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51 |
遺告縉紳疏廳書 |
아, 모든 어르신 각하. 오늘날 나라가 무너져가는 때에 해와 달의 충의와 강과 바다의 뜨거움으로써 아룁니다. 만일 장차 죽은 후 우리 나라의 부흥이 이것(죽음)에서 비롯된다면, 어찌 한 둘의 원로 중신이 이어서 순국하는 것에 나라를 위해 만만세를 불러 축하하지 아니하겠습니까. 동휘(東暉)가 본래 우둔한 재주에다가 배움이 부족하여,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있어서 신들과 견줄 바가 되지 못하여, 거칠게나마 병학을 배워 몇 명의 수하를 데리고 군대에 들어간 지 8 여 년이 되는 동안, 나라를 위해 어떤 비책도 내지 못하며 공연히 나라의 녹만 축냈습니다. 이에 올해 봄 스스로 관직을 물러나 고향인 강도를 찾아 교육 사업에 종사하였습니다. 대개 나라의 은혜에 만분지 일이라도 보답하고저 하는 데에 뜻을 두었습니다. 아, 내가 돌아보니 역병의 폐해가 여기에까지 이르렀습니다. 만일 목을 바침으로써도 고칠 수가 없다면 능히 아프지 않겠습니까? 우국자들이 보기에 서세동점이 우려되고 황인종과 백인종의 경쟁이 두려워, 이웃 나라와 상호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면서 이웃 나라를 의지하였습니다. 심지어 더 나아가 (이들의 논리가) 약육강식의 논리가 되어 도리어 같은 인종간에 인간의 도리가 없어지게 되었습니다. 우의는 쇠하였으니, 어찌하리꼬. 더욱이 (을사)오적들이 내부에서 화를 일으켜 제멋대로 위협으로써 조약을 체결하였습니다. 이로써 우리의 권리는 박탈당하고 유언비어가 날조되어 우리의 존엄을 훼손할까 두렵습니다. 드디어는 삼천리 국토를 남에게 빼앗기고, 이천만 영혼이 남의 노예가 될까 두렵습니다. 이러한 까닭에 제공 각하들께서는 이구동성으로 울분을 내뱉으시어, 그 죄를 벌하시고, 그 조약을 물리소서. 아, 동휘(東暉)가 비록 지혜와 용맹이 부족하여 초야에 묻혀 산지 10여 년이 되었습니다. 지난 달 중순 화가 동쪽으로 왔다는 소식을 듣고 홀로 강을 건너 안위의 기회를 살피려 경성으로 들어왔을 때, 흉적의 무리들이 나라를 망치는 것을 두 귀로 듣고는, 돌연 차라리 어찌할 바를 모르겠더이다. 제 짧은 생각에 흉적의 무리들의 흉악한 음모가 단지 나라를 파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닌 듯 합니다. 진실로 그것이 적당한 때를 만난다면, 그 화가 어디까지 나아갈지는 더욱 알 수 없게 될 것입니다. 결단코 단칼에 이 목을 벰으로써 신인들의 분을 풀어주려 합니다. 동휘(東暉)의 뜻은 이와 같습니다. 제공 각하 더욱 분발하시고 서로 힘을 보태시사, 저를 도와 이 쓰러져가는 사직을 막으시고, 또 저를 도와 없어져가는 영혼을 살리소서. 그러신다면 대한민국과 동아시아에 행복과 평화가 임할 것입니다. |
5352 |
遺告諸法官書 |
아, 관리된 자로서 어떤 관리가 신중하지 않으리오만, 집법자(執法者)만한 이가 없고, 또 집법자로서 어느 때에 신중하지 않으리오만, 곤란과 위기의 때만한 때가 없습니다. 지금 나라와 임금의 치욕이 하루가 다르게 심해지고 있으며, 종묘와 사직의 무너짐과 영혼들의 멸망이 조석에 달려있습니다. 이것은 오로지 이웃한 적의 침략과 폭력 때문만은 아니며, 오히려 그 근본 원인은 난신적자(亂臣賊子)들이 나라 안에서 화를 일으켜, 예전에는 없었던 변고를 낸 까닭에 있습니다. 제공 각하께서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상례로 처리하시어, 결국 국법으로 그들을 다스리지 않으시니, 제공의 뜻이 과연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습니다. 이로써 보건대 국권의 쇠망과 임금의 법의 어그러짐이 반드시 난신적자들이 화를 자초한 것에만 있는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관리들이 직무를 게을리 한 까닭 때문은 아닐지요. 동휘(東暉)가 비록 그 직무를 게을리 한 자는 아니지만, 저 흉적이 한 짓을 생각할 때 모든 사람들이 그를 베고자 함이 마땅하니, 공평무사한 칼로써 그 머리를 베어, 위로는 그 죄를 풀고 아래로는 공분을 씻어야 할 것입니다. 저의 살신성인은 부득이할 따름입니다. 아, 법이 집행되지 않음은 사람이 그것을 행하지 않은 까닭이니, 오로지 제공 각하들이 정신을 갈고 닦음으로써 사람을 천하게 여기고 법만을 추앙하지 마소서. 마땅히 법으로써 그 사람을 달래고 바로잡아, 곧 이후로 사람 된 자가 그 흉적들을 본받지 말게 하소서. |
5353 |
遺告林日本公使書 |
이동휘(李東暉)가 피를 흘리는 심정으로 임(林) 공사 각하에게 글을 드림.제가 조심스럽게 살피건대 일본과 우리가 수교한 이래로 각하께서 이 나라에서 일을 하신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양국의 기쁨과 슬픔이 아직 조화롭지 못할 때 이를 돈독하게 하기에 힘쓰셨습니다. 동휘(東暉)가 비록 불민하지만, 공사의 공적을 치하합니다. 그러나 다만 (공사께서) 우리 한국을 열강의 사이에 끼여있어 스스로 자립하기 어려우니, 이웃 나라와 서로 긴밀히 협력을 유지해야 한다고, 또 얼마 전에는 (우리나라가) 청나라의 멸망을 의지처로 삼아야 하며, 노일 전쟁을 소위 발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하셨습니다. 또 우리 나라 온 국민이 일찍이 귀 정부의 사해평등의 정책을 바래야만 이 상황에서 큰 변고가 없다고 하셨습니다. 그런데 앞에서 말한 의지처라는 것은 때로는 침략의 정책이요, 앞에서 말한 사해 평등의 정책이란 약육강식의 자세와도 같습니다. 아마도 우리 한국이 바라는 바는 과도적인 것입니다. 이로부터 여론이 일변하여 우의는 점점 희박해졌습니다. 귀 공사 역시 다소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 최근 소위 신 조약이 체결되어, 과연 진실이 어디 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이른바 조약이라는 것은 이익의 교환과 의사의 자유를 기본으로 하는 것이며, 완화와 평등의 방식으로 체결해야 할 것입니다. 오늘의 소위 조약이라는 것이 과연 이러한 방식에서 나온 것일까요. 그날의 상황은 반드시 무효로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우리 군신 모두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미 이로부터 여론이 급변하여 우의는 더욱 희미해졌습니다. 귀 공사 역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또한 본 조정의 당국자 역시 (그 논리를) 암송할 뿐이어서 귀국의 그 실책을 보충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로부터 정신이 나가 결국 과연 나라를 그르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이에 나라의 적입니다. 나라는 하루 속이 이 사악한 것을 다스려야 합니다. 성상께서는 수교의 원칙에 혹이라도 손상이 갈까 차마 벌주지 못하고 있지만, 이로 인해 여론이 또 한번 국교의 단절을 원하고 있습니다. 귀 공사 역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동휘(東暉)는 본래 학문이 부족하여, 나라를 세우고 백성을 다스리는 데에 부족합니다. 다만 천성이 괄괄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일편단심으로 십 여 년간 초야에 묻혀 있었습니다. 만일 흉적을 단 몇 일 만이라도 더 살려둔다면, 우리 종묘사직의 전복뿐만이 아니라 그 해가 장차 동아시아의 정세에까지 미칠 것이니, 공평무사한 칼로써 그 목을 처단하시어, 불이 더 커져 공분에까지 미치기 전에 그 화를 제거하십시오. 귀 공사 역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아, 우리 한국이 극심히 피폐해진다면, 귀국의 계획 역시 차질을 빚을 것입니다. 우리가 귀국의 대 한국 정책을 묻는다면, 당신은 반드시 한국은 자력으로 설 수 없으며 자강으로 나아갈 수 없으니, 무릇 우리의 설계가 자위에서 나온 것으로 어쩔 수 없는 것이라 말할 것입니다. 혹은 정말로 그러할 지 모릅니다. 그러나 내가 보건대, 그 자위라는 것은 곧 우리 나라의 권리를 해치는 것입니다. 또 귀 공사가 일찍이 한국은 일본을 신뢰하지 않는다고 말한 바 있는데, 과연 진실로 그렇습니다. 어찌 국권을 상실한 이후로도 신뢰할 수 있겠습니까. 수년 이래 양국의 정서는 이미 갈등 상태에 이르렀으며, 밖으로는 비록 70% 정도는 수교에 찬성하지만, 실질적으로 약 30% 정도는 일본을 원수로 보고 있습니다. 아마도 소위 동양의 평화는 거의 이로부터 멸망에 이를 것입니다. (모두가 멸망하고 난 후) 누가 어부지리를 취할 지 아무도 모르니, 어찌 통한스럽지 않겠습니까? 아, 귀국은 동아시아의 선진국이니, 그대의 큰 책임을 살펴야 할 것입니다. 작은 것을 탐하다가 큰 것을 잃지 말 것이며, 자기의 이익만을 추구하고 남에게 해를 주지 말해야 할 것이며, 광명정대를 추구하는 의지로써 모두를 평등하게 대하여, 우리를 도와 우리를 유지시키고, 그 인도와 우의를 존중해야 할 것이며, 우리 둘 사이를 온전히 보존하는 대책을 세운다면, 천하가 모두 기뻐할 것입니다. |
5354 |
遺告長谷川日本大將書 |
이동휘(李東暉) 가 피를 흘리는 마음으로 하세가와(長谷川) 대장 각하에게 글을 남깁니다. 제가 보건대 만주가 망한 이래로 각하는 변방에 주둔한 지 이미 오래되었습니다. 무릇 국제적인 큰 일을 맡으시어 마땅히 일찍이 품으신 뜻을 어느 정도 이루신 것이 확실합니다. 이에 감히 고개를 들어 질문을 드립니다. 원컨대 각하께서 아량을 베푸소서. 우리 한국은 귀국과의 관계에 있어 기쁨과 슬픔이 서로 갈마드는 관계입니다. 그런데 (공께서) 청의 멸망과 러일전쟁을 우리나라의 발전의 기회로 삼아야 한다고 생각하시고, 온 나라가 귀 정부의 사해평등의 정책을 바란다면, 큰 정세의 변화는 오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앞에서 이른 서로 돕는 것은 침략의 책략이기도 하고, 앞에서 말한 사해평등이란 약육강식의 태도와 같은 것입니다. 아마도 우리 한국이 바랄 바는 과도적인 것일 뿐입니다. 이로부터 여론이 일변하여 나라가 점차 혼란스러워지고 있습니다. 각하 역시 어느 정도 이해하실 것입니다. 최근 이른바 신조약 운운하는 것은 과연 평화로운 의지에서 나온 것일까요? 고금에 어느 시대에 병사로써 위협하고 협박으로 체결한 조약이 있을까요. 그때의 행위는 마땅히 무효입니다. 그렇게 해야만 우리 군신 모두가 인정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로부터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습니다. 각하 역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다만 본 조정의 당국자가 귀국의 논리를 암송할 뿐, 그 실책을 교정할 수가 없으며, 저 밑으로부터 정신이 혼비백산하여 마침내는 나라를 그르치는 지경에 이르렀습니다. 이들은 곧 나라의 적입니다. 나라가 마땅히 속히 바름으로써 사악함에 벌을 주어야 하는데, 왕께서는 옛 정을 생각하시어 차마 벌을 주지 못하고 있습니다.이로부터 국교를 단절하라는 여론이 일고 있습니다. 각하 역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동휘(東暉)는 본래 배움이 짧아 대개 나라를 다스리고 백성을 구제하는 데에 있어 상당히 부족합니다. 다만 천성이 괄괄하고, 오직 애국하는 마음으로 10여 년간 초야에 묻혀 있었습니다. 다만 저 흉적들이 조금이라도 더 살려둔다면, 우리 종묘사직의 전복뿐만이 아니라 그 해가 장차 동아시아의 정세에까지 미칠 것이니, 공평무사한 칼로써 그 목을 처단하시어, 불이 더 커져 공분에까지 미치기 전에 그 화를 제거하십시오. 각하 역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아, 우리 한국의 피폐함이 극에 달한다면 귀국의 계획 역시 차질을 빚을 것입니다. 한번 귀국의 대 한국 정책을 묻는다면, 각하께서는 반드시 이것은 자위에서 나온 것으로 부득이한 것이었다 대답하실 것입니다. 혹은 진실로 그럴 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 자위라는 것은 곧 우리의 권리를 침해하는 것입니다. 귀 정부가 일찍이 한국은 일본에 대해 불신한다고 말한 적이 있는데, 확실히 그렇습니다. 어찌 국권을 강탈당한 이후 신뢰가 있을 수 있겠습니까? 한국이 비록 이미 국운이 쇠하였다고는 하지만, 4천 년을 이어오는 나라로서 이미 자치의 법도가 있으며, 백성 역시 정교의 가르침을 받아왔습니다. 신 역시 일찍이 순국의 뜻을 세웠습니다. 그대의 계책이 쉽게 진행되지는 않을 첫 번째 이유는 300년 이래 불행히도 서로 원수로 보아왔으며, 밖으로는 설핏 서로 잘 지내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서로 의혹을 품고 있습니다. 그대의 계책이 쉽게 진행되지 않을 두 번 째 이유는 그것이 열방의 관계 중심에 있어 장차 이해득실을 따져 오로지 한 나라로 귀속되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대의 계책이 쉽게 진행되지 않을 세 번 째 이유는 귀국의 대 한국 정책이 과연 매우 그릇된 것이며, 더욱이 수년 이래 양국의 정서가 갈등을 빚고 있어, 소위 동양의 평화가 장차 없어질 것입니다.결국 누가 어부지리를 취할 지 아직 알 수가 없으니, 어찌 통한스럽지 않겠습니까. 아, 귀국은 동아시아의 선진국입니다. 원컨대 그 책임의 막중함을 살피시어, 과연 어떻게 해야 작은 것을 탐내다 큰 것을 잃게 되지 않게,또 자기에게만 이롭고 남에게는 박하게 대하지 말게 하소서. 또 광명정대한 뜻으로 온 세상을 고루 살피시고, 우리를 도와 능히 인도를 베푸시어, 우의로써 우리 양회를 보존하는 계책을 세우신다면, 천하가 심히 기뻐할 것입니다. |
5355 |
遺告各公館使節書 |
이동휘(李東暉)가 피를 흘리는 마음으로 귀 공사 각하에게 글을 드립니다.제가 보건대 귀국과 우리 나라가 수교한 이래 각하는 이 땅에 오랫동안 재직하고 있었습니다. 무릇 양국의 이해관계를 타진하고 화해하고 타협하는 데에 힘쓰셨으며, 나날이 그 관계가 돈독해졌으니, 비록 동휘(東暉)가 불민하지만, 평소에도 그 고마움을 잊지 않고 있습니다. 귀공께서는 우리 나라가 망한 것이 이미 국운이 쇠한 때문이라 생각하시겠지만, 실제로는 이웃 나라로부터 침략을 당한 때문입니다. 이 역시 귀 공사께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불법적인 조약으로써 우리 정부의 군대가 위협을 받고 있고, 제멋대로 관공서를 주무르고 있으며, 그 구체적인 행태를 살펴보자면, 고금이래로 이러한 조약은 없었습니다. 이것은 우리 임금께서 허락한 바가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전 조정의 신하가 용인한 바도 아닙니다. 이것은 우리 전 국민이 허락한 바도 아닙니다. 귀 공사 역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진실로 난신적자(亂臣賊子)가 일어나 나라 안에서 내분을 일으켜 나라와 임금에게 치욕을 안겨주는 일이 나날이 심해지고 있습니다. 비록 국법으로써 그들을 다스리고자 하지만, 이웃 나라의 견제로 어찌 할 수가 없습니다. 동휘(東暉)가 종묘사직을 위해 단칼에 제 머리를 잘라, 위로는 우리의 죄과를 속죄하고, 아래로는 공분을 씻으려 합니다. 귀 공사 역시 느끼는 바가 있을 것입니다. 아, 동휘(東輝)는…(원본판독불가)… 귀 공사께서는 우리 한국이 무능하다 생각할 것이겠지만, 예전의 좋았던 때를 생각하시어 우리의 좋은 관계를 천하에 당당하게 공표함으로써 이웃의 강포함을 제압하여 주소서. 우리 얼마 안 남은 영혼을 살리시고, 우리의 쓰러져가는 종묘사직을 도우소서. 대한은 심히 좋을 것이며, 천하도 심히 좋을 것입니다. |
5356 |
"具春先에게(1920.11-李東輝|| 金立|| 桂奉瑀연명)" |
五族이 獨立을 宣布하고 따라서 血戰을 主張한 지 兩年되는 이때에 果然 準備한 것이 무엇이 있뇨. 만일 있다고 하면 비록 ●織的 具體的은 못되나 墾北各團의 實地武力을 合한 外에는 거의다 理想言論上으로 如此如此히 準備한다는 말뿐 그것 또한 事實과 境遇에 不可能한 까닭이 없지 아니하나 만일 이 貌樣으로 一日 二日에 그냥 遷延하게 되면 實로 寒心處가 ●은 아니오 또는 墾北各團의 現下準備한 그 武力만으로 吾人目的하는 바의 慾望을 滿足히 하였다 할 수 없음은 判然한 일이온지라 그렇고 獨立을 爲하여 獻身하는 누구나 다 吾儕의 同志가 아니리오 만은 더욱 國民會 同志에게 對한 吾儕의 ●는 良心이 自證하는 바이오. 따라서 國民會 同志도 亦是 그러할 줄 自信하는 바 온지라 그 까닭에 去四月一日 그곳 代表의 結果로서 四萬元 養武費를 劃定하고 兼하여 朱鎭逸(주진일)君 數人이 俄領(러시아령)派送되었다는 數處 通信을 得聞하옵고 무엇을 다는 것보다 더욱 欣賀를 마지 아니할 뿐 아니라 어디까지 後援됐냐고 하였더이다. 그런데 倭奴의 暴擧가 俄領(러시아령)에서 突을 因하여 勢不得己觀望中에 在할 듯 斟酌하는 바오나 失望할 것 없나이다. 東西各國의 聲援이 圓滿한 것은 더 말할 것● 우리 獨立에 對하여 처음부터 乃終까지 가장 密接關係된 레닌政府 그 政府에 이미 派遣한 朴鎭淳(박진순)君은 그 外交委員部●入하였고 그 다음 韓亨權(한형권)君도 不遠間 莫斯科(모스크바)에 到達할 듯 하오며 그 나마 上海 天津 等 各處에 來往한 重要人物 곧 俄國(러시아)●員과의 秘密約束도 이미 決定한 바가 有합니다. 그러면 한 갓 沿海州地帶가 完全하도록 拱手坐待함은 今日 韓人된 者●할 바 아니라 하나이다. 같은 時勢 같은 人力 같은 金力이 有할지라도 實際運動에 가장 敏活한 者 그가 畢竟 大成한다는 悟下에서 李鏞(이용)君을 今에 起送하오니 그 帶去한 十萬元 公債票를 貴會에서 領有하시고 旣往 士官養成費로 劃定하셨●貨四萬元을 李君에게 爲先 付與하시기를 切望하나이다. 李君의 口傳도 入聞하시면 詳悉하시러니와 이번 政府로서● 人物과의 直接約束이 有한 바에(이꾸스코) 以北 地方으로 根據地하고 첫째 士官 養成에 着手하는 同時에 飛行機 大武器를 可及的 準備할 것이며 兼하여 過激軍을 提携하여서 最後作戰할 計劃이오니 千載一時의 此機會를 勿失하도 ●速措處하소. 吾人 大事는 是一擧에 在하올시다.肅請僉位體候爲國萬安하시기를 |
5357 |
"이극로|| 『고투40년』(1946)" |
北京에 처져 있던 나는 行程의 方向을 水路 돌리려고 생각하던 즈음에 翌年 봄에 上海로부터 電報가 왔는데 李東輝(이동휘) 氏의 歐洲(유럽)行에 同行을 請한 것이다.이 電報를 받은 나는 곧 行裝을 收拾하여 가지고 上海로 내려가서 李東輝(이동휘) 氏를 만났다. 그런데 同行의 任務는 旅行中에 中國語의 通譯과 또 西洋語의 通譯이다. 우리가 旅行券 手續을 하여 가지고 佛蘭西(프랑스) 배를 타고 上海를 떠나던 때는 一九二一年 六月이다. 먼저 香港(홍콩)에 대이고, 그 다음에 安南(베트남) 西貢에 대이어서 하루 동안 쉬는데 市街와 附近地를 구경하고 떠나서 新加坡(싱가포르)로 가서 또 하루를 머물다가 떠나려 할 때에 日本 領事館 警官 한 사람과 英國 警官 두 사람이 배에 올라서 變姓名한 中國 旅行券을 가진 李東輝(이동휘) 氏와 朴鎭淳(박진순) 氏의 旅行券을 빼앗으려고 中國人 船客에 限하여 旅行券 調査를 하여 두 사람을 發見하였으나 남의 船客의 旅行券을 빼앗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艦長에게 交涉하는 여러가지 手續이 있으므로 時間이 없이 떠나게 된 배를 붙잡을 形便이 못 되어서 寃痛하다는 氣色을 하면서 그냥 내려 가게 되었다. 그래서 그 목은 無事히 지나갔다. 그러나 우리는 安心을 못하고 찌는 듯한 赤道線의 印度洋 사나운 風浪을 거슬러 印度 錫蘭島 콜럼보 港口에 대이었다. 이 港口에 대이기 서너 時間 前에 艦長의 말이 上海 佛蘭西(프랑스) 官廳에서 無線 電報가 왔는데 李東輝(이동휘)와 朴鎭淳(박진순) 두사람은 入國을 許하지 아니한다고 하였다. 그러니 만일 당신들이 콜럼보 港口의 英國 官廳에 가서 당신들이 旅行券에 英國 領地 通過 承認만 받아오면 우리 배로 포로사이트까지는 갈 수 있다고 하기에 우리는 곧 對策을 생각한 바, 英國 官廳에는 우리만 가는 것보다는 英國 사람을 데리고 가는 것이 나을 듯 해서 그 때에 배 가운데서 親해진 中國에서 二十餘 年을 예수敎 傳道를 하고 歸國하는 英國 宣敎師 한 사람을 데리고 콜럼보 英國 官廳에 가서 事情을 말하고 旅行券에 英國 領地 通過 承認 印章을 찍은 뒤에는 安心하고 市街로 돌아 다니면서 印度人의 生活 狀態를 살피는 가운데 有名한 佛敎 修道院을 구경하고 배로 돌아 와서 艦長에게 旅行券을 보이었더니 좋다고 하였다. 그래서 無事히 그 배로 포로사이트까지 가게 되는데 山峯같이 높이 밀려 오는 有名한 印度洋 여름철 風浪을 헤치고 여러 날만에 아프리카 港口로는 처음으로 지브롤타에 닿았다. 배가 하루 낮을 碇泊하는 동안을 利用하여 그립던 陸地에 내리어서 港口에 돌아다니면서 구경하는 가운데 더욱 재미있는 것은 土人의 書堂을 구경한 것이니 그들은 몸을 흔들면서 소리를 질러 글 읽는 꼴은 마치 우리 나라 私塾에서 漢文 읽는 꼴과 같았다. 그들은 읽은 글은 아라비아 文字다. 終日 여기 저기 돌아다니다가 夕陽에 배에 들어와서 조금 있으니 배는 지부티를 떠난다. 그래서 몇 時間 지내니 배는 벌써 紅海로 들어섰다. 찌는듯한 紅海의 더위를 무릅쓰고 數日 동안 가노라니 陸地가 가까워 오는데 船客들은 甲板 위에 올라 서서 멀리 아득하게 보이는 半空에 높이 솟은 예수敎 聖經에 이름난 시내 산을 바라본다. 그리고 한동안 가고 보니 때는 夕陽인데 수에즈港에 왔다. 여기에서 暫時 遲滯하고 떠나서 수에즈 運河에 들어서니 黃昏이 되었다. 그 이튿날 午前에 運河 出口 地中海에 있는 포로트사이트港에 배가 닿았다. 條件付로 오먼 李東輝(이동휘) 氏와 朴鎭淳(박진순) 氏는 여기에서 배를 내리지 아니할 수 없게 되었으므로 나도 또한 같이 내리었다. 우리는 서너 時間 동안 이 港口의 이모 저모를 구경한 뒤에 汽車로 埃及(이집트) 서울 카이로로 들어갔다. 여기에서 이틀 동안 머물면서 博物館과 回●敎 敎堂을 구경하고 그 附近에 있는 有名한 金字塔을 구경한 뒤에 많은 感懷를 가지고 이 都市를 떠나 알렉산드리아港으로 나가서 伊太利(이탈리아) 汽船을 타고 시칠리島의 港口 시라쿠사와 카타니아를 들러서 伊太利(이탈리아) 나폴리 港口에 닿았다.여기에서 이틀 동안 구경하고는 바로 그 나라 서울 로마로 들어가서 사흘 동안 머물면서 로마 劇場의 遺墟와 로마敎皇의 宮殿으로부터 西洋의 古今 文化를 살피어 보고 떠나서 지내는 걸음에 暫時 내리어서 歷史的 都市 밀라노를 구경하고 世界的 風景으로 有名한 알프스 高山을 넘어 瑞西(스위스) 서울 베른에 到着하여 하루 머문 뒤에 國際 會議가 자주 열리는 都市 제네바를 구경하고 獨逸 伯林(베를린)으로 直行하였다. 여기는 나의 最終 目的地라 行裝을 끌러 놓고 쉬게 되었다. 그러나 나의 旅行은 한동안 더 繼續하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은 同行 李東輝(이동휘) 氏의 最終 目的地가 蘇聯邦 서울 모스크바인 까닭이다. 그 때는 露西亞 革命(러시아 혁명) 뒤라 그 나라에 들어가기가 매우 어렵다 하기보다 特別한 關係가 아니면 入國을 시키지 아니하였다. 그래서 聯絡하는 동안 一個月을 伯林(베를린)에 머물게 되었다. 때는 늦은 가을이라 黃葉이 뚝뚝 떨어지는 九月에 伯林(베를린)을 떠나서 모스크바로 가게 되는데 獨逸 共產黨 領首도 當時에 國會 代儀士로 있던 피코 氏가 同行의 한 사람이 되어서 旅行中에는 많은 便宜를 얻게 되었다. 우리 一行은 獨逸 東海岸에 있는 스테린 港口에 가서 배를 타고 에스토니아 港 테발에 이르러 거기에서는 汽車로 露西亞(러시아) 舊王都 레닌그라드(샹트페테르부르크)에 가서 往時에 ●●한 國都가 이제는 革命의 洗禮를 받아 廢墟의 느낌을 주는 여러 가지를 두루 살피어 본 뒤에 떠나서 모스크바로 直行하였다. 그 때에 마침 좋은 同行을 만났는데 그는 前 朝鮮日報 主筆로 있던 故 徐椿(서춘) 氏이었다. 이 분과 함께 同行이 되어 國際호텔에 들게 되었다. 나는 여기에서 三個月 동안 머물면서 建設 中에 있는 새 國都의 이모 저모를 구경하게 되었는데 크렘린 宮殿과 共產大學과 機械工場 等을 구경하며 또는 때마침 十月 革命 記念日을 當하였는지라. 赤廣場에서 열린 赤軍의 觀兵式에서 軍務委員長 트로츠키 氏의 激勵하는 演說을 들을 때에 世界 革命을 부르짖는 赤軍의 氣象이야 말로 가을 바람과 같이 威風이 凜凜한 느낌을 주었다. 本來 約束하고 온 나는 이제 공부의 길을 찾아 지나가는 길에 라트비아 서울 리가에 내려서 구경하고 떠나서 리투아니아와 波蘭(폴란드)을 지나서 伯林(베를린)으로 돌아오니 때는 一千九百二十二年 一月이었다. 이극로, 『고투 40년』(1946) |
5358 |
"계봉우|| 「성재선생」|| 「꿈속의 꿈」|| 上卷(1944)" |
적으로 한 서북학회 지회가 조직된 것을 또한 말하지 않을 수 없으며, 그것보다도 서북학회의 파견을 받아 관북지방의 교육을 장려하던 성재 이동휘선생을 말하여야 되겠다. 영흥의 학교 수가 그렇게 갑자기 증가된 것은 다 그의 힘이었다. 당시 조선전국에 유행하는 말과 같이 그의 말 한마디에 학교 하나가 되어지고, 그의 눈물 한 고치에 학교 하나가 되어졌다. 현채의 동국사략을 보게 되면 『신사 이종호, 이동휘 등이 교육에 전력하여 경향 각처에 학교를 설하여 학생이 수만으로 된다.』는 그 속에 우리 영흥의 학생수도 들었을 것이다. 이제 성재선생의 말이 나왔으니, 그 경력을 간단히 말하고 싶다. 너이도 중령과 아령에서 한 이웃으로 여러 해를 함께 살았으니까 그의 면목은 잘 알거니와 그 경력이 어떠한 것은 똑똑히 모를 것이다. 그는 청년시대에 단천군 통인으로서 군수의 옳지 못한 행위에 격분하여 화로로써 군수를 쳤으니, 그 때의 그 취지로서는 비록 협기가 있는 남아라도 저마다 못할 일인데, 그에게는 그런 협기가 있었다. 그러나 그에게 붙잡히기만 하면 죽고 남지 못할 일이었다. 생각하면 도망하는 그 밖에는 다른 계책이 없었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 가서 단발하고 사관학교에 입학하게 된 원인이 거기에 있었다. 그 때의 형편에는 용감력이 있는 사람이라도 단발하는 그 일을 그리 쉽게 단행할 수 없는데, 그에게는 그런 용감력이 있었다. 그 학교를 졸업하고 원수부에서 근무하는 때, 진주진위대와 평양진위대의 검사관으로 가서 금전에도 흔들리지 않고, 세력에도 굴하지 않고 군대 안의 폐막을 발로 시킨 것은 그의 강직(强直)한 성격을 나타낸 것이다. 그러고 강화진위대의 참령으로 있다가 보호조약이 체결된 후에 즉시 그 직임을 버리고 강화에 모창학교를 설립한 그 날부터 교육계에 몸을 바쳤다. 진정한 애국성이 없었다면 그런 권위있는 직임을 버리고 교육가로 되기는 쉽지 못한 일인데, 그에게는 그런 애국성이 있었다. 나는 그로 말미암아 독립운동의 비밀단체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그로 더불어 중, 러 양수령으로 분주하면서 민족사업에도 고락을 함께 하였고, 공산주의 사업에도 고락을 함께 하였다. 그렇게 고락을 함께 한 지 근 삼십년이 되는 그 동안에 그의 열렬한 혁명성(革命性)은 언제든지 탄복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직업적 혁명자요, 진정한 혁명자이었다. 유감스럽게도 이제는 세상에서 다시 받아볼 길이 없게 된 것은 우리의 장래사업에 크게 불행한 일이다. 그러나 그의 이름은 영원히 살아 있을 것이다. 영흥에만 오십여 학교가 설립되었다는 것을 보면 조선전국의 학교총수는 많은 숫자를 차지하였을 것입니다. 화림이가 묻는다. 서북학회의 1910년 조사에 의지하면 조선전국의 사립학교수가 2722개소에 달하였다. 이 숫자는 보호조약이 체결된 그 후 네 해 동안에 이루어진 것이다. 그렇게 급속도로 학교가 증가된 것은 보호 계봉우, 「성재 선생」,『꿈속의 꿈』, 1944년, 上卷, 2면 |
5359 |
"「李國務總理의 略歷」|| 『獨立新聞』(1919.9.20)" |
先生은 咸鏡道 端川人이니 貧寒한 中에서 獨立의 努力으로 身을 起하여 五十餘 年의 奮鬪生活을 보내다 光武年間에 陸軍參領이 되어 江華鎭衛隊를 領할 제 兵士는 毋論하고 江華全局의 人民까지도 先生을 父兄과 같이 愛慕하다. 日俄戰役(러일전쟁)이 終하고 日本이 韓國을 倂合하려 하는 爪牙를 現할 세 先生은 憤然히 軍職을 退하여 遊說旅行을 始하다. 先生의 熱火같은 愛國誠과 滔滔한 雄辯은 듣는 者로 感奮興起케 하다. 愛國心 鼓吹와 敎育振興으로 己任을 作하니 先生의 手로 創立된 普昌學校가 九十餘요 百餘校의 長이 되었으며 先生의 薰陶下에 出한 志士愛國者의 數도 千으로써 計하리라. 敵의 가장 危險視하는 바되어 數次 鐵窓의 苦를 當하니 至今도 警務總監部의 倭警은 先生을 話題로 하다. 爾來로 先生은 시베리아에 在하여 人民의 團台과 愛國心 鼓吹와 敎育에 努力하니 先生의 跡이 過하는 곳에 반드시 人心의 大奮發이 隨하다.先生은 眞實한 耶穌敎(예수교) 信者로 몸이 淸敎徒的 敬虔한 生活을 하다. 容貌가 魁偉하고 眼光이 烔烔하여 人을 威壓하는威風이 있으면서도 與人 接語에 春風같은 和氣가 發하다. 그러나 한번 壇上에 올라 怒號할 때에는 千軍萬馬를 號令하는 氣槪가 有하다. 將次 先生의 興味많은 歷史를 詳述하려 하여 아직은 先生의 爲國自愛하심을 빌고 擱筆하노라.「李 國務總理의 略歷」, 『獨立新聞』, 1919년 9월 20일. |
5360 |
"「李東輝」|| 『在上海不逞鮮人에 관한 調書』(1919)" |
이(李)는 조선 사관학교 졸업 후, 소좌가 되어 참모본부에 근무한 후 군인을 그만두고 육영(育英)에 뜻을 두고 지금부터 약 20년 전 조선 전국을 거쳐 소, 중학교 360개를 건설하고 독립사상을 고취하였으며 교육자로서 그리고 애국자로서 명망이 높다.합병 때 노령(露領)으로 도망갔으며 노령(露領)은 그 고향 함경도와 인접하여 있으므로 약 40만의 다수의 함경도인이 있다. 노령 조선인의 신이라고 숭배를 받으며 학교를 세워 육영의 일에 종사하고 또한 금광산에 광부를 소개하여 생계를 잇게 하는 등의 일을 하였으며 그는 러시아어, 중국어를 조금 알고 있을 뿐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