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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481 한길수 활동보고서(1937~1938)

    나는 미국 의회 위원회에서 일본 영사와 하와이의 일본화에 관한 증언을 한 직후, 대낮 호텔 앞에서 호놀룰루 영사 폭력 단원에 의해 잡혔다. 그들은 나를 자동차로 밀어 넣어, 케월스(Kewals) 부두로 끌고 가더니 일본 어선인 삼판에 나를 던졌다. 다행히도 나는 부두를 언뜻 쳐다보았고, 때마침 케월스 부두에 정박한 일본 어선을 살피려고 그곳에 있는 듯한 군복을 입은 미국 육군 한 명을 보았다. 내 생각에 일본영사관 폭력 단원은 케월스 부두에서부터 태평양을 약 60마일을 항해했다. 일본 영사관 폭력 단원은 내 머리와 오른쪽 눈을 때리기 시작했고, 발로차고 나를 묶은 뒤 상어가 있는 바다로 떨어트리겠다고 위협했다. 나를 때리기 시작 한지 얼마 후, 내게 질문을 했다. "미국 의회 위원회에서 증언을 하도록 한 자가 누구냐?" "미육군 G-2가 네게 질레트(Gillette) 상원의원과 램란(Ramlan) 국회의원에게 협조하라고 부추겼나?" 내가 질문에 대답하기를 거부하자 나를 다시 한 번 머리 위로 치켜 든 후 내가 대답을 안 하면 대평양으로 나를 던져버리겠다고 위협했다. 일본 영사관 폭력 단원들이 케월스 부두에서 삼판을 끄집어 내 태평양으로 던졌을 때, 케월스 부두에 군복을 입고 서 있던 군인…(원본누락)…나는 일본 영사관 폭력 단원들에게 당신들이 태평양 바다로 항해해 왔을 때, 케월스 부두에서 군복을 입은 군인이 보고 있었다는 것을 기억하라고 소리쳤다. 그는 목적이 있어서 그곳에 서 있던 것이다. 만약 내가 돌아오지 않으면 미국 육군과 해군은 당신들이 내 몸에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아 볼 것이다. 다행히 일본 영사관 폭력 단원들은 내 말을 알아 듣고, 나를 다시 케월스 부두로 돌려보냈다. 그들은 나를 풀어주면서 내가 만약 미육군에게 60마일 떨어진 곳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하면 나를 죽이겠다고 위협 한 후 하와이를 1년 내에 떠날 것을 약속하라고 했다. 사실상 케월스 부두에서 미군복을 입은 군인이 1937년 10월 나를 케월스 부두에 살아 돌려 보낸 것이다. 하나님께서 사랑하는 사람들의 목숨을 보호하는 신비로운 방법이었다. 1937년 11월 나는 일본 영사관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해 하와이 준주(準州) 법무 장관인 J. M. 스테인벡(J. M. Stainbeck)을 방문했다. 그는 놀랍게도 보호를 요청한 나의 호소를 단호하게 거절했다. 나중에 나는 그의 법률회사가 하와이의 가장 유력 일본 일간지인 니푸지지를 대변했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나는 내 신변보호문제를 미육군 G-2 본부와 논의했다.…(원본누락)… 1937년 정신적으로 고된 경험을 한 후 일본 영사는 "당신은 언제 하와이를 떠날 것입니까?" "몇 월에 갈 것 입니까?"라고 다그쳤다. 나는 그에게 12월 전에 하와이를 떠날 것이라고 했다. 1938년 4월부터 8월까지 일본인들은 저를 희롱하고 모욕하고 위협했다. 그들은 수 차례 내게 진흙과 부패한 달걀을 던지고 나를 길거리에 내쳤다. 수 십번도 넘게 일본 여성들이 지나갈 때면 나에게 "언제 하와이를 떠날 것이냐"고 합창을 했다. 1938년 9월 초에 두 일본 영사관 요원들이 자동차를 태워 유명한 호놀룰루의 조상인 카메라메하(Kamehameha)의 조상으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그들은 내게 최후의 통첩을 했다. 그들은 만약 내가 1938년 12월 1일까지 하와이를 떠나지 않으면, 나, 내 아내, 내 아이들을 태평양 바다에 빠질 줄 알라며, 1938년 12월 1일을 기억하라고 경고했다. 나는 재정적으로 곤궁에 빠졌었다. 몇 달 동안 나는 몇 푼씩 돈을 빌려 근근히 살았고, 이미 미화 1,000불의 빚이 있었다. 나는 의지할 사람도 없었다. 나는 1938년 9월에 신호 찬(Shinho Chan)에게 125달러를 주면 내가 와이마리 근처에 3.5 에이커 분의 여분의 땅문서를 주겠다고 했다. 내가 내 상황을 설명하자 그는 기꺼이 승낙했다. 1938년 10월 4일까지, 나는 하와이를 떠날 수 있는 미국 입국 허가를 받았고, 증기선 티켓을 구했다. 11월에 나는 미국 증기선에 있었고, 두 일본 영사관은 부두에 있었고, …(원본누락)…

    2482 " 브래들리(Willis W. Bradley|| Jr.)가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37.5.11)과 한길수의 메모"

    윌리스 브레들리(Willis Bradley) 미해군대령은 1934년 이후로 한국 지하조직 첩보 단체의 비공식 고문이다.U.S.S. 포틀랜드

    2483 한길수의 한인지하운동보고서(1937.12.5)

    하와이 해군정보국 두 명의 한국인 요원들은 일본 위임통치를 받는 섬으로 보내졌다.임무 목표:1. 일본 군대와 해군활동2. 아멜리아 어하트(Amelia Earhart)- 어디에 있나, 죽었나 살았나?두 명의 한인 지하운동 요원들이 위임통치섬으로 보내졌다.A. 한국 태생. 일본에서 자람. 31세. 북태평양 수산 무역을 하고 있는 초안 마루 배에서 2년간 근무.B. 한국 태생. 일본에서 자람. 35세. 북오스트레일리아와 캐롤라인 섬에서 운영하는 아마직 마루 배에서 어부로 5년간 일함. 위임통치섬에서 2년간 지냄.이 두 명은 일본 기업의 소유인 450 톤의 트롤 어선, 신츠 마루 배에서 일했다. 1935년에 신츠 마루는 일본 제국 해군에 의해 캐롤라인과 위임통치를 받는 섬에서 조업하라고 지정되었다.이 보고서는 미국 해군 호놀룰루 해군정보국에 제출되었다.

    2484 한길수가 하와이사탕수수농장협회에 보낸 서한(1937.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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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485 한길수의 “일본인화 하와이의 위험” 보고서 서문

    이 글의 목적은 미국 내 미 대중들에게 일반적으로 이해 받기 위함이 아니라, 하와이에서 발견된 일본화 활동을 가능한 한 간단하게 제시하기 위함이다. 일본 국민과 도쿄 정부의 관리자들은 하와이를 일본화 하는 그들의 본 정부와 긴밀히 협력하고 있다. 따라서, 그 결과는 미국정신의 가르침에 매우 해가 되었고, 만약 이것이 조기에 저지되지 않는다면, 미국의 최전방에 심각한 위협이 될 것이다. 필자는 이 글이 미국 애국자들의 손에 전해져 그들이 미국의 안전과 복리를 지키는 데 최선을 다할 수 있기를 진심으로 기도하며 바란다.

    2486 한길수 보고서(1937.10.21)

    하와이 설탕농장연합의 웰스(Wells) 전직육군장관 - 조셉 포인덱스터(Joseph Poindexter) 하와이 주지사, 그리고 사무엘 킹(Samuel King) 하와이 연방 하원의원이 내가 1937년 10월 21일 하와이 주 지위 청문회에서 증언하는 것을 얼마나 말리려 했는지 모른다. 1933년 나는 일본영사관의 대미 전쟁준비 움직임에 대항하여 아시아에서 한인지하운동 첩보부로 운영되고 있는 중한민중대동맹에 의해 미국 정보부를 도우라는 지령을 받았다. 1936년 초봄 나는 일본 외무부 관리, 타다시틱 리굴타(Tadastic Ligulta) 씨가 미일전쟁 시 일본에 충성하는 일본계 미국인 단체를 조직하고, 교육적인 목적으로 미국에 온 한인 학생들을 일본을 위한 거국적인 간첩단체로 조직하기 위해 하와이로 보내졌다는 것을 알았다. 이주카(Isuka)는 하와이 주지위 승격을 위한 하와이 내 동양인들의 활동을 조직하기 위해 영사관 활동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정치적인 상황에서, 나는 웰스(Wells) 전직 미국 육군 장관, 조셉 포인덱스터(Joseph Poindexter) 하와이 주지사, 샘 킹(Sam King) 미국 국회의 하와이 연방 하원의원의 기대 하지 못하고 비미국적인 행동을 직면했다. 웰스(Wells) 장관은 영향력 있는 하와이 설탕농장연합에 고용되었었다. 예를 들면, 믿거나 말거나, 웰스(Wells) 장관, 포인덱스터(Poindexter) 주지사, 그리고 샘 킹(Sam King) 하와이 연방 하원의원은 1937년 10월 하와이 청문회에서 일본영사의 비미국적 행동과 하와이의 일본화에 대하여 내가 증언 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1937년 10월 내가 증언 할 것을 알고 웰스(Wells) 장관은 나를 그의 사무실로 불렀다. 그의 사무실에 도착하자 그는 내게 질레트(Gillette) 상원의원을 멀리하고 청문회에서 증언하지 말라고 했다. 나는 화가나 소리를 질렀다. “도대체 왜 이러십니까? 당신은 나를 막을 수 없습니다. 당신은 미국 활동보다 미국 달러를 더 좋아하는군요.” 이틀 후 나는 주지사 사무실에서 포인덱스터(Poindexter) 주지사와 샘 킹(Sam King) 하와이 연방 하원의원을 만났다. 포인덱스터(Poindexter) 주지사와 샘 킹(Sam King) 하와이 연방 하원의원은 내게 나를 위해서, 그리고 하와이 주 지위 승격을 위해서 웰스(Wells) 장관과 협조하라고 촉구했다. 포인덱스터(Poindexter) 주지사는 웰스(Wells) 장관은 “미국에 대한 일본의 의도에 대해 더 잘 알고 있는 사람입니다. 일본은 당신이 1933년에 미육군 G-2와 육군부 장관에게 예견한 것처럼 감히 하와이를 공격하지 못할 것입니다.” 내가 포인덱스터(Poindexter) 주지사와 샘 킹(Sam King) 하와이 연방 하원의원에게 그래도 증언을 하겠다고 했을 때, 그들은 “당신은 ···(원본누락)···입니다. 당신이 웰스(Wells) 장관과 협조하기를 거부한다면 우리는 쉽게 당신을 한국으로 돌려보낼 수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2487 마이니치 신문 번역기사: “일본인 2세의 권리상실의 위험”(1937.3.19)

    만주 사태의 결과, 그리고 최근 올림픽 게임에서 일본 운동선수의 탁월한 성과 때문에, 미국 시민권을 소유한 일본인 2세들 사이에서 자국 사랑이 최고점에 다다랐다. 일본인들을 매혹시키는 이러한 요소들 때문에, 수백명의 미국에서 태어난 청년들이 점차 교육을 받기 위해 일본으로 돌아가고 있다. 장래성 있는 젊은 이들의 출국이 상당히 많아서 태평양 연안의 일본인들은 자신의 소중한 권리를 잃게 되는 큰 재앙을 직면하게 되었다. 최근 로스엔젤레스 일본인 연합과 로스엔젤레스 상공회의소와의 합동 모임에서, 만장일치로 일본에 있는 2세들을 불러들이는 데에…(원본판독불가)…했다. 미국의 와카야마(Wakayama)…(원본판독불가)…연합은 조직을 구성하여 ‘2세 복귀시키기 연합(Calling Back Second Generation)’이라 불렀다. 그리고 로스엔젤레스 상공회의소의 총서기인 59세 시로 후키오카(Shiro Fukioka)는 특별 외교관 자격으로 보내졌다. 외무부는 후키오카(Fukioka)의 청원에 매우 감명을 받았으며, 다른 도에 있는 모든 이민 단체에 단합된 추진력을 촉구하는 ‘2세들이여, 즉시 미국으로 돌아가라!’라는 글을 보냈다.태평양 연안 주의 일본인들을 위해서 거의 40년을 지내온 후키오카(Fukioka)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미국에서 태어난 18세에서 25세 사이의 청년들 약 5만 명이 현재 일본에 거주하고 있다. 고등학교 졸업생으로서, 그들은 일본의 상황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북미로 이상적인 이민을 할 수도 있고, 그들은 일본인들 뿐만 아니라 미국인들에게 환영 받는다. 그들의 복귀에 대한 미국의 거부는 막대한 상업적 손해를 입힐 것이다. 1924년의 반 외국인 이민 법 제정 때문에, 2세대 외의 그 누구도 우리 노령의 일본인들을 대신해 줄 수 없다. 미국 내에서 우리의 상황은 참으로 큰 국가적 이슈다. 이는 또한 모든 일본인들에게 커다란 위기이기도하다.”로스앤젤레스 카운티 < ;해외 일본인일본인 2세 193460,00027,000 193532,71415,519 감소27,28611,481 윌리어드 프라이스(Willard Price) 1938년 2월 세계 영토를 위한 투쟁은 끝나지 않았다. 그 투쟁에서 해외에 있는 백만명의 일본인 아들 딸들은 어떤…(원본판독불가)…를 할 것이다. 그리고 …(원본판독불가)…나라에 있는 거주자들은 사무라이 검의 정의 앞에 믿음이…(원본판독불가)…않을 것이다 미래에, 크게 움직일 것인지 점차적으로 움직일 것인지…(원본판독불가)…, 이러한 것은…(원본판독불가)…일본 조국의 힘처럼 효과적으로 일본 사회가 가득찰 수 있는…(원본판독불가)…그들은 제국의 기지인 것이다.하룻 수구 타하라(Harut sugu Tahara) 일본 의외와 일본에 있는 사회 대중파의 일원들은 다음을 예언했다. “하와이와 미국에 있는 일본인들은 애국적인 대부를 위하여 재산을 동원할 것이다." 그는 그가 해외 일본 신문 협회의 회의에서 이것을 배웠다고 말했다."타이리쿠(Tairiku)", 11월본

    2488 워싱턴 임무에 대한 한길수 보고서(1938.11)

    1938년 11월 워싱턴임무는 다음과 같다.1. 미국인들에게 미일전쟁은 불가피하다고 경고한다.2. 일본이 아시아와 태평양의 지배자가 되면 아시아 내 기독교와 기독교인은 전멸할 것이다.3. 호놀룰루 일본 영사관 관리인 타다키 리주카(Tadoaki Lizuka) 씨가 내게 제시한 일본 외무부 간첩 계획을 좌절 시킨다. 한국과 일본에서 교육 목적으로 미국에 온 한인 학생들을 거국적인 일본에 대한 간첩망조직을 구성한다.4. 일본이 미일전쟁을 이행 할 시 미국 관리 당국자들이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출신 외국인들에게 신분 증명 배지를 달 수 있도록 하여 박두한 미일전쟁을 준비한다.한국지하운동 조직원들은 미국 대중들이 전쟁시 쉽게 “적군”인 일본인과 “미국에 우호적인” 한국인을 구별할 수 있게 신분 증명 배지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다.

    2489 하와이지역 미하원 의원 킹(Samuel Wilder King)의 한길수의 워싱턴활동 지원을 위한 추천 서한(1938.9.21)

    한길수 씨는 제가 몇 년간 알고 지내 온 우리 지역 거주자로서, 워싱턴에서 청문회를 열수 있도록 도와 달라고 제게 부탁했습니다. 저는 그와 같은 목적으로 워싱턴을 특별 방문하는 한국 사람들 그룹의 대변인으로서 미국에 어떤 자료를 제출하고자 하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한길수 씨에게, 저는 알지 못하는, 어떤 세부사항과 공로와 관련된 자신의 임무를 수행 할 수 있도록 기회를 주시기를 부탁 드립니다.

    2490 하와이 샤프트 요새(Fort Shafter)의 미군정보부가 한길수에게 보낸 답신(1938.9.2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