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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1운동 관련 외국잡지 기사 |
비록 많지 않지만, 일부 평자들은 한국이 기독교를 믿기 때문에 벌을 받고 있는것 처럼 보고 있다. 애국심 때문에 박해를 받는 것과 마찬가지로 한국 국민들에게 잘 알려진 데모사건들은 다름아닌 공공연한 "독립만세 3창"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신앙 때문에 기독교도들이 박해를 받은 것처럼 그들은 애국심에 의한 행동으로 박해와 고문을 당했다. 한국은 분명히 비무장으로 저항시위를 수행하고 있다. 무기라면 단지 등사판 인쇄물뿐이다. 한국은 프로이센이나 터키처럼 억압으로 고통 받고 있다. 사적인 편지든 공적인 편지든 이곳으로 오는 편지는 일본인의 검열을 통과해야한다. 이러한 일을 행하는 일본은 한국을 평화롭게 하기 위해 감옥에 있는 불평분자들에게 관용을 베푸는 제스쳐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토쿄에서 발행되는 영자로 된 ‘일본신문’(The Japan Advertiser)에 “영국거주민”이라는 제목의 기사에 따르면, “일본은 연합국의 요구에 직면해 있다. 그들은 부자이든 가난하든, 그리고 학식이 있든 무지하든 똑같이 그들이 요구하는 것은 단지 그들의 조국의 독립이다. 오늘날 지구상의 어느 곳도 한국에서처럼 자유가 없고 사람들을 억압하는 곳은 없다. 한국인들은 노예상태로 사느니 차라니 자유를 위해서 죽는 편이 낫다고들 말한다.” “영국거주민”이라는 기사에서는 ‘일본 군인들에 의해 한국인 희생자들이 고문을 받는 자세로 무릎을 꿇고 있고 마치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처럼 양쪽 팔을 뻗은 모습으로 박해당하는 한국인들에 대한’ 사진을 실어 놓았고, 일본 군 당국을 비난하고 있다. 심지어 일본 시민들조차 일본군대를 비난했다. “일본의 군법아래에서 한국인들은 봉사가 되어야만 하고, 귀머거리, 벙어리가 되어 일본으로부터 무방비 상태가 되어야만 하는 현실에서 한국의 전 지역은 신음하고 있다. 한국인은 일본에서 오는 검열되지 않은 신문을 읽는 것이 금지되어 있으므로 봉사와 같고, 폴란드의 최근 반란 소식을 들을 수 없으니 귀머거리이고, 자신의 감정을 자유로이 말할 수 없으니 벙어리이고, 조국을 점령한 군대 앞에서 비무장상태로 있으니 무방비상태라 말할 수 있다. 어떤 한국인도 자신이 있는 지역을 떠나서 일본으로 건너갈 수 없고, 통신문도 다 검열되고 있고, 사람들도 거리에서나 기차에서도 검문당하고 있다. 내가 직접 목격한 일인데, 서울 한복판에서 무장한 병사들이 평범한 일반 통행인을 붙잡아 조사하는 것을 본 적이 있다. “한국인들이 조직적인 저항운동을 했다는 것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가, 그것이 그들의 방책이었다. 그들은 비무장상태였고, 지난 3주 전에 서울에서 있었던 시위는 극단적이지 않고 절제가 있었고 “만세”라고 소리치는 것 뿐이었다. 이토(Ito)총리가 인터뷰한 것과는 달리 갑작스런 군사공격도 없었고 돌팔매질도 없었고, 화염병 투척도 없었다. 그들은 자기 몸을 돌보지 않고 오로지 “만세”라는 단어만 소리쳐 되풀이하여 외쳤다. 그러나 여기 서울 수도에서조차 외국인들이 지켜보는 아래에서 일본은 78연대 군인들을 무장시키고 한국인들의 비무장 시위를 위협하려 하고 있었다. “예를 들어, 지난주 토요일에 우리는 서울의 서부 외곽에서 총검으로 무장한 군인들이 300 여명의 사람들의 행렬을 총으로 위협하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그들은 영국인이나 미국인 거주자들의 정원을 통해서 도망가는 탈주자들을 추격하여 칼로 찔렀다. 우리는 야만적으로 구타당하고 체포되는 행렬의 사람들에게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들을 보았다. 나는 한 남자가 머리에 총대로 6번 정도 구타당하여 무의식의 상태로 누워있는 것을 보았다. 그의 옷은 피로 물들어 있었다. 밤에 무장한 군인들이 한국인 거리를 지나면서 주민들의 집을 가택수색을 하는 동안 거주민들을 겁주기 위해 총을 난사하고 다녔다 “수도 한복판에서 감시 하에 이런 일이 계속 되고 있으니 이 나라의 여러 다른 지역에서는 정도가 더 심하게 많이 나타날 것이고, 일부의 외국인들은 가슴이 찢어지는 비통한 장면을 목격할 것이다. 일본시민들은 그들 스스로 곤봉과 쇠갈고리로 무장하고 시위대를 위협하여 서울과 그 밖의 다른 지역에 추가적인 분노를 자아냈다. 그들의 시위는 자발적인 것이고 인종전쟁의 위협인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독립운동의 조직적인 위원회에서 발행하고 있는 매일매일 나오는 등사판 인쇄물에서는 소극적인 저항과 자제력을 조언하고 있다. 생각이 있는 지식인층의 관찰자들은 이러한 활동은 단지 시작에 불과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국 사람들은 예상치 않은 자제력과 조직의 힘을 분명하게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그들은 짧은 시간에 행진을 하고, 세금을 내는 것을 거부하고, 가게의 문을 닫고, 모든 은행에서 돈을 인출하고, 철도로 물건을 운송하는 것을 중단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반면에 정부는 굴욕적인 억압을 받는 것 이외에 어떤 정책이나 다른 계획을 가지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누가 이 나라의 여기저기에서 가해지는 폭력의 행위를 기록하고 있는가? 우리는 아르메니아를 안타깝게 생각한다. 그리고 우리는 서둘러서 여기에서 똑같은 경향속에서 떠다니고 있다. 넘쳐나는 감옥, 사나운 군인들, 부상당한 사람들로 넘쳐나는 병원, 이 모든 것은 정부가 어떤 행위가 일어나는 곳에 통제권을 상실했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이러한 현재의 상태에서 세 가지 원칙이 지켜져야 한다: “1. 야만적인 군대에 의한 억압 이외에 위로와 같은 치료책이 필요하다. 왜냐하면 독일의 방식은 이제 시대에 뒤떨어진 구식이기 때문이다. “2. 한국인들은 저급하고 제멋대로라고 하는 잘못된 표현을 즉각 중단해야만 한다. 동등한 시설을 제공하고, 일본인들과 동등하게 행정적인 대우를 받게 해야한다. “3. 한국의 폭동 뒤에 미국의 영향이 있다는 내용이 널리 퍼져 있는데 그러한 확신은 없어져야한다. 왜냐하면 그럴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3명의 영국 사람이 잘못 감금되어 그 중의 한 명은 일본 폭도 시민들과 무장한 군인들에 의해 심하게 맞았다는 얘기를 들은 적이 있나요? 그가 미국인이라고 생각하지 않나요? 일본의 지방신문이 외국인에 관하여 계속하여 악용하는 기사를 쓰는 동안에 이런 종류의 일은 많아졌다. “한국에 있는 외국인 단체는 중립적인 태도를 지키고 있다. 그러나 이 불운의 반도에 있는 무방비의 사람들에게 행해진 잔혹함에 대항하는 항변만 할 수 있을 뿐, 그저 눈 앞에 보이는 사건들을 목격할 뿐이다.” 한국에 있는 선교사가 보낸 3월 9일자가 적힌 한 통의 편지가 있다. 폴 젠킨즈(Paul B. Jenkins)라는 선교사는 밀워키의 장로교 목사로 종종 편지를 보낸다. 이것은 일본인의 검열을 피해 발송되어 중국으로부터 온 것이다. 이 편지는 그 상황의 종교적인 면에 대한 내용이 많으며, 특히 일본인들에 의해 사용되어진 보복 조치들을 다루고 있다. 그 편지는 “소극적인 반란의 일종으로” 황제의 자살을 다루며, 다음과 같이 덧붙이고 있다. “나는 이 지구상의 역사에서 과거 언젠가 이곳에서와 같은 똑같은 봉기가 있었는지 의아스럽게 생각한다. 그것은 나를 완전히 놀라게 했다. 전 황제의 장례식이 있기 몇 일전, 장례식 때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른다는 소문이 있었다. 그러나 그날 서울에서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1919년 3월 1일 2시 30분 탄원서가 33인의 지식층들 즉 장로교 목사, 감리교 목사, 불교계 대표, 두 개의 독립교회의 대표에 의해 총독에게 제출되었다. 33인은 수천 부의 유인물을 시민들에게 나눠주고, 서울의 파고다 공원에 모인 3,000 여명의 사람들에게 연설하고, 식당으로 걸어가서 경찰서에 전화하여 그들이 거기에 있다고 알렸다. 그들은 저녁식사를 하고 다시 경찰에 전화를 걸어 식사를 마쳤다고 말하고, 경찰에 의해 체포되었다. 3월 1일 토요일에 추도식이 있어서 문을 닫고 예배를 보고 있었다. 그러나 몇 마디가 들리고 마침내 만세 소리가 터져 나왔다. 경찰들은 와서 사람들을 내보내라고 명령하고 물론 그들은 밖으로 나갈 준비가 되었을때 그들은 나갔다. 여기는 기독교가 널리 퍼져있어서 다른 업무가 없다 해도 일요일은 기도하는 날이라 하여 조용했다. 월요일은 학생들, 대학밴드, 그리고 몇몇이 즐겁게 보내고 군중들이 모여서 노래하고 만세 부르고 경찰과 군인들은 흩어져서 다른 곳에서 만나기로 한 군중들을 잡으러 다녔다. 군중들은 소리높여 만세를 불렀다.추모비석들과 희생의 십자가들 프랑스 정치가 클레메뇨(Clemeneeau)가 말한 것을 인용하면 “위대한 군대는 죽는다”는 말은 기억할만한 하는 어구이다. 우리들은 고향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을지라도, 많은 사람들이 그들이 있는 장소를 더 좋아한다. 우리는 연합군이 회상을 위해 행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해야만 한다. 영국에서 제국전쟁묘지위원회가 전쟁 첫해에 희생자들의 무덤을 기록하고 표시하기위한 조직에서 성장했다. 뿐만 아니라 친적들로부터 질문에 답변하고 무덤의 사진을 보내기도 한다. 위원회의 최종계획은 구성원중의 하나인 럿얏드 키프링(Rudyard Kipling)에 의해 현재 런던 ‘데일리 크로니클(Daily Chronicle)‘지에 발표되었다. 그는 말했다. 제국의 모든 구역들은 비용에 대한 그들의 몫을 소유하기로 약속했다는 내용을 말했다. “이 휴식처는 모두 상상할 수 있는 장소로서 과수원과 초원, 게다가 대도시와 소도시, 마을에서 정글 숲에서, 항구에서, 섬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 모래 사막과 황폐한 좁은 골짜기. 전쟁으로 인한 수년에 걸쳐 언덕은 벗겨진 장소가 되어 버렸다. 그림 혹은 건축물에 의해 한결같은 형상들을 모두 감소시키기 위해 불쾌할 만큼 불가능 한 듯 하였다. “전쟁에서는 인간에 대한 존엄성 없이 국가가 전력을 기울인다. 장교의 묘지와 일반 사병의 묘지 사이에는 차이가 있을 수 없지만 우리의 전사자들이 어디에 누워있든 그들의 희생을 상징해야 하는 아이디어가 필요하다. 무엇보다도 인간의 예술품이 고안한 것처럼 각각의 공동묘지와 개인 무덤이 영원하게 만들어져야 한다. “위원회에서 어떻게 이러한 목표를 가장 잘 실현시킬 수 있는지를 보고하라고 프레드리 캐년(Frederic Kenyon)경에게 지시했다. 사회복지사업, 종교, 그리고 예술 분야의 대표자들에게 자문을 구하고는 특히 그러한 일을 수행하는데 노동력을 구하는데 한계가 있음을 알고 다음의 내용을 추천했다: “각각의 공동묘지에서 추모의 돌같은 제단과 희생의 십자가를 세워 두어야 한다. 무덤의 머릿돌은 같은 형태와 크기여야 한다. “임시적인 나무 십자가를 대신하기 위해 돌 십자가가 처음에 제시되어야만 했다. 그러나 무덤의 근처에 필요로 하는 작은 사이즈의 십자가는 그 사람의 이름과 묘비명을 쓸 공간이 충분하지 않고, 그것들의 모양 때문에 너무 약하고 오랜 세월 동안 이슬이나 날씨에 피해를 입기 쉽다. “보통의 묘석은 가로 1피트 3인치, 세로 2피트 6인치 크기로 된 돌이 선택 되었고, 그 위에 십자가나 죽은 사람의 신앙에 맞는 종교적인 상징을 새겨 넣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