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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11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송(送) 제 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7-04-26 발신자: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청국 각 공사 수신자: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청국 각 공사 메이지30년(1897) 4월 26일 재 영국, 미국, 프랑스, 독일, 러시아, 오스트리아, 청국 각 공사 앞(각통) 조선국 함경도 삼수군에 폭도가 봉기하여 동 군수가 해를 입은 건에 대해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가 보고하여 지난 달 12자 송(送) 제(영국)43, (프랑스)47, (독일)55, (이탈리아)39, (오스트리아)47, (러시아)39, (미국)54, (청국)39호로써 그 사정을 말씀드렸습니다. 그런데 이번에 동 영사로부터 그 후 원산항 감리가 말한 것과 신창에 있는 우리나라 상인이 보고한 것을 듣고 다시 보고한 바에 따르면, 그 폭도들은 이미 퇴산했다고 합니다. 따라서 그 상황의 개요를 보내는데 좀더 확실히 하기 위해 이를 복사하여 보냅니다. (별지는 재 원산 니구치 이등영사가 보낸 공(公) 제54호 부속 서류 복사)

    112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전수(電受) 제562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898-04 메이지 31년(1898) 4월 어부들이 구석구석에서 부녀자에 대해 실없는 소리로 희롱하고 혹은 인가가 조밀한 장소에서 추태를 부리는 데에 기인하는 것이 가장 많다. 그리고 근래에는 어부가 추태를 부리는 것에 대해 심하게 개의치 않는 경향이 있고 또 옛날과 같이 폐해가 없다. 생각해보면 도민 중에는 우리나라 사람에게 고용된 자, 혹은 흉년에 우리나라 상인에게 금곡(金穀) 물품을 빌린 자, 또는 우리나라 어선 중개선에 편승하여 구경하러 우리나라에 왕복하는 자 등 우리나라 사람의 은혜를 입은 자가 자못 많은 것에도 기인한다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일반 도민은 주류소(駐留所)를 설치함으로써 어느 정도 암암리에 지방관 및 선교사?신도의 가정(苛政)과 폭횡을 억지할 수 있다고 생각하여서 우리나라 사람의 세력은 차츰 높아지고, 상업상 및 어업상 조금의 지장도 없고 피차간 사귀는 정이 날로 친밀함을 더하고 우리나라 사람에 대한 감정이 자못 양호하다고 한다.

    113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發) 제149호 영월 지방 폭민의 건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905-09-18 발신주소: 한국 발신자: 외무대신 백작 가쓰라 다로[桂太郞] 수신자: 외무대신 백작 가쓰라 다로[桂太郞] 강원도 영월 지방에서 의병이라 칭하는 폭민의 집단이 각기 무기를 가지고 그 방면 각 지방에 출몰하여 백성의 재물을 약탈하니 군사령부 및 우리가 파견한 경찰관으로부터 정보가 있었습니다. 또한 원주 진위대(鎭衛隊)도 당 정부에 보고하였으므로 본 공사는 이 진압 방법에 관하여 당 정부에 문의하였던 바 별지와 같이 군부대신으로부터 회답이 있었으니 참고로 말씀드립니다. 또한 이 폭도는 지난 달 29일 본 공사의 326호 전품(電稟)과 동일할 것이라 생각됩니다. 경구(敬具) 메이지 38년(1905) 9월 18일 재한(在韓) 특명전권공사 하야시 곤스케[林權助] 외무대신 백작 가쓰라 다로[桂太郞] 님 [별지] 敬覆者昨奉 大極誦悉은是寧越等地匪徒一事는頃接原州鎭衛隊大將金演蓍報告則該匪類가剽奪民財에勢甚猖獗하야不可以?千兵卒로鎭壓이다이옵기自?部로?發該隊兵弁五十名하야使尉官一員으로領率前往該地方하야不日剿除之意로方已發令於該隊長하엿사오니照亮하심을爲要 광무(光武)9년 9월 16일 권중현(權重顯) 하야시[林] 공사 각하

    114 한국 각지 폭동 잡건

    수(受) 제21269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906-12-11 발신자: 외무대신 자작 하야시 다다스[林董] 수신자: 외무대신 자작 하야시 다다스[林董] 근래 한국 각도에 화적 또는 의병이라 칭하는 비도(匪徒)가 출몰하여 지방의 안녕을 해치는 것이 적지 않은 바, 그 성립 및 근거지 등에 관한 상황은 별지와 같으므로 이 점 통보해 올립니다. 메이지 39년(1906) 12월 11일 임시통감대리 한국주답군사령관 남작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 외무대신 자작 하야시 다다스[林董] 님 [별지] 의병이라 칭하는 자와 화적은 행동이 서로 비슷한 점이 있지만, 그 실질에서는 크게 다른 점이 있다. 의병은 대개 우국개세(憂國慨世)를 표방하는 양반 유생으로서 오로지 배일(排日)을 목적으로 하여 봉기한 한 무리의 당여(黨與)이다. 화적은 무뢰한 무리 십 수 명 내지 수백 명이 무기를 휴대하고 각지를 횡행하며 관민(官民)을 협박하여 재화(財貨)를 약탈하는 일종의 강도이다.의병의 근거지는 종래 지방 양반의 소굴이라 칭하는 충청남도에 있다. 충청남도의 내포(內浦)라 칭하는 신창(新昌)?예산?대흥(大興)?청양?정산(定山)?홍주?덕산?해미?결성?보령?남포(藍浦) 등 서해안을 따라 위치한 각 군에는 한국 황실과 관계가 깊은 양반들이 다수 산재해 있으며 대부분 배일주의를 가지고 있다. 메이지 28년(1895) 중에 충청남북도에 걸쳐 봉기하여 충주 관찰사 및 단양 군수를 살해한 의병과 같은 무리나, 올해 5월 홍주성을 점거한 민종식(閔宗植)과 같은 류는 모두 이 지방에서 나온 자들이다. 화적의 근거지는 강원도 남부 일본해에 인접한 삼척?울산?평해 지방에서부터 경상북도 북부의 영해?영덕?진보?영양?예안?봉화?영천?예천?함창?상주 등을 거쳐 충청북도 남부의 청산?보은 지방에 이르는 산간 계곡에 있는 듯하다. 이들 각 군은 산악이 겹겹이 겹쳐 있어서 인가가 희박하여 출몰하기에 편리하므로 화적은 평소 이런 험지에 의거하여 모습을 감추고 때로 출현하는 것이다. 메이지 27년(1894) 중 보은의 속리산을 근거로 하는 한 떼의 화적이 봉기하였고, 그 후 이 지방의 화적 소굴이 된 이래 오늘날에 이르기까지 그 자취가 끊이지 않는다고 한다. 지나간 해 민후(閔后) 사건이래 민씨 일족은 일본을 원망하여 자칫하면 배일 행동으로 나가려하고, 또 그들은 한국 황제폐하의 진의도 역시 일본을 깊이 혐오한다는 것을 알고 있는 까닭에 배일의 위의(爲義)를 주창하여 군사를 일으킨 것은 폐하에 대한 더 없는 충의라고 한다. 이것이 의병 봉기의 한 원인이다. 그리고 충청남도 내포(內浦)에 있는 양반과 같은 경우는 생계가 윤택하여 대부분은 경성에 저택을 가지고 있어 관직에 있을 때는 경성에서 살지만 관직에서 물러났을 때는 곧바로 충청남도로 돌아가 은거하는 것을 상례로 삼는다. 즉 그곳 지력(地力)이 늘 의병의 봉기 및 근거지인 까닭이다.

    115 한국 각지 폭동 잡건

    통발(統發) 제2474호 발간일: 한국 각지 폭동 잡건 발신일: 1906-11-30 발신자: 외무대신 자작 하야시 다다스[林董] 수신자: 외무대신 자작 하야시 다다스[林董] 이 달 22일 전보로써 올해 6월 충청남도에서 의병이라 칭하며 봉기한 폭도의 괴수 민종식 체포건을 통보하였던 바 이 사람의 취조 개요는 별지와 같으므로 이를 통보합니다. 메이지 39년(1906) 11월 30일 임시통감대리 한국주답군사령관 남작 하세가와 요시미치[長谷川好道] 인 외무대신 자작 하야시 다다스[林董] 님 [별지] 비괴(匪魁) 민종식 취조 개요 비괴 민종식은 비대한 체구에 뺨이 살찌고 구렛나루가 성기어 언뜻 보기에 위인의 풍체가 있다. 그리고 완미(頑迷)하고 과묵하며 침착한 태도로 진술하였습니다. 하지만 다른 사람에게 누를 끼치는 일은 피하여 당시 세상에 선전되고 있던 궁중과의 관계 및 군비(軍費) 하사건은 사실 무근이라고 하며 절대로 부인하였습니다. 또한 이른바 의병의 행동이 때때로 화적으로 드러난 것은 자기의 본뜻과 어긋난 것을 개탄하였습니다. 진술한 요점은, 자신은 평소 진충보국(盡忠報國)을 본령으로 삼고 있었는데, 28년(1895)에는 국모의 변(變)이 있은 지 4년이 지난 당시의 내부대신 이지용(李址鎔)은 일본과 비밀 조약을 맺었고 작년 11월 한일신협약(韓日新協約)이 성립되고 나서는 위로는 황제의 마음을 괴롭히고 아래로는 만민이 안도하지 못하고 국가의 존망이 급박하였습니다. 이에 결의하고 작년 음력 11월 25일 동지 김상덕(金相德)과 김봉환(金鳳煥)을 만나 상경하여 오적(五賊) 대신을 살륙하고 이토[伊藤] 통감과 하세가와[長谷川] 대장을 살해하고 협약을 파기하여 국권을 회복하고자 하는 상주(上奏)를 하려 하였다. 때마침 상주문을 부탁해놓은 동지인 유생 이설(李卨)?김봉환 두 사람이 경무청에 잡혀가 상주문을 압수 당하여서 일이 성사되지 못하였다. 일단 충청남도 정산군(定山郡)의 자기 집으로 돌아갔다. 이로부터 동지 이용규(李容珪)?유준근(柳濬根)?이식(李식)?남경천(南敬天)과 의병을 일으켜 목적을 달성하고자 일을 도모하였다. 가산을 팔아 군자금 2천 원(圓)을 마련하여 군수품을 준비하고 동지를 규합하여 올해 3월 홍주성에 들어가 총기?탄약을 약탈하려 했으나 일이 발각되어 이미 성안에 수송한 총기를 군아(郡衙)에 압수 당하였다. 이로써 동 군 합천(合川)에서 만나 일시 해산할 것을 의논할 때 경찰관과 헌병이 쳐들어왔으므로 총기 등을 버려 두고 겨우 몸을 피하였다. 달아난 후 각지에 잠행하여 전주의 친족인 민진호(閔晉鎬)의 집에 잠복하던 중에 조상수(趙尙洙)?이용규?이세영(李世永)?이상구(李相九)?이봉학(李鳳學) 등과 만나 다시 거병할 것을 꾀하니 원근에서 흠모하여 모여든 자가 60명에 달하였다. 음력 4월 16일 길을 나누어 충청남도 홍산군(鴻山郡) 지치동(支峙洞)의 주막에서 서로 만나 아래와 같이 의군(義軍)을 조직하였다. 선봉 박영두(朴永斗) 중군장(中軍將) 정재호(鄭在鎬) 후군장(後軍將) 정해두(鄭海斗) 사흘 뒤 서천군 군아(郡衙)를 습격하고 군수를 위협하여 군기고(軍器庫)를 열어 총 7정을 약탈하였다. 밤새 남포군(藍浦郡)으로 가는 도중 비인군(庇仁郡) 판교리(板橋里)에서 일본인 1명을 붙잡고 남포군에 진입하여 군수를 묶어 군기를 빼앗고 부근 촌락에서 돈과 곡식을 징발하여 3, 4일 체재하였다. 체재하는 동안 공주(公州) 진위대의 파병으로 인해 총화(銃火)를 입었지만 유준근을 군사(軍使)로 삼아 순국의 의병에게 발포하지 말라고 엄중하게 말하게 하여 한병(韓兵)을 물리쳤다. 남포 부근의 용동(龍洞)에서 일본인 석공(石工) 2명을 붙잡았는데 1명은 총화로 인해 부상을 입었으므로 선봉장에게 명하여 총살하게 하였다. 이것은 일본인은 모두 살륙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았기 때문에 이 사람에게 목숨 바치게 한 것이다. 보령?결성 두 군을 거쳐 홍주성에 다가가 남문에 육박하니 일본 헌병의 총화를 입고 응전하였다. 한 부대를 서문에 육박하게 하니 일본인 등은 모두 동문으로 달아나 마침내 홍주성을 점령하고 총기?탄약?기타의 무기 및 우편국에서 금품을 빼앗았다. 이 때 군대 인원수가 200여 명에 달하여 다시 다음과 같이 일을 분담시켜 방비를 엄중하게 하였다. 선봉장 박영두 중군장 황영수(黃英秀)(나중에 이세영(李世永)) 좌익장(左翼將) 김성진(金成鎭) 우익장(右翼將) 이봉규(李鳳奎) 후군장(後軍將) 정해두(鄭海斗) 유격장(遊擊將) 남규진(南奎振) 유격장 최경도(崔景燾) 동 이만식(李萬植) 참모 이식(李植) 참모 이용규(李容奎) 동 이상구(李相九) 동 곽한일(郭漢一) 동 유준근 동 김광우(金光祐) 동 신현두(申鉉斗) 군량관(軍糧官) 성재두(成載斗) 소모장(召募將) 최상집(崔相集) 동 신석휴(申錫休) 동 김윤식(金尹植) 군사장(軍師將) 김상덕(金相悳) 농성 중 각 군수에게 훈령하여 양식과 군기의 징집 및 모병(募兵)의 일을 주선하게 하였는데 해미(海美) 군수만 포군(砲軍) 10명과 금(金) 약간을 보내주었으나 다른 사람은 응하지 않았다. 소모장(召募將)의 소모에 의해 한 때는 군대 인원수가 500명 내지 600명에 달하였다. 성안에서 다시 상주문을 초잡아 이민학(李敏學)에게 가지고 상경하게 하였다. 그 취지는 전에 쓴 상주문과 대략 동일하며 거병의 공인(公認)을 구하는 것이었지만 경성에 도착하기 전에 홍주성 전투에서 패하였기 때문에 중지했다고 전해 들었다. 윤4월 5일(양력 5월 27일) 동문의 동북방에 경찰대가 배회하는 것을 알아차리고 서문으로 군사를 보내어 협격하여 1명(히지카타[土方] 경시)을 죽이고 2명(총순(總巡 1명, 일본 순사 1명)을 붙잡아와서 7일(양력 6월 29일) 밤 선봉장에게 명하여 북문 밖에서 먼저 잡아온 일진회원 2명, 일본인 3명과 함께 총살하게 하였다. 동 9일(31일) 새벽녘에 동문에서 폭발하는 소리를 듣고 적의 정세를 정찰하게 하려 할 때 이미 일본병이 진격했다는 급보를 접하고 탄환이 비가 오는 듯한 상황에 빠져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도리 없이 남문과 서문 사이에 있는 성벽을 넘어 창의대장(唱義大將)의 인장과 기록 등을 전부 버려 두고 도주하였다. 그 이래 각 처를 전전 잠복하며 다시 거병할 것을 꾀하였으나 군자금이 궁하여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경찰의 수색이 빈틈 없이 탐지 추격하여 마침내 체포되었다고 한다. 의병 참모장이라 칭하는 이용규(이현규(李鉉珪)의 변명이며 민의 처오빠를 취조하였는데 민이 체포되기 전에는 한 마디도 자백하지 않다가 그가 체포되었음을 알고 나서는 팔을 걷어붙이고 분격하며 책상을 치고 띠를 풀어 가슴과 배를 드러내는 등 거의 미친 듯한 태도로써 격앙 통탄하였습니다. 민의 진술과 대동소이한 진술을 하였습니다.

    116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 조칙 발포와 경성(京城) 내의 형세에 관한 헌병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19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헌병사령관 보고(7월 19일 오후 7시 50분) 제14헌병대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음. 오늘 오전 3시에 한국 황제[韓皇]가 황태자에게 양위한다는 조칙이 있음. 지금 그 의식이 거행되고 있는 중으로 완전히 성립하는 것은 오늘 중이 아닐까 생각됨. 이러한 연유로 어제 밤부터 경성(京城) 내에 많은 군중들이 모여 다소 소요를 일으키고 있으나 특별한 일은 없을 것임.

    117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에 관련한 동국 시위병의 폭행에 관한 헌병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0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헌병사령관 보고(7월 20일 오전 5시 30분) 제14헌병대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음. 오늘 19일 오후 5시경에 시위대(侍衛隊)의 병사 약 30명이 탈출하여 양위사건에 관련한 한국인의 도로연설을 단속하고 있던 고문경찰관 및 그 부근에 있던 주변 사람들에게 발포하여 즉사자가 약 10명, 경상자가 약 25명이 발생하였음. 탈출병은 곧바로 사방으로 흩어져 진정되었으나 헌병이 우리의 군대와 함께 계속 경계중임.

    118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에 관련한 경성(京城) 내의 불온한 형세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0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7월 19일 오후 10시 경성(京城) 발 20일 오전 8시 25분 착 육군대신 앞 하세가와(長谷川) 군사령관 당지는 불온한 상황에 있음. 한국 탈주병으로 인하여 일본경부 및 순사 16명이 사망하거나 중상을 입었음. 일반사람(일본인) 가운데에서도 약간의 사상자가 있음. 따라서 평양(平壤)에 있는 보병 1개 대대를 내일 아침까지 당지에 도착하도록 조치함.

    119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에 관련한 동국 병사의 행동과 제국군대의 경비에 관한 헌병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0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헌병사령관 보고 7월 20일 오후 2시 55분 제14헌병대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었음. (7월 20일 오전 9시 45분 발 오후 1시 30분 착) 그 후의 정황은 한층 더 불온함. 특히 한국군대의 행동에 불온한 조짐이 있음. 이러한 이유로 우리 군대는 한국 황제의 위임을 받아 진압행동에 나서 어제 밤 0시에 보병 2개 중대에 기관총을 부여하여 왕성(王城)의 포덕문(布德門) 내에 집합하여 경계함. 오늘 아침에 평양(平壤)에서 우리 보병 1개 대대가 도착할 예정임. 현재 진정중임.

    120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에 관련한 경성(京城) 시민과 탈영병의 폭행 진압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0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전보 7월 20일 오후 1시 발 오후 6시 20분 착 육군대신 앞 경성(京城) 하세가와(長谷川) 어제 19일 오후 5시경에 일한의 경찰관과 한국 군중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는데 한국군대의 탈영병 100명이 군중에 가담하며 사격을 가하여 일본 경부 2명, 순사 1명, 한국순검 2명이 즉사하였고 경부 1명, 순사 4명이 부상을 입음(이 가운데 1명은 입원 후에 사망했음). 위의 탈영병은 한국측에서 체포하였음. 기타 어제 19일 중에 순사 5명이 부상을 입었음. 이상 외에도 일본인 가운데 사망자가 1명, 부상자가 2명 있음. 19일 밤에 한국군대에 불온한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평양(平壤)에서 보병 1개 대대를 당지로 급히 보내라는 명령을 내렸고, 또한 통감의 명령에 따라 밤 11시 50분부터 동 2시 사이에 보병 1개 대대(기관포 4문과 함께)로 하여금 신왕성(新王城) 부근을 점령하도록 하였으며, 군대는 서둘러 집합하여 각 병영에 1개 소대의 호위를 남기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보병과 기병은 군사령부에 집합하도록 하였고 포병은 화성대(和城臺)에 위치하도록 하였음. 어제 야밤부터 한국군대와 인민 모두 지극히 평온함. 또한 내각의 각 대신들도 우리에 대해 반대하려는 의사가 없음. 평양(平壤)에서 불러들였던 대대는 오늘 아침 오전 9시부터 계속하여 당지에 도착하고 있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