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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961 핸리맥(HANRY C. MACK)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보낸 편지

    발신일: 1945-09-05수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우리는 언젠가 줄어들 김차선[Cha Shon Kim]의 재산을 몰수하는 상황에 있으며 상속인에게 대략 2백 달러 정도의 분배가 가능할 것이다.1945년 1월 18일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편지를 써 원 상속공술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게 주어진다는 실행을 요청하였다. 이 공술서는 고인과 고인의 부친인 김치현[Chi Hyun Kim] 사이의 부자관계를 증명할 것이다.1914년 한국국립연맹과의 공식가입을 만들었고 이것도 그 관계를 증명한다. 서류의 사진사본은 중국어라 우리가 읽을 수 없으므로 공식 번역을 제공해야 할 것이다.이 하와이로 보낸 편지 원본과 로스앤젤레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보낸 편지 사본, 김치현[Chi Hyun Kim]에 의해 다루어져야 하는 상속공술서 사본을 동봉한다.이미 많은 시간이 경과되어 1945년 11월 1일날까지 이 서류가 보내질 것인지 아닌지와 상관없이 우리가 이 재산을 해결해야 한다. 이 서류가 도착하지 않으면 그 돈은 부친의 상속권 입증으로 캘리포니아 은행에 예치될 것이다. 물론 서류가 그 전에 도착하면 사법처리에 의해 부친에게 직접 분배될 것이다.

    962 미국방성 차관보가 전경무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5-08-15발신자: 전경무수신자: 전경무1945년 8월 15일 당신의 편지를 받고 당신 기관의 요구사항에 대해 신중히 생각하고 있다. 한족연합위원회의 지도자들이 한국 재입국 시 미국의 원조를 받겠다는 당신의 제안에 대한 미국무성의 조치는 국무성의 결정과 동일할 것이오. 우리의 노력 또한 태평양의 현 운송에 굉장한 영향을 받을 것이다.아직까지 확실한 답변을 하지 못해 유감이다.

    963 전경무가 김병연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5-08-31발신자: 김병연수신자: 김병연이것은 우리의 전화내용을 인정하는 것이며 즉시 재입국 허가를 위해 노력할 것이다. 그러나 실제적인 적용은 공식적으로 알려진 이후 시작된다.8월 15일 우리의 제안에 대한 답변인 맥클로이[John J. McCloy]의 편지사본을 동봉한다. 당신은 맥클로이[McCloy] 씨가 그 제안을 신중하게 검토하고 있으며 그의 조치가 국무성의 결정과 일치한다는 것에 주목할 것이다.오늘 아침 그 편지를 받고 디코버[Erle Dickover] 씨를 방문했다. 그는 자신의 지지와 후원을 반복해 언급했지만 허찌[Robert Hudge]장군이 한국의 본부를 세울 때 활동을 하겠다고 조언하였다. 허찌[Hudge]장군은 한국의 38선 남쪽은 맥아더 장군이, 38선 북쪽은 소련이 군사적으로 감독하는 안 추진할 것이다. 국무성은 허찌[Hudge]장군과 직접 접촉하여 우리의 전진을 위해 추천하고 우리가 희망하는 허찌[Hudge]장군의 호의적인 반응이 있을 때 국무성이 찬성에 대해 미국무성에 편지를 보낼 것이다. 이런 과정의 이유는 맥아더장군이 군사지역에 민간인이 오는 것에 결코 찬성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만약 국무성이 허찌[Hudge]장군의 동의를 얻는다면 재입국이 외교문서과 인가를 위한 더 나은 상황이 될 것이다.대화중 소련이 한국에 남아 있는지 물어보았고 그 대답은 부정이었다. 한국의 미래는 카이로선언에 달려 있다.아직 한국에서 동맹회의가 개최되지는 않았으나 중요 동맹회의가 형성될 것이라고 믿는다. 미국과 소련이 주 참여국인 영국과 중국과 함께 중요한 부분이 될 것이다. 국무성과 미국무성이 통역을 위해 50여 명의 한국인을 소집해 통역작업을 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한족연합위원회의 제안에 혼동을 일으키지 않기 위함이다.우리가 논의했듯이 허찌[Hudge]장군의 허락을 얻으면 S.D.과 C.Ho가 워싱턴을 방문하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 그리고 우리 그룹이 떠날 준비를 하기 전에 미국무성과 국무성을 찾아가야 한다. 일단 한국에 들어가면 우리는 미국과 소련의 군사 관계자들의 합리적인 지지를 얻어야 한다. 한국을 돕고자 하는 노력이 결과를 얻을 수 있도록 모든 각도로 최선을 다하고 있음을 확신해라.

    964 김용정이 김병연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4-03-04발신자: 김병연수신자: 김병연장개석[Chiang Kai-shek] 부인으로부터 온 영수증이 붙어 있는 편지를 샌프란시스코의 중국 영사로부터 받았다. 그것이 누구의 것인지 알 수 없어 당신이 적합한 곳에 그 편지를 전달해줄 것을 요청한다.9월 25일 영사 팽[Feng]에게 보낸 우리 편지사본을 또한 동봉한다.

    965 김용정이 팽(C. T. Feng)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4-03-04발신자: 팽수신자: 팽장개석[Chiang Kai-shek] 부인이 한국사회에 보낸 편지와 103 미국 달러에 대한 영수증이 든 당신의 편지를 3월 1일에 받았다. 한국사회 어느 조직에 이것이 전달되어야 하는지 알 수가 없어 그녀의 편지와 영수증을 로스앤젤레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김병연에게 적합한 곳에 전달할 것을 요청하며 보냈다.

    966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역사

    작성처: 재미한족연합위원회 - 로스앤젤레스 본부 집행위원부 - 호놀룰루 본부 의사위원부작성처: 이승만박사 - 워싱턴[Washington, D. C.] 주미위원회[Korean Commission] 위원장 동지회 총 지도자한족연합위원회의 역사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하와이 대한인국민회[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Hawaii], 동지회[the Dongji Hoi Society], 대한부인구제회[the Korean Womens Relief Society], 중한민중동맹단[Sino-Korean Peoples League] 등의 단체가 참가한 가운데, 1940년 10월 호놀룰루에서 처음 그 토대가 세워졌다. 그 당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유일한 목적은, 한국인들이 미국 국방 계획을 공동 분담하도록 하여, 다가오는 국가적 비상사태에 대처하는 방법을 계획하는 것이었다.이 초기단계 단체의 개가로, 북미 대한인국민회[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North America] 대표 3명, 중국 의용대[the League to Aid Korean Volunteers in China] 대리대표 1명 (이상 두 단체 모두 로스앤젤레스에 사무실 위치), 하와이 대한인국민회[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Hawaii] 대표 3명, 동지회[the Dongji Hoi Society] 대표 3명, 대한부인구제회[the Korean Womens Relief Society] 대표 2명, 중한민중동맹단[Sino-Korean Peoples League] 대표 1명 (이상 모두 호놀룰루에 사무실 위치) 이 참석한 가운데, 제 1차 총회가 1941년 4월 19일부터 29일까지 호놀룰루에서 열렸다.이 회의 기간동안 이루어진 일련의 협정의 결과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두 개의 본부를 지닌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는데, 그 본부 중 하나는 호놀룰루 밀러 1306가[1306 Miller Street] (대한인국민회 건물[Korean National Association Building])에, 다른 하나는 로스앤젤레스 제퍼슨 1368가[1368 W. Jefferson Blvd.] (대한인국민회 건물[Korean National Association Building])에 위치한다.새로이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목적은, 미국과 미국 관할 영토, 그리고 멕시코와 쿠바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 사이에 목적과 행동의 일치단결을 이루고 이를 유지하여 (1) 한국의 독립운동에 대해 단결된 태도를 취하고 (2) 전쟁 수행에 총력을 기울이는 것이었다. 이러한 이유로,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호놀룰루 본부와 로스앤젤레스 본부에 각각 2 : 1의 비율로 연간 예산안을 할당하여 기금을 모으곤 했다. 그리고 이렇게 모은 기금은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워싱턴[Washington, D. C.]에 있는 주미위원회에 각각 2 : 1 의 비율로 지급하곤 했다. 총 기금 가운데 적은 비율의 금액이 호놀룰루 및 로스앤젤레스 본부의 운영비로 사용되었다. 그 외에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때때로 한국인들의 참여를 필요로 하기도 하는 다양한 전쟁시 한국인 활동에 쓰일 특별 기금을 마련했다. (이 마지막 항목에 대한 예산 부족은 미숙련으로 인한 예산산정의 부실함에 기인한다.)중경 파견임무재미한족연합위원회 호놀룰루 본부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소재지인 중경으로 대표자 한 명을 파견할 것을 로스앤젤레스 본부와 워싱턴 주미위원회에 제안했다. 이 파견위원은 미국 및 다른 연합국 소속 주요 강국들의 정책 및 그 방향에 대한 상당한 정보를 가지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도움이 되는 회의 참관 및 임무 수행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영어 능력을 갖춘 자이어야 했고, 그래서 한국과 근접한 국경지역 및 아시아 대륙에 또 다른 전선이 형성되기 전에 연합국이 수행하는 한국에서의 전쟁 가능성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정책을 수립하는 것을 도와야 했다. 한국인들은 민주주의 이념에 진정한 공헌을 해야 하며, 이렇게 하기 위해서는 투쟁을 해야만 한다고 판단되었고, 이러한 것들이 이 중경 파견이 계획된 이유였다. 이 중경 파견은 한족연합위원회와 주미위원회, 두 본부로부터 모두 찬성을 얻었다.전경무[JACOB KYUANG DUNN]전경무는 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에 의해 중경 파견위원으로 지명되었다. 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는 전경무와 동행할 파견위원으로 김호[Charles Ho Kim]를 추천했고, 그래서 그도 파견위원으로 임명되었다.이 두 사람은 그들의 출장 계획 및 워싱턴 주미위원회 위원장인 이승만 박사와의 협의를 위해 워싱턴으로 갔다. 그곳에 있는 동안, 그들은 이승만에게 중경 파견 승인을 얻는 것과 동시에 주미위원회의 편성 및 정책의 변화를 꾀할 목적으로,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 본부의 지시에 따라 4가지 요구사항을 이승만 박사에게 구두로 제안했다.이 4가지 요구사항은 이승만의 요청에 의해 서면으로 작성되었다. 그는 한때는 그 요구안들을 받아들였으나 그 다음 번에는 또 그것들에 반대했다.이런 식으로 계획 사항이 확정되지 않고 변경되는 가운데 3개월이 지나갔다.결국 이승만은 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에 공개적으로 선전포고를 했고, 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에도 같은 선언으로 위협을 하고 있다. 단체의 일치단결을 주장하는 호놀룰루 본부는 이승만 및 로스앤젤레스 본부와 협의할 두 명의 대표위원을 파견할 예정이다.그 대표위원은 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 위원장인 이원순[Won Soon Lee]과 그 집행비서관인 워렌 김[Warren Y. Kim]으로, 이들은 평화적 해결을 바라고 있다.문제의 요구안(1) 주미위원회의 위원단 : 주미위원회의 위원을 한 명에서, 현직 위원장인 이승만, 대변인 혹은 비서관, 그리고 위원회 경영인 혹은 회계관, 이렇게 세 명으로 증원시키는 사안이, 1942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서 열린 재미한족연합위원회 2차 총회에서 동의되었다. 주미위원회의 매달 재정은 600달러에서 1200달러로 증가되었다.2차 총회에서 추가 위원진으로는, 비서관으로 헨리 드영[Henry DeYoung] 박사가, 회계관으로 김호가 추천되었으며, 이승만은 동의했다.이승만은 증가된 자금은 수령하면서도, 약속한 인사 증원은 이행하지 않았고, 그래서 한족연합위원회는 그에게 약속을 이행할 것을 여러 차례 요청했다. 그는 동의를 할 때마다 썩 내키지 않는 기색을 보였다. 마침내 그가 드영[DeYoung]에게 워싱턴으로 와줄 것을 요청하며 보낸 편지에서 그는, 드영[DeYoung]을 초청하기는 하지만, 그(이승만)가 드영[DeYoung]의 생계비를 책임지지는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한족연합위원회의 집행위원장인 김호는 직무상의 이유로 회계관직을 사절했다. 이승만은 그가 약속한대로 무엇인가를 이행할 아무런 의향도 비추질 않았고 그러는 사이 그의 주위에는 담당 직무에 필요한 경험이 없거나 적절한 교육이 되어있지 않은 채 이승만이 하는 모든 말에 단지 “예, 알겠습니다”만 할 줄 아는 몇몇 젊은이들이 모여들었다.그런 까닭에, 각서의 첫 번째 조항은 능률적인 전체 운영을 위해 이승만에게 인사증원을 이행해 줄 것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그 외에도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워싱턴 주미위원회의 적절한 재편성을 주장하는 이유에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이승만은 일련의 중대한 과오들을 저질렀었다.(a) 그는 일본이 그의 목에 현상금 100,000달러를 걸었는데, 그 금액이 나중에는 300,000달러로 올랐다느니, 그가 왕족 출신이라느니,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기 위하여 관에 숨어 한국에서 상하이로 밀입국했다느니 등과 같은 근거 없는 이야기들을 동원한 개인적 선전행위를 지겹도록 했다. 이렇게 자기미화를 한창 하고 있을 때의 그는, 한국과 한민족에게 그가 마땅히 해야 하는 공표나 한민족의 자유에 대한 염원 및 자유를 누릴 자격, 워싱턴의 한국 대표로서 그가 세계 전쟁을 지원하며 한국인들에게 맡긴 책임들을 완수할 준비가 되어있는 한민족의 의지, 이 모두를 완전히 망각한 것처럼 보였다.(b) 포츠머스[Portsmouth] 회담에서 한국을 일본에 팔아 넘긴 책임은 테오도르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나 엘리후 루트[Elihu Root] 같은 미(美)정치가들에게 있다는 이승만의 끊임없는 공격을, 한족연합위원회는 좋지 않게 받아들였고 그에 반대했다. 그리고 이승만의, 특히 현재 미국 정부의 공감 및 지원을 구하고 있는 한 민족의 공식 대표의 미 정치가에 대한 비난행위는 정치가답지 못한 행동이라 여겨졌다. 한국 국민들이 이승만의 발언과 방책에 찬성하지 않는 동안에도, 그는 산 사람에 대해서든 죽은 사람에 대해서든 인신공격 차원의 선동을 계속했다.(c) 이승만은 미국무성에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을 요청하는 데 있어 일방적인 계약을 제안했다는 가장 중대한 과오를 저질렀다. 물론, 제임스 크롬웰[James Cromwell]이 코델 헐[Cordell Hull]에게 보낸 편지 원문의 언어는 그 해석만큼 그렇게 자의적이거나 그렇게 나쁘지는 않다. 그러나 그렇게 해석을 할 수 있는 종류의 제안은 어떤 점에서도 한국의 대의명분에 도움을 줄 수 없었고, 따라서 한국 국민의 찬성을 얻을 수 없었다. 물론, 이승만이 저지른 실수들의 대부분은 한길수[Kilsoo K. Haan]가 저지른 실수들처럼 공공연히 비판당하는 정도에까지 이르지는 않았었다. 그래도 한족연합위원회는 조용히 수습 방안을 강구했다. 이승만에게 고령의 지도자로서 그에 맞는 적절한 예우를 하는 한편, 조화를 이루기 위해 주미위원회의 위원단에 보다 젊고 새로운 인재의 채용이 요구되었다.(d) 정중한 경고와 질책으로 이해하는 게 당연할 헐[Hull] 국무장관의 답장을 크롬웰[Cromwell]이 받고 난 다음, 이승만은 주미위원회의 미국무성과의 관계는 끝이 났음을 알렸다. 한족연합위원회의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 두 본부는 모두 이승만의 행동과 태도에 변화가 있길 바랬다.갑자기 이승만은 기금의 사용 용도도 밝히지 않은 채, 5000달러의 추가 예산의 송금을 요청했다. 이승만은 점점 난폭하게 이러한 송금을 요구했다. 이승만과 서로 연락을 주고받는 가운데 한족연합위원회는 요청된 자금이, 이승만의 임시정부 승인 요구를 들어주지 않은 데 대해 미국무성에 반대하는 전국적인 시위 운동을 벌이는 데 사용하기 위한 것이란 사실을 간접적으로 알게 되었다. 또한 크롬웰[Cromwell]이 미국무성에 대해 일종의 개인적 적대감을 지니고 있다는 사실도 이 때까지는 꽤 명백해 보였다. 그러나 그 후 언젠가, 헐[Hull] 반대 시위 운동에 대한 이승만의 목소리가 조금 잠잠해졌을 때, 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는 그가 본래 요구했던 금액의 절반인 2500달러를 그에게 보내주었다. 그 금액 가운데 1000달러는 이승만이 별 목적도 없이 헛되이 써버렸고, 나머지 1500달러는 그냥 방치되어 있는데 아마 주미위원회의 예금계좌보다도 이승만의 개인 예금계좌에 있을 것이라고 보고되었다.다른 이유들 가운데서도 상기한 이유들로 인해, 한족연합위원회는 주미위원회의 적절한 재편성을 강조했다.(2) 개인적인 서신들 및 9월 25일 이러한 개인적 편지 발송 외에도 또, 그는 매주 이른바 (3) 한미위원회[the Korean American Council]에서의 그의 지위 : 한국 국민들은 한미위원회와 제임스 크롬웰[James H. R. Cromwell] 위원장의 이타적인 노력을 높이 평가해왔다. 아직도 그들은 한국의 대의명분이, 크롬웰[Cromwell]이 미국무성에 대항하는 데 사용하는 무기가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한 사람의 미국인으로서 크롬웰[Cromwell]은 어떤 정부 관리나 정부 기관에 대항해서라도 그의 권리 안에서 하고싶은 어떤 말이든 자유로이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승만은, 인정받든 인정받지 않든 외국 대리기관의 대표로서, 어떠한 정치적 중상모략 싸움에도 관여해서는 안 된다고 한족연합위원회는 주장해왔다.9월 25일 이러한 이유로 각별히 한족연합위원회는 이승만에게 그와 그의 아내가 각각 이사 및 회계관으로 있는 한미위원회로부터 두 사람 모두 물러날 것을 요청했다.(4) 파견위원의 중경 파송 : 전경무와 김호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의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교섭활동을 돕기 위한 중경 파견위원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출장 준비를 위해 워싱턴에 있는 동안 단순한 예의의 차원에서 이승만에게 그들의 파견 허가를 구했다.워싱턴에서의 전경무와 김호전경무는, 이승만에게 요구사항들을 제안하되, 쉽게 흥분하고 질투가 많으며 의심 많고 편협한, 그리고 화가 나서 싸울 때는 매우 매정한 그를 자극할 정도로 너무 강요하지는 말 것을 지시받았다. 전경무와 김호는 워싱턴에 도착했을 때, 이승만에게 전반적인 한국 사안들에 대한 오랜 토의과정을 거치면서 호의적인 태도로 요구안들을 제안했다. 이승만은 그 요구안들을 서면으로 작성하여 제출해 줄 것을 요청했고, 그들은 이를 행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이승만이 만든 함정에 빠지게 되었다. 그는 곧 그의 추종자들에게 소문과 거짓말, 비난을 퍼뜨렸고, 그 각서를 그들이 이승만 개인에 반대해서 주미위원회와 대한민국 임시정부에까지 반대한다는 증거자료로 내놓았다. 마침내 그는 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에 선전포고를 했다. 그는 십중팔구 차후의 맹공격을 위해 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는 보류해놓은 것일 게다. 그는 히틀러식 방법을 흉내내어 동시에 한 곳을 공격할 작정이다.로스앤젤레스에서의 한족연합위원회 회의이승만과 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 사이의 평화적 해결을 도모하기 위하여, 이 성명서 앞에서 이름이 언급되었던 두 명의 대표위원은 머지않아 본토로 출발할 것이다. 이승만은 표면상으로는 이 회의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그러나 이 계획을 깨뜨리기 위하여 비밀리에 반대의 움직임을 계획했다. 그는 본토 여기저기에 뿔뿔이 흩어져 숫적으로는 얼마 안 되는 그의 추종자들에게 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에 대항하는 그들의 입장을 성명하게 하고, 한족연합위원회의 회의와 거의 같은 시간에 로스앤젤레스에서 민중대회를 열도록 했다. 대표되는 단체들로는 뉴욕 동지회(약 15명), 로스앤젤레스 동지회(약 20명), 시카고 동지회(약 10명), 인민 위원회[the Peoples Committee](약 20명, 궐기를 위해 임시적으로 조직됨), 오하이오주 애크론[Akron]의 개인대표 1명, 아이다호주 보이시[Boise] 대표 1명과 그의 부인이 될 것이다. 이렇게 소집된 민중대회는 소위 전한국 회의[All-Korea Congress]라 일컬어질 것이다. 이 6개 단체가 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에 보낸 전보들은, 그들이 아마 이승만이나, 이승만이 그의 외교 사단법인체의 육군대령이자 간부위원으로 임명한 그의 대변인 벤 림브[Ben C. Limb] 같은 하나의 동일한 사람으로부터 선동되어 지시받은 것 같은 인상을 강하게 풍긴다.이승만은 대중 선동과 당파 싸움에 대단히 능수능란하다. 1931년 1월, 동지회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로부터 떨어져 나간 후, 이승만은 가짜 대표자들을 대한인국민회의 정기 연례회의에 참석하도록 소집했다. 이 비정규대표들은 대한인국민회 건물[Korean National Association Building]의 회의장에 갑자기 뛰어들어 약 2주 동안 하는 일 없이 실내에서 소일했다. 약 4개월 후, 이러한 사실이 호놀룰루의 저지 크리스티 법원[Judge Cristys court]에서 심리되었고, 이 법원은 대표의 권리는 정규대표에게 있다고 재결했다.이승만은 1915년, 하와이에서 가장 오래되고도 그 당시까지 다른 모든 단체를 포괄하는 통일된 단체였던 대한인국민회에 처음으로 공격을 가할 때도 같은 방법을 사용했었다. 이승만의 대한인국민회에 대한 공격은, 실세를 쥐고 있었으며 지휘권을 독점했었던 박영만[Youngman Park]의 단체를 퇴거시켰다. 박영만은 그의 가장 가깝고도 절친한 친구였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가장 매정한 방법으로 그를 배반하고 공격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대한인국민회 단체원들과 대표자들을 부추겨 그가 원하는 것을 얻고 한인 공동체를 분열시켰다. 비난받고 단체축출 당한 대한인국민회의 일부는 이 파란이 끝나면 그 본체와 재결합할 것을 선언하며 조선독립연맹[Korean Independence League]으로 조직되었다.하와이에서 한국 감리교 선교회의 지도적 인물이었던 이승만은 1918년 갑자기 교회로부터 독립해 나와 나중에 한인기독교회[Korean Christian Church]가 될 한인신교회[Korean New Church]를 조직했다. 이승만은 군중심리를 부추기는 데 정확히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다.이승만과 대한민국 임시정부1919년 그 당시 막 조직되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외의 한국인들로부터의 자발적인 애국 기금의 기부가 필요했다. 국무총리에 해당하는 집행위원장이 된 이승만은 스스로를 대통령으로 선언하고, 대표자의 권위가 아닌 16세기 군주도 그 자신의 겸손에 얼굴을 붉힐 정도의 절대적인 권력을 쥐고 있는 듯 행세했다. 그는 그의 독점적 관리 아래 놓일 한인 채무증서를 발행했다. 그 결과는 또 하나의 당파적 분쟁이었다. 그는 어떤 일을 하더라도 정부나 국민의 뜻을 고려사항에 넣는 최소한의 의향도 보이지 않았다.1922년 그는 상하이에 갔는데, 그 곳에 위치하고 있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이승만의 참석을 요청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회의 도중 갑자기 자취를 감추더니 하와이로 살그머니 되돌아왔다. 그 때 그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보내는 하와이 및 미국 본토로부터의 모든 지원을 오로지 방해할 계획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온갖 종류의 허언을 유포시켰다.그는 우선, 그가 태평양 연안 쪽의 한국인들에 대한 절대적인 통솔권을 지니고, 전적으로 그의 개인적 착각에 따르면, 국가의 독립운동을 위한 하와이 및 미국 본토 한국인들의 전 기부금을 받아서 사용할 수 있게 만들어 줄 확실한 협정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맺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계략은 아무런 효과도 없이 또 하나의 당파 싸움만을 야기시켰다. 그리고 난 다음, 그는 상하이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가짜이며, 실은 그, 바로 그만이 합법적인 정부라고 선언했다. 왜 그는 이에 앞서 임시정부의 우두머리 노릇을 하고 그러한 직위에 취임선서를 했었는가? 그는 공개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항하여 싸웠고, 이후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어쩔 수 없이 이승만을 반역자로 탄핵하고 1926년 그에게 사형을 선고했다.한국인의 단합1934년, 급격히 다가오는 국제정세의 동향은 이러한 추세의 어느 편에라도 들어가기 위해서는 한국인 모두가 하나로 단결된 완전체가 되어야 한다는 이념을 요구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의 발족을 통해, 하와이의 한국인 단체들을 하나로 통합시킬 계획이 착수되었다. 이러한 통합을 위해 대한인국민회가 부단히 노력한 끝에, 동지회 지도자 9명 가운데 6명이 여기에 찬동하였다. 이 6명의 지도자들은 대한인국민회 전체 임원의 사직에 의해, 동지회에서의 직책과 겸임하여 대한인국민회의 임원이 되었고, 이 단체의 통상적인 절차와는 달리 그 해의 중간에 특별선거를 열었다. 불행히도 이 통합 계획은 실패했는데, 그 이유는 분명 동지회의 절대 우두머리로 있는 이승만의 명령에 의해 이 지도자들이 동지회의 직책에서 뿐 아니라 단체로부터도 축출 당했기 때문이다. 1938년, 급격히 비등점을 향해 가는 세계정세에 따라 대한인국민회는 통합을 위한 노력을 다시 한 번 했고, 마침내 대한인국민회는 압도적인 대다수의 동지회 임원 및 단체원들의 찬성을 얻었다. 그리하여 두 단체의 공동 대표자 회의가 소집되어 같은 해 11월 중순부터 하순까지 밀러 1306가[1306 Miller Street] 대한인국민회 건물[Korean National Association Building]에서 열렸다. 마지막 순간까지는 모든 일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그 때 이승만의 광적인 지지자 한 사람에 의한 선동 때문에 동지회 대표위원들 사이에 불화가 생겼다. 이승만은 동지회 대표위원들에게 계획에 방해가 될 만한 연설을 했고, 그들은 그의 지시에 따라 그 다음 회기의 공동 대표자 회의에서 자리를 박차고 퇴장하여 다시는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워싱턴에서의 한국의 대의명분대한인국민회는 한국의 단합이 하나의 민족으로서, 그리고 전 인류의 일원으로서 한(韓)민족 모두의 노력에 필수조건이라 생각하며, 아직까지 한국의 단합에 대한 신념이나 희망을 굽힌 적이 없었다. 그렇지만 한길수[Kilsoo Haan]는 자칭 한국 국민의 대표 자격으로 워싱턴에 갔고, 이승만도 스스로 그와 동일한 자격으로 거기에 따라갔다.아무리 이 두 사람이 한국과 한국인을 위해 아무리 적은 혹은 많은 외교와 선전의 일을 했다고 할지라도, 그들의 활동은 하와이 대한인국민회(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 of Hawaii)의 눈에는 별 다른 영향은 미치지 못하고 손해만 더 끼친 것으로 보였다. 왜냐하면 첫째는 그들이 서로를 공격하고 서로에게 책임을 전가하며 모든 영예와 영광을 주장했기 때문이다. 이는 비극적인 일은 아니더라도 대체로 사소하고 무익한 일이었고, 따라서 한국인의 분열과 무능을 광고하면서 가장 바람직하지 못한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동시에 그것은 좀 더 양심적이고 좀 덜 기회주의적인 다른 대표를 파견할 수 없었다. 그런 사람을 발견할 수 있었다 할지라도 말이다. 왜냐하면 그런 시도는 그 싸움을 격렬하게 만드는 결과를 낳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두 방향의 승부를 세 방향의 승부로 변화시킬지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따라서 1939년 초반에 하와이 대한인국민회는 한국 임시정부에게 이승만이나 한길수를, 혹은 둘 모두나 둘을 함께 그것(대한인국민회)의 워싱턴 공식 대표로 임명함으로써 그 상황을 구제할 명령을 내려달라고 호소했다. 대한인국민회는 그들 중 어느 쪽도 전혀 쓸모가 없었다고 해도 그런 피임명자 누구라도 지지할 것을 약속했다. 한사람은 시시한 당파적인 선전 외에는 아무 것도 할 능력이 없었고 다른 사람은 수다쟁이, 전문 거짓말쟁이, 사기꾼, 기껏해야 희망 없는 기회주의자였지만 말이다. 따라서 대한국민회는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통합을 위해 분투했다. 이를 위해서 당시 김구가 이끌던 중국에 있던 한국 정당인 한국독립당의 하와이 지부는 그 계획에 동의했고 많은 도움을 주었다. 그리고 김구는 한국인의 통합을 가장 철두철미하게 지지한 사람이었다.이승만의 임명 이런 호소가 있은 이후 김구는 이승만과 한길수 둘 모두와 서신 왕래를 시작했다. 오래 전에 김구는 한길수가 전혀 신뢰할 수 없는 사람이란 것을 자각하였다. 한길수가 미국과 그 영토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 가운데 70퍼센트가 친일파라는 이야기를 유포시켰을 때, 그는 이승만과는 계속해서 연락을 취하면서도 한길수와는 연락을 끊었다. 한편 이승만의 추종자들 가운데 한국의 통일을 가장 열광적이고 일관적으로 지지한 인물인 이원순은 이승만을 워싱턴 주재 한국 위원으로 임명하는 일을 가능하게 하는 데 큰 기여를 했다. 따라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결국 이승만에게 내렸던 사형 선고를 철회했고 주로 김구의 노력을 통해서 이승만에 대한 적대적인 태도를 뒤집었다. 아마도 한길수 보다 이승만을 선택한 일은 두 개의 악 가운데 덜 한 것을 선택한 것이리라. 어쨌든 1941년 4월 호놀룰루에서 개최되었고 한족연합회의 공식적인 조직화를 낳은 해외한인회의가 이승만을 구미위원부의 워싱턴 대표로 추천하자,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그를 그 자리에 임명했다.이승만의 은인들 이승만의 은인들은 언제나 그에게 혼났다. 이승만이 프린스턴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후 1911년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은인들을 잊었다. 그가 한국 구체제에서 한국의 정치적인 포로였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한국의 기품 있는 나이 든 신사인 이상재가 이승만의 가족을 도왔고, 그를 감옥에서 풀려나게 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학생으로 있었을 때, 그와 그의 가족은 이승만에게 헤아릴 수 없을 만큼 큰 도움을 받았다. 하지만 1911년 한국으로 돌아오자마자, 그는 이상재를 자신의 하급자로 그리고 하찮고 대수롭지 않은 아랫사람으로 취급했고, 곧 그가 같이 일하기로 되어 있었던 한국인들의 공감을 상실했다. 그는 Y.M.C.A.와 함께 일했지만, 자신의 위사을 상당히 오랫동안 유지할 수 없게 되었다. 그렇지만, 이상재의 사심 없는 마음을 통해서, 1913년 그는 뉴욕의 사라토가(Saratoga)에서 4년마다 열린 감리교도 회의의 대표로 미국으로 탈출할 수 있었다. 1927년 이상재의 사망 이후, 호놀룰루 한인들은 그에게 존경을 표하는 대중 집회를 열었다. 이승만은 그때 주요한 연설자였다. 이승만의 개막사는 "이제 나의 가장 충실한 신민이 죽었습니다"였다. 이상재의 연배, 높은 사회적 지위, 개인적인 관계, 고명한 인격에 비추어 볼 때 그런 오만과 그에 대한 그의 무례함은 적절하지 않았다. 이 같은 일은 이승만이 어떤 부류의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이승만이 한국에서 감옥에 있었을 때, 그의 아내는 너무 어려서 스스로를 돌볼 수 없었던 어린 아들과 이승만의 부친과 매우 힘겨운 시간을 보냈다. 아주 구식 사람인 이승만의 부친은 상습적인 술꾼이었고 과도한 음주 탓에 거의 정신이상이었다. 그녀는 이런 궁핍한 가족을 후원해달라고 구걸해야만 했다. 이승만이 감옥에서 석방되었을 때, 그는 아내를 형편없이 대했다. 그는 당시 8살밖에 안 되었던 아들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는 반 미친 아버지와 합세하여 불성실하고 품행이 나쁜 며느리이자, 배신행위를 포함한 온갖 종류의 비난을 아내에게 퍼부었다. 그녀는 괴로움에 시달리면서도 참을성 있게 그를 기다렸고 시아버지를 위해 악착같이 일했다. 이승만의 아들은 워싱턴 D. C.에서 죽었다. 이승만은 혼자 한국으로 돌아왔다. 그는 집으로 가지 않고 호텔에서 지냈다. 그의 아내는 자신의 부당한 소원함을 한탄했고, 그의 친구들 그리고 곧 공동체 전체가 이승만에게 충고했고 그를 비난했다. 그래서 그는 집으로 갔다. 하지만 아내와 첫 대면에서 그는 느닷없이 집을 뛰쳐나왔고, 자신을 살해하기 위해 애인을 벽장에 숨겼다고 아내를 고발했다. 이 고발은 결코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었다. 교회 공판이 고소인으로 그의 아내에 의해 시작되었다. 이승만은 재판에 출석하기를 거부했다. 소송의 결정을 그저 무시했고 아내에게서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었다는 듯 돌보지 않았던 이승만에게 불리한 판결이 내려졌다. 미국에 두 번째 입국한 이후 그리고 사라토가에서 열린 감리교 회의에 참석한 이후, 그는 갈 곳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는 한동안 뉴저지 캠든(Camden)의 Y.M.C.A.와 함께 일했고, 여전히 그에게 충성스러웠던 박용만은 종교 사업과 교육 사업을 하기 위해 그를 하와이로 데려오는 데 도움을 주었다. 스스로 모든 것을 해야만 했던 그는 등장하자마자 종교 사업과 교육 사업을 착수했고, 동시에 그의 은인에게서 정치적 지도력을 제거하는 일을 꾀했다. 그것이 1915년 하와이에서 발생한 한인들 간의 당파 싸움의 주된 원인이었다. 수년 동안 감리교 선교회의 지원을 받은 후, 그는 이 은인에게 반발했다. 이번에는 1917-18년의 당파 분쟁이 그것이었다. 감리교회 지역 선교회의의 기록을 참조해 볼 수 있다. 1930년 초반에 이승만은 최악의 재정적인 어려움에 처해 있었다. 그가 공채로 시작한 올라아(Olaa)에서 재목을 베어나고 농사를 짓겠다는 중국의 구상에서 밝힌 번영과 성공은 약속과는 달리 완전히 실패하였다. 그는 그것을 해 나갈 수 없었다. 무거운 부채로 인해 그는 약속을 지킬 수 없었다. 그는 진주만에 건식 독을 건조하기 위해 오하이오 블록을 공급하는 계약을 정부와 맺었지만, 당시 계약의 조건을 이행할 방법도 수단도 보이지 않는다. 대한인국민회 간부진의 새로운 성원인 헨리 김(Henry Kim)과 한국기독교회의 새로운 목사인 윌리엄 Y. 이(William Y. Lee)는 여론을 움직여서 그를 곤경에서 구해낼 책임이 있었다. 그들은 그를 위한 자리를 만들겠다는 희망을 품고 당시 죽어 있던 동지회를 부활시켰다. 그는 호놀룰루에 나타나자마자, 두 사람을 산산이 깨버리겠다고 단언했는데, 그는 이 과업을 이전 당파 사움에서처럼 절반도 성공하지 못했다. 그는 추종자들과 함께 대한인국민회에서 이탈했다. 그는 그 단체의 일원인 적이 없었지만, 추종자 대부분은 한때 그 일원이었다. 그는 한인기독교회(Korean Christian Church)를 계속 자신의지지 세력으로 두었지만 그 성원의 상당수가 떨어져나갔다. 그가 교회를 접수했을 때, 그는 자신이 블랙리스트에 올렸고 "반역자"로 부당하게 고발한 교회 이사회(church directorate)의 목사와 성원에 대해 잔인한 공격과 모욕을 주었다. 그는 결국 목사와 이사회의 대다수, 즉 9명 가운데 7명을 내쫓았다. 이승만이 미국 워싱턴에 있는 한족연합회 한국위원이 된 지금 그것이 가능했다.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의 미국 한족연합회는 1941년5월 이래 그를 재정적으로 또 도덕적으로 지원해왔다. 이제 그는 다시 한 번 은인을 짓밟으려고 시도하고 있는데, 이번에는 한족연합회였다. 처음에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사무실을 산산 조각내려고 했고, 호놀룰루의 사무실도 그럴 가능성이 컸다. 여전히 호놀룰루의 한족연합회는 한국인들 간의 내부적인 통일이 그들로 하여금 스스로를 자유롭게 하고 세계의 해방을 위한 전지구적인 투쟁에 적극 참여하게 하는 모든 요소들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이라는 이론을 단단히 고수하고 있다. 그리고 워싱턴의 주미외교위원부와 로스앤젤레스의 한족연합회 간에 현재 존재하는 간격을 만족할만하게 해결할 길이 있을 것이란 바람을 견지하고 있다. 그들은 이승만을 비밀로 해 두는 것 외에 그에게 기대하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만약 누군가 해야 할 어떤 일이 있다면, 그들은 그에게 기꺼이 모든 영광을 줄 것이다. 그들은 이승만의 사소한 말다툼과 선동에도 불구하고 그리고 심지어 그의 과거 이력을 알면서도 화합하기를 원한다.

    967 한국독립운동(미하원의회 기록)

    작성일: 1944-02-07회의록한국의 동향J. 해리 맥그리거(J. Harry McGregor) 의원(오하이오주)의 의사 개진미국 하원의회1944년 2월 7일 월요일맥그리거(McGregor): 의장님, 제 발표를 허락해 주심에, 저는 회의록에 오하이오주 애슐랜드시에서 한 어떤 연설을 첨가하게 되어 기쁩니다. 이 연설은 한국 동향과 관련된 최근의 행렬과 기념행사에서 발표된 것입니다. 저는 안타깝게도 이번 의사일정에 참여하기 위해 이 행사에 개인적으로 참석하지는 못했지만, 이런 기회를 갖게 되어 세계가 한국의 동향에 대해 좀 더 명확한 사실을 알 수 있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의 상황은 “정의와 공정함은 모든 인류의 지향점이다”를 믿고 있는 모든 이들의 진지한 존중을 정당화하는 것입니다.연설은 다음과 같습니다.가이 C. 마이어스(Guy C. Myers) 여사의 연설오늘 이 자리에 계신 신사 숙녀 여러분, 그리고 다양한 청중을 이루고 계신 상호조직 여러분, 또 우리 애슐랜드(Ashland) 시민 여러분께서도 오늘 아주 많이 참석해 주셨군요. 미국 국기가 이곳 저곳에 눈에 띄게 걸려 있습니다. 우리 거리에도 환영의 현수막이 걸려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국기도 눈에 보입니다. 그것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국기입니다. 바로 한국 국민들의 국기입니다.우리의 중심가에서, 교회, 시민클럽, 고등학교 강당, 그리고 우리 가정에서, 애슐랜드의 시민들은 과거에서부터 현재까지 한미위원회(Korean-American Council)를 후원하고 있습니다. 이 조직은 미국 국민들의 조직으로, 한국 국민들의 일본인에 대한 오랜 영웅적 저항을 지지하고 있습니다.지금 우리와 같이 많은 한국인들이 이곳에 있습니다. 우아하고 화려한 의상의 한국 숙녀분들, 미국인 남성의 전통적인 정장을 훌륭히 차려입으신 한국 신사분들.이제, 이 방송을 듣는 여러분들은 특히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야 합니다. “도대체 애슐랜드가 저 멀리 아시아의 나라인 한국과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인가”제가 그 질문에 대답을 하게 되어 매우 기쁩니다.한국은 “잊혀진 나라”를 대표합니다.제가 생각하기에 애슐랜드에 사는 우리들은 한국에 대해 알게 된 최초의 미국인 사회입니다. 지난 가을 우리는 우리 가운데에 자유를 위한 열정적인 운동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한국인이었습니다. 그로부터 우리는 한국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우리는 한국의 초대 대통령인 이승만(Syngman Rhee) 박사가 일본의 한국 지배를 끝내게 하기 위해 이끈 위대한 투쟁에 대해 알게 되었습니다.그리고 우리 앞에 덮이지 않은 한국 영웅담의 한 페이지, 그 다음 페이지를 넘겨가면서 우리는 스스로에게 질문을 했습니다:“어째서 이 일에 대해 무언가 이루어지지 않는가? 왜 한국인들에게는 무력이나 군대의 형식으로 도움이 주어지지 않는가? 어떻게 3천만 명이 살고 있는 나라가 세계의 양심으로부터 지워질 수가 있나?”그리하여 우리는 무언가를 하기로 했습니다.평범한 중서부의 작은 도시 애슐랜드에 사는 우리들은, 우리의 도시를 자랑스러워하고, 우리의 가정과 교회, 산업을 자랑스러워하며, 우리 사랑스러운 전원생활의 평화와 안전에 감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번 전쟁에 우리가 자금과 군인을 내보낸 것을 자랑스러워합니다. 그런 우리는 결론을 냈습니다.이 일을 하면서 우리는 미국의 다른 사람들도 한국에 관심을 집중하게 할 수 있다고 느꼈습니다. 그리고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쫓아낼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을 것이라고 말입니다.그리고 카이로 회담이 시작되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 장개석 총통은 카이로 회담에서 한국인들의 독립을 약속했습니다. 그들이 오하이오주 애슐랜드를 알아서 이곳의 일을 채택하는 의식으로 그렇게 했다고 여러분들을 믿게 할 생각은 없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위대한 행동은 자유를 사랑하는 모든 이들에게 박수를 받았습니다. 그리고 우리의 계획에 약간의 변화가 필요하게 만들었습니다. 카이로 선언에서는 한국이 “정당하게” 독립하게 될 것이라고 했습니다. 애슐랜드의 시민인 우리들은 한국승인회의(Korean Recognition Conference)의 주인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자유는 미끼가 아니라고 믿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약간의 도움이 무기와 군대의 형식으로 한국인들에게 도달한다면, 그들은 우리가 진지하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 믿습니다. 한국인들은 투쟁가입니다. 그들은 일본인들을 미워합니다. 그러나 맨손으로 총을 든 사람과 싸울 수는 없습니다. 이 선량한 사람들이 일본인들을 물리칠 수 있도록 도와줍시다! 감사합니다. 윌리엄 H. 킹(William H. King) 의원의 연설 미국 정부가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즉각적으로 인정하게 하기 위한 애슐랜드 시민의 고귀한 노력에 함께 참여하게 되어 영광입니다. 한국은 한 때 여러 국가들의 가족이었습니다. 우리 미국 국민들이 한국을 설득하여 스스로 강요한 고립을 버리고 근대 세계에 합류하도록 하였습니다. 한국은 우리를 믿고 따라왔습니다. 한국은 우리를 믿고 우리와 조약관계를 맺었습니다. 그러니 우리가 가장 처음으로 공사관을 철수하고 외교사절은 짐을 챙겨 대표들을 소환하고 일본과의 합병을 조금의 반대도 없이 공식적으로 승인했을 때 한국인들을 얼마나 당황하고 슬펐겠습니까. 우리가 얼마나 빨리 일본인들을 인정했습니까. 그러나 오늘날 진주만 기습이 일어난 지 2년도 더 되어 우리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는데 실패했습니다. 이 정부는 일본인에 대항하여 혁명적으로 생긴 것입니다. 이 정부는 민주주의 원칙에 근거하여 설립되었습니다. 이 정부는 우리가 조금이라도 지원을 해준다면 방대한 한국의 인력과 자원을 사용하여 극동의 전쟁이 조기에 끝나도록 도울 수 있을 것입니다. 신사숙녀 여러분, 도덕과 예절에 있어서 동양도 없고 서양도 없습니다. 명예는 서양만의 배타적인 소유물도, 동양만의 배타적인 소유물도 더 이상 아닙니다. 우리는 우리 나라 외교사의 한 페이지를 지금 없앨 수 있습니다. 지금 바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으로 말입니다. 40여 년 전에 한 잘못을 바로 잡도록 합시다. 애슐랜드의 시민들은 한국의 이야기를 알고 있습니다. 그들은 잘못이 바로잡히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그들은 전국에 한국의 이야기가 알려지기를 기도하고 희망합니다. 애슐랜드의 시민들은 확신합니다. 미국 국민들이 한국의 모든 이야기를 알게 된다면 그들의 소망을 워싱턴에 알리고, 그렇게 되면 잘못이 바로 잡힐 수 있으리라는 것을 말입니다. 감사합니다. 제임스 신(James Shinn) 박사의 연설 이 회의를 가능하게 해주신 애슐랜드의 시민께 진심으로 감사드리는 마음에 이렇게 연설을 합니다. 그리고 마이크를 통해 듣고 계시는 청중들께도 감사를 드립니다. 저는 한국인입니다. 지난 가을, 저는 애슐랜드에 왔습니다. 저는 우리의 존경하는 지도자이신 이승만 박사를 돕고 싶었습니다. 그는 한국 민중들을 위해 반세기 가까운 세월동안 자유를 쟁취하기 위한 투쟁을 해오셨습니다. 저는 뉴욕이나 시카고에서 시작했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도시의 거대함에 기가 죽었습니다. 고층 빌딩의 협곡 속에서 작은 목소리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교통혼잡의 소음 속에 그 목소리가 어떻게 들릴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저는 전통적인 미국인 사회인 애슐랜드를 선택했습니다. 농업과 산업에 종사하는 시민들은 대지의 여신에게서 멀리 떨어져 있지 않으므로 자연의 속삭임을 들을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신의 목소리인 것입니다. 저는 이곳에서 관대한 호의를 받았습니다. 성직자 협회에서는 교회를 열어주셨고, 시민클럽에서는 제가 한국 국민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리고 재향군인회에서도 저를 도와주셨습니다. 학교와 애슐랜드 대학은 제가 이야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을 주셨습니다. 이 도시의 고위층에서도 제 노력에 진지한 관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얼마지 않아 모든 사람들이 도움을 주겠다는 제의로 응답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정말로 도와주셨습니다. 제가 얼마나 의기양양해질 수 있었는지 여러분께 표현하기가 힘들군요. 정의와 공정함은 모든 인류의 목표입니다. 그리고 정의와 공정함은 한국에도 세워져야 합니다. 애슐랜드의 시민들은 한국인들이 인정받아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들은 기꺼이 제 목소리에 그들의 목소리를 합쳐주셨습니다. 그들은 희망적으로 모든 미국인들이 이런 식으로 한국의 일을 알게 될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저도 역시 그렇게 되리라고 믿습니다. 무한한 겸손과 감사의 마음으로 다시 한 번 말씀드립니다. 저는, 한국에서 태어난 한국인입니다. 그리고 일본인들의 학정을 목격했고, 직접 겪었습니다. 저는 애슐랜드로 왔습니다. 그리고 미국의 진정한 마음을 찾았습니다. 감사합니다. 폴 더글러스(Paul Douglass) 박사의 연설 저는 오늘 여기 애슐랜드에 있게 됨을, 그리고 이 매력적인 도시의 시민들이 약 반세기 전의 잘못을 바로잡는데 사려 깊고 우정어린 노력을 하고 있음을 목격한 것에 대해 무한한 영광으로 생각합니다. 일본이 한국을 점령하고 4,200년이나 내려오던 독립적인 역사를 말살했을 때 세계의 다른 나라뿐만 아니라 미국 역시 등을 돌려버린 그 태도에 대해 언급하겠습니다. 미국은 한국과 조약도 맺은 상태였습니다. 자매 국가로서 지원을 하겠다는 엄숙한 약속이었던 것입니다. 이제 우리 정부는 그 때의 국가적 불명예의 오점을 지울 수 있는 기회를 맞게 되었습니다. 세계가 일본의 침략 행진의 첫걸음에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던 반면, 한국인들은 그 때나 지금이나 일본의 점령을 반대하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들은 자유를 사랑합니다. 그들은 과거에도 자유를 위해 기꺼이 죽을 각오였고, 현재에도 그렇습니다. 우리가 그들에게 무기와 군수품을 제공한다면 그들은 유능한 게릴라 전투원이 되고, 테러리스트가 되고, 활동가가 되고, 첩보원이 될 것입니다. 그리고 무기를 가지고서 일본인들과 싸우고 있는 모든 한국인들은 그곳에 필요한 미국 군인이 한 명이라도 더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자유를 위한 인간의 투쟁에는 지도자에게 지워지는 책임과 의무를 기꺼이 받아들이는 굳건한 영혼이 항상 있습니다. 한국인들은 그런 많은 남성과 여성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오늘 우리는 운 좋게도 한 분을 모시게 되었습니다. 그 분은 반세기가 넘게 한국 국민을 위해 부단히 노력해왔습니다. 그는 자유를 위해 신체적 정신적으로 온갖 고문을 다 겪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그의 경력을 되돌아봤을 때, 그의 불굴의 의지를 주목해야 합니다. 이 모든 세월동안 그는 한 번도 희망을 놓은 적이 없습니다. 우리는 마음속에서 알고 있습니다. 신의 섭리는 그의 노력이 결론에 다다랐을 때 결코 실패를 허락하지 않는다는 것을 말입니다. 애슐랜드 시민과 청중께 이 분을 소개할 수 있게되어 정말 큰 영광입니다.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시고 현재는 워싱턴의 사절로 계신 이승만 박사이십니다. 미국이 한국 정부를 공식적으로 인정만 한다면 -그리고 저는 우리의 위대한 나라에서 그렇게 하지 않을 것이라고는 믿을 수가 없습니다만, 특히 카이로 선언이 있었기 때문에 말입니다-그렇게만 되면 이승만 박사는 새로 태어난 그의 조국의 초대 미국 대사가 될 것입니다. 신사 숙녀 여러분, 이승만 박사님이십니다. 이승만 박사의 연설 감사합니다, 더글러스 박사님. 이곳 청중들과 함께 한 친구 여러분, 오하이오주 애슐랜드에서 연설을 하게 되어 얼마나 흥분이 되는지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이곳은 중서부의 전통적 도시로 훌륭한 시민들이 살고 계시며 또한 금번의 한국승인회의에 참석하도록 저를 초청해 주셨습니다. 한국의 자유를 위한 저의 49년간 투쟁 속에서 저는 햇볕 한줌이 없는 암흑의 시기 속에서도 희망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그 희망이란 바로 언젠가 미국의 위대한 국민들이 한국에 대한 진실을 알게 되어 저희 국민들에게 정의를 실현해 주시리라는 것입니다. 애슐랜드와 다른 도시 시민들이 자발적으로 나서 한국 국민의 정의를 위한 그들의 신념 속에 시위를 하는 것을 보고 저는 반세기가 넘은 제 소중한 꿈이 마침내 이루어 졌다는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곳 미국에서는 몇 년 전에 “잊혀진 사람”에 대한 많은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실업의 첫 번째 희생자인 그 불쌍한 인간은 여러분의 거대한 폭풍과도 갚은 절망의 분노에 의해 내던져지고 괴롭힘을 당했습니다. 대양의 파도와 같은 절망이 그를 삼켜버릴 것만 같은 시점이었습니다. 그 때 갑자기 무언가가 벌어졌습니다. 암흑 속에 한 줄기 빛이 뚫고 들어와 분투를 하고 있는 그 인물을 건졌습니다. 함선의 선장이 명령을 내렸습니다. 배는 방향을 바꾸고 그대로 달렸습니다. “잊혀진 사람”은 구조되었습니다. 이제, 왜 그렇게 되었는지 여러분께 말씀드리겠습니다. 위기의 시기에 이 위대한 나라는 항상 그 영혼을 찾아내었습니다. 그 국민인 여러분들은 이 나라의 배입니다. 그리고 여러분들의 선장은 선택할만한 가치가 있었습니다. 한 민족이 자신의 깊은 내면에서 동정심과 정의, 예절의 가치를 찾아낼 수 있다면, 그 민족은 전지전능한 하나님과 손을 잡고 걸어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함께라면 “잊혀진 사람”이란 없습니다.오늘 저는 여러분께 제 조국과 그 국민들이 자유를 찾기 위해 한 오랜 투쟁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저는 “잊혀진 나라”인 한국에 대해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카이로 선언에서 한국의 독립을 약속했으므로 저희는 더 이상 잊혀진 나라가 아닙니다. 각지의 한국인들은 마침내 길이 열리자 기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프랭클린 D. 루즈벨트 대통령, 처칠 수상, 그리고 장개석 총통에게 깊이 감사드리고 있습니다. 아시아에 대한 대서양 헌장의 연장인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훌륭하신 대통령은 언젠가 이를 약속하셨고, 이제 그 약속을 이행하신 것입니다. 한민족의 삶은 아주 오래 전의 역사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4,200년이 넘지요. 그리고 한국은 인류문명에 빛나는 공헌을 했다고 정당하게 주장할 수 있습니다. 동방 여러 곳의 학자들이 수백 년 전, 최초의 태양관측소에 찾아왔었고, 그 구조물이 아직도 한국에 서있습니다. 미국의 국회도서관에는 최초의 백과사전인 한국의 서적 112권을 소장하고 있습니다. 이 도서는 미 대륙이 발견되기도 전에 한국에서 인쇄된 것입니다. 그리고 뉴욕의 자연사박물관에는 한국의 또 다른 공헌인 금속활자 58 조각이 소장되어 있습니다. 이 금속활자는 1406년에 한국에서 발명된 것으로 유럽의 구텐베르그의 발명보다 50년 앞선 것입니다. 여러분은 질문할 수도 있습니다. “왜 우리가 이런 일을 몰랐을까요?” 여러분들이 알지 못했던 이유는 40여 년이 넘게 일본인들이 허가한 문건을 통해서만 한국에 대한 글을 읽을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전부가 아닙니다. 일본인 스파이들은 미국 도서관에서 한국에 대한 서적을 샅샅이 찾아내었습니다. 즉, 제 불행한 조국에 암흑의 밤이 찾아와서 일본인들이 점령을 하고 우리 국민들을 노예로 만들기 전에 출간된 서적들 말입니다. 그 때부터 일본인들은 한국을 잊혀진 나라로 만들기 위해 변함없는 노력을 했습니다. 그들은 3천만 명이 살고 있는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의 존재를 세계 다른 곳으로부터 거의 잊혀지게 할 뻔했습니다. 생각해 보십시오! 3천만명의 삶과 문화, 문명이 세계의 연대기에서 지워진 것입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의 이름을 바꿨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어를 가르치지 못하게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한국인들로 하여금 적어도 외부에 나타나는 공적인 자리에서는 그들의 한국 이름을 버리고 일본식 이름을 사용하게 했습니다. 일본인들은 무력으로 하나만 빼놓고 한국에 있는 모든 것을 바꿨습니다. 그들은 한국 국민들의 자유를 사랑하는 정신은 바꾸어놓지 못했습니다. 그 정신은 과거에도 일본에 대항하여 활활 불타올랐고, 앞으로도 다시 그럴 것입니다. 여러분들도 아시다시피 일본은 정의의 도덕적 힘을 알지 못합니다. 일본이 아는 것은 검에서 나오는 무력일 뿐입니다. 그러나 검은 아무리 강하다 할지라도 자유를 사랑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이길 수 없습니다. 한국 국민들은 여러분들을 도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일본에 대항하는 3천만 명의 사람들이 일본의 문 앞에 버티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여러분들이 사용만 한다면 잠재적 동맹인 것입니다. 일본의 진주만 기습으로 인해 여러분의 동포 3,000명이 희생된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그리고 그 후로부터 수천 명이 더 죽었습니다. 또한 우리 한국인들도 그렇게 죽은 동포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일본인들의 괴롭힘을 받고 있는 그들의 고통의 울부짖음이 여전히 우리에게 울리고 있습니다. 한계를 넘어선 그들의 목소리는 우리에게 일본인들을 봐주라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듣고 있는 죽은 자의 목소리는 일본 군국주의를 즉각적으로 파괴하라고 요청합니다. 그들은 일본의 군국주의자들을 처단하라고 합니다. 저는 죽은 여러분들의 동포도 그렇게 외치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우리는 그 목소리를 마음에 두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그렇게 하지 않는다면 앞으로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가 저지른 실수의 대가를 지불하며 살아야 할 것이기 때문입니다.한 때 일본을 이기던 하나인 한국이 지금까지 일본을 물리쳐야만 하는 다른 나라들과 연합할 수 있는 기회를 거부당해온 지금의 상황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까? 한국인들이 여러분들과 연합하기 위해 애걸복걸해야 하는 것이 이상한 것이 아닙니까? 저는 여러분들이 우리가 요구하는 기회를 주어야만 하는 도덕적 의무가 있다고 강력히 주장하는 바입니다. 그리고 이제 그 이유를 말씀드리겠습니다. 한국은 거대한 왕국인 중국의 서쪽에, 만주와 몽골, 러시아가 북쪽에, 그리고 호전적인 민족인 일본이 동쪽에 있었기 때문에 최근 수세기간 이웃 국가들의 전쟁에서 전쟁터가 되었습니다. 그러나 한국인들은 무려 42세기 동안 독립국가로서 그들의 존재를 지키고 유지할 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대단한 기간입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서구의 백인들이 와서 일본의 호전적 민족에게 우등한 전쟁무기를 주기 전까지는 자유를 즐기며 살았습니다. 62년 전, 우리의 평화로운 국토에 미국인들이 찾아왔습니다. 미국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리 와서 외부 세계에 끼십시오. 무역을 위해 개항하십시오. 국민들이 진보의 축복을 즐기게 하십시오. 우리가 손을 잡고 이끌어 주겠습니다. 우리가 안내를 하겠습니다. 우리가 지켜주겠습니다.” 그래서 1882년에 그렇게 했습니다. 한국의 국민들은 미국의 국민들과 엄숙한 조약관계에 들어섰습니다. 여러분들도 바로 그 조약이 여러분들의 역사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 조약은 폐기된 적이 없습니다. 조약의 훌륭한 구절들은 변함없이 그대로 있습니다. 그리고 예외 없이 제 조국과 여러분들의 조국이 맺은 외교관계의 진실을 알고 있는 미국인들은 용기 있게 정의를 실현해야 한다고 말해오고 있습니다. 저는 여러분들이 그런 목소리에 합류하여 주시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충분히 말했지만, 서양의 백인들로부터 무기를 얻은 일본인들은 1905년에 한국을 점령했습니다. 그리고 그때부터 우리 국민들을 노예로 만들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일본이 아시아를 침략하려는 첫 단계였습니다. 우리는 그 첫 번째 희생자였습니다. 왜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여러분들과 힘을 합할 기회를 얻지 못하는지 제가 다시 한 번 부탁드리는데 동의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왜냐하면 전 세계 모든 인류 중, 일본인들의 가장 거대한 적은 한국인들입니다. 우리는 1919년에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우리는 다시 한 번 봉기할 준비가 되어있습니다. 1919년의 독립운동 당시, 전국 각 분야를 대표하는 33인의 애국자들은 우리의 수도인 서울에서 은밀히 만나 독립선언서를 인쇄했습니다. 그들의 운명은 구금과 고문, 그리고 죽음이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끔찍한 운명도 우리가 전국에서 비밀선거를 하고 의회를 구성하는 것을 막지 못했습니다. 이 의회가 소집되어 정부를 구성하고 세계에 그것을 선언했습니다. 이 정부는 이제 25년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기간 동안 홀로 일본과 싸워왔습니다. 그러나 민주주의를 위한 전쟁을 하던 사람들은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 정부는 1941년 12월 7일부터 국제연합의 승인을 요청해오고 있습니다. 우리의 미국인 친구들은 한미위원회를 조직하여 국제연합이 즉각적인 조처를 취하도록 요청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아무런 결과가 없습니다. 미국 정부가 한국 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독립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점을 기억해주십시오. 우리는 스스로 그것을 얻기 위해 싸워야만 하고, 그것을 위해 싸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그렇지만, 승인은 당신들이 당신들의 민주주의 병기고에서 만들어내고 있는 비행기와 대포와 탄약의 일부가 현재처럼 우리에게 거부되지 않을 것임을 의미할 것입니다. 우리는 당신들이 우리의 엄청난 인적 자원을 공통의 대의를 위해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당신들에게 그것을 제공합니다. 또한 한국인과의 싸움에 가담한 모든 일본인들이 한명의 미군과 싸우는 일본인보다 적다는 점을 기억해주십시오. 저는 궁극적인 승리가 국제연합에 의해 쟁취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 왜냐하면 저는 정의의 힘을 믿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이 전쟁이 10년 혹은 15년 계속되는 것을 원치 않습니다. 만약 서구 세계의 정치가들이 아시아인들의 심리 상태를 이해할 수 있다면, 우리가 충분한 무기와 탄약, 폭탄과 비행기를 가졌다면 당신 군인들이 동양에서의 실제 전투가 얼마나 미미했을지 그들은 곧 깨달을 것입니다. 우리는 일본인들을 보살필 것입니다.마지막 의견이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동정을 자아내기 위해 한국을 "잊혀진 국가"로 명명하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하나의 민족으로서 우리의 4,200년의 역사에 자긍심을 가진 사람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세상이 우리를 결코 잊어버리게 해서는 안 됩니다. 하지만 저는 어떤 목적을 위해서 그 유추를 사용했습니다. 당신들은 제가 위기의 시대에 미국이 언제나 자신의 정신을 찾았다고 말했던 것을 기억할 겁니다. 저는 정화의 정신을 감지할 수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전쟁이 시작된 이래 이 은총을 입은 땅에서의 재생입니다. 불행과 재난은 제 동포들에게 비슷한 영향을 미쳤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세계의 도덕적인 사고와 정의의 지도자로 바라봅니다. 오래 전, 당신들은 우리에게 원조의 손길을 내밀었고 우리를 일단의 민족들로 이끌었습니다. 우리들이 지금 당신들을 향해 손을 내미는 우리에게 그 동일한 손길을 거부하지 말아주십시오.

    968 전경무가 김병연에게 보낸 편지

    작성일: 1942-10-07재미 한족연합위원회밀러(Miller)가(街) 1306번지호놀룰루(HONOLULU), T. H.한족연합위원회,제퍼슨(W. Jefferson)로(路)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캘리포니아(Calif.)참조: 김평윤(P. Y. Kim)관계자 여러분,우리는 오늘 날짜로 이곳 한족연합위원회에서 채택한 두 개의 결의안을 대한민국 임시정부로 발송했음을 알리고자 합니다.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는 10월 4일 회의를 열었습니다. 리승만 박사를 현직 한국위원회 의장에서 해임하고,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재무 대리인으로서 한족연합위원회를 임명하여 줄 것을 요구하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보내는 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의 청원과 관련하여, 이는 미래의 내부 분쟁을 종식시키고 운영상의 일관성을 유지하기 위한 결정으로써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즉시 리승만 박사의 지위를 한국위원회 의장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외무장관의 고문으로 바꾸어 줄 것을 결의하였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조건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한족연합위원회를 관리하여 한국위원회를 재조직하여 주기로 결의하였습니다. 이러한 두 결의안을 채택한 이유는 리승만 박사가 사람들과 협력을 하지 않았으며, 당파적인 활동을 부추겨 바람직한 화합을 해쳤을 뿐만 아니라, 리승만 박사의 외교 정책은 실효가 없으며, 리승만 박사는 그가 1919년 했던 개인적인 사법권적 요구의 인수와 관련하여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 사는 한민족과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분리시키려 시도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변화가 빨리 이루어지지 않으면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의 한족연합위원회의 재정적 도덕적 지원은 매우 커다란 손해를 받을 것이라는 점을 알려드립니다. 이러한 요청은 이미 한국위원회와 우리의 두 사무국에 통고하였습니다.우리는 전달하는 상기 내용이 우리의 로스앤젤레스 사무국의 의견과 일치한다고 신뢰합니다. 그리고 그 일에 대해 빠른 응답이 주어진다면 회의의 집행위원회가 조치를 취할 것이라고 신뢰합니다.안녕히 계십시오.전경무(J. Kyuang Dunn)

    969 주미위원회에서 김호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1-11-29발신자: 김호[Charles Ho Kim]수신자: 김호[Charles Ho Kim]수신주소: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1368 W. 제퍼슨 거리(1368 W. Jefferson Blvd.)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친애하는 김선생님께,지난 10월, 중국 중경에 있는 김구와 조소앙에게 받은 편지를 통해, 그들에게 중국 국태치[Quo Tai Chi] 외무부 장관이 중국 정부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정식 승인의 가능성을 알렸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11월 25일, 다음과 같은 해외 전보를 받았습니다.“중국 정부는 광복군(한민족 항일군대)을 정식으로 승인한다는 공문서를 우리에게 보냈다. KOPOGO (대한민국 임시정부)”11월 29일, 우리는 다음과 같은 해외 전보 3통을 보냈습니다.중국 중경, 국태치[Quo Tai Chi] 외무부 장관 각하께“현재 중경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귀하의 협력을 감사드립니다. 한국인들과 더불어 미국과 중국의 동지들이 귀하께 대한민국의 정식 승인을 선포해주실 것을 권고드립니다. 한국을 원조하기로 한 협정에 따라 미국과 영국, 소련은 우리의 청원을 따를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자동적으로 한국에의 무기 대여를 포함하여, 만주와 한국에서 제기될 수 있는 한국 전투력 향상에 대한 요청을 충족시켜줄 것입니다. 미국 국회는 한국 문제를 재론할 것입니다. 귀하의 승인이 긴급합니다. 이승만.”중국 중경, KOPOGO (대한민국 임시정부) 앞“한국인들과 중국인, 미국인들이 중국 외무부 장관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강청하는 해외전보를 보냄. 조지 피치 [George Fitch]박사에게도 그의 도움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낼 것임. 그를 만나보기 바람. KORIC (주미위원회)”

    970 Warren y. kim이 올리버(Robert t Oliber)에게 보낸 서신

    발신일: 1944-07-31발신자: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씨수신자: 로버트 올리버(Robert T. Oliver) 씨수신주소: 워싱턴 D. C. 북서부 E. 스트리트 1337 워싱턴 포스트(The Washington Post) 전교(轉交)올리버(Oliver) 씨께,1944년 7월 30일자 워싱턴포스트지에 실린 귀하의 ‘한국, 이제 태평양에서 주요 역할’이라는 사설을 흥미롭게 읽었습니다.그 사설은 한국에 대해 상당한 홍보를 하고 있었고, 한국 국민들은 그에 대해 감사할 것입니다.그러나 저는 귀하의 사설에서 잘못된 점을 지적하고 싶습니다.귀하께서는,‘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현재 반체제 단체들이 연합전선을 형성함으로써 생겨난 기회를 포착하려 준비해왔다. 현재 그 연합전선은 네 개의 단체가 연합한 것이다. 가장 큰 세력을 이루고 있는 것은 워싱턴 한국위원회 위원장(Korean Commissioner in Washington)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대표하고 있는 리승만(Syngman Rhee)과 중경(Chungking)에서 현재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통령직을 맡고 있는 김구(Kim Koo)가 이끄는 독립당(Independence Party)이다.’라고 쓰셨습니다.제가 강조하는 바는 귀하의 발언이 부정확한 것으로, 대한민국 독립당(Korean Independence Party)에 피해를 주고 있으며, 리승만(Syngman Rhee)에게 잘못된 영향을 미치고 있습니다. 사실 리승만(Syngman Rhee)은 독립당(Independence Party)의 지도자가 아닐 뿐더러, 그 단체에 소속된 적도 없고, 오히려 그 단체의 성장과 권력을 막기 위해 온 힘을 기울이며 독립당(Independence Party)에 항상 반대해온 인물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현재 대한민국 독립당(Korean Independence Party)의 대표적인 해외 지부인 하와이(Hawaii) 지부 부회장직을 맡고 있는 사람으로서 이 점을 지적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저희가 알고 있는 바에 따르면 귀하께서는 아마도 리승만(Syngman Rhee) 씨 측근의 한국인으로부터 정보를 입수하셨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렇다면 이것은 리승만(Syngman Rhee) 씨의 지지자들이 또 다시 미국의 대중들에게 잘못된 정보를 주려고 시도한 것으로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최근에 워싱턴 북서부 5번가(Fifth Street) 426번지에 사무소를 세울 때도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라는 명칭을 오용(誤用)하여 리승만(Syngman Rhee) 씨가 마치 재미(在美) 한족연합위원회의 후원을 받고 있는 것 같은 인상을 주었던 사례가 있었습니다. 이것은 사실과 다른 것으로, 대다수 한국인들을 대표하고 있는 한족연합위원회는 실제로 리승만(Syngman Rhee)을 지지하고 있지 않습니다.배상(拜上)워렌 김(Warren Y. Kim) 이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