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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 安昌浩氏 慈親 昨日別世(『東亞日報1930.3.1) |
【평양】 저간 노환(老患)으로 위독을 전하던 도산안창호(島山安昌浩)씨의 자당(慈堂) 황씨(黃氏)는 이십칠일 오전 열시 반 이십여년 전 해외에 망명한 아들을 만나지 못한 채 팔십삼세의 고령으로 강서군 동진면 고일리(江西郡 東盡面 高逸里) 자택에서 별세하였는데 장례(葬禮)는 오는 삼일(月曜)에 행할 터인 바 동일 오후 한시 발인이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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雅號의 由來(二) ; 春園과 長白山人[李光洙](『三千里』1930.초하) |
나는 맨처음에 「孤舟」라 하였다. 끝없이 망망한 큰 바다위에 외로이 뜬 배 – 그 배가 지향없이 흘러 가는 것이 어쩐지 나의 少年時代의 사정을 그린 듯하였다. 그러나 「외돛」이라 함이 나의 고단한 가정과 나의 외로운 신세를 너무나 핍진하게 그린 듯하여 十七八年 前에 「春園」이라 고치었다. 春園이라 하는 뜻은「올보리」에서 나온 것이니 「올보리」라 함은 五月麥으로 農家에서 이른 보리로 먹는 것이다. 비록 다 익지는 못하였다 하여도 糧食이 없는 晩春의 農民들은 그 보리를 緊要하게 食糧에 代한다. 이 뜻은 나의 才分이 다 익지는 못하였더라도 그래도 여러가지로 不足한 여러분에게 이 몸이 一助가 되려 하는 뜻으로 그런 즉 五月麥은 봄產物이라 春字를 따다가 그 아래에 동산원자를 붙여 春園으로 한 것이니 이것이 決코 처음부터 雅號로 쓰자던 것이 아니고 假名으로 使用하자던 것이 結局 號로 되고 말았다. 또 「長白山人」이라 하는 뜻은 내가 上海에 있을 때 島山안창호(安昌浩)氏가 날더러 「長白」이라하라 하였다. 그 理由는 그때 그 분이 세가지 條目을 들어 주었는데 첫째 - 長白이라 함은 長白山 아래에서 났으니 即 朝鮮에 났으니 長白이 可하고둘째 - 長白은 潔白을 表함이니 可하고셋째 – 돈이 없으니 乾達이란 뜻으로 可하다.함이 있다. 그 중에도 셋째 條目의 돈이 없다함은 때의 나의 身勢를 表現한 말이었으니 上海있던 그 추운 겨울에 옷이 없어서 나는 흰 옷을 입고 지내었다. 그래서 어쩐지 그 건달이란 말이 옳은 듯 하여 「長白」 이라고 小說 쓸 때에 쓰기 시작한 것인데 上海의 旅館에 있을 때는 대개 變姓名하고 있었기에 그럴때 마다 늘 「이장백(李長白)」이라고 써왔던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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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 安昌浩氏의 活動[李光洙](『三千里』1930.7) |
島山 안창호(安昌浩)先生은 지금으로부터 五十四年 前인 乙未年에 平安南道 江西에서 낳았다. 家勢가 그렇게 富裕하거나 그리 큰 名門의 出은 아니었지만은 점잖은 집안의 둘째 아들로 태어나서 어릴때부터 그 고을 書堂으로 다니면서 四書五經을 배웠다. 그 때의 訓長과 書堂 동무들이 지금은 어디에 있는지 알 길이 없어서 在學時代의 島山의 재주를 물을 바가 없으나 村老들이 간혹 전하는 말을 듣건대 어릴 때 부터 잘생긴 뚜렷한 그 얼굴 바탕과 聰明하고 글 잘짓고 말 잘하는 才童으로 이름이 있었다고 한다. 그러다가 열일곱살 되는 해에 딴 뜻을 품고 平壤으로 나왔더라 한다. 平壤으로 나올 때는 총각의 몸이라 언젠가 「先導者」라는 小說속에서도 대강 記述하였지만 그 때 江西에 傾城의 佳人으로 치는 젊은 寡婦가 있었는데 그가 島山先生을 熱慕하는 나머지 앞고개 마루턱까지 따라나와서 같이 데려가 달라고 눈물 흘리며 애원하기에 靑春인 島山의 가슴 속에도 相克하는 이 愛慾의 불길 때문에 한참은 괴로웠었다 한다. 그러나 일단 마음을 결정하여 鄕閭를 나서는 몸이라 애틋한 그 少婦의 사랑을 받아 들이기에는 너무 男兒의 뜻이 굳었다. 그제는 그 少婦는 왼손 無名指에 끼었던 은가락지 한쌍을 주섬주섬 빼어서 島山을 주며 路資에 보태 쓰라고 하고는 저는 버드나무 뒤에 숨어 島山의 그림자가 앞산 고개너머 가물가물 아주 사라질 때까지 멀리 서서 바라보고 있더라 한다. 필연 애꿎은 버들가지를 휘여잡고 눈물을 흘려가며 그리운 사람을 보내고 있었으리라. 뒷날 上海에서 島山은 날더러 그 때 이야기를 하며 적적한 낯빛을 짓더라. 그가 平壤에 간 뜻은 독립협회라 하는 結社가 平壤에 있어서 四處로 人材가 모이고 무슨 큰 經國의 이론이 벌어진다기에 勃勃雄心을 참을 길이 없어서 간 것이다. 그곳에서 亦是 平安道 사람인 「畢大榮」이란 분을 相交하게 되었다한다. 필대영(畢大榮)氏는 그 當時 島山보다 四年長인 스무살이었으나 일찍 서울에 올라가서 서재필씨의 感化를 많이 받고 또 演說도 많이 들어 그 當時 新思想의 尖端을 걷던 靑年이었다. 그로부터 여러가지 時代形便을 듣는 島山의 마음은 굳게 決心되는 바 있었던 모양으로 그 제는 畢氏와 같은 旅館에 묵으면서 밤을 새워 가며 時世를 痛論하였다 한다. 그러자 平壤의 여러 뜻 있는 사람들은 萬民共同會의 支會를 設置하고 하루는 淨碧樓에서 時世에 對한 큰 演說會를 열었는데 그 자리에 平壤監司이하 웬만한 官吏와 民間의 志者들이 數千名이 모였더라 한다. 그 때 島山은 일어나 一場의 演說을 하였는데 感이 極하여 壇上의 人도 울었거니와 壇下의 數千 群衆도 눈물을 흘리기를 마지 않았다 한다. 이것이 島山으로 一生에 처음하여 본 演說이자 또 平壤 天地에 안창호(安昌浩), 안창호(安昌浩)하는 소리가 높게 울리기 시작한 첫 발단이라고 한다. 그러다가 未幾에 그는 서울의 中央舞台로 뛰어 올라왔다. 그러나 온갖 團體와 政客들과 사귀어 보다가 結局 큰 見識을 기르는 것이 急務라 하여 이강(李剛)과 또다른 靑年 한 사람과 모두 셋이 美國을 向하여 留學의 길에 올랐더라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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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國暗行記(五) ; 安昌浩氏와 邂逅[金武吉](『朝鮮日報』1931.3.30) |
上海의 碼頭(棧橋)는 大端히 混雜하였다. 汽船에서 내리는 사람 오는 客을 迎接하는 사람 船人 人夫 稅關官吏(英人) 汽車(自動車) 黃包車(人力車) 馬車 – 미처 길을 찾아 나갈 수가 없이 人波가 웅실거렸다. 이곳저곳에서는 저마다 自己의 客棧(旅館)으로 끄는 소리 저마다 自己의 洋車를 타라고 勸하는 소리 – 모두 長袖를 휘저으면서 외치고 또 외쳤다. 朝鮮사람이라고는 今春에 善成專門을 卒業하고 다시 負笈의 길을 떠나 오는 김성주(金成柱)氏와 記者 이렇게 두 사람이 내렸을 뿐이다. 우리는 車를 잘 얻어타지 못하고 彷徨할 때에 마침 염온동(廉溫東)氏가 바쁜 視務도 내버려 두고 好意로 나와 주셨다. 우리 一行은 自動車를 타고 廉氏의 指導하는데 맡겨서 프랑스界霞飛路로 向하였다. 共同租界의 무슨 銀行이니 무슨 洋行이니 무슨 公司니 무슨 領事館이니 하는 큰 建物을 지나고 黃浦江 支流에 걸친 가든브리지를 지나서 未久에 霞飛路를 감돌아 섰다. 廉氏는 自己의 妻家로 臨時案內하여 주었다. 그곳에는 中國 女服을 한 婦人이 있어 퍽 반갑게 맞아 주었다. 暫時 앉아 있는 동안에 大門을 두들기는 소리가 數次나더니 三人의 紳士가 쑥 들어선다. 廉氏는 그분들에게 우리를 紹介하여 주었다. 그것은 너무도 意外였다. 그 中의 한분은 島山 안창호(安昌浩)先生이었다. 한분은 선우혁(鮮于爀)先生 또 한분은 不分明하였다. 島山의 素顔 記者의 好奇心은 極度로 날이 섰다. 그렇지 않아도 中國을 떠나오기 얼마 前에 春園과의 座談 中에서 『中國 가시거든 島山을 꼭 찾아보시오. 반드시 有益하리다.』 이것이 春園의 付託이었던 만큼 또 그렇지 않다해도 벌써부터 누구나 잘 알고 있는 島山의 面影이 果然 어떠한가? 하고 궁금히 생각 하던 次였다. 記者는 島山의 政客的 風貌를 보려 하기보다도 氏의 赤裸裸한 素顔을 보고 싶었다. 氏의 熱辯에 感激되기 보다도 먼저 默默한 人格을 보고 싶었다. 이번의 機會야 말로 絶好한 찬스라고 속마음으로 『스케치북』을 準備하였다. 그리고 記者는 正體를 감추기 爲하여 渡來한 用務와 身分을 말하지 않고 다만 姓名 三字만 아뢰었다. 氏는 전무길(全武吉)이란 이름을 有心히 귀담아 듣는 듯 싶지 않았다. 氏는 아무 假飾없는 態度로 먼저 어느날 到着하였으며 어디를 經由하여 왔느냐? 하고 親切히 물어 주었다. 그것은 아직도 때벗지 못한 平安道 사투리었다. 數分後에 氏는 찾아온 用務를 主人에게 말하고 있었다. 그것은 上海 居留하는 同胞를 中心으로 消費合作會社를 發起한다는 것이었다. 氏의 天頂은 훨씬 벗어지고 빛나는 것이 凡人 以上의 聰明을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高齡은 아니건만 벌써 귀밑에는 白髮이 八分이요 나오는 말소리에 氣力이 적고 볼이 패여 들어간 것으로 보아서 氏가 當한 數十年間 海外風霜이 얼마나 고된 것이었던가? 하는 것을 觀察할 수가 있었다. 氏의 容顔에서 젊은 빛을 찾으려면 로이드式 眼鏡을 걸친 것이라 할까? 그러나 그 眼鏡의 度數도 이미 깊어진 것을 어찌하랴. 푸르스름하고 기다란 米國式 外套랄지 검으테테한 洋服이랄지 빛 낡은 구두랄지 어디나 當世의 革命家의 面目으로서는 너무나 純朴하고 너무나 溫厚하여 보이면서 過度하게 지친 빛이 보인다. 그러나 열길 水中의 일은 可測이라 쳐도 한길 島山의 속이 얼마나 넓고 깊은 것을 얼른 알기에는 記者의 가진 機會가 너무나 짧었다. 島山은 記者가 好奇心을 가지고 一動一靜을 注目하는 줄을 모르는 模樣 氏는 連放旅館을 定할 것을 念慮해 주고 一便消費合作社 일에 바쁘다는 듯이 番갈아서 한마디씩 하였다. 조금 後에 氏는 結局 다른 同胞의 집을 尋訪하기로 하고 同行 中이던 鮮于氏에게 案內 役을 맡기어 버렸다. 作別의 握手를 할 때의 島山의 손에서는 따스한 氣운을 맛 볼 수가 없었다. 그것은 老衰한 사람에게서 흔히 볼 수 있는 現象이었다. 그 外에도 十餘年 間이나 海外에서 가진 辛苦를 맛보고 있는 여러 先輩와 商業을 經營하는 諸氏를 만나 볼 機會가 있는 것을 僥倖으로 생각한다. 어떤 사람은 中國 婦人과 結婚하여 子女까지 두고 滋味있는 生活을 하는 분도 있었지만 大槪는 生活에 쪼들려서 窮乏에 우는 同胞가 많았다. 만나 뵌 先輩들에 對해서는 쓰고 싶은 말이 많지만은 後機로 뵙기로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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在扈 先輩들의 印像(四) ; 豪賢한 安昌浩氏[全武吉](朝鮮日報 1931.6.9) |
島山 안창호(安昌浩)氏에 對해서는 月前에 中國暗行記 中(第五)에서 暫時 紹介한 바 있었거니와 當時의 것은 電逢電別한 初對面의 浮薄한 印象的 短片으로서 너무나 不足을 느끼기 때문에 다시 數言을 費코자 한다. 記者가 島山先生을 會見할 機會는 僥倖히 많았다. 第二次의 會見은 마침 그때에 先生이 持導하는 興士團의 定例會合이 있어 講演을 請하기에 다만 好意에 答코자 敢히 나갔을 때거니와 그 자리에서 一世의 雄辯家인 氏의 寸言이나마 들을 수가 있었다. 興士團의 會合 – 그것은 記者의 젊은 가슴을 울릴만큼 힘찬 歡喜를 주는 것이었다. 그다지 크지 않은 長方形의 講堂에는 男女團員이 가득히 모였다. 司會者의 指示대로 一同은 團의 儀式의 하나인 擧手로써 彼此에 宣誓와 敬意를 表한다. 그리고는 壯重하게 愛國歌를 불렀다. 그것은 일찍이 듣지 못하던 - 畧 – 노래였다!(中略) 第三次의 會見은 先生의 請으로 午餐을 같이 하면서 長期間 高見을 들을 수가 있었다.氏는 一言一句를 다만 眞勇한 態度로만 말한다. 모든 體驗을 綜合하고 考究하고 思索해서 確信있는 斷案을 얻고서야 비로소 말한다. 氏가 朝鮮이 낳은 唯一의 雄辯家란 稱號를 받는 것도 그것이다. 만일 才操로만 修飾하는 所謂 才辯과 달라 참되고 切實하고 心的 經驗에 合理되는 眞勇한 말을 하기 때문인가 한다. 그리고 病軀들이 끌고 다니며 富際關事에 從事하는 까닭이다. 記者는 先生과 마주 앉아 여러가지 問題에 對하여 高見을 물었다. 記者 『私有財産制度에 對하여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島山 『萬一 내가 政治를 한다면 生產機關은 國有로 하겠습니다. 土地도 一般에게 - 中略 - 耕作케 하고 國稅를 除한 全 收益은 各人의 私有로 할 것입니다…. 』 記者 『前略 - 相續制는 勿論없을 테구요』 島山 『勿論 生產機關을 私有같이 相續할 수는 없습니다. 많은 傳統과 勞功을 尊重해야 使用權을 繼承시킬 것입니다. 繼承者없으면 國家가 달리 處分하지요. 그리고 모든 것을 民族을 單位로 하겠습니다.』 記者의 疑問에 對하여 先生은 이렇게 答辯하였다. 『朝鮮에서 흔히 民族主義 云云하지만은 도무지 理論의 體系를 세운 것이 없어 民衆을 原理的으로 指導할 수 없는 것이 遺憾인듯 하오나 現在 中國에는 漠然하나마 三民主義가 指導原理가 되고 러시아는 共産主義 이탈리아는 파시즘 印度에는 간디의 主義 等이 各其 統制理論이 되지 않습니까? 그것이 없어서 民衆이 進路에 헤매이는 點이 많은 것입니다.』 島山 『어- 勿論 있으면 좋겠지요. 朝鮮에도 世界的 學者가 나서 그렇게 國情에 맞는 理論을 體系 세워 주었으면 感謝할 일이지만 그렇지 못한 以上 嘆息만 할 것은 아닙니다. 古今으로 自由를 獲得한 國家가 반드시 原理가 있어서 成功한 것이 아니라 다만 그대로는 살 수가 없으니까 『살자는 運動』을 한 것입니다. 『사는 것』이 原理겠지요. 우리도 그와 마찬가지겠지요….』 記者 『先生님 이때까지 말씀한 것은 마치 孫文(쑨원)의 建國防略와 같은 性質의 것입니다. 이제 餘年이 길지 못하시겠고 또 只今 情勢로는 積極的 運動이 效果가 적은 細音이니 著述에 着手해 보시면 어떠실까요? 後進에게 有益할 터인데요』 島山 『이제 새삼스럽게 著述을 하기도 困難합니다. 一濟와 諸般使宜와 生活環境이 許치 않습니다. 拙見이나 만들어다가 그것을 體하여 著述하겠다는 분이 있다면 몇마디 參考될 말은 해 주겠습니다.』 記者는 先生의 白髮을 쳐다 볼 때도 그러했거니와 只今도 쓸만한 材料를 드려서 敢히 先生 高見을 두드려 보았으나 先生의 博學과 經驗과 考究는 標 모은 것을 準備해 가지고 있었다. 溫厚하고도 强直한 性格의 所有者인 先生은 우리의 石일 것이다. 길이 先生의 健康이 維持되기를 바랄뿐이다.(寫眞은 安島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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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舜巨과 安島山[李光洙](『三千里』 1931.성하) |
巴人兄 요새 弟는 「이순신(李舜臣)」을 쓰기에 寸暇가 없습니다. 約二個月 來로 밤낮 이순신(李舜臣)과 壬辰亂만 보고 생각했더니 눈에 어른거리는 것이 모두 三百年 前일입니다. 꿈에 가끔 壬辰亂을 꾸고… 참으로 苦笑할 일입니다. 나는 朝鮮사람 중에 두 사람을 崇拜합니다. 하나는 옛사람으로 이순신(李舜臣)이오 하나는 이제 사람으로 安島山입니다. 나는 七八年 前에 先導者라는 小說을 쓰다가 말았거니와 그 主人公이 安島山인 것은 말할 것 없습니다. 이제 「이순신(李舜臣)」을 쓰니 結局나는 내 愛人을 그리는 것입니다. 이순신(李舜臣)에 關해서는 예전 少年雜誌에 「우리 英雄 忠武公 이순신(李舜臣)」이라는 新體詩를 지은 일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아마 二十年은 훨씬 前인가 합니다. 그러므로 이순신(李舜臣)에 내가 興味를 가진 것이 慧星記者의 臆測과 같이 이번 忠武公 墓所問題를 機會로 생긴 저널리스틱한 動機만은 아닙니다. 글이나 그림이나 저 생긴 以上은 몹쓸 法입니다. 내가 이순신(李舜臣)을 그리거나 안창호(安昌浩)를 그리거나 結局 내 人格程度 以上에 넘지 못할 것을 내가 압니다. 그러나 나는 나 以上할 수는 없기 때문에 다만 내 힘을 다하여서 내 愛人을 그릴 뿐입니다. 그러하지마는 내게는 또하나 崇拜하는 人物이 있습니다. 그것은 아직 한번도 입밖에 내거나 붓끝에 올려 보지 못한 사람이니 내가 朝鮮民族을 爲하여 이순신(李舜臣), 안창호(安昌浩)를 그려놓은 뒤에는 아마 나 自身을 爲하여 或 「사람」이란 것을 爲하여 이 「사람」을 그릴 것이라고 생각합니다.巴人兄 兄의 三千里의 紀念號에 무엇을 쓰마 하고는 쓰지 못하여 이순신(李舜臣) 原稿를 쓰던 붓으로 그 생각으로 이것을 씁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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桑港에서 海參威(李剛)(『東光』 1931.10) |
하와이에 한 一 年 있다가 桑港(샌프란시스코)에 들어 갔을 때가 스물여섯 때다. 하와이에서 桑港(샌프란시스코)에 移民으로 第一 먼저 들어간 이가 이재수 氏고 둘째로 들어간 사람이 나다. 그 때 桑港(샌프란시스코)에는 親睦會가 있었는데 會員이 二十餘 名. 그 中에 절반은 상투가진 人蔘장사고 절반은 學生들이었다. 이 不過 二十 名 사이에도 갖은 갈등이 많았는데 安島山 先生이 들어 오셔서 처음으로 親睦會를 만든 것이다. 桑港(샌프란시스코)에서는 農塲에서 일을 하여 學費를 벌어 가지고 로스앤젤레스로 가서 공부를 하려고 하였다. 그 때 로스앤젤레스에서 처음으로 安島山 先生을 만났다. 그 때 先生의 말씀이 「三年만 더 있다 공부하시오. 우리 ○○사람의 일이 더 급하지 않소?」 나는 安 先生의 指導를 받아 가면서 勞働紹介所를 만들고 하와이에서 배마다 二十餘 名씩이나 오는 桑港(샌프란시스코)의 勞働者를 데려다가 各 鐵路와 農塲과 오렌지 밭으로 配定을 하기에 바빴다. 이 사람들은 「떼시라」라고 하는 사람이 어떤 會社와 契約을 하고 朝鮮에서 移民하여 오는 사람들이다. 그 中에는 모군, 난봉 가지각색 사람들이 다 들어 있었다. 이 사람들을 自覺있는 사람으로 만들지 않으면 안되겠다는 것이 安 先生의 着眼點이니 먼저 그 共同利益을 圖謀하지 않으면 안되겠다고 勞働紹介所를 만든 것은 先生의 慧眼이라고 안 할 수 없다. 桑港(샌프란시스코)에 있는 親睦會 - 後에는 共立協會라고 하여 林蚩正(임치정) 氏가 일을 보았지마는 그 會에서 하와이에서 오는 勞働者들을 로스앤젤레스로 보내면 勞働紹介所에서는 各其 適當한 곳으로 紹介하였다. 그 때에 宋錫準(송석준) 氏는 安 先生과 같이 四方으로 흩어져 勞働하는 사람들을 찾아 다니면서 敎養 주는 것으로 일을 삼고 한편 共立新聞이라는 週間新聞을 經營하였다. 이것이 지금 있는 新韓民報의 前身이다. 한창때에는 會員이 三百 名이 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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朝鮮各界人物 온파레드(『彗星』 1931.9) |
이는 세상에 너무 많이 紹介되고 또 그의 系統으로 發刊되는 雜誌 東光에 그의 이야기가 每月 發表되다시피 하니 여기에 새삼스럽게 말하지 않는다. 氏의 身上에 關한 일로 잠깐 말하자면 年齡은 今年에 五十四, 故鄕은 藥水 좋기로 有名한 平南 江西, 號는 勿論 島山, 近來에는 或 山翁이라고 東光에 가끔 發表된다. 子女는 아들과 따님이 各 두분이요 現在 生活이나 地盤은 여러 亡命家 中에 第一 安全한 모양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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平壞大成學校와 安昌浩[金灐植](『三千里』 1932.1) |
朝鮮에 唯一한 政黨 獨立協會가 없어진 뒤 一千九百六 七年頃 朝鮮의 뜻있는 이들은 到處에서 「實力修養」 等을 絶叫하여 朝鮮 天地에는 靑年有志者가 輩出하고 坊坊曲曲에 私立學校가 簇生하였다. 그 中에도 西朝鮮 地方은 다른 地方보다도 敎育熱이 烈火화 같이 熾盛하였었는데 그 原因은 그 地方이 歷史的으로 가진 理由도 있겠지만은 當時의 環境으로 그 地方에는 先導者가 特히 다른 地方보다도 많았던 까닭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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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八人觀[黃錫禹](『三千里』 1932.4) |
朝鮮의 人物 中에서 이미 完成된 權威者를 골라 내려면, x雄 安昌浩(안창호), 政客 宋鎭禹(송진우), 事業家 金性洙(김성수), xx家 金翰(김한), 雄辯家 朴一秉(박일병), 外交家 金奎植(김규식), 文豪 李光洙(이광수), 好人物 安在鴻(안재홍), (後日의 好宰相?) 等이 될 것이다. 政客側 人物에는 申錫雨(신석우), 張德秀(장덕수) 君 等이 있으나, 申君은 좀더 긴 時日의 現實 履歷을 가져야 할 人物(그는 너무 빨리 隱退한 感이 없지 않다.) 이며 張德秀(장덕수) 君은 議會 政治家流의 人物이나, 學界로 向해가는 便(忠實한 政治學者로서) 이 더 좋은 길일까 한다. 此外에 또 빼놓지 못할 人物로는 崔麟(최린)이가 있으나, 그는 새 時代 사람들의 信賴하는 支持를 받기에는 너무나 陰險하고 舊式 人物인 듯 싶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