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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71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광주(光州)수비대 경비배치 및 의령(義寧)|| 신천(信川)|| 통영(統營) 방면의 형세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31 수신일: 1907-07-31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전보 7월 30일 오후 11시 0분 발 31일 오전 8시 0분 착 육군대신 앞 발신자 한국주차군사령관 1. 오늘 오전 1시에 광주(光州)에 수비대가 도착함. 이로써 전부 예정했던 배치를 종료함. 2. 오늘 오후 1시 55분발로 진해만(鎭海灣) 요새사령관이 보낸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음. 오늘 시찰한 결과, 통영(統營)은 파견대가 도착한 후 평온을 되찾았으며 현 재 진위대도 함께 경비에 임하고 있음. 3. 동일 오후 3시 5분발로 해주(海州)수비대장이 보낸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음. 재령(載寧), 신천(信川)(해주의 북쪽)의 불온한 거류민을 안악(安岳)으로 철수시킴.

    172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 부근 및 양지군(陽智郡) 방면의 형세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31 수신일: 1907-08-01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22호 메이지 40년 7월 31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7월 31일 오전 10시 45분 발전(發電) 7월 31일 오후 3시 0분 착 경성(京城) 부근은 평온함. 27일 밤에 양지군(陽智郡) 죽산(竹山) 부근에 파견했던 척후는 30일 오전 5시에 귀착함. 해당 방면에 이상한 점을 발견할 수 없음.

    173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주재 한국혼성여단 및 진위대 해산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1 수신일: 1907-08-01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23호 메이지 40년 8월 1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7월 31일 오후 7시 40분 발전(發電) 동월 동일 오후 9시 15분 착 경성(京城)에 주둔한 한국혼성여단은 보병 5개 대대를 남기고 기타는 전부 8월 1일에 부대를 해체할 예정임. 진위대는 점차로 부대를 해체할 것임.

    174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의 형세 및 한국군대 해산과 부산(釜山)|| 대구(大邱)수비대의 교대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1 수신일: 1907-08-01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24호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7월 31일 오후 9시 45분 발전(發電) 8월 1일 오전 1시 46분 착 오늘 31일 아침 이래로 경성(京城) 부근은 정온함. 경성(京城)에 있는 한국의 제 부대는 내일 부대가 해체될 예정에 있으므로 오늘밤은 만일의 경우를 고려하여 경성(京城)에 위치한 제 부대는 경계를 엄하게 하였으며 용산(龍山)에서 대대장이 지휘하는 보병 3개 중대를 경성(京城)으로 불러들였음. 종래부터 제13사단에서 파견했던 부산(釜山), 대구(大邱) 수비대는 제12여단병과 교대하고 어제 경성(京城)에 귀착했음.

    175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주재 한국혼성여단 및 진위대 해산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31 발신자: 육군성 수신일: 1907-08-01 수신자: 외무성 수제11899호 전보 번역 7월 31일 오후 7시 40분 발 오후 9시 46분 착 육군대신 앞 하세가와(長谷川) 경성(京城)에 주둔한 한국혼성여단은 보병 5개 대대를 남기고 기타는 전부 8월 1일에 부대를 해체할 예정임. 진위대는 점차로 부대를 해체할 것임.

    176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기수 제2045호 한국군대 해산의 조칙 발포에 즈음한 시위대의 교란에 관한 동국 경무 고문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2 수신자: 외무대신 을비(乙秘) 제939호 8월 2일 한국 경무고문인 마루야마시게도시(丸山重俊)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에 접하였습니다. 참고가 되셨으면 합니다. 한국군병(軍兵)의 도전과 아군의 응전 어제 오전 9시에 한국군대에 해산명령이 전달되자 시위대 제1대대의 대대장이 분격하여 자살을 하였으며 이에 즉시 동 대대의 병사들이 총을 들고 일본군대에 도전해 왔으므로, 아군은 이에 응전한 후 돌격을 감행하여 그들의 병영을 점령했음. 한국병은 장교 이하 포로가 200명이며 사상자는 무수히 많음. 아군은 전사한 중대장 1명, 특무조장 1명 이외에 사상자가 40명이 있음. 기타의 한국병은 모두 해산하였으며 소요는 이미 진정되었음.

    177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군대 해산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1 수신일: 1907-08-02 수신자: 외무대신 비(秘) 참1발 제25호 메이지 40년 8월 1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8월 1일 오전 10시 38분 발전(發電) 동 일 오후 6시 40분 착 한국군대 해산의 건은 31일 야밤에 한국 황제의 재가를 받아 오늘 1일에 본인[本職]의 관사에서 한국군대의 각 대장을 소집하여 한국 군부대신이 군대 해산 칙유(勅諭)의 내용을 전달하고 오전 8시에 이를 마침. 오전 10시에 각 부대를 한국 연병장에 집합시켜 칙유를 전달하고 해산시킬 예정임. 경성(京城) 부근은 평온함.

    178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군대 해산의 조칙발포에 즈음한 군대의 폭동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2 수신일: 1907-08-02 수신자: 외무대신 비(秘) 참1발 제26호 메이지 40년 8월 2일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 8월 1일 오후 5시 10분 발 8월 2일 오전 0시 45분 착 오늘 아침 군대 해산의 조칙을 전달할 때에 보병 제1연대 제1대대의 대대장이 병상에 있어서 부관이 대리로 열석(列席)하였고 전달이 끝나자 그 부관은 부대로 돌아가 병상에 있는 대대장에게 위의 조칙 내용을 전함. 대대장은 이를 듣고 분개한 나머지 자살을 기도했으며 이로 말미암아 동 대대의 병졸 일동이 폭발하여 당시 영내에 있던 우리 교관을 향해 사격을 가하였고, 바로 이들과 인접해 있는 보병 제2연대의 제1대대가 이에 부화뇌동하여 폭발하여 우리 교관에게 사격을 가하고 또한 병영 밖으로 나가려고 하는 등 반항을 기도했기 때문에, 오전 9시에 우리의 보병 제51연대의 제3대대(1개 중대를 결함)와 2개 소대에 공병장교 이하 10명 및 기관총 3문을 부여하여 이들을 진압하도록 함. 해당 부대는 오전 9시 30분에 진압에 착수하여 화력을 이용해 오전 10시 50분에 우선 한국 보병 제2연대 제1대대의 병영을, 이어서 오전 11시 40분에 동 제1연대 제1대대의 병영을 점령하였고, 한국병은 일부는 무기를 휴대한 채, 대다수는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음. 대대는 계속하여 패잔병을 소탕하는 중에 있음. 이상 이외에 보병 3개 대대와 기병, 포병, 공병중대 및 연성학교(硏成學校), 교도보병대(敎導步兵隊)를 모두 무사히 해산시켰음. 우리측의 전사자는 보병대위 가지하라요시히사(梶原義久), 동 특무조장 구마모토 다메지로(熊本 爲次郞)이며, 중상자는 동 특무조장 후지타 고오사쿠(藤田 耕作), 경상자는 보병 소위 후지에이자부로(藤江伊三太郞)이고 기타 하사 졸병 가운데 사상자가 약 20명이 있음.

    179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의 요란 진정 및 둔잔병(遁殘兵) 소탕 정황과 한국 진위대 해산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2 수신일: 1907-08-02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27호 메이지 40년 8월 2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메이지 40년 8월 1일 오후 10시 55분 발 동 동 2일 오전 10시 10분 착 1. 이후 경성(京城) 부근의 소란은 진정되었고 우리 보병 및 헌병, 순사가 예의주시하며 소굴에 숨은 병사를 소탕중에 있으며 내일부터는 성 밖의 조금 먼 거리에 있는 촌락에 대한 수색을 실시하고자 함. 2. 오후 8시까지 받은 보고에 의하면, 오늘의 전투에서 아군의 하사 이하 전사자가 1명, 부상자가 15명이며, 한국군에서는 사망자가 장교 11명, 하사 이하 54명이며, 부상자는 장교가 5명, 하사 이하가 54명임. 그밖에 외국의 선교사가 수용하고 있는 자로 하사 이하의 부상자가 29명이며 이 숫자는 더욱 증가할 것으로 보임. 기타 장교 15명, 하사 이하 약 308명(?)을 체포했음. 3. 우리가 소비한 탄약과 소총탄은 6,863발, 기관총탄은 1,138발임. 4. 지방 진위대 가운데 불온의 소지가 있는 경우는 가능한 한 평화적으로 교섭하여 각 부대 내에서 현재 보유하고 있는 탄약을 일본수비대에서 보관하기 위한 수단을 강구하고 있음. 또한 점차적으로 부대 해산을 실시하기 위해 각 진위대장 및 일본측의 교관을 경성(京城)에 소집하여 내일부터 군대 해산의 조칙을 전달하고 동시에 실시에 관한 상세한 지시를 내리고자 함.

    180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일한협약 체결후의 한국 내의 상황 통보처[通報方]에 관한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8-02 수신자: 외무대신 메이지 40년 8월 2일 육군대신 관방(官房) 한국의 사건에 관해 지금부터 특별한 변화가 없는 한은 통보해 드리지 않겠습니다. 이점 양해해 주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