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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981 CHANG HO AHN DIES AT 61 ; CHAMPION OF KOREA′S FREEDOM(THE KOREAN STUDENT BULLETIN 1938.2)

    일본 제국주의에 대한 반대자이며 대한민국 애국 운동의 투사였던 안창호(Chang Ho Ahn) 선생이 1938년 3월 9일 한국 서울의 서울대학병원에서 생을 마감했다.61세의 한국인 애국지사는 지난 여름 중일전쟁이 발생한 이후 명백하게 조작된 죄명을 선포받고 다른 한국인 지도자들과 함께 일본 경찰에 의해 붙잡혀 서울에 구금되었다. 그는 재판도 없이 지난 12월까지 서울 교도소에 구금되었다나 병을 앓게 된 것으로 여겨진다. 안선생(Mr. Ahn)은 그가 쓰러진 지난 12월 중반에 일본 정부 병원인 서울대학병원으로 옮겨졌다. 그의 사망의 진정한 사유는 알려지지 않았으며, 아마도 알려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화려하고 소중한 지도자, 안선생(Mr. Ahn)은 1932년 상항이에서 있었던 일본인 고위 관리인 암살 폭파사건에 그가 연루되어 있을 것이라고 단언하는 바람에 3년이라는 기간동안 수금되어 있다가 3년 전에 대전에 있는 일본인 교도소에서 풀려났다. 그의 유죄를 증명하지 못했기 때문에 일본인은 그가 소의 평화-보존법을 위반하였다며 죄를 물어 유죄를 선포했다.안선생(Mr. Ahn)은 한국의 정치적인 자유를 목적으로 몇 년간 살았던 미국에서 한국인들을 모아 중요한 단체 몇 개를 설립한 창시자였다. 이 단체들 중에는 대한인국민회와 흥사단이 대표적이다.

    4982 "AHN CHANGHO|| KOREAN PATRIOT|| DIES IN PRISON (THE EVENING STAR 1938.3.23)"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회원이며, 한국인 애국지사 및 지도자였던 안창호(Ahn Changho) 선생이 감옥세어 별세했다는 소식은 어제 N. W. 조지아(Georgia)가 7309의 대한인국민회와 연결되어 있는 작가, 안승화(Ahn Seunghwa)로부터 알게되었다.안창호(Ahn Changho) 선생은 1937년 7월부터 일본인에 의해 감옥에 갖혔으며 한국의 서울에서 3월 10일에 사망했다. 그는 1932년 4월 상하이에서 있었던 공고우(Konhkou) 사건에서 일본인 암살 사건에 연루되었을 것이라는 이유로 4년간 감옥에 수감되어 있었다. 그 당시 6명의 일본인들은 보고상으로 한국인들이 던진 폭탄으로 암살되었다고 한다.안창호(Ahn Changho) 선생은 한국의 평안남도 광주에서 태어났다. 1878년 그는 필립 제이슨 박사(Dr. Philip Jaisohn) 와 다른 저명한 한국인들과 함께 대한민국 독립운동회와 결합되었다. 그는 강의를 위해 미국에 여러번 방문하였다. 그는 아내와 세 아들, 그리고 두 딸을 남겨두고 세상을 떠났다. 그들은 현재 모두 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으며 미국 시민이다.

    4983 만 안도산공[현순](『太平洋週報』 1938.3.26)

    도산서세도산암 만첩도산개함비 막도도산미복국 도산명일립공비

    4984 HAWAll MOURNS OVER DEATH OF AHN CHANG HO (The American-Korean 1938.3.28)

    하와이의 한국인들은 3월 10일 아침 새벽 3시, 서울대학병원에서 안창호(Ahn Changho)가 별세했다는 소식을 듣고 충격을 받았다. 이 슬픈 소식은 같은 날 아침 11시, 로스앤젤레스에서의 전보로 강 도날드(Donald Kang)에 의해서 전해졌다. 그리고 이와 비슷한 전보 소식이 지방 협회와 이승만 선생(Dr. Syngman Rhee)에게서 전해졌다.강씨(Mr. Kang)는 너무나도 훌륭하신 분의 사망 소식을 즉시 모든 중요한 기관과 지도자들에게 알려 함께 애도하였다. 장례식은 3월 13일 저녁에 대한인국민회의 도움으로 밀러(Miller)가의 본부에서 치뤄졌으며, 3월 20일에는 와히아와(Wahiawa)에서도 치뤄졌다. 대한인국민회 홀에서는 여러 연설자들이 세상을 떠난 지도차를 위해 100명의 애도자들 앞에서, 높은 찬사의 연설을 했다. 이들 중 대부분이 눈물을 보이는 모습이었다. 대표 조 P. Y.(P. Y. Cho)씨는 안선생(Mr. Ahn)을 찬양하는 글을 읽다, 목이 메여 몇 번 잠시 숨을 돌리는 모습도 보였다. 그 글의 서두는 다음과 같았다. : "훌륭하신 도산 선생(Dosan Sunsang), 당신은 그 훌륭한 업적이 빛을 발하기도 전에 우리 곁을 떠나시는 군요."안선생(Mr. Ahn)의 일대기는 도산(Dosan)을 사랑했던 제자들 중 하나인강 도날드(Donald Kang)이 설명해주었다. 그 자가 모두 말하지 못했던 부분은 안선생(Mr. Ahn)의 친구였던 정 W. M.(W. M. Chung)이 이야기해주었다. 정 B. K.(B. K. Chung)은 안선생(Mr. Ahn)의 정신이 우리에게 계속 용기를 주고 있다고 강조했다. 헨리 K. 김(Henry K. Kim)씨는 도산(Dosan)이 진정한 애국지사였으며 절대 잊을 수 없는 한국의 아들이라고 말했다. 그리고 문도라(Mrs. Dora Moon) 부인은 안선생(Mr. Ahn)이 독실한 기독교 신자였으며 순결한 생을 살았다고 설명했다.홀은 눈물 바다가 되고 소녀들은 안선생(Mr. Ahn)이 평소 제일 좋아했던 노래를 부르며 청중들은 정중하게 절을 하며 기도를 드렸다. 박 C. S.(C. S. Park)씨는 기도를 시작하면서 남아있는 가족을 위해 주님의 은총을 빌었다.기부금은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안선생(Mr. Ahn)의 가족에게 돌아갔다.

    4985 HON. AHN CHANG HO(The American-Korean 1938.3.28)

    하와이에 있는 한국인 조상의 미국 시민들을 위해, 호놀룰루 포트(Fort)가 1520에서 분기별로 발행됨.총 책임자 : 강도날드(Donald Kang)(이전에 강영(Young Kang)으로 알려져 있었음)구독 신청 : 일년에 1 달러주소 : 호놀룰루 포트(Fort)가 1420 재미교포지(The American-Korean)

    4986 BlOGRAPHY OF AHN CHANG HO(The American-Korean 1938.3.28)

    3월 10일 서울에서 타계한 안창호(安昌浩) 선생은 1878년 11월 11일 강서에서 태어났다. 그는 지역 학교에서 초기 교육을 받았고 나중에 서울 경신학교에서 수학했는데 거기서 기독교인이 되었다.웅변에 대한 그의 특이한 재능은 일찍이 어린 시절부터 드러나, 16세 때 평양 독립협회에서 5천명 앞에서 대중연설을 하였다. 힘있는 연설가로서의 그의 명성은 시간이 갈수록 높아졌고 그의 혀의 마술은 기적을 이루었다.1902년 안선생은 그의 젊은 부인과 함께 미국에 유학을 오게 되었다. 1905년 그는 캘리포니아 정착민들을 위해 공립협회를 세웠는데 이 단체는 뒤에 하와이의 합성회와 결합해 국민회를 형성하게 된다.1907년, 안선생은 완전한 파멸로부터 나라를 구하기 위해 고국으로 돌아갔다. 본부를 평양에 세우고, 안선생은 국가적 통합의 사명을 띠고 윤치호, 이동휘, 이갑, 그리고 이상제 등 유력 인사들의 지지를 이끌어 나기 위해 한반도를 종으로 횡으로 돌아다녔다. 동시에 그는 나중에 모두 그의 열렬한 추종자와 조력자가 된 500명의 젊은이를 뽑아 평양에 대성 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안선생은 이토 공작과 두 번 대담을 하였는데 이토 공작은 그의 정치적 활동에는 분개하였지만 그의 훌륭한 지도력과 성품을 칭찬하였다. 만주 하얼빈에서의 안중근의 이토 암살에 뒤이어 일본 정부는 모든 "선동자"들을 근절하려고 하였고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첫 번째 대상으로 지목했다. 그러나 이 빈틈없는 정치가는 그들의 덫에 쉽게 빠지지 않았다. 그는 1910년 조용히 그 나라를 빠져 나왔다.중국에서 2년을 보낸 후 영웅 안창호(安昌浩)는 시베리아, 독일을 거쳐 미국 뉴욕으로 해서 미국으로 돌아왔다. 그가 1911년 여름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을 때, 그는 퇴락되어 있는 국민협회를 발견하였다. 그의 노력으로 곧 대한 국민회는 다시 제대로 일을 하게 되었고 ′신한민보′의 발간이 재개되었다. 1913년 그는 29명의 핵심적인 학자들과 함께 흥사단을 조직하였는데 이 숫자는 10년 이내에 200명으로 늘어났다. 1916년 그는 그곳의 상황을 진정시키기 위해 하와이를 방문하였고 2년 후 멕시코로 갔다. 1919년 만세 운동이 일어났을 때, 애국자 안창호(安昌浩)는 즉각 상하이로 떠나 그곳에서 임시정부 수립을 도왔다. 그곳에서 그는 1925년까지 남아 있다가 "안식년"을 지내기 위해 하와이를 거쳐 미국으로 여행하였다. 다음 해 중국으로 돌아가서 그는 1932년 홍구 공원 폭탄사건에 따라 적들의 손에 체포될 때까지 혁명운동을 계속하였다. 같은 해 한국으로 압송되어 일본에 의해 혁명 활동에 "유죄"를 선고 받고 정치범으로 4년 형이 내려졌다. 건강이 악화된 채 1935년 가석방된 안선생은 회복을 위해 몸을 뉘였지만 오래 있지는 못했다. 작년 중일전쟁의 발발에 이어서 일본은 그를 수양동우회의 다른 수 백 명의 지도자들과 함께 감옥에 다시 가두었다.계속된 고문과 학대로 안선생은 쇠약해졌고 1938년 3월 10일 오전 3시 서울의 대학병원에서 숨을 거두었다. 영화배우 필립안(Philip Ahn),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아들3월 10일 일본의 학대로 서울에서 타계한 한국의 가장 으뜸가는 정치가이자 연설가인 안창호(安昌浩)선생을 개인적으로 알 수 있는 특권을 가지지 못한 젊은 이들이라도, 이 분이 파라마운트 영화 배우인 필립 안의 아버지라고 하는 것을 알면 흥미 있어 할 것이다. 많은 면에서 필립은 그의 아버지를 닮았고, 필립을 본 적이 있고 은막에서 계속해서 보게 되는 우리는 그 아버지의 잘생긴 모습을 그에게서 볼 수 있을 것이다.필립 안은 두 남자형제와 두 여자형제를 가지고 있었고 모두 어머니와 함께 천사의 도시(로스앤젤레스)에 살고 있다. 안선생의 부인은 작년에 한국에 갈 계획을 세웠지만 그 여행을 만류하는 남편의 전보를 받고 샌프란시스코까지만 갈 수 밖에 없었다.

    4987 고 안도산선생을 봉조 외(『國民報』 1938.3.30)

    위국애족 혁명가로 사십성상 불변충성위국자중 제일인 것 경탄하고 애도한다.불고쳐자 모험력은 혁명위인 흑성이다.순국원혼 영성하심 비통중에 축하한다.애국동지 모세위인 영적협조하옵소서애원민족 위하여서 신비동력하옵소서광복대업 미성한 것 후계자를 믿으시고국치분심 도산 선생 안위령성하옵소서

    4988 島山先生을 悼함(『韓民』 1938.4.3)

    우리의 참된 인도자 안도산 선생이 돌아가셨다는 부음을 들으니 우리는 하늘이 무너진 것 같다. 우리의 대업을 이루기 전 더욱이 사업이 가난한 이 때 정히 도산 선생 같은 어진 인도자가 언제보다도 필요한 이 때에 선생을 잃었으니 하늘이 어찌 그다지도 무심하며 우리 민족의 박복함이 어찌도 그다지 심한가! 슬프다! 성공의 날을 보지 못하고 만고의 한을 품고 돌아가신 선생 양같은 우리 민족을 버려 두시고 가신 선생이 어찌 구천에서 눈을 감으리오. 그러나 오히려 선생의 뜻을 이을자가 없지 아니하오리니 선생은 그 편히 쉬소서. 선생의 거룩한 정신은 우주에 사무쳐 영원히 꺼지지 아니하고 선생의 걸으신 맑은 자취는 우리의 앞길을 밝혀 보여주시니 우리는 그대로 밟아 나아갈 뿐이 올시다.선생의 하신 말씀 어느 것이 우리의 폐부에 새기워지지 아니하였으며 선생의 하신 일 어느 것이 우리의 모범 안되는 것이 있사오리까. 선생은 우리 몽매한 무리를 깨워주기 위하여 사십년 동안 혀가 닳도록 애쓰셨으며 선생이 당신의 그 사랑하는 나라를 위하여 쓰신 그 정성 그 노력은 신명이 많이 증거할 것이외다. 선생에게는 나라가 있었을 뿐이오. 다른 아무것이 없었으며 선생의 평생 정력은 나라일 이외에 다른 무엇에 쓰신데가 없었습니다. 자나 깨나 언제 나라를 잊어 본 적이 있었습니까. 나라 일을 위하여는 먹는 것을 잊고 자는 것을 잊으신 선생이 아니었습니까. 나라를 사랑하심에는 거짓이 없고 가식이 없으셨습니다. 일단 정심이 이에 있었을 뿐이 올시다. 아-선생! 선생은 혼령으로라도 우리를 도으소서. 우리를 지도하소서. 그리하여 선생이 못 보고 가신 그 날이 올 때에 무너진 옛동산에 무궁화 다시 필 때에 선생은 하늘에서 기뻐 뛰소서.

    4989 安島山先生 逝世의 悼儀(『韓民』 1938.4.3)

    도산 선생이 삼월 십일 경성 적 감옥에서 돌아가시고 동십이일에 장례하였다는 소식은 미주국민회에서 보낸 특전에 의하여 알게 되고 즉시 본보 호외로써 발표하였거니와 그 후 선생의 도의(悼儀)에 대하여 진행되는 일을 탐보하건대 이러하다.

    4990 故安島山先生의 略歷(『韓民』 1938.4.3)

    선생은 一八七八년(무인) 십일월 십일일에 강서군「방아꼬지」에서 나셨다. 어려서 부터 비범하더니 점점 자라 세정을 알게됨으로부터는 신문화에 눈이 뜨이고 애국사상이 날로 깊어 그의 십팔세 때에 경성에 올라가 예수교에 입교하고 서양인 학교에서 공부하면서 당시 신사상이 있는 이들과 교제하기를 시작하였다. 인하여 서재필, 이승만 등 제씨로 더불어 독립협회를 조직하고 독립신문을 발행하며 정부를 편달하여 부패한 정치를 개혁하려 할 때 선생은 경향으로 다니며 유세(遊說)하는 책임을 맡았다. 선생은 웅변가이다. 정유년 칠월 이십오일 개천절날 독립협회 지회의 주최로 평양 쾌재정 아래 대광장에서 열린 전성인사가 다 모인 경춘대회에서 선생이 표표한 청년으로 대열변을 토하여 그 현장에 출석한 관찰군수와 장령들의 악정폐습을 들어 여지없이 공격하였다. 이 말을 듣는 대관들은 얼굴이 붉어 고개를 들지 못하고 수만 청중은 통쾌하여 박수갈채하는 소리에 전성이 떠나가는 듯 하였다.이로부터 선생의 명성은 크게 떨쳐 대웅변가라는 칭호를 얻고 박영효 유길준등 망명 노정치가와 기타 신진 명사들과 지기를 토하게 되였다. 선생은 일찍부터 또 교육사업에 주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