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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501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1.9.5)

    이창호 댁에서 하루 저녁 자고 어제부터는 사사 집에 방세를 주일에 두 사람이 六원씩 주고 유하는데 한주일 후에야 떠나겠소이다. 내 몸은 아라사(러시아) 땅에서도 매우 상하였다가 덕국(독일) 와서 좀 낫고 또 이번 대서양을 건너는 동안 매우 나아서 전날 쇠한 형상이 없어지는 듯 하외다.

    502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2.1.24)

    일간 몸이 어떠하온지요. 나는 오늘 아침에 상항(샌프란시스코)까지 편히 왔소. 여러분이 하와이로 가라하오나 자저하는 중이외다. 이곳서 오래 머물지 않고 스탁턴 등지로 가서 또 다른 곳을 다니어 집으로 가겠소이다. 상항(샌프란시스코)은 별일 없소이다.

    503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2.3.5)

    내가 집을 떠난 지도 오래 되어 집 생각이 날로 간절하고 돌아 가고저 하는 뜻을 겨우 억제하나이다. 내 몸은 큰 병 없이 지내고 숙식은 전과 같이 회관 안에서 하는데 어찌 집만 하겠소. 이곳에 뇌동이 성실치 못하여 회사 돈이 속히 걷히지 않고 걷다가 말고 중도에 돌아가면 큰일이 실패하겠는 고로 자연 지체하나이다. 당신이 얼마나 궁금하겠소. 아이들을 잘 가르치소서. 트럭도 팔고 농사도 세 곳이 다 이가 있었다니 다행이외다. 나는 지금 농장으로 돌아다니는데 차 시간 때문에 매날 새벽 四시에 일어나고 저녁에는 二시쯤 되어 자니 좀 어렵소이다. 이조각 여●●한 것을 송군한테 주소서.

    504 自筆履歷書(1913)

    姓名 : 安昌浩 : 年 三十五現住 : 北美 加洲(캘리포니아)河邊 252本人의 履歷을 左에 烈錄 仰呈하오니 參照하심을 敬要.一、出生時 建國紀元 四千二百十一年 十一月 九日二、出生地 韓國 平安南道 江北郡 草里面 七里 鳳翔島.三、居住地 : 自四二一一年 至四二一八年(自一歲 至七歲) 右 出生地. 自四二一八年 至四二二○年(自七歲 至九歲) 平安南道 平壤 大同江面 국수당. 自四二二○年 至四二二四年(自九歲 至十三歲) 居出生地 末年 遊黃海九月山 自四二二四年 至四二二五年(自十三歲 至十四歲) 平南 平壤 南祭山面 魯南里職業 : 自四二一六年 至四二一八年(自六歲 至七歲)修學在家庭 自四二一九年 至四二二○年(自七歲 至九歲) 遊戱 或 修學 在家庭 自四二二○年 至四二二四年(自九歲 至十三歲) 或 學于書塾 或 遊于外方 自四二二四年 至四二二五年(自十三歲 至十四歲) 修學漢文書堂 自四二二五年 至四二二七年(自十四歲 至十六歲) 或 修學于漢文書堂 或遊牧助農 自四二二七年 至四二三一年(自十六歲 至二十歲)半期修學于耶蘇(기독교)敎會 求歲通學收 半期는 敎授于同校●●自四二二五年 至四二二七年(自十四歲 至十六歲) 同出生地 又同郡 心貞里 自四二二七年 至四二三一年(自十六歲 至二十歲)住京城 大貞洞 自四二三一年 至四二三五年(自二十歲 至二十四歲) 京城 黃海 平安 三地에 轉居 自四二三五年 至四二四○年(自二十四歲 至二十九歲) 到美自四二四○年 至四二四三年(自二十九歲 至三十二歲) 歸國 自四二四三年 至四二四四年(自三十二 至三十三) 淸(중국)·俄(러시아)·毆(유럽) 自四二四四年 至四二四六年(自三十三 至三十五) 到美 自四二三一年 至四二三四年(自二十歲 至二十四歲) 周游 一本邦 京鄕 團體役一獨立協會 自四二三四年 至四二三五年(自二十三歲 至二十四歲) 開荒作畓 自四二三五年 至四二四○年(自二十四歲 至二十九歲) 遊歷 日本 美國 團體役(親睦會共立協會) 自四二四○年 至四二四三年(自二十九歲 至三十二歲) 游說 本邦聞明 校務 本邦 大成學 自四二四三年 至四二四四年(自三十二歲 至三十三歲) 游歷 支那(중국)•俄(러시아)•德(독일) •英(영국)中 俄(러시아)在留罷 自四二四四年 至四二四五年(自三十二歲 至三十五歲) 團體役國民會 間或勞勞水道役學藝 略●國漢文 略●學校管理伴團志觀遊山河●肯 觀遊山河最長牧能 泛枼船宗敎 耶蘇敎(기독교) 四二二七年 十六歲時 位奉團體 日新會 獨立協會 四二三○年 入參 또 解散 國民會 四二三五年家族 父 興國(안흥국) 年三十二 業 士人 稱親睦會時 寫字 入參 三十七歲 別世母 黃 氏 年六十七 業 管理 家庭兄 致浩(안치호) 年 四十二 業 農 禾穀 現 與母親同居妹 信浩(안신호) 年 二十九 業 家庭管理 金聖鐸(김성택) 現住 平壤城 章坮峴妻 李 氏 惠鍊(이혜련) 年 二十九 業 家庭管理子 弼立(안필립) 年 八 業 修學及勞動牧

    505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낙장](1910년대)

    그저께 저녁에 미순려가 모이는 곳에 가려고 새 옷을 입고나가면서 손수건이 없기로 살만한 돈은 없고 뒷간에 가서 뒤지를 좀 뜯어 넣고 나아가려 하는데 청인이 편지하여 주기로 떼어보니 손수건이 있기로 이상한 일로 생각하였소이다. 그동안에 편지 三장을 받았소이다. 내 목은 아주 나았고 몸은 곤하나 과하지 않고 날마다 조금씩 나아가나이다. 이곳은 일기가 과히 덥지 아니하고 일자리는 매우 드문 고로 청인도 많이 노나이다. 슬프다. 우리가 오늘 불행 중에 있으니 범사를 뜻대로 하기 난하도다. 그대를 속히 오게 하면 좋을 말이야 다시 할 것 없으나 그대의 속히 오게 하는 일을 밤낮으로 깊이 생각하니 속히 왔다가 한될는지 모르겠소이다. 첫째는 그대가 오면 우리 인정으로 곧 일 갈수는…(원본누락)…

    506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4.7.20)

    집을 떠난 후로 오늘까지 집 소식을 듣지 못하니 궁금하오이다. 바쁘더라도 몇 자 적어 보내소서. 아이들 어지럽던 증이 다 나았는지요. 또 김부인께서 어떠하시온지요. 나는 나성(로스앤젤레스)을 떠날 때보다 몸이 도리어 좀 나으나, 잠을 열두시 후에 자게 되니 자연 어렵고 일은 밤시간에 보니 피할 수가 없소이다. 이번 배에 二十二인이 왔사온데 아직 상륙은 아니하였고 현승걸 씨의 부인이 오셨다는데 박고지 사람이라니 반갑소이다. 이곳에서 몇 사람을 문답하여 입단식 시키고 새크라멘토로 갈 터인데 예배 二일 쯤 떠날 듯하오이다. 편지는 새크라멘토로 하시오.

    507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3.7.10)

    편지는 반가이 보았사오며, 이성민 씨 집으로 감사하다고 편지하였소이다. 나는 항상 몸이 깨끗하지 못하고 이왕 내통비취에서 고친 이가 三,四일간 너무 아파서 의원을 가서 뵈이고 금 씌웠던 금니를 벗겨 내어서 아픈것이 멎었으나 돈이 자꾸 드니 큰 걱정이오. 그동안에 쓰는 것은 손종익 씨에 주는 것으로 많이 썼나이다. 나는 이주일 후에야 집으로 갈 듯 하오이다.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남자 四인과 여자 二인이 왔사온데 여자는 김홍균 씨의 결혼한 이와 김병규 씨의 결혼한 인데 다 내가 이왕 알던 사람이외다. 상항(샌프란시스코)에서 혼인하겠다는 편지가 왔소이다. 차정석 씨 말씀은 패스텐나에 집을 얻고 같이 살자 조르는데 집세가 매우 많더이다.

    508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4.7.31)

    일간 집이 다 편안한지요. 나는 새크라멘트 근경 벼농장을 다 다니어 왔소이다. 이곳 들 일기가 심히 더운데 밤잠을 잘 못자고 다니고 본즉 몸이 어렵고 음식이 잘 소화되지 아니하나이다. 이곳에서 볼일을 다 본 후에 상으로 들어가서 몇 날을 쉬인 후에 션니별과 놈폭을 다니어 가겠소이다.

    509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4.8.15)

    새크라멘토로 보낸 편지 석 장을 어제 다 자세히 보았고 위로를 많이 받았소이다. 나는 오늘 벼농장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차를 바꾸어 타려고 기다리는 동안에 두어자로 편지하나이다. 보낸 연꽃을 받고 감사하며 옛날 평양 장터께에서 혜련이 보낸 오렌지꽃을 받던 감상이 더욱 나며 나는 그 꽃보다 그 보낸 마음을 사랑하여 그 꽃을 품에 두었소이다.신부인한테서 아무 소식이 없으니 아니갈 듯 하오이다.

    510 安昌浩가 이혜련에게 보낸 서신(1914.1.9)

    일간 어떠하오이까? 집에 돈 한 푼도 없는 것을 보고 와서 염려가 많소이다. 나는 오늘까지 엄풀민드에 있었고 오늘은 리버사이드로 갔다가 주일날에야 병원으로 들어가겠나이다. 준기 씨의 어린 아이 옷이 없어서 이왕 죽은 아이 것을 입히는데 변변치 않소이다. 혹 기회가 있거든 옷을 몇 벌 만들어 보내시오. 그 부인은 매우 바쁘더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