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401 |
"「李總理의 動靜」|| 『獨立新聞』(1919.9.23)" |
再昨 二十一日 日曜. 晴 初秋의 好天氣라. 本社의 高蘭坡(고난파) 君으로 더불어 朝九時에 徐家匯 國務總 李東輝(이동휘) 先生을 訪問하다. 連日 陰雨와 氣候不順으로 有名한 上海도 가을 한철은 天高風淸月明하여 多少 半島의 樂園을 戀戀하는 旅情을 慰勞하기에 足하다. ●를 迪하고 館內에 入하니 方今 李 總理, 安 總辦, 孫 議長 民國의 三巨星이 會議하는 中이라. 記者는 重要한 談話에 妨害됨을 未安히 여겨 燐室에서 기다리기 十數分. 언제 보나 微笑하는 安 總辦이 나와 總理의 診察 中임을 말하며 只今 들어 간 一 西洋人이 醫師인줄을 알다. 記者는 安 總辦을 向하여 李 總理의 談話를 들으러 온 意를 告한 대 安 總辦은 先生은 本來 生각하는 것은 다 말하는 性格이니까 무슨 말이나 다 하리라. 지어서 沈默을 守한다던지 하는 것은 先生의 차마 하지 못하는 일이니 이렇게 開放的이오. 率直함이 先生의 性格의 特徵이라 하다.이윽고 李總理가 浴室로서 들어오다. 室內에는 先生과 同行한 金立(김립), 南公善(남공선) 兩氏와 來訪한 張建相(장건상) 氏가 있다. 四, 五分이 지나 李 總理는 浴室로부터 나와 起立하는 一同을 向하여 慇懃히 禮하고 『안되었소. 다 앉으시지오. 只今 診察을 받고 沐浴을 하였소』하다. 「遠路에 얼마나 苦로우십니까」하는 張建相(장건상) 氏의 慰問에 對하여는 簡單하게 多少 關北사투리로 「苦로울 것 있소. 편안히 왔는데」하다. 李軍次(이군차)가 오고 南亨祐(남형우)가 오고 其他 數人의 訪問客이었다. 一同의 視線은 新總理인 老將軍의 一動一靜에 集中하다. 그 炯炯한 眼中으로서 그 바싹 다문 입에서 어떠한 큰 光線과 큰 火焰을 吐할는고. 二千萬의 運命, 二千萬의 自由와 幸福을 담은 先生의 몸이어 康健하실지어다. 하는 默禱로 後日을 期하고 辭退할 제 門外에는 아직도 訪客이 不絶하더라.『獨立新聞』, 1919년 9월 23일. |
5402 |
"「李總理의 談片」|| 『獨立新聞』(1919.9.23)" |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氏는 抵滬以來로 아직도 具體的 意見의 發表가 無하였으나 氏는 어떤 有力한 閣僚에게 語하여 曰 余는 한번 몸을 國家에 獻하여 任에 就하면 光復事業을 完成하기까지 生命으로써 盡瘁하리라. 余의 同僚인 諸 閣員이 從速히 一堂에 聚會하여 余와 快心과 努力을 같이 하기를 希望하고 또 그러할 줄 確信하노라. 余는 急速히 各處에 散在한 諾閣員을 請하기에 힘쓰리라……」 李 總理는 語를 繼하여 曰 「閣員뿐 아니라 內外에 散在한 有力한 人物이 모두 一處에 會合하여 危殆하고 重大한 民族的 運動을 爲하여 同心協力하기를 바라노라. 우리의 所有한 人材와 金錢을 集中함이 아니고 어찌 難局을 脫하여 所期의 成功을 得하리오 하고 更히 語를 轉하여 萬一의 境遇에 處할 道를 說하여 曰 成功은 我等의 一致하여 期待하고 確信하는 바어니와 設或萬一의 磋跌로 因하여 我民國이 列國의 承認을 得하지 못하거나 又는 速히 國土를 敵手에서 恢復하지 못하는 일이 있다고 하더라도 大韓民國의 獨立國家임에는 何等 相關이 無하니 어떠한 困難 어떠한 犧牲이 있더라도 臨時政府의 根基를 鞏同케 하여 마침내 國土를 光復하고 列國의 承認을 得하도록 戮力하여야 할 것은 全 國民의 一致하게 覺悟한 바요 또 決心한 바니 余와 同心同意인가 하노라……」『獨立新聞』, 1919년 9월 23일. |
5403 |
"「總理及三總長就任」|| 『獨立新聞』(1919.11.4)" |
豫定과 如히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內務總長 李東寧(이동녕), 法務總理 申奎植(신규식), 財務總長 李始榮(이시영) 氏의 就任式은 三日夜某所에서 盛大히 擧行되다. 式場을 둘러 보니 正面背景에는 二個의 太極旗가 白熱電燈에 光彩를 發하고 卓上에는 愛國●人會 獻呈인 滿開의 黃紫菊花로써 裝飾되다. 正面 兩柱도 또한 菊花로서 裝하여 哈似하기 동에 花開한 듯 하며 四面 壁과 天井을 가리운 萬國旗도 今夜에는 生色을 더한 듯 하다. 正面을 向하여 右側인 議政院議員席에는 孫 議長, 鄭 副議長 그 下當地在留中인 各議員의 出席이 ●하고 賓席에는 金立(김립), 安定根(안정근), 金枓●(김두●), 안현경, 黃學洙(황학수), 최동호, 軍政府 代表 한경희, 上海 民團長 呂運亨(여운형), 韓人新報 主筆 金河球(김하구), 愛國婦人會 會長 李華淑(이화숙), 醫師 金昌世(김창세) 諸氏 以下로 各團 代表 及 一般 同胞 無慮 三百名의 會衆은 式場을 넘쳐 門外까지 들어 찼는데 其中에는 近日에 內地로부터 新着한 諸君이 多함도 注目할 만하다. 定刻안 七時 三十分에 秘書長이 式의 遲延을 宣布하다. 이윽고 場內에 喝采聲이 雷起하며 李 總理를 先途로 李 內務總長, 李 財務總長, 申 法務總長의 順次로 入場 著席하고 連하여 司會할 安 總辦 及 各部 次長이 此를 隨하니 正히 午後 八時 五分이러라. 會衆이 國歌를 合唱하고 着席할 새 司會가 稍히 戰慄하는 音聲으로 開式辭를 述하여 曰「今日 余의 喜悅은 其極에 達하여 마치 미친듯 싶도다. 我民族이 獨立自由를 世界에 宣布한 以來로 吾族의 目的을 完成키 위하여 立法行政 兩 機構을 組織코 此를 充하되 各地 散在의 頭領을 網羅함은 그네의 聚合을 願함이었으나 일찍 其實이 無하다가 今日에 李 國務總理 以下 三總長이 此地에 來合하여 就任케 되었도다. 此後의 吾族의 統一 더욱 蛩固케 되고 我等의 事業은 더욱 速成하리라. 余의 菲才로써 此에 來하여 孤獨하게 責任을 全擔할 때의 스스로 悚懼함을 禁치 못하다가 今日을 當하니 余一人의 喜悅도 極하다 하리로다……」 一同의 敬禮式이 有하고 李華淑(이화숙) 孃의 獨唱이 有하다. 交通總長 不就任에 關한 司會의 說明이 有하고 各 總長 就任辭에 入할 새 李 總理 起하여 「나는 二千萬 兄弟姊妹의 바라심을 의지하여 이 자리에 나온 同時에 오직 鞠窮盡瘁死而後己 여덟 글자로 獨立完成되는 날까지 내가 나를 盟誓하고 이로써 閣員 以下 執事 諸氏와 二千萬 兄弟姊妹에게 同心協力하심을 믿고 바라나이다.」續하여다. 李 內務總長은 「여러 分을 뵈이니 반갑기 그지 없도다. 오래 저버리고 遲參함이 罪悚할 뿐이로라. 從此로 諸同胞의 意를 받아 全力을 다 하고저 하노라.」申法務總長은 「不肖余는 國民의 받드심과 議政院의 저버리시지 않음을 받아 此席에 進하였노라. 余는 此席에 進함을 스스로 躊躇하였으나 今에 다만 一個의 信念을 가지고 나왔노니 오직 余의 赤誠이 是라 또한 諸國民의 愛護와 근심을 信하는 信念을 持함이며 病席에 在할 때에 余는 神께 求하여 新生命을 受함을 確信하노니 從今으로 四千年 歷史의 光彩를 回復코 千萬年 未來를 計하는 事業에 余의 맡은 責任을 삼가다 하고저 하노라.」 李 財務總長「余는 從此로 殫誠竭力하여 光復畢業의 前途를 開拓하고자 하노라.」 安 總辦의 發聲으로 大韓民國 萬歲 臨時大統領 李承萬(이승만) 博士 萬歲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閣下 萬歲 及 各部 總長 萬歲를 各各 三唱하니 場內가 크게 振動하다. 司會가 閉式을 宣言하니 午後 九時라.『獨立新聞』, 1919년 11월 4일. |
5404 |
"「李總理就任」|| 『獨立新聞』(1919.11.4)" |
李 總理의 就任은 오래 紛糾하던 時局을 收拾하기에 足하리라. 承認이니 改造니 함은 法律上의 一節次의 差에 不過하니 同是 大韓民國의 臨時政府가 아니며 同是 漢城에서 組織한 政府와 閣員과 同一한 閣員이 아니뇨. 只今은 이러한 小節次로써 時間과 精力을 虛費할 時期기 아니라. 여러 가지 私情이 有함을 不拘하고 李 總理가 今日의 勇斷에 出함을 感謝하노라. 或 就任 後의 諸閣僚의 意思의 一致를 憂慮하는 者도 있거니와 諸氏의 至今까지의 不一致는 오직 承認改造의 一點에 있었을 뿐인즉 此 問題만 解決되는 날에는 如此한 것은 杞憂리라. 諸氏는 모두 二十年 來의 國士니 비록 多少의 意見이 不合함이 있다 假定하더라도 此時를 當하여 此로써 大局을 誤하는 듯한 行動은 決코 없기를 確信하나니 文 交通總長도 速히 就任하여 和氣靄靄한 中에서 國民의 期望에 報하기를 祝하노라.『獨立新聞』, 1919년 11월 4일. |
5405 |
"「國務總理布告」|| 『獨立新聞』(1919.11.20)" |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氏는 呂運亨(여운형) 一行 渡日에 關하여 布告 第一號를 本月 十五日에 頒布하다. 其內容은 呂氏 以下 二人의 此行은 純全히 單獨的 行動이오. 臨時政府와는 아무 관계가 없음을 聲明함이라.『獨立新聞』, 1919년 11월 20일. |
5406 |
"「李總理布告에 對하야」|| 『獨立新聞』(1919.11.20|| 2종) " |
李 內務總長은 往訪한 記者에게 語하여 曰 呂運亨(여운형) 氏 日本行에 關한 李 總理의 發行한 布告는 純全한 總理 一人의 獨行이오. 國務會議와는 아무 關係없노라. 原來 이런 일은 처음부터 問題로 못할지니 아직 그 利害 得失의 結果를 보지 못함일 새라. 勿論 布告의 本意인 즉 呂氏의 此行이 純全한 個人資格으로요 政府와는 아무 關係없음을 聲明하려 함에 在아니라 또 呂氏가 무슨 誓言을 政府에 對하여 發하였다 함은 나는 全然히 不知하노라. 呂氏와 李總理와의 本問題에 關한 交涉은 나 亦是 李財務總長과 함께 參觀하였지만 나는 다만 李總理의 「絶對獨立을 主張하는 此日…云云에 對하여 呂氏는「그러면 누구는 自治를 運動한단 말이오.」하고 서로 詰難하는 것만 보았노라. 李 總理 布告에 對하여 今番 呂運亨(여운형) 氏 一行의 渡日에 對하여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氏는 別도의 布告文을 發하다. 그 文意로 보건대 呂運亨(여운형) 一行은 獨立以外의 무엇을 求하는 듯하여(民族의 羞恥) (獨立의 毒菌이라고까지 極言하였으나 只今까지 各新聞에 드러난 것을 보건대 呂氏의 此行은 오직 絶對獨立을 主張하려함)이며 또 呂氏의 性格과 過去의 來歷과 功績으로 보더라도 決코 獨立運動에 害될 行爲를 할 人物이 아니오. 또 氏와 同行한 張德秀(장덕수), 崔謹愚(최근우), 申●琓(신●완) 三氏도 自初로 獨立을 爲하여 盡誠力하던 者라. 그럴진대 政府로서 布告할 것은 오직 呂氏의 此行이 個人의 資格으로 한 것임과 或 日人이 呂氏의 言을 變改하거나 僞造할 憂慮가 있음을 內外에 周知케 할 뿐일지라. 功績많고 有爲한 同志를 輕率히 攻擊하여 그 名譽와 前途를 害함은 너무 刻薄 不人情한 일이 아니뇨. 또 듣건대 此 布告文에 對하여 總長 中에도 잘 모르는 이가 있다 하고 여러 次長들은 全혀 모른다 하니 實로 疑心이 되도다. 이만한 問題를 一, 二人의 獨斷으로 함은 우리 理解치 못하는 바로라.『獨立新聞』, 1919년 11월 20일. (2종) |
5407 |
"「總理令孃別世」|| 『獨立新聞』(1919.12.27)" |
李 國務總理 令孃 仁橓(인순) 氏는 十一月 二十二日 西伯利亞(시베리아)에서 辭世하다.孃은 일찍 江華 普昌小學校를 修了하고 또 京城貞信中學校를 畢한 後 咸興, 城津 等地에서 女子 祖會와 敎育界에 獻身하다가 父親을 隨하여 海外에 出하여 無限● 甘苦를 嘗하면서 北間島 局子街 吉新女學에 數年 敎授하는 동안 婦人會를 創設하였고 其後는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三一女學校에 在하다. 獨立運動 開始後로 各地에 婦人獨立會를 組織하여 熱心活動 中이었다. 孃의 訃報는 一般 人士에게 多大한 愛惜의 感을 주다. 李 總理는 此 信을 接하고 悵然한 顏色으로 獨立血戰에 죽지 못함만 恨이라 하다.『獨立新聞』, 1919년 12월 27일. |
5408 |
"「三愛國女史의 追悼會」|| 『獨立新聞』(1920.1.22)" |
本月 十七日 下午 二時에 駐滬 大韓愛國婦人會의 主催로 故 河蘭史(하란사), 故 金敬喜(김경희), 故 李仁橓(이인순) 三 愛國女史의 追悼會를 康寧里 民團事務所內에서 開하였는데 愛國婦人會員 二十餘人이 出席하였고 來賓으로는 勞動局總辦 安昌浩(안창호) 氏, 國務院秘書長 金立(김립) 氏, 財務次長 尹顯振(윤현진)氏와 其他 駐滬하는 有志紳士 三十餘 人이러라. 愛國婦人會長 李華淑(이화숙) 氏가 簡單히 開會辭를 述한 後 婦人中에 追悼歌를 合唱하고 金順愛(김순애) 女史가 故 金敬喜(김경희) 女史의 略歷을 述하다. 故 女史는 光復事業에 獻身하여 獨身生活을 營하였고 重病中인 身으로 本國과 中國으로 往來하면서 熱心運動하다가 昨年에 三十二 歲의 芳齡으로 逝世하였다고 다음에 金元慶(김원경) 孃이 故 李仁橓(이인순) 女史의 略歷을 述하는데 李 女史인즉 現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氏의 長女로 端川에서 生하고 漢城에서 長하고 江華 普昌女小學校를 卒業하고 다시 漢城 蓮洞 貞信學校를 卒業한 後에 十七 歲의 妙齡으로 咸興과 城津과 間島에서 敎鞭을 執하여 女子敎育에 盡瘁하고 隱密히 其大人의 獨立運動을 幇助한 力이 多大하며 또 女子界의 改造로써 目的을 삼고 貢獻한 事가 多한데 昨年 十一月에 妙齡 二十七歲로 逝世하였다며 李華淑(이화숙) 氏가 故 河蘭史(하란사) 女史의 略歷을 述하는데 故 河女史는 安州의 出生으로 漢城 河相驥(하상기) 氏와 作配하였고 淸日戰爭 後에 小日本이 大中華와 戰爭하여 勝利함을 聞하고 異常한 感想이 起하여 其 原因을 問한 즉 國民의 自覺과 敎育의 發達함에 在하다 함을 聞하고 甚히 愁心 中에 在하였더니 河相驥(하상기) 氏가 其故를 問한 後 卽時 梨花學堂에 入學시켰다가 更히 日本留學生이 되어 日本東京 慶應義塾에 一年餘를 工夫하고 歸國하였으며 其後에 徐載弼(서재필) 氏가 貞洞禮拜堂에서 美國人 男女의 活動하는 狀態를 演說함을 듣고 크게 感動을 받아 美國에 留學하기로 決心한 後 河相驥(하상기) 氏와 同伴 渡美하여 美國 오하이오州 웨슬렌大學에 入學하여 甘苦를 많이 받되 秋毫도 落心하지 않고 熱心 做工하며 또 貧寒한 同窓生을 扶助한 일도 적지 아니한데 畢竟 成業한 後 歸國하여 第一 着手한 것은 故 美國大統領 아브라함 링컨氏의 黑奴放釋함을 思하고 自己家庭의 奴婢를 解放할뿐 아니라 昇格하여 子女로 待遇하고 또 梨花學堂에서 敎鞭을 執하고 女子 敎育에 盡力할 뿐아니라 靑年 女子에게 祖國精神을 鼓吹하며 女子道德을 養成하기 爲하여 聖經學院을 設立하며 各 會堂에서 熱心으로 聖經을 敎授하였고 四年 前에 監理會 平信徒 代表로 美國總會에 出席하여 大韓敎會와 信徒의 狀況을 詳細히 報告하여 多大한 好影響이 有하였고 閉會 後 一個年間 美國에 逗遛하여 神學을 硏究한 後 歸國하여 梨花學堂에서 다시 敎鞭을 執하였더니 昨年 春에 義親王의 密囑을 受하고 巴里講和會議에 出席하려고 北京에 와서 旅行을 準備하던 中 不幸히 流行性 感冒에 罹하여 同年 四月 十日에 北京에서 四十五歲의 壯齡으로 逝世하였다 하고 其後에 金連實(김연실) 孃이 追悼歌를 獨唱하고 愛國婦人會 會員 中 金敬愛(김경애) 氏가 懇切한 追悼辭로 來賓을 勸勉하고 來賓 中 金泰淵(김태연) 氏가 深切한 追悼辭를 演하고 會長의 引導로 一同이 起立하여 愛國歌를 合唱하고 閉會하니 時 正 下午 四點 鐘이러라.『獨立新聞』, 1920년 1월 22일. |
5409 |
"뒤바보|| 「海嚴鄭君長逝」|| 『獨立新聞』(1920.4.10)" |
李 國務總理의 女婿 海巖 鄭昌贇(정창윤) 君은 現 國務總理 李東輝(이동휘) 氏의 女婿이라. 昨年 十一月 夫人 人橓(인순) 氏(李 總理 令孃)와 五 歲 男 光宇(광우)가 一時 俱沒함에 지난 一月 二十七日에 悲壯히 飮藥殉節하다. 氏의 在世 時의 經歷과 性格은 別項의 弔錄에 讓하고 여기는 氏의 別世文을 錄하노라.宇宙여네 품속에 사는 萬類中動物動物中에 貴賤이었느냐尊貴도 있느냐大小도 있느냐欲望도 있느냐快樂도 있느냐苦痛以外 무엇인지解得치 못하였노라宇宙의 答辯이 없으니까이 動物을 마음 풀지 못하노라世上아生何死何情何無情何너도 또한 알치 아느니海巖은 너를 등지고저『獨立新聞』, 1920년 4월 10일. |
5410 |
"「安泰國追悼辭」|| 『獨立新聞』(1920.4.15)" |
四月 十一日 午後 七時 半 大韓의 忠誠된 愛國者 東吾 安泰國(안태국) 先生은 榮光스러운 大韓의 獨立 -- 그의 生命이던 大韓의 獨立 -- 寤寐의 所念이요 所願이던 大韓의 獨立의 完成을 보지 못하고 上海 中國 紅十字會 總醫院 十六號 病室에서 溘然히 世를 別하다. 上海에 在한 모든 同胞가 哀情으로 哀悼의 意를 表하는 것 - 李 國務總理가 放聲大哭하신 것 – 이 글을 읽고 이 말을 듣는 內外의 同胞가 모두 이 急한 時機에 忠誠스러운 指導者를 失한 것을 哭하는 것 – 내가 只今 눈물에 붓을 적셔 이 글을 쓰는 것이다. 合當한 일이로다. 우리의 哀悼는 皇帝가 死함을 哀悼하는 哀悼도, 權力있는 者가 死함을 哀悼하는 哀悼도 아니라, 親愛한 兄弟, 많이 믿던 指導者, 誠實하고 愛惜하던 同志者의 死함을 哀悼하는 哀悼니 우리의 哀悼의 淚는 心底에서 끓어오르는 熱淚로다. 假裝함이 없고 誇張함이 없는 哀悼로다. 왜? 先生은 權力을 가진 이도 아니라. 金力을 가진 이도 아니라. 學識이 超越하거나 風雲을 起하고 歛하는 所謂 手腕을 가진 이도 아니라. 그는 그다지 名聲이 赫赫하고 威光이 凜凜한 이도 아니며, 그는 또한 多數의 部下를 引率한 頭領도 아니라. 그는 一個의 純然한 布衣라, 그에게는 權力이나 金力이나, 朋黨이나, 名利에 關한 아무 野心도 없는 淸廉하고 恬淡한 一個 布衣라. 그는 果然 我國의 最大한 政治的 秘密結社이던 新民會의 中心 人物의 一人이었었고, 眞正한 國民改造의 自覺으로 일어 났던 (合倂의 霜雪에 萌芽로 枯死하였거니와) 靑年學友會의 發起人(恆用 世上에 있는 發起人 말고 徹底한 主義와 經綸과 實行을 具備한)의 一人이었었고 또, 따라서 所謂 總督暗殺 陰謀事件이란 것에 中心 人物의 一人이었나니 이것이 어찌 우리 志士 安東吾(안동오) 先生의 歷史를 ●●履歷이 아니리오, 世上의 志士에가 모두 虛되고 僞된 目的을 立하고 虛되고 僞된 手段으로 虛되고 僞되게 言하고 行할때에 民族 萬年의 大計는 實力(知識과 德性과 團結과 人材의 養成과 實業의 發展 等)을 基礎로 한 民族의 改造에 있다하여 一邊 新民會로서 全國內 愛國者의 團結과 敎育 及 實業機의 設置를 實行하며 一邊 靑年學友會로써 有用한 人材 - 國民의 中樞가 될 人材의 養成 及 團結에 힘쓰던 그 識見과 功德도 嘆服할 바이라. 이것을 비록 先生 個人의 事業이 아니오. 여러 同志(現在 或은 政府에서 或은 野에서 獨立運動의 幹部가 된 李 總理, 李 內務, 李 財務, 安總辦 等 諸名士)의 合力의 事業이라도 先生이 그 中에서 가장 重要한 努力을 한 것은 그 同志 諸氏의 共認하는 바라. 그러나 내가 이에 가장 先生을 敬慕하고 따라서 가장 先生의 別世를 哀悼하는 것은 以上의 모든 功績에 在하지 아니하고 다른 一點에 在하니 이 一點이야 말로 過去우리 志士間에서 求키 難한 特點이오 또 現在 及 未來의 우리 愛國者의 模範이 될 點이며, 따라서 先生을 우리 中에서 失하는 것이 가장 哀痛한 點이라. 그 一點이란 무엇이뇨.「十年이 一日과 같이 同志와의 盟約을 不變함.」이라. 늘 「믿을 만한 사람」, 「信義의 사람」으로 있었음이라. 아아 그때에 - 十五年 前에, 또는 十年前에 얼마나 愛國者가 많고 志士가 많았더뇨. 얼마나 慟哭하는 者가 많고 當場 죽으러 나가자는 者가 많았더뇨. 그러나 그네가 다 只今 어디 갔나뇨. 또 그때에 – 十五年 前에 十年前에 同志의 盟約을 結한 者가 얼마나 되었더뇨. 무슨 會, 무슨 團은 만들고, 或은 山中에서 或은 天을 指하여 日月과 神明을 指하여 一志를 同히 하고 死를 同히 하고 生을 同히 하자고 鐵石같이 盟約한 者가 몇 千百이었을지나 그들이 只今 어디있나뇨. 或은 죽은 者도 있으리라. 或은 敵에게 買收도 當하였으리라. 或은 所謂 落心도 하였고, 或은 남의 바람에 나뛰다가 無形無臭하게 쓰러지며, 또 或은 苦生과 不便을 不堪하여 退●도 하였으리라. 이러한 無信, 無誠, 薄志冷情한 中에서 或은 獄中의 苦楚, 或 天涯의 流離, 或은 時局의 悲觀, 或은 同胞의 冷落 等 온갖 困難을 무릅쓰고 十年 一日과 같이 愛國者의 初志를 貫徹한 者가 몇 사람인고. 先生은 實로 이러한 貴한 人物 中에 한 사람이로다. 合倂 當時에 모든 同志들이 다 時局의 非함을 깨닫고 或은 將來를 準備하려 하여, 或은 一身의 安全을 圖하여 國을 去할 제 先生은 泰然히 「나까지 떠나면 國內의 모든 經營을 어찌하랴.」 (이는 安島山을 向하여 하신 말씀) 하여 國內에 留하다가 마침내 保安法 違反 과 連하여 所謂 暗殺陰謀事件에 걸리어 六七年間 冷獄의 苦楚를 겪었고 警務總監部의 惡刑에 모두 或은 同志를 連累케 하며 或은 있는 말 없는 말을 집어 대어 事件을 더욱 錯綜케, 禍害를 더욱 廣汎케 하며 或은 悲泣哀乞의 醜態를 敵의 面前에서 現할 때에 泰然히 國士의 態度를 不變하고 禍를 同志에게 及하지 아니한 勇壯한 少數 國士 中에 一人이며,至今 또 혹 愛國者로는 不變하면서도 天地에 誓約한 誓約을 廢棄하고 各기 自己의 利害와 便宜를 向하여 달아나는 當時의 同志들 中에 隕命의 瞬間까지 그 誓約을 死守할 貴한 國士 中의 一人이라. 아아 信義의 人, 忠誠의 人, 우리 中에 이러한 國士가 幾人이나 남았으며 現在의 靑年들 中에는 幾人이나 되냐뇨. 이번 上海에 來하자마자 政府가 그에게 中·俄領(중국·러시아령) 統一에 關한 折衝의 大任을 委하려 先生은 「國家의 命令이면 무엇이나」라 하여 身體의 哀弱함도 不願하고 곧 登程하려 하였다 하며, 또 先生의 人格은 政府 當局이나 中·俄領(중국·러시아령)의 人士나 모두 信任하는 바인 것은 政府가 先生의 來滬未幾에 이 大任을 委함과 北墾島의 各派 代表者가 共히 先生의 行을 歡迎하고 그의 成功을 確信하며 아울러 그를 爲하여 全力으로 援助하기를 快諾할 것을 보아서 알지라」 아아 先生은 가시도다. 天生의 愛國者, 信義의 人, 忠誠의 人, 節槪의 人으로 我國民의 뚜렷한 模範이 되는 先生은 가시도다. 가신 이를 爲하여 慟哭함이 何益이랴. 願컨대 大韓의 男女 中에서 先生의 性行을 본 받는 愛國者가 많이 나기만 바라노라.『獨立新聞』, 1920년 4월 15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