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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普昌再昌」|| 『皇城新聞』(1908.2.22)" |
江華郡 普昌學校는 昨年 七月 該郡 ●擾 以後에 該 校長 李東輝(이동휘) 氏는 䵝味히 屢月 滯囚함으로 學徒는 多數 渙散하여 校況의 潤殘함을 人皆嗟惜하더니 數日前에 李東輝(이동휘) 氏가 來到하여 學徒의 父兄과 郡內 人士를 對하여 執手揮淚하고 懇惻勤勉하여 破殘●樣을 僅僅 修葺하고 渙散學徒를 稍稍募集하여 二月 十八日에 開學式을 設行하였는데 該 校長의 血誠을 人人 感激하여 內外國 紳士 百餘人이 齊會●勸勉하고 傍聽觀光者 千餘人이 澳發新想하여 其子其弟를 入校受業케 하는 者가 比前尤多하고 本郡守 高靑龍(고청룡) 氏가 極力贊成하여 該校의 中興 狀態와 前進實力은 指日可期라 하더라.『皇城新聞』, 1908년 2월 22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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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沛東野人|| 「送李東輝先生之北」|| 『西北學會月報』(1909.10.1)" |
…(원본판독불가)… 선생은 가히 시작을 하면 끝을 보는 사람이라 할 수 있으며, 본국 10수년 이래, 조국의 많은 어려움에 탄식하고 나라 일이 나날이 심각해짐에 분개하였다. 오랜 군대는 눈물로 분투하여 국권을 회복하고 백성의 지혜를 개발하려 하였으나, 임무를 다한 사람이 몇이나 되겠는가. 우리는 그 수를 알지 못하지만, 혹여 지사로 자처하는 자가 있다 해도 몇이나 되겠는가. 하루 이틀 뜻을 품거나, 한, 두 달 뜻을 품거나, 1, 2년 뜻을 품는 사람은 있어도, 10년 동안 뜻을 품는 자는 아마 적을 것이다. 또한 조정은 정치, 책은 교육, ●은 실업을 따라가니 아마 이런 것을 구하는 지사는 많을 것이다. 선생은 일찍이 문명을 각성하여 국가를 중흥시키고 진실로 교육의 주장과 창도를 소홀히 하지 않으니 이미 앞서간 사람이요,그 진실한 언어는 사람을 감동시키며 그 비분 용감한 기세는 사람의 냉혈을 부추긴다. 이로써 각 지역 간을 개방하여 민족의지를 지속하게 함은 선생의 노력이고, 경시청에서 육체의 희생을 감당함은 선생의 생활이다. 백절불굴(百折不屈)하고 만좌불요(萬挫不僥)하니, 앉으나 서나 교육에만 정진하고 그 행적에 담소가 떠나질 않았다. 교육을 부르짖음에 흘린 한번의 눈물이 하나의 학교를 성립하고, 한번의 연설이 한 사회를 설립하니, 만일 선생이 천백 번 울고 천백 번 연설하면 후에 천백의 학교와 사회가 성립되는 것이니, 그 날이 오기만을 기대할 따름이다. 선생의 행적을 말하자면, 부모처자와 만나는 기쁨은 인정의 일상 욕구임에도 선생은 10수년간 조국을 비관하여 이런 기쁨도 누리지 못하고, 바람 속에 노숙하며 홀로 쓸쓸히 분주하면서도 고생을 고생으로 여기지 않고 비애를 비애로 여기지 않았다. 다카야마 마사시바(高山正芝)의 통곡도 선생의 선의의 눈물에 못 미치며, 마틴 루터(馬丁路得)의 인내도 선생의 선한 인내에 못 미친다. 애국을 울부짖는 이런 선생과 같은 자들이 국가에 기여한 높은 업적은 날이 갈수록 얼마나 깊은가. 영웅 중에 이름을 날린 영웅이 없으니 우리는 아직 그 성공을 볼 수 없다. 다카야마 마사시바(高山正芝)의 이름은 일본을 유신하여 그 국민이 일심 단결하게 하였고, 마틴 루터(馬丁路得)의 이름은 서구를 몰아내고 자유를 보호하며 그 동포를 종교의 힘으로 단합하였는데, 지금 우리나라는 자립 할 수 없다. 나와 같은 동포는 스스로 분발 할 수 없어 선생이 주야로 슬피 울고 몸 둘 곳도 없으니 슬프기 그지 없다. 현재 우리 서북은 오랜 침울 상태에 빠져있어 선생의 울음 소리를 듣고도 무슨 소리인지 모르고, 선생의 강연을 듣고도 또 어떤 말인지 모른다. 작년부터 북방 인사들 몇 명이 선생의 눈물의 의미를 각성하고 우둔함과 냉혈을 깨닫기 시작하였으나, 현재 또 은거하고 잠을 자려함에 선생은 다시 근심이 생긴 셈이다. 선생의 분투를 말하자면, 이번 달에 각각의 방면에서 착수된 지사의 의무가 더디기도, 급한 듯도 하니 한번에 책동하는 것이 상책이다. 현재 도산(島山) 선생이 서쪽에 있으니, 서쪽은 근심이 없어서 선생은 부득불 북쪽으로 가서 동포들과 뜻을 같이하려 한다. 따라서 그 힘든 상황 속에서도 참음과 성실함은 전국 최고이다. 각성은 사람의 뒤에 있기 힘들어서 시종일관 지켜도 사람 뒤에 있지 않으니, 인내하고자 하면 필히 그 선생의 인내를 존경하고 사랑하여야 하며, 성실하고자 하면 선생의 성실을 받아들여야 한다. 선생이 북으로 간 날 당시 바람이 세차게 불어 선생의 갈 길을 재촉하니, 나는 선생과의 이별에 너무나 낙심하여 참기 어려웠다. 선생은 먼 곳으로 떠나셨지만 나는 그 가르침을 받들 것이다. 나는 언젠가 친구의 권유로 술을 마셔 취한 상태였는데, 선생의 논리적인 말 한마디 한마디에 절절히 감탄한 적이 있다. 만약 선생이 없으면 누가 이런 권고를 주겠는가. 비록 선생은 천리 밖에 있어서 만날 수 없지만 나는 꼭 인재가 되어 다시 선생의 행적을 기술하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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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崔麟|| 「凜凜丈夫의 李東輝氏」|| 『開闢』(1925.8)" |
海外에 나아가 있는 나의 親舊로 말씀하면 毋論 여러분 됩니다. 安昌浩(안창호) 氏라든지 柳東說(유동설) 氏라든지 盧伯麟(노백린) 氏라든지 其他 여러분 계십니다. 헤어진 지 各各 十餘星霜에 人便 或은 書信으로 安否는 間或 들었으나 近日은 어떻게들 지내시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무론 내 말씀이지 李東輝(이동휘) 氏로부터는 昨年 봄에 片紙가 왔습니다.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서) 다른 말은 없고 簡單한 問安片紙인데 그 끝 句節에 이런 말이 쓰여 있습디다. 「海外에 漂流한 지 十餘 星霜에 所事란 하나도 이룬 바 없고 다만 白髮이 零星함을 볼 뿐이니 부끄러울 뿐입니다.」라구요. 이것을 볼 때에 나의 마음에도 異常한 感懷가 일어 남을 禁치 못했습니다. 李東輝(이동휘) 氏로 말씀하면 아시는 바와 같이 本來 端川 出生으로 少年에는 苟且한 生活을 한가 봅디다. 中間 일은 仔細히 記憶하지 못하겠습니다. 그가 京城에 올라와 가지고 軍隊에 入籍을 하여 軍人生活을 할 때에도 나는 顏面이 없었습니다. 그가 參領이 되어 朝鮮 軍人界에 其名이 赫赫할 때는 나는 日本 留學中에 있으면서 그가 如何한 人物임을 들어 알았습니다. 그 亦 나를 모르는 中에 알고 지냈다고 합니다. 이때로부터 내가 歸國하기까지 三, 四年間은 靈的으로 서로 사귈 뿐이요 顏面은 없었습니다. 只今 사람들은 그렇지 못한 感이 있는 듯 합디다만은 그 때의 우리 사이는 義理를 퍽도 尊重했었습니다. 顏面有無는 不拘하고 그가 如何한 人物임을 間接으로 라도 안 以上은 靈的으로 서로 思慕하고 서로 尊敬하여 信義가 여간이 아니었습니다. 내가 그를 對面하기는 卒業을 하고 歸國하던 그 때였습니다. (隆熙 三年) 나를 곧 찾아 왔습디다. 一面 如舊로 當場에 肝膽을 吐하고 將來를 시로 期約했습니다. 그 後 그는 保安法違反이란 嫌疑로 舞衣島(江華 附近)로 流配를 갔었습니다. 얼마만에 舞衣島로부터 解放이 되어 京城에 다시 왔다가 約 十餘年 前에 海外로 떠나갔습니다. 떠나던 그 前날 어떤 劇場에서 서로 만나 作別의 感懷를 이야기했습니다. 그 때 그는 나에게 同行을 말했습니다. 그러나 그 때 나의 事情은 同行을 못하게 되었습니다. 後期를 두고 最後의 作別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이 벌써 十餘 星霜인데 그의 말과 같이 白髮을 서로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는 果然 凜凜한 丈夫之風이었습니다. 體格과 얼굴이 어울려 훌륭한 丈夫입니다. 키는 中키요 얼굴은 길쑥하고 耳目 매우 淸秀합니다. 性格으로 말하면 아주 熱烈합니다. 불덩이 같은 사람입니다. 그러나 宗敎家的 慈悲之風도 있습니다. 近日은 모르지만 그 때의 그는 耶蘇篤信者였습니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世上을 「浮世」라고 말하는 적도 있었습니다. 나의 知友 中에 玄端川(현단천)(承奎)이라는 이가 別世를 했을 때 그의 葬列에 參禮했던 나는 東大門 밖에서 慰●式이 있을 때 그의 靈下에 哭을 했습니다. 이를 본 李氏는 나에게 「무엇 그런 것 있소. 浮世를 가지고……」하고 죽은 사람 또는 죽은 이를 哭하는 사람에게 一種의 冷突을 던지고 말았습니다. 그는 如何間 나 아는 친구 中에는 氣骨로나 性格으로나 가장 丈夫之風이 있는 好個男兒입니다. 海外 漂流 十餘 星霜에 事無所成하고 只以白髮零星의 句를 볼 때 그와 사귀던 過去가 생각 나고 將來가 더욱 그리워집니다. 그의 年齡은 지금 쉰여섯인가 일곱인가 되지요. (談)『開闢』, 1925년 8월호, pp. 10-12.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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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東鎭|| 「李東輝의 靑年時代」|| 『三千里』(1930.7)" |
李東輝(이동휘) 君의 靑年時代를 記錄하자면 나보다 더 잘 아는 분이 많을 것이다. 나는 그와 어릴 때부터 벼루를 같이 한 同門修學의 벗도 아니고 또 長하여 같은 軍門에 劍戟의 벗을 지은 사이도 아니었었다. 다만 안다면 그는 氣慨와 才略의 人이라. 여러 번 자리를 함께하여 公事를 與議하였고 그는 氣力이 絶倫하고 風采 - 俊豪한지라. 사내답고 그 시원한 快男子임에 대단히 好印象을 받았을 뿐이다. 그러기에 그의 性格을 안다 하되 徹底치 못할 것이요. 그의 智量을 窺한다 하되 皮相的일 것이나 簡略하게라도 이제 二十年 前의 그의 風수를 眼前에 그려 보면서 그의 靑年時代를 두어 마디 적어 보려 한다. 내가 듣기에는 그는 咸鏡道 端川人이라 한다. 家庭으로 富裕한 집이나 或은 權門勢家가 아니었던 모양으로 어릴 때부터 衙門에 出仕하는 아전의 아들로 그 아버지는 그를 장차 아전을 만들고자 「官奴의 道」라할 온갖 禮儀와 漢學 等을 배워 주었는데 이것이 熟習이 되면 吏房이 되는 것이다. 「吏房」이라 하면 지금 時代 靑年들은 그 말을 잘 알아 듣지 못할 듯 하나 그 때 政府가 六曹로 組織되었었는데 그 중에 吏曹衙門이란 것이 있고 그 吏曹에는 吏曹判書가 있어서 마치 只今의 內務大臣格에 該當하는 일을 하는 官職이었다. 그런데 地方에도 中央政府와 꼭 같은 組織으로 되어서 端川에는 府使 아래 吏曹라는 마치 只今의 內務部長格 官吏가 있어 國家에 上納하는 稅金이라든지 穀倉의 管理 등을 도맡아 하였었다. 李東輝(이동휘) 君의 嚴親이 그를 이 吏房을 시킬 作定으로 敎育시켰다 하는데 그런 까닭으로 그는 콧물 흘리는 어릴 때부터 必然 官衛에 나가 官人의 심부름 등을 하며 지내었으리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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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洪陽明|| 「李東輝의 印象」|| 『三千里』(1931.6)" |
一九二二年 十月 末日까지를 期日로 하여 체코軍을 돕는다는 口實로 西伯利亞(시베리아)에 共同出兵한 諸國中의 最後까지의 殘留軍이었던 日本軍도 完全히 極東 露西亞(러시아)에서 그 그림자가 사라지고 멜크로프의 白色政府와 까베리軍도 남김없이 國境外로 驅逐된 後 極東은 赤色의 津浪이 澎湃하게 모든 社會面을 덮게 되었다. 新建設을 爲한 諸般의 努力이 가장 慌急하게 進行됨에 따라 極東은 俄然活氣를 띠기 始作하였다. 이 赤白政權의 交替와의 歷史的 轉變 中에서 또한 XX人의 活動의 一面이 展開되기 始作하였나니 XX人의 海外活動의 中心은 어느덧 極東 露西亞(러시아)의 中心都市인 V[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로 옮긴 듯 하였다. 上海로부터 歐露로부터 滿洲로부터 여러 사람이 續續 集中하기 시작하였다. 이 歷史的 畫幅 속에서 나는 特히 李東輝(이동휘) 氏를 提示하여 본다. 李東輝(이동휘)! (以下 五行削) 當市 V市에서의 一個 샐러리맨에 不過한 生活을 하고 있었음에 不拘하고 나는 種種의 理由와 種種의 機會에서 이들과 接觸할 機會를 가지고 있었던 것은 가장 滿足한 回顧 中의 하나이다. 回顧컨대 一九二三年 初 겨울의 어느 날 밤, 그것은 十一月과 十二月間의 맵자게 찬 어느 날이었다. 初저녁에 宿舍에서 來日의 『타스크』를 準備하고 있노라니까 禹錫(이우석) 君[李東輝(이동휘) 氏 아들로 서울서 九年前까지 儆新學校에 다니다가 上海, 滿洲 等地로 아버지와 같이 轉轉하다가 只今 莫斯科(모스크바)의 아라파크에 在學中]이 아버지가 좀 오라는 命令을 가지고 왔다. 그날 밤의 用務는 亡命中의 XX同志를 訪問하는데 인터프리터의 役割을 負擔해 달라는 것이었다. 當時에는 上海에서 開催된 (略) 會議의 直後로서 (中略) 의 海外 派閥間의 軋轢이 尖銳化 하였던 터이므로 外國同志의 訪問에도 彼此 策略的이라는 誤解를 避하기 爲하여 各派 相互警戒하는 形便인 듯 하였다. 그리하여 當時 白紙의 白面書生인 나를 適任者로 擇한 모양이었다. 이리하여 李東輝(이동휘) 氏와 나는 『쑤베르스까바지』에서 이시보시[露西亞(러시아)馬車]를 달려 께, 뻬, 우 (國家保安部) 건너짝 이따이스까야, 울니채(中國人街)에서 있는 三層洋屋)앞에 車를 멈추었다. 門을 여니 廊下에는 執銑한 軍人들이 파수를 보고 있다. 宏壯한 保護이다. 만날 約束이 있었으므로 韃靻人系인 듯한 赤面逢髮의 빠바리시는 벌써 알아채고 말도 하지 아니하고 안으로 들어 가더니 「야뽄스키-」를 끌고 나온다. 服裝으로 보든지 風貌로 보든지 그야말로 말숙한 靑年紳士였다. 彼此 누구인 것을 通한 後에 房으로 들어가 앉으니 야뽄스키는 三人이다. K와 S라는 最近 아메리카서 왔다는 親舊와 D이다. 이들은 그 後에 알고 본즉 모두다 (略) 에 있어 內地派와 對立的 關係를 가진 桑港(샌프란시스코) (略) 系로써 所謂 (略) 人物들이었다. (略) 初期의 國際的 連絡이 이 그룹을 通하여 된 만큼 當時 이들은 相當히 重要한 責任을 가지고 있는 모양으로서 그 室內는 마치 큰 秘密을 包藏한 설탄의 密室과 같은 空氣가 떠돌았다. 타임 부라이터로 씌운 프르또골 等이 無數히 机上에 陳列되어 있었다. 나는 이곳에서 이들의 人間으로서의 風貌를 散文的 視角으로 比較하여 보았다. 日常의 李東輝(이동휘) 氏 보다 이날 밤의 老다바라리쉬 李의 눈에는 興奮된 氣色과 緊張한 빛이 얼굴에 떠돌았다. 獅子의 수염과 같은 威嚴있는 수염, 數十年間의 海外……生活에서 印찍힌 無數한 受○의 자체가 雄渾한 老 - 家의 얼굴에 多少 남아 있다할 지라도 千軍萬馬를 怒號할 듯한 氣宇와 威嚴은 조금도 消失된 흔적이 없다. 그 堂堂한 體軀, 그 바리톤 調의 振動的인 豊富한 音調, 炯炯하고 壓力的의 눈, 어디로든지 堂堂한 巨人이다. 政治家로서의 修件에 이러한 品貌가 重要한 것이라 하면 나의 본 中의 諸國의 政治家 中에서 이이는 두말 없이 第一流의 一流다. 이는 이이를 만난 이로는 누구나 大槪 肯定하고 마는 것이다. K, D, S의 야뽄스키따바라쉬는 아메리카 出身들인만큼 同志란 感은 생기지 않고 會話의 樣式 等이 純外交家的인 感이 생기고 어쩐지 양키臭가 났다. 鬪爭의 第一線에선 階級X士라는 感보다도 뿌로드외이街의 산데리아 밑에서 인베스트를 企圖하는 株式相場師와 같은 感이 생기었다. 事實上 이 豫感은 只今에 와서 正鵠을 얻었나니 國際運動의 初期에 運動의 斡旋者로 「콤」의 舞臺에 重大한 任務를 띠고 活躍했다는 이들은 오늘 完全히 脫落되어 S는 모르지만 D는 제 나라에 돌아온 後 露西亞(러시아)서 찬란히 놀던 ●談的 이야깃거리나 쓰고 大衆黨系와 野合하고 있다는 것을 最近에 나는 알고 있다. 數年前 東京서 D를 만난 때 D는 鎌倉서 「카페」를 經營한다고 말했다. 會話는 여러 가지 復雜한 問題로 展開했지만 그 關係가 錯雜하여 白紺甘面의 十九歲의 少年의 알 바가 아니었다. 要領을 會得치 못하고 器械的으로 通譯한 만큼 李氏는 대강 알아 듣기는 하므로 나의 通譯이 不充分하다는 苦情은 뜸뜸히 말했다. 後에 閑談이 始作되었다. 話題가 亡命 脫走 等에 들자 S는 美國서 파스포드-야마시한 이야기에 꽃을 피우고 李氏는 歐露로 갈 때 싱가폴에서 英國官憲에게 一時 逮捕되었던 이야기, 獨逸에서 말을 몰라 狼狽하던 始末 蒙古 沙漠을 橫斷하던 때의 蒙古女子의 親切한 이야기 等에 이르렀다. 이리하여 極東의 밤은 점점 깊어 간다. 時計가 새로 한시를 칠 때 우리는 再會를 約束하고 이 집을 떠났다. 거리는 蒼白한 졸음과 죽음 같은 沈默 속에서 하얀 눈이 펄펄 내리고 있었다. 무서운 名物인 西伯利亞(시베리아)의 吹雪의 前兆이다. 十二月의 初이지만 지독한 추위이다.「이시보시! 이시보시!」 우렁찬 목소리로 巨人은 외쳤다. (第三十七頁에) (第二十一頁에서) 오직 街路의 反響이 있을 뿐이다. 우리는 이리하여 할 수 없이 外套를 귀 밑까지 둘러 쓰고 털모자를 푹 눌러쓰고 걸어 나갔다. 이 때의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의 거리는 政變後 整頓이 덜 된 만큼 돈이 必要한 피스톨 紳士의 街路의 活劇이 뜸뜸히 演出되는 때이었다. 老 다와리쉬 李의 포켓에는 뿌라우닝 六號가 그 커다란 손에 든든히 쥐여 있었다. 時間은 흐르고 흘러 이 記憶은 老李의 머리에서 사라졌다 할지라도 萬一 이글을 볼 機會가 있다 하면 그는 반드시 그 偉容으로써 莞雨한 微笑를 禁치 못할 것이다. (中絡) 極東에서 오래 있던 나는 그 後 歐露 旅行時에 (以下 全部 略)『三千里』, 1931년 6월호 |
5396 |
"權東鎭|| 「誠齋! 그대난 갓는가」|| 『三千里』(1935.3)" |
1, 誠齋 그대는 참으로 갔는가 權東鎭(권동진) 2, 誠齋 李東輝(이동휘) 追憶 元世勳(원세훈) 3, 시베리아의 一夜 洪陽明(홍양명) |
5397 |
"元世勳|| 「誠齋 李東輝의 追憶」|| 『三千里』(1935.3)" |
誠齋의 心境을 推想하여 볼 때 그만 精神이 아득하여 지고 눈이 깜깜하여 지나이다. 이제 確實히 죽어 버린 誠齋를 찾아서 무슨 소용이 있으련마는 誠齋라는 이름 誠齋의 모든 過去를 走馬燈같이 돌려가며 回顧하여 보게 되나이다. (此間畧) 머나먼 거리의 이땅에 앉아서 죽어가는 誠齋의 무덤에 흙 한줌 나의 으로 못 얹어 주고 誠齋의 무덤 앞에 술 한잔 못 따라 놓음이 더욱 딱하여 지나이다. 어찌 誠齋의 죽음에 對한 哀痛한 생각이야 끝이 있겠소이까 마는 이에 그치겠나이다. |
5398 |
"「新內閣成立」(李東輝 國務總理)|| 『獨立新聞』(1919.9.16)" |
十一日에 議政院議長은 李承晩(이승만) 博士의 臨時大統領 當選을 公佈하고 同日 臨時大統領은 如左히 國務員을 任命하다.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內務總長 李東寧(이동녕) 外務總長 朴容萬(박용만) 軍務總長 盧伯麟(노백린) 財務總長 李始榮(이시영) 法務總長 申奎植(신규식) 學務總長 金奎植(김규식) 交通總長 文昌範(문창범) 勞動局總辦 安昌浩(안창호)『獨立新聞』, 1919년 9월 16일. |
5399 |
"「新國務總理 來호」|| 『獨立新聞』(1919.9.20)" |
今次 改造內閣에 國務總理로 된 前 軍務總長 李東輝(이동휘) 氏는 臨時政府 特使 玄楯(현순) 氏 及 金南兩(김남량) 氏와 함께 시베리아로부터 再昨日 無事히 上海에 到着하다. 本社는 二千萬 同포로 더불어 國民의 信望을 一身에 負하고 光復의 大任의 首途에 登하신 我 李 國務總理의 健康을 祝하노라.『獨立新聞』, 1919년 9월 20일. |
5400 |
"「李國務總理를 歡迎함」|| 『獨立新聞』(1919.9.23)" |
改造된 新內閣의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先生이 水陸萬里에 安隱히 來着하심을 다시 祝賀하노라. 四月 十一日 大韓民國 臨時政府가 成立됨으로부터 國務總理 李承晩(이승만) 博士는 美京에 內務總長 安昌浩(안창호) 氏를 桑港(샌프란시스코)에 外務總長 金奎植(김규식) 氏는 巴黎에 在하고 當時 軍務總長이던 李東輝(이동휘) 氏와 交通總長 文昌範(문창범) 及 財務總長 崔在亨(최재형) 兩氏는 西伯利亞(시베리아)에 在하여 臨時政府所의 在地인 上海에는 겨우 法務總長 李始榮(이시영) 氏가 在할 뿐이라가 安內務總長이 上海에 到着하기 數日前에 李法務總長은 上海를 去하고 安內務總長은 如前히 單身으로 國務總理代理의 職을 帶하고 各部 次長으로 더불어 萬機를 總攬하더니 安氏는 國民統一의 第 一策으로 第三議會에 內閣改造案을 提出하여 快히 從來의 內閣을 犧牲하고 四月 十六日 漢城國民大會 發布의 政府대로 改造함에 成功하여 李承晩(이승만) 博士는 이미 臨時大統의 職에 就하였고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氏도 또한 西伯利亞(시베리아)로부터 來하여 日內에 國務總理의 職에 就할지요. 또 李 國務總理를 隨하여 申 法務, 文 交通 兩 總長도 不日에 就任하리라 하며 其他 李 內務, 朴 外務, 盧 軍務 等 諸 總長도 從速히 就任할 確實한 希望이 있다 하니 그리되면 我國民의 指導者는 數週前 安昌浩(안창호) 氏의 談과 같이 不遠에 一堂에 聚하게 될지요. 따라서 內外各地의 全國民의 民心도 一齊히 我臨時政府로 集中되고 統一되어 擧國一致完全統一의 名과 實이 相副할지라. 大統一의 第一步로 보아 李 總理를 歡迎함이 其一이오, 從此로 臨時政府는 內와 外에 對하여 不眼不休로 心誠과 精力을 傾盡하는 大活動을 開始하여야 할 危機를 當하여 事實上으로 大統領을 代理하여 全國家를 代表하고 統率할 國務總理가 前途의 艱難을 不快辭하고 敢然히 然히 身을 挺하여 難局의 大任을 擔하려 하니 이 李 總理를 歡迎하는 理由의 二요, 最終에 以上의 두가지 理由보다 더 重要한 一理由는 李 總理의 政治的 手腕도 아니요 喧傳하는 名譽도 아니요 오직 그의 人格이라 我國民은 永遠히 다시 舊韓國에 있던 바와 같은 腐敗한 官僚의 政府를 戴치 아니할지니 彼等 腐敗한 貴族들은 專制君主의 袞龍布 中에 隱하여 亡國의 惡政을 施함으로써 다만 國家만 亡케 할 뿐아니요 日本에게 韓族의 獨立自治의 能力이 無하다는 讒誣의 口實을 주게 되었도다. 그러하거늘 建國初의 李 國務總理 東輝 氏는 元來 平民의 出로 獨立奮鬪한 者의 典型일 뿐더러 그의 淸敎徒的 淸純高潔한 人格, 그의 熱火같은 愛國心, 그의 富貴도 淫치 못하고 威武도 屈치 못할 松竹같은 節槪, 그의 愛人下士하는 天來의 謙遜의 德, 그의 時와 處를 不關하고 恆當 祖國과 同胞를 爲하여 息함 없이 活動하는 忠誠 그외 農夫와 같이 ●樸하되 王候와 같이 軒昻한 氣宇한번 志를 決하며 水火를 不關하고 한번 武義라 斷하매 生命을 鴻●같이 여기는 勇氣는 足히 새로 國民生活에 人하려 하는 大韓民族의 指導者되기에 마땅할지라. 此를 讚辭로 알지 말지어다. 氏를 오래 接한 者면 누구나 此를 解得할지니 그는 家도 없고 妻子도 모르고 二十年 來의 生涯가 오직 하나님과 祖國을 爲한 것 뿐이라. 그의 半白의 鬚髯과 漸漸 늙어 가는 얼굴의 주름이 何로 中함이뇨, 名譽를 爲함이뇨, 財產을 爲함이뇨, 家庭의 樂를 爲함이뇨.東西로 漂流하며 天涯萬里에 외로운 客을 作하여 思함도 國, 行함도 國, 歌도 國, 哭함도 國이라. 二千萬아 우리 眞正한 國土의 앞에 허리를 굽힐지어다. 그로 더불어 그의 命令을 縱하여 苦커나 樂커나 生커나 死커나 光復의 大事業을 成할지어다.『獨立新聞』, 1919년 9월 23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