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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701 전경무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L. A.지부와 호놀룰루지부에 보낸 공함

    발신일: 1945-03-05수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L. A지부, 호놀룰루지부지난번 편지에서 통지된 대로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석하는 것이 가능한 지에 관해 탐구적인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나는 대화 중에 대한민국임시정부가 2월28일 오후 3시에 독일에 대한 전쟁을 선포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 선언은 쯔오 소 왕[Tjo So-Wang] 외무부장관에 의해서 발표되었는데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참가하기 위해서 신중하게 행해진 일이었습니다. 이번의 탐구적인 대화에서 우리는 샌프란시스코 회의에 초대받을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였습니다. 참석하는데 필요한 자격요건은 다음과 같습니다.인정받은 정부이어야만 하고 국가는 주권국가이어야 하며 반드시 UN의 회원국이어야만 한다는 사항입니다. 더 나아가 스페인, 스웨덴, 포르투갈, 아르헨티나, 아일랜드와 같은 국가들은 샌프란시스코 세계안보회의에 참가하는 것이 금지되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은 계속되어야만 하고 참석을 허락해달라는 탄원서가 제출될 것입니다.지난 토요일에 우리 지부에서 모임이 열렸습니다. 이 모임에 대해 한인위원회와 한국경제협회가 참석을 취소하고 불참하였습니다. 이[Rhee]박사는 나와 워런 김[Warren Kim]에게 우리를 대표로 지명한다는 내용의 서한을 보냈습니다. 나는 또한 이[Rhee]박사가 샌프란시스코 회의의 대표들로서 C. 김호[C. Ho Kim], 한시대[S. D. Hahn], 새럼 리[Sarum Lee], H. J. 송[H. J. Song], C. 호 펜[C. Ho Penn], S. Y. 왕[S. Y. Wang] 그리고 P. K. 윤[P. K. Yoon]등을 지명했다는 사실을 통지받았습니다. 현재 우리의 임무는 대표에 관한 적절한 절차를 추구하는 것이기 때문에 이 지명은 너무 성급한 것으로 여겨집니다.

    702 전경무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L. A.지부와 호놀룰루지부에 보낸 공함

    발신일: 1945-03-02수신자: 재미한족연합위원회 L. A지부, 호놀룰루지부얄타회담의 발표 후 2월12일에 4월25일에 개최될 샌프란시스코 UN회의에 대한 한국들의 참석을 대신하여 조사가 실시되었습니다. 솔직히 말해서 회의에 초대되는 것은 그 가능성이 매우 낮게 여겨지고 있습니다. 참석하기 위해서는 주권을 지닌 국가로서 UN의 회원국이어야 하고 정부는 인정을 받은 정부이어야만 합니다. 하지만 참석을 위한 노력은 계속 되어야 합니다. 그러므로 적절한 상의 후 2월23일에 동봉한 편지의 복사본의 설명대로 워싱턴에서 한국 단체들의 몇몇 대표들이 독자적이 아니라 일치하여 논의하고 행동하기 위해 소집되었습니다. 2월26일에 이 지부에서 모임이 개최되었습니다. 소개된 사람들은 한인협회의 헨리 디 영[Henry De Young], 한중연맹의 한길수[Kilsoo Haan]과 더킨 정[Dakin Chung], 한국경제협회의 안성화[Seunghwa Ahn],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워런 김[Warren Kim]과 나였습니다. 한국문제연구소의 김용정[Yong jeung Kim]은 그가 비정치적 단체를 대표한다는 이유로 참석을 거부했습니다. 이 모임에서 맺은 결론은 국무성에 한국의 참석을 요청하는 탄원을 계속해야만 한다는 것이었습니다. 탄원은 전경무[J. K. Dunn]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국무성과 탐구적인 대화를 나누었고 이 모든 것들을 전경무[J. K. Dunn]에 의해서 수행되었습니다. 우리는 더욱 깊이 토의하기 위해서 내일 다시 같은 대표들이 모일 예정입니다. 우리는 거쳐야 할 절차에 관해 당신에게 통지할 것입니다.진심을 보내며, 전경무[J. K. Dunn]

    703 전경무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L. A.지부와 호놀룰루지부에 보낸 공함

    발신일: 1945-03-02수신자: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호놀룰루(Honolulu) 지부,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지부관계자 여러분, 1월 초 버지니아(Virginia) 주 핫 스프링스(Hot Spfings)에서 개최될 세계신문편집인회의(IPR)에 세 명의 한국 대표자가 참석할 예정임을 알려 드립니다. 이와 관련한 초청장이 위원회(Commission)와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중한민중동맹(Sino-Korean People’s League), 한국문제연구소(Korean Affairs Institute) 및 한국경제단체(Korean Ecomonic Society) 등에 송부될 것입니다. 이는 위의 제 단체들이 세계신문편집인회의(IPR)에 보낼 세 명의 대표자를 선출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는 또한 이 대표자들에게 한국 민족을 대표하는 책임을 부여한다는 것을 의미하게 됩니다. 말씀드린 바와 같이 어떤 회의라도 국제회의에 참석하는 옵서버들은 특정 단체의 대표자가 아닌 한국 민족 전체의 대표자로서 책임감을 가져야 합니다. 세계 각국의 논의 대열에 한국이 참여하도록 고려된 점에 대하여 다시 한 번 기쁨을 표합니다. 감사합니다. 전경무(J. Kyuang Dunn)

    704 전경무가 한시대에게 보낸 공문

    발신일: 1944-09-19수신자: 재미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발신자: 한시대(Sidai Hahn) 의장 수신자: 한시대(Sidai Hahn) 의장 수신주소: 서 제퍼슨(Jefferson)로(blvd.) 1368 캘리포니아(California) 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시친애하는 한(Hahn) 의장님, 국내 문제의 해결을 위해 무엇보다도 중요하다고 간주하고 있는 이번 회담과 그 의미, 그리고 심각한 정치적 지연과 경제적 출혈을 가져왔다고 생각되는 최근 2년간의 불행한 상황을 해결하기 위해 열린 최근의 회의에 관하여, 개인적인 제안과 권고사항을 담은 비망록과, 올 6월 10일 개소한 우리 사무소의 작업에 대해 보고서의 형태로 알려 드립니다. Ⅰ. 한국위원회의 모순으로 인해 발생한 문제의 해결을 촉구하는 한족연합위원회와 그 연합 기관 수신 명의의 청원에 대하여 대한민국 임시정부(Kopogo)에서 오랫동안 답변을 해주셨습니다. 이러한 청원이 발생한 이유와 한국인들이 2년 동안 분열되어 있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재론의 여지가 없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대한민국 임시정부(Kopogo)측에 리(Rhee) 박사의 의장직 박탈을 조속히 처리하도록 결정하기 위한 회의를 개최할 것을 제안합니다. Ⅱ. 우리 위원회의 기구 가운데에서 저는 특히 워싱턴(Washington) 지부의 활동에 관심을 갖고 있습니다. 저는 의장과 부의장, 4명의 수행원 등 6명의 직원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의장의 기능은 남한 정부의 공식 대표자와 거의 동일합니다. 의장은 미국 및 하와이의 한국인들로부터 대표자로서 지지를 받아야 합니다. 의장은 한시대(Sidai Hahn) 및 김호(C. Ho Kim) 씨 가운데에서 선출됩니다. 부의장은 재정을 포함한 일반 업무에 대하여 책임을 집니다. 워렌 김(Warren Kim) 혹은 P. Y. 김(P. Y. Kim) 씨를 고려하고 있습니다.네 명의 수행원들은 일반 및 경제 상황에 대한 조사, 공보 및 홍보를 맡게 됩니다. 이들은 워싱턴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게 되며, 특별한 자격과 기여 능력을 고려하여 선발해야 합니다. 이를 통해 단순한 조직체인 우리 위원회의 협동을 위하여 특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합니다. 워싱턴의 조직은 업무 기능 단위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일이 정치적 편의주의보다 우선시되어야 합니다. 일반 조사를 위해서는 도신호(Chin Ho Tough) 씨를 선택하고자 합니다. 제 의견으로는 그는 의심의 여지없이 최적의 인물임으로 반드시 선택되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부탁하면 그도 수락할 것이라 생각합니다. 경제 조사 업무를 위해서는 경제적 원리와 실제 지식이 요구됩니다. 또한 이러한 지식을 발휘할 수 있는 경험도 필요하며 경제 용어를 다룰 줄도 알아야 합니다. 이러한 점을 고려할 때 개인적으로는 데이비드 유스(David Youth) 씨와 일한 뉴(Ilhan New) 씨 두 명을 최적의 인물로 보고 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두 후보자 가운데 뉴(New) 씨께서 좀더 유력하지만 우리 조직 근무를 그만큼 원하는 것 같지는 않기 때문에 유스(Youth) 씨를 생각하고 있습니다. 공보 업무에는 세 명을 고려할 수 있습니다. 김용정(YongJeung Kim) 씨, 한길수(Kilsoo Haan) 씨 그리고 저입니다. 현재로서는 김(Kim) 씨와 한(Haan) 씨 두 명을 생각하고 있으며, 한(Haan) 씨가 좀더 많은 경험을 지니고 있습니다. 위의 업무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홍보 업무입니다. 이 업무를 위해서는 정치적 지식, 유창한 영어 구사 능력, 포용력 있는 성격, 한국 문제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한족연합위원회의 설립 당시부터 현재까지 제가 이 업무를 담당해 왔습니다. 그러나 조직 기능과 정치적 목표의 강화 및 회의 준비 업무를 잘해 내기 위해서 저는 워렌 김(Warren Kim) 씨에게 확답을 요구하지 말도록 명령했습니다. 후보자는 아더 김(Arthur Kim), 벤 임(Ben Limb) 그리고 헨리 드영(Henry Deyoung) 씨입니다. Ⅲ. 리(Rhee) 박사가 위원장으로 재선될 경우에는 개인적으로 한족연합위원회(UKC)가 현재 상태를 유지하되 이번만은 대한민국 임시정부(Kopogo)와의 관계를 명확히 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제 입장에 대해서는 워렌 김(Warren Kim) 씨께 전달하였습니다. 지난 번 하와이(Hawaii)로 갈 때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에 머물면서 여러분과 워싱턴(Washington) 사무소의 폐쇄와 관련해 논의하면서 제가 드렸던 제안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1년간 사무소 개소가 지연된 것은 상당한 시간 손실 외에도 한족연합위원회(UKC)의 명성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왔습니다. 그러나 일단 이 사무소가 개소된 이후 벌써 4개월이 흘렀습니다만, 우리 사무소는 일반적으로 기대할 수 있는 이상의 성과를 올렸습니다. 개인적으로 저는 한족연합위원회 사무소를 개소하고 우리가 성취한 일들을 언급하는 데 어떠한 주저함도 없습니다. 첫째, 한족연합위원회 중앙 본부는 우리 사무소를 통하여 워싱턴(Washington)의 정황들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입수하였습니다. 이는 모든 위원회 회원들에게 도움이 되었습니다. 둘째, 우리 사무소는 이전에 한족연합위원회 대표자들이 일시적으로 수행했던 관계 업무를 쇄신하였습니다. 독립에 대한 다수 한국인들의 열망에 대한 개념과 정치적 해석의 지평을 확대시켰다고 믿고 있습니다. 관계 강화는 매우 기초적인 토대 작업이며, 이것이 우리의 업무로 지속된다면 한국 문제에 관한 미국 정부의 관심을 강화하게 될 것입니다. 셋째, 우리는 한족연합위원회가 국제회의 참석을 위해 노력을 다해야 한다고 언급해 왔습니다. 유엔구제재활회의(UNRRA)가 그 한 예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1년 동안 실질적인 협상력을 가질 수 없었습니다. 한(Haan) 씨와 리(Rhee) 박사께서 이 협상을 수행해 오셨습니다만, 우리는 친분 관계를 강화하는 것이 가장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이에 성공함으로써 우리는 몬트리올 회담(Montreal Council Session)에 옵서버를 파견할 수 있었습니다. 친분 관계가 없었다면 한족연합위원회는 이 회담에 참석할 수 없었을 것이며, 현재 한족연합위원회의 정치적 위상은 악화되었을 것입니다. 우리는 11월로 예정되어 있는 국제경제회의(Internation Business Conference) 주최측과 접촉했으며, 여러분께 알려 드린 바와 같이 우리 옵서버의 파견을 기대해도 좋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물론 우리의 정치적 위상을 고려할 때 공식 초청을 받을 정도의 능력이 되지는 못한다는 사실을 이해합니다. 그러나 저는 좀더 중요한 국제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는 정치적 통로를 확보하고 국제 대표자로서의 지위를 획득해야 하며, 이를 위해서는 우리가 언제 어느 때라도 국제회의에 참석할 수 있어야 한다고 비공식적인 요구를 했습니다. 넷째. 중경(Chungking) 지역으로 가기 1년 이상 전에 이곳에 머무르면서 저는 한국인들의 미국 군사학교 입학을 허용해 달라는 기밀 비망록을 전달하는 업무에 착수하였습니다. 올해 최소 두 명의 한국인들의 입학이 허용되었습니다. 이들은 현재 미군에 복무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 포로들에 대한 의견을 제시하였으며, 여러분께 보내 드린 바와 같은 답변을 받았습니다. 한국인들의 전쟁 참여에 대하여 강조함으로써, 최근 미 관계 당국은 한국인들을 적합한 업무에 배치하였습니다. 이를 위해 여러분께서 저에게 한국계 미군들의 명단을 제공하는 수고를 해주셨습니다. 다섯째, 홍보의 차원에서 우리가 국제 태평양 관계(International Pacific Realtions)에 대하여 설명하도록 초청되었다는 사실을 아실 것입니다. 또한 미국 교육성(United States Office of Education)의 원조에 힘입어 중요한 연설을 수행하게 되었습니다. 여섯째, 우리는 불행히도 일반 및 경제 조사 업무 수행에 실패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우리 사무소의 과오가 아닙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조사 업무는 능력이 매우 탁월한 사람에게 위임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저는 도(Tough) 씨의 부임을 매우 만족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이것이 불가능하게 되면서 저는 즉각 유스(Youth) 씨에게 권유를 했습니다. 현재까지는 어떠한 결정도 내려지지 않았습니다. 따라서 현재는 제가 공보, 조사 및 홍보 업무를 모두 맡게 되었습니다. 이로 인한 시간의 부족으로 저는 홍보 업무를 매우 의욕적으로 진행하는 데 어려움을 느낍니다. 또한 미국 정부를 비롯한 단체들과의 공식 협상을 준비하기 위해서는 일반 조사와 경제 연구 업무가 필수적입니다. 일곱째, 현재 여기서 우리가 할 일이 없다는 논쟁이 있었습니다. 만일 여러 업무나 공식 초청을 기다리고만 있게 된다면 집으로 돌아가는 편이 낫습니다. 업무를 만들어 내는 것이 우리의 업무입니다. 또한 필요한 근무자들을 만들어 내는 것도 필수적입니다. 따라서 개인적으로 저는 두 명의 한정된 직원으로도 충분하다고 생각하며, 오히려 그보다는 보조원이 없다는 사실을 유감으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업무를 위원회 개소 업무로 추진하거나 한족연합위원회의 연장 업무로 생각한다면 직원을 모두 채용하는 것은 분명히 필요한 일입니다. 저는 어떠한 제의도 거절하지 않으며, 이를 통해 우리 워싱턴 지부의 귀가 항상 열려 있기를 바랍니다. 만일 이러한 일이 지금까지와 같이 흘러간다면 우리의 한국 관련 업무를 다른 기관에 이관하는 것이 전적으로 낫습니다. 위에 말씀드린 내용이 신중히 고려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저는 솔직하게 제 의견을 말씀드렸습니다. 한족연합위원회는 언제나 제게 자신감을 불어넣어 주었으며 관대하게도 저를 대표자로 지지해 주셨습니다. 우리가 대표하는 한국인들에게 저는 항상 빚을 지고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경무(J. Kyuang Dunn)

    705 전경무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호놀룰루 지부와 L.A.지부에 보낸 공함

    발신일: 1944-09-16발신자: 재미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IN AMERICA)발신주소: 워싱턴(Washington) 사무소 폰(PHONE) 구역 7049 워싱턴(Washington) 6, D. C.수신자: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사무소,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호놀룰루(Honolulu) 사무소담당자 귀하, 지난 9월 15일 캐나다(Canada)의 몬트리올(Montreal)에서 제1회 유엔구제재활회의(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 국제 협의회가 개최되었습니다. 김용정(Yongjeung Kim) 씨께서 대표자로 선정되어 우리가 이 공개 회의에 참석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된 것에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김용정(Yongjeung Kim) 씨께서는 내일 출발하실 예정입니다. 대표자는 공식 효력과 기능을 가질 수 있는 비망록은 지참하지 않을 예정입니다. 우리의 참석과 관련하여 어떠한 정치적인 해석도 개입되지 않기를 바랍니다. 유엔구제재활회의는 비정치 기구이며, 한국의 확고한 최대 이익을 위해 경주하는 우리들로서는 오해를 낳을 수 있는 잘못된 해석에 대한 경계를 늦출 수 없습니다. 그러나 다른 단체들과 마찬가지로 우리들에게 동등한 기회가 주어진 것에 대하여 매우 기쁘게 생각합니다. 벤 임(Ben C. Limb) 씨께서 힘써 주신 초청 문제와 관련하여 우리는 위의 사항들을 고려하고 있습니다. 첨부한 문서 사본에 보다 상세한 설명이 나와 있습니다. 감사합니다. 전경무(J. Kyuang Dunn)문서 첨부

    706 전경무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호놀룰루 지부와 L.A.지부에 보낸 공함

    발신일: 1944-09-05수신자: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사무소, 재미 한족연합위원회: 호놀룰루 사무소담당자 귀하, 지난 8월 16일, 미국 국무성 명의로 발신했던 비망록의 답신을 받았습니다. 비망록에서 저희는 덤버튼 오크스(Dumbarton Oaks) 회담에서 4강의 결의한 국제 안전 보장 계획의 일환으로 한국 문제를 고려해 주실 것을 요청했으며, 스테티너스(Stettinius) 씨로부터 답신을 받는 영광을 갖게 되었습니다. 저희는 스테티너스(Stettinius) 씨의 다음과 같은 말씀을 의미 있게 생각합니다. “미국인과 한국인들의 길고 친밀한 친분 관계를 고려할 때 한국이 자유 국가의 반열에 합류할 수 있는 때가 오기를 미국 정부가 고대하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 상당히 만족스럽게 생각합니다.”감사합니다. 전경무(J. Kyuang Dunn)문서 첨부

    707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본부에서 호놀룰루와 L.A.지부로 보낸 전문

    발신일: 1944-09-01수신자: 재미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로스앤젤레스(Los Angeles) 사무소, 재미 한족연합위원회(United Korean Committee): 호놀룰루(Honolulu) 사무소 담당자 귀하, 국제경영회의(International Business Conference)의 한국 대표 참석을 요청했던 서한 사본을 지난 7월 7일자로 보내 드렸던 것을 기억하실 것입니다. 이 회의는 국제 상공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미국 상공회의소(Chamber of Commerc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미국 제조노동자연맹(National Association of Manufacturers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미국 무역협회(National Foreign Trade Council) 등이 협찬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해 기술위원회(Technical Committee)에서 결정을 검토중이라는 답신이 지난 7월 14일자로 도착하였습니다. 이제 최종 답변을 받았으며 “회의의 성격상 대표 자격이든 고문 자격이든 한국 대표의 회의 참석은 허용되지 않는다”는 내용이었습니다. 회의 주최측의 서한과 우리의 답신 사본을 동봉합니다. 이 두 장의 편지를 읽어보시면 이해에 도움이 될 것입니다. 비록 결과는 실망스럽지만 차후에 열릴 전후 처리 관련 국제회의에 대하여 정보를 얻을 수 있도록 지속적으로 노력해야 할 것입니다. 비록 이번에 참석 기회는 갖지 못하였더라도 궁극적으로 국제 문제에 대한 해답을 도출해 내기 위해서 계속 현재 상황을 예의 주시하여 해답을 도출해 내는 것이 바람직합니다. 감사합니다. 전경무(J. Kyuang Dunn)문서 2부 첨부

    708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 사무소 선전부장의 활동 보고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 워싱턴 사무소는 1943년 6월 27일 워싱턴에서 로스앤젤레스와 호놀룰루에 있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전경무가 지시한 메모로부터 시작되었습니다. 메모의 내용은 전경무 씨에 의해 이원순 씨에게 건넨 복사본을 통하여 이승만 박사에게 알려졌습니다. 이 메모의 내용은 전경무 씨가 7월에 로스앤젤레스로, 9월에 호놀룰루로 돌아오는 데 있어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에 지시한 전경무 씨의 보고서 가운데 중요한 부분이 되었습니다. 워싱턴 사무소의 설립을 위한 제안에 있어서 사무소의 다룰 범위와 중요성에서 주의를 받지 못하지만 필수적인 일들을 담당하기를 강요받았습니다.Ⅰ. 사설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워싱턴 사무소의 설립은 한국 국제 태평양 주간지(Korean National-Pacific Weekly)에 다섯 줄의 제목으로 영어 사설로서 발표되었습니다. 한국 국립 헤럴드(Korean National Herald)와 한국 태평양 주간지(Korean Pacific Weekly)의 합동 출간은 1942년 1월 21일 이루어졌습니다.; 1943년 12월 23일 동지회(Dongji Hoi)의 요구에 의해 해산되었습니다.‘앞으로의 발걸음’ 1943년 10월 20일:“솔직하게, 워싱턴 관리들과의 한국 교섭은 아시다시피 실패입니다. “미국 주정부와 함께한 우리의 교섭은 지난 3월 중순에 끝났습니다. …… 그러므로 그것은 한국인들에게 관한 한 우리의 외교적 진전의 끝이었습니다.” 1942년 8월 14일 UKC 사무소에서 이승만 박사로부터의 편지. …… 전쟁은 확실히 내부의 올바른 한국 정치적 상태를 위해 일어난 것이 아닙니다. ……전쟁이 끝났을 때 한국인들은 웅변술보다 더 명백한 무엇인가를 하는 편이 낫습니다. 그리고 독자적인 한국의 문제나 아주 괄목할 만한 강력한 그들만의 사례를 만들기 위해 준비되어지는 형식은 실제 검증으로 증명될 것입니다. ……“…… 미국의 원조는 한국의 독립에 필수적입니다. 합리적인 행동이 주어져야만 하며 우리는 실행할 수 있고 정치적으로 실질적인 발전을 담당하기 위한 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워싱턴 사무소 설치를 주장합니다. 우리는 우선 다음과 같은 단계를 주장합니다.:”“(1) 국제연합과 특히 현재 미국의 요구에 적절하게 한국 연구에 관한 조사를 담당. 그리고 그들의 전후 회의; 한국인들에 의한 한국 문제의 지지와 한국 독립을 위한 평화 회의의 재정(중재)에 있어서 요구되어질 물질적인 자료들 모으기.”“(2) 한국 연구에 있어서 그 조사의 이유로 일본으로부터의 한국의 자유와 독립의 실현 및 관심에 관한 한국의 선전을 담당하고 촉진시키기.”“(3) 미국에서 한국인의 복지와 관련되고 염려하는 모든 문제들의 가장 좋은 실행을 한국인이 담당하는 사무소에서 담당하기, 그것의 영역과 다른 장소에서는 실제적인 행동의 영역 내에서 이루어짐. 1943년 전경무 씨의 개인적인 메모에서 밝혀진 제안들. 그것들은 로스앤젤레스의 UKC 사무실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확장되어졌습니다.”“이러한 사무실의 설립은 오직 이 전쟁이 지속되는 동안에는 고려되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하지만 전쟁 후의 한국과 미국 간 관계의 보다 심도 있는 발전과 증진을 위해서 영구적으로 계획되어져야 합니다.”‘보다 자세한 상술’ 1943년 10월 27일, 부연합니다.: “…… 워싱턴 사무소의 설립은 조사, 공공성과 대중적인 관계를 집중시킵니다. 보다 효율적인 결과를 위한 전략적인 핵심에서……”“…… 한국 문제에 있어서 정확하고 최신 정보의 공급은 현재 미국 정부 기관에 일정 정도의 가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들에 의해 조사됩니다. 적절하게 제공되는 정보 공급은 그것 자체로 전쟁중의 노력에 있어 한국인들의 기여이고 평가되어질 것입니다.”“정리?보관된 한국인 인재 관련 조사는 사실과 인물들을 위해 필수적이고 전후 회의에 있어서 측정할 수 없는 필수적인 요소일 것입니다. …… 한국인 자료들은 평화회담에서 독립을 위한 한국의 주장과 발표의 공식화를 돕기 위해서 갖추어져야 하는 것입니다.”“효율적인 한국인의 선전을 위해 한국인의 조사결과들은 반드시 있어야 합니다.”“한국인의 선전의 새로운 국면은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전력과 사고에 있어서 전체적인 동향과 함께 주요한 문제에 관한 기본적인 지식 및 그에 따른 모든 발표가 필요합니다.”“선전을 촉진시킴에는 한국의 문화적이고 역사적인 정보가 있어야 하고 그들의 정치적인 독립에 가치가 있는 한국인들의 논제, 극동 지역의 평화와 안정의 유지에 있어서 독립적인 한국정부의 전략적 군사적인 가치, 미국과 동맹국에 이른 원조와 함께 즉각적인 이용이 있을지 모르는 한국의 전쟁 가능성, 자치 정부를 위한 한국 국민의 역량의 증거……”“모든 선전의 끝은 전후 평화회의 쪽으로 지도되어질 것입니다.”“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준비와 반대로 그것 독자의 독립적인 정치적 기구를 세우기 위한 제안을 한다고 해석되어지지 않습니다.” 국민의 기관으로서 UKC는 한국 위원회에 의해서 무시되어졌던 일들을 떠맡은 워싱턴 사무소를 변론하였습니다.“…… 1941년 이후 재미한족연합위원회는 미국에 있는 대표적인 한국의 기관으로 알려졌습니다. 그리고 당회의 관리들을 통하여 미국 정부국과 중요한 관계가 함께 이루어졌고 이를 통해 한국 상황들에 대한 일반적인 관심으로 유지되고 더 깊게 발전되어졌습니다. ……”“특별한 공적 관계들은 한국의 상황과 그들의 협조에 관심이 있는 다양한 미국 부서들의 이해를 지속시켜 가는 데 있습니다.; 한국에 관련되는 미국과의 관계의 창조; 법률적으로나 전문적인 설명을 요구하는 한국 공공 관계 내의 직접적인 도움; 평화회담에 준비로서 국제연합에 의해서 때때로 배열되는 국제적인 회의의 관찰자와 대리자들의 한국에 대한 고려와 참석을 얻는 것.”‘UKC 워싱턴 사무소’ 1943년 11월 10일 발표했습니다.: “워싱턴은 지금 한국인에 관한 한 중요성에 대하여 초점을 맞추고 있으며 우리는 더 이상 주저하지 않고 일을 해야만 하는 시점에 도달했습니다. 히틀러가 패배했으며 그의 패배와 더불어 일본도 결정적으로 패망해 가는 시점에 거의 도달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자유를 향해 열망하는 한국인들을 위해 우리가 하고자 원하는 떠들썩한 평범한 자치 행정보다 전쟁에서 승리를 위한 믿을 만한 무엇인가를 해야만 합니다.”“그리고 한국인들이 전후 회담에서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서는 우리는 강한 친구를 찾아야만 합니다.”“관찰(주목)과 역사로부터 미국은 영토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자립심이 없는 국가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은 전후 식민지들에게 있어서 결정적인 힘을 발휘하는 국가 가운데 하나입니다. 미국의 원조와 신임을 얻기 위한 한국인 활동이 있습니다.”“재미한족연합위원회의 워싱턴 사무소는 무참하게 실패하고마는 중요한 요구를 충족시키고자 출현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사무소는 불필요한 논쟁과 지연에 더 이상 시간을 손실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설립되어져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회담에서 한국의 위치’, 1943년 11월 17일 발표했습니다.: “국제적인 대표(사절단)들의 회의는 항상 중요합니다. …… 게다가 그러한 회의에의 참석은 한국의 미래 사건들에 필수적입니다. 하지만 한국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태평양 관계 기관(The 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에서 한국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국제 음식 회의(The International Food Conference)에서 한국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그리고 구호와 회생을 위한 회의에서 한국은 어디에 있었습니까? 우리는 승인에 있어서 집요합니다. 참가자로서의 참석조차 이러한 초기의 회의들에 참석을 인식하는 목소리가 왜 없었습니까? 많은 이같은 대표자 모임이 있을 것입니다. 이와 같은 참가를 가능하게 하십시오.”‘워싱턴 사무소’, 1943년 11월 1일 결정했습니다.: “사설을 통해서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워싱턴 사무소의 설치가 발표되었습니다.”“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사무소의 결정으로 워싱턴 사무소가 설립되게 되었습니다.” 1943년 11월 15일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의 UKC의 합동 결의에 의해 채택되었습니다.“아 사무소의 목적은 오늘날 발표된 한국 전쟁 활동들과 전후 회담을 위해 당면하는 조사, 발표, 공공 관계와 같은 필수적인 일을 담당하는 것입니다.”“지난 2년 동안 받은 경험은 워싱턴 사무소와 새 인물들이 지금까지 존재한 기관들에 의해 얻은 것보다 더 많은 결과들을 얻으리라는 희망과 함께 한국인의 활동을 촉진시키기 위해 필요하다는 것을 명백하게 입증합니다.”Ⅱ. 사무소 직원워싱턴 사무소의 설립은 1943년 11월 15일 호놀룰루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UKC 사무소의 합동 결의에 의해서 결정되어졌습니다.사무소 직원들을 위한 대중적인 고려는 전경무, 워렌 김[Warren Kim], 도신호, 데이비드 유스(David Youth)와 김영정 씨에게 주어졌습니다. 특별한 자격을 심사하는 데는 도신호 씨가 일반적인 조사를 인솔해야만 했습니다.; 유스(Youth) 씨는 경제적인 협상; 김영정는 발표; 전경무 씨는 공공 관계, 워렌 김 씨는 사무소 행정과 한국의 연락.호놀룰루 사무소에서 전경무, 워렌 김, 도신호 씨는 로스앤젤레스의 김영정 씨가 담당하는 분야와 함께 직원들을 채용하기로 결정했습니다. 그 결과 도신호 씨는 떠날 수가 없었습니다. 전경무 씨와 김영정 씨는 1944년 3월 5일 그 대륙을 떠났습니다.1944년 4월에 열린 UKC 회의에서 전경무, 워렌 김, 김영정 씨가 공식적으로 워싱턴 사무소를 구성하기 위한 직원으로서 받아들여졌습니다. 워싱턴 사무소 직원의 구성원이 되었다는 통지를 받은 김영정 씨는 그는 군대에 참여할 수 없었다고 진술했습니다. 그사이에 김영정 씨는 워싱턴에 Korean Affairs Institute라는 사적인 기관을 열었습니다. Ⅲ. 사무실의 개시워싱턴 사무소는 1944년 6월 10일 대표이사로 워렌 김 씨, 공공 관계 비서관으로 전경무 씨가 임명되어 문을 열었습니다.Ⅳ. 프로그램사설에서 개설되고 채택됨으로써 추진될 프로그램은 전 사무실 직원의 요구 때문에 시작부터 상당히 불리했습니다. 즉 대표 이사의 특별한 책임이었던 한국 연락 작업을 제외하고 워싱턴 프로그램의 주제넘은 작업을 시도하기 위한 공공 관계 비서관을 남겨 두었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프로그램은 시작되었습니다.Ⅴ. 위임받은 일연대순으로 날짜에 따라 위임받은 일은 다음과 같습니다.6월 5일 각서, “지금 미국 군대에 억류되어 있는 한국인들과 그들의 노동력에 대한 이용”6월 19일 IPR과의 대화 “우리는…… 태평양 관계의 기관(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의 중요성에 대해 잘 인식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가 요구하기 전에 우리는 스스로 그렇게 하기 위해 특권이 주어질지도 모르는 방법으로라도 당신의 기관에 첫번째로 봉사하기를 원하고 우리의 적절한 역할에 기여할 수 있습니다.”6월 24일 국제연합 화폐와 재정 회의(United Nations Monetary and inancialConference)에서 일치가 이루어졌습니다.7월 5일 국제 기업 회의(International Business Conference)에서의 요청으로 11월 10일부터 19일까지 한국인 대표들의 공식적인 참가나 참관자로서의 참여가 고려되었습니다.7월 9일 라디오 프로그램 — 전경무 씨와 한길수 씨, WINX 방송국7월 12일 국제연합 구조와 복구 관리(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에서 쓴 “우리는 미래의 UNRRA 회의에 한국의 존재를 위해 조기 협동을 가져오기 위하여 계속 진행하고 있습니다.”7월 31일 다가오는 회의에서 한국인의 참가를 위한 IPR의 워싱턴 지국과의 대화8월 2일 ‘적절한 시기’의 해석을 요구하는 주정부에서 보낸 편지8월 16일 고려에 대해 제출된 각서와 Dumbarton Oaks Conference에 기록9월 14일 UNRRA는 권위 있는 UKC 대표에게 “몬트리올 위원회분과[Montreal Council Session]의 국가 회의에 참석하라”고 충고했습니다.9월 29일 IPR 회의에 한국인 참가의 보증을 받았습니다.10월 10일 IPR로부터 참관자로서의 초대를 받았습니다.10월 18일 ‘한국은 승인을 추구합니다’라는 글이 IPR 발간의 극동 지역 조사(Far Eastern Survey)에서 출간되었습니다.11월 2일 한국 우표 기념식(Korean Stamp Ceremony)11월 18일 한국 학생 원조를 위한 문화 협동부(Division of Cultural Cooperation)와의 대화12월 1일 카이로 선언 기념일 행사12월 5일 미국 교육부와 관련된 기관들의 원조하에서 ‘한국의 국민들’이라는 제목의 강의가 Departmental Hall에서 열렸습니다.12월 21일 ‘태평양에서 한국 전쟁 포로들을 방문하는 한국 위원회’라는 기사가 발표되었습니다.1월 5일 IPR 회의 참석2월 12일 라디오 연설 ‘한국의 국민들’ WMAL 방송국(예정중)위의 임무들의 분류발표1. 극동 지역 조사(Far Eastern Survey) 2. “한국의 국민들(The People of Korea)”3. 라디오 연설전쟁 참가1. AMGOT에 관한 각서2. 전쟁 포로들에 대한 각서3. 한국 전쟁 임무에 관한 각서회의1. 국제 기업 회의(International Business Conference)2. 국제연합 구조와 복구 관리(United Nations Relief and Rehabilitation Administration)3. 국제 민간 항공 회의(International Civil Aviation Conference)4. 태평양 관계 기관(Institute of Pacific Relations)한국의 협동1. 중한 민중 연맹(Sino-Korean Peoples’ League)2. 우표 기념식3. IPR 위원회4. 카이로 회담 참관Ⅵ. 맡은 일의 보고서발표:극동아시아의 조사의 초대에서 IPR 발표, 기사는 10월 18일 ‘한국은 승인을 추구합니다’라는 내용으로 씌어지고 발간되어졌습니다. 부록 1을 보십시오강의:미국 교육부와 관련된 워싱턴 기관은 해마다 강의의 시리즈가 발표됩니다. 강의는 이전의 러시아에 있는 미국 대사관인 에드머럴 윌리엄 스탠리[Admiral William H. Standley]에 의해서 “러시아의 인민들[The People of Russia]”라는 강의가, 예일 대학(Yale University) 부교수인 레이먼드 케네디[Raymond Kennedy]에 의해 “The People of the Netherlands East Indies”라는 강의가, 재미한족연합위원회 @/k@전경무@/k@ 씨에 의해서 “한국인[The People of Korea]”라는 강의가 이루어졌습니다. 강의들은 Departmental Hall에서 이루어졌고 참석과 가입 모두 대중적으로 입증되었습니다.라디오:한국인의 관점을 명백하게 하는 라디오 인터뷰는 재미한족연합위원회를 대표하는 전경무 씨와 중한 국민들의 동맹을 대표하는 한 씨에 의해서 이루어졌습니다.라디오 강연은 미국 교육부의 원조로 2월 12일 ‘한국인[The People of Korea]’라는 제목의 발표를 하는 전경무 씨로 예정되어져 있고 학교에서 사용되기 위하여 방송되고 녹음되었습니다.초기 방송은 IPR 회의(1945년 2월 1일 기록)에서 OWI에 의해 전경무 씨로 예정되어졌습니다.기록들:기록 세 가지가 한국의 전쟁 참가를 위하여 제시되었습니다. 전경무 씨가 워싱턴에 있고 중경에 갈 수 없을 시간이었던 1943년 6월 5일에 기록을 제시하였습니다. 즉 적절한 부서에서 전문화된 행정적인 업무들을 위한 도움들로서 훈련받지 않고 잘 알려지지 않은 사람들을 요청하기 위한 요건에 의하여 준비되어지지 않고 강요받은 채로 남아 있는 것보다 “군사정부와 연락과 관계한 미래의 세부사항을 위한 훈련받은 한국인들에 관한 고려를 하기 위하여”였습니다. 이 기록은 “훈련을 위한 지원자들은 군사정부 학교에 의해 요구되어지는 필수 조건들과 함께 현재 미국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을 맡고 있는 미국인 관리들에 의해 선택되어진다”고 제안했습니다.두 번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전쟁 포로로서 하와이에 억류되어 있는 한국인들의 노동력의 이용이 연구됩니다. …… 신속한 행동을 위하여…… 미국의 전쟁 성과를 돕기 위하여 그리고 전쟁에서 국제연합에 기여하는 바람직한 한국의 수단으로서…… 이 한국인들은 노동력 단위로서 제공하고…… 군사적 정보에 있어서 도움, 적의 지역에 스며드는 주동자, 다른 한국인들과 관련 연락 세부사항과 마찬가지로 여전히 일본인들의 강제징용당한 노동력을 발견하는 것…… 이 한국인들은 훈련받고 조직화되었습니다. …… 그들의 자격과 군사적인 승인과 태평양으로의 복귀…… 다른 한국인들과 같은 취급에 있어서 원조…… 처음으로 훈련받고 조직되어진 한국인들은 적의 지역에서 증가하는 미국의 점령으로 얻은 새로운 한국인 구성원들로부터 그들의 힘과 노동력을 증가시킬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때문에 그들이 추구하는 한국인으로서 한국의 독립의 근거를 위한 힘을 실행할 수 있도록 세울 것입니다.”세 번째 기록은 다음과 같습니다. “한국 위원회나 한미합동 위원회는 미국인들의 지휘하에서 태평양 섬들에 감금되어 있는 한국인 전쟁 포로들을 방문하기 위하여 선택되고 할당되어졌습니다.”(a) 교육, 예배, 복지에 관계된 도움을 위한 그들의 필요를 결정하기 위하여 한국전쟁 포로들의 상황을 조사하기 위하여(b) 어째서 그들은 그들 자신의 삶을 위해 효율적으로 제공할 수 있고 미국에 이익을 위 한 노동에 착수하고 또는 그렇지 않으면 제네바 협약의 구조와 해석 안에서 이 나라에 봉사하기 위한 수단들에 관련된 정보들을 얻기 위하여(c) 이 전쟁 포로들과 한국의 시민 사건 행정에 있어서 미래의 포로들의 실행 가능한 참가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위하여 이 당시 이 기록의 결과들은 지금 논의될 수 없습니다.회의:7월 2일 뉴욕 타임즈(The New York Times)는 “사적 기업의 유지, 국가의 상업정책, 새 지역의 산업화, 선박 정책, 비행 정책, 세계의 공급과 기업연합”을 논의하기 위하여 미국 지역(American Section), 국제 상공 회의소(International Chamber of Commerce), 미국의 상공 회의소(Chamber of Commerce of the United States of America), 제조업 국가 연합 (National Association of Manufacturers), 국립 외국 무역 협의회(National Foreign Trade Council)의 협력하에서 11월 10일부터 18일까지 열리는 국제 기업인 회의(International Business Conference)에 관한 이야기를 다루었습니다. 우리 사무실은 7월 5일 회의 본부에 글을 썼습니다. “이 기관(UKC)은 당신들의 회의가 극동 지역 국가들에게 중요성을 가질 것이라고 보았고, 미래 한국의 국제 무역은 당신의 초대의 말로 해석되어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합니다.”(동맹국과 중립국들의 경제 지도자들에게 보낸 것) 그리고 이 사무소는 회의 본부에 “한국 기업 지도자들에 대한 초대를 확장하기 위한 정당한 고려가 주어지는 것은 미국에게 달려 있습니다. …… 우리는 내일의 경사스러운 세계의 관계에 대한 비전을 느낍니다. 한국 기업 대표자들은 기업 협동의 국제적인 계획을 훨씬 충분하게 도울 것입니다. 그리고 한국 대표자들이 크게 기여하지 못할지도 모름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한국의 독립 후 국제적 기업의 건설에 실제적으로 참여하기 위하여 원칙과 기초를 세우기 시작할지 모르는 당신의 프로그램 자체를 배우고 익혀 알게 할 수 있습니다.”두 달 후 국제 기업 회의의 기술 위원회(Technical Committee of the International Business Conference)는 다음을 결정했습니다. “회의의 조직 형성 때문에 대표자나 참관자의 자격으로서 회의에 한국인 대표자가 참석하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오직 연합국과 중립국의 기업 조직의 대표자들과 현재의 전쟁 이전에 완전 독립이 이루어지지는 않아 적에 의해 지금 점령당하고 있는 국가의 일부 기업 대표자들만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그러므로 국제 기업 회의(International Business Conference)에 한국인들의 참석은 안 됩니다. 7월 12일 UKC의 UNRRA와의 서신 왕래 이후 관심은 워싱턴의 UNRRA 본부와 계속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당시 한국인 참관자는 한국 위원회(Korean Commission)에 임명되었고 UKC 사무소는 마찬가지로 몬트리올 위원회 분야(Montreal Council Session)의 공공 회의에 참석하기 위한 대표자를 보내기 위해 초대받았습니다. 재미한족연합위원회 로스앤젤레스 사무소 이전 대표인 김영정 씨가 참석자로 임명되었습니다. 한국인 위원회(Korean Commission)를 대표하는 Ben C. Limb와 함께 김영정 씨는 한국인 참관자였습니다.국제 민간 항공 회의(International Civil Aviation Conference)가 11월 1일 시카고에서 열렸습니다. 이 사무소에서는 아무도 이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기 때문에 현재

    709 THE PEOPLE OF KOREA

    작성일: 1944-12-5작성처: 마이너 교육대학[Miner Teachers College]에 의해 후원된 강의, 일슨 교육대학[Willson Teacher College], The United Office of Education, 컬럼비아 지역의 교육회[The Education Association of the District of Columbia], 그리고 컬럼비아 교육회[the Columbia Educational Association]작성처: 전경무 전설에 의하면 단군이 한국 민족의 창시자로 알려져 있습니다. 단군왕조의 통치는 B. C. 2333년에 시작되어 12세기 동안 오래 지속되어졌다고 말해집니다. 그러나 그 초기의 역사는 신화와 전설로 덮여져 있습니다.진정한 한국의 역사는 고대 통치자 가운데 한 명인 기자에게서 시작되었다고 전해집니다. 기자는 주왕조에서 망명하여 5천 명의 추종자와 함께 중국을 떠나 고대 한국으로 이주한 자입니다. 이 일은 B. C. 1122년에 발생하였습니다. 그리고 중국 정치가이며 철학가인 기자는 한국 사회질서의 기초를 세우는 데 공헌을 하였습니다.하지만 한민족 자체는 지금 하얼빈의 도시로 되어 있는 만주의 중심에서 일어났습니다. 그곳에서부터 이른 남성다움 안에 사람들은 그들의 첫번째 왕조–부여–를 형성하기 위해 남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남쪽과 북쪽의 경계지는 송화강과 근대 한국의 북쪽의 경계선을 형성하는 압록강[Yalu]와 두만강[Tumen]을 따라 자리잡은 백두산입니다.그 당시 부여 민족들은 지형적으로 팽창하였고 경계가 북한의 두 지역을 둘러싸는 대동[Tatong]강을 넘어 만주의 랴오둥 반도의 전체를 포함하는 북경 쪽으로의 랴오허강[Liao]을 넘어서 팽창하는 고구려 왕조로 알려져 있습니다. 만주에서 일어나서 고구려민으로 알려진 이 종족은 B. C. 2세기에 그 영토적인 권리와 첫번째 큰 침략의 합법성이 한(wu-ti)왕조의 중국과 대항하는 것을 넘어서 중국과 싸우고 있었습니다. 3년간의 전쟁 후 B. C. 107년 현재 한국인의 조상들은 굴복하였고 이후 70년 동안 한제국의 통치하에 있었습니다.B. C. 1세기가 되면서 3개의 독립왕조가 한국에 형성되었습니다. 만주의 랴오둥 전역과 대동강[Tatong]을 포함하는 현재 한반도 북쪽의 두 지역이 고구려였습니다. 대동강의 남쪽 지역은 동과 서로 나뉘어 신라와 백제가 있었습니다. 1세기부터 10세기까지는 이 세왕조의 이야기입니다. 그것은 전쟁의 이야기이고 역사의 형성기에 사람들의 등장과 몰락의 이야기이며 마지막으로 현재 Korea라는 이름이 나오게 된 고려라는 단일 왕조에 결합시키게 하는 것이다.A. D. 1세기 중국왕조는 고구려의 영토적 확정과 강성함을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50년 동안 고구려는 중국의 북서쪽의 반란에 대항하여 중국의 도움을 받았습니다. A. D. 221년 거대한 한왕조의 분열로 고구려 군대는 거의 북경 근처 가까이에서 중국의 만리장성 안쪽으로 이동하였습니다. 그리고 4세기 동안 고구려는 만리장성과 압록강 사이의 많은 왕국들의 생성에 대항하고 반복적으로 이웃국가인 백제와 신라와의 갈등을 겪고 있었습니다.고구려민들의 이야기(역사)는 중국과 만주 지역에서 엄청나게 떼지어 이동하는 많은 반란군들과의 전쟁, 경계 지역에서의 신라와 백제와의 투쟁들입니다. 30년도 안 되는 시간 동안 중국의 수나라는 세 번 고구려를 침략했습니다. 첫번째는 30만의 군사와 수백 척의 함대를 가지고, 두 번째는 그 당시까지 중국 군대에서 모은 가장 많은 숫자 가운데 하나인 100만의 군사를 이끌고 왔습니다. 그리고 다시 613년에 또다시 침략했습니다. 매 칩입 때마다 중국은 그들의 목적 달성에 실패했고 놀랍게도 돌이킬 수 없는 손실이 반복되었습니다. 이 세 번의 고대 원정은 중국 수왕조의 멸망을 직접적으로 야기시키게 했다고 말해집니다.수왕조를 이은 유명한 당왕조는 고구려로부터 랴오둥을 얻기 위한 그들의 선조들의 야심을 품고 있었습니다. 침략을 위한 구실이 필요했을 당시, 637년 고구려가 신라를 공격했습니다. 신라는 중국의 동맹국이었고 그들의 요청으로 태종 황제가 고구려를 침공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목적은 실패하였습니다. 하지만 국경지역 전쟁은 마침내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으로 이어졌습니다. 660년 당나라는 신라의 원조를 위해 다시 왔고 이때 백제와 싸워 그 왕조를 멸망시키고 664년 고구려를 공격하였습니다. 수많은 전쟁을 통해 공격적이고 방어적으로 싸우며 네 차례의 엄청난 중국의 침략에 당당하게 버티던 고구려는 700년의 통치 후 독립국으로서 굴복하였습니다.B. C. 1세기에 형성된 황해의 조수에 의해 서쪽으로 침식한 이들의 왕조와 함께 백제의 유민들은 농부였고 3개의 한국 국가의 문명화에서 가장 낮은 위치를 차지하였다고 역사가들에 의해 기록되어졌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왕조로서 성장하였고 지도국가로서 몇 세기 동안 투쟁하였습니다. 또한 그들은 빈번한 전쟁-국경지역의 투쟁과 중국으로부터의 습격으로 혼란스러웠습니다. 하지만 황해의 좁은 지형(strip)을 가로질러 중국으로 바로 근접하여 그들에게 처음으로 공자와 맹자의 고전과 중국의 뛰어난 문학작품들이 소개되었습니다.중국측 저서에 이미 374년, 나라 안에 교육을 위해 학교가 학교장과 함께 세워졌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10년 후인 384년 유행처럼 산스크리트의 연구를 한다며 산속에 불교 사원과 수도원들이 세워졌고 인도와 직접 대화가 이루어졌습니다. 불교(학문)의 선전으로 남자들뿐만이 아니라 여성학자들도 절과 수도원에서 받아들여졌습니다.백제는 일본에 불교 선교사들을 보낸 최초의 한국 국가였습니다. 577년 승려들이 일본 선교 현장에 파송되었습니다. 그리고 중국 쪽에서 백제의 패배가 이어지고, 타국의 정복자의 전제정치를 피하여 수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승려들은 학교를 세우고 배움을 독려하였습니다. 일본의 역사적인 작품들 가운데 가장 오래된 것인 Kojiki와 Nihongi는 일본에 직접적으로 자취를 남길 수 있는 백제 학자들의 지배적인 권한의 표현물들이었습니다. 또한 일본에 잘 알려진, 자기 공장을 설립한 능숙한 장인들은 백제에서 왔습니다. 그리고 백제는 다른 어떤 동방 국가들 이상으로 일본에게 대륙의 문명을 처음으로 소개해 주었습니다. 신라는 한반도 남쪽의 낙동강의 동쪽 반을 차지하고 있었습니다. 그곳은 날씨도 좋은 비옥한 땅이었습니다. 끊임없이 전쟁을 치루었던 고구려인들에 반하여 자연적인 보호 장벽으로 보호를 받고 적국의 통로로부터 멀리 떨어졌던 신라인들은 아마도 평화를 추구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신라의 해안가에 자주 출몰하던 일본인 해적들의 추방에 대한 그들의 역사(이야기)입니다. A.D 25년 신라의 사절단이 일본에 그들의 문명화의 물건들을 가지고 갔습니다. 그들은 거울, 옥색 장신구, 수놓은 비단, 칼과 일본에서 보편적으로 사용하지 않는 다른 물건들을 가지고 갔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백제가 (신라에) 불교를 보급하여 528년 불교가 국교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불교의 열렬한 선교사들이 일본으로 갔고 그들과 함께 신라의 무역업자, 예술가, 학자들이 따라갔습니다. 신라는 특히 라이벌이었던 고구려와 백제의 제거를 도운 중국과 가까운 동맹 관계를 맺었던 7, 8, 9세기 동안 한국의 고대 세 왕조 가운데 가장 높은 문명화를 얻었습니다. 수도였던 경주는 예술과 과학, 건축, 종교와 문학의 중심지였습니다. 그리고 문학 발전의 촉진으로 8세기 초 이두라고 알려진 한국 음절표(문자)가 발명되었습니다. 그리고 경주에는 오늘날 640년에 만들어진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천문관측소가 세워져 있습니다. 8세기부터 10세기까지 신라는 평화롭고 풍족한 절정기였습니다.신라의 눈부신 문명의 절정은 9세기였습니다. 그리고 나서 신라는 몰락해 갔고 918년 멸망하였습니다. 그리고 고구려 왕족의 후손인 왕건이 935년 고려를 세웠습니다. 그리고 초기에 한반도 전역과 만주의 랴오둥을 정치지배하에 두고 민족간의 동질성을 위해 사람들의 실질적인 결합을 이루었습니다.고려의 창시자인 왕건은 강력한 중앙집권의 목적을 위해 한반도의 중심에 가까운 송도에 수도를 두었습니다. 수도의 위치는 랴오둥을 넘어선 고구려처럼 영토 확장과 유지보다는 현재 반도의 발전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그리고 고려는 특히 불교의 발전과 터득에 관심을 보였습니다.불교는 왕실에 의하여 극진한 보호를 받고 지지를 얻었습니다. 그 결과 절들과 사원들은 그 수가 급격하게 늘어났고 그들의 유지를 위하여 국가는 대규모의 세금을 걷을 수 있는 영토를 수여하고 세금을 면제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1080년 아들을 세 명 둔 집안에서는 그 중에 한 명을 스님으로 출가시켜야 한다는 법을 공포하였습니다. 스님들은 국가의 상류계급이 되었습니다. 사원들은 학교로 변하고 절들은 예술과 과학의 전당이며 고등교육의 보고가 되었습니다.수세기 동안 한국인들의 역사는 전쟁의 기록이었습니다. 아마도 전쟁은 그들의 취향은 아니었지만 공격적이고 적대적인 성향의 사람들의 가운데 있었던 한국의 지정학적인 위치는 외국의 협박을 받기 쉽게 만들었습니다. 또한 다시 단일 국가로 한국인들의 통합이 되는 동안 중국 내부는 수차례의 침략으로 북만주 지역에서 거란이 한국을 공격하는 것을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이어 1015년 시간의 기록이 있은 이후 한국 영토였던 남만주의 일부를 잃었습니다. 그리고 한국의 경계가 남겨진 시간 이후 오늘까지 고정되어 있습니다. 다시 중국의 정복자로서 징기스칸의 대두는 전쟁의 제물로 한국을 발견했습니다. 그리고 징기스칸의 정복하에서 일본열도의 공격을 두 차례 도와주면서 한국 해안으로부터 시도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러한 전쟁에도 불구하고 고려에서 외국인의 통치는 일시적으로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불교의 발전이 멈추어지지도 않았습니다. 그리고 계속되는 국민적인 지지로 문필가들과 학문을 한 동시대인들의 유산은 국가의 문학적 부(富)와 영향으로 중국에 학문적인 전도를 가져왔습니다. 신라의 위대한 학자이자 언어학자인 설총에 의해 8세기 초에 만들어지고 이두[Nido]라고 알려진 문자는 어려운 중국 문자의 독해를 자국어로 읽는 데 사용되었고 교육의 대중화에도 기여하였습니다. 목판 인쇄는 실용적으로 이용되었고 불교 서적들이 엄청나게 출판되었습니다. 불교 철학과 문학에 관한 국가의 시험은 공공기관을 유지하기 위한 시험으로 실시되었고 학문을 위한 격려와 선호를 가지고 왔으며 전문직으로서의 군인의 격하를 야기시켰습니다. 게다가 수년간 고려왕조는 동방의 일부분으로 존재하면서 엄청난 불교의 영향을 받았다. 비록 그것이 인도의 아소카의 최고의 것들이 아니었어도.하지만 450여 년 동안 단일한 계통의 통치는 때를 맞추어 왕권의 나약함을 가지고 왔습니다. 정신적인 면보다 정치에 관련한 것에 대한 불교 성직자들의 음모에 의해 부추겨진 후대 왕들에 의한 잘못된 통치와 타락이 발생하였습니다. 폭동이 일어나고 새로운 왕조가 왕위에 올랐습니다.이씨 집안의 새 왕조는 1392년–재미있게도 컬럼버스[Columbus]가 미국을 발견하기 100년 전–왕씨 가문을 정복하고 서울을 수도로 하였습니다. 경사스러운(상서로운) 통치가 시작되는 것 같았습니다. 우선 수도와 국가의 성채의 강화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나서 퇴폐적인 기관을 대신하여 새로운 사회가 열렸습니다. 이전 통치하에서 국가의 종교였던 불교는 폐지되었고 그것을 대신하여 엄격하고 본질적인 가르침인 유교가 강조되었습니다. 그리고 더욱이 불교의 영향이 줄어들고, 유교 경전의 지식과 경쟁은 관원이 되기 위한 수단이 되었습니다. 이것은 중국 고전의 학습이 필수적인 선택을 가져왔고 대중적인 불교 사원들은 유교적 교육기관으로 변하였습니다.중세에서 근대 한국의 교량인 1910년까지 계속된 이씨 왕조의 처음 2세기는 한국인들의 삶에 뛰어난 진보로 기록되었습니다. 훌륭한 정부의 관심으로 국민들이 그들의 불평과 제안을 글로 남길 수 있는 신문고라고 알려진 것을 궁궐 입구에 두었습니다. 새로운 세금제도는 정부의 재정적인 부담을 공정하게 배분하는 효과를 가져왔습니다. 그리고 1403년, 세계 최초의 움직이는 금속 활자가 발명되었습니다. 그것은 유럽의 르네상스시기를 촉진시킨 구텐베르그[Gutenberg]의 발명보다 50년을 앞선 것으로 이것은 성미 급하고 훌륭한 한국인들의 독창성을 입증하는 사실입니다. 이 발명에 앞서서 이루어졌던 200년 이전의 한국 인쇄는 목판이었습니다. 그리고 이 움직이는 타이프는 쓰기에 활력에 가져왔고 한국 문학의 활발한 시대가 동양 문학의 산문과 시조를 산출함으로 번창하였습니다. 그리고 또한 이 기간에 세계 최초의 백과사전적인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초기의 복사본 세트와 엄청난 작품이 현재 국회 도서관에 있습니다.1441년 언문으로 알려진 한국 문자가 나왔습니다. 많은 유럽의 국가들이 중세시대와 그 이후에서 계속 라틴어를 사용하고 있을 때. 언어학자들에 의해 매우 뛰어나다고 판명된 25개의 문자는 한국의 지적인 진보의 성장을 가져왔습니다.물시계를 포함한 많은 기계적인 장치들이 발명되기 시작했습니다. 도자기 공예는 완벽에 가까운 높은 수준에 도달하였으며 이는 일찍부터 일본에 전해져서 이후 세계의 물질적인 개화(문명화)에 일본인의 공로를 초래하게 되었습니다. Stasuma, Nabeshima, Yatsushiro와 Imari로서 매우 잘 알려진 일본의 제품들은 본래 한국의 장인들의 작품들입니다.국내의 발전과 함께 국가는 만족스럽게 발전하였습니다. 평화가 200여 년 동안 지속되었고 이 시기에는 국가를 불안하게 하는 어떠한 외국의 침략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쟁에 대한 생각은 느슨해지고 국가 방어에 대한 엄격한 정신이 느슨해지면 이를 무시하게 되었습니다.그러던 1592년 일본의 실제적이고 행동적인 지배자였던 히데요시[Hideyoshi]가 한국을 거쳐 중국으로 침략하겠다는 구실로 침략했는데 한국인들은 아무런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습니다. 일본의 침략이 시작되자 그들은 랴오둥 평원에서 중국의 군대에 대항하여 버티던 고대 고구려인들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그들은 또한 몽고와 Khitan에 맞서던 고려인들도 아니었습니다. 그리고 동맹국으로서 중국에서 지원군이 왔음에도 불구하고 너무 늦고 적은 수였기에 일본군은 의지대로 한반도를 점령하였습니다. 전쟁에서 일본의 잔악성은 현재의 전정에서도 발견할 수 없을 만큼 잔인했습니다.그러나 7년의 전쟁으로 인한 약탈과 파괴의 고통을 겪었지만 사람들의 정신과 천재성은 극단적인 결과를 가져오지는 않았습니다. 전쟁 폭발물들에 대한 실험이 이루어지고 세계 최초의 전쟁용 철갑(장갑) 선박이 발명되었습니다. 그리고 이 철갑 선박은 일본의 함대를 부수고 그들을 본국으로 돌려 보내는 수단이 되었습니다.하지만 1592년의 침략은 사람들의 힘을 소모시켰습니다. 그들은 죽어 갔고 약해졌습니다. 그들의 나라는 즉각적인 회복을 준비했습니다. 그리고 불운하게도 건축가로서 붕괴를 막을 훌륭한 지도자가 없었습니다. 지난 반세기 동안 권력을 위해 다툰 정치적인 당쟁이 지금 강렬한 논쟁 속에서 재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일본의 침략으로 황폐화된 이후 이 세대들은 중국의 옥좌를 차지한 만주 지역의 군사들에 의해 두 번의 침략을 당했습니다. 50년 안에 모두 일어났던 이러한 참혹하고 굴욕적인 외국의 침략에 의한 황폐는 완벽한 고립정책을 불러왔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고립은 제국주의로서의 중국과 개항으로서의 일본에서 활동한 강력한 서구 국가들의 구속하에 있었으며, 한국이 미국과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1882년까지 국민들의 국가적 진보에 치명적이었고 가장 강력한 정책으로 남겨졌습니다. 우리 토론의 기록은 수많은 날들의 목록으로부터 단절이 될지도 모릅니다. 아마 그들에게는 대수롭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나의 주제의 도입에 있어서는 중요하기 때문입니다.B. C. 1122년 한국 사회의 지도자의 창시자인 기자와 만주에서 일어나고 한반도를 포함한 랴오둥에 살고 있는 사람들과 함께 믿을 만한 한국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기원후 1세기에 고구려, 백제, 신라라는 세 독립 왕조가 있었습니다. 660년 한국을 침략한 중국은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키고 신라는 한국 문화의 높은 발전을 가져왔습니다. 935년 세 개의 고대 국가의 주민들을 모두 연합하여 고려가 세워졌습니다. 고려의 지배는 한국 불교의 황금 시기였습니다. 1392년 잘못된 통치로 고려가 망하고 이씨 왕조가 들어서서 한국이 일본제국에게 강제로 합병된 1910년까지 지속되었습니다. 1592년 일본의 대침략으로 한국인들은 물질적으로 고갈되었고 정신적으로 피폐하게 되었습니다. 1882년 한미협정이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후 한국은 근대를 맞이하게 되었습니다.한미수호통상조약은 서양국가와 맺은 첫번째 국제협약이었습니다. 이후 영국, 러시아, 프랑스, 독일, 이탈리아, 오스트리아-헝가리와 비슷한 조약이 급속하게 뒤따랐습니다. 오랜 고립되고 약해져 있는 한국의 서구와의 이런 갑작스러운 접촉은 비극적인 영향을 가져왔고 1882년부터 1905년까지 한국 내에는 자멸적인 복잡함–사상, 민족, 충돌하는 강대국–이 발전하였다.첫째, 서구와의 접촉으로 많은 한국인들은 정체된 동양과 비교하여 빠르게 발전하는 서구화의 추진력에 주의하였습니다. 그들은 중세 일본이 겉으로는 페리[Ferry] 제독의 방문으로 갑자기 근대국가로 변한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고대 한국을 버리고 서구의 새로운 것을 받아들이기를 열망하였습니다. 보수세력과 권력층은 쉽게 변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당파의 내부적인 경쟁을 가져왔습니다. 왜냐하면 그들의 당파적 투쟁과 위치를 강화하기 때문입니다. 진보론자라고 불리는 이들이 일본을 장악하였습니다. 보수파들은 일본에 의존하였습니다. 둘째, 육지 탈환의 유행에 늦은 일본은 거대한 대륙의 힘을 가진 일본제국을 건설하려던 히데요시[Hydeyosi]의 꿈을 상기시켰습니다. 일본은 한국이 가장 즉각적이고 쉬운 대상이라고 혼잣말을 하였습니다. 이에 대해 일본의 팽창 야심에 두려움을 느낀 중국(그들의 영토와 너무 가까워지기 때문이)은 의견을 달리하였습니다. 한국의 많은 취약성 때문에 내부적인 문제는 1894년 중국과 일본사이에 외교적이고 군사적인 투쟁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아시아의 지배를 위한 일본의 계획으로 중국은 패배하고 한국의 문제들로부터 배제되었습니다.셋째, 태평양 진출을 추구하는 러시아는 지금 국제적인 관심의 극동 지역으로 눈길을 돌렸습니다. 러시아의 첫번째 관심은 만주였습니다. 러시아는 한국에서 한국의 약함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금 한국은 러시아와 일본 사이에서 분쟁의 지역이 되었습니다. 러시아와 일본의 전쟁이 1904년에 뒤이어 일어났습니다. 러시아가 패배하였습니다. 그리고 1905년 미국이 지배력을 가지고 있는 포츠머드조약에 의하여 일본은 강하게 한국을 압박하였습니다.한국에 대한 국제적인 사건들은 현재 빠르고 비참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1905년 일본은 한국에 보호국을 설치하고 한국의 외교 공사관을 파견하였습니다. 1910년 일본은 일본 제국의 일보로 한국을 합병하였습니다. 그리고 이 합병으로 일본은 식민지로서 그 나라와 정복 대상으로서 그 국민들을 지배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한국에 일본의 최고 우세권을 형성하기 위하여 일본은 정치적인 지배를 위한 군사정부를 설립했고 경제적인 정복을 위한 동양척식주식회사를 만들었습니다.모든 중요한 정부 요직에 일본인들이 즉시 자리를 차지하였습니다. 나라는 단속과 스파이 활동을 위한 일본인 헌병대들로 가득 찼습니다. 군사단은 전략적인 요충지에 위치하였습니다. 언론은 엄격하게 통제되었습니다. 연설과 집회는 ‘위험한 사상’은 일본의 흡수정책에 방해하도록 발전하지 못하게 경찰 통제하에 있었습니다. 학교들은 엄격한 일본의 커리큘럼–일본의 명령과 제도에 충실한 한국인 세대를 만들기 위한 명백한 의도를 가지고 있는–을 가지고 일본인들에 의하여 지도되엇습니다. 그리고 한국어와 역사의 교육은 금지되었습니다. 세금은 증가하고 여행은 제한되었습니다.동양척식주식회사는 일본 정부에 의해 도움을 얻었고 그 기관은 그들의 새로운 식민지를 식민지배하기 위해 그들의 고국의 일본인들을 장려하였습니다. 한국 정부가 소유하던 토지, 불교 사찰과 왕족은 뒤를 잇는 일본인들이 인계하고 분배하였습니다. 더욱이 한국 농부들은 일본인들과 일본인의 이익을 위한 많은 자리를 내주기 위해 그들의 땅을 빼앗겼습니다. 이것은 엄청난 고

    710 전경무가 한시대에게 보낸 기밀 편지

    발신일: 1944-08-28발신자: 한시대수신자: 한시대보안 요망지난 6월 5일 저희는 육군성의 주소를 입수하고 현재 미군의 관할 아래 있는 한국인들과 그 노동력의 활용 방안에 대해 다음과 같은 내용의 비망록을 전달하였습니다. Ⅰ. 하와이(Hawaii)에 억류되어 있는 한국인 ‘전쟁 포로’들의 실제적인 활용 방안이 미군의 지도 아래 육군성에 의해 시급히 마련되어 미군의 전쟁 수행을 지원하고, 일본과 그 연맹국에 대항하고 있는 국제연합(United Nations)을 위해 한국인들이 바람직한 기여를 할 수 있도록 한다. 이들 한국 포로들은 미국 점령지의 노무자로서, 군 정보국의 보조원으로서, 적지의 무장 침투 요원으로서, 일제에 강제 징용된 한국인들과의 접선책으로서 제 역할을 다한다.Ⅱ. 이러한 목적뿐만 아니라 개인의 능력에 따라 군 당국의 승인 아래 다양한 훈련과 조직화가 이루어진 한국 포로들은 이제 미군 관할의 태평양 지역에 배치되어 미국의 관리를 받고 있는 한국인들의 임무를 돕는다. 미국의 점령지가 확대되어 포로들의 숫자가 늘어감에 따라 조기에 훈련되고 조직화된 한국 포로들은 스스로의 역량을 향상시킬 수 있으며, 이를 통해 유엔군의 대 일본 전쟁 승리를 위해 원조할 수 있을 것이며, 나아가 자국의 독립에 기여할 수 있을 것이며, 또한 한국인들이 열망하는 독립을 쟁취하기 위한 실질적인 힘을 기를 수 있다. 위에서 말한 바와 같이 ‘전쟁 포로’ 자격 여부는 지상전의 법칙과 관례를 따라 1929년 제네바 협정(Geneva Convention)에서 규정한 교전국 요건의 기준을 따르게 될 것으로 믿고 있습니다. 저희의 제안이 미국이 참여한 제네바 협정(Geneva Convention)에 위배되는 것이라면, 미국 본토와 하와이에 거주하는 많은 한국인들에게 이미 부여된 전쟁 필수품이라는 자격과 유사한 자격을 부여하는 것도 고려해 볼 수 있으나 조국의 자유와 독립을 위한 열망을 지닌 채 군의 감독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는 불가능할 것으로 보입니다. 이에 대한 회답이 8월 16일자로 도착하였습니다. 여기에서 육군성은 우리 서한의 기본 요지인 ‘한국인 전쟁 포로의 미군 내 노무자 활용 방안’에 대하여 “미국과 일본 정부간의 협정으로 인해 일본측의 인가를 받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라고 답변하였습니다. 그러나 “현재의 상황에서는 전쟁 수행에 필수적인 노무를 부여하는 것”은 가능하며, 이를 통해 육군성으로서도 전쟁 수행을 위해 전투와 마찬가지로 중요한 작업의 노동력을 얻을 수 있다고 덧붙였습니다. 따라서 저희들로서는 육군성측에서 저희 제안이 국제조약에 타당한지 다각도로 검토해 보았다고 생각하며, 한국전쟁 포로들에게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할 수 있는 참여의 기회를 준 것으로 보여집니다. 감사합니다.전경무(J. Kyuang Dun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