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361 |
"「琿春義勇隊組織」|| 『不逞團關係雜件』(19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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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362 |
"「李東輝」|| 『페드로그라드일본대사관|| 구두문서』(1915) 附 : 번역문" |
일본정부가 제국의 공공질서를 심각하게 위협하는, 반일적인 행위를 하는 일정 수의 한국인들에 대한 인도를 러시아정부에게 요구하고자 함에 따라, 지난해 12월 경 일본제국 대사관은 러시아정부의 이 문제에 대한 태도를 공식적으로 알기 위하여 러시아 외무성에 구두로 말했다. 이에 대하여 러시아 외무성은 러시아 국적을 가진 한국인들을 일본으로 인도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러시아 당국이 취할 수 있는 유일한 조처는 일본에 의해 지명된 사람들을 러시아 안에서 이주시키는 것이라고 말했다. 예컨대 이르쿠츠크(Irkoutsk)의 서쪽으로 이주시켜 그들을 경찰의 끊임없는 감시 아래에 두는 것이다. 반면,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지 않은 사람들에 대해서는 1911년 6월 1일의 비밀조약에 근거하여, 범죄 행위의 정치적 성격을 고려하여 그들을 러시아 경계 밖으로 추방할 수 밖에 없다고 말했다. 러시아 외무성은, 桂太郞(계태랑) 내각총리대신 겸 외무대신의 방문시에 취했던 조치들과 일본과 러시아 양국 간의 매우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법무성과 상의하기 전에는 어떠한 조언도 할 수 없음을 덧붙였다. 20세기 이래로, 러시아 외무성은 이러한 주제에 대한 법무성의 의견을 일본영사관에 전달한 적이 없다. 이 주제에 대하여 일본제국정부는, 첨부된 리스트에 지목된 30명의 한국인들에 대하여 그들의 반일적 행동에 상응하는, 아래에 기재된 조처들을 요구하는 훈령을 일본 영사관에 다시금 내렸다.1. 이러한 힌국인들은 러시아 국경 밖으로 추방하여야 하며, 러시아정부가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방식에 따라 일본의 통치권 안으로 이송되어야 한다.2. 이러한 한국인들 중에 러시아 국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 대하여 위의 조처를 취할 수 없다고 판단되는 경우에는 시베리아(Sibérie) 내부로 이송하여, 연안지방과 다른 지역들에 있는 불온한 한국인들과의 모든 연락망을 단절하기 위하여 경찰의 꾸준한 감시 하에 두어야 한다. 그리고, 러시아와 러시아의 우방들 간의 국제적 관계에 해를 끼칠 가능성이 있는 행위들을 징벌하기 위하여, 러시아 법이 승인을 결정하고 있기에, 이러한 한국인들은 러시아 법의 엄정함에 따라 처벌 받아야 한다. 러시아정부가 양국 간의 매우 친밀한 관계를 고려하여 일본제국정부의 이러한 요구를 만족시켜줄 의사가 있음을 일본대사관에 알려준 데 대하여, 일본제국대사관은 러시아 외무성에 감사를 표한다.이름/ 국적/ 거주지/ 나이· Li-ton-khwi(이동휘)/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샹펭고(San-phen-gao)/· Kan-swïn-ki(강순기)/ 일본인/ 니콜라에프스크(Nicolaevsk)/ 46세· Dë-chang-kho(조창호)/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39세· Dë-diang-von(조장원)/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35세· Youn-khaï(윤해)/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샹펭고(San-phen-gao)/ 31세· Kho-koung(허근)/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52세· Ke-peng-ou(계봉우)/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하마탕(Khamatan)/ 36세· O-chou-khion(오주혁)/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49세· Koum-kha-kou(김하구)/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31세· Li-kang(이갑)/ 일본인/ 니콜라에프스크(Nicolaevsk)/ 38세· Li-pom-youn(이범윤)/ 일본인/ 노보-끼에프스크(Novo-georgievsk)/ 60세· Li-ton-khion(이동녕)/ 일본인/ 니콜라에프스크(Nicolaevsk)/ 53세· Li-tsen-kho(이종호)/ 일본인/ 샹펭고(San-phen-gao)/ 29세· Li-tsen-man(이종만)/ 러시아인/ 샹펭고/ 24세· Li-khion-tsaï(이현재)/ 러시아인/ 상펭고/ 59세· Koum-do-e(김도여)/ 러시아인/ 블라디보스토크/ 48세· An-dé-koun(안정근)/ 러시아인/ 니콜라에프스크/ 28세· An-kon-koun(안공근)/ 러시아인/ 니콜라에프스크/ 24세· Tyon-chaï-kouan(정재관)/ 러시아인/ 노보-끼에프스크/ 38세· Li-i-tcheng(이위종)/ 러시아인/ 페트로그라드(Pétrograd)/ 33세· Kum-sön-in(김성립)/ 러시아인/ 하얼빈(Kharbin)/ 31세· Kum-son-peck(김성백)/ 러시아인/ 하얼빈/ 39세· Tzo-o-khion(최재형)/ 러시아인/ 니콜라에프스크/ 61세· Kum-sïn(김진)/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22세· Li-kan(이강)/ 일본인/ 치타(Tchita)/ 35세· Om-in-son(엄인섭)/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39세· Li-son-go(이상설)/ 일본인/ 하발로프스크(Khabalovsk)/ 48세· Khon-pon-bon(홍범도)/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또는 샹펭고/ 50세· Li-pen-khwi(이병휘)/ 일본인/ 블라디보스토크/ 34세· Yui-sang-don(유상돈)/ 일본인/ 이르쿠츠크(Irkoutsk) 또는 ????/ ??세※ 본문에서 거주지로 ‘일본인’이라고 되어 있는 것은 러시아에 귀화하지 않은 한국인을 의미함. |
5363 |
"「李東輝」|| 『社會科學大辭典』(이석태편|| 1949)" |
一八七三年 咸南 端川郡 出生. 少時에 武官出身. 安東營將, 江華島參領을 歷任하였다.일찍부터 烈火같은 排日 獨立思想을 품고, 熱狂的 雄辯으로써, 群衆을 煽動하였으며, 咸鏡道 一帶에 遊說하여 新式學校 建設에 積極 努力하였다. 亡國卽時로 滿洲, 沿海州에 亡命하여 獨立運動을 指導하다가 一九一七年 末, 俄領(러시아령) 黑河에서 韓人社會黨을 組織하여, 僑民에게 社會主義運動을 일으켰으며, 一九年 第三國際共產黨設立大會에, 朴鎭淳(박진순)을 派遣 參加케하였다. 三·一運動 卽後, 上海臨時政府에 國務總理로 있으면서, 二十一年 高麗共產黨을 組織指導하였다. 二十二年 末에는, 前記 國際黨 高麗部幹部의 一人이 되었고, 二三年에는, 「올그뷰-로」의 一人으로서, 朝共再組織을 爲하여 活動하였고, 二五六年에는 國際黨에 對하여 朝共組織을 贊成하였고 二六年에는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 聯絡部일을 보았고, 二九年에는 朝共再建準備에 參● 하였고, 三六年 一月 三十一日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病死하였다. 氏는 身體가 長大하고 風神이 俊偉하여 萬人을 威壓하고, 朝鮮에 있어서 民族運動의 巨星인 同時에, 共產黨組織의 先驅者로서, 著名한 革命家의 一 人이었다. 號는 省齋였다.「李東輝(이동휘)」, 『社會科學大辭典』(이석태 편), 1949. |
5364 |
"「李東輝先生과 提携」|| 洪相杓|| 『間島獨立運動小史』 " |
여기에 特記하여야 할 일은 具禮善(그리슨) 博士와 誠齋 李東輝(이동휘) 先生의 提携이다.李東輝(이동휘) 先生은 咸鏡南道 端川 出身으로 어려서 漢學을 專攻한 意志와 志操가 非凡한 靑年이었다. 일찍 端川 牧使밑에서 衙前職으로 있었으나 牧使의 暴政과 酒色의 醜態를 참을 수 없어 牧使에게 뛰어 올라가 靑銅 火爐를 뒤집어 씌우고 그 자리에서 도망을 쳐서 서울로 올라 갔다. 서울에 到着한 그는 兵丁 募集에 應試하여 그 偉風과 口令의 우렁참으로써 參領(지금 少領)에 合格되었다. 訓練을 마친 즉시로 參領으로 江華島에 赴任하여 島民을 잘 보살펴 주었으므로 稱頌이 자자하였다. 그러나 얼마 가지 않아 우리 軍隊는 日本政府의 壓力으로 一九○七年 八月 一日 解散되어 버렸다. 軍服을 벗은 李東輝(이동휘) 先生은 基督敎에 入信하였다. 基督敎야말로 쓰러져 가는 나라와 民族을 救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이었다. 先生은 救國運動에 나섰다. 그는 平安道에서 많은 感動을 주었다. 誠齋 先生과 島山 先生은 隔意없는 救國同志였다. 島山 安昌浩(안창호) 先生은 언제든지 誠齋 先生을 兄님이라 하고 誠齋 先生은 年長이므로 島山 先生을 아우님이라 하였다. 誠齋 先生은 元山 江原道 等地를 巡廻하면서 「무너져 가는 祖國을 일으키려면 예수를 믿어라, 예배당을 세워라, 學校를 세워라, 子女를 敎育시켜라, 斷髮하여라. 그래야 우리도 西洋 文明國과 같이 잘 살수 있다.」고 눈물을 흘리면서 외쳤다. 그의 눈물의 호소를 듣는 사람으로서 눈물을 흘리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람들은 先生을 「눈물의 愛國者요 英雄」이라고 하였다. 誠齋 先生은 聽衆들에게 擧手로 誓約시켜서 各處에서 禮拜堂이 세워지고 善昌學校를 세웠는데 그 數가 四百餘에 達하였다. 宣敎師 具禮善(그리슨) 博士는 李東輝(이동휘) 先生의 소문을 듣고 一九○九年에 봄 元山으로 찾아 가서 城津으로 모셔다가 自己와 같이 傳道 事業을 하는 助事(傳道師)로 任命하였다. 當時 우리 民族이 救國運動을 하려면 背後가 튼튼하여야 하는 때이었다. 그리고 端川에 있는 李先生의 家族을 城津으로 데려다가 物心兩面으로 돌보아 주었다. 誠齋 先生의 身邊을 具禮善(그리슨) 博士가 보호하는 限 絶對 安全하였다. 誠齋 先生은 具禮善(그리슨) 宣敎師와 함께 城津을 중심으로 各處로 돌아다니며 눈물의 호소를 하였다. 이에 感動한 동포들이 擧手로 서약하고 禮拜堂과 學校를 세우는 일에 힘써 到處에 敎會와 基督敎 學校가 세워졌다. 誠齋 先生은 城津의 協信中學校의 敎師陣營을 强化하기 爲하여 東京 物理學校 三學年 吳永善(오영선) 氏(李先生 二女 約婚婿)를 데려 왔고 이어 奇泰鎭(기태진), 洪佑晩(홍우만) 等 諸氏가 모였다. 이리하여 中學 校師陣이 咸鏡道에서 最高峰이었다. 協信 中學校 內의 速成 中學科에서는 每年 敎師를 養成하여 農村의 小學校와 北間島와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까지 浸透시켰다. 그리하여 到處에 學校가 생기고 敎會가 있는 곳에 愛國運動이 일어 났으며 學生과 더불어 男女老幼가 들어 보지 못한 愛國唱歌와 讚頌歌로 흥겨워 졌다. 李東輝(이동휘) 先生의 愛國精神이 基督敎 信仰과 함께 번져 갔다. 基督敎 宣敎의 據點이었던 城津은 獨立運動의 據點이 되어 誠齋 先生을 中心으로 한 愛國志士들의 來往이 頻繁하게 되었다. 멀리 北間島 局子街의 白下 金永學(김영학) 先生은 誠齋 李東輝(이동휘) 先生에게 數次 來往하였다. 그래도 日警은 具禮善(그리슨) 博士가 治外法權을 行使하는 威力에 눌려 博士의 擁護下에 있는 誠齋 先生과 愛國志士들을 어쩌지 못하고 觀望하기만 하였다. 日警은 宣敎師 具禮善(그리슨) 博士를 눈의 가시처럼 생각하였으나 어쩔 수 없었다. 協信中學校도 끊임없는 監視를 받았으나 손을 대지 못하였다. 一九一○年 八月 二九日 아침 禮拜堂에서 鐘이 울렸다. 敎人들과 學生들이 의아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모여 들었다. 그들은 靑天벽력 같은 消息에 禮拜堂 안이 울음바다가 되었다. 이는 日本政府의 壓力으로 韓日合邦이 되었고 誠齋 李東輝(이동휘) 先生이 早朝에 日警에게 逮捕되었다는 것이었다. 日警은 敎會안으로는 侵入하지는 못하였으나 獨立鬪士들은 危險이 닥쳐 왔음을 깨닫고 흩어져 자취를 감추기 시작하였다. 誠齋先生은 서울로 護送되어 判決을 받고 仁川 大舞矣島에 流配되었다. 이로부터 日本 警察의 彈壓이 極甚해 져서 農村의 學校들은 閉校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고 自由를 잃은 百姓들이 自由를 찾아 北間島로 移住하는 者가 續出하였다. 그리하여 北間島 到處에 이런 亡命客들의 部落이 생겼다. 그들의 大部分이 基督敎信者들이었다. 그들은 異域에서도 敎會堂을 짓고 學校를 세워 信仰과 子女敎育에 힘썼다. 또한 學校와 敎會는 愛國思想을 기르는 곳이었다. 이는 宣敎師 具禮善(그리슨) 博士와 誠齋 李東輝(이동휘) 先生의 敎化의 힘이 컸다고 해도 過言이 아닐 것이다. 合邦이 된 후 朝鮮 內에서의 排日運動과 愛國活動은 日帝의 彈壓으로 表面化하기 어렵게 되었고 敎會와 學校도 前과 같이 愛國思想 鼓吹가 不可能하게 되었다. 宣敎師 具禮善(그리슨) 博士가 設立 經營하던 城津의 協信 中學校는 그동안 排日運動의 巢窟로 指目을 받아 오던 터이었으므로 閉鎖를 當하게 되어 一九一一年 咸興 永生中學校에 合倂되었다. 具禮善(그리슨) 博士는 事態의 變遷에 따라 露骨的인 排日運動을 避하여 基督敎 傳道에 힘씀으로써 韓國人의 愛國運動을 間接的으로 支援하게 되었다. 그는 캐나다 宣敎部에 要請하여 咸北 會寧과 間島 龍井에 廣大한 垈地를 購得하고 一九一二年 會寧에 梅道那[매도나(D. A. Macdonald)]宣敎師를 龍井에 朴傑[바커(A. H. Barkar)]宣敎師(排日宣敎師)를 派送하여 두 곳에 宣敎部를 設置하였다. 一九一三年 朴傑(바커) 宣敎師는 龍井東山(俗稱 英國덕이)에 자리 잡은 宣敎部 垈地를 鐵條網으로 두르고 英國旗를 揭揚하여 英國 治外法權 地域임을 明示하였다. 이로써 이 地域 內에는 日本官憲의 權力이 미칠 수 없게 되었다. 宣敎師 朴傑(바커) 牧師는 濟昌病院을 세워 韓中人들에게 施療를 하는 한편 恩眞中學校와 明信女中學校를 構內에 設立하고 明信女小學校를 構外(亦是 準英國 治外法權 地域)에 設立하여 韓國人들의 子女敎育과 愛國思想 涵養에 많이 이바지하였다. 이를 契機로 하여 龍井(俗名 용드레촌)은 間島에 있어서의 韓國人의 思想, 文化, 宗敎, 敎育, 愛國運動의 中心地가 되었고 朝鮮內에서 愛國運動을 하던 者들의 亡命處가 되어 龍井 東山의 宣敎部 構內는 이들 亡命客의 隱身處가 되었다. 宣敎部는 우리 愛國鬪士들의 隱身을 즐겨 許容했고 積極保護해 주었다. 한편 이미 組織된 國民會의 連絡處로서의 重要한 役割도 하여 주었다.城津의 具禮善(그리슨) 博士는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를 그대로 城津 宣敎部의 區域으로 存置시키고 계속 이 地域의 宣敎를 맡아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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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휘에 대하여」|| 『김철수친필유고』|| 『역사비평』(1990)" |
이동휘는 端川人으로 16세 시에 그 고을 군수 李某의 통인으로 지내는 중 군수가 뇌꼴스럽게 함을 분히 여겨서 요강으로 군수 머리를 쳤다. 주위에서 통인 이동휘를 죽인다고 떠드는데 군수가 너그러히 용서하고 서울로 榮轉간 뒤에 이동휘 18세 때에 서울로 불러다가 軍隊에 들렸다. 그로부터 昇進 又昇進하여 軍隊被服관계를 맡아 가지고 간사한 진고개 日本商人들과 접촉하면서 깨끗이 服務했다. 결백하다고 하여 三南軍事 財政 調査員 즉 御事로 내려 갔다. 郡守 14인을 罷職시키고 엽전 50만兩을 찾아 다가 王에게 바친다. 그 功으로 3만兩을 下賜하는 걸 “軍人이 무슨 돈이 필요하겠냐”하고 받지 않았다. 그 후 江華守備隊 參領인지 正領인지로 있다가 韓日合邦時 수비대장 尹某가 調印했다 하여 자기 부하 4인을 시켜서 尹某를 죽이라 했다. 尹某는 도망치고 도리어 4인이 붙잡혔다. 李東輝(이동휘)는 태연히 나아가서 “4인이 나의 부하고 나의 명령에 따랐을 뿐이니 나를 죽이고 4인을 놓아라.”고 했다. 倭놈들은 이동휘를 利用하려고 했다. 이동휘 아버지 李發(이발)(? : 편집자)은 한일합병 시에 鍾路(종로)에서 飮毒自殺未遂로 만주로 逃出, 이동휘도 백두산을 넘어서 亡命나갔다. 江華(강화)에 있을 時엔 그 근방 황해도, 경기도 일대에 普信學校(지금 국민학교)를 많이 세웠다는 것, 함경도 端川 근방에는 그이와 吳학정(? : 편집자)의 가는 곳마다 학교를 일으켰다 한다. 시베리아와 만주에서 獨立軍들을 지도하다가 1917年 러시아 革命 後엔 韓人社會黨을 조직했고 1919년 상해임시정부의 國務總理로 被任되었으나 이동휘는 안 가려 하는데 간부들이 권해서(민족기관에 들어 가서 힘써야 제국주의와 싸울 수 있다고) 上海로 진출했다는 것, 1921년에 高麗共產黨 대표로 모스크바에 갔는데 國際黨 안에서 特히 후인랜드 黨首 꾸시넨이 자기 처지나 같다고 후원해 주고 체코 黨首 스메탈 헝가리 당수 벨라군라이라든지 일본당 片山潛(편산잠) 등이 도와 주었으나 유태인들의 각 要所에 앉아서 伊市派를 자기네의 위성으로 만들려고 했던 것이다. 이동휘는 熱과 誠을 主로 한다. 漢學은 있어도 新學은 넉넉치 못하다. 성의가 없는 사람은 멀리 해 버린다. 熱辯家이라 청중은 그의 열변을 좋아한다. 號도 誠齋라 한다. 비위가 틀리면 銃을 빼어 든다. 눈물이 많다. 群衆 앞에서도 演說하다가도 소리를 놓아 우는 수가 있다. 對하는 사람이 바로 믿게 한다. 그는 돈을 모른다. 돈이라고는 만지지 않으려 한다. 알려고도 아니한다. 上海에서 國務總理 엉덩이라는 말이 있었다. 이동휘가 엉덩이 다 떨어진 것을 입고 다니기 때문이다. 한번 성이 나면 억제키 어렵다. 그래서 국무회의 하다가 의자로 대통령 李承晩(이승만)을 친 일이 있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1925년 火曜會를 중심으로 한 조선공산당(別記)은 國際黨에서 승인을 받아야 할 터인데 국제당에서 이동휘의 찬성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즉 上海派를 망라한 것 같이 朱鍾健(주종건)과 兪鎭熙(유진희)를 간부에 넣었지만 국제당에서는 上海派의 대표적 인물인 이동휘의 승인이 있어야 승인하겠다고 한 것은 아무리 유태인들의 짜고서 야단내도 老將들의 의견을 무시 못해서이다. 1925년 말이다. 서울서 朱鍾健(주종건)이가 오라고 하기에 上京해 본 즉 海蔘威(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朴應七(박응칠)이가 이동휘의 書簡을 가지고 와서 나를 찾으매 朱鍾健(주종건) 죽이고 간다는 것이었다. 李鳳洙(이봉수)도 그 때에 朱에게 기울어 가는 판이다. 말도 못낸다. 나는 朴應七(박응칠)을 데리고 나와서 해외소식을 다 들었다. 朴은 물론 강경파였다. 나도 朱를 죽이고 싶다만 이 무서운 日本帝國主義 압박 하에서 간신히 조직된 공산당을 우리가 키워 가지고 잘 싸워야지 파쟁만 해서는 안되니 朱에게 잘 이르고 내 편지 가지고 나가면 李鳳洙(이봉수)와 함께 黨에 들어 가서 모든 일을 잘 해 가도록 죽음을 걸고 힘쓰겠다 했더니 朴도 눈물을 함께 흘리면서 應하고 내 편지(李東輝(이동휘) 同志여, 우리가 정신을 一新해 가지고 왜적과 싸우다가 죽읍시다. 동지가 나에게 意見을 묻는 것은 나에게 그리 하자는 걸 命令해 주는 걸로 알고 內地의 동지들과 함께 새로 된 黨에 欣然 희생하겠오)라고 편지했다. 이동휘는 바로 國際黨에 전보 쳤다. “찬성”이다고. 조선공산당은 1926년 초에 국제당의 승인을 받았다. 국제당 老將들은 이동휘를 높이 평가했다는 것이다 (그 때의 詳細는 別記에). 그 뒤에 내가 黨을 재정돈 해 놓고 대표로서 국제당에 갈 때에 만나니 이동휘는 나를 붙들고 울었다. 倭賊의 엄중삼엄한 경계와 원거리에서 더 相議할 수 없이 內地의 同志들의 의사를 존중하여 찬성 전보를 쳤지만 今後의 투쟁조직에 생명을 걸고 매진해야 된다고. 이것이 소위 新義州사건과 종로경찰서의 연속 검거로 105인 검거사건 당시의 일이다. 그 뒤 소위 엠엘당 사건으로 내가 다시 국제당에 갈 때 이동휘는 슬픈 눈물을 흘리면서 앞날이 캄캄하다고 했다. 그 결과로는 엠엘당을 부서 버리는 대신 당이 해체되고 말았다. 나는 당 재건 준비 차로 귀국했다가 체포되고 보니 그 고심과 노력이 다 수포에 돌아가고 말았으매 이동휘와는 다시 못만나고 감옥 내에서 그의 61세를 일기로 病死(1936년인지)했음을 알았다. 나는 당시 安在鴻(안재홍)의 주선으로 기독청년회관에서 그의 추도회를 하려 하다가 경찰의 저지로 그도 이루지 못했음을 알고 나는 무척 분히 여겼던 것이다.김철수, 「이동휘에 대하여」, 『김철수친필유고』, 『역사비평』(1990) pp. 367-369. |
5366 |
"「아령동포에게 고하노라」|| 『勸業新聞』(1913.7.21)" |
주일보 |
5367 |
" 「리성재선생의 연설」|| 『勸業新聞』(1913.10.19 - 11.2)" |
기자필기 여러분이 이동휘를 이같이 성대한 환영을 하여도 나는 마음에 조금도 기쁜 생각이 없고 다만 비분한 마음만 폭발하오. 오늘날 이 자리에서 서로 말할 때에 말을 꾸밀 것도 아니요, 연설로 할 것도 아니라. 우리는 다 불평한 무리라 서로 만났으니 서로 위로의 말마디나 할 것이오. 여러분 인생이 이 세상에 살 때에 누가 치고 욕하면 나도 치면서 욕할 것이요, 누가 나를 지극히 사랑하며 보호하여 주면 물론 감사할 것이 아닌가. 그런데 우리 해외에 나온 첨 동포는 시베리아 찬바람에 수십 성상을 지내며 조국의 참상을 듣고 마음이 얼마나 끓었으며 이곳 와서 먼저 주민되시고 여러가지로 조국을 위하여 일 많이 하신 첨 군자를 위하여 내가 당도한 날로부터 집집에 가서 치하하며 감사를 올리고자 하였으나 미처 행치 못하고 이와 같이 먼저 환영회로 부르심을 받으니 도로 미안할 뿐이오. 깊이 용서하여 주시기를 바라나이다. 오늘날 우리는 비참한 마음으로 서로 만날 것이요, 즐겁게 서로 볼 때는 아니라. 그러면 이 환영회는 우리가 일 후에 두만강을 건너가서 금수강산을 다시 빛나게 회복하고 독립연에서 환영회를 열고 반갑게 손잡고 만나기를 과연 바라는 바오. 이제 우리가 서로 만났으니 알고자 하는 일과 붉은 정성을 다하여 서로 강구할 것이 있소. 오늘날 내가 여러분에게 고할 것은 내가 말을 하기 좋아하여 그런 것도 아니요, 아니할 수 없는 말을 여러분께 고하여 서로 위로코자 함으로, 질서도 없고 두미도 없이 다만 나의 정성대로 말하고자 하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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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나의 사랑하는 신한민보에 부탁하야 합중국각지방에 잇는 동포에게 문안하노라」|| 『新韓民報』(1914.2.19)" |
시베리아 찬바람을 의지하여 단군황조의 혈족 나의 사랑하는 북미합중국(미국) 각지방에 흩어져 있는 여러 동포에게 두번 절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문안하나이다. 우리가 오늘날 어디 있든지 서로 당한 지위가 피차 일반이라. 변북강개한 회포를 더 말하지 않아도 다 아는 바며 생각하는 것이니 이에 간단히 나의 붉은 정성대로 두어 마디 말씀을 드리나이다. 나의 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용서할지어다. 이 이동휘는 아무 능한 것 없이 다만 국민의 한 분자로 정성껏 하고자 하는 것 뿐이오. 이미 지난 경험으로 말할지라도 광무시대에 소위 군인으로 칼도 차 보았으며 그 후에 청년 교육을 권면도 하여 보았으며 또 하나님의 택함을 받아 우둔한 성품을 회개하여 얼만큼 진취의 효력을 얻었으니 감사할 바나 다만 나라 망한 첫날부터 나중까지 눈으로 보며 몸으로 겪었어도 여러 충신열사와 같이 의롭게 죽지 못하고 이날까지 구구한 생명을 보존하여 다시 사랑하는 형제 앞에 말하게 됨은 과연 부끄럽고 죄송하오니 또 용서하여 주기를 바라나이다. 이제 이곳 당도한 후에 있는 희망과 무궁한 기쁨을 여러 형제에게 고하고 절함은 내가 내지에 있을 때에 까닭없이 혹 옥문도 구경하며 섬에도 가서 생각할 제 어서 이 썩어진 육신이 이 세상을 떠나 잠시 평안을 도모할까 한 일도 있더니 요행으로 압록강을 건너서 장백산 일대를 밟아 중국지방에 있는 동포의 형편을 살피며 이곳 러시아 영지에 온 지 아직 달이 차지 못하였지만은 여러 가지 기쁜 것과 우리의 희망있는 일을 아니 고할 수 없나이다.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우리는 옛적 이스라엘민족과 같이 하느님께 제사하던 백성이라 어디 가든지 이것을 본령을 삼을지니 내가 중국영지에 당도하는 첫 날에 제일 기쁜 것은 하느님을 공경하는 동포가 여러 만 명이오. 청년교육과 사회에 좋은 사업은 많이 믿는 형제들이 열심하며 망국의 한을 이기지 못하여 풍찬노숙하며 일시로 동장에 몸을 숨기고 하루아침에 기회만 있으면 두만강 건너가기를 재촉하는 열혈남아가 기 千만 명이며 기타 사회에 공익사업을 일반 힘쓰고자 하며 조국강산을 한번 광복하기를 밤낮 지극히 원하는 정상은 보는 자의 눈물을 금치 못할 바라. 이것은 한국사람 된 자의 마땅히 행할 바나 이곳에서 애쓰고 일하는 여러 형제의 고생한 효력이니 이에 기쁜 소식을 고하노라. 나의 사랑하는 신한민보여 너의 면목도 그곳 동포의 힘으로 지어낸 줄 내가 믿고 먼저 감사를 돌리며 다시 더 부탁할 말이 없지만은 나의 감격된 바를 쓰고자 함은 대개 북미합중국(미국)은 어떠한 나라인가. 워싱턴이 건국한 처음에 하늘에 기도하기를 하나님이여 우리에게 자유를 주옵소서. 자유를 아니 주시려면 죽음을 주옵소서. 이와 같이 기도한 결과로 오늘날 공화행복을 누리는 것은 다 아는 바지마는 내가 또 한 번 말하며 내가 국민보 사진에 소년병학교 학생의 체조하는 그 그림을 볼 때에 반갑도다. 보고 또 다시 보았노라. 그 용감한 체력과 활발한 정신은 내가 친히 본 듯이 과연 기뻐하였으며 또 스트윗부인이 우리 동포를 위하여 여러 가지로 힘쓴 것을 그 마음에 예수그리스도가 계셨지만은 우리 국민된 자야 어찌 잊으리오. 내가 그 사진에 절하였으며 또 지금 옥중에 계신 장인환형님이 속히 나온다는 소식을 듣고 참 기뻐하였노라. 그가 누구를 위하여 저와 같이 감옥 속에서 신음하는지 우리는 일각이라도 잊지 못할 바이니 이 몇 가지는 여러 형제들이 그 곳서 보고 듣는 것이니 내가 더 부탁할 바는 아니나 잠시 국민보를 불 때에 감격된 마음을 그대로 열어 고하나이다. 사랑하는 형제들이 오늘날 우리가 먼저 구할 것은 자유가 아닌가. 그러나 이것을 얻고자 하면 병법을 배우며 공익과 의협심을 배양할 것이 제일 급무로다. 또 내가 걱정 삼아 한 말씀할 것은 오늘날 미국 각주에서 동양인 배척하는 것이 무슨 원인인지 흑인종상관계와 경제상 문제로 해석한다는 말도 있고 특별히 일본사람을 미국에 귀화권을 주지 않는 것이 제일 일본사람들은 종교신앙심이 없으며 성품이 비열하며 매음녀를 장려하며 기타 잡기 등 여러 가지 악습이 있다 함이니 이 가운데 일본사람의 특별한 악습도 있지만은 인류의 자연성은 아니라. 전염한 악습인 즉 우리 한국 동포들은 아직까지는 이와 같은 배척은 당하지 않았으니 또 감사히 여기는 동시에 경계하기 위하여 또다시 말하나니 우리 신성한 민족은 어디 가든지 저런 비평을 듣지 말지어다.사랑하는 형제들이여 이제 신한민보에 이 글을 써서 일체로 문안하나니 말의 차례도 볼 것 아니며 문체도 없이 이동휘의 문체대로 진정을 고하였으니 일후에 다시 좋은 일과 기쁜 소식은 신한민보에 부탁할 지며 또 듣기를 원하나이다. 자유와 건강을 항상 보중할지어다. 북미합중국(미국) 각 지방에 계신 형제들이여.『新韓民報』, 1914년 2월 19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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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新韓靑年創刊」|| 『新韓靑年』|| 創刊號(1920)" |
백두산의 높음은 너희 청년들의 기개이고,동해바다의 깊음은 우리 청년들의 운명이니라.필봉(筆鋒)이 도끼처럼 예리하여 인도와 정의가 없는 삼도(三島)의 왜인을 영원히 꾸짖고한림학사들은 빨리 봄이 오게 하여 자유와 평화를 사랑하는 우리의 백성들을 부활시켜라.우리 대한 청년남녀의 충성과 절의를 분발시키고중국의 동정하는 사조를 고취시키고동양군국(東洋軍國)의 완고한 고집을 꺾어놓아대륙의 안전과 복지를 증진시키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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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俄領의 韓人|| 誠齋先生談」|| 『獨立新聞』(1919.9.25)" |
旣報와 如히 誠齋 李東暉(이동휘) 先生은 二十二日에 本社를 來訪하시다. 午後 四時에 國務總理께서 오신다는 報道를 듣고 祖員一同은 마음에 期待하고 있었다. 三時半이 조금 넘어 本記者가 編輯을 마치고 끝내려 할 즈음에 先生의 雄姿가 編輯室에 나타나다. 첫 印象이 記者의 想像하던 바와 判異다. 記者는 長軀炯眼의 老紳士를 머리에 그렸더니 實로 先生을 接見함에 豊隆한 體格 凜凜한 態度 多情한 목소리 明哲한 語調가 恰似히 親父를 對함과 같다. 「一日前에는 忽忽히 만나 滿足히 談話치 못하였노라.」 인사를 마친 後에 先生이 먼저 입을 연다. 新聞社의 慨況說明을 開하신 後 發送 等에 對한 注意가 있다. 先生은 記者의 問에 答하여 俄領(러시아령)의 事情을 如下히 述하더라.「俄領(러시아령)의 韓人은 百萬으로 算하나니 적어도 五十萬은 不下할지라. 近來에는 農業以外에 商業界에서도 發展하여 蘇王營에는 韓人商業市街를 이루니라. 敎育現況은 仔細한 調査가 없으나 韓人 五十戶에 一校式은 있으며 今年에 敎育方針을 確立코저 하다가 獨立宣布 後에 稍히 遲延되니라 우랄 以西에 있는 韓人이 約 二萬이오, 其間 大戰에 出戰한 이가 一萬八千이라. 只今은 다 歸還하다….」 先生은 더욱 繼續하여 「今番 大戰 以後로 俄領(러시아령)의 在한 韓人이 不知中에 큰 自覺을 하였도다. 大戰에 參加하여 各色文明利器를 實見한 後로 文明에 對한 自覺이 有하였고 다음에 革命이 起하자 各民族이 제各기 民族自決에 依하여 團合할 때에 韓人도 自決의 決心이 生하지 않을 수 없었다. 韓國사람은 韓國사람끼리 살아야 하겠다는 큰 自覺이 此로써 發하였도다.」 先生은 炯炯한 眼을 熱心으로 빛내면서 수건을 내어 이마에 汗을 씻는다.「俄領(러시아령)에 對한 誤解? 俄領(러시아령)에서 新來者를 歡迎치 않아! 제 行實 잘못하면 待接을 잘 받지 못할 것이요 行實만 잘하면 優待받을 것이라. 제가 잘못하여 몸 못 붙이고 와서 險談하는 말을 信함은 不可라. 三月 以後에 數百名의 人士가 入去하였으되 굶은 사람은 하나도 없다. 먹여주고 입혀 주고 쌀까지 주는데 게서 더한 待接 어디 있겠느뇨. 知識階級에 在한 人士는 마땅히 該地方의 素朴한 風俗을 理解하고 人去키를 願하노라.」 마침 日人이 二大隊를 韓國에 增派한다는 報導를 示하매 先生은 曰「彼等이 암만 軍隊를 더 派送하면 무슨 所用 이뇨? 인제야 집집이 派守를 세우면 어떠리오. 모두 豫期한 바가 아니뇨.」 初秋의 殘暑가 차차 甚할 새 先生의 談話는 끊일 줄을 모르더라.『獨立新聞』, 1919년 9월 2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