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콘텐츠

선택

선택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971 그들의 靑年學徒時代 ; 安昌浩氏(『朝鮮日報』 1937.1.3)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선생의 청년학도 시대는 갑오년(甲午年) 난리가 한참 야단법석을 이루고 있던 때에 고향 강서(江西)에서 배우던 한학(漢學)을 집어치우고 원대한 포부와 경륜 밑에서 경성(京城)에 올라가고 원두우(元杜尤) 박사가 창립한 경신학교(儆新學校)에 입학한 때부터 시작된다. 도산 선생은 경신학교에 입학하자 설립자인 원두우 박사에게 영어(英語)를 배우는 일방 선생은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어 절반은 학생、절반은 선생의 역할 밑에서 몇 해를 경과했던 것이다. 물론 사십 여 년 전인 옛날의 일인 터이므로 경신학교는 서당(書堂)과 지금의 보통학교(普通學校)를 절충한 다시 말하면 지금 보통학교보다 정도가 조금 높은 학교이었으며, 칠십 여 명의 학생이 있었는데 전부가 상투를 짜고 망건에 갓(笠)을 썼던가 그렇치 않으면 머리를 따아내린 후 댕기를 달고 다녀서 사실로 지금의 서당 아이들보다도 모양이 창피할 정도였었다 한다. 그러나 이 시대의 학도들의 기풍(氣風)이란 것은 실로 지금의 생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 활달하고 씩씩하였던 것이다. 지금 같으면 학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하면 급속히 몇 십 원짜리 월급쟁이로 취직을 할 수 있을까 하여 머리를 앓고 있는 터이지마는 그 시대의 학도들은 공부하는 학도들이 누구나 자기를 위하고 각자의 향락을 취하고자 하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고 어떻게 하면 민족을 잘 인도하고 사회를 빛나게 할 수 있을까? 배운 후 자기의 몸을 민중을 위하여 바치겠다고 불타는 생각뿐이었었다는 것이 그 시대의 학생 기분이었다. 그래서 그 시대의 학생은 누구나 자기가 조선 안에서 공부를 하든가 그렇지 않으면 외국에 가서 공부를 하는 목표가 전부 이 생각뿐이었었고 또 공부시키는 부모들이나 그 동리 사람들까지 이러한 기대를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도산 선생의 경신학교 시대는 대강 이러하거니와 미주(米洲)의 학도시대는 어떠했나? 도산 선생이 미국에 건너가기는 스물세 살 적인데 건너가던 해에 어떠한 「그라마·스쿨」에 입학을 해 가지고 공부를 시작했다. 그런데 어떤 날 그곳 신문사에서 기자 한 사람이 찾아와 선생의 사진을 찍고 선생의 경력을 전부 물어 가지고 가더니만 그날 석간(夕刊)에 『기특한 조선 노학생(學生)이란 사단(四段) 제호 밑에서 선생의 사진과 기타 선생의 경력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대서특서를 해놓았다. 도산 선생이 입학했던 "그라마·스쿨" 이란 학교는 "컴먼스쿨"보다 조금 격이 높아서 조선에 비하면 보통학교보다 조금 급이 높은 고등과(高等課)와 같은 것이나 좌우간 소학교는 틀림없었고 이 학교에서는 열여덟 살 이상은 절대로 입학을 허가하지 않은 만큼 도산 선생은 여 교장으로부터 퇴교 명령(退校命令)을 받았다. 그래서 선생은 여 교장을 면회하고 별별 하소연과 애걸을 다해보았지만 "당신은 스물세 살이니 공부시킬 수 없소."의 한 마디로 끝끝내 거절했고 최후에 이 여 교장은 그곳 학무과장(學務課長)에게 소개 편지를 써주면서 거기 가서 졸라보라고 이야기했다. 도산 선생은 그래도 일부의 희망을 가지고 예의 학무과장을 찾았더니 뚱뚱보 학무과장 영감쟁이는 떡 버티고 앉아서 첫 마디부터 마지막 마디까지 ‘노-노-’를 반복할 뿐 이래서 간신히 입학했던 것을 신문기사로 그만 퇴교 처분은 결정되고 말아 노학도(老學徒)의 비탄이 적지는 않았었다 한다. 그러나 어쨌든 공부는 해야 되겠으므로 둘째번 다른 학교에 입학을 하고저 했으나 이 학교에서도 역시 연령이 많다고 퇴짜를 놓아 현하 조선의 취학 연령 아동이 공부할래도 입학할 학교가 없어 문맹(文盲)으로 지내게 되는 예와는 근본부터 처지가 다르다고는 할 수 있으나 입학 허가할 학교가 없어 선생에게도 퍽 곤란을 느끼게 되었었다 한다. 일이 여기에 까지 미치니 선생이 하숙하고 있는 주인집 영감은 그대는 동양사람이므로 키도 적은데 정직하게도 스물셋이라고 고집을 부리지 말고 슬쩍 열입곱 살이라고 넘기어 버리라고 하면서 나에게 저런 "풀리쉬"가 또 어디 있느냐 떠들어 대였으나, "나로서는 입학을 못하면 그만두었지 연령을 속일 수는 없다"고 대답하여 그 집 주부(主婦)에게 동정을 얻게 되었고 무엇 때문에 남에게 거짓말을 하라고 권고하는가? 하면서 부부 싸움까지 생기어 희극까지 한 번 생겼다고 한다. 그러나 세번째 입학하려는 학교에서는 여 교장이 아주 싹싹하고 이해가 많아서 입학시문에 연령 초과 문제가 도무지 없어 무난히 "패스"되어 공부를 하게 되어 우리와 같은 사정 밑에서 미주학도 시대를 갖게 되었으나 몇 차례의 축출 명령을 당하다가 초부득심이란 말과 같이 세번째에야 입학 통과가 되어 한쪽으로는 기쁨도 없지 않아 여 교장에게 "어째서 이 학교에서는 나를 내어 쫓지 않고 입학을 허가했는가?" 고 물었더니 여 교장 대답이 「그것은 해석 여하에 있을 뿐 열입곱까지 입학을 허가한다는 것은 미국학생에게 국한된 문제이지 동양사람에게까지 적용할 것은 없지 않느냐」는 답변이어서 같은 미국인이라도 하후하박을 생각할 수 있었다 한다. 이러한 모든 경과는 선생의 미주학도시대의 짤막한 에피소드도 되려니와 무엇 때문 선생이 기어코 「그라마·스쿨」에 입학을 하려고 애를 썼나? 여기에 대하여 선생의 이상과 그리고 그때의 기분은 소학교로부터 시작하여 중학교、대학교 이렇게 계단을 밟아가면서 미국의 학교를 공부해보자는 생각 다시말하면 미국의 교육 행정(敎育行政)을 직접 체험해보고 상세하게 연구하여 조선에도 그 장점(長點)을 적용하고자 생각했던 것 뿐이지 정말 「그라마·스쿨」에서 공부를 못해서 축출을 서러워했던 것도 아무 것도 아니었던 것이었었다 한다(끝)

    4972 "『아리랑』(님 웨일즈・김산[조우화 역]|| 동녘|| 1984); 40의 번역"

    1920년 상해에 도착했을 당시 나는 단지 약간의 무정부주의적 경향을 가진 한 명의 민족주의자였다. 나는 온갖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으며 제반 정치사상과 논의가 서로 각축하는 소용돌이 속에 휘말렸다. 처음에는 자연히 민족주의자의 문화그룹에 들어갔으며, 그 후 어느 정도 공부와 관찰을 하고 나자 테러리스트와 무정부주의자들에게 기울어졌다. 그것은 민족주의자의 강령이 무기력하다고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공산주의 운동은 이제 막 싹트고 있었으므로 나는 마르크시즘에 대해서도 별로 몰랐으며 레닌주의에 대해서는 하나도 몰랐다. 내가 상해에서 최초로 영향을 받은 사람은 민족주의의 쌍벽으로 이름난 유명한 안창호와 이광수였다. 이 두 사람은 한국에서 사제지간이었던 때부터 친밀한 동지였다. 이광수는 내가 일하고 있던 『독립신문』의 편집장이었으며, 또한 잡지 『젊은 조선』의 편집장이기도 했다. 그는 또한 왜놈이 만든 교과서가 창조해 내는 신화를 깨뜨리기 위하여 국사를 다시 집필할 목적으로 설치된 임정 사료편찬위원회의 주임이기도 하였다. 안창호는 임시정부의 노동총판이었으며 또한 흥사단의 지도자였다. 흥사단은 그가 1916년에 창설한 단체이다. 내가 이광수한테서 받은 영향은 일시적인 것이었지만 안창호한테서 받은 영향은 내가 이제까지 받은 영향 중 두 번째로 커다란 영향이었다. 가장 강한 영향을 받은 사람은 금강산 승려 출신의 공산주의자인 김충창(金忠昌)이었다. 이 사람은 그 후 1922년에 북경에서 비로소 만나게 되었다. 또한 내가 세 번째로 커다란 영향을 받은 인물은 해륙풍 쏘비에트의 지도자 팽배(彭湃)였다. 이 사람은 1928년에 만났다. 안창호는 나에게 실제 정치를 가르쳐 주었고, 김충창은 마르크스주의 이론을 가르쳐 주었으며, 팽배는 야전에서의 혁명전술을 가르쳐 주었다. 그 밖에는 나의 생애에 깊은 영향을 미친 사람이 없다. 1922년 이후 나의 이론적 배경은 확실히 정해졌다. 하지만 그 당시에는 행동과 전술에 있어서 어떤 훈련도 받지 못한 상태였다. 안창호와 이광수는 한국청년들을 감화시키기를 좋아하였다. 그래서 나는 몇몇 다른 친구들과 함께 거의 매일 같이 그들 집을 찾아갔다. 어떤 때는 한국 소녀가 우리들을 맞이하였다. 이 모임은 토론회와 비슷한 것이었다. 우리는 정치문제나 역사문제에 대하여 아주 오랫동안 논의하였다. 이광수와 안창호는 우리들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혁명은 아직 요원하다. 너희들은 지금은 장래를 대비하여 공부를 해야만 한다. 너희 가족들도 생활비를 대줌으로써 너희들을 도와주지 않으면 안된다." 나는 흥사단에 입단하였다. 흥사단은 상해에만 팔십 명의 단원을 가지고 있었으며 한국인이 있는 곳에는 어디나 지부를 두었다. 비록 "사(士 : 선비)"라는 말이 최고 신분인 학자를 지칭하는 옛말이기는 하지만, 흥사단이라는 이름은 "육영회(育英會)"라 바꾸어도 좋을 것이다. 구한국에서는 사(士)가 사회에서 최고의 신분이었다. 두번째는 농부, 세 번째는 노동자(장인), 네 번째는 상인이었다. 안창호는 평양부근 강서(江西)지방에 있는 어느 중류지주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정규교육은 하나도 못 받았지만 독학을 하였다. 안창호는 16살에 한국개혁운동에 참가하여 오랫동안 사람들의 뇌리에 아로새겨진 열렬한 대중연설을 하였다. 그래서 이동휘가 군사지도자가 되었던 반면, 안창호는 정치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설득력있고 영향력있는 대중연설가였지만 일상생활에 있어서는 습관적으로 조용하였으며 조그마한 일에는 별 말이 없었다. 그렇지만 일단 행동노선을 결정하면 결연히 의견을 개진하였으며, 대개는 자기의 주장을 관철하는 것이었다. 안창호는 1900년 경의 "삼일내각(三日內閣)"의 각료였다. 그래서 내각이 붕괴하자 해외로 망명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에 귀국하여 한국에서 『대한매일신보』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결국 구한국정부에 의해 이름이 바뀌어 인수되었다. 1907 년 안창호는 시위운동을 조직하고 대중에게 강연을 하는 등 대단히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1907년부터 1910년까지 그는 모든 한국 민족주의자들의 지도자였다. 1910년 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그는 중국의 청도(淸島)로, 다시 그곳에서 캘리포니아로 망명하였다. 캘리포니아에서 그는 "대한인국민회(大韓人國民會)"를 조직하고 신문도 발행하였다. 캘리포니아를 방문한 것은 이번이 두 번째였다. 안창호는 미국에서 많은 노래와 이야기를 배웠다. 그는 특히 흑인 노래를 좋아하였으며 나에게도 몇 곡 가르쳐 주었다. 상해에서 우리는 그와 함께 모여서 "올드 블랙 죠", "켄터기 옛집". "주인은 찬 땅속에" 등의 노래를 부르곤 하였다. 그는 한국에 있는 자기 학교에서도 이 노래들을 가르쳤다. 그래서 이 노래들은 달밤이면 대단히 애창되게 되었다. 한국 사람이면 모두 사별(死別)이라든가 향수, 불행 등을 주제로 한 슬픈 노래를 사랑한다. 그래서 흑인 멜로디가 커다란 호소력을 갖는다. 나 역시 이런 옛노래를 좋아하였다. 또 하나 내가 좋아하는 미국 노래는 "내 푸른 하늘(My Blue Heaven)"이다. 이 노래는 1931년 감옥에서 출소하고 나서 며칠 뒤에 한국에 있는 어느 카페에서 처음 들은 노래이다.한국에서는 이 노래를 "저녁 강"이라 불렀는데, 우리는 이 노래를 구슬픈 목소리로 아주 느리게 부른다. 1919년 민족운동의 물결이 일어나자 안창호는 상해로 돌아와서 대한민국 임시정부에 합류하였다. 그러나 오 년 후에는 임시정부와 사이가 틀어져서 캘리포니아로 되돌아갔다. 1924년 샌프란시스코에서 공산주의 서적을 자택에 소지하고 있다는 이유로 검거 되었지만, 공산주의자가 아니었기 때문에 다음날 석방되었다. 그 이듬해에 그는 또다시 상해로 돌아와서 많은 단체를 조직하였다. 상해사변이 일어난 이듬해 봄에 그는 프랑스 조계에서 체포되어 일본 측에 인도되었다. 그 이유는 폭탄투척사건이 일어나 일본관헌이 몇 명 사상자를 내었기 때문이었는데, 그는 그 사건과 아무런 관련이 없었던 것이다. 그는 서울로 압송되었지만 재판부는 그를 석방해 주었다. 그러나 경찰은 독립운동과 관련되었다는 이유로 재차 그를 체포하여 일년 간 감옥에 가두었다. 이광수가 자기 신문을 총동원하여 압력을 가한 결과 안창호를 석방시킬 수가 있었다. 동아일보사에서는 안창호를 주필로 데려오려고 하였다. 하지만 그는 거절하였다. 현재 안창호는 서울에 있지만 활동을 안하고 침묵을 지키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부르조아의 가장 유력한 정치지도자이다. 안창호가 부르조아적 원칙을 따르는 민주적 대중운동을 대변하는 반면에, 이광수는 그것과 평행한 상층 부르조아와 부르조아 지식층의 자유주의적 문화운동을 대변하고 있다. 이광수는 프롤레타리아의 세력 증대에 반대하지만 안창호는 프롤레타리아의 혁명적 역할을 인정한다. 이광수는 가부장제 귀족주의적 경향을 가지고 있지만, 반면에 안창호는 참으로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지도자이다. 손문과 중국 민족주의자들이 중국의 복잡다단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마르크스주의로 전향함과 동시에 안창호는 공산주의 이론과 전술에 관심을 가지게 되었다. 안창호는 결코 공산주의자가 되지는 않았다. 하지만 아직 미숙한 한국공산당을 반대한 적이 한 번도 없다. 이광수가 청소년 시절에 도오꾜오에서 인력거를 끌면서 고학으로 대학을 다녔다는 이야기는 이미 앞에서 말하였다. 그는 1924년경 사이또오 총독의 초청으로 한국에 돌아와서 『동아일보』와 청소년을 위한 자유주의 잡지인 『동광』(東光)의 주필노릇을 하였다.이광수는 한국 최초의 현대작가이며 지금도 제 일인자이다. 그는 장편소설, 단편소설, 평론, 시집, 역사책 등 스무 권에 가까운 책을 집필하였다. 이광수는 톨스토이주의자로, 비장한 희생정신과 가부장적 정신으로 충만해 있다.

    4973 "Noted Korean Dies|| Prisoner of Japan(Examiser 1938.3.13)"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창시자이신 안창호(Ahn Chang Ho)선생이 목요일 한국 서울의 한 교도소에서 61세의 나이로 별세하였다. 그의 사망 소식은 어제부로 여기에 있는 그의 아들에게 전보로 알려졌다.안(Ahn) 선생은 중일전쟁(Sino-Japanese affair)에 연루되었다는 까닭에 지난 7월 체포되었다.실제적으로 모든 한국인은 그가 1902년에 설립한 대한인국민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의 회원이라고 할 수 있다. 안(Ahn) 선생의 아들인 필립안(Philip Ahn)은 그의 생의 대부분을 미국에서 살고 있으며, 지난 해에 캘리포니아 대학을 졸업하였다. 랄프(Ralph)와 두 자녀인 수잔(Susan)과 사라(Sarah)는 모드 캘리포니아 태생이다.

    4974 안도산선생 별세(『國民保』 1938.3.16)

    도산안창호 선생은 三十일 상오 三시에 서울대학교 병원에서 별세하였다는 것은 북미국민총회장 최진하씨가 국민총회에 보낸전보이더라「부」국민회에서 강영각씨의 전보를 인하여 별보를 발힘한후에 최총회장의 전보를 받았으니 그 전보가 우편으로 오노라고 지체된 까닭이더라.

    4975 추도문(『國民報』 1938.3.16)

    선생은 이미 다시 돌아 오지 못하는 길을 가셨도다. 그리하여 선생이 형●는 어딘가에서 영원히 살아●셨도다. 그러나 선생에 六十평생에 애국하든 그의 정령은 오히려 반도 강산에서 더욱 빛나고 二千萬 민중의 가슴속에서 활약이 더욱 강하도다.영웅의 큰사업을 어찌 반드시 그의 성평에 맛치기를 기악하리요. 이를 후세에게 속하고 발전하고 성공하는 법이 라. 이제 선생을 영별하는 이 때에 조선의 사람된 우리 二千萬형제자매는 선생의 뜻을 이어 우리의 대업을 완성지로 서로 온●●●지●지어다.정봉관, 유사 유기인, 언망 환유사, 하언 능계사 , 유사 유기인 김현구, 황혜수, 김성윤, 문도라, 장현신, 김두희, 강영효, 박정금, 이순화, 안현규, 정인수, 손옹섭, 조문철 , 김차순, 홍숙자, 유진학부인, 영남부인실업동맹회, 강영각, 김한경, 김창근, 이정두, 박춘경, 황수경, 김영선, 전종문, 김대윤, 편성원, 오신비, 송명자, 조덕삼, 손덕언, 이태제, 양남수, 김복술, 최혜림, 김진호, 이태성, 정만서, 서창순, 김대성, 안광훈, 지종순, 심영신, 양순서

    4976 고 안도산선생 추도회 외(『國民報』 1938.3.16)

    고 도산 안창호 선생을 위하여 국민총회의 주최로 총회관 내에서 三월 十三일 하오 七시반에 추도회를 여니 고 도산 안창호 선생 추도회 순서 一. 사회 김진호 一. 애국가 일동一. 기도 박종수 一. 개회사 주석 一. 부고 전보 낭독 김원웅 一. 역사 정봉관 一. 선생의 고국 불망가 부인구재희 一. 조상예호 국민군단 一. 추도문 총회장 一. 추도가 감리교 부인회 一. 선생추도사집 권도인 一. 독립운동 김현구 一. 폐회 기도 안원규 영남부인실업동맹회에서 꽃을 기부하였더라. 부인구제회에서는 조문 전보를 보내고 또 동회에서는 안창호 씨 댁에 부의금 二十元을 부송하였더라. 국민총회에서는 조문 전보를 보내고 부의금이 수합되는 대로 곧 보내겠다더라.

    4977 安昌浩先生長逝 외(『韓民』 1938.3.19)

    도산 안창호 선생이 본월 십일 경성 왜감옥에서 돌아가셨다는 전보가 미주 국민회로부터 왔다. 이 전보를 받아보고야 이 곳에서는 비로소 알게 되었는데 동 전보에 의하건대 선생이 십일에 돌아가시고 십이일에 곧 장례를 하였다하니 아마 적의 강박으로 인하여 장례도 자유롭게 지내지 못한 듯하다. 탐보한바에 의하건대 왜적이 작년 칠월에 중국 침략 전쟁을 시작하기 임박하여 선생의 지도하에 있는 동우회 회원을 위시하여 전국 각지에서 수천명을 잡아서 가두고 선생도 자주 불러다가 심문을 하더니 수월 전부터는 아주 입옥되어서 마침내 만고의 한을 품고 영원의 길을 떠나가신 것이다. 아직 자세한 기별은 받지 못하였거니와 선생이 년전 상해에서 잡혀 나아가 사년 동안이나 옥중 고생을 당하시고 나오신 이후 그 신체가 대단히 불건강하다하여 염려됨이 대단치 아니함은 아니었으나, 뜻밖에 그와 같이 쉬히 돌아가실 줄은 몰랐더니 이제 그같이 속하게 돌아가신 것을 보면 혹시나 왜놈이 독약으로써 폭사케 하지나 아니 하였나하는 의심도 없지 아니하다. 선생은 금년이 육십일 세이시요 그의 부인과 자녀들은 다 미주에 있고 본국에는 그의 백씨와 매씨가 있다한다.

    4978 추도 안도산선생 외(『太平洋週報』 1938.3.19)

    三千리 금수강산에●●●●二千五百만 단군유족의 대표이신 도산 안창호 선생은 六十一년 전에 평양에서 출생하여 四十●●●●●업과 광복사업에 전력하다가 금월 十일에 ●●순국하였다. 뜻밖에 이 소식을 듣는 二千五百만 ●●●●●눈물을 흘리게 되여 三千금수강산은 슬●●●●다. 三千리 금수강산 ●●●●●만 동포와 합력하여 선생의 전력하시던 ●●●●●하여 선생의 신명이 九천에서도 위로 ●●●●●선생의 역사를 ●●●●략이리하다. 一은 선생의 품행이●●●은 용모가 특수하고 구음이 웅장하며 사●●●●●회포가 원대하며 교제에 진실하였고 국사에 담임하였다. 二는 선생의 출신이니 자유시● 예수교의 출신으로 신공 ●●●●●하였고 十八세에 독립협회에 투신하여 만●●에 영수이였었다. 짚신에 ●●하니 영웅을 교결이오 광복에 활동하니 동서양을 ●답하였다. 三은 선생의 직무이니 교육에 열심하니 숭실대학교 교장이오 이등박문의 작위를 배척하니 독립대장의 선봉이다. 一九一五년에는 미, 포(미국, 하와이)간에 안무사이었고 三·一운동에는 임시정부 각원이였다. 四는 선생의 음덕이니 영웅이 영웅을 만났으니 내실의 후이다. 선생의 평생경제는 부●의 노동이어다. 영웅이 영웅을 났으니 자제는 명성가의 특수이다. 선생의 미결사는 우리가 성공할 것이다. 五는 순국 이유이니 중일전쟁으로 인연하여 한국독립 기회가 임박하였다. 일인은 우리 운동을 방비키 위하여 지사를 포착하였다. 이광수, 정인과 제선생을 주목하니 七十오 명이 무조건 피수이다. 철장속에서 온갖 악형을 당하다가 뜻밖에 순국이다. 죽사의 방명은 만세에 유전하고 사업 의미는 일반 동포의 담책이다. 선생의 역사를 기억하며 우리 영수들의 활동하던 사업을 우리는 담부하고 속히 ●●●하여 안도산 선생과 같이 우리 애국지사들이 우리를 위하여 원수의 손에서 악형을 당하다가 세상이 알지 못하게 순국하는 영웅들이 많을 것을 추측한다. 독립에 급급한 것은 일각이 억만세와 같다. 물은 동으로 흘러 바다에 들어가고 악은 세상이 미워하여 정리가 정녹하는 것이다. 일본의 악행을 세상이 미워하며 세계전쟁은 피치 못하게 된다. 일본이 만주 점령한 것을 빙자하고 이탈리아는 에티오피아를 점령하더니 덕국(독일)은 중일전쟁을 기회로 알고 히틀러는 금월 十三일에 오스트리아를 점령하였다. 덕·이·일(독일·이탈리아·일본) 三국의 악행이 세계를 점령할 수 없고 미·영·법·아·중(미국·영국·프랑스·러시아·중국) 五국의 정세가 한국과 동정하며 승리할 것이다. 순국 선생들은 천당에서 천사들과 우리와 같이 만세를 부를 것이다.히틀러가 六千명 군인을 옹위하고 비행기와 탱크와 대포로 후원하며 자기가 출석한 오국경성에 입성하니 구주의 세력은 나치스 수중에 들어갔● 미국서는 동서양의 성전을 보고 전쟁을 준비케 된 즉 ●●것이 우리에게는 중일전쟁보다 더 중요하게 된●나치스정책과 제국주의에 악행이 극도에 달하였으니 소악국들과 민주정의에 승리할 시기가 임박하였다. 선생을 위하여 추도하는 동시에 우리가 결심할 것은 선생의 마치지 못한 광복사업에 더욱 분투하여 속히 국권을 회복하고 민족을 부활케 할것이다. 일본이 수十년 전부터 한국서 행하던 악행을 지금은 중국에서 행한 즉 내일은 미국에서 행할 것이요, 그 다음에는 동서양 각국에서 행할 것이다. 그런즉 미국에서도 이제야 수十년 전부터 한국에서 일본의 악행을 선포하던 것을 기념●되고 중일전쟁은 미국이 당한 전쟁으로 생각케 되고 ●●러실스 九국회의시에 소위 미국종교단체 二百五十만과 와이. 엠. 씨. 에이 대표들이 청원서를 제출하여 일본에 대하여 ●화를 배척하지 못하게 하였다. 이제야 미국의 종교가들과 와이.엠.씨.에이 대표들도 일병이 중국에서 야만 행동하는 것을 직접으로 보고 비밀히 일병의 야만 행동하는 것을 활동사진을 박아서 미국정부 당국자들과 사회영수자들에게 비밀히 소개하다.미국정부 당국에서는 일본과 전쟁키를 미리 준비하여 오는 것이나 그러나 미국은 민권 자유가 너무 많은 탓으로 친일파들이 활동하기를 시험하여 전쟁을 반대하더니 지금와서는 미국에 있는 일인까지 중국을 후원한다. 미국생 일인 도야(廿六)는 미국에서 四처 대학에서 필업하였고 미국에서 중국을 위원야 선전자중 일인이다. 상항(샌프란시스코) 일 영사는 도야를 대하여 질문한 즉 도야는 대답하기를 자기 의량으로 발생하는 사상이요 일본을 패전케 하는 것이 일본을 보전케 하는 것이다 하였다. 도야의 말은 미국에 있는 일인들 중에 자기와 같은 사상가가 많되 용감력이 부족하여 양심을 속인다 하였다. 불원간 일인이 일인과 전쟁하고 세계는 한국을 동정케 되었다.

    4979 안도산 선생 추도회 외(『太平洋週報』 1939.3.19)

    와이와후 지방회에서는 회장 이봉수 씨의 주식으로 안창호 선생의 추도회를 여니 그 순서가 여좌하다. 一. 사회 이봉수 二. 애국가 일동三. 기도 목사 안창호 四. 취지 주석 五. 역사 목사 안창호 六. 순국자를 위한 三분간 묵도 七. 추도사 박인규, 고선신 八. 폐회

    4980 安昌浩先生逝世 외(『大韓民國臨時政府公報』 1938.3.20 호외)

    本月 十四日 美洲 國民會● 特電에 依하건대 安昌浩(안창호) 先生이 本月 十日에 京城 敵獄에서 逝世하여 本月 十二日에 ●●하였다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