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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861 한국문제에 대한 의견(전경무의 연설 원고)

    작성처: 전경무(J. Kyuang Dunn)한국 문제 및 관찰1. 승인에 대한 답변1910년 합병 이후 처음으로 일본에서 해방되기 위한 한국 국민의 노력에 희망적인 징조가 나타났다. 한국 국민의 독립을 위한 노력은 구불구불한 길을 돌아가는 것처럼 오랜 세월과 다방면에 걸친 것이었지만, 여전히 어려운 점들이 남아 있었다. 하지만 일본이 미국의 적국이라는 점과 함께, 한국 독립이라는 사실은 현재 가장 유리한 상황이다. 한국 국민은 외국의 통치를 받아온 국민으로서 자신들의 적에 대해 즉각적으로 적의를 보였으며,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탄압을 받은 사람들의 직관으로 수년 동안 일본 군국주의의 기만 행위로 인해 미국이 태평양전쟁에 개입할 밖에 없음을 예감했다. 그리고 정치적으로 가장 많은 표현의 자유를 누렸던 하와이(Hawaii)와 미국 거주 한국 교민들은 일본과 미국과의 충돌하는 과정에서 발생할 것이라고 생각한 전쟁과 해방의 기회를 함께 맞을 준비를 하면서 1941년 한족연합위원회를 조직했다. 그것은 전쟁으로 인해 필요한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한 조치였으며, 주요 한국인 정치 단체들의 자원과 인력을 한 곳으로 통합시키거나 아니면 당면한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행동에 참여하도록 하는 의미가 있었다. 이 조직의 당면 목적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독립운동 기관으로서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에 공동 지원을 하는 것이었다. 망명 정부인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해방에 대한 한국 국민의 의지를 상징하며,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위싱턴(Washington) 대표부로서 미국에서 한국의 이익을 대변했다. 한국 교민들이 미국의 국방을 지원하는 문제도 중요한 목적이다. 미국의 안보는 궁극적으로 한국의 독립과 동일한 의미가 있는 것으로 생각되었다.호놀룰루(Honolulu)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 한 곳씩 모두 2개의 지부가 설립되었으며, 초기의 조직상 취약점에도 불구하고 기관으로서 지부의 지원 및 선전, 공식적 관계에 필요한 예산에 대한 기금이 조성되었다.현재까지 한족연합위원회의 활동에 대한 검토는 칭찬할 만하다. 군법 하의 하와이(Hawaii)에서 한국 국민의 지위에 대한 논의가 있었으나, 우호적인 외국인에 대한 처우는 좋지 않았다. 미국 육군성 정보국의 협조로 우호적인 선전이 본토에 영향을 주었다.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재정 지원을 받았다. 그리고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에서 필요한 자금도 더욱 많이 충족되었다.태평양전쟁이 발발한 후,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의 주요 목표는 중국과 미국으로부터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을 받는 것이었다.위싱턴(Washington)에 있던 리승만(Syngman Rhee)이 한국 정부를 실제적으로 승인할 것을 주장했다. 개인적으로 한국의 대표임을 자임한 그가 초기에 기울인 노력은 진전이 없었으며, 그는 1942년 3월 중순경 “미국 국무성과의 우호적인 협상이 결렬되었다”고 고백했다. 그리고 나서 그는 한미위원회를 결성했으며, 그의 표현에 따르면, 한미위원회에서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하는 것이 미국의 승전에 도움이 되기 때문에 미국 국무성에 한국 임시 정부를 승인해줄 것을 요구했다.”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와 한미위원회(Korean-American Council)는 미국의 승인을 얻어내기 위해 활동했다. 그리고 리승만(Syngman Rhee)은 위싱턴(Washington)에서 한미위원회 활동을 통해 한국인으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절차에 관한 업무를 맡았다. 세 명의 미국인이 그 일에 적극적이었는데, 주로 리승만(Syngman Rhee)에게 관심이 있었으며 그들을 대표하는 기본적인 사항들과 관련하여 한국 국민에 대해 아는 바가 많지 않았다.한미위원회는 1942년 코델 헐(Cordell Hull) 국무장관에게 보내는 서한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승인 문제를 거론했다. 한 미국 단체에서 자기 정부에게 발송한 그 편지의 내용은 솔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경솔하게도 다음과 같이 오해의 소지가 있는 문장이 들어 있었다. “...한국 애국자의 활동은 남에게 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 사람들은 유엔을 위해 위험을 무릅쓴 대가로 돈을 받는 용병이 아닙니다. 젊은 한국인들은 자유를 얻고자 몸부림치고 있으나, 리승만 박사는 이들을 놓아주지 않을 것입니다. 미국 국무성이 진정한 대한민국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미국 대통령과 영국 수상의 약속을 이행할 때 그들은 비로소 강제로 빼앗긴 주권과 자치 정부가 복원될 것이라는 희망을 갖게 될 것입니다.” 이 서신에 대해, 미국 국무장관은 1942년 5월 20일에 답장을 보내 자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에 협력하지 않은 이유를 설명했다. 답장에 담긴 다음 발췌문은 헐(Hull) 장관의 답장의 골자로서 요청된 한국 승인에 대한 미국 국무성의 입장을 밝히고 있다.“… 미국과 다른 여러 나라에 있는 여러 한국 단체들이 한국과 일본이 군사적으로 점령한 지역에 있는 국민을 대변하는 일을 맡고 있습니다.”“… 유엔이 승전할 경우 추축국의 지배 하에 있는 국민들에게서 자신의 정부를 선택하고 수립하려는 완전한 자유를 박탈하게 될 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이 미국 정부의 희망입니다.”“외국에서 조직되어 자국민에게서 공식적인 권한을 부여받지 않은 피정복민 집단을 정부로 인정하는 문제에는 아주 어렵고 복잡한 요인들이 얽혀 있습니다…” “사사로운 개인이 단체를 선택하고 자신이 선택한 단체에 가입하는 것은 상대적으로 쉬운 일입니다. 그러나 정부가 미국에 한 외국인 단체를 다른 단체보다 상위 단체로 받아들이는 문제에 개입할 수 있는 지위와, 이 단체의 뿌리가 되는 국민의 현재 또는 미래의 바람과 관계없이 이러한 발탁을 유지할 의무를 확약하는 것은 간단한 문제가 아닙니다.““당신이 암시하고 있듯이, 여러 단체가 대표하는 국가가 우리 정부가 최초로 당신의 단체를 그들이 대변하기로 떠맡은 진정한 국민의 정부로 승인할 때까지 당신이 대변하는 단체가 그들의 자유를 위하여 행동할 의도가 있다고 생각하기 어렵습니다. 오해하고 있는 일 같은데, 이에는 당신이 말하는 복무가 ”팔려고 내놓은 것“이고 그 대가는 미국 정부가 특정 단체를 승인하며, 그 국민의 행동에 대해 미리 지불하는 대가라는 의미가 내포되지 않았습니까?”“타의로 침략국의 전제에 속박된 모든 민족들이 그들의 자유를 획득하거나 되찾도록 적절하고 실행 가능한 원조를 제공하는 것이 우리 정부의 목적입니다. 자위를 위해 무장 투쟁을 벌이는 우리 정부는 공동의 승리를 위한 이러한 원조를 환영합니다.” 정부로서의 승인을 지지하지 않는 이유는 헐(Hull) 장관이 1942년 6월 23일 한미위원회에 보낸 서한에 언명되어 있으며 다음과 같다.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문제에 관한 우리의 검토에서 대두된 또 다른 중요한 요소는 중국, 영국, 그 외 이해관계가 있는 국가 정부들의 견해와 태도에 대하여 미국의 관심이 필요하다는 것이다.?헐(Hull) 장관의 서한에서 지칭된 “집단들”이란 말은 워싱턴의 여러 부처에 탄원한 바에 관하여 아무런 실질적인 지원을 받지 못하는 많은 부류를 의미한다. 전쟁에서의 미국의 역할에 의하여 갑자기 활발하게 대두된 한국의 상황을 이용하여 이익을 취하려는 욕심에서 상당한 추측의 발언이 나올 수 있다. 또한 여러 개의 한국을 대표하는 모임이나 단체들과 엇갈리는 의견과 함께 표출되는 구두상의 질타들은 한국의 통일에 대한 욕구가 중요한 과제임을 보여주고 있다. 국무성에 의해서 인정되지 않으면 한국의 청년들을 “리(Rhee) 박사가 놓아주지 않을 것”이란 암시는 불미스러우며 근거가 없는 것이다. 리(Rhee) 박사는 그러한 영향력을 갖고 있지 못하며, 1919년에 정부를 지지했던 한국 국민들은 힘든 세월 속에서 일본인들과 싸웠다. 이 정부나 혹은 다른 어떤 한국 정치단체에 의한 독립투쟁이 알려졌던 또는 알려져 왔던 간에, 진정한 독립을 위한 한국인들의 전투는 계속될 것이다. 바라건대, 승인을 받는 시점에서 이로 인하여 모든 한국인들의 사기가 크게 진작되고 적과의 싸움이 헛되지 않았다는 생각을 갖게 되기를 바라며 또한 인정받기 위한 노력추구가 가치 있었다고 느껴져야 한다.한국 정부에 대한 미국의 승인이 동정에 의한 것이든 원하는 바에 의한 것이든, 그 승인은 “다른 이해당사 국가들의 견해와 태도”에 합치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점이 한족연합위원회 지도자들의 인식이었다. 만약 승인 절차가 논리적으로 추진된다면 한국의 독립문제에 직접적으로 이해관계를 갖고 있는 관계국 정부들과 필요한 협정을 맺어야 한다는 문제가 한국의 정치적인 과제였다.한국인들은 한국과, 중국 영토에 망명하였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중국 정부의 확실한 의중을 알아야만 한다. 인도 문제에 혼란을 가져온 대영제국의 마음 바꾸기에 대해서도 알아야 한다. 그리고 국경을 접하여 역사적으로나 정치적으로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는 러시아의 침묵에 대해서도 살펴야 한다. 일본과 불가침 조약을 맺고 있기는 하나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인정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일본과의 문제도 고려하지 않으면 안 된다.II. 역 방향 외교한미위원회에 의해서 발기된 승인이 좌절되었다. 그러나 헐(Hull) 국무장관은 서한을 통하여, “본인의 의사와는 관계없이 침략국의 학대 정치의 대상이 된 모든 민족들은 그들의 자유를 획득하거나 다시 쟁취하기 위해서 적절하고 실용적인 원조를 받게 될 것이다”라고 자국 정부의 의도를 명확히 밝혔다.이는 국무성의 일반 정책의 태도를 나타내 주었다. 인정을 해주자고 제안하지도 않았었고, 어떤 이유에서든, 한국을 말하고 있는 어느 집단에게도 우선권을 부여하는 것도 아니었으며, 중경(重慶)에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초기 정치적인 입지에 관여하자는 것도 아니었다. 이는 2차 대전 추축국들로부터 탄압을 받고 있는 민족들에게 “적절하고 실용적인 원조”를 제공하여 그들이 자유를 다시 획득하기 위하여 싸워서 그 전쟁에 이기도록 원조하자는 데 목적이 있었다. 이어서 육군성의 한 부서에 의해서 한국인들에게 미국의 원조를 실시하는 기회가 주어졌다. 이는 선택된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극동 지역에서 결과적으로 실시하여야 할 군사 작전을 위해 군사훈련을 받는 것이었다. 즉시 정치가 개입되었다. 리승만 자신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대리인으로서 한국인을 선정하는 모든 실무적인 일을 감독하고자 원하였다. 결과는 실패였다. 50명이 소집되었는데 12명이 참여하였다. 그리고 이런 기회를 확대하려기 보다는 일련의 전 계획이 군사기밀이라는 근거로 아무도 모르게 은폐되고 말았다. 이 문제는 리승만에 의해서 적절히 해결되었는데, 대여 및 임대차 건이 그에 의해서 협상되었고 그가 훈련을 책임지게 되었으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이 확실시되었으며 그의 집이 곧 하나의 공사관 역할을 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그는 스스로를 무관에 임명하고 헐리우드의 소품으로 예복도 갖추었다. 리승만의 활동을 지지하는 한국 대중들은 의구심을 갖게 되었다. 그리고 한국인들의 군사 훈련은 최초의 12명에서 갑자기 중지되고 말았다. 일반 한국인들을 위한 원조의 기회는 서툴게 포착되었고 무시되었다. 다시 말하지만, 승인을 받는다는 문제는 국무장관의 상세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잊혀지지 않고 있었다. 리승만에게는 승인의 문제는 어느 다른 방식의 조언 이전에 선결되어야하는 근본적인 사안이었다. 그리고 이를 관철하기 위하여 그는 한미위원회를 통하여 공표하는 절차를 요구하였고 승인을 받기 위하여 의회를 동원하여 국무성에 압력을 넣도록 하였다. 동일한 목적을 위하여 리승만은 한국의 기독교인들을 규합하여 의회의 의원들을 대상으로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위한 탄원 활동을 후원하도록 하였다. 그 배경에 깔린 논리는 잘못된 논리이다. 본말이 전도된 것이었다. 외국 정부의 승인은 국무성의 업무 절차이다. 그러므로 국무성의 승인을 받기 위한 이해와 신뢰의 과정은 신중하여야 한다. 기대에 부응하지 않는다고 한국 기관에서 국무성을 향하여 불만을 토로하는 여러 비판적인 행동은, 협조를 얻어야하고 또 협조 관계를 계속 구축하여야 하는 미국 정부와 국무성에 대하여 비우호적인 자세로 보여질 것이다.진주만 공급 이후, 실로, 한국에 관한 문제는 통상적인 관심의 정도를 벗어난 주요 사안이 되었다. 한국 정부가 1919년 이후 중국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사실과 인재들을 중경에 피신시켰다는 사실은 그 유효성 면에서 고려했어야만 했다. 그러나 미국 정부는 이러한 사실을 그 다음 달에나 알게 되었던 것이다.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련한 사실을 손쉽게 접할 수 있고 국무성은 승인에 대한 자체의 최선의 정치적 판단을 준비해놓고 있었다.국가로서의 승인은 모든 한국인의 소망이었으며, 집단으로 혹은 개별적으로, 일부에서는 반발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모든 알려진 단체들의 한결같은 열정과 지원에 의해, 모든 노력들이 경주되어왔다. 미국으로부터 승인을 받게 되면, 국제적인 차원에서 공동의 적에 대항하여 싸우는 유엔의 승인을 받을 수 있는 셈이었다.여러 가지 사실에서 논점을 정리해보면,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을 위한 탄원은 단순한 희망사항으로 간주될 수도 있을 것이다. 다른 정부의 승인의 선례를 관찰해보자. 소련은 건국 후 16년이 지날 때까지, 그리고 미국이 완전히 만족할 때까지 미국으로부터 국가로서의 승인을 받지 못했다. 이 전쟁을 하는 현재까지도 프랑스 정부를 승인하는 미국의 승인 조치는 없었으며 프랑스 국민들은 역사적인 결속이나 정치적인 관계에서 한국인들보다 훨씬 더 강하게 승인을 요구하고 있다. 현재 프랑스에는 독일에 협력했던 비시(Vichy) 정권이 물러가자 북아프리카의 여러 지역에서 싸웠고 오늘날 나찌(Nazix)와 싸우는 유엔의 강력한 군대의 일원이 되어 있는 프랑스 민족해방위원회(French Committee of National Liberation)가 정부의 역할을 대신하고 있다.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보면 이 단체가 미국의 승인을 받기에 충분하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승인을 받지 못하고 있다. 사정이 이러한데, 워싱턴에 주재하는 한국 대표기관에서는 국무성에 압력을 가하려는 의도로 성명을 발표하고 국회의 의결을 촉구하며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승인을 획득하려고 하니 과연 경우에 합당한 일이란 말인가? III. 현실에 입각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승인 추구한국인들에 관한 한, 이 전쟁에 있어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관한 승인만이 유일한 추구 대상이 되었던 것은 아니다. 그들은 일본인들이 지배한 세월이 너무나도 오래되었기 때문에 수월한 독립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다. 게다가 그러한 분쟁에 관여하는 데 합법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간주되는 몫에 대한 고통의 측면에만 열광했다. 한국인들은 오늘날 미국의 첫 번째 정적이 되어버린 잔인한 적에 대항하여 30여 년 동안 분투해왔던 바와 같이 자유를 위해 싸울 수 있는 공평한 기회가 주어지길 원했다. 우선적으로 한국인들은 국제연합(UN)의 공통된 기준 하에 전쟁을 감행하며 군사 훈련을 실시하길 원했다. 그리고 쿠웨이트, 미국 본토, 멕시코나 쿠바에 있는 한국인들은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한국위원회(Korean Commission)를 지원하는 공통 수단 이상으로 충실히 기여하였다.또한 이들은 군사적 관여를 위해서 한족연합위원회를 통해 미국에서 중경으로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그 목적은 절대적으로 필요한 것이었으며 대중적인 지지를 받았다. 미국과 극동에서의 활동에 대한 한국의 협조는 투쟁에 장애가 있는 소수민족을 위해서는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승인을 위해서든 연합군의 원조를 이끌어내기 위해서든 도움이 될만한 관여를 하기 위해서는 앞서 한국의 군사적 정치적 상황에 관한 정보가 있어야 한다. 그리고 사절단의 목적은 국제연합 회원국들의 전쟁 원조를 효과적으로 호소하기 위한 일환으로서 사용되는 자유 중국에 있는 한국의 단체, 부대, 계획, 잠재성과 상대적으로 존재하는 사실들, 인물들에 대해 정확히 조사하고자 하기 위함이었다.그러나 불행하게도 한국인들의 건설적이고 현실적인 목적을 달성하려던 중경 사절단은 더할 나위 없는 미국의 원조에도 불구하고 워싱턴을 떠나지 못했다. 그 결과 혼란이 야기되었다. 은밀히 모든 것을 가지고 있었으며 사절단 인원을 그가 채택하였던 것이 아니지만 실제로 큰소리치며 자신했던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미국 승인 실패에 부분적으로 책임이 있기 때문에 사사로운 정치적 술수를 쓰고 다녔던 한 한국인 위원은 목적을 오해하였던 것이라고 주장하였다.결과적으로 사절단은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다. 그러나, 워싱턴에서 통행에 필요한 중국 비자를 받기 위해 거의 1년 동안 기다린 끝에 기회가 있었지만 또 다시 비자를 받지 못했다.미국의 전쟁 선포와 더불어 한국인들은 대규모의 독립군이 연합적 목적과 한국의 독립 투쟁 원조를 위해 중국에서 동시에 봉기하였을 것이라는 바램을 가졌다. 그러나 실제로 그러한 군대는 착안되지도 않은 것이었다.현실은 열망하는 생각만이 아닌 한국인의 노력으로 추구될 수 있는 것이다. 그리고 곧 알려지게 될 사실은 중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필요시 즉석에서 징집 가능한 강력하게 조직화되고 군사적으로 훈련되고 정비된 그룹을 구성하지 않았으며, 한국 군대의 잠재력이 있다 해도 연합군의 전쟁 계획에 의해서 등한시되었을 것이라는 점이다. 더 나아가, 중국에 흩어져 있는 한국인들을 모집하고 훈련하고 정비하여 상당한 규모의 군대로 조직한다는 것은 분명 한국인들이 열망하는 것보다 훨씬 더 큰 과제이며, 복잡한 시간 요소를 고려하는 현재적이거나 즉각적인 사업도 아니다.또한, 솔직히 그러한 과업은 한국인들에게 신뢰할만한 투쟁력이나 군대의 외형마저 부여하는 데 필수적인 중국에서 꽤 거대한 규모로 시도되고 있는 동안은 준비된 장애물과 마주치게 된다. 중국은 가장 거대한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다. 중국은 처음부터 탱크, 대포와 비행기 등 무기가 부족하다고 외쳐댔다. 중국은 적절한 무기 공급이 이루어진다면 일본에 대항하여 싸울 것임을 공표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상황 하에서 중국 땅에서 한국 군대가 훈련하고 정비하는 것을 적극 지원한다는 것은 특히 중국의 통솔 하에 이루어지지 않고서는 기대하기 어렵다. 적어도, 오늘날까지 중국은 진주만 공습에 앞서 일본으로 인해 겪게 된 패배와 굴욕의 세월들을 통해서 빠르게 성장한 유일한 연합국에도 우호적인 통고를 한 적이 없다.확실히, 한국인들은 참전을 갈망한다. 그들은 참전하는 것이 궁극적이며 결정적인 정세에 있어서 자신들의 요구를 표명하는 데 필수 불가결한 것임을 알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방식으로 군대 없이 이들이 참전할 수 있을까? 그들이 가지고 있는 잠재력은 과연 무엇일까? 이는 만일 이러한 실패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다시 오지 않는다는 가정 하에서 한국의 자유를 위한 최초의 실제적인 기회를 맞음에 있어 이 전쟁에서 한국인 스스로가 대답해야 할 문제들이다.만일 한국의 지도자들이 의지를 가지고 있다면 한국인들이 이에 대답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자신들의 몫으로 착수할 특정한 과업들이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게릴라전, 첩보 활동과 방해 공작을 효과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 이러한 것들은 이 전쟁에서 중요한 특징들이며 한국 독립군의 봉기에 얽힌 어려움 없이 착수 가능한 것들이다.1905년 한국 강점 이후, 한국인들은 일본군과 대항해 게릴라전을 벌여왔다. 이러한 게릴라전은 개별적으로 행해졌다. 그들의 투쟁은 산발적이었으며 10회 이상 일본군의 전멸을 이끌어내었으며, 그러한 투쟁은 계속 지속되었다.그리고 최근 한국 게릴라들은 중국 점령지역으로 세를 확장하였으며 중국의 투쟁력의 일부분을 형성하였다.한국인들은 연합국들이 일본군을 무너뜨리고 지나가야만 하는 만주와 중국 북부 지형들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상황의 진전과 군역을 위해 실현 가능한 사절단을 제공하며 분명 국제 연합의 물질적 원조와 초기 지원을 받을 가치가 있는 것이다.첩보 활동은 아시아 전쟁터에서 타국 군대를 필요로 하지 않는 한국인의 즉각적인 전쟁 잠재력을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다. 30여 년 동안 일본 통치 하에 있었던 사람들은 일본 방식에 길들여진 한국사람이 되었다. 그들은 한국어 과목을 일본어 과목으로 왜곡하는 일본 교육 계획의 강요 하에 배우게 된 일본어를 말하고 쓴다.한국인들은 타고난 언어학자들이

    862 김형민이 미시간 대학 총장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7-05-12발신주소: 서울, 한국,발신자: 알렉산더 G. 루스번(Alexander G. Ruthven) 총장수신자: 알렉산더 G. 루스번(Alexander G. Ruthven) 총장수신자: 미시건 대학(University of Michigan)수신주소: 미시건(Mich.) 주 앤 아버(Ann Arbor)친애하는 박사님,주한 미시건대 총동창회가 작년에 설립되었음을 알리게 되어 기쁘게 생각합니다. 총동창회 회원에는 미군과 한국인들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총동창회는 하나의 기구로서 빈번한 모임을 가지고 공공 복지를 증진시킬 수 있는 계획을 계속 추진해 왔습니다. 복지 후원을 위해, 총동창회는 한미 미식축구협회(Korean American Football Association)에 관심을 두고 있습니다. 이 단체는 24기 회장인 전경무(J. Kyung Dunn) 소령과 명예 회장인 아처 러치(Archer Lerch) 미군 총사령관이 작년 서울에서 결성했습니다. 한미 미식축구협회(Korean American Football Association) 회원들은 여러 차례 시합을 가졌으며, 3만 명의 관중이 모이기도 했습니다. 좋은 출발이었습니다. 한미 미식축구협회의 목적은 미식축구를 고등학교 및 대학교의 스포츠로 소개하고 장려하며 대중화시키는 것입니다. 또한 공정한 경쟁의 경기를 즐기는 사람뿐만 아니라, 한국의 청소년들이 최고의 스포츠 정신과 단체 협동을 배울 수 있도록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한국에서 미식축구를 활성화시키기 위해서는 외부로부터의 애정 어린 지원이 절실히 요구됩니다. 특별히 도움이 필요한 것은 유니폼과 신발, 공을 비롯한 장비들입니다. 이를 위해 미시간대 총동창회는 회의를 통해 결의안을 채택했습니다. 그 결과, 박사님께 미시간대에서 사용했던 장비들을 한국 선수들이 이용할 수 있도록 지원해 주실 수 있는지 여쭙게 되었습니다. 또한 미식축구 장비뿐만 아니라, 야구나 농구의 중고 장비 또한 제공해 주시기를 요청 드립니다. 만일 이러한 장비들의 제공이 가능하다면, 이를 한국에서 사용하고 싶습니다. 답변을 부탁드립니다.답신은 전경무(J. Kyung Dunn) 동창에게 아래의 주소로 직접 발신해 주시기를 부탁드립니다. 루스 스메들리(RUTH SMEDLEY)시민과장 (CIV. EMP.)교육부(EDUCATION)주한미군사령부 본부(HEADQUARTERS USAMGIK)APO 235-2 C/O PM.캘리포니아(Calif.) 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감사합니다. 김형민(Hyung Min Kim) 33기 서울시장

    863 전경무가 미국방성 피터슨(Peterson)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6-12-20발신주소: 호텔 라파예트 워싱턴(Washington) D. C.발신자: 하워드 C. 페터슨(Howard C. Perterson) 귀하, 수신자: 하워드 C. 페터슨(Howard C. Perterson) 귀하, 수신주소: 육군성 차장보 워싱턴(Washington) D. C.친애하는 차장보 님, 귀하의 호의에 힘입어 찰스 맥카시(Charles McCarthy) 대령을 만났습니다. 한국으로의 귀국과 관련한 저의 요청에 대한 맥카시(McCarthy) 대령의 조언에 따라, 저는 미군 총사령관인 하지(Hodge) 장군과, 미군 외교문제 소장인 토마스 H. 워드(Thomas H. Ward) 대령, 24군단 정치 고문인 윌리엄 R. 랭던(William R. Langdon) 씨께 서한을 전달했습니다. 이 서한에서 저의 귀국 승인이 가능한지 여쭈었습니다.귀하의 승인을 요청하며, 다음의 자료를 제출합니다. 1945년 10월 28일, 연합사령관이 승인한 no. 11493에 의해 항공편으로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를 출발하여, 1945년 11월 4일 서울에 도착, 다시 1946년 9월 1일 S. S. Cape Tryon 편으로 인천을 출발하여 1946년 9월 19일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도착하였습니다. 미국으로 재입국하면서 제가 계획했던 개인적, 공식적 목표는 완벽히 달성되었습니다. 저는 1947년 3월 1일 경, 선박 편으로 모국인 한국으로 돌아가길 원합니다. 승선료는 자비로 지불하겠습니다. 존경을 표하며, 감사합니다. 전경무(Jacob Kyuang Dunn)

    864 전경무가 미국무성 비자국 국장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6.12.20발신자: 미국무성 비자국 국장수신자: 미국무성 비자국 국장친애하는 메이어(Meyer)나는 주한미군부대 대장 하지 장군에게 편지를 썼다. 그 편지를 통해 나는 한국에 돌아가기를 희망한다는 것과 그의 승인을 기대한다는 것을 그에게 알렸다. 나는 지금 당신에게 1947년 3월 1일이나 그때쯤 미국을 떠나 합동참모회의에 참여해 진술하기 위해 신청서를 제출한다. 그리고 당신이 그 수속 절차를 신속히 처리해 주기를 요청한다. 참조할 정보들:1945년 10월 28일 합동참모본부가 발표한 군 허가용 공중 수송 명령 11495번에 의하여 샌프란시스코를 떠날 것을 허락받음. 1945년 11월 4일 서울 도착. 1946년 9월 1일 S. S. Cape Tryon에서 인천(仁川)을 출발. 1946년 9월 19일 샌프란시스코 도착.존중을 표하며, 전경무(田耕武)

    865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 지부에서 전경무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4-06-24발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 지부발신주소: 워싱턴(Washington) D. C.발신자: 전경무수신자: 전경무재미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 지부에서 전경무에게 보낸 편지댄(Dan) 씨, 필리스(Phyllis) 씨마침내 저희 사무소가 문을 열게 된 것을 기쁜 마음으로 전해 드립니다. 3개월 동안 불안한 사정으로 인해 업무가 과다해서, 저는 지금 하루에 12시간에서 14시간을 일해야만 하는 처지입니다. 하지만 저는 기꺼이 그렇게 일하고 있으며, 여기까지 오기 전에 계획했던 프로그램이 어느 정도 진척을 이루기 시작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어젯밤 트리시아(Tricia)에게 전화를 했지만 엘렌(Ellen)과만 통화를 할 수 있었을 뿐입니다. 트리시아(Tricia)는 지난 목요일, 고등학교를 졸업했습니다. 그 아이의 어머니와 잭(Jack)이 디뉴바(Dinuba)에서 와서 졸업식에 참석했습니다. 엘렌(Ellen)의 말에 따르면 트리시아(Tricia)는 샌프란시스코에 가서 메리(Mary)와 한 달을 보낼 거라고 합니다. 그리고 나서 8월쯤에 저와 지내러 이 곳으로 올 것입니다.두 분과 아드님들이 잘 지내시기를 바라며, 가능하다면 가끔 제게 편지를 보내주십시오. 저는 계속해서 우유를 마시고 있지만 이 곳 워싱턴의 더운 날씨 때문에 몸무게가 좀 줄었습니다. 워렌(Warren)도 살이 빠졌답니다.다음 주쯤에 더 길게 쓰겠습니다.‘빙고’ 게임을 하러 오는 친구들 모두에게 안부를 전해 주세요.

    866 전경무가 남영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7-05-25발신자: 남영수신자: 남영남영에게당신에게 쓰는 이 편지에서 당신은 내용을 읽을 것이며 이에 앞서 당신의 아버지에게도 그가 알게 하기 위해 똑같은 내용이 전달되었습니다.(나는) 3월 31일에 도착했습니다. 여행의 동료로서 한국 평화신문 사장 김동성이 함께했습니다. 여행하는 데 있어서 우리가 택한 북쪽 길은 폭풍이 쳤습니다. 배 위에는 상당수의 군인들이 있었고 한국에 오는 그들은 특별히 선발된 자격을 갖춘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사람들에게 나는 한국에 대하여 두 번의 강연을 했습니다. 당신의 편지는 배달되었습니다. 김구(金九)와 조소앙(趙素昻)을 만났습니다. (그들 중) 후자가 승자였습니다. 두 사람이 모두 시기적으로 그리고 사안들에 있어서 보조를 맞추지 못했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유감입니다. 둘 다 아직까지 씩맨(Sickman)의 통치력에 의존하고 있습니다.독립당은 내부의 어려움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보수적인 Chungking 그룹과 직업적인 자유주의자, 두 분파가 있습니다. 당의 이익을 위하여 자유파가 이겨야만 합니다. 보수파는 독립당을 한민당과 합치려고 시도해 왔습니다. 그때에 내가 서울에 없었던 것이 유감입니다. 당신의 전보는 내가 독립당 회의에서 하와이(Hawaii)를 대표하도록 지시했습니다. 회의 주간 동안에 대전(大田)에 갔습니다. 지난주에는 대구(大邱)에 갔습니다. 또한 경주(慶州)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많은 청중들 앞에서 연설을 했습니다. 나는 어떤 면에서의 강인함에 대한 당신의 충고를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미소공동위원회(공위)는 유쾌한 분위기에서 시작했습니다. 나는 어떤 명확한 무언가가 지금 진전되고 있기를 희망합니다. 씩맨(Sickman)과 동료들은 이제 김규식(金奎植)의 모범적인 지도력에 의해 사라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군정 당국도 호의적으로 김규식(金奎植)을 지지하고 있습니다.군정에서 나의 위상은 좋습니다. 한국 청년들에 대한 나의 노력에 대해 고마워하고 있습니다. 나는 지금 한국 아마추어 체육회의 부회장이고 그리고 전적으로 올림픽 협상에 책임이 있습니다. 마지막으로 문서가 도착했습니다. 대략 3분의 1이 수송과정에서 파괴되었습니다.손**를 만났습니다. 지금 당장 책을 출판하는 것은 지혜롭지 못한 것 같습니다. 적어도 미소공동위원회 동안은, 군정 당국은 선동적인 어떤 것도 출판하지 말 것을 요구합니다. 손**과 다시 이야기하고 당신에게 편지하겠습니다. 가족들에게 안부 전하고 내 가족에게 사랑한다고 전해 주십시오.

    867 엘리자베스 켈러가 전경무 가족에게 보낸 편지

    작성일: 1947-08-19엘리자베스 켈러 (Elizabeth Keller) 귀하일리노이 주, 루이스빌, 서 브로드웨이 (W. Broadway, Louisville, Il.) 2304 번지 N. J. 던(N. J. Dunn) 씨 부처 및 가족과 썬 (Thun) 가(家)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Los Angeles, Calif.)댄 던(Dan Dunn) 가(家)하와이 주, 호놀룰루 (Honolulu, T. H.)친애하는 여러분께6월 10일 우리의 소중한 J. K.의 죽음과 관련하여 여러분께 편지를 쓴 이후로 저는 제임스 (James)로부터 자신은 물론 그의 부모님을 대신해 쓴 서신들을 받았습니다. 샘슨 썬 (Samson Thun) 역시 제게 한국을 떠나기 전, 그의 ‘해임’에 대해 J. K.와 나눈 이야기에 대해 제게 편지를 써 주었고, 패트리샤 (Patricia)의 편지도 받았습니다. 이 모든 편지들에 대해 무척 고맙게 생각하며, 여러분께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감사의 말씀을 전하고 싶습니다.전에 여러분께 편지를 썼을 때 저는 저희 신문 사설과 우리 교회 신문에 기사를 싣기 전에 댄 (Dan)으로부터 좀더 정보가 전해지기를 기다리겠다고 하였으나, 더 이상 확실한 정보를 아직까지 받지 못하였고 시간이 그야말로 유수와 같이 흐르고 있는 고로, 우리 교회 신문의 7월호에 우리가 사랑하던 이에 대한 찬사로서 ‘서 브로드웨이의 감리교 신자’라는 글을 썼고, 지금 이렇게 그 글의 사본과 제 ‘찬사’가 실린 우리 교회 신문 약 10여 부를 각각 여러분 세 분의 가정에 보내고 있습니다. 우리 교회의 신문 약 150 부를 이미 옛 친구들과 교회 지인들에게 보냈으며, 1920년도 고등학교 졸업생들 중 연락이 닿는 사람들과 여러 은사님들께도 보냈습니다.J. K.가 준비하고 노력하고 헌신했던 것을 기리기 위해서는 더욱 고귀하고 훌륭한 표현이 마땅하기에 저로서는 이보다 더 훌륭하게 해내고 싶었지만, 여러분께서는 제 ‘찬사’를 좋게 봐 주실 걸로 믿습니다. 또한 저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께서 인간의 실망과 고통, 절망을 통해 역사를 계속하실 것을 믿으며, J. K.의 삶을 스쳐간 모든 사람들이 더 풍요롭고, 그의 정신의 선물이 우리가 죽음이라고 부르는 이 사건으로 인해 손상되는 일 없이 몇 백 년이고 계속 이어져 나갈 것을 믿습니다.우리 교회 신문이 나오기 전 일요일, 저는 그를 기리며 교회 제단에 꽃을 놓았습니다. 이 곳의 공공 도서관에 제 ‘찬사’ 사본을 보냈을 때, J. K.가 ‘조사 활동’을 위해 도서관에 자주 갔던 관계로 그를 잘 아는 그 곳 관리 중의 한 사람이 제게 그 ‘찬사’를 ‘켄터키 실’에 두겠다는 편지를 보내왔습니다. J. K.의 에세이와 연설, 사설, 시, 그 외 여러 종류의 기사들 중 상당수가 이 곳에 그의 서신과 일기, 기사들과 함께 있습니다. 저는 이것들이 보물이며, 다른 사람들에게 영감과 영향을 주기 위해 전시되는 것은 물론 잘 보존되어야 한다고 굳게 믿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곳의 고등학교와 미시건 대학에, 그러한 목적을 위한 기록 보관소가 있는지, 특별히 재능이 있고 뛰어난 제자들의 저작물로 학교의 부를 늘리는데 관심이 있는지를 묻고 있습니다. 여러분께서도 제 행동에 찬성하시는지요? 그렇게 하고 싶으십니까? 한국인의 업적을 전시나 보존을 할 만한 데가 있을까요? 그가 대학에서 있은 4년 동안 썼던 일기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나요? 졸업 후에 그는 일기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메리 (Mary)가 가지고 있는지 모르겠군요. 메리 (Mary)는 재혼을 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재혼한 남편의 이름은 무엇인가요? 이제 패트리샤 (Patricia)는 누가 돌볼 것이며, 대학 교육은 누가 시킬까요? J. K.에게 재산이나 혹은 채무가 있었나요? 그의 개인적인 일은 누가 처리할 것입니까? 여러분께서 우리 친구의 노력과 영향에 대해 알 수 있는 일을 알려주신다면 너무도 기쁠 것입니다.영원한 사랑과 호의를 담아서엘리자베스 켈러 (Elizabeth Keller)

    868 엘리자베스 켈러(E. Keller)가 전경무 가족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7-08-19발신주소: 서 브로드웨이(W. Broadway) 2304 켄터키(Ky.) 주 루이스빌(Louisville)발신자: 전경무(N. J. Dunn) 부처 및 일가수신자: 전경무(N. J. Dunn) 부처 및 일가수신주소: 선(Thun) 일가, 캘리포니아(Calif.) 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댄 던(Dan Dunn) 부처 및 일가, 하와이(T. H.) 주 호놀룰루(Honolulu)친애하는 여러분,지난 6월 10일 J. K.의 사망에 대하여 여러분들께 서한을 보내드린 후, 저는 제임스(James)로부터 자신과 부모님에 대한 내용을 담을 편지를 받았으며, 샘슨 선(Samson Thun)으로부터는 J. K.가 한국에서 추방당해 떠나기 전 나누었던 이야기에 관한 편지를 받았습니다. 또한 패트리샤(Patricia)도 편지를 보내 주었습니다. 저는 이 모든 편지에 대하여 진실로 감사드리며, 제 마음으로부터의 감사를 여러분 모두가 받아 주시길 바랍니다. 지난번에 드린 편지에서, 저는 우리 신문에 실을 기사와 교회 주보에 쓸 글을 위해 댄(Dan)으로부터 올 더 많은 정보를 기다릴 것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나 아직까지 더 자세한 정보가 도착하지 않았고, 시간은 정말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기 때문에 우리가 사랑했던 J. K.에 바치는 헌사를 7월에 발행될 주보 “웨스트 브로드웨이 감리교(West Broadway Methodist)” 지에 싣기로 했습니다. 제 “헌사”가 실린 주보 약 여섯 매씩과 여러분 세 가족 모두에게 같은 내용의 서한 사본을 각각 보내드리겠습니다. 오랜 친구들과 교회 식구들에게 우리 주보 150매씩을 보냈습니다. 연락이 닿은 1920년 고등학교 졸업 동기들과 몇몇 은사님들께도 보냈습니다. 비록 제가 쓰기를 원했던 것은 아니지만, 여러분들께서 저의 “헌사”를 마음에 들어 하시리라 믿습니다. 더 높은 곳으로 오르기 위한 J. K.의 준비와 노력과 정진에 대한 찬사를 위해서는 오직 가장 훌륭하고 고상한 수식만이 가치가 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저는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여전히 인간에게 좌절과 고통, 절망을 내리실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또한 J. K.의 삶에 닿아 있는 사람은 누구라도 더욱 풍요로워졌으며, 그의 영혼이 안겨준 축복은 죽음과 같은 사건에 약해지지 않고, 수세기 동안 이어질 것이라 믿고 있습니다. 저희 교회의 주보가 도착하기 전인 일요일, 저는 교회 제단에 우리 아이를 기억하기 위하여 꽃을 봉헌했습니다. 한편, 저는 헌사의 사본을 공공도서관에 보냈습니다. J. K.가 자주 참고 도서를 이용했기 때문에 그를 매우 잘 알고 있는 근무자 중 한 사람이 그 헌사는 “켄터키 룸(KENTUCKY ROOM)에 보관될 것이라고 전했습니다. J. K.의 에세이, 연설문, 사설, 시를 비롯한 다양한 작문들이 그의 편지, 일기, 기사들과 함께 보관되어 있습니다. 또한 저는 이것들은 보물과도 같으며, 보존되어야 한다고 확고히 믿고 있습니다. 또한 타인들에게 감명을 주고 그들에게 영향을 주기 위하여 전시되어야 할 것입니다. 저는 그래서, 이곳의 고등학교들과 미시간(Michigan) 대학 측에 그들이 이러한 목적의 보관 시설을 가지고 있는지, 또 두드러지고 자질이 풍부한 학생의 작품들로 그 자산을 풍부히 만들 의향은 없는지 타진해 보았습니다. 이 일을 도와주실 의향은 없는지요. 이 중 관심 있는 부분이 있습니까? 전시나 보관을 이루어내기 위한 한국 규정이 있습니까? J. K.가 대학 시절 써 왔던 그의 일기가 어디에 있는지 아시는지요? 졸업 후 그는 그것을 가져갔습니다. 혹시 메리(Mary)가 그것을 가지고 있나요? 저는 메리(Mary)가 재혼했다고 알고 있습니다. 두 번째 남편의 성이 무엇인지요? 현재 패트리샤(Patricia)와 그녀의 학업을 보살펴 주는 사람이 누구입니까? J. K.에게 재산이나 부채가 있었는지요? 그에게 도움을 주었던 사람은 누구였습니까? 이 사실들에 대하여 알게 된다면 좋겠습니다. 또 우리 아이가 끼친 영향력과 노력들에 대해서도요. 언제나 깊은 사랑과 기원을 드립니다.

    869 한국 - 미국과 소련의 이데올로기 시험

    발신일: 1947-01-26카이로 회담까지 한국에 대한 것은 거의 알려지지 않았다. 전 대통령 루즈벨트(Roosevelt)와 전 수상 처칠(Churchill) 그리고 총통 장개석(蔣介石)은 전쟁중에 공동으로 “한국을 적당한 시기에 독립을 시킨다”고 선언했다. 그러나 한국은 오랜 문명국이며 극동 역사에서 중요한 역할을 해왔다. 한국은 만주의 남쪽으로 튀어나온 반도로 동쪽에 일본이 서쪽에 중국이 있다. 그리고 짧은 거리의 해수에 의해 분리되어 있다. 이러한 근접성으로 한국민의 관계는 이 두 나라와 밀접한 관련을 갖고 있다. 모양 면에서 한국은 플로리다(Florida) 주와 닮았다. 영역 면에서 85,000평방 마일로서, 잉글랜드(England)와 웨일즈(Wales), 스코틀랜드(Scotland)를 합한 크기에 가깝다. 지형학적으로 육지는 뉴 잉글랜드(New England)—암석이 많고 기복이 심한 구릉—와 같은 형세를 띠고 기후는 미국 동부의 메인(Maine) 주에서 사우스 캐롤라이나(South Carolina)에 이르는 지역의 그것에 비견할 만하다. 한국의 식생은 다양하며 온대 지역에서 생장하고 있다.한국민은 몽골리안이다. 그러나 중국, 일본인과는 자신의 언어를 갖는다는 점에서 구분되며 인구는 현재 2천 6백만이다. 한국인의 기원은 지금은 하얼빈 시가 세워져 있는 만주에서 시작되었다. 그리고 전통적으로 단군(檀君)이 종족의 시조로 알려져 있다. 진정한 한국의 역사는 기원전 1122년에 고대 한국으로 이주한 기자(箕子)—(한국의 사회질서의 기초를 세운 것으로 인식되고 있는) 중국의 귀족—로부터 시작되었다.한국민 최초의 왕국은 부여였다. 서력 기원이 시작될 즈음에 한국의 영토는 현재의 한반도와 대략 남만주를 포함하고 있었고, 고구려, 백제 그리고 신라로 나뉘었다. 고구려는 중국과 많은 전쟁을 한 것으로 유명했다. 백제는 동양의 위대한 문화 요소를 가진 첫번째 고대국가였다. 서기 374년에 한문학을 가르치는 대학이 설립되었다. 384년에는 절과 승원이 산속에 건립되었다. 산스크리트어가 연구되었고 인도와 직접적인 교통 왕래도 이루어졌다. 신라왕조는 화려한 문명을 이룩했고 수도인 경주는 예술과 과학, 즉 건축미, 종교?문학 연구의 중심지였다. 경주에는 아직도 1300년 전에 세워진 천문관측대—세계 最古로 여겨지는—가 서 있다.935년에 삼국은 오늘날 Korea라는 이름을 유래시킨 통일 왕국 고려로 통합되었다. 그리고 이러한 통합 속에서 사람들은 고도의 불교적이고 국가적인 문화 질서를 발전시켰다. 고려왕국은 450년간 통치하였다.1392년에 새로운 왕조—이 씨 가문—가 한국을 넘겨받아 통치했다. 1910년—제2차 세계대전의 끝 무렵—에 이르기까지 한국을 통치했다. 한국민들은 끊임없이 자유를 향하여 저항했고 그 저항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중국 공자(孔子)의 사회적 교훈들은 깊게 한국민에게 자리하고 있다. 효는 이것들 중의 하나였으며 부모를 공경하라는 기독교 계율과 사실상 같은 것이었다. 부모에 대한 자식의 공경과 헌신은 국가적 이상이었으며 많은 책과 시의 주제가 되어 왔다.

    870 카이로와 한국의 독립

    작성처: 전경무(J. Kyuang Dunn)카이로(Cairo)와 한국 독립최근의 사설에서 저자는 주간 코리안 내셔널 헤럴드 퍼시픽(The Korean National Herald-Pacific) 지에 다음과 같이 썼다.한국의 문제에 대한 카이로(Cairo) 회담은 정말로 중요하다. 한 나라와 거기에 예속되어 있는 23,000,000명의 사람들이 곧 자유와 독립을 얻게 될 것이라고 승인을 받은 것이다.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과 처칠(Churchill) 수상, 장(Chiang) 총통과 그 나라들의 대표에 의한 이 발표와 결단은 다음과 같은 “그들은 강제로 빼앗긴 주권과 자치권을 되찾길 희망한다”라는 문구가 적혀 있는 대서양 헌장(the Atlantic Charter)을 실제로 적용한 결과이다.추축국 공격의 첫 번째 희생양이 된 한국의 경우, 공동 전쟁에 포함되어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이 공동 전쟁은 네 가지 자유(역주: 1941년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이 선언한 네 가지 자유-언론과 표현의 자유, 신앙의 자유, 빈곤으로부터의 자유, 두려움으로부터의 자유)의 적들을 물리쳐야 한다는 것이었다.이 발표는 33년 동안 그들의 적에 맞서 자신들의 대의를 위해 용감하게 싸워오던 국민의 사기를 진작시켜 주었다. 그리고 모든 한국인들에게 개인적으로도 국가적으로도 의미심장한 것이었다.이 발표는 23,000,000 한국인들의 희망을 최고조에 올려놓았다. 직접 참여를 위한 한국의 자유와 독립이 현실화되는 순간이었다.그러나 한국인들은 고조된 흥분과 부푼 희망 속에서도 커다란 위험과 증가된 어려움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이를 위해 분별력 있고 냉정한 판단을 견지해야 할 필요성이 더욱 커졌다.정치적 직접성을 완화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다. 대통령과 새로운 지도자가 되고 싶어하는 무수한 야심가가 생겨날 것이다. 권력을 위한 집단간의 갈등이 고조될 것이다.노예 상태에서 벗어나 자유로 가는 길에는 많은 위험이 도사리고 있다는 사실을 한국인들은 알아야 한다. 그리고 위의 발표는 한국이 일본을 물리치고 독립을 획득했다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그 발표에는 이렇게 써있다. “앞서 말한 세 열강은, 한국 국민들의 노예 상태를 염두에 두고, 오래지 않아 한국이 자유롭고 독립된 나라가 되도록 결정한다.”“오래지 않아”라는 표현에 의미가 있다. 그 의미를 이해해보면 한국인들의 의무는 더욱 심각하고 중대하다. 한국의 자유를 위한 전쟁은 이 발표에 의하면 오직 절반의 승리일 뿐이다. 완전한 승리를 위한 나머지 절반이 더 큰 일이다. 한국 문제에 도사리고 있던 재난이 여전히 남아 있다. 지금까지 견뎌왔던 비능률성이 진작에 근절되지 않고 아직도 기승을 부리고 있다. 국제연합(United Nations)의 일에 적절히 참여하기 위한 협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국내 및 국제적 의무를 다하기 위한 한국의 단결은 여전히 달성되지 않고 있다. 여전히 가려야 할 시시비비가 있는데, 아마도 마지막까지 남아있을 것 같다.이제 한국은 자유롭고 독립된 국가로 인정을 받았으므로 한국 국민들은 목적의 힘과 단결로 이러한 승인을 받아야 한다. 지금까지 손실을 입혀온 닳고닳은 파당과 개인의 의지와 야망을 넘어서야 하고 이런 것들이 앞으로 지속되어서는 안 된다. 한국은 정당과 그 독재자보다 훨씬 넓다.미국, 영국, 중국 세 나라는 한국을 위하여 약속을 했다. 결과적으로 이 약속을 즉각적으로 적용함에 앞서 한국의 자유는 한국인들의 능력을 조건으로 하고 있다. 이 전쟁의 승리에 있어 한국인 참전의 정도와 직접성 그리고 한국 행정부가 신뢰할 만하다는 입증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후자는 명백히 의문시되고 있다. 그러나 결정은 내려졌고, 적군에게서의 승리는 정치적 논쟁이 아니라 주요한 문제이기 때문에 이것은 지금 당장 검토할 문제는 아니다. 카이로 선언 이후,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을 직접적 쟁취하려면 서둘러 참전하고 이 참전을 위해 필요한 협상을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 두 가지에 대한 실천과 증거가 없으면 약속은 약속으로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사실, 한국에는 그들 자신의 실체적 군대가 없다. 일본인들의 통치 하에서 한국 내에 있던 한국인들은 군사적 훈련을 받을 기회가 없었다. 중국 땅에서 대규모의 독립적인 한국인 군대를 만들고자 했던 소망은 이 중대한 때에 그저 소망일 수밖에 없다. 중국이 홀로 우세한 일본군과 싸울 때, 일본인을 증오하는 한국인들은 모두 중국 군대에 입대했다.그리고 군대 안에서 숫자야 어찌되었건 남다른 인정을 받았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부터 중국은 거대 열강들의 동맹국으로서 인력은 충분하고 적절한 무기가 필요하다고 표현했다. 이동의 어려움과 유럽전선에서 사용되던 필요한 장비들이 중국에 충분히 당도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중국 스스로 거대한 인적 자원을 가지고 있음에도 대규모 공격을 위한 충분한 무기가 없는 상태일 때, 중국 일부 지역에 한국 군대가 있었다는 것은 그대로 믿기가 힘들다.한국은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고 가능하고 가질 수 있는 범위에서 협상을 해야만 한다. 그러므로, 한국이 즉각적이고 합리적으로 전쟁에 참여하는 방법은 게릴라전, 첩보 활동, 방해 활동이다. 게릴라전에서 한국인들은 풍부한 경험을 가지고 있다. 1905년 러일전쟁 말기, 애국적 한국인들은 일본인의 통치에 반대하여 게릴라가 되었다. 비록 현저한 군사력을 지속하거나 결정적인 전투를 치른 것은 아니지만, 그들은 여전히 불안정한 나라인 만주로 건너갔다. 일본인들이 남만주 지역에 자신들의 사업을 개발하고 확장하자 한국 게릴라들은 한국을 사랑하는 마음에 일본인들에게 복수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저항이 역사를 바꾸지는 못했다. 하지만 그들은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증오하는 마음을 확고히 했다. 그들의 후계자들은 1931~32년 사이의 만주사변에 함께 참여했다. 그들은 1937년에 시작된 현재의 중국 방어 전쟁에서도 싸웠다. 그리고 그들이 현재 중국이 점령하고 있는 북만주 지역에서 일본인들과 투쟁했다는 사실은 공식적으로 인정되고 있다.한국의 게릴라전은 사실이고, 이러한 사실은 한국인들의 입장에서 좀 더 심도 깊은 참전을 위해 초기에 협상되어야 할 사례이다.첩보 활동은 어떤 이유에서건 한국인들이 가장 잘 참전할 수 있는 방법인 것으로 보인다. 한국인들은 태어나면서부터 일본인들을 증오하고, 아시아 지역에 대해서 친숙하다. 한국인들은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를 능숙하게 말하고 쓸 줄 안다. 한국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일본인들의 습관과 문화에 대해 가장 잘 알고 있다. 그리고 사실, 그들은 이미 첩보 능력을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중국 정보국에 귀중한 군사적 정보를 가져다주고 있다.방해 활동은 또 다른 직접적인 참전 방법이다. 이것은 상당한 효과를 볼 수 없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은 아직도 일본 군대에 포위되어 있고, 연합군의 군사력은 미치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맹군이 가까이 당도하여 적군의 전략 요충지인 만주, 한국, 일본에 폭탄을 투하하면, 1919년에 무기도 없는 한국인들이 들고일어난 것처럼 전국적으로 소요 사태가 일어날 것이다. 그것도 아주 광포하게 일어날 것이다. 그리고 이 단계에서 한국인들은 일본을 무찌르려는 동맹국의 전략에 가장 중요한 기여를 하게 될 것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 단계는 협동 작전을 통해 지금 조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 게릴라전과 첩보 활동 기능, 국제연합의 지도와 밀접한 협력관계를 가져야만 한다. 그러나 이러한 한국의 군사적 노력을 효율적인 참전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협상이 필요하다. 만약 한국인들 스스로 적절한 조직을 구성할 수 있고, 국제적 외교관계를 유지하는 위치에 있다면, 협상의 중요성을 강조할 필요가 없다. 그러나 한국인들의 실상은 이런 점들이 결핍되어 있다. 그러므로 협상이 필요하며, 계획이 수립되어야 하고, 원조가 이루어져야 한다.군사적 참여에 대해 협상하는 데에는 중국과 미국의 원조가 사실상 가장 필요하다. 왜냐하면 즉각적인 한국의 참여는 중국 땅에서 이루어져야 하고 미국의 발의와 지도력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즉, 중국의 동의를 얻고 미국의 완전한 협력이 있어야만 한다.한국은 나라를 잃었을 때부터 중국의 공감과 이해를 받아왔다. 그리하여 1919년 이후, 중국은 한국의 정치 조직을 자신의 땅에 자리잡게 해주었다. 그리고 자신들의 방어전에 한국을 동맹국으로 인정해 주었다. 그리고 중국은 국제연합의 주요 회원 국가이고, 현재 한국의 전쟁 참여 노력은 중국의 영토 안에서 이루어지고 있기 때문에, 중국의 지원이 가장 필수적이라 하겠다.한국의 자유와 독립을 약속한 세 나라 중, 미국은 한국의 전쟁 노력에 가장 지원을 아끼지 않을 위치에 있다. 미국은 무기의 보고이다. 미국은 억압받고 종속된 자들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뛰어난 지도자이다. 미국은 어떠한 영토 확장이나 자국 혹은 타국의 정치적 지배에도 관심이 없다. 미국의 보호 아래 한국인들은 살아왔고, 정치적 독립을 위해 일할 수 있었다.이제 한국이 필요로 하는 것은 다음과 같다. 게릴라전, 첩보 활동, 그리고 방해 활동을 통한 군사적 참여의 목적을 가지고, 중국과 미국과 가장 이른 협상의 방법을 찾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한국 국민들과 중국, 미국에 있는 한국인 조직은 일치단결하여 일해야 한다. 한국인들은 내부의 분열을 최소한으로 줄여야 하고, 중국과 미국 정부의 신임을 받는 가장 능력 있는 지도력을 가지고 있는 하나의 강력한 기관을 유지해야 한다. 그리고 그 때까지 이른 참전은 미정으로 남겨두어야 한다.국제연합의 승리를 위한 한국의 참전은 훌륭한 목표이다. 그리고 이 목표를 위해 한국인들은 그들의 모든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