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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51 최광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안 선생 각하이때 여름 일기가 매우 덥기도 한대 선생 기운이 내내 안녕하신지 멀리 있어 생각뿐이오이다. 중국 땅에 留하는 申采浩 씨가 편지를 보내면서 겉 봉투를 바로 써서 선생께 부치고 답장이 오거든 자기의 있는 곳을 알게 하는 대로 보내 달라 하엿기에 이에 그 편지를 부쳐 드립니다.이곳 주소를 적어 올리오니 답장하실 대에 쓰시옵소서. 이곳 같이 留하는 徐超・리태휘 두 분도 잘 지내오며 秋汀(이갑)丈 병환은 소왕령 가신 후 많이 나으시다는 소식을 한 달 전에 들었슴니다.

    452 김영일이 안창호에게 보낸 편지

    10월 19일敬頌兄體大安事 於二週日 前에 來此하엿소이다. 弟는 上海서 本會 擴張次로 兄께 上候로대 回示가 無키로 這間 海港 等處를 經由하야 西北間島를 視察하고 上海로 가랴고 來此하야 海山 兄께 美洲 消息을 詳問 則 弟가 上海서 留하든 時에 失守한바 만노이다.這間 美洲之事를 不知하야 如을 失守한 바오니 海恕之地를 仰要 海山 兄의 挽留함으로 此處에 오래 留하갓소이다.上海서 經營하던 바는 水包에 歸할 듯하옴나이다. 弟가 此處에 잇서서는 何事던지 海山(최정익) 兄을 幇助코자 하옴나이다.李東暉 先生이 日昨에 來此하얏소이다. 港內 分黨心이 發하야 合心合力케 되면 됴콧노이다.10月 19日 弟 金永一 拜上

    453 백원보가 안창호・이갑에게 보낸 편지

    6월 17일我 去月 晦日 夕에 本港 헌병 사령관의 令으로 弟가 被捉하야 警務廳 감옥소에 滯囚하다가 俄 本月 십 육일에야 蒙放 되엿사온데 其 誣陷한 죄명은 遊衣遊食하는 不好人으로 지적하엿사옵더이다.其間에 도산(안창호) 丈이 발부하신 서신은 작일에야 盡承하옵고 치타에서 제이차 付賜하신 書函만 금일 拜承하엿사옵나이다. 謹伏詢 伊來 兩位 旅體上萬康하옵시니가?제는 금일부터 大洋報社에 視務하는 양이오이다. 신문으로 말슴하오면 도산(안창호)장이 發程하신 후 一週 兩次 발간키로 결정되야 萬植 씨는 書記의 任을 帶하고 同히 시무케 되엿사오나 弟가 被捉할 동시에 弟의 소임한 문자는 譯述하고 印케 할 시에 未參 되엿사옵드니 其間 申 박사 혼자 담당치 못할 형편인 故로 一週日報로 二號를 발간하엿사옵더이다.然하온데 금번 弟가 피착한 후 당지 청년 諸氏와 기타 兪都憲・金奎燮 諸氏가 여하케 주선하엿던지 黃・咸・申・金 제씨가 대단 齟齬히 忖度하며 該氏 등의 恒心이 如彼한데 肝膽을 傾論키도 난처이고 오제의 孤單함으로 同情相表키 極悶한 경우라 云云 하는 중에 근일 李鍾浩가 권업회를 설립한바 아즉 인허는 無하오나 從此得許도 有하겟다 하는데 其 목적은 農・商・工・學 四業을 실지로 행할 작정이오 況且 신문사도 崔(재형) 씨네 三叔侄이 기부하겟다는 錢은 사개월 후에 出給된다 風傳이오 신문사에 재정이 窘渴하야 정지되는 것보다 이종호 씨로 합하야 견고케 하는 것이 可하다는 청년 제씨의 의론이 有하야 勤業會와 勸業會가 합하고 신문사도 이(종호) 씨의 物이 거의 된 듯하외다.弟가 작일에 出獄하야 소상한 기미는 盡得치 못하엿사오나 이종호의 주장하는 咸北 청년회가 권업회로 변하야 北團의 통합하는 듯하외다. 該 회장은 崔才亨이오 부회장은 洪範度이온데 물론 某道 인사든지 可히 相論 相通할 자는 願入으로 申 씨를 누차 방문하엿사옵고 심지어 여관까지 권업회 사무실 家로 移接케 권고하엿사오니 신문사에 관한 事는 아즉 如此하온즉 從後 형편대로 更告하오리다.鄭淳萬의 사망은 신문에 게재되엿사온즉 更告치 아니 하여도 洞亮하시려니와 楊得春 씨는 現金 大獄에 滯囚하야 재판이 無한즉 何日에야 여하케 판결될넌지요?도산(안창호)丈이 행차하실 시에 淸地에 경과하기 불편함을 우려 하엿사옵드니 萬幸이오며 營道도 安達하엿사옵나잇가? 권업회에서 상점을 趙永晉 家에 貰로 得하야 개방하엿소이다.차처 동지는 黃公道 씨는 무사히 傳道하는데 明日 도비허 등지로 전도차 發行하오며 申・金 양씨는 同食同遊로 安過하오며 朴永甲 氏의 소식은 료료하옵고 이강 씨는 向日 환가한 후 도산(안창호)丈의 付書를 其間 未收인지 陰 六월 一일에도 여하타는 回書가 無하고 단 도산(안창호)장의 行李 여하만 委問하엿사옵더이다.정재관 씨의 소식은 安過하는 줄로만 아랏소이다. 徐超・崔廣 씨 등이 불네고베션스크에 상금 留하는데 추정(이갑)丈의 번지를 知키 원하와 委書하엿사오며 李泰爲 씨는 칠 팔일 전에 당지에 도착하엿사오니 (정)榮道 형에게 在한 서초 씨의 번지대로 통신하시옵소셔.弟도 秋汀(이갑)丈의 번지를 부송하겟소이다. 弟等의 사세가 여하할지 難處難測하외다. 誠力을 費盡하고 욕만 먹는 西道 인사의 俄領地가 何日에나 雲霧 업는 白日靑天에 行하는 跡을 世人이 탄복할넌지요.俄 6월 17일 弟 白元普 拜上.도산(안창호)・추정(이갑) 兩位 각하.

    454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7.7.29)

    편지를 잘 보았고 집안이 다 평안하다니 기쁘외다. 나는 집 생각이 날로 많이 일어나며 몸은 다시 괴롭소이다. 예배 二일후에야 새크라멘토로 가겠소이다. 이번에 이곳에 단우될 사람은 다섯 분이고 차부인은 오늘 떠난다고 하더이다.

    455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5.8.24)

    새크라멘토에서 편지를 받아 보았소이다. 나는 그저께 덴버까지 왔는데 속히 가고 싶은 뜻은 많으나 일을 좀 보고 가야 되겠으니 여러 날 지체가 되겠소이다. 아이들을 심히 보고 싶어서 좀 괴롭소이다.

    456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7.10.12)

    나는 지금 떠나려고 배에 올라왔소이다. 내 마음에 이번 집을 떠나는 것이 이만큼 섭섭한 것을 생각한즉 당신은 매우 고민하는 줄로 생각하나이다. 스웨터를 짐만 되기로 도로 보내오. 겨울에 당신이나 입고 고생하소서. 상항(샌프란시스코) 단우 한병선 씨가 반당 최덕군한테 동매저금 八원을 등기편지로 (단소로) 보내었는데 최 군은 받지 못하였다 하니, 아마 내가 사인하고 받아서 잊고 전하지 않은 듯하니 낡은 저고리 바지와 다른 데 다 찾아서 있거든 최 군한테 보내면서 송군(송종익)이 두 사람에게 설명하여 편지하게 하소서.

    457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7.10.17)

    그간에 평안히 지내며 아이들도 다 잘 있습니까. 또 필립이가 잘 다니는지 항상 마음이 놓이지 않소이다. 나는 지금 멕시코 항구 마사틀린드(Mazatlan)란 곳에 있소이다. 이곳에서 六시간을 지체하여 떠나서 三일을 더 가야 내가 내릴 곳에 내리겠소이다. 일기가 매우 좋은 고로 평안히 잤고 아직은 조금도 덥지 않고 오버코트 생각이 납니다. 사촌누이한테 부칠 것을 못 부치고 왔소이다. 지금 편지를 써서 보내오니 송군(송종익)한테 말씀하여 十원을 부치소서. 나는 그 가려움증이 낫지 아니하므로 상항(샌프란시스코)에 가서 약질하였더니 약 냄새가 옷에 배어서 남에게 냄새를 피우노니 안되었소이다. 이즈음은 매일 해수욕을 하니 좀 나아가는 듯하오이다. 집안 소식과 동리형편을 자주 알게 하소서.

    458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7.10.20)

    일전에 보낸 편지는 보았으며 그동안에 아이들을 데리고 평안한지요. 나는 오늘에 만산니오(Manzanillo)란 항구에 내리나이다. 일전에 편지를 부친 후로 오늘까지는 꽤 더워서 매우 괴롭소이다. 이 보다 차츰 더 덥다하니 얼마나 더울는지요. 몸 괴롭던 것은 날마다 해수욕하므로 좀 낫소이다.

    459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7.12.11)

    내가 오랫동안 편지를 아니 하였으므로 매우 궁금하였겠소이다. 그동안 집안이 다 어떠한지 편지를 자주 주소서. 나는 묵경(멕시코시티)에서부터 몸이 아플 뿐더러 정신을 차릴 수 없음으로 민망히 지내며 부득이 몇 곳 동포를 찾아보는데 고생을 많이 하였나이다. 이 메리다(Merida)에 지난달 二十八일에 와서 치료를 좀 하였는데 다른 곳 보다 기후도 좋고 회관 안에 한 방을 차지하여 거처도 편하고 식사도 합하여 몸이 좀 낫고 경영하는 일은 아직 잘 되어서 회사로 자본금 모은 것이 벌써 묵국(멕시코) 돈 만여 원 되었소이다. 오늘부터 농장을 돌아보려고 오후 네시에 떠나나이다.

    460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8.1.24)

    보낸 편지를 반가이 보았소이다. 맹정희 씨가 돈 二十元을 보내셨다 하오니 감사하고 당신이 그 돈으로 옷이나 살까봅니다 하고 쓴 글자를 볼 때에 내 마음은 자연 괴롭소이다. 당신은 항상 옷 한 가지, 신 한 켤레 갖되 나흘 때 찾아 입지 못하고 지나온 정형을 생각하니 참 미안하오이다. 지금에 얼마나 추운지요. 이곳은 아직 별로 덥지 아니하여 지내기가 편하오이다. 나는 저간에 이질기운이 있던 것도 나았고 모기와 벌레한테 물려 발목과 발등을 한달 나마 부스럼으로 알았는데 지금은 다 나았소이다. 나의 처소는 회관 안방 하나를 차지하였고, 밥은 회관 안에서 학교 식당 주인하는 방경일 씨란 노인 내외가 하여주는데 정성을 매우 써서 하여주나 내 식성과는 좀 반대가 늘 되나이다. 이곳에서 처첩한 사람을 재판하여 하나만 데리고 살게 하였더니 마음으로는 매우 싫으나 그대로 시행하나이다. 이곳에서는 수산이 만한 계집아이들을 약혼하고 十一세, 十二세에 성례하는 것이 큰 풍속이 된지라 이것을 금하니, 어떤 신랑의 부모와 동생들은 여러 번 와서 이왕에 약혼하여 둔 것을 금년에 성례만 하게 하여달라고 조르는데 거절하였더니 어떤 늙은 부인은 대성통곡하더이다. 十六세 이상이어야 시집간다는 시범을 정하였소이다. 회사에 돈을 내마고 허락한 것은 미화 二만四천원이외다. 이 주식금들을 四월까지 필납하기로 한정하였으니 나는 자연 四월 전에는 이곳을 떠나지 못하겠소이다. 집 생각이 때로 간절하외다. 집안 식구들 찍힌 사진 두 장만 보내시오. 하나는 선사하고 하나는 두고 보려고 하나이다. 필립과 필선이가 보낸 편지도 받아보았소이다. 이곳은 각종 물가가 비싸온데 실과로 말하면 배 한 개에 묵국(멕시코) 돈 八十전 혹 一원이요, 능금 한 개에 五十전, 호도 네 알에 十전이고 사탕 한 근에 二원이오니 보아도 거짓말같소이다. 떡 노을 한 개에 十전씩이니 먹기도 끔직하외다. 지금 이금에 미국 물가는 내가 떠난 후에 얼마나 변하였소. 집에 있는 티(tea) 중에 그 중 맛이 좋은 것으로 보내시오. 이곳 값도 비싸거니와 맛이 흉하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