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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701 김좌진·홍범도 부대 행동에 관한 보고서

    군정서에 관계있는 유력한 첩보자의 보고 요지는 다음과 같다.(본 정보는 주로 첩보자가 11월 14일, 황구령(현:중국 북동부)을 출발해, 청산리(만주 동부)를 거쳐 화용현 삼도구 대금창에 온 군정서 중대장인 오상세(吳尙世)로부터 얻은 것이다)1.김좌진(金佐鎭)의 부대(가) 김좌진(金佐鎭)의 부대는 11월7 일경, 황구령 부근을 출발해 오도양차(五道揚岔)에서 천보산 서쪽의 산맥을 거쳐, 치유댐에 나와 남하얼빈을 무사히 통과한 취지의 연락 통신이 있었다.( 당시 북하얼빈에는 일본 군대 토벌을 위해 출동하고 있었다.)위 통신은 11월 15일, 동 경찰서 모연대장인 김현묵(金玄默)이 한 것이어서, 참모장인 나중소(羅仲韶)는, 부하 2명을 거느리고, 변장해 판아코리(삼도구상마을의 동방 약1리(약 3.93km))에 있었다. 이 통신을 받고 즉시 치유댐(텐뽀우산의 서방 약4리)으로 향했다. (동지의 ●현(●鉉)의 친아우집에 있을 것이다)(나) 김좌진(金佐鎭)은 현재 연길현 춘양향 북삼차구(소삼차구라고도 한다) 부근에 집합한 마적단한테서 공동 동작의 신청에 의해 드디어 결의하고 이동하기로 했다. 이렇게 해서, 부대의 주력은, 무장하는 사람이 약 이백팔십명에 이른다. 그 외는대부분이 무장을 해제하고 집합하도록 명했다.(다) 황구령에 있어서는 이미 일본 군대가 청산리 오지에서 통로를 개방해 공격의 준비를 서두르고 있었기 때문에 끝내 동영 할 수 없었다. 영●과원(營●課員)(축성반)은 전부 해산(해산 당시에는 약 백오십명이 되었다)했다.(라) 군정서의 중대장인 오상세(吳尙世)가 인솔하고 있는 중대는 약 팔십명이 된다. 그러나 주력(김좌진(金佐鎭) 부대)의 출발 후 대원은 전부 무장을 풀고 청산리 방면으로 나와 삼삼오오 해산했다.(김좌진(金佐鎭)부대의 행동을 조사하기 위해서 북삼차구 방면으로 유력한 첩보자를 냈다)2.홍범도(洪範道)의 부대홍범도(洪範道)의 부대는 황구령 마을의 서북쪽 약4리에 있는 조선인 부락( 약 20호)에 있어서 한족회 부대의 집합을 기다리고 있다. 그 군인의 수는 부하 약 삼백오십명, 한족회 백사십명 내외이다. 이렇게 해서 홍은 그 후 김좌진(金佐鎭)과 행동상 서로 의견을 받아 들이지 못한 점이 있었기 때문에 다시 간도 방면으로 진출하지 않고 잉두산 방면으로 향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었다. 만약 상황이 이것을 수락하면 곧 바로 삼수갑산에 침입할 것을 결심하고 있었다. 홍은 이전 차도선(車道善)과 함께 장백무송방면에 근거를 두고 있던 관계상 창배하(蒼配下)의 와서 투신 할 사람은 적지 않다.3.북삼차구 방면의 상황북삼차구 방면에는 전에 보고한 강피리립포(姜)가 인솔하는 기병대가 다수 파고 들어가고 있다. 그리고 지나 마적단과 연합해 유세한 단체를 편성하고 있지만 그 마적은 몰래 지나측(장작림)의 후원이있다. 지난번, 영우탑방면에서 다수의 병기 군수 품등을 운반하고 있다.본건에 관해서 김좌진(金佐鎭)은 상황이 여기에 올바르지 않았기 때문에 드디어 여기에 연합할 것을 결의했지만 중국측이 마적과 함께 독립군을 원조해 일본 측에 맞서려고 하는 진심을 측정하기 어렵다고 내심 우려하고 있었고, 또 한 총재인 서일(徐一)은 비적과 행동을 같이 하는 것에 있어서는 독립군은 도적이라는 이름을 받는 것을 달갑지 않았다고 한다. 현재 시베리아는 일본 군대 철퇴를 의해 많이 활동의 여지가 있으므로 한때 동방면으로 이동해 시기를 기다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었지만 김좌진 부대의 이동에 의해 서일 이하 각 간부도 아마 북삼차구 방면으로 일시 집합해 마지막 협의를 할 예정이다.4.의군단 및 국 민회 부대의군단 및 국민회의 부대는 대부분이 해산했다. 삼도구방면으로 출몰하고 있던 안무는 현재 부대를 해산시켜 무산 간도 반동에 잠복 하고 있다.(끝)

    1702 조선총독부 보고(관동대지진 관련)

    이번 대지진으로 동경 및 요꼬하마의 시내 각지에 화재가 일어났고 그 중에는 방화로 의심이 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조선인 중의 불량분자나 일본내의 불량분자와 추사공모(追辭共謀)의 소행이라고 전해지고 더불어 조선인으로 강도 폭행을 행하고 있다는 풍설도 생겨나고 있으며 흥분하는 민중으로하여금 새로운 일대위협을 느낌과 동시에 분노의 극치 강렬한적개심을 불려일으켜 결국,민중은 각자 무기를 소지해 주야 자위에 임하게 되었다 그 결과 조선인 및 내지인(일본인)으로서 피해를 당했다고 하는 자 각현에 서 수십명에 이른다는 예상이다 정부는 지금 본건에 대해 극력조사중이며 이에 따라 불일 그 진상을 명확히 해야 한다고 하지만, 일시 혼란상태에 빠져있으므로 귀중품을 놓아야 할 이라고 하고 혹은 방화 혹은 폭발물을 소지 광분해 파괴을 계획 혹은 우물에 독약을 투입해 그 대로 강도, 강간, 살인등의 의혹이 있는자 헤아릴수없게 있어 정부는 계엄령의 실시와 동시에 불량분자 모행의 경계단속으로 엄중히하고 일반 조선인은 수행하여 일정 장소에 수용해서 보호를 하여야 한다고 유고를 발해 민중은 무기의 휴대를 금하고 또한 공적 제재를 기다리지 말고 돌이키건대 박해를 가하는 것은 안된다고 하기 때문에 인심은 점차 안정된 경향으로 가고 있다고 동포의 대

    1703 조선노동총동맹 수발문서

    지난달 한국의 고 황제의 출장(出葬) 때 한국의 민중들이 참가하였다가 일본 경찰에수 백명이 체포되어 간 사실을 우리나라 사람들이 듣고 모두 공평치 못하다고 여겼다. 우리 이곳의 각 단체들도 대부분 전보를 보내 원조하였고, 중화전국총공회에서도 어제 전보를 보내어 국민들에게 알리고 함께 일어나 원조하자고 하였다. 그 전보는 다음과 같다.

    1704 북경 한인 대일본 의회 경고서

    지나 북경(北京)에 재주하는 일부 불령조선인은 일본의 조선통치 및 대 지나 정책에 관하여 중상비난을 꾀하며 일본의 조선통치기관 철퇴를 요구하는 의미의 불온문서를 인쇄하여 이를 귀중 양원 그 밖에 배부하려는 계획을 하고 있는데 그 원문은 별지 복사와 같다.때를 알고 지략을 사용하고 변화에 따라 처리하는 것은 재주와 슬기가 뛰어난 사람에게만 볼 수 있으며 아직 일어나지 않은 일을 미리 의심하지 않고 확실히 알아 용감하게 판단하는 것은 현명하고 지혜로운 일이다. 현재 20세기에 처해 있으면서 19세기 이전의 정략을 답습하고 있는 까닭에 나는 우리 민족을 위해서 슬퍼하고 또 일본의 앞날을 위해서 슬퍼한다. 이것은 나 한 개인의 말이 아니다. 즉 2 천만 민중의 마음속에 있는 진실한 말이다. 일본을 위해서 충고한다. 바라는 것은 일본은 반성하고 함께 복을 누릴 것을 희망한다. 다만 현실 정치를 떨쳐버리고 거역하고 침략으로 부딪히고 어긋나니 옳은 정의는 받아들여지고 베풀어지기 어렵다. 이러한 사태는 세계의 대의이고 사리는 필연적이며 불을 보는 듯 밝다. 비록 가리고 막고 한쪽으로 치우쳐 기대고 있어도 어찌 이를 모르고 행한다고 하겠는가? 만약에 능히 분발해서 용감하게 그 가운데 뛰어들어 자신을 버리고 무리를 따른다면 전화위복하게 되고 위태함을 되돌려 안전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렇게 할 사람들이 없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에 감히 승리를 원하는 일반적인 감정으로 억측하고 판단해서 스스로 막지 못한다. 일본은 50년의 문명을 모아 부강을 얻고 한국을 합병하고 이 대세를 틈타 함부로 병력으로 지나를 간섭하였다. 겉으로는 친선을 빙자하고 속으로는 침략을 팔고 명분을 빌어 회유하고 꾀어 잔인하게 살해를 자행하니 개인과 개인도 서로 더불어 믿음을 세우지 못하는데 하물며 나라와 나라간의 국제관계에 이래야 하는 것인가? 이미 완전한 독립과 강토의 완전한 보존을 세계만방에 성명하였는데도 일본은 부지런히 박차를 가해 합병을 하니 그 위엄과 신의를 어찌 논할 수 있겠는가? 미개한 민족이 욕심이 많으면 깃털처럼 바람이 부는 대로 날아간다. 야만스럽고 우매한 사람은 다만 덕교로서 감화시킬 수 있다. 5천년 신성하고 빼어난 민족에게 갑자기 야만 민족의 식민정책을 가하였다. 일본이 합방하는 날은 바로 우리 민족이 도태되는 때이다. 이것은 본래 자연의 섭리이다. 향기가 나는 풀과 악취가 나는 풀 즉 선과 악 그리고 얼음과 숯이 서로 동화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비록 자연스럽게 좋고 아름다운 정치를 베풀 수 있도록 하였으나 비탈길을 가는 대세이기에 일본의 길은 진실로 말로라 하겠다. 우리 민족은 이와 같은 참담한 액운을 만나 하소연할 데가 없다. 특히 일본위세에 눌러 일시에 겉모양이 비록 태연작약하나 그 고통당하고 원통함과 혹독한 진상은 날로 심해간다. 대저 사람을 대할 때 칼 톱 가마솥 초개 어육 등 하찮은 것을 대하듯 하면서 기쁨으로 진심으로 복종하기를 기대한다. 고금 세계 어찌 이와 같은 이치가 있겠는가? 이로써 민족문화의 발전을 저지하고 민중이 진취하는 생기를 가로막아 불량하게 하고 강도로써 보며 잔혹한 형벌로 박탈당하고 죽은 생명은 몇 십만이 되는지 알 수가 없다. 또 여러 가지 세금과 혹독한 형벌을 무겁게 하여 백성들이 그 명령에 견딜 수 없어 늙으신 부모와 어린 자식을 데리고 남북으로 흩어지고 눈에 가려서 잘 보이지 않은 한적한 거친 곳에서 갖은 풍상고초 고생을 골고루 맛보며 해를 거듭하면서 와신상담하니 어찌 시시각각 원수 오(吳)나라를 잊을 수 잊겠는가? 오히려 피를 흘려 노동해서 남은 여력으로 학교를 건설하여 자제들을 교육하고 기르니 그 고심은 지극한 충심에서 우려 나온 것이어서 가련하고 측은하기까지 하다. 진실로 일본에게 무엇을 저버렸기에 우리에게 무력을 일으켜 갑자기 학살을 더해 무고한 노인 어린이 부녀자들로 하여금 화염과 총칼 화살 아래서 죽는 힘을 다해 안간힘을 쓰도록 하는가? 이러한 상황에서 참아야 하는가 아니면 참지 말아야 하는가? 이 때문에 온 민족 가슴에 슬픔이 골수에 사무치고 살자니 설 땅이 없고 죽고 싶어도 죽을 수 없으며 암담한 궁지에 몰려 있으니 이 한을 품고 어디로 돌아간단 말인가? 대저 같은 아시아 주, 같은 황인종으로서 마땅히 백인의 침략을 막아야 하는 것은 우리민족의 자연스러운 야심이다. 그러나 일본의 정치 말살참극이 이와 같이 극에 달하니 만일 일본과 러시아가 전쟁한다면 우리는 러시아를 동정하지 않을 수 없고, 일본과 미국이 서로 전쟁한다면 미국편에 부합하지 않을 수 없다. 아, 이것이 어찌 우리민족이 원하는 바이고 본래 갖고 있는 감정이라 하겠는가? 누가 우리를 이렇게 만들었는가. 더구나 이렇게 만든 것은 제 3국이 아니다. 전쟁을 즈음해서 온 민족이 철저히 단결하여 다만 죽을 목숨을 다해 피로써 독립을 바꾸었다. 특히 우리에게는 힘이 부족하기 때문에 그 시일만이 문제가 될 뿐이다. 지금의 힘의 형세로 본다면 강자와 약자가 너무 다르다. 그래도 차라리 저항하고 배척하겠다. 지극히 어리석음과 망령되다 하여 멸시한다든가 또는 자신의 힘을 헤아리지 못함에 대해 분히 여기고 탁식하지 않겠다. 그러나 수중에 한 치의 무기도 없는 백성이 어찌 능히 강한 저 진나라를 밀어 쓰러뜨릴 수 있겠는가? 2천만 민족은 진실로 피로써 자유를 위하여 상환하니 필경 어리석고 망령된 이름은 한민족에게 돌아가지 않고 일본에게 돌아갈 것이다. 그때 웃을 여유가 있겠는가? 하루아침에 단호히 찢어져 그 대세는 막을 수 없은즉 어찌 우리민족은 총칼의 혼이 되어 불행하고 처절한데 일본의 장정들에 대해서 부녀와 어린이들은 그 이유를 돌아보지 않고 불쌍히 여기는가? 비록 일본은 생명을 희생시켜 현재 전략을 유지할 수 있는데서 양심을 구한다 하여도 절대로 그렇게 되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그 결과는 바닥에 이르지 않았는가? 일본은 이와 같이 처참한 상처를 입고도 단지 큰 좌절만 있었을 뿐이다. 우리의 궁극적인 독립과 자유를 부득불 일본에게 완전히 헌납하게 된다면 이 어찌 상식을 지니고 양심을 갖은 자가 능히 참을 수 있는 것이겠는가? 지금 필리핀, 이집트 연이어서 독립하고 아이랜드, 인도는 적극적으로 독립을 주장한다. 시대 흐르는 추세와 풍조가 날로 빨라져 막을 수가 없다. 무릇 세계적인 안목을 갖고 있는 사람은 세계의 추세와 그 방침을 헤아릴 수 있다. 대저 일본은 우리에게 처음에는 기만하고 그 다음 합병하고 그 다음은 회유를 빌었고 그 다음은 업신여기고 학대하고 불량배와 강도가 되어 다스릴수록 복잡해졌다. 2천만 민중은 이 2가지 명목 외에 일본 선량한 사람에게 할 말이 없다. 여기에서 다만 일본의 정치 기술은 좋다고 할 수 없을 뿐이다. 대저 사람은 통치하는 지위에서 장악하고 조종하는 위력과 감화시키는 힘으로 족히 백성들이 안정되도록 진압할 수 있고, 덕 은혜 상으로 족히 장려하면서 회유할 수 있다. 그러나 10여년 성적이 졸렬함이 이와 같다. 비록 통치의 권력은 있다 하겠으나 통치의 힘은 없었음을 우리는 미루어서 짐작할 수 있다. 헛되어 우리 민족에게 가혹하게 하고 생명을 죽이고 상하게 하였다. 필경 전쟁이 폭발하는 그 날 양국은 극심한 화염에 싸여 감히 상상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어찌 때를 알고 재주와 슬기가 뛰어난 사람과 당국의 명석한 지혜로도 이러한 미래에 미치지 못할 수 있다는 것인가? 이 때문에 여전히 쭈그리고 앉아 연기를 무릅쓰고 계속 부지런히 땔감을 더하면서 불을 더욱 타오르게 하여 참극의 토대를 만들려는 것인가? 우리 민족 역시 피 외에 계속할 것이 없고 다른 방법은 더 말할 필요도 없다. 우리 민족이 피를 흘리는 순간 일본의 백성들의 생명과 영혼이 안전한 복지를 누릴 수 있겠는가?생명으로써 자유를 되갚으니 차라리 교섭해서 국위를 손상시키지 않고 확고히 용단을 내려 세계의 선구자로서 주장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1918년 합병체결에 대해 총독이하 일반 정치기관은 일제히 철회하면 기왕의 과실은 일월이 바뀌듯 여기겠다. 세상 사람마다 우러러 볼 것이며 우리 민족 역시 옛 악행을 기억하지 않고 해결하여 모두 기뻐하며 손을 잡고 앞으로 나아가면 동양 3국 정족처럼 설 것입니다. 전쟁을 일으켜 서로 원한을 품고 붕괴되면 때가 늦어 화가 크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양국이 교섭하게 되면 이 어찌 양국의 영원한 복지가 아니겠으며 또 어찌 동양 전국의 복리가 아니겠는가?

    1705 결사대 복장 등에 관한 건

    1706 국회의 조선독립 제안 기사 송부의 건

    졸전 제261호에 관한 신문기사 발취 별지를 위해 참고 및 송부하는 바이다. 사열하도록 이번 기회 말씀드리는 바이다. 경구본신 송부하는 곳 북경(北京), 상하이(上海), 조선

    1707 여운홍 행동에 관한 보고의 건

    졸전 제112호에 관해 본관은 그저께 진성장(陳省長)을 방문하여 엄중히 단속하도록 요구하는바 그 성장(省長)은 본관에게 실은 여운홍(呂運弘)의 형 여운향(呂運享)은 작년 장주(漳州)로 와서 자신을 알리기 위한 관계상 이번에 여운홍(呂運弘)은 형 여운향(呂運享)의 소개장을 가져오게 하여 당지에 와 자기에게 회견을 청하였지만, 자신은 회견을 거절하였다. 여운홍(呂運弘)이 광동(廣東)에 온 목적이 지나 부근에 있는지는 몰라도 광동(廣東)의 현재 상태를 보고서는 조선인 원조라는 생각이 이르러 만일 여운홍(呂運弘)의 거동이 불온할 경우에는 충분히 단속을 가해야하는 취지를 요구했다. 또한 여운홍(呂運弘)은 그곳 유력자에게 별지복사와 같은 인쇄물(임●생 입수)을 제출하여 상하이(上海) 조선인 학교 등 건축자금 기부를 요구하고 있는 모양이지만 지나인은 여운홍(呂運弘)을 귀찮은 존재로 보고 회견을 피한다고 불평하는 일도 있다. 또 야마다(山田)를 중개로 손문(孫文)이 주의를 환기시키는바 손(孫)은 야마다(山田)에 대해 여운홍(呂運弘)은 아직 자신에게 회견을 요구하지 않았다. 이를 요구하더라도 자신은 회견하지 않을것이다. 현재 일본의 오해를 불러일으킬 것 같은 행동을 자신은 결코 하지 않을 것이라고 명언하는 취지이다.위와 같이 보고하는 바이다.경구본신 복사 송부장소 북경(北京), 상하이(上海), 조선

    1708 북경 보황당 조직설에 관한 건

    아세아국

    1709 천진 대한교민단 활동에 관한 보고서

    당지 불조계(佛祖界)에 산재 하는 불령 조선인등은 8월 29일 한국 병합 기념일에 즈음해, 별지와 같이 천진대한교민단(天津大韓僑民團)장의 명의로, 직접 쓴 불온문서를 일부 조선인의 사이에 배포했다.  그러나 실제로 휴업 또는, 회합등을 하지 않은 것을 보아 일반적인 통고에 지나지 않는 것이므로, 아무런 반향도 없는 것이라고 생각 되어 집니다. 지난번에 보고 드렸던 상하이 에서 9월 1일부터 개최할 예정이었던 국민 대표 회의에 그 곳으로 부터의 출석의 유무에 따라 세심한 주의를 하였으며 오늘에 이르러도 출석의 모양이 없고, 어느 조선인의 말에 따르면 지금은 생활난에 쫓겨 분주히 할 여유가 없기 때문에 본회의는 완전히 실패에 돌아갈 것이라고 이야기 했습니다. 위 내용을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 삼가 말씀 드렸습니다  본신송부선 재 시나-중국공사(在.支那.公使)、조선총독(朝鮮總督)、재 상하이 총령사(總領事) 조사를 했는데「한민성(韓民聲)」이라는 인쇄물은 상하이에서 만들어 당 지방에 보내져 왔다고 말씀 드렸기 때문에 본관은 이「한민성(韓民聲)」은 등사판인쇄로 그 곳에서 인쇄된 것이 확실한 것이라고 하자 동 영사는 본관으로부터, 이「한민성(韓民聲)」의 송부를 요구해 한편 불조계(佛祖界)에 있어서의 불령 조선인의 단속에 정정진력(精精盡力)을 다한다 라는 것, 본관은 즉시「한민성(韓民聲)」을 동 영사에게 송부했는데, 오늘 당 관할 경찰의 보고에 의하면, 지난 21일 불국 경찰관은 동 조계 내에 거주의 불령 조선인 김정방(金政方)을 덮쳐 등사판을 압수 하고 김을 인도했는데 그 후 김은 어떤 약속을 해 석방했다는 것입니다 「한민성(韓民聲)」제 2호 그 후 입수 했으므로 별지에 첨부하겠습니다. 이상, 보고하겠습니다      삼가 말씀 드렸습니다 본신복사본 송부처

    1710 중국 신문 한인활동 보도기사

    저는 호북(湖北)에서 왔습니다. 각계의 열렬한 환영을 받으니 정말 감격스럽습니다. 저는 지난해 12월에 한구(漢口)에 도착하여 호북성 각계와 중한호조회(中韓互助會)를 발기했습니다. 창립 당시 2백여 명의 회원이 있었으며 본인도 호조회의 회원입니다. 이번에 귀지(貴地)에서 교섭하기 위해 세 사람이 함께 왔습니다. 호조회는 발기 이래 하루가 다르게 발전하고 있습니다. 금년 3월 1일 한구 중한호조회의 회원들이 제3차 한국독립주년기념회를 열었습니다. 그날의 떠들썩함은 여러분도 다 아실 터이니 세세히 말하지 않겠습니다. 그중에서 가장 의미 있는 일은 전단배포였습니다. 우리 회원들이 자동차에 나누어 타고 각 조계와 여러 번화가 그리고 일본의 조계까지 가서 전단을 두루 돌렸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의 발양된 민기(民氣)를 보고 두려워하며 어쩔 줄 몰라 했습니다. 우리의 사기(士氣)는 그 어떠한 장애도 멈추지 못하는 행동이라는 것을 여러분께서는 알아야 합니다. 귀국이 적국의 상품을 배척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팔을 높이 들고 소리치면 산악이 울립니다. 비록 기간은 오래지 않지만 사람들이 간접적으로 입은 손실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각계의 열성은 오래가지 않았습니다. 일시에 사기가 흩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일본이 또 다시 이익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이에 제가 귀국을 대신해서 발을 동동 구르고 가슴을 칩니다. 우리가 조계에서 전단을 돌리고 있을 때 60세 남짓한 노인인 대한민국만세를 소리 높여 외쳤습니다. 이를 통해 한국인을 돕고자 하는 귀국 사람들의 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가장 힘이 되는 것은 우리 한국국민에게 동정을 표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 한국국민이 자주독립을 할 수 있다는 사실에 공감하는 것입니다. 강권과 군국주의를 타도해야 하고 또 한국인이 받고 있는 극심한 고통을 참을 수 없어 구국인(救國人)들도 기회를 봐서 저항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한 귀국의 공감은 매우 큰 가치가 있습니다. 제가 처음 호북에 도착했을 때 호북 사람들은 호남 사람들의 문화운동에 대해 중국에서 가장 진보적이고 가장 영향력이 있는 것이라 말했습니다. 그리고 저에게 귀성(貴省)의 각계와 교섭하라고 했습니다. 배를 타고 오면서부터 귀성 사람들을 보았는데 아주 질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또 배에서 내려 여러 곳을 참관하면서 호남 사람들은 매우 용감하고 능력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각계의 언론도 자치(自治)의 선도자로서 매우 적합합니다. 농공상학(農工商學) 각계도 과거보다 훨씬 더 진보했습니다. 각계로부터 환대를 받으니 형제를 보고 있는 기분입니다. 하지만 순간 저는 사고무친(四顧無親)의 고통을 느꼈습니다. 정말 만 배로 상심했습니다. 저는 원래 우리나라에 대한 일본의 악정(惡政)에 대해 말하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목이 메고 눈물이 흐르고 무한한 상심이 마음속에 사무쳐 대신 이군에게 자세한 얘기를 계속 하라고 청할 수밖에 없겠습니다.(미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