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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621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552호 한국 동부|| 중부||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소탕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2-23 수신일: 1909-02-23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0호 메이지 42년(1909) 2월 23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평안남도 방면 약수동(藥水洞)의 헌병이 1월 29일 그곳 동북 약 21리의 지점에서 14명의 적을 격퇴시켰다. 2. 황해도 방면 배천동(白川洞)의 헌병이 2월 8일 그곳 부근에서 약 15명의 적을 격퇴시켰다. 3. 경기도 방면 주포(周浦)의 헌병이 2월 4일 그곳 북방 약 6리 지점에서 약 200명의 적을 격퇴시켰다.양주(楊州)의 헌병이 2월 7일 포천(抱川) 부근에서 약 20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를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문산(汶山)의 헌병이 2월 10일 그곳 동방 약 4리 지점에서 약 100명의 적을 토벌하고 다시 파주 부근에서 약 40명의 적을 격퇴시켰다. 4. 강원도 방면 우리 우편호위병(郵便護衛兵) 3명이 2월 15일 금화 서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30명의 적과 교전하여 이를 격퇴시켰다. 5. 경상남도 방면 안의(安義)의 헌병이 2월 11일 그곳 서북 약 3리 지점에서 숙영 중인 적 약 50명을 습격하여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6. 전라남도 방면 영산포(榮山浦)의 헌병이 2월 6일 그곳 부근에서 약 100명의 적을 토벌하고 그 중 11명을 죽였다.영암(靈巖)의 수비대가 2월 10일 그곳 부근에서 15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622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586호 한국 동부|| 중부||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소탕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2-26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1호 메이지 42년(1909) 2월 26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평안남도 방면 사창(社倉)의 헌병이 2월 8일 함경남도 정평군(定平郡) 내에서 35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 중 8명을 죽였다. 2. 황해도 방면 온정원(溫井院)의 헌병이 2월 13일 그곳 부근에서 약 15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3. 강원도 방면 북창(北倉)의 헌병이 2월 9일 그곳 동방 약 8리 지점에서 약 12명의 적을 격퇴시켰다. 4. 충청남도 방면 예산(禮山)의 헌병이 2월 11일 그곳 동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15명의 적을 토벌하였다.부여(扶餘)의 헌병이 2월 12일 홍산군(鴻山郡) 내에서 약 1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5. 전라북도 방면 무주(茂朱)의 헌병이 1월 29일 그곳 동남방 약 6리 반 지점에서 약 70명의 적을 격퇴시켰다.

    623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616호 한국 동부|| 중부|| 남부 각도에서의 폭도 소탕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3-02 수신일: 1909-03-0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2호 메이지 42년(1909) 3월 2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평안남도 방면 덕천(德川) 수비대의 일부가 2월 1일부터 9일에 걸쳐 적 괴수 이하 3명을 죽이고 9명을 체포하였다. 2. 황해도 방면 신계(新溪), 황주(黃州), 송화(松禾) 및 평양(平壤)(평안남도)의 각 수비대에서 나온 연합 토벌대가 1월 12일부터 30일에 걸쳐 평산(平山) 및 토산(兎山) 부근을 소탕 토벌하여 적 22명을 죽이고 14명을 체포하였다.배천(白川)의 헌병이 2월 17일 그곳 지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40명의 적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3. 경기도 방면 양합리(兩合里)의 헌병이 2월 15일 장단군(長湍郡) 내에서 약 30명의 적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4. 강원도 방면 금성(金城) 수비대의 일부가 2월 19일 그곳 동방 약 4리 지점에서 40여명의 적을 토벌하여 소총 18정을 노획하였다. 5. 충청남도 방면 홍산(鴻山)의 헌병이 2월 17일 그곳 부근에서 약 2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624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641호 경상도 및 전라남도 방면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3-05 수신일: 1909-03-05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3호 메이지 42년(1909) 3월 5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경상남도 방면 영산(榮山) 경찰서 관원이 2월 16일 순흥군(順興郡) 내에서 약 1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2. 전라남도 방면 해남(海南), 강진(康津), 장흥(長興)의 헌병 연합수색대가 2월 10일 고금도(古今島) 내에서 약 3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광양(光陽)의 헌병이 2월 10일 승선하여 그곳 남방 3리의 해상에서 약 15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영산포(榮山浦)의 헌병이 2월 13일 흥양군(興陽郡) 내에서 약 15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정정(訂正) 참1발 제373호의 제1항 중 경상남도 영산(榮山)은 경상북도 영천(榮川)의 오류임.

    625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687호 한국 각도에서의 폭도의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3-09 수신일: 1909-03-09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4호 메이지 42년(1909) 3월 9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황해도 방면 황주(黃州) 수비대의 일부가 2월 16일 온정원(溫井院) 서남 약 2리 지점에서 약 3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2. 경기도 방면 포천(抱川) 수비대의 일부가 2월 20일 동 군 내에서 약 15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들을 동북방으로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문산(汶山)의 헌병이 2월 23일 그곳 동방 약 3리 반 지점에서 4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양주(楊州)의 헌병 및 경찰서 관원이 2월 27일 그곳 서북 약 2리 반 지점에서 진지에 있던 적 약 270명을 토벌하고 또 3월 2일 그곳 동북 약 2리 지점에서 약 8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3. 경상북도 방면 풍기(豊基)의 헌병이 2월 22일 동 군 내에서 18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4. 전라남도 방면 광양(光陽)의 헌병이 2월 21일 그곳 동남 약 2리 반 지점에서 2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 중 9명을 죽였다.광주(光州) 수비대의 일부가 2월 26일 남평군(南平郡) 내에서 나주(羅州)의 헌병 및 경찰 관원과 교전 중에 약 250명의 적을 공격하여 그들을 영암 방향으로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영암(靈巖) 수비대의 일부가 2월 27일 그곳 동북 약 3리 고지대에 있던 앞 항의 패배한 적 약 70명을 토벌하여 괴수 박민홍(朴民洪)이라는 자 이하 20명을 죽였다.

    626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734호 황해도|| 경기도 및 전라남도 방면에서의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3-12 수신일: 1909-03-13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5호 메이지 42년(1909) 3월 12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황해도 방면 평산(平山)의 헌병이 2월 20일 그곳 남방 약 6리 지점에서 약 16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시변리(市邊里)의 헌병이 3월 1일 그곳 서남 약 1리 반 지점에서 약 4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2. 경기도 방면 의정부(議政府)의 헌병이 3월 4일 그곳 동북 약 3리 지점에서 약 12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3. 전라남도 방면 법성포(法聖浦)의 헌병 및 경찰관이 서로 협력하여 2월 27일 그곳 동북 약 1리 반 지점에서 약 13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들을 무장(茂長)(전라북도) 방면으로 격퇴시켰다.영광(靈光) 수비대의 일부가 3월 6일 그곳 서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100명의 적을 토벌하여 그 중 32명을 죽였다.

    627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778호 함경남도 및 전라남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3-16 수신일: 1909-03-16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6호 메이지 42년(1909) 3월 16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함경남도 방면 창평(倉坪)의 헌병이 3월 1일 영흥군(永興郡) 내에서 12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2. 전라남도 방면 보성(寶城)의 헌병이 2월 25일 그곳 북방 약 6리 지점에서 약 2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창평(昌平)의 헌병이 2월 26일 옥과(玉果) 부근에서 약 70명의 적과 충돌하여 그들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해남(海南)의 헌병이 2월 27일 그곳 동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14명의 적을 토벌하였다.목포(木浦)의 헌병이 2월 27일 그곳에서 동쪽으로 약 4리 떨어진 무안(務安)에 습격한 약 30명의 적을 격퇴시켰다. 메이지 42년(1909) 3월 16일 참모총장 참첩청(參諜淸) 제9호 중 아래와 같이 오류를 고침 본문 제 1항 중 정(正) 오(誤) 착봉(着奉) 착춘(着春)

    628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827호 한국 각지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3-19 수신일: 1909-03-20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7호 메이지 42년(1909) 3월 19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경기도 방면 양주(楊州) 경찰서 관원이 3월 6일 그곳 동북 약 3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적성(積城)의 헌병이 3월 9일 그곳 남방 3리 지점에서 약 8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2. 경상북도 방면순흥(順興)의 헌병이 3월 7일 그곳 동방 약 4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3. 전라북도 방면 김제(金堤)의 헌병이 3월 1일 그곳 서남 약 3리 지점에서 약 4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구례(求禮) 수비대의 일부가 3월 3일 전라남도 순천(順天)의 서북 약 2리 지점에서 약 3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남원(南原) 수비대의 일부가 3월 3일 전라남도 곡성(谷城) 동남 약 2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무주(茂朱)의 헌병이 3월 10일 경상남도 안의(安義) 서방 약 6리 지점에서 약 38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4. 전라남도 방면 영광(靈光) 수비대의 일부가 3월 11일 그곳 동북 약 2리 지점에서 약 8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광주(光州) 수비대의 일부가 3월 13일 그곳 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629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878호 한국 각지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한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3-23 수신일: 1909-03-24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8호 메이지 42년(1909) 3월 23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평안남도 방면 개천(价川) 헌병 및 보조원이 3월 10일 그곳 서남 약 7리 지점에서 적 4명을 토벌하였다. 2. 황해도 방면 누천(漏川) 헌병 및 보조원이 3월 13일 그곳 남방 약 2리 반 지점에서 약 40명의 적을 격퇴하였다. 3. 강원도 방면울진(蔚珍) 헌병 및 보조원이 3월 2일 동 군 내에서 적 3명을 격퇴하였다. 4. 경기도 방면 적성(積城) 수비대의 일부가 3월 2일 그곳 동남 약 6리 지점에서 약 20명의 적을 격퇴하였다.마전(麻田)의 헌병 및 보조원이 3월 11일 그곳 북방 약 5리 지점에서 약 30명의 적을 격퇴하였다.마석우(磨石隅)(경성(京城)에서 동쪽으로 약 8리 떨어진 곳) 헌병 및 보조원이 3월 11일 양주군(楊州郡) 내에서 약 2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5. 충청북도 방면 영춘(永春)의 헌병 및 보조원이 그곳 순사와 함께 3월 5일 경상북도 순흥군(順興郡) 내에서 약 20명의 적을 격퇴하였다. 6. 경상북도 방면 흥해(興海)의 헌병이 3월 12일 그곳 서방 약 4리 지점에서 약 20명의 적을 격퇴하였다. 7. 전라북도 방면 태인(泰仁)의 헌병 및 보조원이 3월 15일 그곳 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3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8. 전라남도 방면 해남(海南) 수비대의 일부가 2월 18일 밤 그곳 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60명의 적을 패하여 달아나게 하였다. 그 토벌대는 다음날 19일 추적을 계속해서 약 15명의 적을 토벌하고, 광주(光州) 헌병 및 보조원이 3월 9일 그곳 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630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기수 제905호 한국 각도에서의 폭도 토벌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이첩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1년 9월부터 동 43년 8월까지한국에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 밀사를 파견한 것과 동국(同國)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日韓協約)체결 건 발신일: 1909-03-26 수신일: 1909-03-27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參一發) 제379호 메이지 42년(1909) 3월 26일 한국주차군사령관의 보고 요지 1. 강원도 방면 정선(旌善)의 헌병이 3월 7일 그곳 동남 약 7리 지점에서 약 27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임계(臨溪)의 헌병이 3월 9일 정선 서남 약 9리 지점에서 24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2. 경기도 방면 구화장(九化場)의 헌병이 3월 13일 그곳 서북 약 2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삭녕(朔寧) 수비대의 일부가 3월 17일 양주(楊州) 북방 약 4리 지점에서 적 약 16명을 토벌하고 괴수 윤인순(尹仁順)을 죽였다.유산리(杻山里)의 헌병이 3월 15일 그곳 동북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3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적성(積城) 수비대의 일부가 3월 20일 서남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2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3. 경상북도 방면 내성(乃城)의 헌병이 3월 9일 순흥(順興) 동북방 약 4리 지점에서 약 4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흥해(興海)의 헌병이 3월 11일 그곳 서남방 약 5리 지점에서 약 18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4. 경상남도 방면 합천(陝川)의 헌병이 3월 13일 그곳 서남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5. 전라북도 방면 순창(淳昌) 수비대의 일부가 3월 9일 그곳 서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15명의 적을 토벌하였다.고부(古埠) 수비대의 일부가 3월 19일 전라남도 장성(長城) 북방 약 3리 지점에서 약 7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 6. 전라남도 방면 벌교포(筏橋浦)의 헌병이 3월 7일 그곳에서 남쪽으로 약 2리 떨어진 산 속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영광(靈光)의 헌병이 3월 8일 그곳에서 서남쪽으로 약 2리 떨어진 산 속에서 약 5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고막원(古幕院)의 헌병이 3월 11일 그곳 부근 산 속에서 약 12명의 적을 토벌하였다.동복(同福)의 헌병이 3월 11일 그곳 서방 약 2리 지점에서 약 2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남평(南平)의 헌병이 3월 13일 그곳 부근에서 약 60명의 적을 토벌하였다.옥과(玉果)의 헌병이 3월 124일 동복군(同福郡) 내에서 약 75명의 적을 토벌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