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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921 H. C. De Young이 김병연에게 보낸 편지

    발신자: 김병연수신자: 김병연?신한민보를 편지에 있는 워싱턴 주소로 보내주시오.지난 두 복사본을 분실했으므로 그것들 또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봄에 로스앤젤레스를 떠날 때 뉴[New] 씨가 쓴 ‘전쟁과 한국’ 사본을 박씨가 번역을 위해 그것을 쓴다기에 당신에 사무실에 남겨 두었습니다. 그가 당신의 사무실을 떠났다고 들었는데 그가 나의 복사본은 사무실에 남겼다고 추측됩니다. 번역에 사용된 원본 외에 많은 자료가 있을 것입니다. 이 편지 주소로 그것 모두를 보내주십시오. 감사합니다.

    922 김영정이 Y. K. Kim에게 보낸 편지

    발신자: Y. K. Kim수신자: Y. K. Kim워싱턴을 방문하는 동안 Messrs, 던[Dunn]과 김의 비자 추천을 위해 중국정부 장관과 함께 협상하고 호의를 베풀던 중국대사관의 육군무관과 Lt. Col. Sin-ju Pu Hsiao와 알게 되었습니다. 중경[Chungking] 임무와 관련된 한국 상황을 토론하면서 중국이 집중될 현 한국문제에 관한 중국의 생각과 결정을 안내할 재미한족위원회의 중경[Chungking] 여행과 같은 한국기관과 업무에 관한 정확한 정보의 부족으로 어쩔 줄 몰라 한다는 것을 진술하였다. 그러므로 육군대장은 대사관에 보낼 한국기관과 활동에 관한 공식정보들을 참고하기 위해 요청하였다. 다음의 것이 포함되어야 한다.; 1. 한족연합위원회에 관한 자료 : 기관, 임원, 회원수.2. 한족연합위원회의 멤버조직과 임원과 총 가입회원에 대한 분리된 목록.3. 한족연합위원회가 설립된 이후 대한민국임시정부와 한국위원회가 받는 재정적 후원의 규모.위 요청에 대한 응답이 중국의 협력을 얻는 데 구체적으로 우리를 도울 것이며 이 제안에 동의한다면 앞으로 계획하는 것을 포함한 정보를 호놀룰루 기지에서 보내줄 것을 요청합니다.

    923 유일한이 M. O. Jung에게 보낸 편지

    발신자: M. O. Jung수신자: M. O. Jung60달러 수표를 동봉한 8월 31일자 당신의 편지에 감사드립니다. 개인적으로 지난 편지에 내가 당신에게 언급한 일을 위해 기부하심에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때때로 ‘한국자유’라는 우리의 목적이 세계의 힘 사이의 현 투쟁에서 멀리 제거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우리에게 보내준 후원을 받을 때 많이 격려를 얻고 한국을 위한 헌신이 독립으로 보상될 것을 믿게 합니다.영수증을 동봉합니다. 60달러 가운데 16달러를 국립연맹의 요금으로 보냅니다. (회원료 10달러, 신문대금 5달러, 수수료 1달러)9월 12일 즈음 2~3주 동안 난 Boulder에 있기를 원하며 그때 당신을 직접 만나 감사를 전하길 원하고 오랫동안 하지 못했던 낚시를 함께하기 원합니다.

    924 김병연이 오스본(C. Osborne)에게 보낸 편지

    3대국인 미국과 영국, 중국의 승인으로 한국이 자유와 독립을 얻을 거라는 소식은 이천삼백만 동포들의 심장에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감사를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자유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삼대국에게 증명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시대를 여는 이 소식이 고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니 당신이 극동아시아에 우리의 기쁨을 나누고 일본을 저지하기 위해 단기방송을 해주시겠습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한국어와 영어로 방송을 했으면 합니다. 당신과 그 동지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925 전경무가 김용정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2-10-19발신주소: 라파이에트 호텔[hotel lafayette] 워싱턴[washington, D. C.] 발신자: 김용정[Yongjeung Kim]수신자: 김용정[Yongjeung Kim]수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수신주소: 공보담당관 1368 W. Jefferson Blvd.,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용정[Yongjeung] 귀하, 김호[C. Ho Kim]선생이 워싱턴으로 출발했다는 소식을 전해준 귀하의 두 번째 편지는 잘 받아보았습니다. 워싱턴 주변의 홍수에도 불구하고 단 한 시간 늦었을 뿐, 토요일날 이곳에 그가 무사히 도착했음을 알려드리게 되어 기쁩니다.그가 도착한 이후로 줄곧, 그와 나는 우리가 완수해야 할 임무에 대한 각자의 입장을 분명히 하기 위해 여러 번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의사가 잘 통하고 있으며 내일까지는 이 어려운 임무에 착수할 작정입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 문제와 관련하여 코델 헐[Cordell Hull]장관과 제임스 크롬웰[James H. R. Cromwell]위원장 사이에 오고간 서신이 담겨있는 “Blue Book”을, 별도의 봉투에 넣어 한족연합위원회 공보담당관으로 계신 귀하 앞으로 보내드립니다. 이 문제에 관해서는, 한미위원회[the Korean-American Council]에 대한 설명과 함께 저의 정찰기록서와 보고서 사본 한 부를 귀하의 사무실로 보내드렸었습니다. 그 보고서가 귀하와 집행위원부의 위원들에게, 달성된 목표들 및 서신의 대략적 내용을 알려주었을 것입니다.“Blue Book”에 보충설명을 달아놓았으니, 그 내용을 잘 검토해보시면 거기 담긴 중요 서신의 결과를 알 수 있을 것입니다. “Blue Book”과 그 내용에 대해서 집행위원부에서는 기밀을 유지해 주시길 특별히 부탁드립니다. 그 내용이 공개되면 현재 미결상태에 있는 협상에 불필요한 장애가 생길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크롬웰[Cromwell]위원장의 양해를 얻어, 한족연합위원회 임원들께서는 당연히 알고있을 크롬웰 위원장의 협상 전체 성격을 귀하께 알려드릴 이 사본을 보낼 수 있게 되었습니다.안부 전합니다.전경무[J. Kyuang Dunn]

    926 해리슨(Harrison)이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보낸 편지

    발신일: 1942-02-21발신주소: 펜실베니아 거리 615, N. W.[615 Pennsylvania Ave., N. W.]수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수신주소: 서부 제퍼슨 거리 1368[1368 West Jefferson Blvd.]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 주근계(謹啓):귀위원회의 요청에 따라, 최근 편지를 통해 문의하셨던 1940년도의 해외 등록 현황과 관련한 등록자 명단을 동봉합니다. 받으신 명단의 각 등록자 등록 사항은 우리 서류에 기록된 대로 작성된 것입니다. 동봉된 명단의 사람들이 귀위원회에 그들이 등록했던 방법을 확인해주실 것을 요청했었으리라 생각되며, 귀위원회서 이 정보의 기밀을 유지하면서 명단에 적힌 사람들의 대리자 역할을 하고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귀위원회는 명단에 적힌 사람들에게 1940년도 등록당시에 그들이 직접 기입했던 바와 같은, 또한 우리의 문서에 전사되어 있는 바와 같은 그들의 시민 자격을 알려줄 권한을 위임받았습니다. 이 정보는 기밀이며 본 명단은 오직 지시된 목적을 위해서만 사용될 수 있습니다.김익선[Ek Sun Kim]과 강화중[Wha Choong Kang], 김주택[Chu Taik Kim], 박권진[Park Kwonchin], 이기름[Ki Rum Lee]은 일본 시민으로 등록되어 있습니다. 만일 이들이, 또는 이들 중 누가 신분 증명서를 신청하지 못했다면, 2월 9일 이전에 캘리포니아주 로스앤젤레스의 미법무장관인 윌리엄 플릿 팔머[William Fleet Palmer]각하께 즉시 편지를 보냈을 것입니다.총총.얼 G. 해리슨[Earl G. Harrison]법무장관 특별보좌관사본 : 윌리엄 플릿 팔머[William Fleet Palmer]각하께 미법무장관 로스앤젤레스, 캘리포니아주이름 번호 등록김기수[Kee Soo Kim] 3559529 한국한국희[Kook Hi Hahn] 1532016 한국최학선[Hack Sun Choy] 2453067 한국류필완[Pill Wan Loo] 1146767 한국 김춘리[Kim Chooly] 5789250 한국허학[Hak Her] 2036219 한국 계룡옥[Long Oak Kay] 2242645 한국 김익선[Ek Sun Kim] 2183141 일본이순백[Soon Beck Lee] 1212038 한국강화중[Wha Choong Kang] 2172274 일본이복덕[Bok Druk Lee] 2500976 한국 김주택[Chu Taik Kim] 4754973 일본박권진[Park Kwonchin] 1066506 일본 이촌[Chon E. Lee] 5017509 한국이원걸[Won Kull Yee] 5253593 한국 박호헌[Ho Hun Park] 1881584 한국박금순[Kum Soon Park] 4570549 한국장덕길[Duk Kil Chang] 2036237 한국장봉선[Bong Sun Chank] 2036221 한국이복[Charles Bok Lee] 4160471 한국이반갑[Van Kap Lee] 5786978 한국이기름[Ki Rum Lee] 5033577 일본박당연[Dang Yun Park] 4468120 한국고언도[Earng Doh Koh] 2534513 한국이경진[Lee Kyoung Chin] 5468163 한국

    927 전경무가 김호|| 김병연|| 한시대 등에게 보낸 편지

    발신자: 김호, 김병연, 한시대수신자: 김호, 김병연, 한시대호놀룰루 기지에서 워싱턴에 한족연합위원회를 설립하는 것을 찬성하는 투표를 했다는 것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전신으로 통보하였으며 재무부로서 Commission과 한족연합위원회와 관련된 김구의 진술에 대한 우리의 답변을 인용하였습니다.워싱턴 기지에 관한 결정이 됐기 때문에 기본적인 것들, 특히 재정에 관한 빠른 준비가 계획되고 있습니다.물론 시일에 관한 우리의 어려움을 이해할 것입니다. 이곳의 동지(Dongjis)의 대표들이 한족연합위원회에 호의적이지만 소수의 확고부동한 이승만 지지자들이 있습니다. 제 생각으로 그들이 탈퇴할 것 같습니다. 이들이 내부 서클을 구성합니다. 우리는 12월 12일 그들의 연말 회의와 선거에서 그들에 대한 공식적인 조치를 예상합니다. 지금까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지위를 부여하는 것에 관한 전보문에 있는 계획들에 대해 일반 대중들이 지지하며 개인적으로 이곳 한족연합위원회가 이 과정을 가능케 하고 신뢰를 가지고 수행하는 것을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워싱턴 기지에 관한 자세한 사항들이 내가 딸과 함께 크리스마스를 보내는 적절한 때에 운영되길 바랍니다.추신: 해리[Harry] 부부에게 안부를 전하면, 지난 두 달 반의 정의 조언이 그립습니다. 내가 힘든 상황에 있음을 알 것입니다. 하지만 당신의 기관이 탁월한 협력을 하고 있지요. 이번에 팀작업을 계속적으로 해야 합니다.

    928 안원규가 이승만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9월 25일발신자: 이승만[Syngman Rhee] 주미위원회 위원장수신자: 이승만[Syngman Rhee] 주미위원회 위원장수신주소: 호바트 거리 1766[1766 Hobart St. N. W.] 워싱턴[Washington D. C.]친애하는 이선생께,귀하가 직접 전달하신 이 달 11일자 편지는 잘 받았으며, 공식적으로 기록되었습니다. 답장으로, 우리는 유감스럽게도 당신이 급속도로 대한민국의 지지를 잃고 있다는 점에 대해 충고 드립니다. 우리는 당신이 우리 민족의 임시정부를 위해 한국의 단결을 강화시키고, 미국 정부와 호의적인 관계를 결성하기 위해 무언가 하리라는 희망을 품고 2년 이상 온힘을 다해 예외 없이 당신을 지지해 왔습니다. 이에 반해 당신은 미국 본토와 하와이 한국인들 사이에서 당신이 소속한 당만을 확립시키기 위해 훨씬 많은 시간을 들여왔고, 때문에 오늘날 우리로 하여금 거의 붕괴 직전까지 오도록 하였습니다. 당신은 당신의 보고들을 통해 계속 혼란을 일으키고 있습니다. 그러한 보고들을 통해 당신은 동포들을 비난하고, 잘못을 추궁하고 있으며, 말장난으로 우리의 대의과 단결을 위태롭게 만들고 있습니다. 이렇게 되면 설사 당신이 지도자가 된다할지라도 당신이 필요로 하는 대중의 지지를 잃게 되는 결과를 가져올 것입니다. 하와이에 있는 한국인 대다수는, 당신이 우리나라의 독립운동과 유엔의 운동을 지원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는 우리의 노력을 성공적으로 집중시키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습니다. 당신은 극도로 흥분하여 편지에 캘리포니아에 있는 당신 지지자들의 재정적 지지가 낮아지고 있다고 언급하셨습니다. 우리는 이것이 지금까지 당신의 당파적 선동 행동의 당연한 결과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는 처음부터 내내 그러한 결과에 대해 당신에게 충고해 왔습니다. 우리는 당신이 지금 비난하고 있는 이러한 재정적 지원의 붕괴가 점점 더 악화될 것이라고 감히 예견합니다. 당신이, 자유 기부 형식으로 이뤄지고 있는 우리의 기금 모금 임무를 자신에게 넘겨주기를 요구했을 때, 하와이에 있는 우리들은 매우 당황했었고, 당신의 행동이 정말로 의심스러웠습니다. 당신이 하와이에 있는 우리에게 구하는 기금은, 우리가 앞으로 당신을 지원해줄 수 없을지도 모르는 정도까지 갑자기 줄었습니다. 이제는 당신이 우리와 협력할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지지를 잃을 것인지 명확하게 결정내릴 필요가 있습니다. 물론 당신은 몇 안 되는 당신의 맹목적인 지지자들과 함께 우리에게서 갈라져나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것이 당신에게 가져다 줄 결과가 무엇인지 압니다. 물론 당신은 자신의 모든 권위를 과시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어떠한 독단적인 권위의 과시라도 그러한 태도에 대항하는 대중에게 무엇인가를 강요하기에는 부족할 것입니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의 미국인 친구들의 뛰어나며 희생적인 행동들을 지지하지 않았던 점을 진술하여 당신 자신의 민족을 좋지 않게 비추려 했었는데 그런 암시적인 당신의 진술에 대해 우리는 기록된 다음의 사실을 충고하고 싶습니다. (1) 우리는 우리의 애국적 운동에 관심을 갖는 모든 동지들을 존경하는 한편, 단연 당신이 창시자인 한국의 당파 싸움에 그들이 참여하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2) 매달 한족연합위원회의 예산으로부터 당신에게 송금하는 1200달러의 금액은 한미위원회를 위한 할당액을 분명히 포함하고 있습니다. (3) 당신이 공공 기금으로 충당하는 지출은 그 어떤 지출이든 간에, 고정된 예산에 기초를 두어야 하며, 당신이 계속적으로 시도했었던 것처럼 개인적인 요구에 근거해선 안됩니다. (4) 당신이 우리 민족의 단결을 유지할 수 없다면, 당신은 다른 단체로부터도 많은 이득이나 지지를 기대할 수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솔직하고도 직설적으로 표현한 이 지적들에 대해 당신이 충분히 고려해주시길 권고하며, 빨리 답신 해주시기 바랍니다.

    929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정치적 배경

    현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핵은 1940년 10월 호놀룰루에서 하와이 한국국립연맹과 동지회사회, 한국여성갱생사회와 한중민족연맹과 같은 참여기관과 함께 시작되었다. 그것의 단독목적은 그당시 한국인들이 미국방어프로그램을 공유하는 것을 돕는 국가긴급모임의 방책을 계획하는 것이었다.이 예비기관의 성장으로 최초로 일반회의가 1941년 19일부터 29일까지 호놀룰루에서 북미의 한국국립연맹의 세 대표와 중국의 한국지원병을 돕는 연맹의 한 명의 대표와 하와이에 있는 한국국립연맹의 세 명의 대표, 한국여성갱생사회의 두 명의 대표와 한중민족연맹에서 한 명의 대표와 함께 개최되었다.회의에서 결정된 규약에 의해 출석한 대표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두 사무국을 출범하였다. 하나는 호놀룰루에 있는 한국국립연맹 건물인 1306 밀러 거리이며 또 다른 하나는 로스앤젤레스의 한국국립연맹 건물인 1368 제퍼슨 거리에 있다.목적새롭게 조직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목적은 미국과 미국의 영토, 멕시코와 쿠바에 있는 한국인이 한국독립운동과 관련하여 그들의 목적과 활동의 통합을 창조하고 유지하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에서 호놀룰루와 로스엔젤레스에 각각 2 : 1의 비율로 줄 1년 예산을 위한 기금마련을 해야 한다. 3대국인 미국과 영국?중국의 승인으로 한국이 자유와 독립을 얻을 거라는 소식은 이천삼백만 동포들의 심장에 표현할 수 없는 행복과 감사를 불러일으켰다. 한국이 자유민족이 될 수 있다는 것을 삼 대국에게 증명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려있다.시대를 여는 이 소식이 고국에 있는 동포들에게 전해지지 않을 것이니 당신이 극동아시아에 우리의 기쁨을 나누고 일본을 저지하기 위해 단기방송을 해주시겠습니까? 만약 가능하다면 한국어와 영어로 방송을 했으면 합니다. 당신과 그 동지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중경[Chungking]에 있는 대한민국임시정부와 워싱턴에 있는 한국위원회도 2 : 1의 동일한 비율로 예산이 지불될 것이다. 전체 기금 중 약간은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의 지방 사무 비용으로 사용될 것이다. 게다가 때때로 소집되는 한국인의 여러 전시활동에 쓸 특별비용이 기부되어야 한다. ( 마지막 항목에 대한 예산부족은 미리 예상하지 못한 착오에서 기인한다.)중경[Chungking] 임무호놀룰루의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로스앤젤레스 기지국과 미국에 있는 한국위원회에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대한민국임시정부기지인 중경[Chungking]에 사절단을 보내야 한다는 것을 제안하였다. 사절단은 유엔의 주요한 힘뿐만 아니라 미국정책에 대한 공정한 정보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관찰하고 돕는 능력 외에도 영어를 정통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아시아대륙과 한국에 가까운 경계지역에 또 다른 전쟁이 일어나기 전에 유엔의 전쟁노력에 대한 한국의 잠재력을 이용할 수 있는 정책을 형성할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 한국인이 민주주의를 위해 실질적인 일을 할 것이며 이것을 위해 그들을 싸워야만 한다. 이러한 이유에서 우리는 중경[Chungking]에 가야 한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한국위원회에서 임무에 대한 찬성을 하였다.전경문전경문은 중경[Chungking]의 밀사로 호놀룰루 임명되었다. 로스앤젤레스에서는 전경문과 동반할 밀사로 김구를 추천하였고 그가 임명되었다.이 두 사람은 1942년 10월 그들의 파견을 준비하고 워싱턴 기지에서의 한국위원회 의장인 이승만 박사와 회담하기 위해 워싱턴에 갔다. 심사숙고한 중경[Chungking] 임무에 대한 이박사의 찬성과 함께 한국위원회의 조직과 정책 변화를 위한 구두로 네가지 각서를 호눌룰루와 로스앤젤레스 기지에 줄 것을 이승만박사에게 제안하였다. 던[Dunn]-김 각서이 각서는 이승만의 요청으로 작성되었다. 한 가지에 관하여 용인되었으나 다른 세 가지는 기각되었다. 불확실성과 요동 속에 함께 석달이 지났다.마침내 이박사가 로스앤젤레스의 한족연합회에 전쟁을 선포했으며 호놀룰루에도 동일했다. 통합을 상징하는 후자의 두 대표가 이승만 박사와 로스앤젤레스 사무국과 회의를 위해 파견되었다. 대표는 평화로운 해결을 희망하는 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 의장인 이원순과 행정비서관인 워렌[Warren Y.Kim]이 대표였다.각서사항1. 위원회 직원: 1942년 4월 로스앤젤레스에서 개최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제2차 회의에서 한족위원회의 인사를 의장과 대변인, 비서관으로 지배인으로 재무관리원으로 재직하고 있는 이승만, 1인에서 3인으로 증가시킬 것을 합의하였다. 한족위원회예산은 한 달에 6백 달러에서 1천2백 달러로 증가하였다.이에 추가하여 비서관으로 디영[Henry Deyoung] 박사와 재무원으로 김구가 추천되었고 이승만이 동의하였다.이승만은 기금의 양을 증가시켰으나 인사증원동의를 실행하지 않아 한족연합회는 그에게 반복적으로 이행할 것을 요구했다. 그가 찬성할 때마다 내키지 않음을 표시하였다. 편지로 디영[Deyoung]을 워싱턴으로 올 것을 요구하여 초빙하면서도 이승만이 그의 생활비를 책임지지 않겠다고 말했다. 한족연합회 행정의장인 김구는 사업적인 이유로 거절하였다. 이승만은 약속한 것을 이행할 의도를 보이지 않았으며 직책에 적합한 경험과 훈련 없이 그저 자신에게 “네라고 말할 수 있는 측근들을 모았다.그러므로 각서의 첫번째 사항은 기관 효율성을 위해 이승만에게 요청한 것이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워싱턴의 한족위원회의 고유기관임을 주장하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다. 이승만은 심각한 실수를 자행해왔다.(a) 근거없는 이야기를 담은 이승만 개인의 선전을 위해 일본에 십만 달러를 소비했으며, 후에는 그것이 삼십만 달러로 증가되었다. 그는 로얄훼밀리였으며 한국의 초대대통령이 되기 위해 한국에서 상하이로 밀항했고 그 외에 역겨운 광고를 남발했다. 자기를 높이고자 하는 열망이 가득 차 워싱턴의 한국대표로서 자유를 향한 열망과 능력, 세계대전에서 한국과 한국민족에게 그가 주어야 하는 공적 의무를 망각한 것 같았다. (b) 포츠머드회의에서 한국을 일본에 넘기는 것을 책임졌던 미국대변인 루즈벨트[Theodore Roosevelt]와 루트[Elihu Root]에 대한 이승만의 계속적인 공격은 한족연합위원회에게 적대감을 주었으며 무안하게 하였다. 그리고 이승만의 그런 공격은 특히 미국정부의 동정과 원조를 구하는 민족의 공식대표로서의 정치인의 모습이 아니었다. 한국인들이 이승만의 말과 술책에 반대하는 동안 그는 목숨을 걸고 정치적 선동을 계속하고 있었다.(c) 미국 국무성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승인을 요청하는 편협한 협정을 제안할 때 이승만은 가장 결정적인 실수를 범했다. 물론 크롬웰[James Cromwell]이 헐[Cordell Hull]에게 보낸 편지 원본에서는 직접적으로는 알 수 없지만 해석을 했을 때 매우 부정적이다. 그러나 제안은 한국에게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결과적으로 한국민족에 대한 승인을 받지 못했다. 물론 한길수처럼 이승만의 실수를 대중에게 알려 비판받게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조용히 한족연합위원회에서는 대책을 강구하고 있었다. 나이든 지도자로 이승만이 자연스레 받는 존경과는 다른 참신하고 젊은 피가 위원회에 더해지길 원한다.(d) 경고와 비난이 담긴 헐의 답장을 크롬웰[Cromwell]이 받으면서 이승만은 주부성과 한족위원회와의 관계가 끝났다는 발표를 하였다.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의 한족연맹위원회는 이승만의 절차와 태도의 변화를 원했다.갑자기 이승만은 예산의 용도를 설명하지도 않은 채 5 천 달러의 추가예산 송금을 요청하였다. 이승만은 폭력적으로 이 송금액을 요구하였다. 그와 의사소통하는 과정에서 한족연합위원회는 그가 요구한 돈이 그가 요청한 승인협정을 거부한 미국무성에 항거하는 거국적 캠페인에 쓸 예정이라는 것을 간접적으로 알았다. 또한 크롬웰이 국무성을 지지하는 것에 대한 개인적인 적대감이 있음이 확실했다. 그러나 얼마 후 헐을 반대하는 대중운동에 대한 이승만의 열성이 가라앉았을 때 호놀룰루 한족연합위원회에서 그가 처음에 요구한 액수의 절반 2천5백 달러를 보냈다. 이 금액에서 천 달러가 이승만에 의해 선한 목적과는 다른 것을 위해 사용되었으며 1천오백 달러는 사용되지 않았다고 보고되었다. 대부분이 한족위원회의 계좌가 아니라 이승만 개인의 계좌에서 말이다.위의 이유로 한족연합위원회는 한족위원회의 고유조직임을 주장했다.(2) 개인적 편지와 위원회 보고:이승만은 어려움에 직면하지 않았을 때 자신의 잘못을 정당화하고 책임을 다른 사람에게 돌리고 폭력과 절도를 부추기기 위한 헛소문을 퍼뜨리고 의심을 부추기는 개인편지를 보내는 습관이 있다. 그는 자신의 평생직업을 위한 파벌싸움과 그의 간사함을 자랑하고 교만함을 과시하는 당쟁의 지도자이다. 그래서 그 자신의 추종자들까지 포함한 한국인들은 한국의 공식대표나 지도자로 지지받는 사람에게 맞지 않는 이런 그의 행동을 강하게 반대한다. 이러한 개인편지 외에도 그는 매주 소위 위원회보고라는 것을 발행하였다. 그것들은 특정 사람이나 조직에 대항하는 원한에 관한 것이었으나 한국의 전쟁참여나 한국국내운동에 관한 계획이나 격려에 관한 것을 전혀 없었다. 결과적으로 그의 활동과 말에 대한 대중적 불만족이 생겼고 그 불만족은 확대되었다. 매일 상황이 더 암담해졌다. 그래서 한족연합위원회가 그에게 그의 개인적이고 공적인 사설을 그만둘 것을 요구하였다.(3) 한미위원회와의 그의 위치:한국인들은 한미위원회와 크롬웰[James H. R. Cromwell]의 이타적인 노력에 감사하고 있다. 그러나 한국이 국무성에 대항하기 위해 크롬웰[Cromwell]에 의해 사용될 무기를 만들지 말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물론 미국인으로 크롬웰이 정부의 사무국이나 부서에 대항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한족연합위원회는 외교부의 대표자로서 이승만이 인정과는 상관없이 어떠한 쟁의에 참석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한다.이런 이유로 특히 이승만은 한족연합위원회에 의해 그가 책임자이며 그의 아내가 재무원인 한미위원회를 나와 사과할 것을 요청받았다.(4) 중경[Chungking]으로의 민족사절단 :전경무와 김구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의해 중경[Chungking]으로 가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협정을 돕는 임무에 임명되었다. 그리고 그들이 워싱턴에서 여정준비를 하는 동안 단순한 예의와 존경을 위해 이승만에게서 임무인사를 구했다. 이것이 이루어지지 않아 전경무와 김구 자신들이 미국무성 육군성의 헙력을 구했다.던[Dunn]과 김구에 대한 공격전경무와 김구의 각서로 인해 이승만은 그의 추종자들에게 헛소문을 퍼뜨렸으며 그를 반대하는 서류증거로서 각서를 보관하고 한족위원회와 대한민국임시정부를 반대하였다. 마침내 그는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한족연합위원회에 공식적인 전쟁을 선포한 것이다.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 회의이승만과 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의 평화프로그램을 수행하기 위해 이원순과 워렌[Warren Kim]이 main로스앤젤레스nd로 떠났다. 이 회의에서 이승만은 표면적으로는 전적인 동의를 하였으나 비밀스럽게 그는 이 계획을 무마하기 위한 반대 움직임을 전개하고 있었다. 그는 로스앤젤레스 한족연합위원회 반대선언을 하고 재미한족연합위원회와 로스앤젤레스에서 커다란 규모의 모임을 열기 위해 main로스앤젤레스nd에 흩어져 있는 그의 추종자들을 모았다. 대표조직들은 뉴욕의 동지회(15명 정도)와 시카고의 동지회(10명), 로스앤젤레스의 동지회(20명), 민족위원회(the peoples Committee, 항거를 위해 임시적으로 조직 20명)와 오하이오, 아크론에서 자진 참가한 한 남자와 아이다호 보이스의 자진참가한 그의 부인이었다. 그렇게 소집된 대모임은 ‘All-Korea Congress’라 칭해졌다. 호놀룰루의 한족연합위원회에 위 여섯 조직이 보낸 전보내용은, 이승만과 그를 외교군단의 간부와 연대장으로 만든 그의 대변인인 임[Ben C. Limb]이 같은 하나의 동일한 원천으로 교화되어지고 부추겨져 있음을 보여주었다. 이승만의 파벌성 보고서이승만은 선동과 파벌의 폭력에 굉장히 능숙하다. 1931년 1월, 동지회가 하와이에 있는 한국국립연맹으로 떨어져 나간 후 이승만은 유령대표들에게의 1년마다 개최되는 한국국립연맹 정기 집회에 참석하라고 전화를 했다. 그들은 한국국립연맹의 모임장소에 쳐들어 왔고 2주동안 내부에 머물렀다. 넉 달 후 한국국립연맹 회원들을 위한 정당한 소유권을 결정했던 호놀룰루의 Judge Cristy 법정에서 그 사건을 알게 되었다. 이승만이 하와이의 가장 오래된 한국기관인 한국국립연맹에 처음 공격했던 1915년에도 그는 동일한 방법을 사용했으며, 그때까지 모두 포함되고 연합하였다. 이승만의 한국국립연맹 공격은 그 당시 힘있고 통치력을 가지고 있던 박용만의 조직을 몰아내었다. 박용만이 그의 가장 가깝고 소중한 친구였음에도 불구하고 이승만은 냉심장을 가지고 그를 배반하고 공격했던 것이다. 그는 그때 한국국립연맹의 회원들과 대표들을 자극하여 그가 원하는 것을 얻었으며 한인공동체를 분해하였다. 한국국립연맹 회원 일부가 폭동이 끝날 때 주요기관과 재연합할 것을 선언하는 한국독립연맹으로 조직화되었다.하와이의 한국감리교선교회의 지도자였던 이승만은 1918년 교회와 결별하고 후에 한국기독교교회가 된 한국신교회를 조직하였다. 이승만은 너무나 동일한 민중선동심리학을 이용하였다. 이승만의 성난 폭도들이 한국독립연맹의 공식조직이었던 주간 한국언론인 한국태평양지 사무실을 침입한 1922년 그는 민중을 선동하는데 동일한 방법을 이용했다.이승만의 재정후원자 대우이승만의 재정후원자들은 언제나 최악의 대접을 받았다. 이승만이 프리스톤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1911년에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그는 그의 재정후원자들을 잊었다. 그가 구체제의 이상채[Li Sang Chai] 아래서 양심수로 있을 때 지금은 고인이 된 이상채[Li Sang Chai]가 이승만의 가족을 도왔고 그를 감옥에서 나오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승만이 미국에서 공부한 때 그와 그의 가족 모두가 이씨로부터 계산할 수 없는 재정적 도움을 받았다. 그러나 그는 1911년 한국에 귀국하자마자 이씨를 자신의 아랫사람으로 대하였으며 이러한 허망함에 그와 일할 한국인들에게서 동정을 잃었다. 그는 YMCA에서 일했으나 그 자리를 오래 유지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이씨의 배려로 뉴욕의 사라토가에서 4년마다 열리는 감리교 회의 대표로 1913년에 미국으로 망명할 수 있었다. 1927년에 이씨가 사망한 후 호놀룰루 한국인들이 그를 추모하는 행사를 대규모 집회를 열었으며 이승만이 주 연사였다. 그의 오프닝 연설을 다음과 같다. “지금 나의 가장 충직한 백성이 고인이 되었습니다.” 이승만의 모욕적인 발언으로 그 시대의 존경자, 이씨의 높은 위상, 그의 존경스러운 인품이 가려졌다. 이승만은 이런 성격을 가진 자였다.그가 한국에서 감옥에 있을 때 그의 아내는 어린 아들과 시부와 함께 어려운 시절을 보냈다. 구식의 가치관을 가진 그의 아버지는 알코올중독자였으며 과음으로 인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녀는 이러한 상황에서 구걸을 해야 했다. 이승만은 석방이 되자 여덟살 된 아들만을 데리고 미국으로 갔다. 그는 아버지와 함께 그의 아내가 아내로서 며느리로서 불성실했다는 누명을 씌었다. 그녀는 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그를 기다렸으며, 그의 아버지를 봉양했다. 이승만의 아들이 워싱턴에서 죽었다. 이승만은 한국에 혼자 돌아왔으나 그의 집에 가지 않고 호텔에 머물렀다. 그의 아내는 그의 비합리적인 행동에 대해 불평하였고 친구들과 전 공동체가 그에게 충고하고 그를 비난하였다. 그래서 그가 집에 돌아갔다. 그러나 아내를 만난 후 바로 집에서 뛰쳐나와 그의 아내가 자신을 살해하려 한다며 그녀를 고소하였다. 이 고소는 결코 판명되지 않았다. 그것을 들은 교회가 그녀의 아내를 원고로 입건했으나 이승만은 공판에 참석하는 것을 거부하였다. 이것은 그가 판정을 거부하고 그의 아내를 아무 이유 없이 버렸다는 결론을 낳았다. 그가 두 번째로 미국에 가 사라토가에서의 감리교 회의에 참석한 후 그는 갈 곳이 없었다. 그가 한동안 Camden, N .J의 YMCA에서 일하였다. 그의 충직 박용만은 이승만을 종교적이고 교육적인 일을 하게 하기 위해 하와이로 데려온 수단이었다. 그곳에 가자마자 스스로 모든일을 해야 했던 그는 종교적인 일과 교육에 관한 모든 일을 차지하였고 동시에 그의 후원자들로부터 지위권을 빼앗을 계략을 세웠다. 이것이 1915년 하와이에서 파벌싸움의 주요인이다.그는 수 년 동안 감리교 선교회로부터 후원을 받은 후 그의 후원자들을 배격하였다. 이때가 1917년부터 1918년 사이의 파벌문제이다. 감리교회의 지방선교단체 기록에 나와 있다.1930년 초에 이승만은 최악의 재정적 어려움을 겪었다. 공공기금으로 착수된 오하이오의 목재와 로스앤젤레스의 농장 프로그램이 실패로 돌아갔다. 그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는 진주만의 갑판 건설에 필요한 오하이오 벽돌 공급에 관한 정부계약에 착수했었으나 그 당시 계약 수행을 할 수 있는 방법이나 길을 모색할 수 없었다. 한국국립연맹의 새로운 회원인 김[Henry Kim]과 한국기독교 교회의 새로운 목사인 리[William Y. Lee]가 주로 여론에 대해 책임졌으며 그를 어려운 상황에서 빼주었다. 그들은 그의 자리를 위해 동지회를 부활시켰다. 이승만이 호놀룰루를 떠나자마자 전의 당파싸움뿐 아니라 그가 반도 하지 못한 임무로 그들을 몰아내려는 일에 나섰다. 그는 그 당시 자신은 회원이 아니었지만 이승만 추종자들의 대부분이 회원이었던 한국국립연맹에서 떨어져 나갔다. 그는 한국기독교 교회를 그의 편으로 끌어들였으나 그 멤버의 대부분이 탈퇴하였다. 그가 교회를 장악했을 때 그의 패들은 블랙리스트에 올려 배신자라 명명한 목사와 교회관련자들을 공격하며 모욕하였다. 결국 그는 9명의 목사와 교회관련 임직자들 중 7명을 몰아냈다.이승만이 워싱턴의 한족위원회가 됐을 때 재미한족연합위원회가 그를 후원하였다. 그러나 1944년 1월 11일 이후 후원을 멈추었다.이승만과 대한민국임시정부1919년 갓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는 외국에 있는 한국인을 위한 애국자금에 자발적인 헌신을 요청했다. 장관과 동일한 위치인 행정의장이었던 이승만은 자신이 대통령이라고 발표하였다. 그는 자신이 상징적인 힘이 아니라 16세기의 왕과 같은 절대왕정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는 독재 아래 한국연합(Korean bonds)을 발족시켰다. 그 결과는 또 다른 파벌문제였다. 그는 정부나 민족의 의지를 참고할 의도를 거의 보여주지 않고 무엇이든 자기 맘대로 했다.1922년 이승만은 임시정부가 정부의 직책을 위해 그의 출석을 요구해서 상하이에 갔다. 그러나 갑작스럽게 회의 도중에 사라져 하와이로 빠져나갔다. 그 당시 하와이와 미국에서 대한민국임시정부를 후원하는 것을 막기 위해 이승만은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한 유언비어를 퍼뜨리고 다녔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이용해 그가 한국인과 태평양에 대한 절대적 통제권을 가지고 국내운동을 위해 하와이와 미국의 한국인 후원할 것이라는 망상을 가지고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동의를 하였다고 처음으로 주장했다. 이 계략은 성공되지 않았으며 또 다른 파벌문제의 원인이 되었다. 그는 상하이의 임시정부는 유령조직임에 반해 자신이 합법적 정부임을 선언하였다. 그는 대한민국임시정부에 대해 공개적으로 항거했으며, 후에 그는 배반자로 1926년 사형선고를 받았다.한국통합(Korean Unity)1934년 하와이 한국국립연맹의 창립식에서 긴박한 국제행사에 한국이 참여하기 위해 한국인들이 연합된 하나로 통합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하와이의 한국인들이 먼저 연합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것을 위한 노력으로 9명의 동지회의 임원 중 6명의 동의를 얻었다. 6명의 임원들은 한국국립연맹 임원직을 사임하고 동지회와 함께 사무실 소유권을 공유하는 한국국립연맹의 회원이 되었으며, 기관의 세금절차에 반대하여 연중에 비상투표를 하였다. 불행하게도 임원직들은 절대간부였던 이승만의 명령으로 동지회에서 추방되었을 뿐 아니라 사회에서 추방되었다.세계 상황이 긴박해진 1938년에 한국국립연맹이 통합을 위한 또 다른 시도를 하였다. 끝내 압도적인 수의 동지회 임원들과 회원들의 지지를 얻었다. 그해 11월 중순부터 후반까지 한국국립연맹 건물이 있는 1306 밀러 거리에서 두 기관의 연합집회를 가졌다. 마지막 순간까지는 모든 것이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이승만을

    930 한국 교육을 위한 미국인 재단

    작성일: 1945-02-23작성처: 재미 한국인교육재단(AMERICAN FOUNDATION FOR KOREAN EDUCATION)루더 P. 아이젠하트(Luther P. Eisenhart) 박사, 의장 프린스턴(Princeton)대학 대학원장 존 P. 포(John P. Poe), 회계사퍼스트 내셔널 은행(First national Bank) 프린스턴 지점장 윌리엄 S. 카펜터(William S. Carpenter)프린스턴 대학 정치학과장 에드워드 S. 코윈(Edward S. Corwin)프린스턴 대학 법리학 교수크리스티앙 가우스(Christian Gauss)프린스턴 대학 학장 아더 M. 그린(Arthur M. Greene)프린스턴 대학 공대 명예학장조셉 D. 맥골드릭(Joseph D. McGoldrick)뉴욕(New York) 시 회계 감사관 J. 세이모어 몽고메리(J. Seymour Montgomery) 2세뉴욕 및 프린스턴 시 변호사 윌리엄 스타 마이어스(William Starr Myers)프린스턴 대학 명예교수존 F. 슬라이(John F. Sly)프린스턴 대학 정치학 교수, 프린스턴 통계소장채닝 리엄(Channing Liem) 간사“전술한 세 강대국들은 현재 한국 국민이 노예상태 아래 놓여 있음을 유의하여 앞으로 한국을 자유독립국가로 해방시킬 결의를 다진다”카이로 선언(CAIRO DECLARATION), 미국, 중국, 영국 조인, 1943년 12월 1일. 발단 - 카이로 선언에 의거, 한국의 이해 관계에 깊은 관심을 가지고 있는 프린스턴 시민들은 한국이 일본의 폭정으로부터 독립할 경우 한국과 한국 국민들을 지원할 방법과 수단을 논의했다. 연속된 회의를 통해, 이 목적을 실현할 가장 실질적이고 효과적인 방법은 가능한 한 많은 한국의 남녀 청년들을 기술, 의학, 과학 분야에서 교육시켜, 전후 모국에서 유익한 활동을 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 이 회의의 결과, 1944년 프린스턴에 재미 한국인교육재단(AMERICAN FOUNDATION FOR KOREAN EDUCATION)이 설립되었다. 목적 - 재미 한국인교육재단(AMERICAN FOUNDATION FOR KOREAN EDUCATION)은 비정치 및 비영리 사단법인이며, 그 참된 목표는 한국의 청년들과 한국계 미국인들을 기술 및 사회과학 분야에서 교육시켜 독립된 모국의 재활과 발전을 위해 기여할 수 있도록 하려는 것이다. 이 재단은 정치 지도자의 교육에 관여하지 않으며, 한국의 자치 유지에 요구되는 다양한 기술 전문가들을 육성하는 훈련에 중점을 둔다. 행정 - 교육 자금의 보관 및 분배, 선발자에 대한 교육 기관 배정, 교육생 선발 등의 모든 권한은 이사회에 있다. 자격 - 고등학교 학력 이상의 17세에서 45세 사이의 건강한 한국인 및 한국계 미국인에게 선발 자격을 준다. 모든 신청자는 장학금 신청 시 다음의 서류를 제출해야 한다. 1. 신청자의 정신적 역량 및 품성을 증명할 수 있는 신망 있는 추천인의 추천서 2부. 2. 전 과정의 학교 성적. 선발자는 다음을 준수해야 한다.1. 한국 내 정치 활동의 자제2. 우수한 학교 성적의 유지.3. 이사회가 요구하는 여타의 규칙과 규율의 준수. 이상의 규율을 위반하는 선발자에 대해 위원회는 지원을 거부할 수 있다. 선발자는 재단으로부터 교육 전 과정의 비용 일부 또는 전부를 지원 받는다. 신청서는 뉴저지(New Jersey) 주 @/k@프린스턴(Princeton)@/k@ 시 나소 가 20번지의 재미 한국인교육재단(AMERICAN FOUNDATION FOR KOREAN EDUCATION) 간사에게 제출한다. 본 제안에 관심을 표명한 인사는 다음과 같다. 허버트 후버(Herbert Hoover) 경, 전 미국 대통령로버트 M. 필드(Rovert M. Field), 미국 철강 무역 법률 고문 피오렐로 H. 구아디아(Fiorello H. Guardia), 뉴욕(New York) 시장필로 W. 파커(Philo W. Parker), 뉴욕 스탠다드 베큠 오일(Standard Vacuum Oil) 사장 알버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프린스턴 평생교육대학 교수H. O. 피블스(H.O.Peebles) 부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주 필라델피아(Philadelphia)어니스트 마이너(Ernest Minor), 국제 전기 사장도널드 로버츠(Donald Roberts), 뉴저지(New Jersey) 주 프린스턴(Princeton)J. 아더 킨(J. Arthur Keane), 미국 철강 무역(United States Steel Export) 극동 아시아 담당1945년 2월 23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