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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한민국임시정부

    콘텐츠/대한민국임시정부 [] 에 대한 전체 277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41 임시정부령 제1호(3)

    납세를 거절하라. 적이 폭력으로 우리 국토를 점령한 이후 우리 국민은 적에 의하여 무력으로 민족적 결합의 기회를 박탈당하였고, 10년동안 적의 횡포 하에 노예의 생활로 굴욕을 참고 견디어 왔다. 이제 우리 국민은 민족적 단결과 정치적 통일을 완성하고 하루 빨리 적의 노예가 아니라 당당한 독립된 조선국민으로 적의 지배에서 벗어나야 한다. 납세는 국민의 국가에 대한 의무이고, 이미 정식으로 적의 통치권을 부인한 이상 적에게 털끝만큼의 조세도 납부하지 말라. 국토를 완전히 적의 군대의 손에서 구출할 때까지 일체의 조세를 면제한다. 가령 적의 관리가 납세를 강요하여도 "우리는 조선국민으로 일본의 노예가 아니다"라고 강경하게 거절하여야 한다. 이에 모두가 단결하고 마을이 단결하고 면이 단결하고 군과 시가 대단결을 하여 죽을 각오로 이를 거절하여야 한다.

    242 임시정부 모험대 파견에 관한 건

    경시총감(警視總監)이 국장(局長)에게 보냄

    243 대한민국임시정부 특파원 연설 및 삼일운동2주기기념일기사(2

    대한지사가 호남에서 연설 불쌍한 사람의 상심한 말 실로 매 마디마다 눈물이 쏟아집니다. 대한(즉 조선국)은 원래 중국의 부속국이였습니다. 지금은 비록 일본에 의해 병탄되였으나 항상 회복을 도모하는 의지를 품고 있습니다. 그 임시정부가 상해의 모 조계에 설치되여있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어제 이약송(李若松),이혜춘(李兮春),황송우(黄松友) 세 군이 상해로부터 호남에 와서 각계인사들과 미리 합의하고 또한 이를 빌어 감정 연계도 하려고 하였습니다. 하여 통속신문관(通俗报馆)은 세 군을 특별히 초청하여 이 신문관에서 연설하게 하였고 서양음악을 준비하여 환영의 뜻을 표하였습니다. 그 당시에는 도로가 붐비었고 먼저 온 사람들만이 착석하여 들을 수 있었습니다. 늦게 온 사람들은 앉을 자리조차 없었습니다. 통계에 의하면 약 800명 정도가 왔는데, 이후로 오는 사람들도 끊이지 않았습니다. 소재지가 너무 좁은 제한을 받아 참가할 기회가 없음을 탄식하였습니다. 우선 주석이 한국의 역사와 지리에 대해 소개하셨고 다음 이군(李君)의 연설과 황군(黄君)의 연설이 있었습니다. 주석이(연설내용을) 한국어로 번역하셨습니다. 청취자들의 환영의 마음을 저버릴까 두려워 그의 언어는 너무도 자세하였습니다.(혹은 그의 목소리는 너무도 가늘었다고도 이해할 수 있습니다.) 때문에 이군(李君)이 다시 연역하였습니다. 이군(李君)은 중국어가 능란하였고 어조도 격앙되었습니다. 우선 이군(李君)의 연설은 아래와 같습니다. 제가 이번에 호남에 왔는데 환영이라는 두글자를 받기에는 실로 황송합니다. 여러분의 이러한 초대를 받기에도 실로 부끄럽습니다. 저는 한국이 바라는 것을 여러분에게 알려드리려고 합니다. 일본이 한국을 병탄한 뒤부터 모든 영향은 다 중국과 관련되어 있습니다. 제가 이번에 호남에 온 것은 우선 상황을 보고하려는데 있으며다음으로는 귀국의 방조를 청하러 왔습니다. 저는 매우 간절한 마음을 품고 왔습니다. 하지만 저는 망국인입니다. 망국은 슬픈 일이나 망국에서 회복할 수 없는 일이 더 슬픕니다. 비록 중국은 지역이 광대하고 인민도 아주 많지만, 망한다면 아주 빠르게 망할 것입니다. 저는 항상 중국 국민이 우리 한국 망국의 고통을 본으로 삶고 각자가 애국의 마음을 품어 소수의 매국노에 의해 잘못되지 않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은 원래 중국의 한 부속국이였습니다. 교통이 불편하였기에 두 나라로 나뉘여졌습니다. 한국이 망하면 중국이 망하는 것과 같다는 것을 반드시 알아야 합니다. 우리 모두가 한국은 본보기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오늘 저는 여러분의 환영을 받고 이 정경을 보니 감정이 일고 저도 모르게 아픔도 늘어가고 있습니다. 하여 저도 이 이상 말을 이을 수가 없습니다. [이군(李君)은 여기까지 말하면서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리고는 다시 말을 이었습니다. 저는 이미 28살입니다. 10살 때부터 나라가 망하여 많은 사람들이 함께 대화할 수가 없었고 결사의자유, 인쇄의 자유, 행동의 자유도 없었습니다. 오늘 여러분 수백 명이 함께 모여서 자유럽게 행동하고 강연을 듣는 것을 보니 참으로 천당과 지옥의 차이와 같습니다. 저는 항상 여러분이 자유를 영원히 간직하기를 바랍니다. 타인에 의해 멸망한 후 자유를 추구하려면 절대로 않될 것입니다. (미완)

    244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일 항의 공문

    각하께 삼가 아뢰옵니다. 온 세상이 합력하여 일본을 쓰러뜨리니, 3개 도시가 불길에 휩싸이고 모든 것이 거의 사라졌다는 소식에 아군과 적군을 떠나 안타깝기 그지 없습니다. 이런 때가 올 것이라고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사람들은 살기(殺氣) 일어 천재지변과 화를 한국인에게 전가하여, 방화자도 한국인이요, 폭탄을 투척한 자도 한국인이라고 하며, 군사를 일으키며 전쟁을 선포하고 큰 적을 만난 것 같이 민군(民軍)을 부추겨서 무기를 들게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노인, 어린아이, 학자, 노동자 할 것 없이 한국인을 대량 학살하였으며, 물 불 가리지 않고 한국인을 찔러 죽였습니다. 9월 1일부터 7일 동안 무고한 한국인이 하루에 50명씩 난살 당하였고, 강제로 징병 당한 사람은 이미 1만 5천명을 넘어섰습니다. 중국과 외국 기자들은 실황을 보도하며 한국인을 옹호하는 기사를 썼으나, 이 사실을 누가 믿을 수 있겠습니까. 광분한 민중들이 사람들을 함부로 공격하였다는 보도를 보고 누가 용서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 정부는 침묵하고 있을 수 없어 그 적군과 전쟁을 일으키려 합니다. 법은 지키라고 존재하는 것인데, 그렇게 재민(災民)을 잔인하게 죽인 것은 사람이 할 짓이 아닙니다. 하물며 이렇게 재해 지역에 있던 한국인은 홀홀 단신 그 곳에 남아 돌아오지도 못 하고 살 길을 모색하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전쟁 상황에 있어서도 안 되고 죽임을 당해도 안 되는 사람들인데도 불구하고, 전쟁을 하고 죽였습니다. 이는 만행 중에서도 극악무도한 만행이니, 천벌을 받아야 마땅합니다. 사람에게 동정을 바라면서도 스스로 사람을 배척하니, 이는 천성이 도전자인 것이지요. 본 정부는 일본인민을 위해 슬퍼하고 애통하는 바인데, 한국인에게는 오죽하겠습니까. 바라건데, 속히 태도를 고치기 바랍니다. 조금의 지체도 용납하지 않으니 이 서신을 받은 지 5일 내로 모든 항목을 따로 기록하여 조사하여 밝혀 내십시오. 본 정부의 항의하는 바는 다음과 같습니다. 1. 불법 강제 구금 당한 1만 5천명의 한국인을 즉시 석방할 것. 2. 모든 재해구역에 있는 한국인의 생사 여부와 성명, 연령, 주소, 업적을 조사하여 발표할 것. 3. 한국인을 잔인하게 죽인 무리들을 관리들에게 묻지 말고 엄중히 처벌할 것.

    245 신한독립당 활동 및 일화 배척 운동 보도기사

    민보 3월15일

    246 상해임시정부 경고문 제1호(신협주보)

    신협주보(新協宙報) 상해 임시정부 조선통신국 아, 한반도여! 우리 3천리 반도여! 아 동포여! 우리 2천만 동포여! 우리 2천만 동포가 건재하다면 우리도 건재하고 걱정 없이 무사하고 평안하다면 태평하다고 할 수 있도다. 확실히 태평한 시대가 왔지만 태평은 다른 곳에 있지 아니하다. 태평양회의가 열린다고 한다. 이번 회의는 세계를 개조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우리 대한동포도 일시에 재생하는 기회를 얻게 되나니, 사랑하는 우리 동포에게 한마디 경고를 하는 바이다. 금년 11월 11일은 이미 내외의 신문지상에 보도되어 모두들 알고 있는 바와 같이, 태평양회의를 개최하고자 세계의 열강 및 동서의 약소국가가 각자 평화롭게 생활하고자 "워싱턴"을 무대로 열정적으로 고군분투하며 준비 중이다. 아! 오직 우리 동포는 꿈속에서 깨어 분성(의미불명) 경무(庚戊) 8년 9월 11일이 도래하여도 아무 것도 모르고, 반만년 역사의 우리 조상이 지하에서 신음하고 3천리 우리 금수강산이 색을 잃어도 방관만 하고 있도다. 재산이 있는 자들은 술과 여자를 가까이하며 불량하고 방탕한 생활을 하고 있고 돈을 물쓰듯 하고 있다. 배고픔과 추위를 인내하고 강토를 생각하며 동포를 사랑하여 천신만고를 감수하는 그 사람에게는 한 그릇의 식사도 대접하지 않으며 상호 비평하고 있다. 이윽고 일본화(日本化) 된 자들이 동포를 체포하여 원수들 앞에 공헌하고 있어 이는 짐승만도 못한 짓에 억 천만년을 통탄할 일이다. 옛날 중국에 월(月)나라 구천(句踐)이라는 왕은 적국에 잡혀서 석실에서 3년 동안 지내며 분(糞)까지 맛보다가 본국으로 돌아가서 힘을 키워 복수를 하였다고 한다. 현상황에서 우리 동포들은 실로 구천이 당한 시대와 비교할 수 있어 우리는 망했다고 말 할 수 있다. 임금에서부터 백성에 이르기 까지 분(糞)을 맛보고 있는 것이다. …(원본판독불가)…마관(馬關)조약 이후 우리들은 세계 여러 곳에서 언론을 요구하는 증거가 충분하여 대한민국 원년 3월 1일부터 이후 대한(大韓)은 확실히 탄생하였음을 세계가 공인하였다. 우리 이천만이 자각하여 각자를 인식해야 한다. 대한의 독립을 객관적으로 보지 않고 각자 자기 집이라는 생각을 능히 가지고 자신의 역량을 한사람 한사람에 이르기 까지 피눈물 나는 용력(勇力)을 분발하는 것이 필요하다. 적국이 우리나라를 침략하기 위해 피를 흘린다면 우리도 피를 흘려야만 한다. 가능하다면 천리(天理)를 중시하여 역지사지하는 정신으로 일장(一場)의 만세를 외쳐서 대한독립이 가능하다면 이것이 천리(天理)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이번의 태평양회의를 기회로 하여 이천만이 상응하며 서로 구하여 지식 있는 사람은 지식을 희생하고,금전(金錢)이 있는 사람은 금전을 희생해야 한다. 지식 및 금전이 없는 사람은 신체를 희생하여 각자 국민의 의무와 책임을 다하여 전진할 것을 상제(上帝)에 맹세하여야 한다. 그 후에 이설(李卨) 씨와 안중근(安重根) 씨의 의용심(義勇心)을 한층 분발시켜 이완용(李完用)의 머리를 북문에 걸고 왜인(倭人)의 목을 남산에 걸어야 한다. 태평양회의가 정직하고 태평하게 된다면 금강산의 눈 위에서 선조의 혼령을 위로하며 자손의 행복을 바라는 것은 인류라면 당연히 이루어져야 한다. 또한 행복을 바라는 동포는 자각자성(自覺自醒)하여 만강(滿腔)의 붉은 피를 흘리며 와신상담의 의지를 가지고 전진해야만 한다. 동포여, 동포여

    247 북경독립당 및 천진한민회 격문

    총론(번역문) 우리가 가장 경애하는 동포에게 대성 통고한다. 우리가 외적에게, 대항하기 위하여 다른 것을 돌아볼 필요 없이 먼저 당파를 둘러싸고 논쟁을 벌일 여유가 없다. 지금 구미의 풍운은 눈깜짝할 사이에 변화를 거듭하고 있고, 동서의 벼슬아치들은 한데 모여 절충을 꾀하려는 우열경쟁의 상황에 직면하여 존망성패의 위기에 처해있다. 이러한 때 당파의 폐해를 걱정하여 대책을 강구하여야 한다. 중국이 변화의 지역으로 열강의 지배를 우려하는 것은 남북의 총통과 군벌의 당파가 자살적 원인은 아니지만, 부에루스 화의에 실패하면 임명자 등이 반목하게 되고, 미국이 필리핀의 독립을 허용하려고 그 독립의 성패를 모 장군에게 시찰하게 하였지만 해당 장군은 미국정부로 ●고 하였다. 필리핀이 독립하기 어려운 것은 첫째는 자국의 당파 싸움이고, 두 번째는 국방이 없으며, 세 번째는 재정이 없어 나중에 미국의 도움으로 조성되었지만, 중요한 것은 먼저 필린핀이 자각하지 아니하면 불가능하다는 것은 여러분들도 익히 알고 있을 것이다. 태평양회의를 목전에 두고…(원본판독불가)…외교에 이를 때까지 실패를 하여서는 아니 된다. 따라서 대성 통고하는 바이다. 우리의 가장 경애하는 동포 여러분! 공정한 관찰로 일의 선후와 사실의 진위를 판별하여야 한다.

    248 임시정부 자금모집 계획 및 감사장

    대정 10년 10월 3일 접수 아세아국 제3과

    249 조선 임시정부 성립

    조선 임시정부 성립 (1919. 3. 1) 1. 조선독립운동폭발 1919년 3월 1일에 조선 전 민족이 단결해 일어나서, 조선의 자주독립임을 쟁취하라는 만세소리가 뇌성벽력(雷聲霹靂)처럼 3,000리 금수강산을 움직일 때, 우리 조국이 일본 군국주의 강도들에게 강탈되는 전후시기에 망국의 원한을 가슴에 안고 사랑하는 조국을 등지고 멀리 국외로 떠나서 이국(異國) 각지에서 동분서주(東奔西走)하면서 조국의 자유해방을 위해서 끊임없이 투쟁하던 애국지사 선배들이 중국 상해 법국 조계에 집중해서 혁명적 “임시 정부”를 건립하였는데, 그때로부터 조국내지와 비밀 통신량이 끊임없이 통과되었다. 그때에 나는 “3. 1” 운동이 폭발한 뒤에 정치 조직의 지하운동에 투입(投入政治組織地下運動)하였다가, 그해 6월에 “상해”로부터 귀국한 조용주(趙鏞周) 동지와 동행해서 “상해법국조계”에 갔었는데, 그때 이미 “임시정부와 임시의회”(臨時政府臨時議會)가 건립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임시정부” 각원 명단과 “임시의회” 의회 명단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250 中國護法政府承認 韓國臨時政府 始末實記(중국호법정부승인 한국임시정부 시말실기)

    緖論 제1차 世界大戰이 終結되었을 적에 美國大統領 ‘월슨(W. Wilson, 1913~1921)은 民族自決을 提唱하는 동시에 汎太平洋會議를 召集하여서 民族 問題를 解決하고자 하였다. 이 風聞이 傳播되자 全地球에 響應하여 모든 被壓迫民族은 이 提唱을 經典으로 받들어 獨立의 自由를 恢復하고자 圖謀한 것이다. 韓國은 오랫동안 日帝의 酷毒한 壓制를 받아서 일찍이 水火之中에 있었으니 苦病을 당한 것은 其他 弱小民族과 비할 바가 아니었다. ‘월슨’의 民族自決論이 한번 提出되자 크게 刺戟을 받아 多年來의 鬱積 苦憫이 기다릴 사이없이 暴發되어 서기 1919년 3월 1일에 全國民의 一大 示威運動이 展開되어 代表 33을 뽑아 明月館에 會集하고 獨立宣言을 發表하는 동시에 臨時政府를 組織하였으니 이것으로 日帝의 奴隷의 쇠사슬을 粉碎하고 우리의 古代 三韓을 繼承하여 自由獨立 地域으로 하려고 하였던 것이다. 韓國 臨時政府의 組織이야말로 무수한 先烈의 鮮血로 물들인 바이고, 自由를 사랑하는 三千萬의 韓國 民族이 擁護하는 바이었고, 正義를 崇尙하는 全世界 人士들의 同情을 받으며 절대로 不屈不撓하는 革命志士의 推進하는 바이었다. 다만 개나 매같은 倭寇가 秘密裡에 國內에 布告하여 憲兵과 警察의 偵探을 가지고 監視가 극히 嚴重하였으므로 순조롭게 政令을 施行하고 國權을 恢復할 수 없었으니 外國에서 形勢가 비교적 安全한 곳을 選擇하여 政府를 設置하고 政權의 安全과 政令의 貫徹을 求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당시 여러 革命 指導者들이 많이 上海에 雲集하여 秘密裡에 擧事를 圖謀하였던 것이다. 上海는 東方의 大都會地로 交通이 便利하고 治安이 安定되었으며 또한 國際視線이 集中된 곳이니 世人의 보고 듣는 바가 되어 效果가 大端하였다. 이에 上海를 臨時政府 所在地로 하고 各地의 代表들이 모여 臨時議政院을 組織하여 意氣相通하였으며, 또한 國內와 東北等地(滿洲를 意味함)에서 抗倭하는 武裝 獨立運動에 대하여 여러 가지의 直接 行動을 指揮하여서 日帝의 暗黑統治를 顚覆시키고 太極旗를 서울에 다시 날리도록 圖謀하였다. 一國의 革命은 모름지기 自己가 責任을 지고 自力으로 奮鬪하여야 하지마는 國際友邦의 聲援도 매우 重要하니 절대로 없어서는 안될 것이다. 먼 例로는 美國의 獨立이고 가까운 例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光復이니 前者는 佛蘭西(프랑스)의 援助이고 候者는 條約國의 後援이었다. 歷史가 이러하여 명백히 證明하는 것일진데 韓國만이 어찌 홀로 例外가 되겠는가? 그러므로 臨時政府가 成立되자 우선 國際關係를 參酌하여서 各 友邦의 同情과 聲援을 구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特使를 巴里에 派遣하여 平和會談에 參加한 民主國家에 向하여 大大的으로 呼訴하고 極力 援助를 구한 것이다. 당시 26개국의 社會民主黨 代表大會에서 韓國 獨立의 承認이 通過되어 國際聯盟에 加入을 推進하는 決議에 까지 이르렀다. 佛蘭西(프랑스) 方面에서는, 民間側의 佛蘭西(프랑스) 人權協會같은 것은 聲明書를 發表하여 極力 韓國獨立을 承認하고 또한 對韓親友會를 조직하였고, 政府側의 上海 佛(프랑스)領에서는 佛(프랑스)租界가 臨時政府에 대하여 保護를 留意하였다. 倭敵은 數次 交涉하여 封鎖를 要求하고 또한 秘密裡에 懸賞方式을 가지고 暗暗裡에 韓國人을 逮捕하기를 陰謀하였으나 모두 拒絶을 당하였다. 美國方面에서는, 1920년 3월 22일 上議院議員 ‘뎀즈’(Thames)씨 및 ‘시이덕스’ 씨가 議案을 提出하여 極力 韓國獨立을 承認하고 韓國이 國際聯盟의 會員國이 됨을 批准하여 마땅히 全體의 贊助를 獲得해야 할 것이라고 主張하였다. 그런데 당시 美日 國交가 平常的인 軌道에 올라가야 하겠는데 이 案이 通過되면 兩國의 관계가 반드시 破裂에 이르게 될 것이므로 부득이 이 案을 잠시 保留하기로 하였다. 英國 方面에서는, 國會가 역시 韓國獨立을 承認할 것을 提出하여 長時間 熱烈한 討論이 있었고, 民間에서도 역시 對韓親友會의 組織이 있었다. 蘇聯 方面에서는, 熱烈한 同情은 勿論이고 同時에 秘密裡에 特使를 上海로 派遣하여 臨時政府와 緊密한 連絡을 하고 또한 巨額의 物資도 暗暗裡에 援助하였다. 中國에 있어서의 精神上의 同情과 物資上의 援助는 다시 論할 必要가 없었던 것이다. 臨時政府는 成立 後에 全世界의 注目를 惹起하여 美ㆍ英ㆍ佛ㆍ中(미국ㆍ영국ㆍ프랑스ㆍ중국) 등의 國家 朝野의 熱烈한 同情을 獲得하고 一步 나아가서 各國 政府와 正式 接觸하고 外交 科程에 따라 各國의 正式 承認을 얻기로 圖謀하였다. 第一먼저 努力한 것은 中國의 承認이었다. 그것은 第一, 韓·中(한국·중국) 兩國은 원래 兄弟之國으로 傳統的 友誼가 있어서 中國 朝野의 韓國에 대한 同情은 더욱 他國에 비할 바가 아니었다. 第二, 韓國 獨立을 圖謀하려면 地理上으로 보아 中國 大陸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다. 第三, 그때 護法政府는 廣東에서 成立하고 中國 民意를 代表하는 政府이었다. 執政者 孫文 中山 선생 및 國民黨 諸 先輩는 평소에 正義와 自由를 崇尙하고 韓國 革命을 同情한 것이다. 멀리 巴里 平和會義時에 廣東 非常國會는 卽時 韓國獨立을 承認하고 또한 平和會義 中國代表에게 電文을 發送하여 韓國獨立을 主張할 意向을 授與하였다. 以上과 같은 여러 理由로, 民國 十年 十月에 臨時政府는 드디어 特使를 廣東에 派遣할 것을 決定하고 韓國獨立 事件을 承認토록 交涉하기로 하였다. 韓國에 있어서는 獨立 運動線上 免할 수 없는 方針을 屬한 것이나 그러나 世界 弱小民族을 解放하는 것을 職志로 하는 中國 護法政府로서는 考慮中에 屬하는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