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島山과 凰山과의 一問一答[千眼居士](『四海公論』 1936.2) |
(舊臘 어느 날 城北洞 凰山 先生宅에서 島山 安昌浩(안창호) 先生과 凰山 李鍾麟(이종린) 先生을 中心으로 하고 몇몇 有志가 한자리에 모여서 저녁을 함께 같이 하며 이야기를 듣게 된 機會가 있어서 記者도 그 末席에 參與하였다. 極히 조초로운 會合이었으나 그야말로 歷史的인 會合이어서 오고가는 말이 마디마디가 意味深長하였을 뿐 아니라 참으로 歷史的인 對話에 틀림없었다. 이 一文은 그때 島山과 凰山과의 사이에 오고간 對話를 記錄한 것이다. 이제 이 記錄을 誌上에 發表함에 際하여 機會를 만들어 주시기에 여러 가지로 애써 주신 洗松園 主 李信●(이신●)老에게 感謝해 마지 않는다.) 때는 丙子年 一月 十二日 午後 三時 半이다. 記者는 어른들 會合에 時刻을 늦으면 失禮될까 念慮하여 約束한 時間을 어기지 않으려고 時計를 보며 빠른 걸음으로 東小門 外 凰山 先生宅을 向하였다. 大門을 들어가서 凰山 先生을 불렀다. 몸소 房掃除를 마치시고 洗手를 하시다가 手巾을 손에 든채 나오신 凰山 先生을 接하나 어디까지나 「淸廉한 선비다」先生의 이끄는 대로 二間 半이나 되는 방에 들어 가니 아직 來約한 사람은 한사람도 오지 아니하였다. 방에 들어가 앉은지 얼마 後에 島山 先生이 들어 오셨다. 記者는 昨年 가을 先生이 出獄하신 直後 春園 先生의 紹介로 中央호텔의 一室에서 한 번 會見한 일이 있었거니와 海外風霜 三十餘 年 太平洋을 새에 두고 오로지 私를 버리고 公을 爲하여 馳驅한 風雲兒로서는 너무나 意外의 平凡한 一個의 老翁이었음에 놀란 일이 있었는데 오늘 두 번째 본 先生의 印象도 亦是 그에 틀림이 없었다. 凰山, 이거 참 오래간만이오. 先生도 記憶하고 계실는지 모릅니다만 지금으로부터 한 三十年 前입니다. 大韓協會 總會가 永導寺 뒷山 위에서 열렸을 때 거기서 先生의 演說을 들은 일이 있었는데……. 島山, 그렇지요. 그런 記憶이 조금 나는 것 같습니다. 凰山, 그때의 先生은 體軀도 퍽 壯大하시고 元氣가 팔팔하셨는데 지금은 꽤 달라지셨구료. 島山, 다 歲月의 탓이지요. 兩山(凰山과 島山을 이름)의 對話는 이로써 序曲을 시작하였다. 凰山 그동안 海外風霜에 얼마나 苦生하셨습니까. 島山, 苦生이야 무슨 苦生입니까. 海內에 계신 여러분에 比하면 別로 拘束을 모르고 지낸 것만 하여도 더 幸福이었지요. 또 그동안 米國에 오래 있었으니까 거기서 最下級의 生活을 하였다 치더라도 우리 나라의 中流 以上 生活을 한 셈이 되니 苦生이랄 건 도무지 없었지요. 凰山, 요새 新聞을 보면 米國서도 不景氣 또는 루스벨트 大統領의 뉴-딜 政策의 失敗로 失業者가 續出하고 國民의 生活苦가 深刻하여 간다던대요. 島山, 그렇더라도 米國이란 나라는 다른 나라에 比하면 貧民 階級이 적지요. 勿論 全國民을 놓고 따져본다면 貧民 階級이 數로는 많지요. 그러나 米國 國民이란 가령 한때 어려운 일을 當하더라도 그것을 能히 克服해 나가는 國民들이기 때문에 一時 不景氣의 苦杯를 맛보고 있다 하더라도 머지 않아 다시 回復될 것입니다. 그 点으로 미루어 나는 그들에게 對해서는 樂觀합니다. 凰山, 米國서는 舊敎(가톨릭敎)의 勢力이 어떠한가요.(凰山 先生은 天道敎 舊派의 頭領의 한 사람이시다 = 記者) 島山, 매우 大端하지요. 經濟力으로 보더라도 아마 新敎보다는 有力하지오. 그뿐 아니라 米國 內의 新聞들이 가톨릭에 對해서는 攻擊의 붓을 못들지요. 왜 그런가 하니깐( 先生은 이 「깐」字에 악센트를 두신다.) 萬一 어느 新聞이 가톨릭에 對한 무슨 不利한 記事를 쓴다면 가톨릭 本部에서 全國의 信徒들에게 그 新聞에 對한 「보이콧트」의 指令을 내립니다. 그렇게 되면 그 新聞은 亡하고 마니깐요. 凰山, 그것 참 勢力이 무섭구료. 그런데 그 指令이 그렇게 實行이 잘 될까요. 島山, 實行이 되구 말구요. 가톨릭의 힘은 거기 있는 것입디다. 團體의 힘이 났으니 말입니다만 米國에서는 宗敎 以外의 團體로도 그 勢力이 꽤 宏壯한게 많아요. 三K團 또는 KKK團이란 것은 여러분(室內에 모인 사람을 두루 보며) 이미 잘 아시겠지요만 그 外에 「슈라이너-」라든가 「앨크」라든가 모두 무서운 勢力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러한 團體들은 勿論 政治的 團體 即 政黨이 아니지요. 그렇지만 그 團體의 힘은 政治上에도 많은 影響을 주고 있습디다. 凰山, 米國의 이야기는 잘 들었습니다. 한데 先生은 中國에도 오래 계셨으니까 中國 事情도 잘 아시겠지요. 어쨌든 中國은 이대로 우물쭈물하다가 亡하고 말까요. 그렇지 않으면 무슨…….(話題는 太平洋을 건너 차츰차츰 輪廓이 좁아 들기 시작한다.) 島山, 그렇습니다. 現在 中國에는 封建的 勢力이 많이 남아 있어서 各其 勢力 다툼을 하였기 때문에 그로 因하여 農民이 苦痛을 받고 商人이 苦痛을 받고 온갖 國民이 모두 苦痛을 받아 왔습니다. 그뿐인가요. 國家의 存在조차 危機에 닥치게 되었지요. 이렇게 본다면 勿論 中國에 對하여는 悲觀 밖에 안 생기지요. 그러나 中國 國民은 背後에 何等의 背景이 없어도 世界 어느 나라를 가든지 相當히 勢力들을 잡습니다. 이 點은 猶太人과 매우 恰似하지요. 말하자면 經濟的 勢力을 無視할 수 없단 말이지요. 또 中國 사람으로 歐米 各國에 留學하여 新文化를 吸收하고 돌아오는 靑年들이 每年 數百名, 數千名式됩니다. 말하자면 現在의 中國은 文化的으로도 每年每年 꾸준한 成長의 길을 걷고 있단 말이지요. 이 두 點으로 보아서 나는 決코 中國에 對해서 悲觀을 안 합니다. 그뿐 아니라 中國 사람에게는 排外熱은 많았지만 對內的으로 國家나 社會나 民族에 對한 愛着 即 愛國心이 없었지요. 이것은 매우 矛盾이지요. 愛國心이 없이 어떻게 排外熱이 납니까. 愛國心이 먼저 있은 다음에 排外熱이 생기는 게 아녀요? 그런데 中國 國民은 愛國心은 없으나 排外熱은 盛하거든요. 確實히 矛盾이에요. 그러다가 요즘 와서는 이 排外熱이 愛國心을 돋우고 愛族心을 북돋우거든요. 말하자면 中國 國民에게 뿌리박힌 個人主義思想이 中國이란 國家의 對外的 危機로 因하여 打破되어 간단 말씀입니다. 中國 國民이 이 個人主義思想 打破에 對하여는 日本의 德을 많이 보고 있단 말이지요.(一同 哄笑) 凰山, 그런데 요새 中園서는 蔣介石(장개석)에게 對한 怨聲이 높아가는 中 더욱이 學生層에서는 蔣介石(장개석)더러 한번도 싸워보지 아니하고 領土를 남에게 자꾸 빼았긴다고 打倒 蔣介石(장개석) 소리를 외치고 있으니 대관절 蔣介石(장개석)이는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요. 島山, 그렇습니다. 蔣介石(장개석)에게 對한 怨聲이 높아가는 건 事實이지요. 그러나 蔣介石(장개석)인들 憤한 마음이 없겠습니까. 公的으로 보더라도 自己治下에 있는 領土를 빼앗기게 되니 憤한 일이요, 私的으로 보더라도 그같이 自己가 爀爀한 革命完成의 功績을 이루어 가는데 그것을 挫折케 하니 이 또한 憤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리보고 저리보아도 中國 國民 中에 蔣介石(장개석)보다 더 憤한 사람은 없을 것입니다. 蔣介石(장개석)의 속인들 오죽이나 썪겠습니까마는 蔣介石(장개석)은 지금 干戈를 들고 싸운댔자 利益이 없는 것을 잘 알거든요. 그럴 것 아닙니까? 몇 날 며칠이고 늘 싸움만 하는 사람이 그 속을 모를 理 없지요. 萬一 지금 싸운다면 浙江省, 福建省 等 海岸에 面한 領土를 第一 먼저 빼앗길 것을 알고 있지요. 이런 地方을 빼앗기고 저 狹西省같은 奧地로 몰려 가서 언제 어떻게 싸워 볼 準備를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니까. 지금 어떻게든지 現狀을 維持해 가면서 後日을 爲하여 準備하고 있는 게지요. 이 때에 저녁상이 들어 오며 島山 先生의 이야기는 暫時 中斷되지 않을 수 없었다. 海外에 있을 때에 토장찌개가 먹고 싶고 찰떡이 먹고 싶더라는 등 鄕土色에 對한 愛着의 披攊이 있은 다음 飯酒 몇 잔 씩 돌린 뒤 夕飯을 마치고 「兩山」의 對話는 다시 繼續하여 긴 序論을 마치고 겨우 本論에 들어 가게 되었다. 凰山, 島山 先生, 지금까지 海外의 情勢에 對하여 좋은 말씀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先生은 이 앞으로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이 땅에서 언제까지든지 우리들과 같이 웃고 같이 울고 같이 고생하시겠는지 그렇지 않으면 다시 海外로 나가시겠는지? 凰山의 質問은 그리고 우리가 누구나 島山 先生에게 發하고 싶은 質問의 화살은 은근히 던져 졌다. 凰山과 아울러 一同은 果然 어떠한 對答이 나올런지 聽神經을 一層 銳敏히 하여 가지고 귀를 기울였다. 島山, 네! 그러나 나는 거기 對하여 아직 어떻겠다고 定하지를 못하였습니다. 조선 사람이 내가 여기 있기를 원하고 또 내가 여기 있어서 조금이라도 朝鮮 사람에게 對하여 利益이 된다면 여기 있으려니와 또 그렇지 못하다면 여기 있을 必要도 없겠지요. 헌데 日前에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어떤 女人들 四, 五 人이 찾아와서 나보고 山間에 들어 가서 감자나 캐라고요.(一同 大笑) 凰山, (웃으면서) 그건 너무 甚한 말입니다 그려! 島山, 그만이면 좋게요. 날보고 감자나 캐다가 죽으라고 하지 않겠습니까.(一同 大笑) 헌데 이야기가 脫線한 것 같습니다. 지금 凰山 先生이 나의 앞길에 對한 態度 如何를 물으셨지만 이렇게 하여 주셨으면 어떻겠습니까. 먼저 이 땅의 情勢가 이러이러 하니 너는 이렇게 하였으면 좋겠다고요. 나는 지금까지 이러한 態度로 여러 사람들을 만나 왔습니다. 그렇게 여러분의 意見을 들어서 면저 이 나라의 現實을 알고 난 뒤에 나의 態度를 定하려구요. 그래서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을 만나 意見을 들어 보았는데 어떤 사람은 너는 學校 校長이 되라고하고 또 어떤 사람은 新聞社 社長이 되라하고 또 어떤 사람은 和信商會 社長이 되라 하고 또 어떤 사람 아니 아까 말씀한 女人네들은 山에 가서 감자나 캐먹다 죽으라고 합디다.(一同 大笑) 凰山, 그건 다 제 各己 利益을 생각하고 하는 말이겠지요. 그러나 내가 알고자 하는 것은 朝鮮 社會의 所謂 指導者層에 있는 사람 一般으로서 우리가 지금 取해야 할 方針은 어떠해야겠다는 것입니다. (이때 島山은 한참 동안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그는 꽤 重大한 質問이구나 하는 것 같았다. 島山, 그렇습니다. 지금 우리가 할 일은 많을 줄 압니다. 物産奬勵도 해야 되고 文字運動도 해야 되고 ●發明도 힘써야 하고 할 일이 많지요. 그러나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根幹이 되는 바는 人格革命이라고 생각합니다. 民族變化란 말씀이에요. 이렇게 말하면 이거 또 春園式의 民族改造論이구나 하고 비웃을는지 모릅니다만 何如튼 우리가 지금 제일 必要한 것은 人格革命인 줄 압니다. (여기서부터 島山은 漸漸 熱辯으로 들어 간다.) 우리는 지금 무슨 일을 하려고 할 적에 서로 말 믿고 일하는게 아니라 무엇보다도 「시기」와 「질투와 당파 가림」을 먼저 하게 된다. 이것이 亡種之民의 人格이란 말씀이에요. 過去에 우리가 이렇게 亡하게 될 때의 心理를 人格을 지금도 여전히 가지고 있단 말씀이에요. 이러한 人格을 가진 人間들이 무엇을 해요. 오! 이렇게 말하면 이러한 人格을 이렇도록 培養하는 惡한 制度를 打破해야지 지금쯤에 앉아서 케케묵은 人格修養이란 무슨 수작이냐 할 것입니다. 나는 이 말에 賛成합니다. 나쁜 制度를 打破하지 않으면 그러한 훌륭한 人格을 내기가 不可能한 줄 압니다. 그러나 나쁜 制度를 打破하는 것은 누가 하는 것입니까? (여기서 島山 先生의 熱辯은 高度에 達하였다.) 人格이 하는 일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러니 亡種之民의 人格으로 무슨 社會革命입니까? 하니까 根幹은 人格革命에 돌아가고 맙니다. 어느 何 歲月에 人格革命을 하여 가지고 社會革命을 하느냐고 또 反擊할는지 모릅니다만 우리 社會에 人格革命한 이가 한 해에 열 사람이면 열 사람 스무 사람이면 스무 사람이 같이 늘어갈수록 우리 社會는 漸漸 좋아갈 것이 分明합니다. 人格입니다. 가새나무에는 가새만 열리고 葡萄나무에는 葡萄만 열리는 것입니다. 人格革命을 못한 이는 제 아무리 나쁜 社會制度를 打破하여도 다시 나쁜 制度밖에 나오지 않습니다. 이거 보시오. 같은 데모크라시-가 똑같은 理論을 가진 데모크라시-가 墨西哥(멕시코)에 떨어진 것과 亞米利加(아메리카)에 떨어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같은 社會主義가 露西亞(러시아)에 떨어진 것과 中國에 떨어진 것과 다르지 않습니까. 본바탕이 그르면 아무리 좋은 씨라도 글렀단 말씀이에요. 島山 先生은 여기까지 말하고 時計를 보더니 「이거 너무 오래 혼자만 지꺼려서 未安하게 되었습니다.」하고 일어나서 가려고 할 즈음에 밖에서 車가 왔다는 通知다. 凰山, 좋은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結局 先生이 감자 캐다 죽지 않겠다는 것만은 잘 알았습니다. (了)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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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옹의 애녀 수산에게[동히슈부](『新韓民報』 1936.3.19) |
一. 산옹이 집에 있어 깊은 정 맺었던 것 품 속에 수산이오 뜰아래 부용이라.二. 강남서 돌아올제 삭옹은 흰머리오 수산이 다방머리 부용도 필요없다.三. 대전에 열린 철창 산옹이 어떠한고? 부용은 없다지만수산이 부용같이四. 어쩌면 이 강산에 이 부용 옮겨다가 군자화 꽃이 피고 열매를 맺히도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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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도산 선생[피향실주인](『新韓民報』 1936.3.26) |
(一) 나라를 사랑하여 꽃다운 한평생 칠 같은 검은 머리 은 실로 바꿨네. 망명의 거친 살림 돌보고 내보와 아늑한 한양성이 눈물에 어린다.(二) 흰옷을 입은 무리 가는 곳 어디냐? 만리 밖 만주 뜰이 가나안 아님을! 영웅의 타는 가슴 찌는 듯 아프오. 바가지 장단 속에 나라와 자식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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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浩氏에게 엇든 舞臺를 맛기고 십흔가(『三千里』 1936.4) |
島山은 昨年 十一月 十八日의 假出獄期限도 完全히 마치고 이제는 自由스러운 몸이 되었다. 그 동안 平安道 大到山 下의 절간에서 身病의 療養과 「現實朝鮮學」을 硏究하고 있더니 瓢然히 新春 初頭에 서울에 올라와 各界人士와 會見이 頻繁하였고 따라서 여러 가지로 氏의 身邊을 싸고 도는 風說이 많아서 最近 朝鮮社會의 話題의 三分의 一쯤은 安島山에 對한 이야기거리가 된 感이 不無하다. 어쨌든 今后의 吾人의 注目은 氏는 장차 무얼하려는고 함이요, 무얼하였으면 좋겠소 하는 問題다. 이 수수께끼를 풀고자 本社는 서울안 各新聞社의 一流記者와 敎育界 宗敎界 思想界 等 各方面 人士 數十氏에 向하여 標揭의 回答을 求하여 보았다. (但 問題의 性質上 匿名도 無妨하다 하였더니 果然 匿名回示도 있었기로 그는 그대로 내었노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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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浩論[印貞植](『朝鮮中央日報』 1936.5.28-6.9) |
平南 江西 땅 秀麗한 舞鶴山을 등지고 溶溶히 흐르는 大同江을 앞으로 바라면서 나즈막한 언덕 위에 자리잡은 一寒村 『도마메』에서 한 貧農의 아들로 태어난 한 個의 人間으로서의 島山 安昌浩(안창호)가 나의 論하려는 바 對象이 아니다. 오직 三十 餘 年의 長久한 歲月을 通하여 朝鮮의 土着資本家 階級의 歷史的 利害를 終始一貫 숨김이 없이 스스로의 一言一動의 中에로 表現하고 代辯하면서 그와 온갖 歷史的인 變遷과 流動을 같이하여 오는 한 個의 物質的 勢力으로써의 島山、또 現在의 歷史的 階段에 있어서는 頹廢되고 無氣力한 이 땅 小市民들의 幽靈 俱樂部인 저 興士團 또는 修養 同友會의 巨頭로써의 安昌浩(안창호)가 이제부터 내가 敢히 讀者諸賢의 앞에 그 階級的 本體를 明白히 呈示하는 同時에 그의 앞에 남긴 不可避의 歷史的 路線을 科學的으로 規定하여 보이고자 하는 大物的 對象인 것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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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산의 꽃동산・도산의 꽃동산을 떠나며[동해수부](『흥사단보』 1936.1-7) |
一천구백二십五년에 도산 선생이 상해로부터 나성(로스앤젤레스) 자택에 돌아와 一년간 한양하는 동안 그 원정에 꽃 심고 물대기를 부지런히 하여 당시 도산의 꽃동산은 四시에 춘광이 늙지 아니하고 연당에 연잎이 덮혀 있는 속에 금붕어가 무리를 지었었나니 이것이 벌써 십 년 전 일이다. 그 후 도산 선생은 상해로 가고 작자는 상항(샌프란시스코)에 돌아와 오랫동안 도산의 꽃동산을 보지 못하였다가 작년 십一월에 다시 도산의 꽃동산을 찾아와 본 즉 연당에 물이 마르고 꽃동산이 변해서 풀밭이 되었으매 홀연히 옛일을 생각하고 무궁한 느낌을 금치 못하여 이 시를 쓰거니와 그 의미는 다만 꽃동산에 있는 것은 아니다.一. 밤 속에 있는 동산 달빛이 울연한데 이슬이 꿈을 꾸고 새들도 잠들었다.二. 외로이 가는 사람 호올로 돌아를 와 말없이 방황하며 끝없이 느끼는 것.三. 물 마른 연당 속에 군자화 소식 없고 덕 거친 꽃동산이 변해서 풀밭이라. 四. 가을이 깊을 때에 국화를 못 본다면 청춘이 돌아올 제 장미도 못 볼테지.五. 이 동산 꽃 없는 것 주인이 갔음이라 청춘을 원망하며 가을을 슬퍼하라.六. 여기서 깨닫는 것 무궁한 봄 가을에 동산도 주인이요 강산도 주인이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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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浩論의 再批判[元世勳](『三千里』 1936.8) |
中央日報 學藝欄에 『安昌浩(안창호)論』이라는 題下에서 印貞植氏의 論文이 十日이나 連載되고 印氏의 論을 反駁하는 朱耀翰(주요한) 氏의 論文도 三日이나 連載되어 安氏와 一面의 交라도 有한 人士들의 略干의 注意를 끌게 되었다. [寫眞은 右가 朱耀翰(주요한) 氏, 左가 印貞植(인정식) 氏] 나도 安氏와 交分이 有하다면 有하고 親한 사람이라면 親한 사람 가운데의 한 사람인 것 만치 다른 사람에게 對한 人物論 보다는 比較的 자세히 읽어 보았다. 그런데 印氏의 安氏論은 대체에서 너무 지나치게 長篇인 同時에 實際 그 內容에 包含된 骨子가 적었다는 感이 有하며, 그 다음 印氏의 安氏觀은 出發点으로부터 終末까지 몹시 非凡한 人物로 取扱한데서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氏의 諷剌 嘲笑法에 同意하기 難한 反面으로는 安氏에 對한 印氏의 期待가 컸다가 安氏가 그 期待에 相符되지 못한데서 落望한 듯한 느낌을 주게 하였다. 그리고 印氏는 安氏를 日本 內地의 福澤諭吉(복택유길), 中國의 汪兆銘(왕조명) 等의 業蹟과 役割에다가 對照하면서 論하였지만 이것은 安氏의 素養과 憺力을 자세히 알지 못한데서 나온 論인가한다. 福澤氏와 汪氏는 本來 깊은 學問의 素養이 有하며 더욱이 汪氏는 한때에 刺客까지 되었던 사람이지만 安氏에게는 時代와 環境으로 그것이 좀 不足하였고 또 福澤氏나 汪氏가 舞臺로 한 場所와 時間과 對象이 安氏와는 거의 全的으로 相反되었으니 그 業蹟과 役割인들 어찌 同一할 수 있으랴! 그러나 저러나 日露戰爭을 前後하여 氏가 『나는 간다』의 去國行을 짓고서 朝鮮을 떠날 때까지의 몇 해 동안이 安氏 一生에서 金字塔的 全盛時代일 것이다. 이 時代에서 民衆에게 紹介된 安氏를 가지고서 印氏가 人物論도 쓰고 朱氏가 反駁도 하게 된 것이다. 印氏는 外地時代의 安氏를 論하되 『朝鮮이 잠자고 있을 時에 있어서 敎育의 烽火를 든 것은 確實히 進步的 事業이었다 하더라도 民衆이 이미 눈을 깨어 다른 무엇을 要求할 만큼 成長되었으매 不拘하고 依然히 더욱이 中國까지 가서 敎育萬能主義 空虛한 文化打鈴을 反覆한다는 것은 確實히 一種의 念佛에 不過한 것이었다.』云云한데 對하여 그 理論의 是非는 말할 것이 없고 事實이 相左되는 点을 말하지 않을 수 없으니 곧 安氏는 朝鮮을 떠나서 中國과 露領(러시아령) 沿海州를 暫時暫時 거쳐서 美國에 건너가서 己未 以前까지의 長久한 歲月을 보냈으니 中國에서 敎育萬能主義나 또는 文化運動을 反覆하였다는 것은 事實과 相反되는 것이며 己未 以後에 上海에서 지낸 바를 擧論하더라도 敎育萬能主義를 反覆할 餘地와 舞臺가 無하였으며 다만 個人間 座談에서 文化運動을 말한 때가 有하였을 것 뿐일 것이다. 그렇다면 印氏의 論이 時代와 民衆이 要求하는 그 무엇을 爲하여서 붙잡은 것이라 할지라도 事實의 論據를 바로 잡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印氏는 다시 安氏論을 展開시키다가 論하되 風聞에 依하면 그(安氏)는 흔히 西北 사투리를 말하는 靑年들의 귓가에 입을 대고 『西北人의 最大의 敵은 南朝鮮 사람들이다.』 云云의 風說을 前提로 하여 論하다가 『그러면 그(安氏)는 한 개의 唾棄할 地方熱의 煽動家이며 咀呪될 反動的 標本이라는 世人의 嘲弄을 免할 수 없을 만큼 重大한 過失을 저지른 것이 아니면 안되라』고 하여 그러한 風聞을 들을 만한 過失이 安氏에게 있다는 것을 말하였으며, 다시 印氏는 自己의 論文 第八回에서 말하되 『一方으로 島山 一派의 所謂 關西派는 南朝鮮의 兩班輩에 對한 關西 民衆의 當然한 階級的 憎惡와 歷史 깊은 反感을 끝가지 兩班輩 掃蕩의 民主主義的 路線에로 發展시키려는 度量과 理性을 가지지 못하고 도리어 이것을 南朝鮮對 關西의 地方 싸움으로 轉化시켜 愚眛한 者들의 愚眛한 地方熱을 利用하여 自己의 政治的 地盤을 樹立하기에만 汲汲하였으며 他方으로 李承晩(이승만) 一派의 所謂 幾湖派는 이보다도 더 더럽게 南朝鮮 兩班輩의 關西人에 對한 어리석은 驕慢과 偏狹한 自尊心을 利用하여 이것 亦是畿湖 一帶를 基礎로 한 政治的 地盤을 形成하기에 汲汲하여 온 것이 아니였던가 하고』 云云하였다. 이러한 印氏의 安氏 攻擊에 對하여 朱氏는 反駁하되『印氏는 가장 輕率하게 地方熱이라는 文字를 使用하고 있는 바 이것이 印氏의 가장 큰 認識 錯誤인 同時에 내가 그 論文을 定罪하는 唯一의 點이라』고 前提한 뒤에 『이 地方熱이라는 文字는 四十 年 來의 朝鮮社會의 正體 모를 怪物인 同時에 島山의 一生을 괴롭게 하는 도깨비라고 나는 말한다』고 하여 놓고 安氏가 地方熱의 煽動者가 아닌 것을 極口 辯明하는 同時에 安氏는 차라리 『地方熱 鼓吹者와는 正反對의 人物이라』고 確斷하며 安氏를 만일 地方熱 가진 사람이라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것은 惡宣傳이며 中傷이라고 하여 安氏가 그러한 말을 듣게 된 것은 反對派의 誣陷 中傷에서 나온 謠言이라고 하며 地方熱이라는 것이 根本的으로 도깨비와 같이 虛傳뿐이요 實在가 아니라는 것을 主張하였다. 그리고 朱氏는 印氏가 風聞을 가지고서 論材삼은 잘못을 責하였다. 뿐만 아니다. 朱氏는 現在에서 남이 地方熱이라고 指稱할 만한 모든 것이 實際에서 地方熱 아니라 一種의 怪文書나 謠言에 不過하다고 論하고 『이 怪文書와 謠言의 橫行을 制止하기 爲하여 若干의 關心을 가질 必要가 있다.』 『첫째, 他人을 가리켜 地方熱者라 宣傳하는 그 者를 警戒할 것이니 그런 者가 內心으로 어떠한 陰謀를 가지고 있는 法이다. 둘째, 他道人이 性格, 習性, 氣質 等을 理解하도록 努力할 것이다. 세째, 둘째와 反對 어떠한 事業이나 機關에서 같은 故鄕 사람끼리 서로 信任하는 것은 當然한 일로(即 氣分이맞고 根本을 잘 알고 있는 까닭으로 認定하여) 是非하지 말 것이다. 네째, 事業機關인 學校, 新聞社, 會社 等에 있어서는 가장 信任하는 사람끼리 일하는 것이 原則이오 理想的인 十三道 網羅主義는 議會가 아닌 以上 不可能한 것이요 또 可能하다 하더라도 非能率的인 것을 是認할 것.』 等等의 六 個條의 注意를 喚起하였다. 以上에서 引用한 印, 朱 兩氏가 安氏는 地方熱者이다! 아니다! 한 兩氏의 所論에 對하여 一般讀者도 저마다 相當한 見解가 있으려니와 나는 兩氏의 所論에 對하여 首肯하기 難한 点이 有하다. 印氏가 引用한 畿湖人은 西北人의 敵이다라는 安氏의 말이라는 것은 完全한 風說이며 僞造일 것이다. 그러한 風說과 僞造를 가지고 立論의 主材를 삼는다면 그 論을 누구나 首肯하기 難한 것이다. 무엇을 가리켜서 그 말이 風說이며 僞造라고 하는가 하면 나도 地方熱的 派爭이 甚하였다는 外地에서 數十年의 歲月을 보낸 것만큼 地方派爭의 眞相을 짐작하는 바 如何히 地方熱的 病的 心理作用을 가진 者라도 自己의 體面과 政策 上에서 某道人은 我道人의 敵이다 하고 自己 地方의 靑年이나 其他 누구에게 말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다만 『우리들은 地方的으로 團結되지 못하는데 某道 사람들은 地方黨을 지어 가지고 우리를 反對하니 참으로 걱정이라』 는 말을 하여 他道人의 地方黨을 말하여 은근히 自己들도 地方的으로 黨派를 形成하자고 鼓吹하던 것은 事實이라고 할 수도 있는 것이어니와 安氏가 直接으로 『畿湖人은 西北人의 敵이라』는 말을 自己 입으로 하여 地方熱을 煽動하였다는 것은 風說이며 僞造일 것이다. 그 다음에 朱氏의 地方熱이란 도깨비 같은 虛傳이요. 實在가 아니라는 說도 首肯하기 難하다. 西道 사람의 多大數는 安昌浩(안창호) 氏를 首領으로 하며 그 主張을 따라가고 畿湖 사람의 多大數는 李承晩(이승만) 氏를 首領으로 하고 그 主張을 따라가며 北道 사람의 多大數는 李東輝(이동휘) 氏를 首領으로 하고 그 主張을 따라갔다면 그것을 가리켜서 地方黨이라고 命名하는 外에 다른 第二의 名詞가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나는 차라리 關西사람이나 關北사람이나 畿湖사람이 過去에서 總히 地方黨을 지었던 사람들이라고 말하고 今日 以後에는 오직 저마다 自己의 主義主張을 따라서 結合하고 地方的으로는 野合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다. 내가 보고 들은 바에 依하여도 安氏는 地方黨을 打破한다고 어느 때 어느 곳에서든지 말하고 부르짖었지만 地方熱 鼓吹者라는 評은 安氏 또한 남만큼 들었으며 自己는 派爭하지 않고 남의 싸움 말리기에 奔走한다고 安氏가 말하지만 모든 싸움에 安氏 自身이 參加되어진데가 多少 있게 되었으니 그 辯明은 도리어 안타까운 無用의 辯明에 자나지 못하였다. 말로만 있는 것을 없다고 하여서 없어지는 것이 아니며 남에게 없는 것을 있다고 하여서 있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직 實狀 그대로 나타나는 것뿐인가 한다. 묵은 冊張을 뒤적거리지 말고 새 冊張을 펴자는 말인데 過去에서 있었던 것을 없었다고 强辯할 必要도 없거니와 그 보다도 過去의 錯誤를 發見하는 대로 匡正하는 것이 가장 賢明한 前途인가 한다. 그리고 印, 朱 兩氏의 所論에서 다시 疑訝되는 点을 指摘할 바가 有하니 무엇인가 하면 印氏는 論하되 島山一派의 所謂 西道派는 云云하고 그것이 차라리 南朝鮮의 兩班輩들에 對한 關西 民衆의 當然한 階級的 憎惡와 反感을 끝까지 兩班輩 掃蕩의 民主主義的 路線에로 發展시키지 못하고 地方 싸움에 轉化시킨 것이 잘못이라고 恨嘆하였는데 이것을 얼른 보면 그럴 듯하나 그렇치 아니한 点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南鮮地方이라고 全體가 兩班만 사는 것이 아니요, 方方谷谷과 時時種種에서 直接으로 兩班의 壓迫 下에서 呻吟하던 常民의 數가 西鮮地方에서 守令方伯에게 壓制받던 民衆의 數만 못지 아니하였으며 西鮮地方에도 兩班은 아니지만 土班쯤은 到處에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차라리 全鮮을 通하여 班常의 階級的 兩黨 分立을 謀하지 아니하였다고 責할지언정 地域으로 南鮮은 總히 两班, 西鮮은 總히 常民으로 하여 戰線을 形成하지 못하였다고 責한 것은 地方熱을 攻擊하던 印氏 自身이 地方熱化한 外觀을 呈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印氏는 그 아래에서 續論하되 『李承晩(이승만) 一派의 所謂 畿湖派는 이보다도 더 더럽게』 云云하여 同一한 地方派에 對하여 李承晩(이승만)의 畿湖派는 安昌浩(안창호)의 西道派 보다도 더 더럽게라고 區別한 것은 色眼鏡을 안 쓴 사람에게도 誤解받기가 쉽게 되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말한다면 安氏에게는 島山 一派라 하여 그의 雅號를 쓰고 李氏에게는 그의 雅號를 쓰지 아니한 區別은 어디 있는가? 이것은 印氏의 不注意일지언정 故意的 區別은 아닐 것이다. 그 다음으로 朱氏의 論에서 한 가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떠한 事業이나 機關에서 같은 故鄕사람끼리 信任하는 것을 當然한 일로 認定하고 是非하지 말라』 하고 다시 말하되 『事業機關인 學校 新聞社 會社 等에서 가장 信任하는 사람끼리 모여서 일하는 것이 原則이요, 理想的인 十三道 網羅主義는 議會가 아닌 以上 不可能한 것이요. 또 可能하다 하더라도 非能率的인 것을 是認할 것』이라고 云云하여 이것으로써 虛傳的인 地方熱이라는 怪文書의 橫行을 抵禦하기 爲하여 關心을 가질 必要가 있다고 한 것에 對하여 首肯하기 難한 点이 있다. 무엇인가 하면 무슨 事業이나 機關에서 互相 信任할 수 있다는 標準은 設或 習俗과 趣味가 맞지 않더라도 오직 그 事業이나 機關의 自體를 有益하고 有助하면 그만이요. 같은 故鄕 사람이라고 반드시 서로 信任되며 他鄕사람이라고 不信任될 것은 아닐 것이다. 더욱이 敎育界(學校), 言論界(新聞社), 實業界(會社) 等 事業機關에서는 가장 信任하는 故鄕 사람끼리 모여서 일하는 것이 原則이요, 各道 사람이 모여서 일하기는 不可能하다. 設或 可能하다 하더라도 非能率的인 것을 是認하라는 朱氏의 主張에는 異議하지 아니할 수가 없다. 여기에 對하여는 길게 말할 것이 없이 朱氏가 現在 奉仕하고 있는 和信百貨店이라는 實業機關에는 반드시 平安道 사람끼리만 모여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能率을 내기 爲하여 東京과 大阪(오사카) 사람도 있을 것이며 서울 處女도 있을 것이며 다른 시골 靑年도 없지 아니할 듯하다. 謀利하는 百貨店도 그러하거든 敎育界나 言論界 等 事業에서 반드시 同鄕사람끼리 일을 하여야 能率的이요, 他道사람과 섞이면 非能率的이라는 論據를 찾기가 困難하다. 朱氏의 말대로 한다면 現在 서울에 있는 各 學校나 各 新聞社에는 반드시 그 어느 一道의 同鄕사람끼리만 모여서 일을 하여야 現在보다 能率的이 될 것이다. 나는 생각하건대 一個人인 나의 집안 살림살이가 아니요. 적어도 敎育界나 言論界나 實業界의 事業인 以上에는 그 事業에 適當한 人材를 標準하고 鄕黨을 超越하여 選任하는 것이 가장 能率的일까 한다. 뿐만 아니라 朱氏의 말대로 한다면 모든 事業과 機關에는 一地方사람 끼리만 모이게 되고 그 結果는 朱氏가 아무리 地方派는 아니라고 辯明하더라도 各各 地方的 派黨만을 形成하고 말게 될 憂慮까지 確有하다고 할 터이다. 이제 다시 돌이켜 印氏의 『安昌浩(안창호)論』을 읽어본다면 그는 過去의 安氏보다 現在의 安氏에 對하여 不少한 落望을 가졌다. 和信百貨店에서 그 店員에게 行한 安氏의 演說을 가지고 이리저리 論難하며 解剖하다가 말하되 『朝鮮人의 商工業을 建設하기 爲하여 모든 勤勞하는 무리들은 몸과 마음을 自進 犧牲하여야 한다는 것이 비록 自己(安氏)의 救世的 主張이라 하더라도 그러한 主張은 百萬長者인 商店主와의 個人的 談話나 或은 그들의 會合에서나 하는 것이 그 말의 適當한 場所라는 것은 決코 賢明한 우리 安島山이 모를 理가 萬無할 것이다. 돈 한 푼 없어서 靑春의 勞動을 팔고 있는 이 店員들 앞에서 商工業奬勵와 店主의 功德 讚頌하고 돌아다니기에야 安島山이 아니라 하더라도 世上에 사람이 흔한 것쯤은 또한 島山이 모를 理가 없을 것이다.』 『그러면 왜 島山은 할 말도 많을 것인데 何必 그 많은 말 가운데서 가장 아름답지 못한 말만 추리어 내어 가지고 말씀하시었을까? 하는 慨嘆도 하고 『그의 演說을 들은 店員들이 島山을 『실없는 親舊라고 怒罵하는 것을 들은 까닭에 哄笑도 한다고 하였다. 이리하여 印氏의 安氏論 中에서 論難한 安氏의 和信商店 演說의 一端은 우리에게 새로 傳하여 준 뉴스이며 그 嘆惜과 哄笑를 無理라고 할 수 가 없을 것이다. 朱氏는 自身이 該商會의 幹部 中 一人이며 安氏로 하여금 그 演說을 하도록 한 裏面의 理由도 자세히 알 것이며 安氏를 辯護하자면 이 点을 明白히 辯明할 必要와 義務까지 있을 것인데 朱氏는 이 点에 對하여 一言半辭도 하지 않고 問東答西 格으로 朱氏는 過去에서 安氏가 『手腕家』 『陰謀家』 『野心家』라는 말들이 安氏를 誤解하게 하며 謀陷한 것이라고 하며 安氏의 性格 上에서 陰謀와 術策과는 距離가 멀고 信義와 率直을 主唱하고 實行하였다고 辯護하기에만 汲汲하였다. 朱氏는 自說의 옳은 것을 證明하기 爲하여 一例를 擧하되 『그(安氏가 ○○에 있을 때에 ○○○에서 韓某가 가지고 나온 돈 ○○萬 元을 갖다가 맡기는 데도 不拘하고 그것은 ○○政府에서 나온 돈이니 나는 맡을 수 없다 하여 아니 받은 것은 有名한 이야기다. 그래서 그 돈을 쓰자고 勸하던 元○○氏가 『어느 미친 놈이 島山을 野心家라 하였더냐』 부르짖고 島山에게서 물러선 것도 事實이요, 그다음에 그 一派가 할 수 없이 羅○○氏를 시켜서 京城에서 딴 돈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여 가지고 그 돈의 一部를 島山에게 주어서 使用하게 된 것도 事實이다.』 云云하여 安氏의 野心없고 率直한 것을 力說하였다. 이와 같이 朱氏가 말하여 놓은 묵은 冊張에 依支하여 安氏는 참으로 道學者와 같은 분이 될 수 있을까? 朱氏의 말하여 놓은 묵은 冊張이 果然 事實이었던가? 아니다. 事實과는 너무 먼 묵은 冊張이다. 韓某가 가지고 온 돈을 安氏에게 맡기는 것을 ○○政府에 나온 돈이니 나(安氏)는 맡을 수 없다 하여 받지 아니 하였다는 것은 完全한 誤認이다. 그때의 韓某가 그 돈을 누구에게나 맡기자고 한 일이 없었다. 韓某가 그 돈을 安氏에게 맡기자고 할 만한 親分이나 信交나 그 밖의 아무 것도 그들의 사이에 아직 없던 時間이다. 設或 事實이 아닌 事實을 事實이라고 假定하고 韓某가 安氏에게 그 돈을 맡겼다면 ○○○府에 그렇게 忠誠스러운 安氏가 그 돈을 어찌하여 맡어서 ○○政府에 돌리지 못하였다고 할 것인가? 이것도 安氏의 道學者的 率直이 良心과 信義에 不許하였던 까닭이다 할 것인가? 그리고 安氏가 韓某의 맡기는 돈을 쓰자고 勸하던 元○○氏가 安氏의 돈 맡지 아니하는 것을 보고서 『어느 미친 놈이 島山을 野心家라 하였더냐?』 하고 島山에게서 물러선 것도 事實이라고 朱氏는 말하였는데 이것도 그 當時에 그 말한 元某와 그 말들은 安氏와 그 밖의 몇 사람이 아직도 살아있는 以上에는 朱氏가 任意로 誤認하여 安氏는 道學者로 만들고 다른 사람은 野心家만 되게 할 수가 없는 것이다. 韓某가 가지고 온 그 돈을 自己들에게 주어서 쓰게 하라는 側이 大略 네 가지 方面이었다. 첫째, ○○○○府側과 둘째, ○○黨側과 세째, ○○團側과 넷째, ○○代表會議 籌備會側이다. 當時의 韓某는 그 돈을 어느 一派에게 줄 수가 없고 ○○代表會議로 統一機關이 成立되면 그 곳에 바치겠다고 버티고 있던 時間이다. 朱氏는 덮어놓고 元某가 安氏에게 그 돈을 쓰자고 勸하였다 하지만 元某가 安氏와 그 돈을 쓰자고 勸한 것은 그 돈을 가지고 元某나 安氏가 私用하자고 勸한 것이 아니고 ○○代表會議를 召集하자고 安氏와 元某와 그밖의 여러 方面의 意思가 合致된지 오래고 또 會議召集 費用이 없어서 못 부르는 時間에서 그 돈 가운데로 얼마를 가지고 會議부터 召集하자는 여러 사람의 意見에 安氏만은 그 돈 가운데서는 한 푼도 쓸 수가 없다고 한 것만은 事實인데, 어찌하여 安氏가 그 돈을 가지고 會議召集費로 못쓰겠다고 主張한 裏面을 이제 듣기 좋게 말하자면 ○○○府에 對한 安氏의 忠義라 할 것이요, 元某의 所見대로 말하자면 安氏가 그 돈을 쓰고는 함께 일할 수 없다는 것이 그 忠義보다도 그 돈을 가지고 會議를 召集한다는 非難을 堪當할 만한 勇氣와 또 解釋의 相異에서 왔다고 본데서 『누가 島山을 가리켜 地方黨을 짓는다고 하였는가? 地方黨도 못지을 분이다. 內地에 가서 學校校長이나 하시오!』 한 말을 있었다. 그렇게 말한 元某의 말을 가지고 安氏가 『地方黨을 짓는다』는 句節의 代에다 『野心家라 하였다』는 句節을 써서 넣고 安氏는 野心家가 아니요, 元某 等이 野心家라고 듣는 사람에 따라 誤解하게 했다. 말이 난 김에 나도 묵은 冊張의 몇 줄만 더 引用하자! 다만 島山과의 親誼上에서 未安한 마음은 不無하지만 朱氏가 먼저 끄집어낸 以上에는 不得已 말하게 되는 것이다. 지난 해 여름 어느 때에 나는 島山과 某飮食店에서 長時間을 이야기하게 되었는데 島山은 내게 『술 마시지 말 일, 一定한 職業을 가질 일, 싸우지 말 일』 等의 세 가지를 付托하고 나도 島山에게 몇 가지를 希望하였는데 그 가운데는 『地方黨을 짓지 말 일』이라는 말이 있었는데 島山은 對答하되 『春谷은 내가 地方黨을 짓지 못하는 것을 잘 알지 아니하우? 內地에 가서 小學校校長이나 하라고 하더니 이제 內地에는 왔지만 小學校校長의 資格도 없소 구려!』하면서 弄談 格으로 웃으며 말한 일도 있다. 이제 내가 上海에서 島山에게 憺力이 不足하다고 지나가는 말로 한 말 몇 마디를 가지고서 安氏 自身은 地方黨 짓지 아니하는 證據로 引用하려하고 朱氏는 安氏의 野心家가 아닌데 引用하려고 하니 나의 몇 마디 말이 이와 같이 功効가 큰 데서 놀라지 아니할 수 없는 것이다. 나의 그 말을 引用하여 가지고 安氏가 地方黨 안 짓는데 證據도 되며 野心 없다는 證據도 되어서 安氏에게 붙어 다니는 『地方熱』 『野心家』라는 別稱이 없어진다면 얼마나 훌륭할 것이며 비록 나의 말한 本意가 埋沒된다고 하더라도 나에게 그다지 큰 損失이 될 것이야 있으랴! 마는 그말의 功効가 어떠 할런지요. 그리고 朱氏의 引證에서 또 한 가지 말할 바는 島山에게서 『물러선 一派가 羅某를 시켜서 京城에서 딴 돈이 왔다고 거짓말하여 가지고 그 돈의 一部를 安氏에게 주어서 使用한 것도 事實이다.』 云云한 것은 朱氏가 安氏를 辯護한다는 것이 도리어 安氏를 公開的으로 率直하게 쓰자는 돈은 쓰지 않고 거짓말하는 돈을 쓴 사람으로만 만들고 말었다. 朱氏여! 分明히 理解하라! 元某가 安氏에게서 물러선 것이 아니라 安氏와 意思가 合致되지 아니하므로 安氏와는 갈라져 ○○會議籌 備會委員 一同과 함께 그 돈 가운데서 얼마를 가지고 會議의 召集을 斷行하게 하였으며 乃終에는 安氏가 그 內容을 알고서도 함께 일하게 된 것이 事實이다. 그리고 安氏에게 그 돈의 一部를 주어서 使用하게 한 것도 事實이라는 事實은 事實이 錯誤다. 會議召集의 費用上에서 安氏의 손을 거쳐서 支出한 것이 있다 하더라도 그것은 籌備會側의 支出이요, 安氏의 使用이 아닌 것이 事實이다. 引證이 事實과 相反되는 引證은 預期의 効果를 내지 못하고 도리어 損失이 되는 것이다. 島山을 辯護하자던 것이 도리어 그에게 非本意, 非事實的 誤解만 사게한다면 이 어찌 신중히 할 바 아니랴. 그리고 印, 朱 兩氏는 『興士團』 『同友會』를 가지고 그것을 安氏論에다 編入하면서 論하였다. 여기에 對하여 길게 말할 必要를 느끼지 못하는 同時에 다만 印氏는 『島山이즘』을 吟味한다고 前提하고 그의 理論이라고 紹介한 뒤에 거기에 對한 批判은 別로 내리지 아니하고 그 團體의 有力한 分子들의 過去 行爲를 擧論하되 李某는 마누라의 궁둥이를 못 잊어서 同志를 背叛하고 上海에서 살짝 朝鮮으로 왔으니 누구는 敎會에서 福音을 傳播하느니, 누구는 大商店에서 島山의 主張하는 商工業의 發展을 시키어 많은 月給을 타 먹느니, 누구는 軟派小說로 有閑마담의 심심풀이를 시키느니, 누구는 醫師가 되어서 어쩌느니 누구는 고무工業을 하면서 勞働者의 賃金 引上을 不許하다가 스트라이크』를 만났느니 等等을 말하여 마치 『島山이즘』이 그러한 人物들을 輩出하게 한 本源처럼 論한데 不過하고 朱氏는 여기에 對하여 辯明하되 『興士團』이나 『同友會』는 地方黨이 아니라는 辯明과 政治團體가 아니오, 오직 修養團體뿐이라는 辯明으로써 亦是 問東答西 格에 지나지 못하였다. 於左於右에 그 團體의 主要分子들의 行爲는 그들 各 個人의 行爲이고 그것을 가지고 安氏에게 深責하는 것은 너무나 지나치는 感이 有하고 興士團은 地方黨이 아니라는 辯明은 오늘의 朱氏만이 아니고 安氏도 時時處處에서 하는 辯明이지만 世人은 興士團이라면 安氏의 西道地方黨의 團體로만 認定하게 되고 辯明이 無用하게 되었은 즉 氏들로 하여금 안타까운 노릇이다. 그렇다면 벌써 오랜 歲月에서 地方黨이라는 烙印을 맞은 該 團體를 氏들은 어찌하여 完全히 解散하지 아니하고 死力을 다하여 繼續하려고만 하는가? 그럴수록 世人의 批判은 甚하여 가는 것이 아닌가? 나의 아는 範圍에서는 그러한 非難을 받던 團體가 各 地方마다 있다가 모두 없어지고 오직 安氏를 首領으로 하는 興士團만이 남아 있는 듯한 즉 나는 이 機會에서 安氏에게 『차라리 그 團體를 解散 시키고 말라!』고 勸告하고 싶다. 그러나 나의 이 말은 아마도 無用일 듯하여 걱정이다. 最后로 말하고자 하는 바는 印氏가 安氏에게 對하여 不相適한 期待와 無理한 注文을 하였다는 一例을 말하게 되는데, 印氏는 安氏가 基督信者가 아니노라 말하더니 그 뒤에 몇 날이 못 되어서 安氏는 누구와 作伴하여 禮拜堂에 가서 說敎를 듣고 돌아오는 것을 보았노라. 安氏는 거짓말 하지 아니 할 사람으로 알았더니 거짓말을 하더라고 落望하고서 카이젤, 蔣介石(장개석), 馮玉祥(풍옥상) 等의 虛僞를 引證하면서 安氏의 거짓말 한 必要를 探索하기에 努力한 것을 볼 때에 나는 印氏의 不相適한 期待를 安氏에게 가졌던 것을 답답하게 생각되었다. 거짓말하지 않는다고 盟誓하던 입에서 거짓말이 나오게 되는 것은 安氏뿐만 아니라 이 世上에 얼마든지 있는 것이며 禮拜堂에 간다고 반드시 基督信者가 되는 것도 아니며 孔子廟에 간다고 반드시 儒生이 되는 것도 아니다. 設或 安氏의 그것이 거짓말이라 하더라도 거기에서 大驚小怪할 것은 없는 듯하다. 그만한 거짓말 쯤에서는 印氏에게나 社會에 그다지 큰 弊害가 되지 아니할 것이다. 그보다 더 큰 거짓말을 하였을지라도 容恕하고 諒解할 境遇에는 덮어두고 오직 내 일만 爲하여 努力을 함께 하자는 것이 忠誠스러운 心境과 態度인가 한다. 무엇을 가리켜서 印氏가 安氏에게 無理한 注文을 하였다고 하는가 하면 三十年 前부터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六十 老翁에게 一九四十 年代의 『이데올로기』를 가진 靑年처럼 活動해 달라고 期待하고 注文한다면 그 注文은 完全히 無理한 注文이다. 봄이 가면 진달래꽃도 진다는 말은 印氏 스스로 한 말이 아닌가? 그저께 새 것이 어제와서 묵은 것이 되고 어저께 새 것이 오늘에 묵은 것으로 되며 오늘의 새 것은 또 다시 來日에 묵은 것이 되는 것은 天演의 公式이다. 저마다 저 한 때의 役割을 다하고 물러가는 것이다. 朴興植(박흥식), 朱耀翰(주요한) 氏 等의 招請으로 和信商店에서 演說하게 되는 安氏를 그 店員들의 便이 되지 아니한다고 말하는 것도 解釋에 달린 것이라 無理한 注文인가 한다. 朱氏도 論하여도 安氏를 爲하여 辯護할진대 單純히 印氏 論文 中에 있는 誤解라든지 世人이 가지고 있는 誤解를 풀려면 論文의 反駁으로써 匡正하려 하지 말고 모든 誤解가 不攻自破할 만한 根本的 淸潔을 하는 것이 上策인가 한다. 以上으로써 安氏를 論題로 한 印, 朱 兩氏의 所論에 對한 나의 所感은 대강 말하였거니와 이 機會에서 나는 安氏의 現狀을 紹介하고자 한다. 時代 靑年이 무엇이라고 安氏를 規定하든지 내가 본 安氏의 現狀에는 同情에 넘치는 点이 한두 가지가 아니다. 아무리 남다른 人物이라도 同一한 人間이다. 人間에다가 人間 以上의 것을 期待하며 注文하지 못할 것이다. 六十 歲나 되는 늙은 몸이 몇 十 年 떠났던 故土에 돌아와 섰는데 大田에서 얻은 難治의 胃病으로 一日도 苦痛받지 아니하는 날이 없게 되었으며, 自身의 齒牙는 모두 잃어버리고 人造齒牙로써 飮食을 씹자니 그의 恨되는 点도 可知이며 이름은 故土지만 사랑하는 妻子는 멀리 太平洋 건너 米國 땅에 있으니 늙으막에 보고 싶은 생각인을 오죽할까? 本來부터 가지고 있던 기침病으로 괴로워하는 그 몸을 平壤城外 某山寺 터에 다 지은 집에서 마지 못하여 園藝에 趣味를 가지고 있게 되었으니 그의 心理 苦痛인 즉 얼마나 甚할까? 아무리 그렇더라도 世相 되어가는 것이나 求景하며 餘生 보내 가는 것이 處士的 氏에게 그 中 한 가지의 希望이라고 할까? 普齋, 誠齋, 秋汀이 모두 간 世相인저…….(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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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昌浩氏 演說私評[朱雲成](『三千里』 1936.8) |
近代 朝鮮史上 여러 意味로 一世의 風雲을 三寸舌로 左右하여 民衆全般的으로 公認한 雄辯家가 있었다면 그는 두 말 없이 安昌浩(안창호) 氏일 것이다. 옛 소리를 그대로 듣는 機械가 發明된다면 昔今 半世紀於間의 半島 山河를 우렁차게 震撼시키던 島山의 獅子吼가 그 機械 속에서 왕왕 들려나올 것이다. 호미를 메고 乙密臺 上에 올라 農夫歌를 高唱하며 하던 土足 演說을 비롯하여 箕城街頭의 大衆演說이 幾 十萬의 心臓을 때려 부수고 大成校壇上의 名 訓示는 아직도 壯年 事業家들의 가슴 속에 깊이 새긴바 되어있다. 그리하여 『간다 간다 나는 간다』 노래를 지어 부르며 狂波를 타고 海外로 流離한지 數十 星霜 동안에 風露演說이 東西 海陸을 울린 우리의 一雄辯家이다. 그리하여 今日 半島 民衆이 雄辯家 安昌浩(안창호)를 다시 보는 興味는 누구나 궁금하게 생각난다 할 것이다. 그러나 出獄한지 오래 되지 않음으로 아직 正式演說을 듣지 못함을 궁금해 하거니와 時勢에 依하여 말할 수 있는 機會일냥 열릴 날이 와줄줄 믿는 바이다. 어쨌든 이런 一世의 雄辯家를 묵혀두는 것은 오히려 自他가 다 關心거리가 되는 것이다. 今春 잡혀서 몇 번 安昌浩(안창호) 氏의 祝辭가 있었고 修養講話가 있었는바 筆者도 그이의 辯舌을 한 토막 맛을 보았기 때문에 余의 私見의 느낌을 가지고 그 雄辯術에 對하여 좀 써보려 한다. 勿論 本格的 雄辯을 못 듣고 評할 바 아니지만 한 독의 물을 다 마시지 않고라도 한 잔만 먹어 보아도 맛을 斟酌할 수 있는 것처럼 雄辯에 있어서도 다만 五分 間 演說에서도 그 音聲, 語調, 表情, 修辭, 組織의 能率을 窺知할 수 있다. 雄辯이라는 것도 바둑의 數와 같아서 벌써 몇 段 몇 級으로 얼른 알 수 있는 것이다. 雄辯은 卽 말하는 音律인 것이다.말의 音律로 喜, 悲, 活劇을 演奏하여 幾 萬人을 短時間에 울리고 웃기고 征服하는 것이다. 故로 雄辯처럼 偉大한 技術은 없나니 이것을 天才와 訓練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雄辯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까닭으로 訓練을 많이 쌓은 演說은 마치 聲樂家가 아무런 노래를 불러도 그 實力이 明顯함과 같이 한 마디 祝辭를 해도 그 雄辯의 實力을 잘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제 序說은 이만큼 하기로 하고 島山의 演說을 檢討하여 보려 한다. 첫째로 그의 風貌가 雄辯家일 뿐이다. 그의 눈이 至極히 平凡스러우니 英雄은 아니고 微笑를 띄운 얼굴이니 革命家는 아니고 입이 오직 넓직하니 주먹이 들어 갈 만하니 판박아 놓은 雄辯家이다. 또는 音聲에 있어서 壓力 있는 뻬스音이면서도 쟁쟁한 淸雅한 音이니 雄辯學上 첫 가락 꼽히는 音聲이다. 語調가 느직느직하여 大人의 辯이 분명한데다가 高低가 律에 맞아 表現하려는 뜻을 如實히 音律과 같이 表現할 수 있는 語調이다. 그리하여 叙述, 暗示, 强調, 感化에 있어서 自由自在할 能辯이다. 또는 演說이란 座談의 擴大한 者이니만치 아주 座談하는 때와 길은 自然스런 態度가 第一生命인데 興奮이 지나쳐도 못쓰고 또는 拙氣가 되어도 못쓰는 것인데, 安先生의 演說은 恰如平路徒步로 自然스러운 心境을 갖게 한다. 여기에서 大衆은 陶醉되고 眞實스러운 感銘을 받게 된다. 또한 그 말씀 內容이 亦是 假飾없는 眞實性的 骨子로 嚴格히 叙述하기 때문에 何日何時에 생각해도 변통 없을 感化的 材料가 될 것이다. 어떤 이의 演說은 마치 痳醉劑와 같아서 듣는 그 時間에는 阿片같이 말할 수 없는 興奮 속에 感動을 받고도 몇 時間 몇 날 지나기만하면 식어지고마는 그런 演說이었다. 이 點에있어서 百世에 感銘을 保全할 수 있는 安昌浩(안창호) 氏의 演說일 것이다. 그런데 安先生의 演說은 英國 글래스톤 氏의 演說類에 들 것이요, 永井柳太郞 氏의 演說類에 屬할 것이다. 로이드 죠지 氏 같은 諷刺的 豪辯은 아니고 히틀러 氏 같은 熱辯은 아니다. 筆者의 좋아하는 바로는 좀 더 安先生의 演說에 있어서 熱辯이었으면 좋겠고 魅力있는 語句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하였다. 語調가 느직느직하면 熱辯되기는 좀 어렵고 眞實 自然스럽기만 하면 聽衆으로 하여금 벼룩 무는 줄도 모를 만한 魅力的 征服이 좀 어렵다. 그리고 히틀러 氏 等의 演說은 文章으로 써놓고 보아도 어찌 그리 名文的이며 詩的인지 들으나 보나 讚嘆할 수 밖에 없는 完全 無缺한 雄辯인 것이다. 그런데 安先生의 演說이 文章的으로는 그렇게 名文的이 되지 못할 念慮가 있다. 이 밖에는 欠잡을 수 없고 歷史 있는 그의 壇上 風貌에 오로지 懷抱가 깊을 따름이었다. 島山 先生의 近日 絶叫는 主로 愛의 絶叫이다. 現狀을 말하는 것도 互相愛로야 될 것이요, 永遠한 繁榮과 向上도 오로지 愛라는 美德으로야 바랄 것이라 한다. 이것이 二千 年 前 基督이 唱導하신 原理를 再吟味하는 것 뿐이 아니니 곰곰히 생각할수록 愛의 原則은 切切한 民生의 福祉가 되는 것이라 한다. 刻下 우리 社會는 極度로 倫紀가 衰微하여 相毁相爭의 報導가 우리의 눈과 귀를 괴롭게 하는 이즈음에 安先生의 愛의 絶叫는 더 한층 時宜에 適한 敎訓이라 할 것이다. 참말로 安先生의 愛의 絶叫를 듣고 現下의 우리 社會를 돌아보면 참 기막힐 뿐이다. 『아메리카니즘』 以上의 個人主義가 우리 社會에 蔓延되어 너무나 利害打算과 功利主義에만 汲汲하고 있어서 今日 財力이 있는 이들이란 단돈 十圓을 써도 芳名이 四海를 떨치는 目的으로야 쓰게 되고 한 따뜻한 얼굴로 어려운 사람을 도와주거나 躍動하는 靑年들 손에 돈푼을 쥐여 주는 사람은 없다. 故로 今日 朝鮮의 富者들은 殆히 冷血動物에서 凍血動物로 되어가는 차디찬 金塊의 本質化가 되어 가는 듯하다. 예수의 말씀대로 右手가 救濟하는 것을 左手도 모르게 하라 하신 名敎訓은 今日에 敢히 實行하기는 不可望이나 너무도 愛의 缺乏을 보는 우리 社會의 今日인 것을 눈물로 嘆息할 밖에 없다. 어디 가서 今日에 愛의 發作을 볼 수 있느냐? 近日 幾 十萬 圓 喜捨하는 사람들이 있기는 하나 亦是 功利主義의 基因에서 되는 일이 많고 今日 五十圓 百圓으로 出世하는 者가 많음을 본다. 五十圓 百圓으로 미끼를 삼아 會長을 벌며 萬圓 十萬圓으로 社長을 버는 黃金의 代價主義가 今日 우리 社會의 特徵이 아닌가? 職業을 찾는 子弟가 街路에서 彷徨하건만 視而不見이요, 끼를 굶은 親知가 한끼 밥을 請하건만 門前逐出로 面會를 拒絶하며 意氣가 있는 事業靑年들이 조금만 援助를 求하건만 名譽 나지 못할 일이니 空白으로 拒絶하고 마는 것이다. 이것이 刻下 우리 社會의 가장 참된 實情이니 여기에서 따뜻한 愛의 絶叫는 時急한 부르짖음이다. 氏여! 한 번 외치고 두 번 외쳐서 이 社會가 溫暖할 愛의 世界로 化하게 만드시라! 한덩이의 불기운이 氷室을 녹이는 것처럼 이 冷却한 社會를 녹일 者는 偉大한 雄辯家의 뜨거운 三寸舌로야 그들의 피를 덥게 할 것이다. 老雄辯家의 面影은 바야흐로 光輝스럽다. 我等은 歡呼와 喝采로 對할 뿐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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安島山과의 問答四個條(『三千里 1936.12) |
島山 安昌浩(안창호) 先生의 消息이 한동안 막혔었다. 간혹 新聞紙의 人事消息欄을 通하여 「平壤에서 某月 某日에 서울 올라와 中央호텔에 投宿」 그렇지 않으면 「入城 中의 安島山 某月 某日 某時 京義線 特急으로 平壤으로 向하여 出發」이란 斷片斷片의 消息이 실렸을 뿐이요, 좀 더 길다 하여야 胃臟病 治療하기 爲하여 또는 齒痛 治療하기 爲하여 그렇지 않으면 咸南 洪原의 新羅 眞興王碑 建立式에 參列로써 入城」이란 亦是 三四行에 不過한 報導가 傳해질 뿐으로 先生의 周圍를 싸고 도는 李光洙(이광수), 鄭仁果(정인과), 李容卨(이용설), 朱耀翰(주요한) 等 諸氏와 其外 平壤, 京城의 有志 몇몇 분을 論外로 하고는 最近의 島山 先生의 去就와 心境에 對하여 一般世人들은 잘모르고 있는 터이다. 大田刑務所에서 假出獄한 것이 昭和 十年 二月이요, 그 뒤에 假出獄 期間이 滿了된지도 去年 十一月인즉 그 뒤 滿 六, 七 個月 사이에 先生은 무얼하고 계셨는가 장차는 무얼하려고 벼르고 계시는가? 또 最近의 病狀은 어떠하며 北米에 있는 令夫人과 子孫들은 돌아왔는가? 더구나 지금도 平安道에 계신가? 이 모든 心境과 現在를 알고싶어 하는 이 많을 줄 아므로 前日 서울 오신 島山 先生에게 對하여 나는 아래의 네 條目을 衆人에 代身하여 質問하여 그 「말씀」을 얻었기에 이에 傳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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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名人物一代記(『三千里』 1937.1) |
丁丑 新春 1, 先生의 春秋 얼마시며, 어디서 무얼하시면서 새해를 맞았으며 또 新年에는 무얼하시겠습니까? 身老心不老의 嘆이나 其他 心境을 적어 주시옵소서) 十年 前 1, 十年 前은 先生의 春秋 얼마셨는데 그때 어디서(京城 又는 東京) 무얼(職業)하시면서 過歲하셨습니까? 2, 그해에는 朝鮮에 어떤 큰 일이 있었습니까? 二十年 前 1, 그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디서 무얼하시며 지내셨습니까? 2, 그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었습니까? 三十年 前 1, 그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디서 무얼하시며 지내셨습니까? 2, 그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일이 있었습니까? 四十年 前 1, 그때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디서 무얼하시며 지내셨습니까? 2, 그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었습니까? 五十年 前 1, 先生의 春秋 얼마신데 어디서 무얼하시며 지내셨습니까? 2, 그해에는 朝鮮社會에 어떤 큰 일이 있었습니까? 六十年 前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