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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931 崔昌圭

    出生時 建國紀元四二三八(1905)年 八月 二十一日弐拾捌歲出生地 朝鮮黃海道海州郡海州面東四里居生地 自四二三八 至四二六三 出生地 自四二六三 至四二六五 上海界格羅希路 百卄五一七職業 自四二四八 至四二五三 海州公立普通學校自四二五三 至四二五八 平壌公立髙䓁普通學校自四二五八 至四二六二 京城帶國大學自四二六二 至四二六三 家事自四二六三 至四二六五 上海法界格羅希路百卄五王卄一七号學藝 文學所肯 藝術家族 父 崔丙薫(최병훈) 五十四 農業 海州東榮甼卄六母 金守京(김수경) 五十七 海州東榮甼卄六建國紀元四二六五年 二月 二十五日 入團建國紀元四二 年 月 日

    4932 崔海卿

    出生時 紀元四二三四(1901)年 二月 三十日出生地 韓國平业朔州下南面小八營洞居生地 四二三四年 至四二四二年 出生地 四二四二年 至四二四四年 九城 四二四四年 至四二五三年 平壌 四二五三年 至四二五六年 鎮南浦 四二五六年 馬山 四二五六至 四二五八年 平壌 四二五八年 至四二六○年 日本京都及廣島 四二六○ 至四二六一年 咸南新興職業 四二四四年 至四二四八年 平壌崇賢女小學修学 四二四八年 至四二五三年 仝郡崇義女中學校修學 四二五三年 至四二五六年 鎮南浦得信学校教員 四二五六年 至四二五六年 馬山義信女学校教員 四二五六年 至四二六○年 在日本修學 四二六○年 至四二六一年 新興郡㓜穉园教員學藝 普通教育 日語宗敎 예수教團体 Y.W.C.A. 廣島女校女子靑年会最長技能 數學 理化所肯 早起散歩 讀書 觀貝生活改名 前名 永保(영보) 恒實(항실)家族 父 鳯立(봉립) 商業 故母 許鳯周(허봉주) 教役 姊 崔榮華(최영화) 弟 崔得賢(최득현) 崔得善(최득선)入團日 建國紀元四二六一年 月 日

    4933 皮午得

    出生日 建國紀元 四二四三(1910)年 四月 弐拾壱日弐拾壱歲出生地 朝鮮京畿道京城府清進洞居生地 自四二四三 至四二五九 出生地 自四二五九 至四二六四 上海職業 自四二四八 至四二五三 京城㓜稚園及書堂 自四二五三 至四二五七 京城師範附屬普通學校 修了 自四二五七 至四二五九 京城苐一髙䓁普通學校 自四二五九 至四六二 Thomas Hamburg School. Shanqhai,China學藝 英文學宗敎 基督教長技 作詩文所肯 讀書家族 母 曹卿順(조경순) 五四 京城市外徃十里七二八 入團日 建國紀元四二六四年 一月 二日

    4934 河世紋

    出生時 一千八百九十八年 九月 十五日出生地 黃海道安岳郡渡美 一九三八年十一月三十日入團 一九三一年四月 日本東京에서現所 美國加洲(캘리포니아)羅城(로스앤젤레스) 3842 So.Hobart Blvd. L.A.62 學歴 安岳邑安新小學校䘚業 平壤崇義中學校䘚業中國南京東明學院二年修學中國上海滬江大學二年修學日本東京中村高等女學校䘚業日本東京日本女子大學䘚業美國 New Yorks Columbia University 一年在學美國 Macon.Ga. Weolyan College 一年在學經歴 東京 Y.M.C.A.會長二年家族 家長 河熈玉(하희옥)親族 男同生 崔世經(최세경) 死亡女同生 崔世玉(최세옥) 現住韓國山男同生 崔世縈(최세영) 死亡現職業 家庭治理 入團 一九三五年 日本東京에서

    4935 韓尙鎬

    出生時 紀元四二二三(1890)年 七月 十七日出生地 韓國黃海道平山郡桃花住日面玄岩村居生地 四二二三年至四二四二年 出生地四二四二年 至四二五四年 美國職業 四二四三年 至四二四八年 學業四二四八年至四二五四年 農業學藝 聲學宗敎 예수教團体 大韓人國民会最長技能 果木培養所肯 音楽改名 前名 긔갑家族 父 韓致弘(한치홍) 農業母 信愛(신애) 仝 妻 성실女 릴리안 인순入團日 建國紀元四二五四年 月 日

    4936 島山 安昌浩 先生에게[李光洙](『開闢』1925.8)

    美洲에서 돌아오신 趙博士便에 先生의 安候를 듣고 기뻐하였습니다. 선생께서 北美各地에 散在한 同胞들을 巡訪하시었다는 말씀과 特히 멀리 사모하는 우리 國老 徐博士를 訪問하시고 靈犀相照하였다는 말씀을 듣고는 하도 기뻐서 拍掌喝采함을 禁치 못하였습니다. 제가 마침 先生께 편지를 드리려 하면서도 病後의 몸이 恒常疲困하여 오늘 내일하고 遷延하던 次에 마침 開闢社에서 기다려 先生을 생각하는 글을 써달라고 請하옵기로 郵便으로 드리는 대신 이 편지를 쓰기로 하였습니다. 先生께서 제 病을 근심하시고 健康에 注意하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나 先生님! 저는 先生께 슬픈 消息을 드리지 아니치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昨日 醫師에게 脊椎 카리에스라는 診斷을 받은 것입니다. 醫書를 보면 이 病은 小兒는 快癒하는 希望이 있으나 成人된 사람은 거의 快癒할 希望이 없다고 합니다. 速하면 一二年 오래 끌면 或 十數年 더 살수가 있다고 하는데 넉넉 잡고 한 三年 더 살것으로 작정하는 것이 合當할 듯 합니다. 그러나 先生님! 저는 죽는 것을 두려워 하지는 아니합니다. 一年이나 二年이나 三年이나 목숨이 붙어 있는 동안에는 先生의 뜻을 爲하여 全力을 다하려 합니다. 또 醫師의 말이 한 一個年 동안 잘 敎養을 하면 生命을 붙잡을 수도 있다고 하니 아마 病者를 慰勞하는 말일 것입니다마는 先生의 뜻이오 우리의 理想인 것을 實現하기 爲하여 할 수 있는 대로 生命을 붙들어 보려고 합니다. 先生께서도 只今 四十八, 昨年 北京서 뵈올 때에 몹시 瘦瘠하신 양을 뵙고는 퍽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러나 설마 하늘이 朝鮮에게서 先生한분까지야 빼앗아 가랴 적더라도 今後 二十年 동안만 健在하야 우리를 指導하게 해 주소서하고 빌었습니다. 나는 이 祈禱가 반드시 應할 것을 믿습니다. 先生님! 먼데 계신 先生께서는 朝鮮內의 現狀을 퍽 듣고 싶어하실 줄 믿습니다. 그러나 지금 그 자세한 現狀을 말씀 할 自由가 없습니다. 다만 날로 經濟的으로는 살 수가 없어지고 精神的으로 民族的 解體가 생긴다 하는 것만 말씀하려 하옵니다. 指導者라 일컬을 만한 이들은 거의 다 落心하여 물러 앉습니다. 어쩌면 그렇게 永遠히 落心할 줄 모르실 듯한 南岡(이승훈)先生까지 朝鮮의 前途에 對하여 落心을 하십니까. 그 밖에도 누구누구하는 이가 만나서 이야기를 하여 보면 거의다 落心을 하였습니다. 三一運動에 興奮하였던 反動이라고 어떤 친구는 說明을 합니다마는 저는 그렇게 생각치 아니합니다. 이것은 「無計劃」하게 動하던 者의 當然한 歸結이라고 믿습니다. 뿌리 없는 데서 열매를 거두려하고 基礎와 材木이 없이 집부터 지으려하고 資本도 없이 營業廣告부터 내려하던 者의 當然한 歸結이라고 믿습니다. 「나간다 나간다 하기를 二十年을 하지 아니하였느냐, 그러하건마는 二十年後의 오늘날까지도 나갈 힘이 없지 아니하냐. 나갈 準備를 하기를 二十年을 하였다면 只今은 나갈 힘이 생겼으리라. 只今부터 나갈 準備를 하지 아니하고 如前히 나간다 나간다 하기만 하면 今後 二十年에도 如前히 나갈 힘이 없으리라! 그러므로 只今은 나갈 때가 아니오. 나갈 準備를 할때다!」 이것이 先生께서 三一運動中에 上海에서 說破하시고 多數 同胞에게 後進波니 非戰派니 하는 非難을 들으신 말씀이 아닙니까. 先生의 이 良言을 非難하던 同胞가 至今에는 그 이치를 깨달을 만도 하건마는 아직도 가는 목소리로 나간다 나간다 할 뿐입니다. 그러나 이제는 그런 소리하는 이 조차 줄어 지고 大部分은 落心하여 各自圖生의 길이나 찾게 된 듯 합니다. 진실로 「準備」, 「基礎」 이것은 先生이 朝鮮을 爲하여 二十年來로 絶呌도 하시고 또 力行도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僥倖과 妖術的 成功만 바라고 一만한 原因에서는 오직 一만한 結果만 生한다. 決코 一에서 二나 三은 生하지 아니한다는 科學的 精神이 不足한 우리 同胞는 先生의 指導를 받을 줄을 몰랐습니다. 物理學과 化學의 原理를 배운 靑年들까지도 父老의 妖術思想에 휩쓸려 들어 가고 맙니다.그러나 先生님! 朝鮮은 마침내 僥倖과 空談으로 亡하고 말것입니까. 아닙니다! 先生의 唱導하신 實力準備主義를 따르는 朝鮮의 子女는 그래도 조금씩 조금씩 增加하여 갑니다. 虛僞를 떠나서 眞實에 空想과 空論을 떠나서 力行에 巧詐와 反覆을 떠나서 忠義에 怯懦와 苟安을 떠나서 勇氣에 利己的 個人主義를 떠나서 團體를 爲하여 自己를 爲하는 民族 奉仕의 精神에 妖術的 僥倖을 바라던 것을 떠나서 正當한 因을 싸하 正當한 結果를 얻으려는 科學的 精神에 共鳴하는 朝鮮의 子女가 비록 數爻로는 적다하더라도 나날이 늘어 갑니다. 어른들은 잘못된 先入見에서 헤어나지를 못하건마는 純潔한 少年들은 甚히 銳敏하게 이 부름에 響應하는 것을 볼 때에 저는 歡躍하지 아니할 수가 없습니다. 만일 先生께서 國內에 계시다 하면 얼마나 좋을까 얼마나 朝鮮의 純潔한 靑年男女들이 先生의 人格에 感化를 받아 先生의 理想을 따라 몸을 바치고 나서는 새 사람들이 될까. 先生의 참된 말씀과 정성된 實行과 밝은 智慧를 산 模範으로하여 진실로 새朝鮮의 基礎와 楝樑으로 鎔鑄될까. 그러나 朝鮮의 靑年子女들은 그 幸福을 가질 運動에 處하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修養同盟會와 그 同志들의 言行을 通하여 間接으로 先生의 理想과 人格의 陶冶를 받을 수가 있을 뿐입니다.「말이나 행실에 거짓이 없으라!」 「저를 잊고 朝鮮을 생각하라!」 「朝鮮을 爲하여 한 職務를 擔當할 德行과 學識과 技能을 準備하라!」 「이러한 主義를 가진 者끼리 굳게 뭉치라!」 極히 微力한 先生의 弟子들이오 同志들인 몇 사람은 쉼없이 이 뜻을 朝鮮의 子女들에게 펴노라고는 합니다. 그러나 先生님! 우리는 너무도 無力합니다. 無力함을 생각할 때마다 先生을 생각합니다. 만일 하늘이 우리 民族을 버리지 않으신다 하면 반드시 힘 있는 者를 우리에게 주셔서 先生의 뜻을 實現하는 큰 일꾼이 되게 하실 줄 믿습니다. 그것을 믿기 때문에 死를 기다리는 저도 生命이 許하는 瞬間까지 참된 朝鮮의 아들과 딸을 찾아 다닐 것입니다. 이 글을 쓰고 앉았을 때에 제 눈입에는 數없는 男女學生들이 보입니다. 저는 그들을 一一이 찾아가서 先生의 理想을 傳하고 싶습니다. 적어도 제 生命이 끝나기 까지에 一萬名에게는 傳하고 싶습니다. 그것도 안되면 一千名에게라도 傳하고 싶습니다. 그들 中에서 先生의 同志者 - 先生과 같이 虛僞를 미워하고 글이나 行에 오직 참된 者 - 先生과 같이 一分一秒를 輕忽히 아니하고 義務 (國民으로의, 人生으로의)를 力行하는 者 - 先生과 같이 朝鮮에 對하여 同志에 對하여 友人에 對하여 모든 微細한 許諾과 約束에 對하여 忠誠과 義理를 지키는 者 - 先生과 같이 理想과 義理와 任務를 爲하여는 苦樂과 死生과 毁譽를 안돌아 보고 萬難을 排하고 一生에 變함이 없는 勇氣를 가진 者 - 先生과 같이 朝鮮을 爲하여 一生의 安樂을 犧牲하고 全心全身을 바치는 者 - 先生과 같이 團結의 信義를 지키는 者가 千名만 생기고 그 千名이 굳게 뭉친다 하면 이게 朝鮮民族이라는 屍體에는 復活의 基礎가 確立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先生께서는 過去 二十年間에 오직 이것으로 事業으로 아셨고 生命으로 아셨고 오직 이것을 爲하여 努力하셨습니다. 先生을 모르는 同胞들은 先生을 이것 外에 무엇을 하려하는 이인줄로 생각합니다. 그러나 先生의 理想을 朝鮮이 깨달을 날이 가까웠다고 믿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現在에 이미 成年된 어른들의 朝鮮이 아니오. 只今 學校에 다니는 어린 동생들의 朝鮮입니다. 先生님! 人格의 改造는 果然 어렵습니다. 「急해 하지말고 하는 체 하지 말고 天然스럽게 그러나 쉬지 말고 조금씩 조금씩 고쳐가고 새로워 가라」 이렇게 先生은 새로 同志들에게 늘 勸하셨습니다. 저도 先生의 뜻을 받아 제 人格을 고쳐보노라고 한 지가 벌써 五年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스스로 저를 돌아 보면 改善된 것이 그렇게 顯著하지 아니합니다. 오직 하나 慰勞하는 것은 제가 東亞日報社에 記者로 儆新學校에 敎師로 일을 볼 때에 (1) 일을 爲하여 全心力을 다한 것 (2) 身病이 있기 前에는 꼭 視務時間을 지킨 것 (3) 新聞社와 學校를 내 것으로 사랑한 것입니다. 이것이 오직 先生을 따라 修養한 效果인가 합니다. 그러나 아직도 朝鮮의 興亡보다도 나 自身의 死生과 苦樂이 더 適切하게 생각하고 主義를 爲한 勞役보다 口腹을 爲한 勞役이 더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저는 四十歲를 期限으로 하여 제 人格의 改造를 完成하려고 計劃을 세우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지금 몸에 생긴 病은 저를 그때까지 보게 할는지 알 수 없습니다. 「우리 民族에게는 사랑이 不足하오. 父子間의 사랑 夫婦間의 사랑 同志間의 사랑 自己가 보는 일에 對한 사랑 自己가 爲한 團體에 對한 사랑 모르는 사람에게 對한 사랑… 우리 民族에게는 사랑이 不足하오. 사랑이 不足한 지라 憎惡가 있고 猜忌가 있고 爭鬪가 있소. – 우리가 團結 못되는 原因의 하나도 여기 있소.」 이것은 先生께서 새로운 同志들에게 늘 하시던 말씀입니다. 「그러니까 우리는 사랑하기 工夫를 합시다. 務實하기 工夫, 力行하기 工夫를 하는 양으로 사랑하기 工夫를 합시다.」 이렇게 數없이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기 工夫!」 아마 이것은 先生께서 처음 내신 文字라고 생각합니다. 이번 趙博士便에 先生께서는 유억겸(兪億兼)君과 저와 關係를 근심하시고 저더러 어디까지든지 兪君의 誤解를 풀도록 힘쓰라 하셨다. 그처럼 先生은 兪君과 저를 사랑하십니다. 두고두고 잊지 못하고 걱정하시도록 사랑하십니다. 그러나 저는 그처럼 兪君을 사랑하지 못하였습니다. 兪君께서 人事를 아니하시니 나도 아니한다. 兪君께서 나를 만나시기를 願치 아니하시니 나는 兪君을 만나기를 願치 아니한다. – 이 모양으로 왔었습니다. 昨年에 先生께서 저와 이러한 會話가 있었습니다. 「兪君을 찾아가 보시오.」 「兪君이 저를 안 만난다시는 걸요.」 「그래도 찾아가 보시구려. 몇번이든지 兪君이 웃고 春園의 손을 잡아 맞을 때까지 찾아가보시구려. 사랑과 정성이 반드시 兪君의 맘을 움직이리다.」 이렇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 後 一年이 넘도록 先生께서 가르치신 대로 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여러가지 핑계도 있지마는 決局은 제가 同志에게 對한 사랑이 不足한 것입니다. 그러나 이제부터는 해보려 합니다. 先生 같으시면 반드시 그대로 하셨을 것을 믿습니다. 또 同友俱樂部에 對하여서도 그러합니다. 좀 더 제게 사랑과 精誠이 있었다면 반드시 여러분을 움직여 벌써 合할 수가 있었을 것을 생각하면 오직 부끄러울 뿐입니다. 「조선의 사람끼리 서로 사랑하자. 허물일랑 서로 용서하고 잘하는 것은 서로 칭찬하자. 불쌍한 조선의 사람끼리는 決코 서로 다투지 말자. 그리하되 同志間에는 더욱 그리하자!」 이것은 先生께서 昨年에 同胞에게 告하는 편지 (東亞日報에 連載되다가 當局의 禁止를 當한) 中의 一節의 大意입니다. 나는 일즉 先生께서 성내시는 양을 못 보았습니다. 우시는 것을 보았으나 노여워하시는 것은 先生을 모신지 滿二個 年에 한번도 못 보았습니다. 제가 先生을 모시고 上海에서 있던 旅館에 방을 잡으러 갔다가 보이의 不恭한 것을 보고 성을 내었습니다. 그때에 先生은 和平한 웃음으로 「성내지 마시지오.」 하신 것을 기억합니다. 저는 그때에 선생의 和平한 웃음 속에는 저를 爲하여 一저의 나쁜 性質을 위하여 슬퍼하는 빛이 있음을 보았습니다. 그때부터 성내지 않기 工夫를 하고 나를 미워하고 毁謗하는 사람에게 까지라도 사랑과 容恕로 對하기를 工夫하였으나 크게 效果가 없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살펴보니 우리 中에는 果然 사랑이 不足하고 용서가 不足하고 성내고 시기하고 吹毛覔疵하는 風이 많습니다. 「사랑하기 工夫!」 이것은 우리 民族의 큰 工夫題目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새 朝鮮의 生命은 점점 자랍니다. 그것이 하루 이틀에 커질 것이 아니라 하더라도 반드시 만 사람이 그것을 우러러 볼 날이 올 줄 믿습니다. 先生께서 뿌린 씨가 決코 헛되이 되지 아니할 줄을 先生께서도 믿으시니 萬里異域에서 故國을 바라보시는 눈물그린 先生의 눈에는 希望과 滿足의 웃음이 있으리라 하고 믿습니다.「끝」

    4937 島山과 還金博士(『東亞日報』1926.1.2)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이 북경에서 재할 때 어느날 스위스 공학박사라는 명함을 가진 어떤 신사가 찾아와서 자기는 금 만드는 법을 발명하여 러시아대사 『카라한』씨에게 실험을 하여 보였더니 사십만원을 줄터인 즉 조선인 명사의 소개를 어서 가져 오라고 하니 소개를 하여 달라고 하였다. 이 말을 들은 도산선생『이왕이면 그 재주를 조선을 위하여 바치지요』 『사실은 협잡입니다마는 조선독립을 위하여 사십만원이란 돈을 얻고자 하는 술책입니다.』 『당신은 독립이 신성한 것으로 아오?』『물론 신성하지요 』『그러면 그 돈이 신성한 돈이요? 아니요?』 이것은 일전 중국에서 돌아온 동포의 이야기

    4938 내외명사의 가정(二) ; 도산 안창호씨 가정(『東亞日報』1926.10.13)

    지금으로부터 이십삼 년 전에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씨가 북으로 북으로 망명(亡命)의 길을 떠날 때에 다시 돌아오기 어려운 길인 줄 짐작한 이씨 부인은 이십이 될락말락한 꽃 같은 나이로 부모형제 일가친척 정들은 고국을 내어 버리고 분연히 남편의 뒤를 따랐던 것입니다. 나라 일을 근심하기에 피곤한 안창호씨는 아내를 돌아 볼 기회가 없었던 것입니다. 언어와 풍속이 다른 만리타향 미국(米國) 로스앤젤레스에 이씨 부인을 머물게 한 후 혹은 북으로 혹은 남으로 혹은 서로 등지를 찾기에 분망한 남편은 일년에 한번도 돌아오는 일이 드물었습니다. 그러나 이 열정적 국사(熱情的 國士)를 남편으로써 특별히 존경하는 이씨 부인은 십년이 하루같이 하등의 불평이 없었을 뿐 아니라 『집의 일은 걱정 말고 동포를 위하여 힘쓰시오』하는 진실로 거룩한 말로써 남편에게 안심과 힘을 주었다고 합니다. 이씨 부인이 지금은 사십이세 벌써 고국을 떠난 지 이십여 년이 되었습니다. 그동안에 아들 형제 딸 형제 사남매를 두었으니 이 사남매를 기르기에 이씨 부인의 근고가 얼마나 큰 것을 보고 듣는 사람으로 하여금 탄복 아니하게 할 수가 없습니다. 이씨 부인은 혹은 서양 사람의 집에 가서 빨래도 해 주고 집안도 치워주어 들어 오는 몇 푼 수입으로 남편 없는 살림을 해 나가면서 어린 아이를 길러나갔습니다. 어린 아이가 병이 나든지 이씨 부인이 병이 난다든지 하여 일은 할 수 없고 일 아니하고는 당장 내일 살림이 어려울 때에 남편이 돌아오기를 바라는 마음이 간절하건 만은 당장 『오시오』하고 전보도 치고 싶지만은 『남편은 나라에 바친 몸이다.』하고 다시 굳세게 결심을 하고 마음을 돌렸다고 합니다. 남편의 여러 동지들은 물질로 혹은 정신으로 이 가족을 도왔으나 동지래야 모두 적수공권이니 물질적으로 넉넉히 도울 길이 없었던 것입니다. 기미년 독립운동이 일어났을 때에 안창호씨는 가족을 미국에 두고 상해로 왔습니다. 이래 일곱해 동안을 일년에 편지가 두어장 있거나 말거나 한 상태로 이씨 부인은 남편의 성공과 건강을 빌면서 아이 둘을 데리고 적적한 생활을 해내려 왔습니다. 이 때에는 벌써 열 서너살 된 맏아들로부터 젖먹이까지 사남매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 네 아이를 손수 벌어 먹이고 입혀 길렀기에 이씨 부인의 노력이 얼마나 컸던 것을 우리는 상상할 수가 있습니다. 일곱해 만에 안창호씨는 공무(公務)를 가지고 미국에 건너갔었을 때에 가족을 찾았으나 이 때에는 어린 아이로 작별하였던 맏아들이 스물한살이 되어 어머니와 동생을 벌어 먹이는 장정이었습니다. 한창 학교 다닐 나이에 학교도 못 다니고 어떤 큰 상점에 가서 『엘리베이터』를 부리고 한달에 구십달러를 받아 어머니를 봉양하고 동생들을 학교에 보낸다고 합니다. 동생들에게 『나는 학교에 못다니지만은 나 대신으로 너희들이나 공부 잘해서 큰 사람이 되라』하고 이른다고 합니다. 이것을 아버지가 볼 때에 아무리 철석장부(鐵石丈夫)이기로 그 마음이 어떠하였으리오! 안창호씨는 칠년 만에 가족을 만나 낯도 익히기 전에 다시 상해로 떠났습니다.

    4939 山翁을 그리면서[平壞一讀者[(『東光』1926.11)

    一, 原稿는 簡單 明瞭하게. 一, 記事의 批評을 歡迎함. 一, 採用與否는 編輯部에 一任.

    4940 先驅者를 바라는 朝鮮[李光洙](『三千里』1929.9)

    巴人兄 先驅者에 대하여 무엇을 쓰라신 부탁을 받고도 병을 핑계로 인해 못쓰고 있었습니다. 兄의 말씀 없는 재촉이 도리어 채찍질하는 듯합니다. 先驅者는 한 民族의 또는 人類의 恩人입니다. 모든 發明과 進步는 先驅者의 정성과 희생 위에 된 것입니다. 힘있는 先驅者를 많이 가진 백성은 복된 백성입니다. 우리 朝鮮은 바야흐로 힘있는 先驅者를 간절히 기다리는 때입니다. 先驅者는 대개 미친 사람입니다. 水火가 무서운 줄을 모르고 自己의 生命이나 家人生業이 貴重한 줄을 모르고 기울어진 天地를 바로 잡으려는 誇大妄想狂입니다. 똑똑한 사람들의 눈으로 보면 先驅者는 實로 精神빠진 사람입니다. 그래서 이 똑똑한 世上에는 힘있는 先驅者가 드뭅니다. 先驅者는 대개 受侮와 貧窮과 苦難의 八字를 타고 납니다. 錦衣를 입는 者는 先驅者의 後繼者들입니다. 先驅者의 무덤은 흔히 찾을 길이 없고 그 이름조차 世上에서 잊어버려지는 수가 많습니다. 無名의 先驅者들 人類는 數없는 無名의 先驅者의 恩惠 속에 살아 갑니다. 쌀 먹는 법을 처음 發見한 이 어떤 약을 처음 먹어 본 이 이런 이들은 다 아무리 感謝하여도 다 感謝하여질 수 없는 先驅者들입니다. 史冊에 이름이 오른 先驅者들만 생각하고 이 無名의 先驅者를 잊는 것은 우리의 義理가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特別히 偉大한 先驅者도 必要하거니와 사람마다 한가지 先驅者되기를 힘쓰는 것이 先人의 恩惠를 갚는 일인 同時에 後生에게 부끄럽지 아니할 선물이 될 것입니다. 自己一個人의 利害를 잠깐 잊어버리면 우리는 先驅者가 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똑똑한 것이 좋지만은 誇大妄想으로 自己가 一國의 主人이라는 自負心과 責任感을 갖는 한구석도 있는 것이 좋습니다. 더욱이 젊은 사람이 그러하다고 생각합니다. 누구에게나 있는 死. 期必할 수 없는 富貴 풀잎에 이슬 같은 享樂. 이것을 따르느라고 一生을 허덕거림보다 人類가 共享할 正義나 眞理나 美를 찾아 先驅者의 貴한 犧牲이 되는 것이 快할 것이 아닙니까. 意氣있는 젊은 男女의 좋은 장난감이 아닙니까. 나도 先驅者 한 분을 압니다. 그는 내가 가장 尊敬하는 어른이십니다. 그가 敎育 實業 民族運動할 것 없이 우리 땅의 黎明運動 거진 全野에 亘하여 다 先驅者이거니와 또 그런 줄을 내가 말하지 아니하여도 世上이 대개 아는 바이거니와 그 中에 가장 重要한 것 다른 모든 것을 合한 것보다도 重要한 그의 先驅가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인고 하니 實과 愛의 運動이외다. 絶對로 참되자. 決코 거짓말과 거짓 行爲를 말자. 外飾 虛張聲勢 伐齊爲名 憑公營私 等等의 모든 虛僞를 버리자 – 이것이 實의 運動입니다. 그는 實의 反對인 虛僞로써 나라 죽인 怨讐라고 부릅니다. 不共戴天之讐라고 부릅니다. 죽을지언정 다시야 그 怨讐와 和하랴 합니다. 그에게는 거짓이 없습니다. 아무리 面에 어렵더라도 아무리 自己의 名譽나 利益에 損害가 되더라도 決코 決코 거짓말을 아니합니다.巴人兄 그에게 만일 缺點이 있다고 하면 그것은 그가 너무나 참되고 變通性이 없는 것입니다. 이 때문에 – 이 참됨 때문에 – 거짓말 아니하는 것 때문에 그는 世上에서 非難도 받고 敵도 만들게 된 것을 나는 잘 압니다. 그러나 그는 거짓이 나라의 원수인 것을 단단히 記憶하기 때문에. 또 참됨이 朝鮮人의 民族的 救濟의 첫 要件인 줄을 굳게 믿기 때문에 그의 信念은 變함이 없고 한사람씩 한사람씩 만나는 대로 實의 道를 說하여 朝鮮民族을 「實」의 魂을 가진 백성을 만들기를 믿고 있습니다. 둘째 變의 運動이란 무엇인가. 남을 爲하여 나를 버리자. 全人類는 못하더라도 내 民族만을 爲하여는 나를 버리자. 한 民族 全體는 못하더라도 내가 接하는 個人들 내 家族들 隣人들 友人들 무슨 主義를 같이 하는 同志들을 사랑하고 미워하지 말아서 그들을 爲하고 돕고 그들이 잘될 때에 猜忌하던 대신에 기뻐하고 그들이 잘못할 때에 欠談하던 대신에 容恕하고 어여삐 여기자. 적어도 同族 間에는 無抵抗이어라. 적어도 同志 間에는 全然히 無抵抗이러라. 猜忌 欠談 憎惡 反抗이 없고 그의 福을 볼 때에 父母나 子女의 福을 보듯이 그의 禍를 볼때에 父母나 子女의 禍을 보듯이 오직 共悅과 稱揚과 容恕와 愛憐을 가지자. 이것이 그의 行하는 愛의 原理이다. 그는 朝鮮民族에게 愛가 不足함을 看破하였으므로 그 自身의 말을 빌건대 「나 自身이 外國人에 比하여 愛가 不足함을 自覺하였으므로 愛工夫를 하고 愛宣傳을 하기로 一生의 義務를 삼은 것이다.」 나는 이 偉大하고 尊貴한 先驅者에게 본 것도 들은 것도 또 그에 對하여 생각한 것도 말할 것도 많지만은 이만해도 實과 愛의 運動이 우리에게 얼마나한 關係와 價値가 있는 것을 알까 합니다. 이것이 모든 先驅者의 工課가 아니리까. 우리 모두 朝鮮人의 第一工課가 아니리까.巴人兄 이번에 先驅者 號를 내이시는 兄의 뜻을 나는 잘 압니다. 이 책을 읽는 同胞들에게도 같은 共鳴이 있을 것을 나는 믿습니다. 그래서 참되고 힘 있는 朝鮮의 先驅者들이 많이 일어나는 힘 있는 刺戟을 주는 效果를 거두시기를 빕니다. 이 몇마디가 兄의 부탁에 대한 塞責이 되겠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