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콘텐츠

선택

선택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441 안창호의 사망에 대한 部民의 감상에 관한 건[京高特秘 제512호의 2](1938.3.16)

    경성제대(京城帝大) 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있다가 사망한 동우회 사건의 주범 안창호의 사후 장례에 이르는 경과에 관하여는 별도상보(別途詳報)와 같다. 위 자는 62년의 전 생애를 통하여 거의 민족운동에 시종(始終)하고, 조선 내 민족주의자의 우두머리로 간주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동 사건으로 예심(豫審) 받다가 그대로 병사(病死)하였다. 그리고 위 자의 수하에 있는 그외 민족주의자들이 몰래 추도회를 계획하거나 위 자의 사망이 검찰 당국(當局)의 가혹한 취조가 원인이었다는 등과 같은 터무니 없는 소문을 유포하지 않도록 관하(管下-관할) 각 경찰서를 독촉하여 그들의 동향에 대하여 가장 깊은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동시에 부민(部民)의 각 계층에 걸쳐 이 감상을 내사(內査)하고 종합하였다. "안창호(安昌浩)가 마지막까지 절개를 굽히지 않고 쓸쓸하게 병원에서 돌아 올 수 없는 객이 된 것은 동정할 점이 없지는 않다고 할지라도 그는 시대를 바로 해석하지 못한 어리석은 사람이다."라는 조소적인 말투로 토로하는 자가 많았다. 각별한 반향(反響)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데 그 주요한 자는 아래와 같다.이상, 통보(보고)한다.一. 중앙 기독교 청년회장: 윤치호(尹致昊)안창호(安昌浩)는 최근 아주 건강하지 못하였는 데 결국 지병으로 영면하였다는 것을 듣고 그의 과거에 있어서의 언동의 선악(善惡)은 제외하고 그 마음 속을 짐작해 볼 때 인정적으로 실로 애처롭게 생각된다.二. 화신상회주(和信商會主): 박흥식(朴興植)안창호(安昌浩)가 가족이 없는 병원의 한 방에서 영면한 것은 오랜 시간 지인(知人)관계로서 사적으로는 유감스럽게 생각한다. 그가 시세(時勢)를 바르게 볼 수 있음을 밝힐 수 없는 다수의 인물을 옹호하며, 그 우두머리로서 무익하게 민족운동을 계속하고 일반 조선인에게 악영향을 미치게 하였다는 생각에 있어서 공적으로는 너무나 애석하기 그지없다.三. 특요(特要) 여운형(呂運亨)안창호와는 수십 년 조선 내에서는 물론 해외에서도 함께 조선독립운동을 위하여 활동한 특수관계도 있고 특히 해외에서는 파벌이 달라 자신은 기호파(畿湖派), 안창호(安昌浩)는 두 선파(鮮派)의 파벌을 초월하고 친교를 거듭하였다. 그가 사망하기 10일 전 병원에 문안한 당시 이미 거의 죽은 상태로 악수를 나누었다. 과거에 동일주의(同一主義)를 위하여 활약했던 동지를 잃는다는 이유에서 무언 중에 슬픔의 이별을 하였는데, 특수한 관계인 만큼 안창호(安昌浩)의 사망에 대한 애수가 깊다.三. 기독교 조선 감리회(監理會) 총리부(總理部), 양주삼(梁柱三)안창호(安昌浩)는 해외로 망명(亡命)하기 전까지는 장로파(長老派) 기독교 독신자(篤信者)로서 동교(仝敎) 신도 사이에 신망이 있었다. 그 후 해외유랑 30년 간, 소위 시대풍조(時代風潮)에 의한 민족운동에 분주(奔走)하였으며, 마침내 감옥에 갇히는 몸이 되어 출감한 후에도 의연히 동아(東亞)의 추세에 각성하지 못하였다. 자기의 변함없는 주의(主義)의 관철에 노력함으로써 안창호(安昌浩) 자신은 시종일관 주의운동에 진췌(盡瘁)하였다고 할 수 있으며 그는 시대에 둔감(鈍感)한 혁명아(革命兒)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四. 동우회 관계자(의전(醫專)병원 입원 중) 이광수(李光洙)동아일보(東亞日報)의 보도 및 그 친척의 통지에 의하여 안창호(安昌浩)의 사망을 알게 되었다. 그와는 20년의 지기(知己)로서 애탄의 뜻을 표함과 동시에 감개무량하다. 그는 민족운동의 대립물(大立物)로서 주의(主義)에 일관한 것은 그도 만족할 것이다. 조위금(弔慰金)을 증정하였는데 금일의 치료비도 어려운 상황에 단지 아내 허영숙(許英肅)을 조문(弔問)하여야 한다.五. 천도교(天道敎) 중앙 종리원(宗理院), 조기영(趙基榮)안창호(安昌浩)가 그 전부의 생애를 민족운동에 바쳤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시세(時世)의 추이(推移) 및 조선인 대중의 공통된 뜻을 알지 못했으며 그의 독선적(獨善的) 행위로서 아무런 이익을 주지 못하였다. 다시 말하면 안창호(安昌浩)는 자기의 고루(固陋)한 주의를 마지막까지 굳이 지킴으로써 나쁘게 해석하면 그의 사복을 채운 보천교주(普天敎主) 차경석(車京錫)과 같은 인물이다.六. 천도교(天道敎) 구파(舊派), 이종린(李鍾麟)삼림 내에 은루(隱樓)한 호랑이가 언제 어느 곳에 나타날 것을 추측할 수 없을 경우에는 무서운 존재이나, 일단 광야에 그 정체를 드러내면 공포심도 희박해 지듯이 자신도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조선인 대중을 위하여 활동하고 있을 때는 그를 숭배한 적이 있었다. 안창호(安昌浩)와 수차 면회하는 사이에 그는 능변가이며, 실로 조선민족을 위하여 활동할 인물임에 틀림없다는 것을 알았다. 현재 숭경(崇敬)의 염원은 없다.七. 조선일보사장, 방응모(方應模)위 자는 안창호(安昌浩)의 장례일 도중에 자동차로 참가한다고 논지(論止)를 주었던 적이 있다고 하는 데 안창호(安昌浩)의 사망에 대하여 아래와 같이 말하였다.기록:안창호(安昌浩)는 조선민족주의자로서 조선인에게는 상당히 인상 깊은 인물이기에 그의 말로를 생각할 때 감개무량하다.그는 마치 민족운동을 위하여 조선에서 출생한 것 같고, 자기의 주의(主義)를 위하여 일생을 바친 인물은 흔치 않은 것이나 조선에 용납되지 않는 주의(主義), 사상(思想)을 주장하고 아무런 성과도 없이 사망된 것에 대하여는 한편 연민의 감정을 금할 수 없다.세상에는 왕왕 금전적인 문제로 비난을 받는 자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절대로 타인으로부터 금전을 강요하는 것과 같은 사실이 없고 늘 곤궁한 생활을 하여 금전적으로는 깨끗하였다. 그의 사망에 의하여 민족주의(民族主義)는 자연히 조선에서 자취를 감출 것임에 틀림없다고 생각한다.八. 세브란스(セブランス)병원 원장, 이영준(李榮俊)나는 안창호(安昌浩)와는 아무런 교제도 없고 그가 어떠한 인물이라는 것을 전혀 알 수 없지만 소문에 의하면 그는 민족운동자로서 동일주의(同一主義) 하에 있는 자 및 그를 알 수 있는 범위내의 사람들로부터 존경을 받았다는 것은 사실인 것으로 생각된다. 스스로 안창호(安昌浩)는 평소부터 그와 공명(共鳴)하는 인물 중의 한 사람으로서 인재가 없었다는 것을 확신하는 바이다. 왜냐하면 모든 사업은 그 시류(時流)에 순응하지 않을 수 없는 철칙(鐵則)이라는 것을 그들은 한 사람도 깨닫지 못하였다. 아직까지 민족운동 등을 계속하고 안창호(安昌浩)를 우두머리로서 존경하는 어리석은 자들은 안창호(安昌浩)의 사망에 의하여 시국을 인식하고 전향(轉向)할 것이어서 그의 죽음은 불행하다고 할 수 있다.九. 경성부(京城府) 회의원(會議員), 김응순(金應純)안창호(安昌浩)는 시종 현 정치에 반대를 주장하고 조선독립을 꿈꾸고 활동하였다.요컨대 그는 제국(帝國)의 큰 실체를 바로 보지못하고 현물(現物)로서 종래 그들의 존재가 총독정치(總督政治)에 심대한 방해가 되었다.그로 인해 2천만 동포는 막대한 손해를 입었으며 금후 이처럼 불령(不逞)한 사항이 머지 않아 자연도태되고 총독정치는 더욱 밝아져야 한다.十. 민족주의자, 나환건(羅桓健)안창호의 사망은 즉 조선에 있어서 민족운동의 종언(終焉)을 의미하는 것이 되며,당국(當局)의 탄압에 죽음으로 대항한 그의 마음속 깊이를 조용히 생각 해 볼 때 눈물을 금할 수 없다.또한 눈을 크게 떠 진실한 조선민족의 행복을 고찰할 때, 안창호(安昌浩)의 죽음은 잘된 것이라고 생각한다. 지금의 조선인 대부분은 매우 행복하며 장래는 더욱 더 복 받을 것으로 생각된다. 안창호(安島山)와 같은 인물이 생존하여 반국가적(反國家的) 운동을 계속하면 그만큼 조선인은 그에 반비례하여 불행하게 되므로 그의 사망은 내선일체(內鮮一體)라고 하는 대국적(大局的) 견지(見地)로부터 나는 이를 축복할 만한 일로 본다. 어쩌면 조선인의 거의 전부가 나와 같은 감정을 갖고 그의 죽음을 조상할거라고 생각한다.

    4442 안창호의 사망에 관한 건[京高特秘 제512의 3](1938.3.17)

    상기 제목의 건에 관하여는 번호에 따라 누차 보고한 것과 같이 안창호(安昌浩)의 유해를 매장할 관하(管下) 양주군 구리면 망우리(楊州郡九里面望憂里)의 공동묘지에 대하여는 소할(所轄) 양주(楊州)경찰서에서 계속 엄중히 주의하던 중이었다. 지난 3월 14일은 매장한지 3일째 되는 소위 삼우제(三虞祭)에 상당하기에 금일 오후 2시부터 4시 경까지의 사이에 아래에 기록한 7명의 묘참자(墓參者)가 있고 그들은 누구나 묘전(墓前)에 참예(參詣)한 것 뿐으로 그 동안에 특이점을 인식하지 못하였다. 참고 바라며이상, 보고 통보한다. < 본적,주소직업성명연령안창호와의 관계 평남 진남포부 비석리 191(平南鎭南浦府碑石里一九一)신탄상(薪炭商)김순철(金順哲)24세안창호(安昌浩)의 조카 위와 같음무직김순원(金順元)32세위와 같음 경성부 명령정 1-36-1(京城府明伶町一-三 六-一)지주장●●(張●●)39세안창호(安昌浩)의 친구 황해 풍산군 만천면 유정리(黃海風山郡萬泉面楡亭里),경성부 공덕정 167(京城府孔德町一六七)무직이선행(李善行)41세동우회 관계자 강원도 금화군 기오면 창도리(江原道金化郡岐梧面昌道里),경성부 삼각정 61(京城府三角町六一)위와 같음김려순(金麗順)32세안창호(安昌浩)의 친구 경성부 수송정 116(京城府壽松町一一六),경성부 통의정 115(京城府通義町一一五)약제사(여)유영준(劉英俊)46세안창호(安昌浩)의 친구 평양부 기림정 7(平壤府箕林町七),경성부 수송정 46-4(京城府壽松町四六ノ四)무직이정희(李禎姬)42세안창호(安昌浩)의 양녀

    4443 피구금 목사의 동정에 관한 건[京鍾警高秘 제1120호의1](1938.2.10)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천북동(平安北道宣川郡宣川邑川北洞)선천(宣川) 북교회(北敎會) 목사정요(政要), 백영엽(白永燁), 47세위 자에 대한 목사 사임문제에 관하여 선천(宣川) 경찰서장으로부터 별지와 같이 보고를 받았으며 참고로 하기 바란다.이상, 보고한다.

    4444 피구금 목사의 동정에 관한 건[平北高 제3056호](1938.1.28)

    평안북도 선천군 선천읍 천북동(平安北道宣川郡宣川邑川北洞)선천(宣川) 북교회(北敎會) 목사정요(政要), 백영엽(白永燁), 47세위 자는 작년 6월 16일, 수양동우회 사건 관계자로서 경성 종로 경찰서에 검거되어 현재 경성 지방법원에서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예심 중이다. 당시 동일사건 관계자로서 검거된 장리욱(張利郁), 이영학(李英學), 김복동(金福童), 박창준(朴昌俊), 김진수(金珍洙) 등은 종로서(鍾路署)의 권고를 받거나 혹은 자발적으로 교직(敎職) 또는 목사 등의 사표(辭表)를 제출하였다. 그러나, 백영엽(白永燁)만은 아직 완고하며 이에 응하지 않고, 소속교회 청년신도 사이에서는 이와 같은 인물을 언제까지나 목사로서 사무를 보게 하는 것은 교회의 발전과 경제적인 측면에서 보아도 바람직하지 않는 것으로 해임한다고 하였다. 그렇지만 오랜 시간 교회를 위하여 노력하여온 지금 목사를 적극적으로 해임하는 것은 본인에 대한 의리(義理)가 아니므로 본인의 자발적 사표제출을 기다려서 처리하여야 한다고 일단 의견이 일치되었다.그 후 본인에게 있어서 사의(辭意)가 없음이 명백하여 부득이 교회 당회(堂會)에서는 적극적으로 해임할 것을 의결하였다. 동(仝) 목사는 평북(平北) 노회(老會)에서 채용한 관계로 당회(堂會)의 일치를 모아 해임불가였다. 1년에 500엔의 급료를 지급하기로 하였는데 그 후의 상황을 고려하면 아직 교회 소속신도 사이에서는 백영엽(白永燁)을 절대적으로 숭배하며, 출옥 후는 계속하여 목사로서 사무를 보게 한다는 것이 농후하여 엄중시찰 중이다. 동(仝) 교회 장로로서 전에 소화(昭和) 8년 5월 백영엽(白永燁)을 목사로서 초청하여 운동을 진행하게 하고 그 후로도 극히 친밀히 계속 지내고 있다.평북 선천군 선천읍 천북동(平北宣川郡宣川邑川北洞)장로(長老), 한복영(韓復永) (58세)은 몇 차례 재감(在監) 중인 백영엽(白永燁)에 대하여 교회의 상황, 기타통신을 하였으며, 이번 달 11일 한복영(韓復永)에 대하여 아래와 같은 답장이 있었다. 수신자 한복영(韓復永)은 지난 16일 일요예배 석상에서 "백영엽(白永燁) 목사는 재감 중이나 하느님의 은혜로 신체 건강하다는 통신이 있었는데 감사하기 그지없다."라고 말한 사실이 있음으로 1월 19일 소할(所轄) 선천(宣川) 경찰서에서는 위 자를 초치(招致)하고 공연히(公然) 재감자(在監者)를 비호하고 또는 칭송적인 말을 쓰는 것과 같은 것은 불가한 것이라고 하였다.참고 바라며, 보고 통보한다.기록:실로 만금(萬金)의 가치가 있는 귀하의 서신을 보고 귀하의 건강과 직계의 손자와 외손자가 거의 동시에 출생된 것에 대하여 두 손을 들어 경하(慶賀)합니다. 저는 은혜를 입어 건강을 보전하고 더욱이 심령의 위안을 많이 받으면서 스스로 자신의 품격상의 결함과 교역(敎役)상의 불충실을 절실히 느끼고 있습니다.예수님의 보혈(寶血)과 성령감화(聖靈感化)의 대변화를 이룩하려고 기도하고 있으며 새로이 당선된 북교회당(北敎會堂) 최(崔)장로님과 또 남녀 집사(執事) 등이 당선되었다는 것을 듣고 기쁘기 그지 없습니다.심(沈), 장(張) 두 집사(심, 장 두 집사는 신성학교(信聖學校) 교원 심인곤(沈仁坤), 장석인(張錫仁) 두 분으로서 신사(神社)에 참배(參拜)하지 않은 것으로 사직권고를 받고 퇴직한 자)의 퇴직은 실로 애석하기 그지없습니다. 최(崔)장로님께 금년도에 직원들을 통하여 하느님의 존영함(尊榮)을 이어받도록 기도할 것을 전하기 바라며, 교회의 달덕(達德)을 기원하는 교회 일에 관하여는 어떤 경우는 조금은 관심을 갖게끔 될 것입니다. 또 귀하 등은 더욱더 굳은 의지로 충실하기를 바라며 소생(小生)의 장남 일규(一圭)의 ●세(●世)는 이는 하느님이 정한 뜻으로서 부득지고원(不得止故援)의 증거만 보아도 행운입니다. 소생(小生)의 집안 일에 관하여는 일체의 지도와 보호를 부탁 드리며 장로님들께 일일이 면회를 부탁 드립니다. 소생(小生)은 북교회(北敎會) 목사를 사직하려 하였는데 아직 보류 중이며 속히 상당한 영구(永久)지도자격자의 목사를 초청하기를 바라며 당회(堂會) 및 제직회(諸職會)의 여러 분께 잘 부탁 드립니다.

    4445 안창호의 사망에 관한 건[京高特秘 제512호의 1](1538.3.12)

    동우회 사건의 원흉 안창호(安昌浩)가 대학부속병원에 입원하여 치료 중 지난 3월 10일 사망한 것은 번호에 따라 이미 보고한 것과 같다. 계속하여 주의(注意) 중이며, 3월 6일 입성(入城)하여 그를 간호하던 친형 안치호(安致浩) 및 그의 부보(訃報)를 받고 3월 10일 입성(入城)한 유족근친자(遺族近親者) 여러 명은 그 시체의 조치를 그의 생전의 유언에 따라 평양(平壤)에 있는 조만식(曺晩植)에게 전보를 쳐서 그와 함께 평안남도 대동군 대보면 대보산(平安南道大同郡大寶面大寶山)에 사유묘지를 설정하도록 관할 대동경찰서에 청원하였는데 논의가 준단 되었다. 시체운반비용 등의 관계도 있기에 경성(京城)부근의 적당한 장소에 매장하기로 하고 경성부(京城府) 당국(當局)과 교섭하여 관할 양주군 9리면 망우리(楊州郡九里面忘憂里)의 부유(府有) 공동묘지 약 100평을 돈 200엔에 구입한 후, 3월 12일 오후 1시 30분 동(仝) 병원에서 기독교 고별식을 거행하고 동일 오후 4시에 전기(前記)의 공동묘지에 매장하였다. 그 사이의 상황은 아래와 같고 아무런 용의점(容疑点)이 없다.이상, 보고(통보)한다.추가로, 유족 근친 및 평양(平壤)에서 온 회장자(會葬者)들은 장례가 종료된 후 누구나 다 거주지로 되돌아갔다. [단, 안치호(安致浩)는 잔무정리 때문에 수일간 부내(府內) 삼각정(三角町) 중앙호텔에 체재할 예정]1. 조문자(弔問者)조문자(弔問者)는 안창호의 생전에 특수관계가 있는 자에 한하여 허용되며 그 성명은 아래와 같다.기록:경성부 창신정 641(京城府昌信町六四一) 동아일보 사원(東亞日報社員)임정환(林正煥)경성부 필운정 287 (京城府弼雲町二八七) 금강제약 회사원(金剛製藥會社員)김기승(金基昇)경성부 수표정(京城府水標町) 조선교육협회유진태(兪鎭泰)경성부 삼청정 149(京城府三淸町一四九) 무직 여균(呂均)경성부 창신정(京城府昌信町) 중앙시보사(中央時報社)원세훈(元世勳)경성부 수송정(京城府壽松町) 안국택시(安國タクシー)이명근(李明根)경성부 내자정 189(京城府內資町一八九) 저술업(著述業) 문일평(文一平)경성부 통의정(京城府通義町) 여의(女醫) 유오준(劉吳俊)경성부 회기정 66 (京城府回基町六六) 시조사(時兆社)김창집(金昌集)경성부 사직정 262-48(京城府社稷町二六二--四八) 무직 주성은(朱成恩)경성부 계동정 143-23(京城府桂洞町一四三--二三) 안창호(安昌浩)의 제자이애지(李愛志)중앙고등보통학교(中央高等普通學校) 교장 현상윤(玄相允)경성부 북아현정 1-148(京城府 北阿峴町一--一四八)이위직(李偉稷)경성부 무교정 33(京城府武橋町三三) 동향인(同鄕人)이종훈(李鍾勳)경성부 합정 114(京城府蛤町一一四) 목사장홍범(張弘範)경성부 청진정 17-5(京城府淸進町一七--五) 변호사김병로(金炳魯)동아일보사장(東亞日報社長)백관수(白寬洙)경성부 당수정 23(京城府唐洙町二三) 안창호(安昌浩) 아내의 지인(知人)최선복(崔善福)경성부 창신정 23(京城府昌信町二三) 이업종(李業鍾)경성부 가회정 1-71(京城府嘉會町一--七一) 최달하(崔達河)조선일보 주필 동향인 서춘(徐椿)경성부 종암동 40(京城府鍾岩町四Ο) 저술업이극박(李克珀)…(원본판독불가)… …(원본판독불가)… 박흥식(朴興植)의 비서 김진태(金鎭泰)조선신탁회사원(朝鮮信託會社員) 장일룡(張日龍)연전부교장(延專副校長) 유억겸(兪億兼)경성부창신정131-5(京城府昌信町一三一--五) 안창호(安昌浩)친형의 친구 이제효(李濟孝)경성부 광화문거리 98(京城府光化門通九八) 동향인김용초(金用礎)대동광업회사원(大同鑛業會社員) 공범자의 남동생유상하(劉相夏)경성부 현저정 46-8(京城府峴底町四六--八) 이전 조일(朝日)영업부장, 동향인명린엽(明麟燁)경성부 원남정 66-31(京城府苑南町六六--三一) 회사원, 동향인김례현(金禮顯)경성부 돈암정 471-30(京城府敦岩町四七一--三Ο) 교사 마선항(馬善恒)경성부 신설정 159(京城府新設町一五九) 동아일보사(東亞日報社) 기자임봉순(任鳳淳)위 자의 아내 황신덕(黃信德)경성부 종로2정목 그리스도교서회(京城府鍾路二丁目耶稣敎書會) 동우회 관계자 최봉칙(崔鳳則)경성부 종로2정목 그리스도교서회(京城府鍾路二丁目耶稣敎書會) 동우회 관계자박태화(朴泰和)경성부 삼각동 중앙호텔(京城府三角町中央ホテル) 성대(城大)학생 오영진(吳泳鎭)경성부 삼각동 중앙호텔(京城府三角町中央ホテル) 무직 김령순(金靈順)식산(殖産)은행원 김태순(金泰順)평양부 창전리 160(平壤府倉田里一六Ο) 안창호(安昌浩) 여동생의 친구 최의향(崔儀鄕)평양부 신양리 98-2(平壤府新陽里九八--二) 동우회 관계자 김성업(金性業)의 아내 박현숙(朴賢淑)평양부 신양리 169-95(平壤府新陽里一六九-九五) 박영애(朴永愛)평양부 관후리(平壤府館後里) 조만식(曺晩植)평남 평원군 숙천면 성남리 91(平南平元郡肅川面城南里九一) 상해 거주시의 지인(知人) 조성덕(趙聖德)경성부 죽반정 3-79(京城府竹潘町三-七九) 안창호의 양녀최명실(崔明實)경성부 창신정 131-55(京城府昌信町一三一-五五) 안치호(安致浩)의 지인(知人)김겸●(金謙●)경성부 경운정 64(京城府慶雲町六四) 스즈끼 후꾸지로우(鈴木福治郞)경성부 성북정 111(京城府城北町一一一) 조최근(趙最根)경성부 제기정 149(京城府祭基町一四九) 같은 이웃사람조덕향(趙德香)경성부 서대문정 1-33(京城府西大門町一-三三) 안창호(安昌浩)의지인(知人)유각향(兪珏鄕)경성부 필운정 93(京城府弼雲町九三) 잡지기자 김명식(金明植)경성부 돈암정 433(京城府敦岩町四三三) 잡지기자 정로식(鄭魯湜)경성부 광화문거리 98(京城府光化門通九八) 변호사 김용무(金用茂)경성부 명륜정 1-36(京城府明倫鄭一-三六) 동향인백붕제(白鵬濟)경성부 내수정 250(京城府內需町二五Ο) 동향인이창준(李昌俊)경성부 가회정 1-94(京城府嘉會町一-九四) 조영원(趙永元)경성부 숭인정 66-7(京城府崇仁町六六-七) 변영태(卞榮泰)경성부 사직정 262-21(京城府社稷町二六二-二一) 김료수(金料洙)경성부 수송정 9(京城府壽松町九) 동우회 관계자오기영(吳基泳)2. 조위료(弔慰料) 증정자1. 돈100엔 박흥식(朴興植)50엔 조선일보사50엔 방응모(方應模)50엔 현준호(玄俊鎬)10엔 박현숙(朴賢淑)10엔 최의향(崔儀鄕)5엔 박영애(朴永愛)5엔 황신덕(黃信德)5엔 임경애(林敬愛)5엔 유억겸(兪億兼)2엔 최봉칙(崔鳳則)2엔 박태화(朴泰和) 합계 294엔3. 조전(弔電)1.정중하게 서거를 애도한다.주: 안창호(安昌浩) 처형사건의 취조의 임무를 맡은 관계로 인하여 유족이 사망통지를 발송하였기에 조전(弔電)이 있다. 미와카즈 지로(三輪和三郞)2.삼가 도산 안창호[島山(도산)]선생의 애도의 뜻을 표한다(번역문)조만식(曺晩植)3.위와 같음진남포(鎭南浦) 이전 중일(中日) 부사장, 강위정(姜偉情)4.언제 사망하였는가, 장례는 어느 날인가, 묘지는 어디로 결정하였는가로스앤젤스(안창호(安昌浩)의 장남) 안필립(安必立)위 조전(弔電)에 관하여 유족으로부터 안필립(安必立)에게"3월 10일 오전 0시 병사(病死)하고 장례는 12일, 망우리(忘憂里)에 매장한다."라고 답전(返電)하였다.4.장례비용총 비용: 550엔명세: 묘지 매수비(買收費): 200엔장례비: 200엔잡비: 150엔(주: 조위료(弔慰料)로 부족한 부분은 안창호(安昌浩)의 친척이 부담한다.)5.고별식 상황고별식은 성대부속병원(城大附屬病院)의 시체 안치실에서 오후 1시 30분에 거행하여 45분에 끝내였는 데 일반 참렬(參列)을 유족은 하지 않고 유족 근친 그 외의 특수 관계자만 참렬하였다.1) 참렬자 < 주소안창호(安昌浩)와의 관계입성(入城) 날짜성명연령 평남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 4-1(平南江西郡東津面古逸里四-一)친형3월 6일안치호(安致浩)67 위와 같음사촌 형제3월 10일안봉호(安奉浩)42 평남 진남포부 억량기리 53(平南鎭南浦府億兩機里五三)매부3월 10일김성탁(金聖鐸)64 위와 같음여동생3월 10일안신호(安信浩)45 위와 같음조카3월 10일김순철(金順哲)25 위와 같음조카3월 10일김순원(金順元)23 평양부 관후리 407(平壤府館後里四Ο七)친구3월 12일조만식(曺晩植)57 경성부합정 114(京城府蛤町一一四)목사장홍범(張弘範)61 평남 대동군 고평면동리 215(平南大同郡古平面東里二一五)조카3월 11일안동칠(安東七)22 2) 고별식 차례1) 찬미가 제248장 합창2) 기도사(祈禱辭)목사 차재명(車載明)의 사고 결석으로 인하여 조만식(曺晩植)이 대신하여 기도사(祈禱辭)를 말하였고 그 요지(要旨)는 아래와 같다.기록:「인간의 생사를 지배하는 ′그리스도′여. 죽은 안(安)씨를 영구히 천국으로 인도하여 주시옵고, 그 뒤에 남은 가족도 영구히 보호하여 주시며 다른 나라에서 부친의 죽음을 볼 수 없어 비탄하고 있는 가족의 마음을 살펴 주시옵고, 부디 보호하여 주시옵소서.」3) 성서(聖書)낭독, 목사: 장홍범(張弘範)성서(聖書) ′고린도(コリント)서′ 제5장 제50절 낭독4) 찬미가 제3장 합창6. 시체매장의 상황위 고별식이 끝난 후, 바로 영구차로 양주군 9리면 망우리(楊州郡九里面忘憂里)의 공동묘지로 갔는데 그 수행자(隨行者)도 사전에 고별식 참례자에만 한하는 것과 동시에 길가의 요소(要所)를 경계하였다. 더욱이 동대문서(東大門署) 사복(私服)경찰관 2명을 영구차에 뒤따르게 하는 한편, 공동묘지에 관하여도 관할 양주(楊州) 경찰서 서원 4명을 파견하여 경계하게 하였다.영구차 및 그 수행자는 동일 오후 3시 30분 현지에 도착하고 다시 찬미가를 합창하고 오후 4시에 무사히 매장을 종료하였다.7. 기타 사항(1) 3월 10일 안창호(安昌浩)의 친형 안치호(安致浩)는 안창호(安昌浩)의 모습을 영구히 보존하기 위함이라고 하며 그의 ′데스 마스크′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런 행위는 죽은 이의 영을 모독할 뿐만 아니라 오해를 초래할 수 있음을 간론(懇論)하고 임의로 제출하여 관할 동대문(東大門) 경찰서에 보관하고 있다.(2) 유족 근친자들에게 장래 묘지에 비석 등을 건립할 경우는 사전에 경찰에게 청원하여 지시를 받도록 주의를 주었다.

    4446 안창호의동정에관한건(平南高秘제1188호)(1938.3.31)

    출생지: 평안남도 강서군 초리면 보봉리(平安南道江西郡草里面寶峰里)주소: 평안남도 대동군 대봉면 대평리(平安南道大同郡大寶面大平里)안창호(安昌浩) 61세지난 해 7월 소위 동우회 사건의 주범으로서 경기도(京畿道)에 검거되고 서대문(西大門) 형무소에 수감 예심…(원본판독불가)… 중, 위병 및 폐결핵증이 재발하여 보석되어 경성제대부속병원(京城帝大附屬病院)에 입원하여 치료(3월 10일 사망)하였던 위 자의 치료비 및 소지금(所持金)이 거액으로 들어 그 출감에 의심스러운 점이 있어 여러 번 통보를 하였으며 그 출감 등 조사를 하였는데 아래와 같다.이상, 보고 통보한다.기록:1. 안창호(安昌浩)의 친형인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江西郡東津面古逸里)에 거주하는 안치호(安致浩) 및 친척 안봉호(安奉鎬) 두 자는 안창호(安昌浩)가 보석출감 한 후 수차례 경성(京城) 여행에서 면회한 적이 있는데, 안치호(安致浩)는 2회에 걸쳐 모두 500원[제 1회에 200원, 제 2회에 300원. 단, 건넨 일시(日時)는 소상하지 않다.]을 입원비용으로 안창호(安昌浩)에게 건넸음이 판명되었다.오히려 강서군(江西郡)에는 위 자 안창호(安昌浩)의 출신지로서 많은 친교자(親交者)들이 거주하지만 그들이 생활비 또는 입원비 등으로 송금한 적은 없다.2. 평양부 선교리45(平壤府船橋里四五) 주류판매 도매업 조덕윤(趙德潤)은 경성 세브란스(セブランス)병원 의사 윤문린(尹文麟) 씨에게 이번 해 1월 18일 돈 100원을 송금하였다. 송금사유를 조사하였는데 조덕윤(趙德潤)은 1월 12일 옛 친구 윤문린(尹文麟)의 내양(來壤) 생활난을 호소하여 100원의 대부금을 신청하여 승낙 받고 윤문린(尹文麟)이 귀성(歸城) 후 송금하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윤문린(尹文麟)에게서 받은 차용증서에는 이율 및 반제기일(返濟期日) 등이 정해져 있지 않다. 게다가 윤문린(尹文麟)은 안창호(安昌浩)와 친교가 있으므로 어쩌면 윤문린(尹文麟)이 안창호(安昌浩)에게 건넸을 지도 모르기에 조사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3. 기타 참고사항1) 안창호(安昌浩)는 소화(昭和) 11년 2월 10일 대전(大田) 형무소를 가출옥(假出獄)하고 대동군 대보면 대평리(大同郡大寶面大平里)에 온 후 자산이 있는 김동원(金東元), 오봉선(吳鳳善), 김병연(金炳淵), 오경숙(吳敬淑) 및 김찬종(金燦鍾) 등 일련의 평양거주의 민족주의자들로부터 매월 약 300원의 생활비를 받았다. 그 외 안주(安州) 윤항(尹恒), 경성(京城) 박흥식(朴興植), 화신상회(和信商會) 및 서쪽 지방에 산재(散在)되어 있는 대성(大成)학우회원 및 동우회원 연고자들로부터 가끔 생활비의 보조를 받은 적이 있으나 그 송금액, 송금자(送金者) 등이 소상하지 않다. 안창호(安昌浩)가 경대부속병원(京大附屬病院)에 입원중의 비용 등 평양(平壤)에서 송금한 자를 조사하였는데 판명되지 않아 평양(平壤)에 있는 오봉선(吳鳳善) 등에 관하여 조사하였는데 송금자가 없는 것은 사실인 것 같다.2) 안창호(安昌浩)와 친교가 있는 용강군 오참면 한압리(龍岡郡吾斬面寒鴨里)에 거주하는 정요(政要) 김기만(金基萬)은 동우회 사건 검거 전 생활비로서 약간의 금전을 제공하였다는 소문이 있어 내사(內査)하였지만, 확실한 사실을 탐지할 수 없었다. 진남포 용정리(鎭南浦龍井里)에 거주하는 특요(特要) 강위천(姜偉倩)은 대평리(大平里)에 있는 안창호(安昌浩)의 건축재료로 온돌석(溫突石) 50장을 제공한 적이 있는데 그 후 금전증여 등의 사실이 없는 것 같다.진남포 억량기리(鎭南浦億兩機里)에 거주하고 있는 의제(義弟) 보요(普要) 김성탁(金聖鐸)은 안창호(安昌浩)의 병문안을 위하여 수차 경성에 들렀는데 돈을 얼마나 증여하였다는 사실은 분명하지 않다.3) 안창호(安昌浩)가 대전(大田) 형무소를 가출옥(假出獄)하고 대평리(大平里)에 거주한 후는 화신상회주(和信商會主) 박흥식(朴興植), 김광업(金鑛業), 최창학(崔昌學) 두 자가 거액의 원조를 하였다는 소문이 있으므로 당시 내사(內査)하였지만 소상하지 않다.4) 앞서 기술한 것과 같이 안창호(安昌浩)의 생활비는 평양에 있는 일련의 민족주의자들이 공동으로 부담하였는데, 소화(昭和) 10년 11월 경부터 그들의 생활원조도 점차 감소되었다. 그래서 안주(安州) 윤항(尹恒), 평양(平壤) 김찬종(金燦鍾) 두 자는 대성학우회원(大成學友會員)을 중심으로 안창호의 생활안정을 도모하는 기관의 설치를 제창하였다. 그 후 임야(林野) 5만평을 구매하여 안창호(安昌浩)의 명의로 소유권을 전이하였는데, 더욱이 위 두 사람은 이듬해 2월 용강도회의원(龍岡道會議員) 김병●(金秉●)를 더하여 3명이 안창호(安昌浩)의 주택 신축계획을 수립하고 500원을 출연(出捐)한 후, 동년 6월 하순부터 공사에 착수하였는데, 안창호(安昌浩)의 의향을 참작하여 약 2,000원 정도의 건평에 18평인 나무로 지은 조선 식에 서양식을 가하는 건축계획으로 변경하였다. 동년 9월에 준공하였으며. 약 2,000원의 나머지 자금은 당연히 안창호(安昌浩)가 소유하였을 것이다. 당시 구입한 임야의 일부에 2,000명 정도를 수용하는 광장을 건설하여 그리스도교 예배당의 건설을 계획한 적도 있으며 그 사이에 있어서의 수지(收支)가 소상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그 건축비의 나머지를 입원 당시까지 저축하여 두었는지 아닌지 명확하지 않다.3. 안창호(安昌浩)의 장남 안립필(安立必)은 북미 로스앤젤레스에 거주하며 배우로서 주 3백 달러의 보수를 받고 있었다. 안창호(安昌浩)가 입원 한 것을 알고 이번 해 2월 27, 8일 즈음 미국화폐 300달러를 우송하여 왔다고 안창호(安昌浩)의 집사 평북 용천군 북중면 수봉동(平北龍川郡秀峰洞) 장계학(張啓學)이라는 자가 말하는 데 이 자가 말한 것도 확실한 것이 아니기에 그 진위(眞僞) 정도가 불명하다.

    4447 동우회 및 동支會의 해산에 관한 건[京高特秘 제1217호](1938.5.28)

    경성부 청운정 108-18호(京城府淸雲町一Ο八-一八號) 신윤국(申允局)(동우회 사건으로 기소 예심 중)에 사무소를 소유한 동우회는 전에 대정(大正) 8년 3월 독립소요사건 당시 상해 임시정부에 있으면서 안창호(安昌浩)의 심복이며 독립신문의 주필로서 한국광복 운동을 지휘하던 이광수(李光洙)가 그 후 당국의 임시허가를 받고 조선으로 돌아와 대정(大正) 11년 1월 표면적으로 청년남녀의 수양기관으로 될 것을 주장하고 동지를 규합 결성한 수양동우회를 그 전초기지로 하였다. 따라서 대정(大正) 15년 1월 재평양(在平壤) 동우구락부(同友俱樂部)와 합체하여 수양 동우회가 되었다. 더욱이 소화(昭和) 4년 11월 동우회로 명칭을 고치고 현재까지 이르렀다.지난해 5월 관할 종로 경찰서에서 검거 송국(送局)하여 기소유예처분을 받고, 경성부 종로 2정목 소재 기독교 면려청년회 조선 연합회 서기 이량섭(李良燮)의 보안법 위반 피의사건을 취조 중, …(원본판독불가)… 앞서 말한 기독교 면려청년회의 우두머리가 된 이용설(李容卨), 정인과(鄭仁果), 이대위(李大偉), 주요한(朱耀翰) 등이 재미 흥사단의 단원인 동시에 동우회에서도 간부의 위치를 점하며, 동 청년회 내에 위엄을 떨쳤다는 것을 폭로하였다. 이 기회에 다년간의 수수께끼의 존재로 추이하여 온 동우회의 전모(全貌)를 철저히 밝혀야 하며, 경성 지방법원 검사정(귀관)의 지휘를 받아, 동년 6월 7일 이후 경성(京城), 평성(平城), 선천(宣川) 등 각지로부터 동우회 관계자를 일제히 검거하였다. 계속하여 동 경찰서에서 엄밀히 취조를 한 결과, 앞서 말한 수양 동맹회는 당시 재…(원본판독불가)…중이며, 안창호(安昌浩)의 …(원본판독불가)… 이광수(李光洙)가 일부러 전향(轉向)을 위장하고 당국의 …(원본판독불가)…허가를 받고 …(원본판독불가)… 흥사단으로서 조직할 것, 재평양 동우구락부의 합동 그리고 안창호(安昌浩)의 지령에 따라 운동의 통제강화를 도모하는 목적 하에 진행할 것, 회칙(會則)도 흥사단 규약을 당국이 용인(容認)할 정도로 개정(改訂)하고 기타 회원의 입회수속 등 전부 흥사단과 같게 한다. 즉 재미 흥사단, 재…(원본판독불가)…흥사단, 원동(遠東) 위원부 …(원본판독불가)…내 동우회는 그 명칭, 지역을 달리 한다 할지라도 한 덩어리로 된 혁명단체로서 제국(帝國)이 장래 국제적 위국(危局)에 봉착하는 것과 같은 일이 있을 경우 …(원본판독불가)…합법을 위장하고 그것이 뛰어난 투사의 양성에 …(원본판독불가)… 판명할 수 있음으로써 취조의 종료와 함께 전후 3차에 걸쳐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송국(送局)하였다. 동 회 관계자로서 사건 송치(送致)된 자는 총수 191명(기소 중지를 포함)에 달하며 42명은 현재 기소 예심 중이다.동(同) 서(署)에서는 제1회 사건 송치로 동우회의 내면 폭로에 따라 동 회는 전면적인 검거에 의하여 자연 괴멸하게 될 운명에 있다. 일단 동 회 간부에 대하여 동우회의 해산을 종용하였던 바 소화 12년 8월 5일 신윤국(申允局) 이하 9명의 대표자 명의와 함께 해산신청서를 제출하였다. 그 지부인 평양(平壤) 지방회 및 선천(宣川) 지방회에서도 동년 9월 20일 간사(幹事)의 연명(連名)으로 동 서(署) 경유의 소재지 관할 경찰서에 해산신청서를 제출하기에 이러렀다. 십수년의 긴 시간을 걸쳐 교묘히 민족운동을 계승하여 사회의 각 계층마다 교육 그리고 기독교 방면에 근거하여 굳센 지반(地盤)을 획득하고 있던 동우회 일파(一派)는 철저한 검거에 의하여 명실공히 완전히 괴멸되기에 이르렀다. 그 중 기소 유예처분을 받은 자 및 종래 그 영향 하에 있은 자가 많았다는 사실에 있는 관계로, 기왕의 사례를 들어 앞으로 철저히 하여 불온의 책동을 미연에 방지하며, 계속하여 그들의 동향(動向)에 관하여는 엄격히 주의(注意) 중이다.이상, 보고 통보한다.추가로, 경무국(警務局)에서는 동우회의 명부삭제에 관해 검토바람.

    4448 동우회사건 관계자의 전향성명서 발표에 관한 건[京高特秘 제1284호의 1](1938.6.14)

    동우회 사건 기소유예자 김지담(金志淡), 하경덕(河敬德), 김로겸(金魯謙), 유형기(柳瀅基), 전영택(田榮澤), 김흥제(金興濟), 차상달(車相達) 등은 전향을 표명하고,대동 민우회에 가입함과 동시에 한발 더 나아가 전향 성명서를 발표할 그 기초(起草) 위원으로 김흥제(金興濟), 전영택(田榮澤), 차상달(車相達) 3명을 선임한 것은 여러 번 보고한 것과 같다. 그 후 기초(起草)위원들은 계속해서 성명서를 기초(起草) 중이며, 이를 별지와 같이 완성안을 얻었으나 다소의 추고(推敲, 다시 고침)를 가하여 인쇄를 한 후 각 방면으로 배포하기로 하였다. 계속 주의 중이다.이상, 보고 통보한다.성명(심의용 초안)불초한(不肖) 자들이 일찍이 흥사단 수양 동우회의 일원으로 된 결과, 현재 내외정세의 변화에 비추어 이전부터 내려온 주의(主義), 주장(主張)에 근본적 결함과 오류가 있음을 깨닫고 단연히 그것을 청산하였다. 이번 새로이 국민적 자각 하에 대동 민우회에 입회함에 직면하여 불초한 자들의 거취와 동향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우리가 새롭게 파악한 견해와 주장을 피력하여 오래동안 알아온 여러 형제에게 호소함과 아울러 널리 강호 여러분에게 참고로 제공하는 바이다.생각건대, 현재 내외정세의 급격한 변전과 일본의 획세적(劃世的) 약진, 발전의 모든 계기는 우리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민족장래의 발전에 관하여 완전히 새로운 견해와 자각 하에 민족적 새로운 운명을 함께 개척할 것을 요구하여야 한다. 이에 불초한 자들은 조선민중이 금후 진행해야 할 새 방면을 천명(闡明)하고 우리는 지금까지의 이른바 ′민족주의′의 관념에 둘러싸여 조선민중의 발전과 향상은 오로지 ′민족자결′에 있을 뿐이라고 굳게 믿으며 과거의 우리의 사상적 및 실천적 모든 노력은 오로지 이 신조(信條)하에 받들려 왔다. 아마도 우리들 조선인은 조선의 통치를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만 곡해하고 일본의 진실한 의미로 화선(和鮮, 일본과 조선) 두 민족의 동아사적(東亞史的) 새로운 사명을 인식하지 못하였던 것이다.그러나 최근 수년 내 조선통치 위에 나타난 비약적인 모든 현상-조선민중의 향상발전을 주안으로 하는 진지한 정책 실시 특히 최근 남총독(南總督)에 의하여 강조되고 있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소리는 홀연히 우리의 지금까지의 미망(迷妄)을 각성하게 한다. 특히 이번 시국에 면한 내지인의 반도민중(半島民衆)에 의지한 동포적 신뢰와 ′신일본(新日本)′의 국가적 대이상(大理想) 하에 조성된 혁신운동(革新運動)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품고 있는 일체의 의혹과 두려움, 불안을 떨쳐버린 것이다.현 세계 대세(大勢)의 추이를 관찰해 보면 많은 약소한 민족군(民族群)은 대국가의 지배 하에 통합되어야 할 필연적 정세에 있다. 현대의 여러 국민의 생활은 개인보다도 사회적으로 민족적 고립보다도 여러 민족의 단합에 의하여 처음으로 그 발전과 향상이 기대되는 것이다. 한 민족의 이른바 ′독립′이라는 것은 이미 그 해당 민족에게 행복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동적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물며 동아시아 여러 민족의 지도로서 일본정신의 세계적 선양을 이상으로 신동아사(新東亞史) 창조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는 새 일본의 영광스러운 자태는, 이른바 ′식민지 조선′을 지양(止揚)하고 조선을 신 일본 구성의 유력한 부분으로 하는 획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그리하여 민족자결 이상은 차츰 조선민중에게 있어서 무의미하며 동아시아 발전의 새 방향을 무시하는 반동적 관념이라는 것이 명확하다.지금이야말로 선내일체(鮮內一體)의 새 이상을 구체화하여 서서히 실현의 걸음을 내딛고 있다. 우리는 이를 조선민중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로 인식하고 새 일본건설의 국민적 긍지 하에 그 일익적(一翼的) 임무를 완수하는 것뿐이다. 이는 바로 조선민중의 장래에 영광과 발전을 약속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이에 우리는 황도(皇道) 일본의 내일의 모습을 생각하여 우리의 지금까지의 그릇된 민족관, 국가관, 세계관은 깨끗이 청산하고 조선민중의 영원한 행복은 화선(和鮮) 두 가족을 한 덩어리로 하여 핵심주체로 하는 새 동아의 건설이라는 것을 점차 확신하게 되는 바이다.조선민중의 이해(利害)와 흥망성쇠는 일본전체와 완전히 합치하여야 하며 일본의 흥륭발전(興隆發展)은 조선민중을 배제하는 것이 아니다. 회고하면 화선(和鮮) 두 민족은 동조동근(同祖同根) 그 옛날에는 일체(一體)였다. 오늘날 이를 구분할 다른 여러 조건은 금후 동일국민생활의 발전향상과 동포감정이 철저하게 심화되어감에 따라 차츰 소멸하여 머지않아 완전한 한 개 민족으로서 일원화하는 것도 또한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민족변화발전의 역사는 이를 필연적으로 귀결할 것이다. 피와 문화의 연원(淵源)을 하나로 하는 두 민족은 새 동아사 창조의 위대한 사명을 전제로 일원(一元)민족으로서의 신념을 구체화하여야 한다.요컨대, 우리는 지금이야말로 모든 것을 버리고 일체를 얻는 가장 솔직하고 과감한 의기로 충만 되어 있다. 이는 실로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의 근본정신으로서 우리가 금후 더 한층 분투노력하여야 하는 사명이다. 이번 지나사변(支那事變)은 이미 다 알다시피 일본의 국가적 대 이상의 표현인 것과 동시에 아세아 여러 민족을 제압의 질곡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목적으로 하는 성전(聖戰)임이 틀림없다고 믿는다면 금후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뎌 거국일체(擧國一體)가 되어 목적의 관철을 기대하여야 한다.이에…(원본판독불가)…을 피력하면서 금후 국민의식정화에 얼마간의 도움이 되었으면 한다.

    4449 元 동우회원의 大東民友會 가입에 관한 건[京高特秘 제1284호의 1](1938.6.14)

    동우회 사건 관계 기소유예자의 동향에 관하여는 늘 주의를 기울임과 동시에 사상선도에 노력하고 있다. 그 중 정영도(鄭永道)는 지난해 8월 하순, 경성부 중학정 1번지(京城府中學町一番地) 소재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가입하여 동 회의 감화에 의하여 갑자기 전향(轉向)하였다. 별도로 이미 보고한 바와 같이 구미의 지인에게 이번 사변에 대한 일본제국의 입장을 천명한 통문(通文)을 발송하고 국방헌금, 출정황군을의 환송하는 등 봉국(奉國)에 노력 중으로 그 성적은 아주 양호하다. 이에 비추어 나머지 기소유예자도 관할 종로 경찰서로 하여금 대동민우회와 연락하고 동회에 가입시켜야 하며, 5월 상순 이래 앞서말한 정영도(鄭永道)로 하여금 김지담(金志淡), 하경덕(河敬德), 김로겸(金魯謙), 유형기(柳瀅基), 전영택(田榮澤), 김흥제(金興濟), 차상달(車相達) 등에 대하여 순차적으로 입회를 권유하였다.그 결과, 모두 가입함과 동시에 이 때 전향 성명서를 발표할 태도를 선명(宣明)할 필요가 있다고 하여 그 성명서 작성 준비 등을 위하여 지난 5월 31일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 사무소에서 차재정(車載貞) 사회 하에 좌담회를 개최하고 이각종(李覺鍾), 차재정(車載貞), 김동일(金東日), 안준(安俊), 이효진(李孝鎭) 및 신입회원인 전영택(田榮澤), 김흥제(金興濟), 차상달(車相達), 김지담(金志淡), 하경덕(河敬德), 김로겸(金魯謙), 유형기(柳瀅基) 등 회합 협의한 결과, 전향 성명서는 수 만장을 인쇄한 후, 각 방면에 배포하기로 하였다. 그 기초위원(起草委員)으로 김흥제(金興濟), 전영택(田榮澤), 차상달(車相達) 3명을 선임하고 멀지 않아 기초에 착수하기로 결정하였는데 또 그 외의 동우회원인 자들도 순차적으로 가입할 것을 권유하기로 합의하고 산회하였으며 계속해서 주의 중이다.이상, 보고한다.

    4450 동우회사건관계자의 전향성명서 발표에 관한 건[京鍾警高秘 제5200호의 4](1938.7.1)

    동우회 사건 관계자의 선도에 관하여는 미리 지시하였는바 예의(銳意) 고려 중이며, 경성 보호관찰소의 취직, 알선 등에 의하여 과거의 오류를 점차 청산하여 전향하고 있는데 그 태도가 확연하다. 기소유예자의 한 사람인 정영도(鄭永道)는 석방 후 대동민우회(大東民友會)에 입회하고 그 지도 하에 구미의 지인에 대하여 전향성명을 발표하였는데, 그 반향(反響)은 아주 양호한 것으로 보아 다른 관계자도 대동민우회에 가입할 것을 종용(慫慂)한 결과, 김흥제(金興濟) 외 16명이 쾌히 입회하였다. 또한 지나사변(支那事變) 발발 이래 팽배하기 시작하는 애국열에 자극 받아 일동협의의 결과, 그릇된 사상을 청산하고 새 일본건설의 일익적(一翼的) 임무를 완수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내려진 임무라고 하고 그 성명서를 인쇄하였다. 그리고, 각 관계방면에 발송하기 위해 기초(起草)위원을 선정하고 지난 6월 중순, 우선 성안(成案)을 얻고 임시 인쇄에 착수하였는데 일부에 그 내용이 극히 미온적이여 반대하는 자가 있기에 더 한층 원고를 작성하고 본부에 출판허가의 수속을 받고 인쇄를 하여 종료하였다.인쇄비, 우편료 등 일체 신입회원의 부담으로서 내선(內鮮)각지는 물론 미국, 만주,중국 등에 재류하는 옛 친구 및 조선내 각 단(團) 혹은 신문사 등에 대하여 곧 우송하고 사상전향을 표명하기로 하였다.이상 보고, 통보한다.불초한 자들이 일찍이 흥사단 수양 동우회의 일원으로 된 결과, 현재 내외정세의 변화에 비추어 이전부터 내려온 주의(主義), 주장(主張)에 근본적 결함과 오류가 있다는 것을 깨닫고 단연히 그것을 청산하였다. 이번 국민적 자각 하에 대동민우회에 입회함에 직면하여 불초한 자들의 거취와 동향을 명확히 함과 동시에 우리가 새롭게 파악한 견해와 주장을 피력하여 구지(舊知)의 여러 형제에게 호소함과 아울러 널리 강호의 여러분에게 참고로 제공하는 바이다.생각건대, 현재 내외정세의 급격한 변전과 일본의 획세적(劃世的) 약진발전의 모든 계기는 우리 조선민중으로 하여금 민족장래의 발전에 관하여 완전히 새로운 견해와 자각 하에 민족적 새로운 운명을 함께 개척할 것을 요구하여야 한다.우리는 지금까지의 이른바 ′민족주의′의 관념에 둘러싸여 조선민중의 발전과 향상은 오로지 ′민족자결′에 있을 뿐이라고 굳게 믿으며 과거의 우리의 사상적 및 실천적 모든 노력은 오로지 이 신조(信條)하에 받들려 왔다. 아마도 우리들 조선인은 조선의 통치를 일본의 ′식민지 정책′으로 곡해하고 제국(帝國)의 진실한 의미와 내선(內鮮) 두 민족의 동아사적(東亞史的) 새로운 사명을 인식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그러나 최근 수년내 조선통치 위에 나타난 비약적인 모든 현상 특히 남총독(南總督)에 의하여 강조되고 있는 내선일체(內鮮一體)의 소리는 홀연히 우리의 지금까지의 미망(迷妄)을 각성하게 한다. 특히 이번 시국에 당면한 내지인(內地人, 일본인)의 반도민중(半島民衆)에 기대하는 동포적 신뢰와 ′신일본(新日本)′의 국가적 대이상(大理想) 하에 조성된 혁신기운(革新機運)은 오늘날까지 우리가 품고 있는 일체의 의혹과 두려움, 불안을 떨쳐버린 것이다.현 세계 대세(大勢)의 추이를 관찰해 보면 많은 약소한 민족군(民族群)은 점차 대국가의 지배 하에 통합되어야 할 필연적 정세에 있다. 여러 국민의 생활은 개인보다도 사회적으로 민족적 고립보다도 여러 민족의 단합에 의하여 처음으로 그 발전과 향상이 기대되는 것이다. 한 민족의 이른바 ′독립′이라는 것은 이미 그 해당 민족에게 행복과 자유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반동적 고립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물며 동아 여러 민족의 지도자로서 일본정신의 세계적 선양을 이상으로 신 동아시아 역사 건설의 역사적 사명을 완수하기 위하여 분투하고 있는 새 일본의 영광스러운 자태는 이른바 ′식민지 조선′을 지양(止揚)하고 조선을 신 일본 구성의 유력한 부분으로 하는 획기적인 현상이라 할 수 있다. 종래의 이른바 민족자결 사상은 차츰 조선민중에게 있어서 무의미하며 동아사 발전의 새 방향을 무시하는 반동적 관념이라는 것이 명확하다.여기서 우리는 황도(皇道)일본의 내일의 모습을 생각하여 우리의 지금까지의 그릇된 민족관, 국가관, 세계관은 깨끗이 청산할 수 있다. 조선민중의 영원한 행복은 내선(內鮮) 두 가족을 한 덩어리로 하여 대국민 일본인을 구성하고 이를 핵심주체로 하는 새 동아시아 건설에 있다는 것을 점차 확신하게 되는 바이다.차츰 소멸하여 머지않아 완전한 한 개 민족으로서 일원화하는 것도 또한 절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분산보다도 통일로 발전하고 있는 인류사회발전의 역사는 필연적으로 귀결할 것이다. 피와 문화의 연원(淵源)을 하나로 하는 두 민족은 새 동아사 창조의 위대한 사명을 전제로 일원화(一元化)하는 것은 실로 하느님의 의사로서 우리에게 맡겨진 숙명임에 틀림없다.그러나 민족 일원화의 이상(理想)은 조급히 완성할 만한 것이 아니기에 왕왕 불가능하게 생각되며, 이와 반대로 민족자결주의는 예전부터 타력(惰力)에 밀려 쉽게 실현될 수 있을 것처럼 생각되는 일면이 있다. 오늘날까지 우리가 민족자결주의에 현혹되어 온 것도 필경 이를 위하여서이며, 많은 사람이 민족관념에 미련을 갖는 것도 또한 이 때문인 것이다. 그런데 사실은 완전히 이와 반대이며, 내선일체(內鮮一體) 민족일원화의 경향은 일취월장의 진보를 거두고 대세는 우리가 좋아하든 안 하든 관계없이 점차 이의 구현화를 요구해 마지않는다. 그 실현은 필연적으로 이미 시간의 문제로 되었다.우리는 이상의 이론적 근거 및 현실의 여러 경향을 기초로서 내선일체(內鮮一體) 완전한 일원화로써 조선민중이 나아가야 할 유일한 길로 인식하고 새 일본건설의 국민적 긍지와 포부 하에 그 일익적 임무를 완수하는 것만이 실로 조선민중의 장래에 영광과 발전을 약속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한다. 이는 실로 대동민우회의 근본정신으로서 우리가 향후 더한층 분발 노력하여야 하는 사명이다. 즉 우리는 지금 모든 것을 포기하고 일체를 얻는 가장 솔직하고 과감한 의기로 충만 되어 있다.이번 지나사변은(支那事變)이 이미 다 알다시피 일본의 대 국가적 사명의 수행 및아시아 여러 민족을 백인(白人)패권의 질곡(桎梏)으로부터 해방시킬 것을 목적으로 한 성전(聖戰)이라면, 우리는 향후 어떠한 희생도 두려워하지 않고 끝까지 참고 견뎌 거국일체(擧國一體) 되어 목적의 관철을 기대하여야 한다.세상은 이미 적화공산의 참화(慘禍)와 개인주의, 공리주의적인 백인문명의 추악함에 진절머리를 치게 되었다. 팔굉일우(八宏一宇, 세계가 일본천황의 것이다고 하는 사상) 도의적 결합을 이상으로 하는 동양정신, 일본주의야말로 참으로 동아(東亞)를 구하고 세계인류를 지도할만한 원리이다. 그러기에 우리는 광휘가 있는 일본정신의 사도(使徒)로서의 영예와 책임을 느낀다. 따라서 우리는 현재 이상의 신념과 주장 하에 분발노력하기를 기대하는 바이다.소화(昭和) 13년 6월 18일갈홍기(葛弘基), 김려식(金麗植), 김흥제(金興濟)김로겸(金魯謙), 김기승(金基昇), 전영택(田榮澤)정남영(鄭南永), 노진설(盧鎭卨), 유형기(柳瀅基)이기윤(李基潤), 이명혁(李明赫), 이묘묵(李卯默)박태화(朴泰華), 차상달(車相達), 최봉칙(崔鳳則)…(원본판독불가)…,현제명(玄濟明), 홍창식(洪昌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