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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병자료

    의병자료에 대한 전체 704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21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에 즈음한 경성(京城)의 경비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0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전보 7월 20일 오후 4시 10분 발 오후 8시 55분 착 대신 앞 하세가와(長谷川) 당지의 정황이 정온해졌기 때문에 왕성(王城) 부근의 점령대(보병 3개 중대)는 군사령부 내에 보병 1개 중대를, 화성대(和城臺) 부근에 포병 1개 중대를 남기고 나머지는 각각 본래의 숙영지로 복귀시켰음. 평양(平壤)에서 불러들였던 1개 대대는 전부 도착했음. 당분간 당지에 체재시킬 예정임.

    122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에 즈음하여 경성(京城)의 폭도민이 총리대신의 저택을 소각한 일에 관한 헌병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0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헌병사령관 보고 (오후 11시 30분) 제14헌병대의 대장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보고가 있었음. 7월 20일 오후 9시 발전(發電) 오후 11시 30분 착전(着電) 오늘 20일 오후 2시 30분경에 한국인 약 2,000명이 총리대신의 저택을 불사르고 사방으로 흩어짐. 또한 오후 4시경에 시위대(侍衛隊)의 병사가 고문경찰관에게 발포하여 약 10분간 상호간에 사격을 교환한 후 한국병은 도주함. 그들의 총 숫자는 약 30명이라고 함. 피차간에 사상자는 없음.

    123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 후 폭도 진압을 위해 제국군대에서 동국 군기창 및 탄약고 점령에 관한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1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전보 번역 7월 21일 오전 9시 55분 발 오후 4시 10분 착 대신 앞 하세가와(長谷川) 20일 오후 5시경에 보병 1개 분대로서 용산(龍山)에 있는 한국 군기창(軍器廠)을 점령케 하고 위병(衛兵)을 배치했음. 이곳의 점령은 한국 위병과 합의한 뒤 매우 조용하게 접수를 마쳤음. 그날 밤 0시 30분에 보병 2개 소대를 이용하여 한국군부(軍部) 내에 있는 탄약고를 점령했음. 그곳에는 군부대신의 예보(豫報)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참모・부관 등이 임석하여 쌍방의 합의하에 원만하게 그곳의 접수를 마침. 우리 군대는 즉시 위병을 배치했음. 한국 군부대신 이하 각 장교는 극력 부하 군대의 청산을 알선하고 있음. 동 혼성여단장의 보고에 의하면, 병졸 각자의 탄약(한국의 각 위병은 평소부터 15내지 30발의 탄약을 휴대했음)은 전부 반환시켜 대대장으로 하여금 이를 보관하게 하였다고 함(우리의 정보에 의하더라도 왕성(王城)의 위병은 전혀 탄약을 휴대하고 있지 않음. 또한 왕성(王城) 부근의 모든 부대에서도 탄약이 반납된 상황을 확인했다고 함). 어젯밤부터 오늘 아침에 걸쳐 폭도들이 각처에서 방화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런 사실은 없었으며 정온하였음. 지금부터 한국교관(일본장교)으로 하여금 한국 각 군대의 상황을 시찰하도록 함.

    124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 후 경성(京城) 폭민 및 군대의 불온에 관련한 제국군대의 경비 상황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1 발신자: 육군성 수신자: 외무성 전보(電報) 7월 20일 오후 9시 40분 발 21일 오전 6시 10분 착 대신 앞 경성(京城) 하세가와(長谷川) 오늘 20일 오후부터 시내는 다시 불온한 정황을 보였고 폭민의 일부가 총리대신의 관저에 방화를 하였음. 또한 서대문(西大門) 및 남대문(南大門) 정차장도 불태우려 한다는 유언비어가 있었기 때문에 보병대로 하여금 그곳을 호위하게 하였음. 또한 한국인 군중 가운데에는 우리 장교척후에게 돌을 던지는 자가 있음. 군중은 한국군대의 부근에 이르러 활발하게 폭거(暴擧)를 교사(敎唆)하고 있어서 군대의 하사 이하는 마음이 점차로 동요되고 있음. 또한 약간의 탈영병이 때때로 일한의 경찰관과 작은 충돌을 일으켰음. 한국 군부대신의 요청에 따라 지금부터 일부의 보병으로 하여금 한국 탄약고를 점령하게 하고 필요하다면 이를 소각시키려고 함. 한국의 탈영병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위력(威力)으로써 이들을 진압하고자 함.

    125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 양위 후에 있어서 경성(京城) 폭민 및 탈영병의 불온과 제국군대의 진압행동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첩(參諜) 제43호 메이지(明治) 40년 7월 22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참모총장 7월 20일 오후 1시 발전(發電) 동 일 동 6시 20분 착전(着電) 19일 오후 5시경에 일본 경찰관과 한국 군중 사이에 충돌이 일어나 한국군대의 탈영병 100명이 군중에 가담해서 사격을 가하여 일본 경부 2명, 순사 1명, 한국 순헌(巡憲) 2명이 즉사하고, 경부 1명, 순사 4명이 부상을 당함(이 가운데 1명은 입원 후에 사망했음). 위의 탈영병은 한국 측에서 체포했음. 그밖에 어제 19일 중에 순사 5명이 부상했음. 이상 외에도 일본인 가운데 사망자가 1명, 부상자가 2명이 있음. 19일 밤 한국군대에 불온한 정황이 있었기 때문에 평양(平壤)에서 보병 1개 대대를 당지로 급행하도록 명령했고, 또한 통감의 명령에 따라 밤 11시 50분부터 동 2시에 이르는 사이에 보병 1개 대대(기관총 4문과 함께)로 하여금 새로운 왕성(王城) 부근을 점령시켰고, 군대는 급히 집합시켜 각 병영에 1개 소대의 호위를 남기고, 나머지에 대해서는 기보병(騎步兵)은 군사령부 내에 집합하게 하고 포병은 왜성대(倭城臺)에 위치하게 하였음. 어제 야밤부터 한국군대와 인민은 모두 지극히 평온하고 또한 내각의 각 대신도 우리에게 반대하려는 의사가 없음. 평양(平壤)에서 불러들였던 대대는 오늘 아침 오전 9시부터 계속하여 이곳에 도착하고 있음.

    126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 황제의 양위에 즈음한 경성(京城)의 경비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첩(參諜) 제44호 메이지 40년 7월 22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참모총장 7월 20일 오후 4시 10분 발전(發電) 동 동 8시 55분 착전(着電) 당지의 정황이 평온해졌기 때문에 왕성(王城) 부근의 점령대(보병 3개 중대)는 군사령부 내에 보병 1개 중대를, 왜성대(倭城臺) 부근에 보병 1개 중대를 남기고 기타는 각각 본래의 숙영지로 복귀시켰음. 평양(平壤)에서 불러들였던 1개 대대는 전부 도착했음. 여전히 수일간은 당지에 체재시킬 예정임.

    127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경성(京城) 폭도민의 총리대신 저택에 대한 화공(火攻) 및 탈영병의 폭행과 진압방침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비(秘) 참첩(參諜) 제45호 메이지(明治) 40년 7월 22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참모총장 7월 20일 오후 9시 40분 발전(發電) 동 21일 오전 1시 20분 착전(着電) 오늘 20일 오후부터 시내는 다시 불온한 상황을 보였고 폭도민의 일부는 총리대신의 관저에 방화했음. 또한 서대문(西大門) 및 남대문(南大門)의 정차장까지도 불지르러 한다는 소문[放言]이 있었기 때문에, 보병대로 하여금 이를 호위하도록 하였음. 또한 한국인 군중 가운데에는 우리 장교척후에게 돌을 던지는 자가 있음. 군중은 한국군대의 부근에 이르러 빈번히 폭거(暴擧)를 교사(敎唆)하고 있어서 군대의 하사 이하는 점차로 마음에 동요를 일으키고 있음. 또한 약간의 탈영병이 때때로 일한의 경찰관과 작은 충돌을 일으켰음. 한국 군부대신의 요청에 따라 지금부터 일부의 보병을 사용하여 한국 탄약고를 점령하고 필요하다면 이를 소각시키려고 함. 한국의 탈영병에 대해서는 필요하다면 위력으로 이를 진압하고자 함.

    128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폭도 진압을 위해 제국군대에서 용산(龍山)에 위치한 군기창 및 탄약고 점령과 하사 이하의 탄약몰수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첩(參諜) 제46호 메이지(明治) 40년 7월 22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참모총장 7월 21일 오전 9시 55분 발전(發電) 동 일 오후 4시 0분 착전(着電) 20일 오후 5시경에 보병 1개 분대로서 용산(龍山)에 있는 한국 군기창(軍器廠)을 점령케 하고 위병을 배치했음. 이곳의 점령은 한국 위병과의 합의 하에 매우 정온하게 접수를 마쳤음. 그날 밤 0시 30분에 보병 2개 소대를 이용하여 군부(軍部) 내에 있는 탄약고를 점령했음. 그곳에는 군부대신의 예보(豫報)가 있었기 때문에 한국의 참모・부관 등이 임석하여 쌍방의 합의하에 원만하게 그곳의 접수를 마치고 우리 군대는 즉시 위병을 배치했음. 한국 군부대신 이하 각 장교는 극력 부하 군대의 청산을 알선하고 있음. 동 혼성여단장의 보고에 의하면 병졸 각자의 탄약(한국의 각 위병은 평소부터 15내지 30발의 탄약을 휴대했음)은 전부 반환시켜 대대장으로 하여금 이를 보관하게 하였다고 함(우리의 정보에 의하더라도 왕성(王城) 위병은 전혀 탄약을 휴대하고 있지 않음. 또한 왕성(王城) 부근의 모든 부대에서도 탄약이 반납된 정황을 확인했다고 함). 어젯 밤부터 오늘 아침에 걸쳐 폭민들이 각처에서 방화하려 한다는 소문이 있었으나 그런 사실은 없고 조용하고 평온한 상태임. 지금부터 한국교관(일본장교)으로 하여금 한국 각 군대의 상황을 시찰하도록 함.

    129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한국군대 하사 이하의 탄약몰수와 진무 정황에 관한 동국 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2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첩(參諜) 제47호 메이지(明治) 40년 7월 22일 한국주차군 사령관 보고 참모총장 7월 21일 오후 10시 1분 발전(發電) 동월 22일 오전 0시 35분 착전(着電) 한국군대의 교관인 우리 장교로 하여금 각 부대를 시찰하도록 하였는데, 하사 이하의 탄약은 전부 압수하여 탄약고에 격납하였고 각 대대장이 그 열쇠를 보관하고 있음. 각 장교가 모두 영내에 모여 하사 이하의 병사들을 설유(說諭)하고 진무(鎭撫)하는 데 노력하고 있어서 군대는 매우 평온함. 오늘 일본순사 1명, 일반 일본인 1명이 총상을 입었음. 경성(京城) 이외의 각지의 군대도 정온함. 우리 군대는 보병 1개 중대와 기병 1개 소대를 군사령부 내에 남겨 두어 만일의 사태에 대비하고 있음. 각 숙영지에서는 척후와 순찰을 통해 계속적으로 경계하고 있음.

    130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폭도 경비에 관한 한국주차군 사령관의 보고 이첩의 건 발간일: 메이지(明治) 40년 7월에서 동(同) 41년 1월까지한국에 있어서 제2회 만국평화회의에의 밀사파견과 동국 황제의 양위 및 일한협약체결 1건 발신일: 1907-07-23 발신자: 외무대신 수신자: 외무대신 참1발 제1호 (참첩 제47호의 계속) 메이지 40년 7월 25일 한국주차군사령관 보고 참모총장 7월 22일 오후 1시 20분 발전(發電) 동 오후 4시 35분 착(着) 어제 21일 밤부터 오늘 아침까지 이상 없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