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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841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서 김구에게 보낸 전보

    발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발신자: 김구수신자: 김구수신주소: P.O Box 95 중경, 중국전하는 바에 의하면 김약산(金若山)이 조선 의용군에 보낸 다음의 전보는 4월 15일 중국 군사위원회의 명령에 따른 것이다. 의용군은 조선독립군과 합병했으며, 첫 분견대가 되는 의용군 최고사령관은 중국 군사위원회의 직접적인 통제하에 놓이게 된다. 군대와 임시정부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 설정도 없다. 의용군이 계속해서 활약할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연맹을 재편성해라. 세부적인 사항은 이만 줄인다. 사실이냐?재미한족연합위원회

    842 김약산이 안석충에게 보낸 전보

    발신주소: 중경발신자: 안석충수신자: 안석충수신주소: 웨스트 제퍼슨(West Jefferson) 1219 웨스턴 유니언(Western Union)6월 1일중국 군사위원회(Chinese Military Council)의 명령으로 4월 15일자로 조선의용군(Volunteer Corps)은 대한민국 독립군(Korean Independence Army)과 합병합니다.나는 부사령관이며, 의용군은 제1함대가 됩니다.군은 중국 군사위원회(Chinese Military Council) 직속이 되며, 군과 대한민국 임시정부 사이에는 관계가 없습니다.동맹을 재정비하여 의용군을 도와주시고, 활동을 계속해 주십시오.자세한 내용은 서신으로 보내겠습니다.김약산(Kim Yak San)안석정(Ahn Suck Chung) 32 D 군단 부사령관

    843 이승만 방송 원고

    작성일: 1942-06-13작성처: 이승만이승만(李承晩)의 한국어 연설에 대한 번역1942년 6월 13일 극동으로의 단파 방송나의 조선 동포여! 나, 이승만(李承晩)은 워싱턴(Washington)에서 고국과 해외에 있는 우리 2천3백만 조선 동포에게 얘기하고자 합니다. 여러분들이 어디에 있든지 간에 나의 말을 주의 깊게 들어주길 바랍니다. 내가 여러분에게 말하고자 하는 것은 자유에 관한 메시지이기 때문에 반가운 소식이 될 것입니다. 내 이야기를 듣는 여러분은 자유의 사자임에 틀림없습니다. 여러분의 동지들에게 말하십시오. 여러분의 이웃에게 말하십시오. 그들이 다른 모든 이들에게 말하도록 하십시오. 오 나의 동포여, 그것이 자유의 소식입니다. 자유! 자유! 자유! 얼마나 기분 좋은 소리인가. 우리에겐 얼마나 타오르는 불꽃인가. 적들에겐 또 얼마나 간담이 서늘해지는 것인가.조선의 신사숙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에게 우리의 영광의 날이 가까이에 있음을 알리고자 합니다. 야만적인 섬사람들이 우리에게 채운 노예의 사슬은 곧 부서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정부가 있고, 여러분의 정부가 여러분을 위해 일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부는 강한 보호하에 있습니다. 영웅적이고 애국적인 김구(金九)는 일본인과 싸우는 것을 결코 비겁하게 멈추지 않았고, 현재는 중국 중경(重京)에서 정부를 이끌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애국자들, 특히 이시영(李始榮), 조소앙(趙素昻), 조완구(趙琬九), 차이석(車利錫)과 그밖의 다른 이들이 그의 곁에 있습니다. 여러분의 군대는 우리의 위대한 사령관 이청천(李靑天) 장군의 지휘 아래 적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가서 적들과 끝까지 맞서 싸우고 있습니다. 여러분의 정부와 군대 모두는 위대하고 훌륭한 장개석(莊介石) 동지에 의해 성역을 제공받았습니다. 도움이 밀려오고 있습니다. 점점 더 많은 도움들이 이미 장개석(莊介石) 총통과 부인이 개인적으로 여러분의 정부와 군대에 거금을 제공했습니다. 미국과 하와이, 쿠바, 멕시코 그리고 일본의 힘이 미치지 않는 세계 곳곳에 거주하는 애국적인 조선인들이 지금껏 기부해 왔고, 계속해서 중경(重京)으로 돈을 보내고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 군대는 매일매일 커 가고 있고, 무기, 군수품, 군보급품들을 갖출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둠이 걷히고 새벽이 찾아오듯이 이제 한국의 날이 밝아 오고 있습니다. 37년 동안 우리의 애국적인 독립군은 외국에서 숨을 곳을 물색하고 춥고 배고픔 때문에 고생하며 혼자 힘으로 도움도 없이 우리 반도의 적들과 싸워 왔습니다. 우리는 우리 연합국인 강력한 미국과 영국과 함께, 그리고 용감하고 정복하기 어려운 중국의 군인들과 나란히 싸우고 있습니다. 이제야말로 우리가 우리 인종 특유의 용맹성과 애국심을 세계에 입증할 수 있는 때입니다.우리 고국에 있는 여러 동포들, 일본, 만주 그리고 시베리아에 있는 여러 조선인들, 중국 내 일본 점령 지역에 있는 여러 조선인들, 내 목소리를 듣고 이 말을 다른 사람에게 전해 줄 여러분들, 여러분 모두가 수행할 애국적인 임무가 있습니다. 내 말을 잘 들어보십시오.여러분은 일본의 군수공장을 폭파해야 합니다.여러분은 일본인이 사용하는 철도를 파괴해야 합니다.여러분은 일본 군대가 지나가는 도로에 지뢰를 부설해야 합니다.여러분은 낮이나 밤이나 늘 당신이 할 수 있는 한 어떠한 무장 일본인이라도 죽여야 합니다.여러분은 어느 부분이든 일본의 전쟁 수행에 관한 것을 방해하고 분쇄하거나 파괴할 태업과 폭동이라는 모든 행동을 실시해야 합니다.이 모든 일들을 여러분은 비밀리에 진행해야만 합니다. 여러분의 고국은 증오스런 난쟁이들에게 무기와 칼조차도 빼앗겨 버리지 않았는가. 여러분은 일본의 힘이 약해져서 당신이 적을 공격하고 근절시키게 될 때를 위해 비밀리에 준비해야 합니다. 반도의 야만인들은 오랫동안 우리나라가 “일본의 심장부에 겨누어진 단도”라고 말해 왔습니다. 여러분 지금이야말로 바로 그 단도가 되어 불결하고 사악한 괴물을 찔러 죽일 때입니다. 이순신(李舜臣), 임경업(林慶業), 김덕영 그리고 그밖의 우리 역사의 빛나는 영웅들을 기억하십시오. 조선의 신사숙녀 여러분, 우리는 우리 역사 속에서 수많은 세월동안 경멸스런 난쟁이를 쳐부수어 왔다는 사실을 결코 잊지 마십시오. 수세기 동안 여러분은 그 난쟁이가 아시아 본토로 들어오는 것을 막아 왔습니다. 수차례에 걸쳐 여러분은 그 난쟁이를 격퇴시켰고, 그 군대를 쳐부수었고, 그 해군함대를 산산이 부서뜨렸습니다. 여러분도 알 듯이 그 안에 숨어 있는 악은 세계의 어느 민족보다도 더 합니다. 여러분은 그의 웃음 뒤의 거짓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쉿쉿 하는 소리를 공손한 척하려고 쓰고 있지만 오히려 그것이 그가 비열한 인간임을 드러내는 것임을 알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여러분에게 가한 잔인한 행위를 기억하고 있습니다. 여러분은 그가 우리의 부녀자와 자녀들에게 가한 비열한 행위를 알고 있습니다. 위대한 미국 대통령, 프랭클린 D. 루즈벨트(Franklin D. Roosevelt)가 얘기한 것처럼 우리 조선인들은 일본의 피로 얼룩진 정복 사냥의 첫 희생양이었습니다. 그렇지만 최근에는 미국의 영토의 일부가 일본의 피로 얼룩진 변절 이력의 일시적인 희생자가 되었습니다. 이에 미국인들은 복수를 외쳤고, 그들 정부는 전쟁을 선언했습니다. 하지만 여러분, 이 오랫동안 그리고 황량한 세월 동안 교육받은 대로 고통을 겪은 첫번째 민족으로서 우리가 무시무시한 철퇴를 가하는 첫번째 민족이 됩시다. 이러한 우리의 특권을 주장합시다. 나는 여러분에게 희망 찬 가슴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조선인들이 미국을 우호협정 관계를 맺은 첫번째 서방 나라로 기억하는 것처럼 위대한 미국인들도 똑같이 조선을 그런 나라로서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는 미국에서 우리 정부에 대한 승인을 얻고 군수품에 대한 지원을 받아 우리 군대가 적을 무찌를 수 있는 장비를 갖추고 그만큼 성장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기 워싱턴(Washington D. C)에 와 있습니다. 일본과 맞서 싸우기 위해 여러분이 처음으로 선택한 지도자로서 내가 얼마나 깊이 감동받았는지 말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이 내 목소리를 듣는 게 이번이 처음이라고 알고 있습니다. 나는 다시 이러한 특권을 수락하며 여러분에게 전하는 현명한 충고의 말들과 그녀가 말한 것처럼 자유를 위해 그리고 밤의 암흑을 걷어 낼 진정한 격려의 말들을 간직하고 싶습니다.여러분 해방의 새벽이 가까이에 있습니다. 나의 사랑스런 동포여 좋은 밤 되시길…….

    844 한길수가 교민들에게 보내는 성명서

    작성일: 1942-05-19작성처: 한길수알립니다.조선 동포여:4월 30일과 5월 7일자 뉴 코리아 지는 각각 미국 내 모든 조선인에 대한 인구조사를 실시한다는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의 최근 결정과 관련한 ‘특별 성명’을 발표했습니다. 이 성명은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웨스트 제퍼슨 거리 1368에 사는 P. Y. Kim(김병연)에 의해 서명되었습니다. ‘특별 성명’은 조선인 인구조사의 실시가 미국 정부의 바람이라고 선언했습니다. 또한 이승만(李承晩) 박사가 이끄는 주미외교위원부는 1942년 3월 29일 가능한 한 빨리 인구조사를 실시할 것을 요청하는 전보를 보냈다고 발표했습니다. 게다가 이러한 인구조사 실행을 무시하고 거부하는 사람들은 장차 곤란함에 직면하게 된다는 사실을 스스로 깨닫게 될 것이라고 간접적으로 언급했습니다. 사실인가? 아니라면 우리가 옳은 일을 하기 위해 그들을 도울 방도는 무엇인가?미국무성 장관과 인구조사국장은 그걸 바라지도 요청하지도 않았다고 합니다.국무성 행정차관보 해럴드 호스킨스(Harold Hoskins)는 1942년 5월 8일 한길수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미국 내 개인에 대한 인구조사에 관한 문제는 국무성 관할권 밖이며 국무성은 당신 편지에 언급된 인구조사에 관해 아는 바가 없습니다.”인구조사국으로부터의 답장“친애하는 한,나는 당신의 5월 14일자 편지를 통해 미국 내 조선인에 대한 특별 인구조사가 미국 정부의 어느 부서에서 요구했는지, 아닌지에 대해 궁금해 한다는 사실을 알았습니다.나의 답변은 이러하다. 인구조사국은 그런 특별 인구조사를 요청한 적이 없으며 또한 어떤 다른 정부기관에서 했는지도 모르는 그런 요청에 대해 어떠한 것도 아는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충심으로 미국 인구조사국장”한족연합위원회와 이승만(李承晩) 박사는 미국 정부에게 잘못 전하는 것을 삼가도록 하십시오. 한족연합위원회는 과거에도 비슷하게 잘못 설명한 경우가 있었습니다.1942년 1월 21일 이원순 의장은 패디스(Faddis) 국회의원이 한국 임시정부를 승인하기 위해 국회에 결의안을 제출했다고 선언하는 내용의 보고를 ‘태평양 주보’에 발표했습니다. 이것은 국회 군사위원회 임원이자 펜실베이니아 주 의원인 패디스(Faddis)에 의해 부정되었습니다. 1942년 1월 21일자 태평양 주보에 실린 의장 이원순의 보고를 읽어보십시오.이승만 박사와 한족연합회의 유력한 임원들은 한국 동포들에 반대하는 정보를 의도적으로 왜곡하려고 했습니다. 1942년 1월에서 4월까지, 한족연합회의 임원들 즉 S. D. 한(한시대) 씨, W. S. 리(이원산), C. I. 송(송종익), 회장 김 호, 한인위원회 수장 이승만 박사는 수차례 의도적으로, 사령관 김약산이 이끄는 조선의용대가 해산되었다고 전했습니다. 동시에 이승만 박사는 조선의용대가 1941년 10월 1일 해산했다는 발표를 했습니다. 이승만 박사와 한족연합회의 다른 임원들이 유포시킨 그런 보고들은 중국에서 조선의용대의 평판이 나빠지기를 기대하면서 한국 대중을 혼란시키려는, 엄청난 오해를 야기시키는 시도입니다. 조선의용대는 1938년 10월 한구(Hankow)에서 조직되었습니다. 이승만 박사와 한족연합회의 이런 잘못된 정보를 받고 있는 임원들이 사리를 도모하고 정권 장악을 꾀하고 있었던 지난 몇 년 동안, 그들은 우리의 적 일본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1942년 5월 11일 중국 중경(Chungking)에서 온 보고 - 조선의용대가 신무기를 제공받았다. 1942년 5월 11일에 받은 사령관 김약산의 보고에 따르면, 조선의용대가 중국군사위원회의 지도를 받고 있고, 최근에 조선의용대가 신무기로 무장했음이 드러났습니다. 이 보고는 워싱턴 D. C.의 중국 관리에 의해 확인되었습니다.첨부한 한국어 회장(回章)을 읽어주십시오. 의심스러운 중국어를 쓰면서 한국 동포들을 해치려는 이승만 박사와 한족연합회의 시도를 폭로하면서. 길수 K. 한 워싱턴 대표 101 D Street, N. E. Washington, D. C. 중한민중동맹

    845 한길수가 미국무성에 보낸 편지

    발신일: 1942-07-03발신자: 중한민중동맹(Sino-Korean Peoples League)발신주소: N. E., D 가 101번지 워싱턴(Washington) D. C.발신자: 코델 헐(Cordell Hull) 각하수신자: 코델 헐(Cordell Hull) 각하수신주소: 국무장관 국무성 워싱턴(Washington) D. C.각하, 호눌룰루 스타(Honolulu Star) 지는 지난주, 제임스 H. 크롬웰(James H. Cromwell) 경께서 1942년 5월 5일 국무성에 보내신 서한을 속보로 게재했습니다. 매우 유감스럽고 놀랍게도, 워싱턴(Washington)의 한국인을 대표한다는 리승만(Syngman Rhee) 박사와 대한민국 임시정부(Korean Provisional Government)가 한국의 공식 정부로서 “국무성의 인정을 받을 때까지” 일본에 항쟁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는 기사였습니다. 직접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제임스 H. 크롬웰(James H. Cromwell) 경의 서한에 의하면, 리승만(Syngman Rhee) 박사가 의장이자 워싱턴(Washington) 대표자로 있는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미국이 자신들을 인정한다면, 국내에서의 방화를 통한 대일 혁명의 청사진을 시행하겠다고 밝혔다.”더 나아가 이 기사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이 담겨 있었습니다. “젊은 한국인들은 구속에서 벗어나려 몸부림치고 있으나, 리승만(Syngman Rhee) 박사는 미국 국무성이 자신들을 사실상의 한국 정부로 인정할 때까지 이들의 해방에 관여하지 않을 것이다.”한국인들은 이와 같은 유아적인 발언에 반대합니다. 애국적이고 사려 깊은 한국인들은 모두 민주주의와 자유를 사랑하는 전 세계인들이 직면하고 있는 이 위급한 순간에 나온 리승만(Syngman Rhee) 박사의 유아적이고 모호한 발언에 강하게 반대한다고 확신합니다. 우리가 현재 알고 있는 대로, 극동 아시아와 하와이(Hawaii), 그리고 미국에서 진행되고 있는 대일 항쟁에 대해 조금이라도 사실을 알고 있고, 이를 책임질 위치에 있는 미국인이나 한국인이라면 누구라도 이런 어리석고 모호한 발언을 할 수는 없습니다. 이러한 발언들은 사실도 아니고 부정확할 뿐만 아니라, 미국과 한국의 이해와도 분명 배치되는 것입니다. 또, 이는 극동 아시아와 미국의 애국적인 한국인들의 마음과 의향을 대표하지도 않습니다.이 발언들을 고려하지 말아 주시길 부탁드립니다. 저희는 국무성 측에서 리승만(Syngman Rhee) 박사의 발언을 수용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를 사실상 고려하지 않고 잊어주시고, 흔히 미국인이 하는 말로 책임감 없는 사람에 의한 “박수갈채를 의식한 호언장담의 위협”으로 받아들여 주시리라 믿고 희망합니다. 한국인들은 일본인들이 한반도에서 물러나지 않는 한 항쟁을 멈추지 않을 것입니다. 십여 년 이상 미국을 우방으로 생각해 왔던 한국인 다수는 1941년 12월 7일 이후 귀국에 대해 많이 실망하고, 초조해 해왔다는 것을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대일 항쟁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인들에 대하여 미국 국무성 측에서 당시 어떠한 명확한 도움도 주지 않은 것에 대하여 한국의 지도자들은 매우 혼란스럽게 느끼고 실망하고 있습니다. 지난 1941년 2월 7일, 국방성 자문위원회 측에서 저희의 요청에 대하여 “신중한 검토”를 약속했음에도 불구하고, 국무성 측에서 한국 독립운동가들에 대한 지원을 거부하셨지만, 저희는 미국에 대한 믿음을 가지고 있으며, 일본에 대해서는 저희가 간주하는 바와 같이 국무성 측에서도 간주하시리라 생각합니다.한국과 한국인이 극동아시아의 필수 불가결한 전략적 요소라는 지울 수 없는 사실에 대해 언젠가는 미국이 알게 되리라 생각합니다. 미국이 일본의 한국 강점을 인정하든 인정하지 않든, 그 결론은, 매우 오랜 뒤에 달성하게 될 결론은 궁극적으로 명확합니다. 이러한 믿음이 있기 때문에 또, 일본이 1592년 이래로 저희의 오랜 적이었기 때문에 한국 독립 지사들은 일본 군국주의가 한반도에서 축출되는 날까지 대일 항쟁을 계속할 것입니다. 1942년 6월 23일, 런던(London), 연합통신(United Press) 보도, “일본의 지배에 대한 한국인들의 저항”“런던(London), 연합통신(United Press), 1942년 6월 23일. 일본 군사령부에 대한 공습으로 시작된 대규모의 전투 끝에 천 명의 일본인과 이천 명의 한국인들이 사망했다고 영국 라디오 방송(British Radio)이 오늘 밤 보도했다.”“한국의 독립 운동가들이 22대의 일본 전투기를 파괴하고, 정유 및 기타 자원 시설을 방화한 것으로 보이며, 일본군 탱크와 92대의 보트도 파괴되고 훼손된 것으로 보고되었다.”“인도 라디오 방송(All India Radio)은 한국과 대만(Formosa) 뿐만 아니라 만주(Manchukuo) 지역에서도 조직적인 폭동과 저항이 있었다고 보도했다.”이 보도는 어떤 것도 한국 독립지사들의 대일 항쟁을 중단시킬 수 없다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증명하고 있습니다. “국무성이 한국 정부를 인정할 때까지” 한국인들이 일본에 저항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하는 한국인은 어리석은 유화주의자이거나 위험한 기회주의자입니다. 크롬웰(Cromwell) 경이 1942년 5월 5일 국무성에 보낸 서한에서 밝힌 리(Rhee) 박사의 주장과 같은 조건부 대일 항쟁을 한국의 독립지사들에게 설득할 수 있는 지도자는 단 한 명도 없습니다.한국은 스스로의 해방과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고 있습니다. 미국이나 여타의 열강들이 한국의 독립을 “은쟁반”에 담아 줄 것이라고 믿는 애국지사들은 없습니다. 저희는 권리와 정의는 승리할 것이라고 진실하게 충심으로 믿고 있습니다. 신은 악마보다 강합니다. 진실은 악마를 이길 것입니다. 한국의 독립은 국무성의 승인에 의지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며, 스스로의 권리에 의해 현실화 될 것입니다. 인권이라는 신의 이름으로 저희는 승리를 향해 싸움을 계속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한길수(KILSOO K. HAAN)워싱턴(Washington) 대표조선민족전선연맹(KOREAN NATIONAL FRONT FEDERATION) 중한민중동맹(SINO-KOREAN PEOPLES LEAGUE)

    846 한길수가 전경무에게 보낸 편지

    한국인들에게 고하는 말발신일: 1942-06-16발신자: 전경무(J. Kyuang Dunn)수신자: 전경무(J. Kyuang Dunn)수신자: 재미(在美)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공보관수신주소: 코리안 내셔널 헤럴드 퍼시픽 위클리(Korean National Herald Pacific Weekly) 편집자 하와이(Hawaii) 주 오아후(Oahu) 호놀룰루전경무(J. Kyuang Dunn) 공보관께,하와이(Hawaii)의 손꼽히는 미국 신문인 호놀룰루 스타 뷸리틴(Honolulu Star Bulletin) 5월 27일자에 편집자에게 보내는 귀하의 공식 서신이 게재되었으며, 사설 면에서도 눈에 띄는 자리에 실렸습니다. 귀하의 공식 서한의 헤드라인은 다음과 같았습니다.“한국인들, 일본인들에 대해 공정한 태도를 밝히다.”귀하의 글에 표현된 견해와 내용은 하와이(Hawaii)와 미국, 극동에 거주하는 모든 분별력 있는 한국인들에게 있어 참으로 의미심장하고도 놀라운 것입니다.일본인들을 옹호하는 한국인 관념론자들에 대해서 읽거나 들어본 적은 있었지만, 재미(在美)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의 공직자가 직접 계몽적인 공식 성명으로 유화 정책을 펴는 것은 읽어본 일이 없었습니다. 귀하의 성명은 1941년 1월 18일 코리안 퍼시픽 위클리(Korean Pacific Weekly), 리승만(Syngman Rhee) 박사의 공식 기관)의 사설보다 훨씬 중대한 의미를 지니는 것입니다.일본인들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습격한 이래로 저는 모든 한국인 지도자들이 나서서 일본에 대항할 정도로 강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제가 오해했음을, 네, 아주 크게 오해했음을 깨닫고 있습니다.루즈벨트 대통령의 명령으로 미 육군은 모든 일본 귀화인들과 일본계 미국인들을 태평양 연안 주의 모든 전략적 지역에서 이동시켰습니다. 상당히 노골적인 표현으로 공개적인 의심이 표명되었습니다. 십만 이상의 일본인들이 수용소로 격리되었고, 수천 명의 외국인들과 시민들이 수용되어 있습니다.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에서 워싱턴 정부와 미군의 현실적인 정책에 의문을 제기할 수 있는 것입니까?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는 성명서는 물론 성명 발표를 통해 공개적으로 하와이(Hawaii)의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정책이 공정하고 정당한 방법이라고 언급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위원회에서는 ‘미국 범죄법과 재판의 기준은 유죄가 판결될 때까지 무죄라고 규정’하고 있기 때문에 일본인들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고 믿고 있습니다.따라서 공정하고 정의로운 것을 원하고 품위를 지키는 위원회에서는 미국 법정이 그들의 유죄를 증명할 때까지 그 일본인들을 의심하거나 그들에게 반대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겠지요. 분별 있는 한국인들은 위원회가 ‘하와이(Hawaii)의 마샬법’을 들어는 보았는지, 태평양에서 미국이 현재 직면해 있는 국가적인 위급 상황을 알고는 있는 건지 궁금해하고 있습니다.위원회의 공보관이신 전경무(J. Kyuang Dunn) 씨는 한국인들이 ‘미국과 일본 사이의 전쟁을 일본 정부에 대항하는 것처럼 일본의 국민들에게도 대항하는 것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선언하고 있습니다.하와이(Hawaii)의 한국인들이 일본인들을 다루는 데 있어 미국인들에게 하는 것처럼 우호적인 태도를 취해야 한다고까지 선언했습니다.전경무(J. Kyuang Dunn) 씨의 그리스도 같은 성명에서는 전문적인 언어와 미묘한 조언을 한껏 집어넣어 한껏 치장을 하고 있고, 하와이(Hawaii)의 일본인들을 보호할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12월 7일 이전에 리승만(Syngman Rhee) 박사와 몇몇 다른 한국인 지도자들이 유화 정책을 폈던 것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1941년 12월 7일 이후로 호놀룰루 스타 뷸리틴(Honolulu Star Bulletin)의 편집자에게 이러한 공식 편지를 보내려면 심사숙고해야만 하며, 그 동기를 의심받을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매우 중요한 미 육군의 공식 성명하와이(Hawaii)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는 진정 본심을 보이고 있는 것입니까, 아니면 일본인들을 두려워한 나머지 전경무(J. Kyuang Dunn) 씨가 정치적 편의를 위해 이런 성명을 내도록 강요받은 것입니까?한 미국 육군 장교가 제게 보낸 글입니다.‘어떻게 하면 귀하가 한국인들의 후원을 받을 수 있을 지에 대해 아무런 제안도 할 수 없어서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제가 상황을 판단하건대, 한국인들이 귀하나 귀하의 일에 반대하는 것은 아니지만, 소규모 집단으로서 자신들이 현재 직면하고 있는 경제적 보복을 매우 두려워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따라서 우리 모두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이러한 두려움이 이 곳의 미국인들 사이에도 존재하고 있는 상황인 만큼, 한국인 단체가 집단적인 목적을 위해 희생할 것을 기대하기는 어렵다고 생각됩니다.’이 미국 육군 장교의 설명으로 보면 전경무(J. Kyuang Dunn) 씨의 행동을 그냥 무시해 버릴 수도 있겠지만, 1941년 12월 7일 이래로 위원회에서 내놓은 모든 공식적인 발언을 읽고 들어보면,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지도자들이 하와이(Hawaii)의 일본인들에 대해 그런 비현실적인 태도를 취한다면 심상치 않은 상황인 것입니다.하와이(Hawaii)와 미국의 일본인 지도자들은 우리가 그들을 공정하고 정의로운 정신으로 대우해 줄 것을 반복적으로 요청해 왔습니다. 그들은 일본 계통의 미국 시민들을 미국과 하와이(Hawaii)의 선의에 반하는 미끼로 사용해 왔습니다. 일본인 지도자들이 그러한 청원과 요청을 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지만, 진주만 공격 이후에 하와이(Hawaii)에 일어난 일을 생각해 볼 때, 재미(在美)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가 그런 요청을 하는 것은 실로 놀랄 수밖에 없습니다. 하와이(Hawaii)에 있는 일본인들에게 관용과 공정한 태도를 보이자고 하는 것은 바로, 하와이(Hawaii)와 미국에 있는 일본인 관리들이 일본반대자로 낙인찍은 동료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고 부당하게 공격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입니다.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는 굴복하지 않으려는 한국인들을 계속해서 공격하고 있다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관리들은 워싱턴의 리승만(Syngman Rhee) 박사와 합류하였고, 한국 동포들이 자신들의 정책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들을 ‘빨갱이’ 및 공산주의자로 낙인찍었습니다. 끊임없는 거짓말이 돌았습니다. 일본 일간 신문이 반일 한국인들에 반대하는 사설을 실을 때마다, 이들 관리들은 일본인들이 내친 한국인들을 간접적으로 공격했습니다.다음의 일본 사설을 보면 특정한 유사성을 분명하게 알 수 있을 것입니다.1940년 5월 31일 니푸지지(Nippu Jiji), 도메이 뉴스 에이전트(Domei News Agent), 호놀룰루 재패니스 데일리(Honolulu Japanese Daily):‘한길수(Haan)는 자신의 잘못으로 한국인들을 비롯해 모든 사람들에게 자신이 끼치고 있는 피해를 깨닫지 못하고 있다.’ (워싱턴 D. C.에서 하원의 출입국 위원회에 출석해 하와이(Hawaii)에 있는 일본계 미국인들의 반미 활동을 폭로한 한길수(Haan)의 증언에 대해)1941년 10월 30일‘한길수(Haan), 하와이(Hawaii) 대표로서 발언권에 이의 제기’1939년 9월 2일‘한길수(Haan)를 알고 있는 사람들은 그가 어떤 사람인지를 알아야 한다. 1937년 10월 호놀룰루에서 하와이(Hawaii)가 주로 승격되는 문제에 대해 여론을 듣는 중에 한길수(Haan)는 호놀룰루에서 총영사 관저에서 열렸던 여러 번의 회의에서 백인에 반대하는 내용의 증언을 했다.’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1939년 9월 15일, 산교 니포(Sangyo Nippo)‘지난 회기의 마지막 시기에 젊은 한국인 한길수(Haan)는 도쿄의 군사력에 대항하는 국회의 행동을 촉구하는 반일 로비로 바쁜 시간을 보냈다.’ ‘한길수(Haan)를 비롯한 사람들이 국제적 상황에 대해 말한 것은 미국의 일본인들에게 관계 있는 것이 아니지만, 일본계 미국 시민들의 충성심과 성실성을 반영하는 모든 행동이나 발언은 재미(在美) 일본동포 2세들이 매우 주의해야만 하는 것이다.’1942년 6월 16일캘리포니아 주 로스앤젤레스, 1941년 2월 9일, 라푸 신포(Rafu Shinpo)‘한국인들은 선전자 한길수(Haan)를 좋아하지 않는다.’‘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에 있는 한국인들이 한길수(Haan)를 신용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통해 신뢰할 수 없는 깜짝 놀랄 만한 증언이 더 이상 외국인 선동 방법에 이용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다. 이 곳과 하와이(Hawaii) 양쪽에서 한국인들이 발행하는 신문에서는 이 선동자를 공개적으로 통렬히 비난해왔다. 한길수(Haan)는 한국인들 사이에서도 거부를 당했다.’전경무(J. Kyuang Dunn) 씨, 귀하께서는 반일 한국인들에 대해 부당한 사설을 싣고 있는 하와이(Hawaii)와 미국의 한국 신문에 대해 잘 알고 계시리라 믿습니다. 귀하께서는 또 귀하 자신의 사설이 한국 동포들을 배신하는 것이라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 6월 5일 제게 보낸 귀하의 서신에서는 다음과 같은 경고를 하셨지요. ‘당신 자신이 제5열(전시에 후방 교란 등의 행위로 적군의 진격을 돕는 자-역주)에 설 수도 있습니다.’라고. 귀하께서는 심지어 ‘그렇지 않다면 확신을 가지고 말하고 있는지 궁금하군요.’라고까지 하셨습니다.모순된 발언이 스스로 드러나고 있습니다.1942년 6월 5일 제가 보낸 그 서신에서 귀하는 놀랍게도 당신 자신의 주장에 모순되게도 다음과 같이 쓰셨습니다.‘“한국인”이라는 단어를 공표한 것은 당신의 공로였습니다. 우리는 우리 민족을 강조할 필요가 있었습니다. 더욱이 귀하는 자신이 대변하는 한국인들의 후원을 거의 받지 않고, 재미(在美)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에서 봉급을 받은 1941년 6월부터 12월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돈을 모아 어려움을 감수하고 그 일을 해냈습니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당신을 인정하지 않은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입니다.’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가 하와이(Hawaii)의 일본인들에게 관용을 베풀고 정당한 대우를 할 것을 얼마나 요청했으며, 그러면서 반일 한국인들의 활동을 계속해서 공격했는가 하는 점은 참으로 묘한 일입니다. 분별 있는 한국인이라면 귀하의 의도와 동기를 잘 이해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의 관리들이 반일 활동을 계속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의도적으로 차별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 귀하는 자신의 편지에서 제게 개인적으로 이 반일 운동의 가치를 인정하고 심지어 미국에 있는 한국 동포들이 그 일을 인정하지 않은 것이 유감이라고까지 표현하고 있습니다.귀하와 귀하가 속한 그 위원회 관리들이 하와이(Hawaii)의 일본인들에게 그렇게 자비롭다면, 그런 자비심과 관용을 일본에 반대하는 한국 동포들에게도 좀 보여줄 수는 없었습니까? 귀하와 귀하의 위원회는 일본인들이 두려워서 반일 한국인들을 무자비하고 부당하게 공격하고 있는 것입니까? 하와이(Hawaii)의 일본인들을 위해 관용을 요청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입니까?‘예방이 치료보다 낫다’는 것이 우리 정책이 되어야 합니다.일본인들에 대한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의 공식적인 천명, ‘유죄가 입증될 때까지는 무죄다’라는 것은 너무도 당치 않으며, 한국인들과 미국에게도 더 많은 피해를 입힐 것입니다. 1941년 12월 7일 이전 일부 미국 관리들도 현재 귀하가 주장하고 있는 바를 믿었습니다. 하와이(Hawaii)에 수백 명의 일본인 스파이가 존재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당신이 지금 생각하는 것과 똑같이 생각했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인들을 체포하는데 반대했습니다.바로 그러한 미국의 관용과 맹목적인 인내의 결과가 1941년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을 불러온 것입니다.당신과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가 현재 하와이(Hawaii)의 일본인들에 대해 제안하는 것은 1941년 12월 7일의 믿을 수 없는 공격을 재현하게 될 것입니다.저는 진정한 한국인 정신을 위해 이제는 ‘전략적으로 고려된’ 일본의 영향에서 깨어나, 인내와 정의와 공정한 대우를 요청하는 것은 그만두시기를 요청하는 바입니다. 귀하께서 그렇게 결정하신다면, 한국인 동포들에게 몇 송이 장미를 보내주십시오.재배(再拜)한길수(Haan)

    847 조선민족혁명당 성명서

    작성일: 1942-01-14작성처: 내셔널 헤럴드[National Herald] 지. (영문판)1942년 1월 14˜15일, 중경, 내셔널 헤럴드[National Herald] 지. (영문판)조선민족혁명당의 제6차 총회 성명서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1. 국제 정세“일제의 압제 아래 한민족이 참고 견디어 온 수난과 고통은 다른 어느 국가가 당한 것보다도 훨씬 크며, 한민족의 파시즘에 대한 반감 역시 그만큼 더 깊다. 한민족은 유일한 희망인 자유와 독립의 쟁취는 파시스트와 맞서 싸우는 다른 모든 국가와의 보다 밀접한 협력에 달려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국내외에 있는 모든 한민족들은 공동 투쟁에 참여해야만 하는데, 왜냐하면 일본이 태평양 연안의 모든 국가들과 적국으로 맞서고 있는 바로 지금이 한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되찾으려는 시도를 위해서는 최상의 기회이기 때문이다.”2. 한국 국내 정세일본은 봉천[奉天 Mukden]사변 발발 이전의 슬로건이었던 “자치 정부”와 조선인의 정치 참여, 조선인의 문화 운동 정책을 포기하고, “내선일체”, “내선융화”, “황국 신민”으로 대체했다. 조선은 “일본 제도의 영토 확장”으로 불리고 있으며 “조선”이란 이름은 “반도”로 대신하고 있다.조선어 사용 금지.창씨개명.모든 조선인 단체의 해산.조선 학교의 일본 학교와의 합병을 통한 재편성.조선의 4000년 문화를 “제국문화의 반도형태”로 대체.한글 신문 및 잡지의 발행금지.기독교와 불교의 일제 지배 및 일본 신도 숭배의 강요.전국에 있는 26개 감옥의 “보호관찰”감옥으로의 확대.조선은 다음과 같이 지정되었다.1. 인력과 자원의 강제 수탈 목적의 군사 숙영 기지.2. 2천만 피컬(picul)에서 6천만 피컬로의 10개년 산미증식계획을 실시하는 곡식 공급 기지.3. 조선인, 중국인, 만주인을 일본인과 융화시키는 문화 기지.145,000명 노동자들의 중국, 만주, 일본으로의 강제징용.자본가들의 재산 몰수 및 지주들의 소작농화(化).조선 전 농토 중 29%의 일본인 소유.조선 노동자의 임금은 조선에 있는 일본 노동자의 절반에도 못 미침.일본의 전쟁에 조선인 강제 징병을 위한 “국민총력조선연맹[Korean League of Citizens Total Strength]”조직.3. 조선독립운동의 전개40년 전. 자본주의적 관점에서 조선왕조가 퇴보하고 있을 때, 일본은 근대화를 이루고 있었으며, 영국과 미국으로부터 지원을 받았다.1919년 3월 3일, 삼일운동 이후, 일본은 오로지 무력만으로는 조선을 정복할 수 없음을 깨달았다.봉천[奉天 Mukden]사변 이후. 1931년 “한-일 우호협약”과 “내선일체”를 가장.“아시아 대륙에서 일본의 궁극적 몰락이 조선에서 시작되고 있는 것이다.”4. 조선독립운동의 성격과 원칙“조국을 희생시켜 재산을 모으는 몇몇 매국노와 일본의 앞잡이들, 그리고 일본을 위해 영사관 관리로 일하는 소수의 자본주의자들을 제외한 조선인들은 자본주의 활동으로부터 배제되었다.”전 인구의 80%인 농민들은 가난에 시달리고 있다.“독립운동은 일본 제국주의라는 외력의 통치를 타도하고 이제껏 일제에 의해 존속되었던 낡은 봉건 왕조의 마지막 잔재까지도 추방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며, 그 대신 자주적, 민주적인 정부체제가 구축될 것이다.”“우리는 조선민족혁명당의 목표와 활동의 윤곽을 다음과 같이 설정하였다.“1. 일본 제국주의 통치를 타도하고 조선에 자주 독립적, 민주적인 공화 정체를 설립한다.“2. 헌법을 입안하고 총선거를 준비할 인민의회를 소집한다.“3. 낡은 봉건체제의 잔재와 일본의 앞잡이들을 소탕한다.“4. 모든 일본 제국주의자와 매국노의 재산을 몰수하고, 일본에 협조했던 모든 사람들로부터 그들의 재산과 권리, 특권을 박탈한다.“5. 파시즘에 대항해온 국민들의 기업체를 위한 특별보호를 실시한다.“6. 토지개혁을 시행하여 소작농들 사이에 토지를 재분배한다.“7. 노동 시간을 단축하고 노동자들을 위한 다양한 사회 보장 방책들을 실시한다.“8. 정치적, 경제적, 사회적으로 남녀 평등을 구축한다.“9. 언론, 출판, 집회, 종교의 자유를 구축한다.“10. 국가의 비용으로 경영하는 의무 교육, 직업 훈련, 사회 보험 제도를 구축한다.“11. 인류 평화와 행복을 위해 세계의 다른 모든 국가들과 평등 및 상호원조를 기초로 하는 협력을 구한다.5. 조선민족혁명당의 해외 과업 및 정책“1935년 우리 당은 고국으로부터 멀리 떨어진 곳에서 조직되었지만, 그 주요 구성원은 한국혁명당[the Korean Revolution], 조선의열단[the Korean Volunteer Corps], 한국독립당[the Korean Independence Party], 신한국독립당[the New Korean Independence Party], 대조선독립당[the Great Korean Independence Party], 북동지역과 중국 본토, 미국에서 쌓은 다년간의 경험을 가진 무수한 혁명당원들 가운데 가장 뛰어난 인재들로부터 끌어왔다. 현재의 당은 조선의 독립운동 역사상 최초의 단결된 조직이다.”과거 조선민족혁명당의 실패와 과오는 대단히 많았고, 당의 사업도 대부분 일반 대중이나 실제적인 투쟁의 문제와는 분리되어있는 해외 인사들에게 위임되었다.새 조선민족혁명당은 “조선민족전선연맹[Korean National Front Federation]”을 조직했다.“조선민족혁명당은 항상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문제에 대해 무관심해 왔다. 그 첫 번째 이유는 우리의 영토를 되찾기 전까지는 그러한 정부가 아무런 실제적 권력도 수행하지 못할 것이라는 데 있었다. 두 번째 이유는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다른 국가들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지도, 또한 지지를 받지도 못해 왔다는 사실이었다. 세 번째 이유는 현재의 임시정부가 다양한 독립운동단체들의 대표도 아니고 조선 국민들에 의해 합법적으로 선출된 정부도 아니라는 데 있었다. 조선혁명당은 단순히 유지해 나가는 이름뿐인 임시정부를 불필요하게도 항상 주시해왔었다.“그러나 최근 정세의 변화는 조선민족혁명당으로 하여금 이러한 태도를 버리게 했고, 1941년 5월 대한민국 임시정부와 합류하여 지원하기로 결정되었다. 왜냐하면 세계 민주주의 국가들이 현재 반파시즘 블록을 형성하여 파시스트 세력에 대항하여 출정했고, 유럽에서는 민주주의 국가들로부터 정식 승인을 받고 지원 받는 폴란드, 네덜란드, 프랑스와 같은 나라들의 망명정부 설립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와 유사한 대한민국 임시정부 또한 이제 임시정부의 정식 승인 및 지원을 기대해볼 수 있을 것이다. 현재 중국 정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대한 적극적인 지원을 준비중이며, 이는 틀림없이 조선독립운동에 커다란 가치가 있을 것이다.“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로 결정하면서 조선민족혁명당은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좀더 한민족을 대표할 수 있도록 하는 방책들을 주장했다. 모든 독립운동기구와 단체들의 대표 의회가 소집될 것이고,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이 단체들의 최고통솔권을 부여받을 것이다. 또한 조선민족혁명당은 중국, 소련, 미국에 있는 조선의 모든 해외 동포들에게 독립운동을 진전시키는 데 그들의 노력을 기울일 것과 동시에, 중국, 소련, 미국이 벌인 저항 전쟁에의 참여를 주장한다. 재일 한국인들 또한 그곳에서 전쟁 반대 운동에 협력하고 지원해야 한다. 이러한 노력은 해외의 모든 조선 동포들의 결속을 이루게 하여 고국의 혁명당원들과 해외 동포들의 노력의 공동작용을 가져올 것이다. 우리는 반드시 중국과 영국, 미국, 소련, 그리고 파시즘에 대항하는 다른 세력들과 함께 싸워야하는 동시에 일해야만 한다. “싸우자, 당의 동지들과 동포들이여, 우리나라의 신성한 국토의 회복을 위하여, 우리 3천만 동포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참을 수 없는 일본 압제자들의 타도와 자주적, 독립적인 새로운 한국의 창립을 위하여 싸우자! 승리를 위하여!”1941년 12월.

    848 한길수가 국무장관 헐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2-05-05발신자: 헐수신자: 헐각하,극동에서의 4개의 조선 당파가 연합하여 설립된 조선민족전선연맹을 대표하는 중한민중동맹은 최근 중국 중경(重京)에서 개최된 조선민족혁명의회 여섯 번째 총회에서 개괄된 목적과 활동상에 대해 각하께 제출하는 바이다. 도움을 줄 수 있는 어떤 효과적인 정책을 결정함에 있어, 그리고 우리의 공동의 적, 일본과 맞서 싸우는 데 있어 조선민족전선연맹에 도움을 주는 결정을 내리는데 각하께 어느 정도 가치가 있을 것이라는 믿음과 바람을 가지며 아래의 11조항을 제시한다.11조항:1. 일제의 통치를 뒤엎고 조선 땅에 자유, 독립, 민주 공화국을 설립함.2. 총선거를 실시하기 위해 조직을 구성하고 조정한 인민의회를 소집함.3. 장차 조선의 복지에 해로운 낡은 봉건제도의 잔재를 청산함.4. 일제의 모든 재산을 압수함.5. 추축국 세력을 반대해 온 국민들의 후생이나 기업 업무를 위해 특별 보호를 제공함.6. 농지정책을 마련하여 소작인과 자작농 사이에 토지를 분배함.7. 노동시간을 단축하고 노동자를 위해 다양한 사회보장제도를 실시함.8. 정치?경제?사회적인 남녀 평등을 확립함.9. 언론, 출판, 집회, 결사의 자유를 보장함.10. 국가 비용으로 의무교육, 직업훈련, 사회보험을 시행함.11. 인류의 평화와 행복을 추구하고, 국가 방어 체제 속에서 평등, 상호 원조를 기초로 모든 나라들과 협력을 추구함.이상의 11조항은 4개의 조선인 당대표들에 의해 만장일치로 승인되었다. 이 대표자들은 시베리아, 북중국, 만주, 조선과 일본의 대다수 조선인을 대표한다.우리는 미국에게 극동에서의 평화 실현을 강력히 요구한다.일본 공사 쿠루수가 진주만에서 미국 관리들에게 자장가를 부른 지 다섯 달이 넘었다. 그리고 지난 1941년 3월 일본에 있는 우리 사람의 보고에 따르면 ‘미일 전쟁 계획’은 실행되었다.:“어떤 식으로든 여느때처럼 외교적인 담화가 있어야 한다. 적어도 군사행동이 개시될 때까지는…… 처음 4개월 동안 일본 함대는 태평양 전역을 자유롭게 휘젓고 다닐 것이다. 그리고 태평양 내에 그들을 방해할 어떠한 대항군도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이는 일본이 승리할 계획이라는 책, 202˜208면에서 인용.만일 미국이 일본을 곧바로 막지 못한다면 그들은 바로 알루션, 알래스카, 하와이 그리고 태평양 연안주 모두를 공격할 전략적 위치에 놓이게 될 것이다. 일본의 전쟁 계획에 기초할 때 미일전쟁의 처음 기간이 끝나고 두 번째 기간이 곧 도래할 것이다.만일 국무성이 지난해 동안 우리 요원들이 제출한 보고서를 검토한다면 각하는 시간과 결과를 통해 그들의 보고서가 미국 방어에 얼마나 중요한 것이었는가를 입증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게다가 이들 조선인들이 지난 시간보다 현재 더 미국에게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일본과 조선에서의 그들의 전략적 위치를 무시해서는 안 된다.비록 미국 관료들이 지난해 동안의 그들의 경고 보고를 무시했다고 하더라도 나는 각하에게 이 메시지를 전해 달라고 요청했다. 이들 애국적인 조선인들의 메시지는 다음과 같이 선언했다.: “우리의 충성과 명예를 걸고 이 전쟁에서 승리해야 한다는 미국과 조선의 대의를 위해 아낌없이 봉사할 것이다. 우리는 극동에서 그리고 태평양 해안 전역에서 우리의 공동의 적 일본을 몰아내기 위해 당신의 존경하는 정부와 최대한 협력할 것을 맹세한다.미국의 외교 기록들은 초창기 미국과 한국의 외교적인 우호 관계 속에서 미국이 극동에서의 현실적인 정책을 시행했다는 사실을 보여줄 것이다. 1882년 5월 22일 조미조약에 서명한 즉시 존 러셀 영(John Russell Young) 중국 공사는 다음과 같은 현명하고 현실적인 단어들을 사용해 국무성에 편지를 썼다.: “나는 미국이 조선에서 확고한 지위를 가져야 하며, 일단 그 문을 열었다면 우리는 그것을 닫아서도 안 되고 또는 어떤 다른 권력에게 윗자리를 내주어서도 안 된다고 생각한다.”조약 안에는 종종 외교적인 문서상 해석하는 것에 따라 매우 중요하거나 거의 중요하지 않은 다음과 같은 무해하지만 치명적인 단어들이 있다.: “만일 다른 나라가 한편 정부에 대하여 부당하게 혹은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에는 다른 한편 정부는 그 사건의 통지를 받는 대로 원만한 타결을 가져오도록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하여야 한다.”미국이 조선에 대한 도덕적인 면 아니면 법적인 의무를 무시하기로 결정했다면 그것은 아마도 운명이었을 것이다. 최근에 국무성이 조선인들의 계속되는 경고 보고를 무시하고 심지어는 지난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에 대한 일본의 공격이 있기 직전까지도 이를 무시했다는 것은 또 다른 운명일 것이다. 시간과 결과들이 평화를 사랑하는 미국 시민들에게 목적의 실제적인 통일과 빠른 행동 통일만이 추축국을 물리칠 수 있다는 사실을 깨우치게 했다. 그렇게 함에 있어 극동에 있는 조선처럼 아무리 작은 나라라고 하더라도 무시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1904년에 일본은 선전포고를 했고 조선은 ‘일본의 심장부에 겨누어진 총’이었다. 오늘날 영국과 미국이 조선과 조선의 전략적 위치를 무시했기 때문에 이와 똑같은 총이 중국과 시베리아에 겨누어지는 것이다. 이전의 상태로 조선을 되돌려 놓아라, 그러면 조선은 다시 ‘일본의 심장부에 겨누어진 총’이 될 것이다. 국제적으로 말해서 조선은 일본의 전체주의 야망의 대표적인 예이자 그것의 마지막 예가 되었다.윌라드 프라이스(Willard Price)는 몇 년 전에 우리 모두가 생각해 볼 만한 다음과 같은 예언적인 말을 했다.:“아시아에서 장차 발생할 미래의 추세를 엿보고 싶은 사람들은 그 생생한 대상 수업으로서 조선을 연구하는 것을 게을리해서는 안 된다.” 지난 수십 년간의 사건들은 영국과 미국이 그들 자신의 안전과 조선과 중국의 안전을 희생하여 맹목적으로 일본을 도와주고 일본을 강화시켜 주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프랑켄슈타인’ 일본이라는 짐승 같은 군대와 맞닥뜨리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 의심할 여지없이 입증하고 있다. 따라서 도덕적으로 정신적으로 그리고 법적으로 만일 영국과 미국이 그들의 실수를 깨닫지 못하고 이번 전쟁에서 일본에 맞서 이기지 못한다면 태평양 지역에 평화는 영원히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유능한 자만이 실수에 대하여 추론하고 계속해서 질문을 던지는 것이다”라고 토머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은 충고했다. 각지에 있는 모든 조선인들은 미국에게 일본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요청한다.모든 훌륭한 조선인의 피 속에는 일본인의 모든 것에 대한 증오가 흐르고 있다. 여기에는 1592년 그날, 350년 전의 그날에 대한 증오도 함께 흐르고 있다. 그 당시 30만 명의 일본 군인들은 히데요시의 지시에 따라 고대 조선 왕국의 해안을 점령하고 우리의 도시와 농경지를 황폐화시키고 보물을 약탈해 갔다. 오늘날 조선 땅 전체가 일본의 속박하에 놓여 있다. 그리고 오늘날 10세대에 걸쳐서 살아온 모든 조선인들처럼 조선 사람은 여전히 3세기 반에 걸친 일본에 대한 굴욕스런 상처를 치유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살고 있다. 조선인들은 분명한 민족이다. 그들은 고대 우호국인 중국인들 같지도 않으며 고대의 적인 일본인들 같지도 않다. 일본의 육?해?공군 기지와 같은 전략적인 요충지에서 수많은 조선인들은 일본인들을 무찌를 수 있는 일이면 무엇이든지 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미국은 조선인들이 중국에 있는 망명정부인 임시정부를 개조하도록 도와줄 수 있다. 1919년 3월 1일 일본에 의해 조선이 병합되고 난 10년 뒤에 조선 땅에서 조선인들은 일본 통치에 반대하는 폭동을 일으켰다. 그 일이 있자마자 중국 상하이에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되었다. 불리한 환경과 사건들이 엄습해 옴에 따라 대한민국 임시정부는 중국 국민당 정부가 이동하는 것을 따라서 언제 어느 곳이든 이동했다. 지난 23년 동안 조선인들은 수많은 고난을 겪고 있다. 영국과 미국에게 되풀이해서 무수한 호소를 했다. 계속해서 영국과 미국은 우리 조선의 우국지사들에게 그들의 외교적인 문을 굳게 닫아 왔다. 이러한 우국지사들의 노력이 계속해서 좌절되었기 때문에 그들은 일본과 싸울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그리고 그곳이 어디든지 찾아가서 도움을 구해야만 했던 것이다. 그 동안 많은 조선인들이 의견 차이로 임시정부와 관계를 끊게 되었다. 어떤 이들은 소련으로 향했고, 어떤 이들은 중국으로 향했다. 이러한 피할 수 없는 정치적?경제적?외교적인 어려움의 결과 두 파의 사조가 일본과의 전쟁을 계속해 나갔다. 그리고 그들 각각은 그들의 방식이 결국에는 민주적인 강대국들의 마음을 사로잡아 일본을 조선 땅에서 몰아낼 수 있도록 그들을 도와줄 것이라고 믿고 있다. 1938년 이래로 중국 국민당 정부는 김약산(金若山)이 사령관으로 있는 중국 내 조선의용군에게 재정적인 지원을 해주고 있다. 유사한 정치적?경제적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싸우는 모든 다른 민족이나 인종과 마찬가지로 조선인들도 유감스러운 경험을 가지고 있으며 그들 내부에서도 분열이 존재하고 있다. 지금 조선이 직면하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역사 속에서도 이러한 현상을 볼 수 있다. 프랑스 혁명 지도자들, 중국의 혁명 지도자들 그리고 소련의 혁명정부도 유사한 내부적인 정치문제와 통치상의 문제들에 직면했다. 이러한 애국지사들의 싸움은 많은 의심을 낳고, 이것은 심지어 내란을 일으키기도 하며 값비싼 대가를 치르기도 한다. 소련과 중국은 모두 자유와 독립을 위해 정치적?사회적?경제적?종교적인 싸움이라는 상처를 지니고 있다. 초창기의 미국 혁명지도자들을 기억하라위대한 나라 미국에서조차도 분열은 있었다. 어떤 사람은 비록 미국 혁명지도자들이 8년간의 혁명전쟁에서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고 하더라도 그들이 유럽인들로부터 그리고 유럽 국가들로부터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도움을 받지 못했다는 점을 의아하게 생각한다. 조지 워싱턴(George Washington)은 아마도 점점 더 많은 시간을 ‘Valley Forges’에서 지내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오늘까지도 우리는 조금만 상상해 보더라도 벤자민 프랭클린(Benjamin Franklin)의 도전적인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 “우리 모두 다 함께 교수형에 처해질 것인가 아니면 따로따로 교수형을 당할 것인가.”몇 몇 미국 관료들은 계속해서 조선인들이 단결하지 못한다고 얘기한다. 그리고 그들은 이것을 조선인들이 일본과 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주는 것을 거절하는 이유로 사용하려 한다. 조선인들은 천사가 아니다. 우리도 미국의 선조들과 마찬가지로 정치적으로 성장하는 데 피할 수 없는 과도기를 겪고 있는 것이다. 미국이 단지 5개월간 일본과 싸운 반면에 조선인들은 1910년 이래로 일본과 싸우고 있다는 사실을 미국인들은 잘 잊어버린다. 일본이 1941년 12월 7일 진주만을 공격하는 비겁한 행위를 한 후에 여러 차례 회의가 개최되었고 호소문을 작성하였다. 우리는 기도하는 마음으로 믿음과 희망, 열망을 가지고 어떤 식으로든 공식적인 답장을 기다리고 있다. 우리는 우리의 호소가 헛되이 되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조선은 지금 미국의 선조들이 그러했던 것처럼 미국의 정신적이고 물질적인 원조가 필요하다. 우리는 빠른 답신을 위해 그리고 국무성에 의한 호의적인 노력을 위해 진심으로 그리고 가장 겸허하게 한 번 더 이 탄원서를 제시한다. 미국 관료들이 무슨 이유나 변명을 들어 미국의 공식적인 승인을 너무도 간절히 기다리는 수백만 조선인들을 이용하는 것을 늦춘다고 하더라도 조선인들은 어디에서든 미국이 일본의 심장부를 공격할 수 있도록 기도하고 재촉할 것이다. 나는 미국 폭격기가 일본의 점령지인 조선의 산업 도시들에 배치될 때 우리 동포들도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다. 그러나 나는 그리고 우리 동포들은 오라고 말한다. 우리는 일제의 노예로 사는 것보다는 차라리 미국의 폭탄에 맞아 죽는 게 낫다. 효과적인 협력을 위하여 그리고 추축국들에 대항하여 국제연합의 빠르고 완전한 승리를 위하여 감사하는 마음으로 한길수

    849 한길수의 라디오 방송 연설

    작성일: 1942-05-25작성처: 한길수위원장님. 지난 주는 한국과 미국이 조약을 체결한 지 60주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중한민중동맹(Sino-Korean Peoples League) 워싱턴 대표 한길수(Killsoo K. Haan)가 발표한 조약에 관한 라디오 연설을 추가 보고서로 기록하는 것에 동의하시길 바랍니다.다음과 같은 연설 내용을 보고서에 기록하는 것에 이의가 없으실 줄로 믿습니다.지난 12월 7일 진주만(Pearl Harbor) 공습 이후 잊혀졌던 한국은 서서히 극동 지역의 수평선으로 떠올라 한국과 그 국민들은 연합국의 주요 관심 대상이 되었습니다.60년 전 오늘, 미국은 조미조약(American-Korean Treaty)을 약식으로 체결하였습니다. 아마도 미국이 그 동안 체결한 그 어떤 조약도 극동 지역에서 발생하는 사건에 커다란 영향을 미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이런 점에서 슈펠트(Shufeldt) 해군 준장의 협약은 한국 해안에서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미 해군들과 서양과 정치적, 경제적 교류의 문을 연 한국에게 이로운 협상이었습니다. 국제적인 측면과 극동 지역에서 발생하는 후속 사건들의 측면에서 보면 1882년의 조약은 한국에서의 중국과 일본의 대립 관계, 그리고 한국에서의 러시아에게 중요한 역할을 하였습니다.1882년의 조약은 한국과 서구 세력간 협상이 이루어진 첫 번째 조약으로서 한국이 후진하는 자국의 전통을 깨는 데 뚜렷한 발자취를 남겼습니다. 한국은 더 이상 은둔의 나라로 남아있지 않고 열린 마음으로 후원자로서의 미국을 받아들였습니다.재고의 가치가 있는 조미조약(American-Korean Treaty)국제적으로 말하자면, 한국은 일본의 전체주의 야망을 보여주는 나라이자 종결하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몇 년 전, 윌로드 프라이스(Willard Price)는 “아시아에서 앞으로 일어날 사건의 추세를 알고 싶은 사람은 한국이 주는 명확한 교훈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됩니다.”라는 글을 남겼습니다.한국 즉, 조선은 플로리다(Florida)와 같은 반도입니다. 만주(Manchuria) 남동쪽 아래로 뻗어 있으며 해협 건너에는 일본이라는 섬이 있습니다. 유타(Utah) 주의 면적과 비슷한 한국에는 23,000,000명의 한국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50만 명의 유타(Utah) 주 인구에 비하면 많은 인구입니다.1882년의 현실적인 미국의 태도새 조약의 승인을 위해 상원에 통보되었을 즈음, 한국의 수도 서울은 무혈 혁명으로 소란스러웠습니다. 조미조약(American-Korean Treaty) 서명 후 2달이 지난 1882년 7월 23일, 일본 영사관이 불에 타고 일본 공사는 공관 직원들과 함께 피신했습니다. 이 반란은 중국 부대와 일본 부대가 동시에 한국에 출현한 후에야 진압되었습니다.1882년 7월 23일은 한국과 조약을 체결한 미국이 조약 내용에 따라 조치를 취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를 준 사건이었습니다. 아서(Arthur) 행정부의 신뢰를 받은 존 러셀 영(John Russell Young)은 그랜트(Grant) 장군과 세계 여행을 하던 중 1882년 여름 재중 미 장관으로서 극동 지역에 도착했습니다. 상하이(Shanghai)에 도착한 그는 일본 영사를 통해 서울의 혁명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것은 매우 심각한 상황이었습니다. 따라서 워싱턴으로부터 지시를 받을 겨를도 없이 조약이 아직 승인되지 않았던 5월에 그는 미국의 법적 책임이 아니더라도 도의적 책임에 대한 자신의 신념대로 조치를 단행했습니다. 1882년 8월 1일, 그는 미국의 관심 대상인 한국을 보호하기 위해 해군 함대를 요청하는 전보를 미국 국무성에 보냈습니다. 곧, 미국 장관의 지시대로 코튼(Cotton) 대장의 지휘 아래 미국 선박 모노캐시(U. S. S. Monocacy) 호가 한국에 배치되었습니다. 존 러셀 영(John Russell Young)은 엄격한 중립적 태도를 유지하는 기존의 견해 차이를 해결하기 위해 그의 우호적인 조정 의사를 전하도록 코튼(Cotton)에게 지시했습니다. 그는 일본 영사관이 습격 당한 슬픔을 위로하였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일본이 미국 선박 모노캐시(U. S. S. Monocacy) 호의 출현을 호의적으로 생각하도록 하려는 방책이었습니다.코튼(Cotton) 대장은 일본의 하나부사(Hanabusa)와의 회담에서 협상에는 실패했지만 임무에는 성공했습니다. 후에, 하나부사(Hanabusa)는 진심 어린 우정이 결여된 형식상 작성한 편지에서 미국에 대해 고마움을 표시했습니다. 이에 반해, 중국은 진정한 마음으로 깊은 감사를 표시했습니다.한국은 1882년 존 러셀 영(John Russell Young)의 행동을 조미조약(American-Korean Treaty)에 따른 “무장 개입의 외교적 압력으로 믿었습니다. 따라서 한국의 황제와 대중들에게 그의 행동은 대단한 환영을 받았습니다. 재중 미국 장관인 존 러셀 영(John Russell Young)은 자신의 판단에 흡족해 했습니다. 또한 조미조약(American-Korean Treaty)이 체결된 후 국무 장관에게 다음과 같이 조언을 한 사람도 존 러셀 영(John Russell Young)이었습니다.“미국은 한국에서 확고한 위치를 세우는 것이 매우 중요하며 우리는 개방된 한국의 문을 닫거나 타 세력에게 우선권을 주어서는 안됩니다.”이 조약에는 외교 문서에서도 종종 볼 수 있는 단순하지만 숙명적인 말이 있습니다. 이 내용은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그 의미가 클 수도 있고 의미가 전혀 없을 수도 있습니다. “만약 다른 열강이 한 쪽 정부를 불공정하고 억압적으로 대한다면 다른 쪽 정부가 그들의 중재권을 발동하여 사건의 전말을 조사하고 평화적인 타협을 가져오게 한다. 그리하여 서로의 우호적 감정을 보여준다.”미국의 윤리적 책임1882년의 조약의 결과, 미국은 윤리적, 법적 책임은 독립국가 상태로서의 한국 문제와 관련된 사항이며 더 나아가서 중국과 일본, 나중에는 일본과 러시아의 세력 균형을 전복시켰다고 생각했습니다. 미국은 극동 지역 평화에 재난을 가져온 후속 사건들에 대해 조금도 책임지지 않았습니다. 만약 한국의 독립을 유지하기 위해 강경 정책을 펼쳤다면 1894-1895년의 중일전쟁(Sino-Japanese War)과 1904년-1905년의 러일전쟁(Russo-Japanese War)을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극동 지역의 영구적인 평화를 위한 열쇠를 쥘 수 있었을 것이며 아시아의 개방된 문호를 보장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올리(Olney) 장관이 언급한 바와 같이 한국의 결정적인 실수는 “중재권”과 “개입”의 의미를 혼동한 것입니다. 하지만 이전의 한미 외교 관계에 비추어 볼 때 “중재권”의 의미를 “개입”의 의미로 해석한 한국 정부만을 비난할 수는 없습니다. 아쉽게도 미국 정부가 초기에 보여준 우정 어린 행동은 태평양의 평화와 미국 안보라는 중요한 사안에 불리하게 작용할 비현실적인 후속 조치를 취한 행동과는 상반되는 것입니다.1910년 일본의 한국 병합일본에 의한 한국 병합은 독일에 의한 오스트리아 병합과는 사뭇 다른, 복잡하게 얽힌 사건의 결과입니다. 한반도는 1864년 혹독한 섭정 정치를 겪었던 왕국이었습니다. 한국이 “은둔의 나라”라는 별명을 얻은 것처럼 9년 동안 복수의 날을 기다리며 “한국 국민만을 위한 한국”을 유지했습니다. 이렇게 굳게 닫힌 한국의 문을 연 첫 번째 나라는 일본이었습니다. 그 결과 교역을 위해 한국 항구에 일본이 다시 돌아왔고 이어 두 개의 항구도 개방되었습니다. 한국 문호 개방의 특전을 두 번째로 누린 서구 세력은 1882년 슈펠트(Shufeldt) 준장을 앞세워 조약을 체결한 미국이었습니다. 한국 국민을 통제하는 문제는 빠른 속도로 일본의 손에 넘어갔고, 결국 1910년 8월 29일 최종 병합이 이루어졌습니다.우리와 조약을 체결했던 독립국가 한국은 생존권을 포기해야 했으며 1882년의 조약은 단지 애정 어린 기억으로만 남게 되었습니다.5월 22일, 한국인들은 격분한 반항의 감정도, 반격도, 비난도 아닌 한미간의 오랜 우정과 한국이 받았던 도움에 대한 감사의 표시하며 그 기억을 되살렸습니다. 미국은 한국을 위해 최선을 다했다고 말하고 있으며 한국은 그것을 기억합니다. 우리 국무성은 중재권에 대해 개방적이었지만 그것이 개입의 의미로 해석되리라는 것은 알지 못했습니다.모든 지역의 한국인들은 일본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미국에 간청합니다.선량한 모든 한국인들이 흘리는 피에는 일본에 대한 증오가 서려 있습니다. 350년 전인 1592년 원한의 그날, 히데요시(Hideyoshi)의 명령에 따라 수천 명의 일본 병사들이 조선 왕국의 해안에 떼지어 몰려와 도시와 농지, 보물을 파괴했습니다. 350년 전의 아픔을 지닌 한국 국민은 오늘날 일본의 속박 아래 있으며 과거의 굴욕적인 삶을 일본에게 복수할 수 있는 그날을 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한국 국민은 조상 대대로 관계를 이어온 오랜 친구 중국과도, 숙적인 일본과도 구별되는 뚜렷한 민족입니다.일본의 군사 전략적 해군 기지 및 공군 기지의 후미에서 수백만 명의 한국인들은 일본을 물리칠 수 있는 방법을 수행하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중국에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수립한 그들은 이미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미국이 한국을 27번째의 연합국으로 승인하지 못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누구라도 그 이유에 대해 유감스러워할 것입니다. 미국 정부에게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승인할 것을 강하게 촉구하는 바입니다.도처의 한국인들은 미국이 일본을 공격할 것을 간절히 바라고 있습니다. 미국의 폭격기가 일본의 산업 도시와 점령국인 한국을 겨누어 우리 국민들이 죽게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그것을 감내할 것입니다. 일본의 노예로 사느니 차라리 미국의 폭탄에 죽음을 선택할 것입니다.

    850 한길수가 한국 동료들에게 보낸 편지

    발신일: 1942-07-23발신자: 조선민족전선연맹(KOREAN NATIONAL FRONT FEDERATION) 중한민중동맹(SINO-KOREAN PEOPLES LEAGUE)발신주소: 노스웨스트 D 가 101 워싱턴 D. C. 친애하는 한국 동포 여러분놀랍게도 리승만(Syngman Rhee) 박사를 대표로 하는 동지회(Dong Ji Hoi)로부터 몇 장의 결의문 사본을 받았습니다. 이 결의문의 내용은 만장일치로 통과되었고 1942년 6월 20일 시카고(Chicago)에서 외국 정부로 발송되었습니다.리승만(Syngman Rhee) 박사는 한국은 함께 숨쉬는 “단합된 하나”라고 말하면서도 “한길수(Kilsoo K. Haan) 또는 어떠한 그의 측근과도 타협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라고 선언하는 결의문을 보내왔습니다. 동포 여러분, 이것이 진정 단합의 정신입니까?동지회(Dong Ji Hoi)의 결의문, 리승만(Syngman Rhee) 박사 단체일리노이(Illinois) 주 시카고(Chicago) 시 코티지 그루브(Cottage Grove) 가 2329, 동지회(Dong Ji Hoi) 시카고(Chicago) 지부결의문우리 동지회(동지 단체) 대표자들은 미국의 주요 지역에 있는 모든 동지 단체를 대표하여 1942년 6월 20일 일리노이(Illinois)주 시카고(Chicago)에서 총회를 소집했습니다. 이에 의하여 다음과 같은 결의문을 만장일치로 채택했습니다.1. 중국 중경(Chungking)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국 워싱턴 D. C.의 한국위원회 그리고 우리가 끝없이 신뢰하는 한국 위원회 대표 리승만(Syngman Rhee) 박사에게 충성을 다할 것을 결의한다.2. 우리의 국제적인 독립운동 활동을 위해 주미 한국위원회를 전적으로 지원할 것을 결의한다.3. 한길수(Kilsoo K. Haan) 또는 어떠한 그의 측근과도 타협하지 않을 것을 결의한다. 왜냐하면 그의 무책임한 성명서와 거짓말, 특히 우리의 단합을 깨려 하는 교활한 노력 뒤에는 좌익성이 내포되어 있기 때문이다. 한국 국민의 단합은 기정 사실이다. 애국 한국인이라면 이 사실을 부인하지 못할 것이다. 따라서 중국 중경(Chungking)의 대한민국 임시정부, 미국 워싱턴 D. C.의 한국위원회는 한길수(Kilsoo K. Haan)를 공식적으로 또는 기타 다른 방법으로도 교섭하지 않기를 삼가 요청한다.동지회(Dong Ji Hoi) 대표 총회회장, (서명) C. L. 김(C. L. Kim) 입증: 서기 (서명) 김홍기(Hongkey Kim)친애하는...한길수(Kilsoo K. Ha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