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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浩回想記[李光洙・金東仁](『三千里』 1932.하절) |
花盆을 사려고 나는 島山과 함께 어느 淸人 花草商을 찾아 갔다. 그 때 島山은 月桂花를 심은 白砂器 花盆 한 개를 가장 마음에 드는 듯이 치켜들고 꽃과 잎사귀에 벌레먹은 데 없나 하고 치밀하게 檢査하고 난 뒤 값을 물었다. 淸人은 七十錢을 내라고 하였다. 島山은 五十錢을 받으라고 하였다.淸人은 六十五錢으로 깎았다. 그래도 島山은 머리를 흔들었다. 六十錢으로 내렸다. 그래도 亦是 머리를 흔들었다. 나중에 五十五 錢으로 낮추었을 때에도 島山은 亦是 싫다고 머리 흔들다가 五十錢이라고 부르니까 그제야 비로소 돈을 꺼내어 샀다. 나는 곁에 섰다가 갑갑하여 「그건 왜그리 깎으시우 웬만하여 사시지오」 그때 島山은 「우리 쓰는 돈이 어떤 돈이길래 그러오」 한마디를 할 뿐이었다. 그 뒤에 알고보니 島山은 이 花盆 한 개를 사려고 上海의 寶康里와 南京路의 여러 花草商을 돌아 다니면서 값을 물어 두었다. 그래서 이 집 花盆이 五十錢이면 비싸지도 않고 헐하지도 않은 값인 줄 알고 비로소 五十錢으로 부르고 그 五十錢에 산 것이었다. 그는 옳다고 생각하는 돈이 아니면 한 分을 아니 쓰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는 花草를 몹시 사랑하였다. 겨우 단칸방 밖에 아니되는 淸人집 宿舍이건만 툇마루에는 언제든지 花盆 여러 개를 놓았고 房안에도 藤넝쿨을 곱게 成長시켜 壁으로 天井으로 고루고루 올렸다. 「제사는 周圍는 깨끗이 하라」 함이 그의 持論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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亡命의 島山으로 囹圄의 安昌浩[城北洞人](『新東亞』 1932.7) |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너를 두고 나는 간다 내가 가면 아주 가며 아주 간들 영 잊을소냐」 이 노래는 島山 安昌浩(안창호)가 距今 二十三年 前인 隆熙 四年 七月 卽 日韓合邦이 되던 前달에 朝鮮을 脫出하며 읊은 노래이다. 이 노래는 約 十年 前까지만 하더라도 朝鮮 全土에 流行하였으니 이는 그 歌詞가 필시 朝鮮人의 心琴을 울리었던 까닭이리라. 이 哀然한 노래를 읊으며 朝鮮을 떠났던 島山이 오늘에 縲絏의 몸이 되어 故土를 밟았다. 灰色 안개 엷게 덮힌 仁川 棧橋에 嚴重한 警官의 護衛를 받으며 悄然히 下陸하는 島山의 恣體! 어찌 無量한 感慨가 없지 않았으랴! 島山은 今年 五十三 歲 그는 本是 平南江西人이다. 집안이 넉넉하지 못하여 일찍이 장가를 들지 못하고 農事만 짓다가 十八 歲 되던 해 八月에 몇 山자 봇짐을 걸머지고 平壤을 거쳐 서울로 올라갔다. 때는 마침 日淸戰爭이 일어 半島에는 日淸(일본, 청국)兩國의 貔貅가 覊權을 다투는 煙塵이 䑃䑃하던 때라 島山은 비록 農村에서 호미를 쥐고 김을 맬 망정 時局의 推移를 洞察하여 奮然히 호미를 내어 던지고 朝鮮의 首部 漢城으로 向하였던 것이다. 서울에 올라온 島山은 于先 自己의 無職을 깨달았다. 事業을 하기 前에 먼저 新學問을 배워야 되겠다는 決心을 하고 米國人 「언더우드」牧師의 設立한 書堂 비슷한 學校(只今 儆新學校 前身)에 入學하였다. 그러나 遠大한 抱負를 품은 그는 切迫한 時局에 處하여 學業만 繼續할 수 없음을 깨닫고 學窓을 물러나 政界에 投足하기 시작하였다. 只今보다도 까만 옛날이라 그가 추측하는 사람들은 아직도 在來의 慣習을 버리지 못하여 그의 총각임을 蔑視하였으므로 島山은 총각이면서 自作成冠하여 網巾쓰고 갓쓴 어른 行世를 하였다. 丁酉年에 平壤으로 내려가 獨立協會 支會를 設置하고 只今 鐘路 公普構 內에 있던 快哉亭에서 繼天紀念 祝賀 演說을 하였다. 이것이 處女 演說이었지만 그 雄辯은 聽衆을 感動시켰다. 그리고 그 故鄕에 敎會를 세우고 또 漸進學校라는 小學校를 세웠다. 이 學校는 그의 最初의 事業으로 現存한 唯一한 紀念物이다. 京城으로 平壤으로 거의 全 朝鮮을 遊說하고 또 그 부르짖는 것은 實踐으로 模範케 하고자 平壤附近 馬山洞에 故 李昇薰(이승훈) 等과 磁器會社를 세우고 京城과 平壤에 太極書館을 세웠다. 그가 二十三 歲 때 서울에서 정말 어른이 되었다. 同鄕인 江西 李錫煥(이석환) 氏 令孃인 現夫人과 結婚하고 마침 獨立協會가 解散되는 때라 內外가 같이 遽然히 米國을 向하여 太平洋을 건넜다. 同船한 同胞가 約 二十 名이 있었다. 그 中의 절半은 洋服한 學生이고 절반은 中國 廣東에 本據를 둔 상투 튼 人蔘장사이었는데 洋服한 學生은 상투 튼 蔘商을 侮蔑하고 蔘商은 學生을 아니꼽게 보아 吳越同舟 格이었다. 島山은 이것을 근심하여 兩者를 融和케 하여 桑港(샌프란시스코)에 到着할 때는 親兄弟같이 親密해 졌다. 米國에 사는 同胞가 겨우 五十人 其中 三十人은 桑港(샌프란시스코)에 살았다. 桑港(샌프란시스코) 同胞도 亦是 船中의 同胞같이 잘 和合되지 않는 形勢이었으므로 그들을 團結시키기 爲하여 親睦會를 組織하고 同胞를 統一된 傘下에 叫合하였다. 때마침 開發會社를 통해 約 萬名의 同胞가 布哇(하와이)와 墨西哥(멕시코)로 移住한 나머지 얼마가 北米로 들어가 朝鮮人이 漸漸 늘어갔다. 느는 것은 좋지만은 開發會社 移民은 一種의 浮浪性을 띤 階級만이었으므로 사람들이 順良하지 못하여 酒色雜技에 沈淪하기가 쉬웠으므로 島山은 그 生活을 改善시키고자 李剛(이강) 氏 等과 더불어 親睦會를 解體하여 共立協會를 組織하였다. 이 協會에서는 새로 건너오는 同胞 移民의 職業을 紹介하고 週刊으로 共立新聞을 石版으로 印刷發行하며 同胞가 僑居하는 各 地方에 地方會를 設置하는 等 在米 同胞를 統一한 唯一한 機關이 되어 在米 同胞는 勿論 하와이 同胞까지의 總 力量이 集中되어 同胞의 生活改善과 知識啓發에 큰 功을 끼쳤다. 開發會社 移民은 大槪가 故國의 生活에 落伍하고 新住地를 찾아 하와이로 墨西哥(멕시코)로 北米로 건너간 사람들로 高尙한 理想과 遠大한 計劃이 없이 돈을 벌어서는 放逸한 生活에서 빠져 있었을 뿐이다. 그것을 今日과 같이 外國人에 比하여 遜色이 없는 生活을 누리게 된 것이 十中八九까지 島山이 쌓아 놓은 基礎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까지 한다. 그의 渡米(미국)의 目的은 遊學이었다. 그러나 그의 熱情은 牧者 없는 羊과 같은 可憐한 同胞가 生素한 外國에서 放浪하는 것을 그대로 보고 지나게 하지 않았다. 島山은 自己 一個人의 榮達보다도 不祥한 同胞와 더불어 같이 苦生함이 옳다고 생각한 것이다. 이리하여 往來 同胞의 生活이 어느 程度까지 安定을 얻어 後顧의 念慮가 없이 되었을 때 東西의 時局은 新興 日本의 北露(러시아)의 强大를 摺伏시켜 半島의 情勢가 急變해 짐을 告하였다. 이에 島山은 北米의 事業을 다른 同志에게 맡기고 忽忽한 걸음으로 故國을 向하게 되었다. 桑港(샌프란시스코)을 떠나며 首를 읊으니 建國男兒正當時 向東投步不可遲 라 하였다. 이 한句로 當時 그의 心志가 어떠하였었던가 함을 짐작할 수 있지 않은가. 七條約이 締結되기 바로 前에 歸國하니 그가 버렸던 故國은 不過 數年 間에 刮目相對하게 突變하였다. 事態가 몹시 促急하였다. 一時인들 蹰躇할 수가 없었다. 그는 다시 街頭에 나섰다. 주먹을 부르쥐고 피를 吐하는 듯이 외쳤다. 同胞여 깨어나라고 그리고 同志를 叫合하여 學校를 세우고 寢食을 頓忘하고 遊說을 하였다. 그 때에 선 것이 大成學校로 이는 故 李鍾浩(이종호), 故 金鎭厚(김진후), 宣川 吳致殷(오치은) 氏 等의 補助를 얻어 세운 것이다. 이 學校는 時局 關係로 併合後 閉校되었지만은 여기서 敎育받은 六百의 英才는 今日에 朝鮮에 棟樑이 되었다. 學校敎育뿐만 아니다. 社會敎化에도 큰 影響을 주었으니 有名한 平壤 妓生으로 그 感化를 받아 廢業하고 當時 平壤社會를 風靡하던 예수敎에 歸依한 女子가 많다. 乙巳年에 故 李甲(이갑) 氏 等이 發起한 西北學會에 丙午年에 歸國하면서부터 參加하여 政治運動을 크게 일으켰으니 當時의 同志로 有名한 사람은 盧伯麟(노백린), 李東輝(이동휘), 李甲(이갑), 柳東悅(유동열), 梁基鐸(양기탁), 崔光玉(최광옥), 李昇薰(이승훈), 安泰國(안태국), 尹致昊(윤치호), 金東元(김동원), 李德煥(이덕환) 氏 等이었다. 金東元(김동원), 李德煥(이덕환) 氏 等은 이번 護送되어 올 때 平壤과 江原道 通川으로부터 仁川까지 出迎하였었다. 隆熙 元年 丁未에 그가 平壤에 있을 때 海牙事件(헤이그사건)으로 高宗이 禪位하여 物情이 騷然하게 되었다. 그 때 島山의 同志들도 平壤에서 逮捕되는 사람이 많아 島山의 身邊도 危殆하게 됨에 오빠를 생각하는 그 누이 安信浩(안신호) 女史는 自己 男便의 갓과 두루마기를 갖다가 입히고 말을 얻어 黃海道 黃州까지 가게 하고 거기서 汽車로 서울을 向하게 하였다. 그가 막 서울에 들어서는 날이 八月 一日 軍隊解散으로 因한 衝突로 負傷한 軍人이 南大門 附近에 수두룩하게 넘어져 鮮血이 淋漓하되 돌아보는 사람이 적었다. 島山은 自己의 身邊이 危殆함을 잊어버리고 負傷兵을 救護하여 濟衆院(지금 세브란스병원)에 收容케 하였다. 그는 政治的 秘密結社로 新民會를 組織하고 表面 合法團體로 靑年學友會를 組織하였다. 新民會와 靑年學友會는 其 後에 百五人事件의 嫌疑로 解散되고 總本部이던 太極書館도 閉鎖되었다. 一進會運動이 나날이 猛烈하여 지는 한 便으론 隆熙 三年의 伊藤(伊藤博文)公 暗殺事件이 일어나 合邦의 機運이 더욱 濃厚하게 되었다. 그는 여러번 憲兵隊에 拘禁되다가 最後에는 龍山 憲兵隊에 拘禁되었다. 때의 統監이 아마 曾彌(曾彌荒助) 氏인지 分明치는 않되 合邦을 할 수 있는 대로 平穩히 마치려는 意味에서든지 民衆의 排斥을 받는 李完用(이완용) 內閣보다 民間에 勢力을 扶植한 政府로 하여금 內閣을 組織케 함이 어떤가 하는 劃策밑에 鄭雲復(정운복), 崔錫夏(최석하) 等이 中間에 斡旋을 하여 島山은 拘禁된 지 三週日만에 憲兵隊에서 나오고 開城 憲兵隊에 갇혔던 李甲(이갑)도 釋放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多端한 時局에 그 責任을 지고 나서기를 願하였을 理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다시 그들이 行하여 오던 運動을 繼續하니 當局의 監視가 더욱 嚴重하여질 뿐 時局은 이미 기울었으므로 길을 各其 달리하여 併合 바로 前달인 七月에 朝鮮을 脫出하였다. 李甲(이갑), 李鐘浩(이종호) 等은 間島를 經由하여 露領(러시아령)으로 安昌浩(안창호)는 黃海道 九味浦에서 木船을 얻어타고 中國 靑島로 經由하여 亦是 露領(러시아령)으로 亡命하였다. 「간다 간다 나는 간다」의 노래도 이때에 읊은 것이다. 海參威(블라디보스토크)에서 李甲(이갑), 李鐘浩(이종호) 等과 相逢하여 約 半年 동안 將來를 計劃하다가 朝鮮人이 많이 사는 各地로 分散함이 有利하다고 하여 李甲(이갑)은 露領(러시아령) 「니콜리스크」로 가고 李鐘浩(이종호)는 海參威(블라디보스토크)에 머물고 島山은 西伯利亞(시베리아) 鐵道로 獨逸 等 諸國을 經由하여 北米로 건너 갔다. 北米에서는 이전에 그가 開拓한 모든 事業에 活躍하는 外에 國民會長이 되고 새로이 興士團을 組織하였다. 이 興士團은 其後 中國 上海에 遠東支部를 두었는데 海外의 團體로 그 結社가 鞏固하다. 西曆 千九百十九年 五月 上海로 나와 지금에 이르렀다. 그가 이번에 逮捕되던 光景을 좀 말하자. 지난 四月 二十九日 上海에서 尹奉吉(윤봉길)의 爆彈事件이 勃發하자 日本警察 憲兵隊와 佛租界(프랑스조계) 警察은 朝鮮人 家屋을 搜索하여 많은 사람을 逮捕하였다. 마침 島山은 그때 上海 朝鮮人僑民團長 李裕弼(이유필)의 아들인 어린이와 約束한 어린이날 紀念式의 捐助를 가지고 그 집을 訪問하였더니 李裕弼(이유필)은 없고 그는 暫時 그 집 應接室에 앉아 新聞을 閱讀할 새 警察隊가 달려들어 逮捕한 것이다. 그 때 警察隊는 安昌浩(안창호) 拘引狀은 가지지 않았었으므로 實로 偶然한 發見이라고 할 수 있다. 拘引狀은 없었으나 그가 安昌浩(안창호)임을 안 日本 警察은 佛租界(프랑스조계) 當局에 交涉한 結果 그날 午後 四時 領事館으로 引渡되었다.安昌浩(안창호)의 被逮가 傳함에 그가 中國籍이었다는 것 그 夫人이 米國籍인 것 또 그가 亡命한 政治犯이라는 것 等을 理由로 國際間에 相當한 紛議가 일어 났다. 總督府로부터 田中(전중) 保安課長이 上海에 到着하기 前에 領事館에선 그를 朝鮮으로 護送하여 七日 午前 七時에 下陸하게 된 것이다. 그의 夫人과 두 아들 두 딸은 只今 北米 로스앤젤레스에 산다. 그의 親兄 安致浩(안치호)(六二) 氏는 平南 江西에서 牧師 노릇을 하고 그 親妹 安信浩(안신호)(四九) 氏는 平南 鎭南浦에서 산다. 安信浩(안신호) 氏는 距今 三十餘 年 前인 그가 十六七 歲 때에 서울에 工夫하러 다니던 新女性으로 그 意志가 男子보다 堅固한 女丈夫다. 島山은 只今 京畿道 警察部에서 三輪警部의 取調를 받는다. 留置場에서 服藥하면서 아마 한달까지도 取調가 끝나지 못할 터이라고 한다. 將次 그의 運命은 어떻게 될까.(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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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島山의 少年時代[海堂](『東光』 1932.12) |
目下 囹圄 中에 있는 島山 安昌浩(안창호)는 世人이 아는 바와 같이 平南 江西 出生이다. 그래서 이곳에는 그에게 關한 옛이야기가 그의 入獄과 同時에 새삼스레 流行되고 있다. 그 中에서 그의 幼年時代 少年時代의 이야기를 듣는 대로 記錄한 것이 이것이다. 그 眞否如何는 筆者가 保證할 것이 못되거니와 이 이야기를 물어 참말이라 하면 그의 性格의 一端을 풀어낸 것도 같아야 興味를 자아내는 點이 많다. 安셋째는 그의 兒名이다. 安셋째는 一八七八 平壤 南村 도롱섬 빈한한 농가에 탄생되었다. 그가 滿 두 살 때에 하루는 그의 어머니가 出他를 하였다. 두 살된 셋째는 嘶腸하여 젖이 먹고 싶었다. 그는 어머니를 두루 찾다가 할 수 없어 그 앞집 長孫의 어머니를 찾아가 방금 물레질(紡績)을 하고 있는 그의 뒤로 가서 가만히 옷깃을 들치고 젖 한통을 맛있게 먹었다. 그 隣母는 自己의 長孫인 줄로 信之無疑하고 먹여 주었다. 安셋째가 「어! 배부르다」하고 뚝 떨어질 때에 살펴본 즉 自己 長孫이가 아니라 뒷집 셋째이다. 하도 어이가 없어서 「이놈 남의 젖을 다 먹었구나!」한 즉 히히 웃고 悠悠히 自己 집으로 가버렸다고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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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島山의 校長時代[洪集疇](『東光』 1933.1・2) |
『安島山은 距今 二十五 年 前 곧 隆熙 二年에 平壤 大成學校를 設立하고 親히 代辨校長으로서 四年 間 千餘의 靑年을 訓育하였다. 그 때 各 方面의 言行 몇 가지를 耳聞目睹한 대로 記錄하여 보려 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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鬪志滿腹 歷代巨頭 ; 平壞大成學校長 尹致昊・安昌浩(『三千里』 1933.9) |
日前 平壤서 올라온 某氏로부터 듣건데 옛날 光輝赫赫하던 大成學校를 다시 復興하려고 有力한 여러분들이 奔走하는 중에 있다 한다. 이 學校가 다시 復興될까 어쩔까 함은 囹圄 中에 있는 最後의 校長 島山이 未久에 刑을 마치고 나올 光景을 豫想하고 未嘗不 興味있는 일이라 아니할 수 없다. 實로 當時 大成學校에 在學 中이던 靑年學徒들이 十年 지난 오늘에 이르러는 平南北의 中樞 人物이 되어 있는 터이라 그분들의 誠意如何엔 그 復興이 그다지 難事로도 보여지지 않는다. 어쨌든 平壤 大成學校는 光武 四年에 創設되어 隆熙 四年에 廢校됨에 이르렀다. 이사이 七年間 表面上으로는 校長을 替하기 兩次에 미쳤으나 內容으로는 늘 一聯하게 한분이 主宰하였다고 볼 수 있다. 旣初代에 尹致昊(윤치호) 氏가 校長으로 있었고 安島山이 代辨 校長으로 있었으나 實狀은 그때부터 大成學校는 精神的으로나 物質의 힘으로나 全혀 島山의 손에 있었었다. 그러기에 島山 卽 大成學校요, 大成學校 卽 島山이었다. 初代의 尹致昊(윤치호) 氏는 舊韓國 政府時에 駐米(미국)公使를 歷任하였고 開城의 韓英書院 院長으로도 있었으며 더욱 在野 時에 徐載弼(서재필), 李商在(이상재) 氏 等과 더불어 獨立協會, 大韓協會 等 政黨을 創設하여 크게 活躍하던 분이다. 校長으로 在職한지는 約 四年 間. 그리고 島山으로 말하면 平南 龍岡人으로 일찍 十八 歲 時에 獨立協會에 活躍하여 才幹, 膽略이 벌써 定評이 있었고 더욱 四隣을 덮는 雄辯으로 名聲이 있었다. 그 뒤 時世 不利함에 米洲로 건너가서 共立協會를 만들고 共立新聞을 發行하였으며 以來 歸國數年하다가 다시 海外로 走하여 布哇(하와이), 米洲, 上海 等地에서 活躍하던 前後는 世人이 已知하는 바와 如하다. 基督敎 信者로 興士團의 首腦이다. 校長에 在任하기는 約 三年 間. 島山이 이제 나온다면 그의 傘下에 얼마나 한 人材가 모여질까? 島山이 나오면 어떤 機關에 據할까? 이것은 벌써부터 社會의 關心을 끄는 問題거니와 아무튼 大成學校 復興의 소리와 아울러 今後의 島山 對 大成學校의 問題가 注目을 끌지 않는다 할 수 없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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獄中에서 해를 보내는 이들[金正實](『新東亞』 1933.12) |
푸르게 말 없이 열린 하늘은 東西에 있어 다름이 없다. 봄과 여름의 晴曇은 있다 치더라도 긴 時流위에 亦是 同一한 面影을 保存하고 있으나 보는 人間의 心情에 떠오르는 하늘은 千變이오 萬化이다. 異城의 하늘. 故鄕의 하늘. 失望人의 눈에 비친 하늘과 情다운 이를 잃은 젊은이의 하늘이 검푸르게 나타난다면 希望의 하늘은 붉게 타오르는 하늘일 것이다. 흰 솜 같은 구름을 싣고 나직한 여름 하늘이 언제 먹장갈아 끼얹은 듯한 험상궂은 소낙비로 化할 때와 맑은 하늘에 부채살 같이 曙色이 五彩玲瓏한 아침날의 하늘과는 느끼는 자에게 달리 나타날 것이다. 東亞의 天地를 席捲하다시피한 不出世의 業績은 없다 치더라도 主義와 政見이 相容 못할 바 있다 치더라도 바탕이 크고 目標가 굵은 線 끝에 빛난 힘센 이의 눈앞에 展開된 하늘은 平凡으로만 보이지 않을 것이다. 하물며 奔馬와 같이 荒野를 馳驅하던 사내들이 無盡藏의 하늘을 판에 박은 틈으로만 바라볼 수 있을 때의 느낌은 적다고 못할 것이다. 그들의 먹는 것이 조밥이고 그들이 입는 옷이 푸르고 붉으며 담장이 높고 잠드는 방이 마루바닥이라는 것으로는 그들의 가슴에 오고가는 생각이 꼬깃꼬깃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일찍이 世人의 冷遇에서 이보다 더 幻滅의 悲哀를 느꼈었고 不如意한 成業에서 失望의 가을을 노래도 하였으니 구태여 새 것으로 보일 것 없었으리라. 그러나 윙윙하고 우는 팔둑을 잠재우기와 감을수록 말똥말똥해 갈 뿐인 가을 밤에 쇠창살 사이로 흘러 들어 오는 달빛을 통하여 보이는 별드문 하늘의 느낌은 깊다면 바다일 것이다. 풀을 이불로 돌을 베개하고 길가에 쓰러져 잠들던 風餐露宿하던 때나 東家食 西家宿하던 날에라도 終不得 行其道의 孔子(공자)의 쓰림을 맛보지 않고 그래도 이 흘린 땀에 쌓아서 뿌린 씨는 때를 만나 움트고 꽃피어서 열매 맺을 것이라는 갸륵한 생각을 唯一의 自慰로 삼았더니 길가에 뿌려 새가 주어간 후 消息이 아득한 담밖의 世界를 생각하고서 精神나간 사람같이 바라보는 하늘빛은 무엇으로 形容될 것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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二十五年만에 島山會見記[金性業](『三千里』 1934.8) |
때는 지난 六月 十八日 下午 十一時 四十分이다. 平壤서 南行 列車에 몸을 싣고 大田行을 하기로 되었다. 目的은 일년나마를 두고 하도 벼르던 島山을 面會하려 함이라. 무슨 큰 用務를 지닌 것이 아니고 다만 얼마나 여위었는가. 얼마나 寂寞과 싸우고 있는가. 무슨 옷을 입고 수염은 얼마나 자랐으며 이마에는 주름살이 몇 가닥이나 더 끼었는가. 그것을 알려 함에 불과 하지만은 찾아가는 내 가슴 속에는 여러 가지로 復雜한 感懷가 줄달음질을 쳤다. 囘顧하면 벌써 먼 옛날 그것이 二十五六年이나 될까. 내가 中學生 制服을 입고 平壤 大成學校를 다닐 때에 나는 늘 島山을 만났다. 靑年敎育家요 情熱家로써 一世에 그 일이 널리 알려진 그분을 校長으로 맞아가지고 智德體의 스파르타式 敎育을 받고 있던 우리 머리에는 島山의 그림자는 크게 깊게 머릿속에 印 찍히었다. 朔風寒雪이 날리는 추운 三冬 大同江의 積雪진 氷판위를 西道健兒의 一隊가 隊伍를 整齊하여 一路行進할 때의 壯觀은 우리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壯觀이었다. 島山은 學生들 行進하는 光景을 校庭에 直立하여 恒常 感激으로 보고 있었다. 그리고 돌아온 學徒들을 校庭에 세워놓고는 「강철이 되어라」 「무쇠 기둥이 되어라」하고 激勵하는 演說을 하여 주었다. 그때는 島山도 三十年 前後의 血氣에 찬 靑年이었다. 그분이 지금 만나 본다면 얼마나 늙었을까. 검은 머리칼도 하얘 졌을까. 그 우렁차고 남을 잘 울리던 목소리도 지금도 청청한가 맑은가. 이 모든 생각이 거칠 사이 없이 가슴 上下를 오르내린다. 이렇게 夜行車 中에서 興奮하면서도 한가지 근심이 있었다. 그것은 大田을 가기는 가지만은 大田가면 果然 面會할 수 있을까. 遠來의 나를 面會나 시켜줄까. 이런 생각을 하면 不安한 생각이 가슴을 찌른다. 이럭저럭 輾轉不寐타가 翌日 十九日 午前 九時에 京城서 下車하여 新聞社의 일을 잠깐보고 그날 곧 車를 바꿔 타고서 午後 九時 四十分에 大田行을 하여 二十日 午前 한 시에 目的地인 忠南 大田에 내렸다. 大田 내려서는 一夜를 旅舍에서 지내고 날새기를 고대하여 午前 九時 半에 郊外 솔밭 속에 있는 붉은 벽돌집 大田刑務所로 訪問하여 온 뜻을 告하고 面會를 請한 즉 宮崎(궁기) 所長의 好意로 그날 午前 열시 반에 看守가 선 刑務所 面會室에서 島山을 相對케 되었다. 二十五年만에 만나는 옛날의 安 校長! 내 몸에는 電流가 흐르듯 一瞬은 呆然함을 느꼈다. 島山도 내 얼굴을 보고 잠깐 沈默한다. 어릴 때에 본 얼굴을 얼른 記憶하기 어려워 함인듯 함참 있다가 알아본 듯 기쁜 빛을 띠며 「君이 인제 中老가 되었구려」이것이 첫인사의 말이다. 나 亦 島山이 많이 늙은데 놀랐으나 그 부드럽고 무거운 목소리는 예나 지금이나 變함 없는데 무어라 말할 수 없는 愉悅이 느껴진다. 이리하여 極히 制限된 世上일 이야기와 健康 이야기를 約 二十分 間하고 난 후 握手까지 하고 島山은 다시 용우쓰고 看守에 同行되어 監房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고 超然히 나오다. 그 분의 健康은 요즈음 消化不良症도 많이 減退가 되었다. 齒牙로 많이 辛苦하던 것도 大田서 다시 入齒한 것이 比較的 完全하여 飮食을 咀嚼하는 것도 잘 된다하며 언제든지 失望할 줄 모르는 그 意氣는 監房안에서도 西式强健術을 實施하여 健康에 몹시 留意하고 있었다. 只今 每日하는 일은 바늘을 쥐고 옷을 꿰매는 裁縫의 일인데 氣分上으로도 매우 좋다고 한다. 나올 때에 一般親知에게 問安하여 달라고 두세 번 連하여 말하였다. 아직 刑期가 一二年 남은 島山의 健康을 心祝하며 나는 그날 夕陽車로 大田을 떠났다.車 中에서도 저멀리 솔밭 속에 앉은 刑務所 建物을 再三, 再四 쳐다 보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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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선생의 출옥을 기뻐함(『흥사단보』 1935.3-6) |
지난 二월 십一일에 경성 전보로 안도산 선생의 출옥을 전함에 본단에서는 즉시 각처에 있는 동포와 동지에게 이 기쁜 소식을 전화와 전보와 급우편지로 제제히 전달하였다. 우리는 너나할 것 없이 이 소식을 듣고 서로 만나 「안 선생께서 놓이셨대요」하고 긴 한숨을 내여 쉬며 두 눈에 남모르게 눈물이 그렁그렁 하였다. 대개 우리는 지난 三년이 넘는 긴 세월에 선생의 안위를 위하여 매일 매일 마음이 졸이다가 뜻밖에 기쁜 이 소식을 들음에 감정의 충동은 거의 우리의 신경을 마비시키었으므로써라. 돌아보건대 선생께서 一九三二년 四월 三십일에 중국상해 법조계에서 체포되어 원수 왜적의 손에 인도된 후 자유의 땅을 밟지 못한 지 이미 三년이었고 무의미하고 불합리한 적의 법률상 수속인 예심과 공판을 지내여 四년 징역의 언도를 받은 후 「살인이나 강도」의 보통 죄수와 같이 황토색의 역복을 입고 복역한 지 거의 二년 반이었다. 해외 만리에 있는 가족을 생각하며 감옥 담장 밖에 있는 친척과 동지를 그리워하여 사정의 애탐도 물론 이거니와 三십여 년을 자나깨나 하루같이 계획하고 지도하여 오던 우리 혁명운동을 일도에 그치게 되고 감옥의 철창 뒤에 앉음에 머리에 떠오르는 아름다운 이상을 동지에게 설파할 수 없으며 가슴에 깊이 품은 새로운 계획을 실제에 착수할 수 없는지라 선생의 심사의 우울하심과 고뇌됨이 과연 그 어떠하였으리요. 하물며 지난 三년 동안에 일본의 군국주의의 세력이 자못 맹렬하여 남만에 만주국을 신설하고 나아가 내몽고와 열하를 침략하여 중국의 운명을 위협함에 중화의 四만 만민족의 배일심은 극도로 백열화하여 비록 미온적이던 장개석의 국민정부로도 참으로 항일구국을 도모하기 위하여 한중(한국, 중국) 양 민족의 진정한 제휴를 각오하고 국민정부의 중요인물들과 우리의 혁명당 간부간에 교섭이 개시되었더니 선생의 체포됨은 이에 대하여 큰 타격을 주었었다. 만일 선생으로 하여금 수년의 자유를 더 얻었던들 그의 열렬한 심성과 종횡인 책략은 능히 내외국인의 동지들을 감동하여 적당한 계획을 세워 오늘 동아(동아시아)의 정국에 새 국면을 열었을 것도 가히 상상키 어렵지 아니하다. 멀리 들음에 선생의 출옥 당시에 머리는 전혀 백발이 되셨고 눈썹까지 하얗다 하니 선생의 이 백수, 호미가 어찌 그 우연함이리오. 오늘 선생께서 대전형무소의 문 밖에 나오시어 기거와 음식에 적은 편의를 얻게 되었으므로 우리는 이를 반겨하나 그러나 우리 강산에 널린 적의 군경의 총검은 감옥의 장벽에 비할 바 아니며 우리 운동을 압박하는 적의 가혹한 법률은 감옥의 귀측에 비할 바 아니니 우리의 혁명운동이 완성하기 전에는 선생의 출옥은 참으로 一종의 가출옥이오 선생의 자유는 실로 극도의 부자유이다. 선생의 혁명적 동지로 자임하는 우리들이 선생의 진정한 출옥과 진정한 자유의 큰 기쁨을 맛보려 하면 오직 우리 운동의 성공을 하루 바삐 촉진함에 있다. 선생은 우리의 혁명적 인도자이니 만큼 비록 적의 옥중에 계시나 우리 운동을 촉진함에 대하여 여러 가지 모범과 암시를 보이셨다. 대저 혁명은 전쟁이라 전장에 나아가는 전사 반드시 죽음과 적에게 포로될 것을 각오할 바이므로 다만 칼을 잘 쓰고 총을 잘 쏨으로 능사가 다한 것이 아니라 평소부터 도덕적 수양을 쌓아 비록 적진 가운데 포로가 되어 천창만이 나의 일신을 견주어도 조금도 굴하지 않으며 두려워 않고 언사가 자약하며 기색이 탄연하여 오히려 적의 사기를 꺾음이 진정한 전사이라. 혁명가도 또한 그러하여 처음부터 단두대와 감옥생활을 각오할 뿐 아니라 또한 면키 어려운 운명이므로 고래(古來)의 진정한 혁명가는 단두대와 감옥생활로 적을 역습하는 一종의 선전기관을 삼았다. 그러므로 그들이 불행히 관헌에게 잡히게 되면 죄의 경중을 불구하고 그들의 주장은 어디까지 철저하였으며 동지를 극히 비호하였으며 혁명의 비밀은 절대로 함묵하였으며 그들의 나라와 민족을 위하는 지성과 고상한 인격은 일상의 동작과 언어에 표현되어야 감옥에 갖힌 보통 죄수와 관계 관헌까지 감화되며 내종에는 민중 가운데 그들의 이름과 사상이 유포되어 민중숭배의 영웅이 되었다. 이번 도산 선생의 감옥생활은 과연 진정한 혁명가다운 감옥생활법을 실제로 우리에게 교시하시었다. 동지를 비호하며 기밀을 엄수하여 사건이 확대치 아니하였으며 연루가 한 사람도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아무리 무도하고 가혹한 일본의 법관으로도 그 심문이 우리의 기밀을 저촉하거나 혹은 태도가 정당치 아니하면 선생은 단연히 절식을 행하고 함언불언함으로 내종에는 소위「치안유지법」에 의하여 독립운동 단체의 결사 또는 결사미수라는 우스운 죄명하에 공판하게 되었다. 공판석상에서 선생의 주장하신 당당한 「조선독립론」은 공판의 공개금지로 세상에 전치 못하였으나 그 내용은 우리가 넉넉히 상상할 바이며 공판 후에 일본관헌까지 선생을 가리켜 「조선 민족주의의 화신」이라 함을 보아도 선생의 의론이 얼마나 광명하였으며 얼마나 정당하였음을 예측하겠다. 그러므로 선생은 일본관헌으로부터 인우군자의 존경을 받을 뿐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는 중국의 손문과 인도의 간디 같이 민중의 영웅숭배의 표적이 되어 몸은 갇히였으며 입은 닫히였으나 그의 일홈(이름)만 말하여도 우리 민중에게 애국심과 애족심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번 선생의 출옥 당시에 그 일이 아무 소문없이 돌연 간에 생기였으나 어느덧 남대문과 평양역에 구름같이 모여든 四천여의 군중은 인산인해를 이루었으니 이 위에 말한 민족심리의 실제적 표현이 아니고 무엇이리오. 아! 선생이 놓이셨도다! 우리는 기쁘도다! 그러나 선생도 우리와 같이 오늘에 기뻐하실까 생각컨대 그의 기쁜 날은 오직 한 날일 것이며, 그의 기쁜 일은 오직 한 일이니, 우리의 목적을 성취하는 날이 곧 그날이며 우리의 운동을 촉진하는 일이 곧 그 일이라. 우리 동지들은 오늘 기쁜 가운데서 더욱 새 각오를 결심하여 선생의 이미 보여주신 이상과 계획을 충실하게 실행할 뿐 아니라 三四년 동안이나 끊겼던 선생의 새로운 이상과 계획을 듣는 때에 더욱 분발하여 선생과 함께 기뻐하는 날이 멀지 않게 꾀할지로다. 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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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의 人格과 舞臺[李光洙](『三千里』 1935.12) |
安島山에 對하여는 여러 가지 事情으로 그의 人格이나 手腕을 充分히 말하기가 어려울 것 같습니다. 내가 아는 安島山은 「참」과 「참음」의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는 거짓말, 거짓 表情을 完全히 克服한 사람이라고 봅니다. 그에게는 發表아니하는 것이 있을 지언정 表裡도 없고 權變도 없고 陰謀도 없습니다. 世上에서 혹시 그를 誤解하는 이가 있지마는 좀 파라독스 같지마는 이 誤解가 다 그의 참되어 꾸밈과 權變없는 데서 온 것입니다. 그에게는 接하는 모든 사람을 다 愉快하게 하고 다 親하게 할 만한 權變과 假飾과 謟曲을 부리라면 부릴 재주는 넉넉하다고 생각합니다마는 이 「거짓」이라는 것을 自己個人에게서 빼어버리고 朝鮮사람에게서 빼어버리자는 것을 一生의 大願을 삼고 또 一生의 職分을 삼고 있습니다. 또 그가 참음을 힘쓴다 함은 그는 일찍 사람이나 일이나 물건에 對하여 성을 내거나 화를 내거나 싫은 생각을 내이는 것을 본 사람이 없습니다. 島山의 人格은 以上에 말씀한 두 기둥 위에 선 것이라고 믿습니다. 島山의 手腕에 對하여 말씀하면 그 中에 特長되는 것은 經倫인가 합니다. 이 點에는 그는 어디까지나 實際的입니다. 그는 이 點에서 決코 空想家가 아닙니다. 島山에게 어떤 舞臺를 提供하였으면 좋겠는가에 對해서는 말할 수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島山은 어떤 處地에 있던지 自己의 舞臺를 自己 손으로 만드는 사람입니다. 만일, 그래도 假想으로, 만일 島山에게 무엇을 提供해 보라고 하면 나는 幼稚園에서부터 普通學校, 男女高等普通學校, 男女專門學校와 大學과 같은 것 包含한 學園을 맡기고 싶습니다. 이것이 島山이 가장 즐겨할 뿐 아니라 가장 능란한 舞臺일까 합니다. 島山의 學校에서 몇 달만 배운 사람이라도 特色있는 訓練을 받아서 特色있는 사람이 되는 것은 이미 大成學校에서 實驗된 것이지만 只今은 그 能力이 더욱 圓熱하였을 것을 믿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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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下大小人物評論會(『三千里』1936.1) |
出席者 車相瓚(차상찬) – (開闢社 主幹) 柳光烈(유광렬) – (新聞社 編輯局長) 宋奉瑀(송봉우) – (批判社 主幹) 李瑞求(이서구) – (新聞社 前 社會部長) 本社 金東煥(김동환), 金性睦(김성목) 十二月 十三日 午後 六時부터 서울 明月館에서 同 十一時까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