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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81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 부근 요란 진정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2 수신일: 1907-08-03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28호 메이지 40년 8월 2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2일 오전 10시 23분 발전(發電) 동 일 오후 3시 35분 착 어젯밤 이래로 평온하며 소굴로 도망친 한국병은 거의 모습을 감추었음. 또한 계속하여 수색중이었는데 오늘 아침에 이르러 시체 4구를 발견하고 7명을 포획함.

    182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 부근에 있어서의 해산군대의 요란 진정과 지방군대의 해산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3 수신일: 1907-08-03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29호 메이지 40년 8월 3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2일 오후 10시 발전(發電) 8월 3일 오전 2시 15분 착 오늘 아침부터는 경성(京城) 및 부근의 촌락도 대체로 정온함. 오늘 오후까지 받은 보고에 의하면, 한국병의 사망자는 준사관(准士官) 이상이 12명, 하사 졸병이 56명이고, 부상자는 장교 이하가 58명, 외국선교사가 수용하고 있는 부상자가 32명이며, 아군에게 붙잡힌 자는 장교 이하가 560명에 달하며 또한 이 숫자는 약간명이 증가할 것으로 예상됨. 전투의 결과 압수한 병기 가운데 주요한 것으로는 30년식 보병총 1,512정, 동 총검 1,377개, 동 탄약 18,991발, 단발총 139정, 동 총검 127개, 단도 18자루로서 이것들도 또한 다소는 증가할 것으로 보임. 우리가 소비한 탄약은 소총탄 7,573발, 기관총탄 1,138발, 황색 탄약(투척용 폭약에 사용한 것으로 1,600그램) 등임. 그저께 경성(京城)으로 불러들인 보병 1개 대대(1개 중대를 결함)는 오늘 오후에 용산(龍山)으로 귀환시켰음. 지방의 진위대는 내일 무렵부터 점차로 해산시킬 예정임.

    183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해산군대의 폭행 진압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3 수신일: 1907-08-05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30호 메이지 40년 8월 3일 참 모 총 장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3일 오전 5시 35분 발전(發電) 동 일 오후 8시 20분 착 경성(京城) 부근은 평온함. 부상자 가운데 한국 장교는 동국(同國) 위생부(衛生部)에 인도하고 하사 이하는 여전히 우리 위생부에서 맡고 있으며, 포박한 자는 전부 명의상으로는 한국군부에 인도를 마치고 우리 군대에서 감시했음. 어제 2일 오후쯤에 한국 패잔병 가운데 소굴에 숨은 병사 약 300명이 일산역(一山驛)(경의선상에 있으며 용산에서 약 9리) 동쪽 약 3리의 지점에 있는 부락에 모여 점차로 학현(鶴峴)(?)(일산리(一山里)의 동북쪽 약 1리) 방향으로 이동하며 한국인의 재물을 약탈한다는 보고를 접하고 보병 제47연대의 1개 중대를 파견했음. 이 중대는 오늘 3일 오전 0시 45분에 용산역(龍山驛)을 발차하였고, 동 1시 38분에 일산역(一山驛)에서 하차하여 학현(鶴峴)(?)으로 향했음.

    184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수원(水原) 외 각 지방 진위대 해산의 정황과 경성(京城) 부근의 경비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4 수신일: 1907-08-05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31호 메이지 40년 8월 4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3일 오후 9시 25분 발전(發電) 동 4일 오전 4시 55분 착 경성(京城) 부근은 이상이 없음. 어젯밤에 일산(一山)에 파견했던 보병 제47연대의 1개 중대는 오늘 오전 2시에 학현(鶴峴)(?)에 도착하여 그 지역 부근을 정찰하였으나 이상이 없었음. 따라서 이들에게 철수를 명령했음. 수원(水原)의 한국진위대는 오늘 오후 5시에 무사히 군대를 해산했음. 온화한 수단을 강구하여 한국진위대의 탄약을 우리 수비대에서 보관하고 있는 지방은 다음과 같음. 청주(淸州), 대구(大邱), 해주(海州), 개성(開城), 황주(黃州), 평양(平壤), 안주(安州), 의주(義州), 북청(北靑), 통영(統營), 강계(江界). 한국군대의 마필(馬匹), 병기, 탄약, 피복, 양식, 진영구(陣營具) 등은 일한 양국의 장교와 동 상당관(相當官)을 위원으로 하여 정리를 맡도록 하였음.

    185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대구(大邱)진위대 해산과 경성(京城) 부근의 형세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4 수신일: 1907-08-05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32호 메이지 40년 8월 4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4일 오전 9시 발전(發電) 동 일 오후 1시 45분 착 경성(京城) 부근은 이상이 없음. 대구(大邱)의 한국 진위대는 어제 밤에 우리 수비대에 그들의 병기를 인도했음. 오늘 군대를 해산시킬 것임.

    186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청주(淸州)|| 황주(黃州) 및 대구(大邱)진위대 해산과 경성(京城) 및 충주(忠州) 부근의 수비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5 수신일: 1907-08-05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33호 메이지 40년 8월 5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4일 오후 9시 35분 발전(發電) 동 일 오후 11시 50분 착 경성(京城) 부근은 대체로 정온함. 오늘 오전 11시에 청주(淸州)진위대(분견병 43명을 제외함) 및 황주(黃州)진위대는 무사히 해산하였고, 어제 무기를 우리 수비대에게 교부하였음. 대구(大邱)진위대는 오후 2시 30분에 해산식을 마쳤음. 일산(一山) 방향으로 파견한 보병 1개 중대는 오전 8시 30분에 무사히 용산(龍山)에 귀착함. 보병 제47연대의 제5중대(1개 소대를 결함)는 어제 3일 오전 8시에 대전(大田)을 출발하여 청주(淸州) 수비대에 가세함(보고가 연착됨). 이 부대는 청주(淸州)진위대가 해산한 뒤 정리가 끝나면 원대로 복귀시킬 예정임. 충주(忠州)수비대장인 니노미야(二宮) 소위는 오늘 오후 4시 40분에 하사와 졸병 등 19명을 이끌고 원주(原州) 방향을 정찰하기 위해 출발했음.

    187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 부근의 형세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5 수신일: 1907-08-06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34호 메이지 40년 8월 5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5일 오전 11시 23분 발전(發電) 동 일 오후 2시 20분 착 경성(京城) 부근은 대체로 정온함.

    188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각지 진위대의 해산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6 수신일: 1907-08-06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35호 메이지 40년 8월 6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5일 오후 10시 발전(發電) 동 동 11시 5분 착 상황은 평온함. 각지의 진위대는 군대 해산을 실시중임.

    189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안성(安城)진위대 해산 및 일반 형세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6 수신일: 1907-08-07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36호 메이지 40년 8월 6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6일 오전 10시 40분 발 8월 6일 오후 1시 52분 착 정황은 평온함. 어제 5일 정오에 안성(安城) 진위대의 군대 해산을 종료함.

    190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평양(平壤)|| 해주(海州)진위대 해산과 원주(原州) 방면의 교란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7 수신일: 1907-08-07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37호 메이지 40년 8월 7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6일 오후 9시 50분 발 8월 7일 오전 0시 55분 착 평양(平壤)진위대는 6일 오전 8시에, 해주(海州) 진위대는 동 11시 45분에 무사히 부대 해산을 종료함. 원주(原州)진위대의 대대장은 지난 3일 상경하던 도중에 폭도들에게 잡혔으나 그날밤에 탈출하였으며 현재는 행방불명[行衛不明]임. 충주(忠州)의 경무고문 지부에서는 니노미야(二宮) 소위가 이끄는 정찰대가 어제 5일 오후 3시에 원주(原州) 서쪽의 고지 부근에서 한병(韓兵) 약 250명과 폭민(暴民) 집단을 만나 약 2시간 동안 교전한 끝에 우리 거류민을 수용하여 충주(忠州)로 귀환중이라는 통보에 접하고, 내일 7일에 대대장에게 보병 2개 중대와 공병 14명, 기관총 4정을 부여해서 원주(原州)로 파견하여 그 부근에 있는 폭도의 진정에 임하도록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진위대대의 군대 해산을 원조하도록 할 것임. 이 부대는 10일에 원주(原州)에 도착할 예정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