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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641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1656호 한국 중부 및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6-07 수신일: 1909-06-08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0호 메이지42년(1909) 6월 7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황해도 방면 배천(白川) 분견대(分遣隊)가 5월 18일 그곳 서북방 약 4리 지점에서 도주 중이던 적 13명을 토벌하고 총 2정을 노획하였다. 2.강원도 방면 율실리(栗實里)의 헌병이 5월 19일 그곳 동남방 약 7리 지점에서 18명의 적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회양(淮陽)의 헌병이 5월 23일 금성군(金城郡) 내에서 약 8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3명을 죽였다. 3.경기도 방면 삭녕(朔寧)의 수비대 일부가 5월 16일 황해도 토산(兎山) 서남방 약 3리 지점에서 25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1명을 체포하였다.고안(高安)의 헌병이 5월 22일 그곳 서방 약 3리 지점에서 12명의 적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4.충청북도 방면 단양의 헌병이 5월 20일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5리 떨어진 산 속에서 약 70명의 적을 토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청풍의 헌병이 5월 25일 동 군 내에서 약 10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6명을 죽였다. 5.전라남도 방면 천원(川原)의 헌병이 5월 11일 그곳 북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1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2명을 죽였다.광주의 헌병이 5월 19일 그곳 서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는데 그 중 15명을 죽이고 총 10정을 노획하였다.사가점(四街店)(영광에서 동북방으로 약 3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5월 20일 무장군(茂長郡) 내에서 약 4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5명을 죽였다.삼거리(三巨里)(영광에서 동남방으로 약 5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5월 20일 나주 북방 약 2리 반 지점에서 약 4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사창(社倉)(영광에서 동방으로 약 3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5월 20일 그곳 북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약 6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6명을 죽였다.완도 수비대의 일부가 5월 20일 이 섬 북쪽 끝 부근에서 약 8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 중 8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능주(綾州)의 수비대 일부가 5월 24일 그곳 동남방 약 5리 지점에서 약 10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포(砲) 1문을 노획하였는데, 우리측 병사 1명이 전사하였다.광주 수비대의 일부가 5월 24일 장흥에서 동북쪽으로 약 2리 떨어진 산 속에서 15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 중 1명을 체포하고 총 2정을 노획하였다.광주 수비대의 일부가 5월 25일 능주 및 영암 두 수비대와 장성원(長城院)의 헌병과 협력하여 보성에서 동쪽으로 약 2리 떨어진 고지에 웅거한 인원수 불명의 적을 공격하여 이를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고 그 중 6명을 죽였으며 총 5정과 칼 2자루를 노획하였는데, 우리측 헌병 1명이 전사하였다. 6.임시한국파견대는 6월 1일 오전에 전부 부산에 상륙을 마쳤다.

    642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1729호 한국 중부 및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6-15 수신일: 1909-06-15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1호 메이지42년(1909) 6월 15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황해도 방면 연안(延安) 수비대의 일부가 5월 28일 그곳 북방 약 3리 지점에서 16명의 적을 토벌하였는데 그 중 3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다. 2.강원도 방면 양구, 낭천(狼川)의 헌병이 5월 19일 서로 협력하여 화산군(華山郡) 내에서 약 10명의 적을 토벌하였는데 그 중 1명을 죽이고 괴수를 체포하였으며 총 3정을 노획하였다. 3.경상북도 방면 재산(才山)의 수비대 일부가 5월 18일 그곳 북방 약 4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5명을 죽였다. 4.전라남도 방면 강진, 보암장(寶岩場)(강진에서 서남쪽으로 약 3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5월 22일 서로 협력하여 보암장 서남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약 130명의 적과 충돌하여 그 중 15명을 죽이고 총 6정과 칼 2자루를 노획하였다.나산(羅山) 및 장흥 수비대의 일부가 5월 26일 장흥 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2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1명을 죽였다.광주경찰서원(光州警察署員)이 5월 31일 동 군 내에서 약 25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4명을 죽였다.

    643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1807호 한국 중부 및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6-22 수신일: 1909-06-2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2호 메이지42년(1909) 6월 22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강원도 방면 철원의 헌병이 6월 4일 그곳 서북방 약 5리 지점에서 적 약 15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였다. 2.경상북도 방면 봉화의 헌병이 6월 2일 그곳 북방 약 8리 지점에서 적 약 80명과 충돌하여 그 중 6명을 죽이고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 3.전라북도 방면 고부경찰서원(古阜警察署員)이 5월 23일 무장(茂長) 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약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였다.나주 수비대의 일부가 5월 28일 전주 동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15명과 충돌하여 이를 패하여 달아나게 하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천원(川原) 및 고부의 헌병이 5월 29일 천원 서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약 8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고창의 헌병이 6월 1일 그곳 서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약 70명과 충돌하여 그 중 8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고부 수비대의 일부가 6월 7일 고부군 내에서 적 약 50명과 충돌하였는데 그 중 21명을 죽이고 4명을 체포하였으며 총 1정을 노획하였다. 4.전라남도 방면 장성(長城)의 헌병이 5월 24일 그곳 동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1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였다. 동 29일 같은 곳에서 다시 약 1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2명을 죽였다. 동 30일 장성 동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15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2명을 죽였으며 총 4정을 노획하였다.신평(新坪)(약수정(藥水亭)에서 서쪽으로 약 2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5월 25일 장성 서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15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해남의 헌병이 5월 25일 그곳 서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1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5월 28일 같은 곳에서 서북방으로 3리 떨어진 지점에서 적 3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사가점(四街店)(영광 동북방 약 3리 지점)의 헌병이 5월 25일 그곳 동북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약 80명과 충돌하여 그 중 6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장흥의 헌병이 6월 1일 그곳 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약 70명과 충돌하였는데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동창(東倉)(나주 남방 약 3리 지점)의 헌병이 6월 1일 그곳 서남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약 50명과 충돌하였는데 그 중 5명을 죽이고 총 4정을 노획하였다.약수정의 헌병이 6월 2일 그곳 서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괴수 이하 3명을 죽이고 총 7정을 노획하였다.영광의 헌병이 6월 2일 그곳 동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644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1857호 한국 중부 및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6-29 수신일: 1909-06-29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3호 메이지42년(1909) 6월 29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황해도 방면 평산(平山)의 헌병이 6월 2일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3리 떨어진 산 속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강원도 방면 황지리(黃地里)의 헌병이 5월 24일 그곳 북방 약 6리 반 지점에서 적 약 3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가려주(佳麗州)의 헌병이 5월 30일 그곳 동북방 약 6리 지점에서 적 약 5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였다.평강(平康) 수비대 일부가 6월 10일 그곳 동북방 약 7리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였다. 3.경기도 방면 고안(高安)의 헌병이 6월 8일 그곳 남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23명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삭녕(朔寧) 수비대 일부가 6월 9일 그곳 서방 약 5리 지점에서 괴수 하상태(河相泰)(하성태(河聖泰)라고도 하며 삭녕군 지방을 횡행하는 자)를 사로잡고 총 2정을 노획하였다. 포로는 호송 도중 혀를 깨물고 자살하였다. 4.충청북도 방면 대전의 헌병이 6월 7일 황간군(黃澗郡) 내에서 적의 괴수 이인영(李麟榮)(폭도의 주모자로 일찍이 고(故) 허위(許蔿), 이강년(李康年) 및 연기우(延起羽), 김준주(金俊侏) 등을 부하로 삼고 스스로 십삼도창의부원수(十三道倡義府元帥)라 부르던 적의 괴수 중 거물인 자)을 체포하였다.5.경상북도 방면영해(寧海)의 헌병이 6월 2일 그곳 서남방 약 5리 지점에서 약 40명의 적을 토벌하고, 다음날 3일 영해 서남방 약 4리 지점에서 적 4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순흥(順興)의 헌병이 6월 4일 그곳 동북방 약 3리 반 지점에서 약 60명의 적을, 동 7일 같은 곳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5명을 죽였다.영천의 헌병이 6월 7일 순흥 동남방 3리 반 지점에서 적 약 1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8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6.전라남도 방면 해남 수비대의 일부가 6월 2일 영암 서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25명을 토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광주의 헌병이 6월 5일 그곳 서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15명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였다.임시 파견 보병 제2연대 제6중대에서 우편물 호위를 위해 파견된 상등병 이하 3명은 6월 10일 해남 남방 약 4리 지점에서 적 약 60명에게 급습을 당하여 교전하던 중 해남 헌병분견소 상등병 1명, 보조원 3명의 구원을 받고 이들을 남방으로 격퇴하였다. 우리측 병졸 전사 1명, 중상 1명, 경상 1명이 발생하였다.광양의 헌병이 6월 14일 그곳으로 쳐들어온 약 50명의 적을 격퇴하였는데, 보조원 1명이 중상을 입었다.

    645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1903호 한국 중부 및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7-05 수신일: 1909-07-05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4호 메이지42년(1909) 7월 5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경기도 방면 양지(陽智)의 헌병이 6월 12일 그곳 동남방에 위치한 죽산군(竹山郡) 내에서 적 1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으며 총 2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마전(麻田)의 헌병이 6월 16일 그곳 서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약 30명과 충돌하여 그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다음날 17일 마전 서방 약 3리 지점에서 다시 같은 적과 충돌하여 그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2.경상북도 방면 순흥(順興)의 헌병이 6월 7일 그곳 동방 약2리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였다.봉화 수비대의 일부가 봉화, 내성(乃城)의 헌병과 함께 6월 9일 봉화 서북방 약 5리 지점에서 적 약 3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북쪽으로 격퇴하였는데, 약 1리를 추격하던 중 다시 약 100명의 적과 충돌하여 그 중 17명을 죽였다.안동의 헌병이 6월 16일 순흥 동북방 약 2리 반 지점에서 적 15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였다. 3.전라북도 방면 구례의 헌병이 6월 8일 그곳 동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약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다.태인의 헌병이 6월 19일 그곳 동방 약 4리 반 지점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 4.전라남도 방면 무장(茂長)의 헌병이 6월 2일 그곳 북방 약 3리 반 지점에서 적 약 8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였다.광양의 헌병이 6월 3일 그곳 동북방 약 6리 지점에서 적 15명과 충돌하여 적의 괴수 이하 2명을 죽였다.광천(廣川)의 헌병이 6월 7일 그곳에서 동북방으로 6리 떨어진 산 속에서 총기를 제조 중이던 적 약 80명을 토벌하였는데 그 중 7명을 죽이고 제조 기구와 재료 등을 노획하였다. 다음날 8일 같은 산 속에서 다시 적 약 7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벌교(순천에서 서남방으로 약 3리, 낙안에서 남방으로 2리 지점)의 헌병이 6월 11일 그곳 서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약 15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사창(社倉)의 헌병이 6월 15일 그곳 동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약 70명과 충돌하여 그 중 8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

    646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1976호 한국 중부||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7-12 수신일: 1909-07-13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5호 메이지42년(1909) 7월 12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강원도 방면 삼척헌병관구(三陟憲兵管區) 연합 토벌대(장교 이하 26명)가 6월 6일 경상북도 순흥(順興) 동북방 약 5리 지점에서 적 7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금성(金城) 수비대가 10일 그곳 서북방 약 6리 지점에서 적 약 6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이림리(泥林里)(영월에서 동방으로 약 5리, 정선에서 남방으로 6리 지점) 헌병 분견소원(分遣所員)이 13일 그곳으로 쳐들어온 적 약 70명을 격퇴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충청북도 방면 영춘(永春)의 헌병이 6월 7일 경상북도 순흥군 내(영춘에서 동남방으로 약 6리 떨어진 곳)에서 적 약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였다. 3.경상북도 방면 청하헌병관구(淸河憲兵管區) 연합 토벌대(하사 이하 13명)가 6월 7일 영해(寧海) 서남방 약 3리 반 지점에서 적 6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또 청하의 헌병이 15일 같은 곳에서 서북방으로 약 6리 떨어진 지점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영천(榮川) 수비대가 16일 그곳 서남방 약 8리 지점에서 적 35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내성(乃城)의 헌병이 18일 그곳 동북방 약 4리 반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5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4.경상남도 방면 김해의 헌병이 6월 21일 그곳 북방 2리 지점에서 적 6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총 1정과 칼 3자루를 노획하였다. 5.전라북도 방면 태인(泰仁)의 헌병이 6월 19일 그곳 동방 약 4리 반 지점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6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 또 24일 그곳 남방 3리 지점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이고 총 4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서림촌(西林村)(순창과 남원 사이, 순창에서 동방으로 약 6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23일 그곳 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약 1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6.전라남도 방면 사가점(四街店)(영광과 고창의 중간)의 헌병이 6월 18일 그곳 북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7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였다.영광, 나산(羅山) 부근의 연합 토벌대(장교 이하 61명)가 19일 영광에서 동남방으로 약 2리 떨어진 고지에서 적 약 130명과 충돌하였는데 그 중 73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으며 총 10정을 노획하였다.또 영광의 헌병이 같은 날 영광 북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약 15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2정을 노획하였다.광천점(廣川店)의 헌병이 20일 곡성군(谷城郡) 내에서 적 약 8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5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으며 총 10정과 칼 4자루를 노획하였다.또 같은 날 광천점 및 석실장(石實場)(곡성과 광천점 중간)의 헌병이 광천점 동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약 7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2명을 죽이고 총 7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괴목장(槐木場)(구례와 순천의 중간) 분견대가 24일 그곳 북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13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다.해남의 수비대와 그곳에 주재하는 순사가 25일 그곳 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43명을 토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으며 총 8정을 노획하였다.

    647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3020호 전라남북도|| 강원도|| 경기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7-19 수신일: 1909-07-19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6호 메이지42년(1909) 7월 19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강원도 방면 삼척의 헌병이 6월 19일 그곳 서남방 3리 지점에서 적 19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였다. 2.경기도 방면 교하(交河)(경성에서 서북방으로 약 10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6월 29일 그곳 동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15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3.전라북도 방면 구례 수비대 일부가 6월 30일 그곳 동북방 약 2리 반 지점에서 적 약 1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 4.전라남도 방면 사천장(沙川場)(영광에서 남방으로 약 3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6월 18일 그곳 북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약 10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곡성 수비대 일부가 6월 24일 밤 그곳 동남방 약 5리 반 지점에서 적 약 7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신평(新坪)(장성에서 북방으로 약 2리 반 떨어진 곳)의 헌병이 6월 24일 전라북도 흥덕군(興德郡) 내에서 적 약 60명과 충돌하여 적의 괴수 이하 6명을 죽이고 총 1정과 창 1개를 노획하였다.유둔장(油芚場)(순천에서 서남방으로 약 5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6월 25일 그곳 서남방약 1리 지점에서 적 약 60명과 충돌하여 그 중 8명을 죽이고 총 6정과 칼 5자루를 노획하였다.오성원(烏城院)의 헌병과 유둔장의 헌병이 6월 25일 유둔장 동남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약 5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체포하였다.장흥(長興)의 헌병과 죽천장(竹川場)(장흥에서 남방으로 약 3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6월 26일 장흥 남방 약 4리 지점에서 적도(賊徒)의 사무소를 습격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같은 날 다시 고금도(古今島)에서 이 적도들이 밀의(密議) 중인 것을 덮쳐 그 중 3명을 죽였다.독천장(犢川場)(영암에서 서남방으로 약 2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6월 27일 그곳 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약 80명과 충돌하여 그 중 5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는데, 우리측 보조원 1명이 중상을 입었다.남창(南昌)(영산포 서방 약 2리 지점)의 헌병이 6월 29일 영산포 서남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약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총 6정을 노획하였는데, 우리측 상등병 1명이 경상을 입었고 보조원 1명이 전사하였다.순천 수비대 일부가 6월 30일 그곳 서남방 약 9리 지점에서 적 약 5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이고 총 2정을 노획하였다.

    648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2071호 한국 각도에서의 폭도의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7-26 수신일: 1909-07-26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7호 메이지42년(1909) 7월 26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경기도 방면 퇴계원 및 후평리(後坪里)의 헌병이 7월 4일 퇴계원 동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2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충청북도 방면 보은의 헌병이 7월 5일 그곳에서 동북방으로 약 4리 떨어진 속리산 속에서 적 11명과 충돌하여 그 중 5명을 죽이고 총 4정을 노획하였다. 3.충청남도 방면 대흥(大興)에 주둔하는 순사가 6월 25일 밤 동 군 내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체포하였다. 4.경상북도 방면 김천의 헌병이 7월 1일 그곳 동북방 약 2리 반 지점에서 적 약 1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1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 5.경상북도 방면 풍기(豊基)의 헌병이 7월 8일 그곳 서방 약 3리 반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0명을 죽이고 총 5정과 칼 2자루를 노획하였다. 6.전라남도 방면 괴목장(槐木場) 분견대가 6월 25일 그곳 동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고 적의 무리들이 은닉했던 총 23정을 노획하였다.영광의 헌병이 7월 1일 그곳 서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5명을 죽이고 총 3정을 노획하였다.쌍암장(雙岩場)(순천에서 서북방으로 4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7월 1일 그곳 서남방 약 1리 반 지점에서 적 약 7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6명을 죽이고 총 8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사창(社倉)의 헌병이 7월 2일 그곳 서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약 60명과 충돌하여 그 중 5명을 죽이고 총 1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순천 수비대 일부가 7월 3일 그곳에서 서북방으로 약 4리 떨어진 선암사(仙巖寺) 부근에서 적 10명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3명에게 부상을 입혔다.몽탄(夢灘) 수비대가 7월 3일 그곳 남방 1리 반 지점에서 적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총 2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흥양(興陽) 수비대가 7월 8일 그곳 동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1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0명을 죽이고 총 22정을 노획하였다.해남 수비대가 7월 9일 그곳에서 남방으로 약 3리 떨어진 대둔사(大芚寺)에서 약 70명의 적을 급습하여 그 중 24명을 죽이고 9명을 체포하였으며 총 49정과 칼 5자루를 노획하였다.

    649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1159호 한국 각도에서의 폭도의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8-02 수신일: 1909-08-03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8호 메이지42년(1909) 8월 2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강원도 방면 황지리(黃地里)의 헌병이 6월 23일 그곳 서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5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경기도 방면 삭녕(朔寧) 수비대가 7월 1일 그곳 동북방 4리 지점에서 적 10명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총 4정을 노획하였다. 3.경상북도 방면 영양(英陽)의 헌병이 7월 3일 그곳 동방 약 2리 반 지점에서 적 6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풍기의 헌병이 7월 8일 그곳 서남방 3리 지점에서 적 50명과 충돌하여 그 중 9명을 죽이고 총 5정과 칼 2자루를 노획하였다. 또 그곳의 헌병이 7월 8일 그곳 서방 3리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7명을 죽이고 총 3정과 권총 1정을 노획하였다.순흥(順興)의 헌병 및 그곳 수비대가 7월 16일 그곳 서북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13명과 충돌하여 그 중 10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으며 총 3정과 칼 2자루를 노획하였다. 4.전라북도 방면 천원(川原)의 헌병이 6월 29일 그곳 북방 약 반 리 지점에서 적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천원의 헌병이 7월 2일 그곳 서북방 약 2리 반 지점에서 적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총 1정과 칼 1자루를 노획하였다. 5.전라남도 방면 약수정(藥水亭)(광주에서 북쪽으로 약 7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6월 28일 그곳 서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12정을 노획하였다.삼거리(三巨里)(광주에서 서쪽으로 약 6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7월 4일 나주 서북방 약 5리 지점에서 적 50명과 충돌하여 그 중 5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으며 총 1정을 노획하였다. 또 그곳 헌병이 7월 5일 나주 동북방 약 7리 지점에서 적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였다.약수정의 헌병이 7월 7일 장성(長城) 동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적 15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였다.사창(社倉)의 헌병이 7월 8일 그곳 동북방 약 1리 지점에서 적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5명을 죽이고 총 4정을 노획하였다.삼거리의 헌병이 7월 8일 나주 동북방 6리 지점에서 적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였다.보암장(寶岩場)(해남에서 동쪽으로 약 3리 떨어진 곳)의 헌병이 7월 8일 해남 남방 2리 지점에서 적 50명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법성(法聖) 분견대가 그곳 헌병과 협력하여 7월 8일 그곳 하안(河岸)에서 적 7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는데, 헌병 상등병 1명이 전사하였다.

    650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2242호 경상북도|| 전라남도 방면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8-09 수신일: 1909-08-09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99호 메이지42년(1909) 8월 9일 한국주차군(韓國駐箚軍)사령관의 보고 요지 1.경상북도 방면 진보(眞寶)의 헌병이 그곳 동방 6리 지점에서 적 약 40명과 충돌하여 그 중 4명을 죽이고 총 18정과 칼 1자루 및 창 2자루를 노획하였다.안동의 헌병이 7월 18일 그곳 북방 9리 지점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3명을 죽이고 1명을 체포하였다. 2.전라남도 방면 강진의 헌병이 7월 1일 그곳 동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약 10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영광의 헌병이 7월 7일 영광에서 동쪽으로 1리 떨어진 지점에서 적 30명과 충돌하여 그 중 2명을 죽이고 총 1정을 노획하였다.광양 벌교 수비대 및 그곳 헌병이 7월 18일 광양 동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약 130명과 충돌하여 이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완도 수비대가 7월 11일 완도진(莞島鎭) 서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적 약 2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명을 죽이고 5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총 2정을 노획하였다.광주 수비대가 7월 20일 동복(同福) 남방 1리 반 지점에서 적 약 200명과 충돌하여 그 중 11명을 죽이고 약 30명에게 부상을 입혔으며 총 8정을 노획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