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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보도(러시아 연해주) 1 |
논설(論說)正義團의 須知分(스티븐스) 砲殺追報정의단의 수지분(스티븐스) 포살추보 미국 상항(샌프란시스코)에 거류하는 한국 동포 중에 정의단이라 하는 단체가 있어 합이 칠백여 명, 언제 일전 그곳에 전 외부고문 수지분(스티븐스) 씨를 저격(狙擊)하여 치폐(致斃)한 사는 작일 본보에 대강 기재하였거니와 그 정보를 추문하건대 좌와 같으니 거월 二十二일 오후 八시 반에 정의단 대표자 五명이 수지분(스티븐스) 씨 여관을 찾아와서 질문하기를 그대가 한국정부의 고문이 되어 한국의 봉급을 받고 한국은 위하지 않고 도리어 오조약(을사늑약, 1910)을 체결하여 한국 외교권을 일본에 넘기고 한국을 일본 속국으로 만들게 열심하였으니 그 주의를 알고자 하노라 하고, 신문에 기록한 말로 씨 입장 변론하다가 앉았던 교의(交椅)를 들어 수지분(스티븐스)을 향하여 치고 돌아갔는데 수(스티븐스) 씨는 그곳에서 기색이 좋지 못함을 보고 그 익일 아침에 일본 총영사 소지(小池) 씨와 함께 (오클랜드) 도선정류장에 이르러 대륙철도 정거장에서 워싱턴으로 향하려 화차를 기다릴 차에 별안간 한인 个三인이 돌출하여 육혈포를 놓아서 다섯 번을 연발하매 수(스티븐스) 씨의 우편 어깨와 볼기살을 맞혔는데 즉시 병원으로 실어가고 한인은 미국순사에게 三명이 피착된지라. 그 하수한 자는 곧 서울사람 조신동·현명운 양씨인데 二十五일 十一시에 수(스티븐스) 씨는 영히 죽고 조·현(조신동·현명운) 양인은 동지 검사에게 모살한 정절을 기소하였는데, 옥중에서 수(스티븐스) 씨의 죽었다는 말을 듣고 조·현(조신동·현명운) 양씨가 크게 기뻐하여 왈 매국적을 죽였으니 우리는 죽어도 한이 없다 한다고 각 신문에 게재되었더라. 대저 수(스티븐스) 씨는 어떠한 자인고 하면 원래 미국 인종으로 일본에 와서 입적하여 수십여 년 벼슬하던 자인데 광무 구년 二월에 경성에 이르러 동월 二十七일에 외부 고문으로 합동조약 八조를 체결하였는데 동씨의 봉금은 매삭 금화 八백원이오, 관사료가 매삭 一백원이오, 선거비가 三백원이니, 이같이 거액의 봉금을 허비하고 외부에서 하는 사무는 무엇인고 하면 한국 외교권을 박삭(剝削)하여 일본에 옮겨주는 목적뿐이라. 이러함으로 당시 각 신문 상에 비평이 헌자하였거니와 오조약(을사늑약, 19010)을 체결할 시에 씨가 극력 운동한 형적이 발로되고 또한 구미 각국 보관에 편지하여 오조약(을사늑약, 19010)을 체결할 시에 한황폐하 이하로 일반 국민이 다 일치 환영하였다는 말을 꾸며 기재하여 우리나라 군민을 무함(誣陷)한 정절이 세계에 전파하였음으로 한국 인민이 수(스티븐스) 씨를 가장 통분히 여기는 원인이라. 이제 또 들으니 수(스티븐스) 씨가 거 二十일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도착한 후 한국인을 대하여 일본을 변호하는 말로 보호를 받는 것이 가하다고 연설한 바도 있고 또한 어느 신문에 수(스티븐스) 씨의 사실을 기재한 것도 있으므로 한국 인심이 일층 더 분격하여 수(스티븐스) 씨의 성명을 요정케 하였으니 수(스티븐스) 씨는 자기 행한 일을 생각하면 비록 혼백이라도 원통하다 호원하지 못할 것이거니와 우리는 정의단 제군자에 대하여 감사한 동정을 표하노니 제군 등이 자기의 생명을 아끼지 않고 능히 의분을 격발하여 공중 도회지에서 국적을 포살하니 그 뜨거운 피와 활발한 기운이 족히 대한독립의 기초를 세울만한지라 세상에서 한국 인종이 망국 종자가 아니될 것을 능히 발표하였으니, 우리는 다만 현·조(현명운·조신동) 양군을 위하여 치하할 뿐 아니라, 정의단 七百여 명이 개개이 이 기운과 이 피가 있는 줄을 깊이 치사하고 송축하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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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보 |
·1884년 6월 25일 서울 종현(鍾峴)에서 부친 전성근(田聖根)과 모친 전주(全州) 이씨(李氏) 사이에서 출생. 본관은 담양(潭陽), 자는 영선(永善), 호는 죽암(竹嵒).·1894년~1903년 12세에 모친, 16세 때에 부친 별세. 가업인 포목전을 경영하는 큰형 전명선(田明善)을 도우며 성장. 1902년 경 2년제의 관립 한성학원(漢城學院)에 다녔다고 함.·1903년 조순희(趙順熙, 1885~1929)와 결혼.·1903년 9월 21일 ‘도릭호’(Doric) 편으로 하와이 오하후 섬 호놀룰루로 단신 노동이민.·1904년 9월 23일 이민 목적인 학업을 위해 미주 본토 샌프란시스코로 이주.·1905년 안창호 등이 1905년 4월 5일 설립한 공립협회에 참여.·1907년 10월 공립협회가 주최한 토론회에서 “식산만 풍부하면 경제가 부족하더라도 재정을 가히 부케 한다.”라는 내용으로 연설.·1907년 10월 26일 「(共立)新報 확장할 趣旨書」 발표의 발기인으로 참여, 『공립신보』의 발전에 주동적 역할.·1908년 2월 한인사회를 대상으로 알래스카 어업 노동인부의 모집을 주선. 한인청년회 초청 토론회에서 ‘모험시대’라는 주제로 연설.·1908년 3월 20일 대한제국 정부 외부고문 스티븐스 샌프란시스코 도착. 페어몬트(Fairmont)호텔에 투숙 기자회견을 열고 친일망언 성명.·1908년 3월 22일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를 중심으로 한인공동회 개최. 정재관(鄭在寬)·최유섭(崔有涉)[공립협회]·문양목(文讓穆)·이학현(李學鉉)[대동보국회] 4명을 總代로 선임하여 스티븐스의 친일 망언에 대한 사과와 시정을 요구함. 총대 4명이 페어몬트호텔로 스티븐스를 찾아가 친일발언 취소와 사과를 요구했으나 거절당함. 총대 4인, 현장에서 스티븐스를 규탄하며 응징. 공립협회와 대동보국회, 장인환·전명운도 참석한 가운데 제2차 공동회 개최. 양 의사 스티븐스 처단을 결심함.·1908년 3월 23일 스티븐스가 친일외교를 펼치기 위해 워싱턴으로 가려고 오클랜드 행 도선대합소인 페리부두에 도착하여 자동차에서 내리는 순간 전명운이 먼저 권총을 발사했으나 격발되지 않음. 이에 전명운이 스티븐스의 얼굴을 총으로 가격하고, 스티븐스가 반격을 가하자 전명운이 몸을 피함. 이때 장인환이 스티븐스의 뒤쪽에서 3발의 총을 쏘아 명중시킴. 그 중 첫 발이 불행히 전명운의 어깨에 맞음. 현장에서 상항(샌프란시스코)경찰국 경관 맥그란드(James McGrand)에게 체포되어 항만응급병원으로 연행 후송됨. 응급 치료를 받고 스티븐스와 함께 중앙병원으로 이송. 장인환 의사와 대질 심문 시 단독 거사라고 공모를 부인함.·1908년 3월 27일 ‘살인미수’ 혐의로 샌프란시스코 경찰 법원에 기소됨. 의거 후 「전명운 애국가」(전명운 작사, 방기납 작곡: 1996년)가 『신한민보』에 발표됨.·1908년 5월 1일 예정된 예심이 5월 22일로 연기되었다가, 다시 연기되어 6월 8일 개정.·1908년 6월 27일 제2차 예심에서 증거 불충분으로 보석 석방. 일제의 감시와 암살 위협 등의 압박감 속에서 맥 필드(Mack Fields)로 개명.·1908년 8월 샌프란시스코를 떠나 동부를 거쳐 유럽을 횡단, 10월경 러시아 연해주 도착.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안중근과 만나 독립운동방략을 논의. 연해주지역에 머무르는 동안 공립협회 연해주지회 설치를 주도.·1909년 10월경 시베리아를 횡단하고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돌아옴. 뉴욕에서 노동으로 생활.·1917년 9월 서울에서 건너온 부인이 발병하여 스탁톤병원에 입원.·1918년 캘리포니아의 농장지대인 맨티카 지방에 정착하여 세탁업 경영.·1918년 12월 대한인국민회 맨티카 지방회 회장으로 선출됨.·1919년 1월 11일 장인환 의사의 가출옥 소식을 듣고 샌프란시스코로 와서 그동안의 옥고를 위로하고 평생의 정의를 표함.·1919년 3월 9일 국내외 3·1운동 소식이 전해지자 맨티카와 이웃의 스탁톤, 투례시 지방의 한인들을 모아 축하회 개최를 주도. 50달러의 의연금을 독립운동 자금으로 기부.·1919년 대한인국민회 윌로우스지방회 부회장으로 선출.·1924년 6월 24일 샌프란시스코 한인감리교회에서 열린 ‘장인환 의사 석방축하회’ 참석.·1928년 로스앤젤레스로 거처를 옮긴 후 경제적인 곤란을 첫딸 전경숙(田慶淑, Rosemary)과 둘째딸 전경령(田慶怜, Magaret)을 고아원에 맡김. 한인 동포를 대상으로 애국강연을 하면서 군자금을 모아 상해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지원함.·1941년 태평양전쟁이 발발하자 전시봉사회를 조직, 군인 위문활동을 전개함.·1942년 로스앤젤레스 한인국방경위대(맹호대)에서 복무.·1947년 11월 18일 로스앤젤레스에서 서거. 갤버리 천주교 묘지에 안창.·1962년 3월 1일 장인환 의사와 함께 대한민국 정부로부터 건국공로훈장 대통령장 추서.·1994년 4월 8일 국립서울현충원 애국지사 묘역으로 천장.(1995년 8월 부인 조순희 여사와 합장)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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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두기 |
1. 이 자료집은 장인환·전명운 의사가 대한제국 친일 외교고문 스티븐스를 처단한 의거와 관련된 한국과 미국·일본 측의 문서류와 의거 전후의 행적 자료, 의거에 대한 논찬, 신문 보도기사 등을 수집하여 집대성한 것이다.2. 자료집은 두 권으로 나누어 제책하였다. 제Ⅰ책에는 상항(샌프란시스코)한인공동회 자료, 미국 법원과 장인환 의사의 수감 관련자료, 의거 전후 양(장인환·전명운) 의사의 행적 자료와 의거에 대한 논찬, 언론보도 자료를 그리고 제Ⅱ책에는 일본 측의 관련 공문서류와 신문 보도기사 등을 수록하였다.3. 자료는 시기 순으로 배열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였다. 다만 일본 외무성 외교사료관 소장의 문서 등 연대순으로 되어 있지 않은 것은 원 문서편집의 의도를 감안해 그대로 두었다.4. 모든 자료는 원자료 영인을 원칙으로 하였다. 다만 제Ⅰ책 Ⅰ의 『양의사합전』에는 원문과 함께 직해문을, Ⅱ 『미국 법원과 형무소 자료』에는 원본과 함께 번역문을 수록하였다.5. 자료는 원형대로 영인 수록하고자 하였으나, 편집과 열람의 편의를 위하여 확대, 축소, 분할 수록한 경우도 있다.6. 각 권 앞에는 의거 관련 사진과 수록된 대표적인 자료의 화보를 제시하였고, 말미에는 양 의사와 스티븐스의 간략한 연보, 관련 연구논저 목록을 수록하였다.7. 이 자료집은 윤병석이 수집한 것에 김경해·김원모·문충한·안형주·오인환·전의식·정제우 선생 등이 제공한 자료를 합하여 편집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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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논저 |
·尹炳奭(윤병석), 1990, 『國外韓人社會와 民族運動』, 일조각.·張伯逸(장백일), 1997, 『義士 田明雲』, 集文堂.·김원모, 2002, 『한미 외교관계 100년사』, 철학과 현실사.·유동식 감수, 성백걸 지음, 2003, 『샌프란시스코의 한인과 교회: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의 역사』, 상항한국인연합감리교회100년사편찬위원회, 한들출판사.·Andrew. C. Nahm, 1979, ‘Dunham White Stevens and the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The United State and Korea, The Center for Korean Studies, Western Michigan University.·尹炳奭(윤병석), 1988, 「李相卨의 遺文과 李儁·張仁煥·田明雲의 義烈」, 『한국독립운동사연구』2,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金源模(김원모), 1988, 「張仁煥의 스티븐스 射殺事件 硏究」, 『東洋學』18,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金源模(김원모), 1988, 「서울에서의 스티븐스의 親日外交活動」, 『향토서울』46, 서울특별시사편찬위원회.·金度勳(김도훈), 1989, 「共立協會(1905~1909)의 민족운동 연구」, 『한국민족운동사연구』4, 한국민족운동사연구회.·崔起榮(최기영), 1992, 「韓末 美洲의 大同保國會에 관한 一考察」, 『수촌 박영석교수화갑기념 한민족독립운동사논총』, 수촌박영석교수화갑기념논총간행위원회.·윤병석, 1994, 「장인환과 전명운의 샌프란시스코(상항) 의거」, 『한국독립운동의 해외사적 탐방기』, 지식산업사.·鄭濟愚(정제우), 1996, 「竹嵓 田明雲 硏究」, 『한국독립운동사연구』10,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오인환·문충한·공정자, 2007, 「장인환 의사의 발자취를 찾아서: 샌프란시스코 지역을 중심으로」, 『한국독립운동사연구』28,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