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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4991 安島山先生追悼大會 초청장[長沙](1938.4)

    사회자 홍진(洪震)1.개회2.애국가 제창 일동3.식사(式辭) 사회자4.헌화 이동녕(李東寧)5.유상(遺像)에 경례 일동6.묵념 일동7.역사 서술 차이석(車利錫)8.추도문 낭독 조성환(曺成煥) 각계(各界)9.추도가(追悼歌) 가영반(歌詠班)10.추도사 서술 조소앙(趙素昻) 이청천(李靑天)11.애도 음악 연주 악대12.폐회13.촬영삼가 알리고자 하는 바는 우리 나라 혁명지도자 안창호(安昌浩) 선생께서 비통하게도 올해 3월 10일에 우리 나라 경성(京城)의 적의 옥중에서 서거하셨다는 흉보가 날아와서 몹시 슬픕니다. 호남(湖南)에 거주하고 있는 동지들이 4월 15일 오전 8시에 아례(雅禮)중학교 대강당에서 추도회를 엽니다. 이에 삼가 선생께 알려드립니다.

    4992 安昌浩先生追悼大會籌備會 초청장(1938.4)

    삼가 알리고자 하는 바는 4월 17일 오후 2시에 중경(重慶)시 상회(商會)의 식장에서 안창호(安昌浩) 선생의 추도대회를 거행하기로 하였습니다. 혜림(惠臨)하시어 지도하여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4993 哀悼島山先生[金星淑](『朝鮮民族戰線』 1938.4)

    우리의 민족해방운동의 위대한 지도자 안도산(安島山)(창호) 선생께서 뜻밖에 3월 10일에 적의 감옥에서 세상을 떠나셨다. 흉보가 전해오자 전 조선민족은 어느 하나 선생의 불행한 운명에 비통하지 않는 자가 없다. 특히 비통을 금할 수 없는 사람들은 오랫동안 해외에 망명하여 선생과 함께 혁명사업을 책동하던 오랜 동지들과 선생의 지도하에 혁명투쟁에 적극적으로 참가한 무수한 청년들이다. 도산(島山) 선생은 올해 61세인 오랜 혁명가이다. 선생은 망국하기 전후 30여 년간 조선민족의 자유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싸웠다. 특히 망국 후 해외에 망명하여 만주(滿洲), 상해(上海) 및 미주(美洲) 각지에서 혁명동지들을 적극적으로 널리 끌어 모아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여 혁명사업을 획책하고 진행하였다. 1919년 3.1대혁명운동 때 선생은 한국임시정부에 참가하여 국민대표대회를 소집하여 혁명운동의 통일을 도모하였으며 그 후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여 독립운동을 통일적으로 지도하려고 책동하였다. 1.28전쟁(1932년 일제가 상해를 침략한 전쟁) 후,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시라카와(白川)를 폭사시킨 사건이 일어날 때 선생은 마침 상해에 계셔서 왜놈에게 체포되어 경성(京城)의 옥중에서 5, 6년간 참혹한 철창생활을 하였으며 병으로 보석되어 나왔다. 이번 중일전쟁이 폭발하자 또다시 적의 총독부에 의하여 체포되어 옥에 갇혔으며 연로하고 다병한 신체로 적의 혹형을 견디지 못하고 끝내 우리의 곁을 떠났다. 우리는 선생이 민족의 자유 독립을 위하여 끝까지 투쟁하고 노력하다가 희생되었다는 것을 꼭 기억해야 한다. 선생의 혁명운동과정에서의 일관적인 주장은 전 민족의 역량을 집중하여 "착실하게 일하고, 열심하게 일"하는 정신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는 것이다. 왜놈들이 중국을 대거 진공하고 조선민족의 반일반침략운동이 폭풍처럼 거세게 연달아 일어나고,특히 전 조선민족의 반일동일전선운동이 드세게 높아갈 때, 선생의 육체를 적들이 앗아갔지만 선생의 혁명정신은 우리 모든 혁명자의 가슴속에서 살아남아 전체 혁명운동을 영도하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도산(島山) 선생을 애도하면서 반드시 선생의 전 민족의 역량을 집중하려는 유지를 높이 받들고 전 민족의 통일전선을 빨리 결성하여서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해야 한다.

    4994 旅湘韓國革命志士追悼安昌浩(『新華日報』 1938.4.15)

    조선혁명지도자 안창호(安昌浩) 씨가 올해 3월 10일에 한국 경성(京城) 적의 옥중에서 서거하였다. 호남(湖南)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 혁명지사들은 오늘(15일) 오전 8시에 장사(長沙) 아례(雅禮)중학교 대강당에서 추도회를 열기로 예정하였다. 아래에 그의 약력을 소개한다.안창호(安昌浩) 선생은 호가 도산(島山)이고 한국 평안남도 강서군(江西郡) 사람이다. 어릴 때부터 애국사상이 풍부하였으며 20세 이후에 혁명사업에 헌신하였으며 국민들은 혁명지도자로 추대하였다. 1919년 한국 민족이 독립을 선포하고 상해(上海)에서 임시정부를 조직하였다. 선생은 내무총장과 국무총리대리로 임명되어 군중들을 영도하여 광복운동을 획책하고 진행하였으며 후에는 어떤 사유로 사직하고 큰 당(黨)의 조직사업에 전념하였다. 1932년 4월 29일에 윤봉길(尹奉吉) 의사가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시라카와(白川), 시게마쓰(重光) 등을 폭사시킨 사건이 발생한 후, 선생은 적들에게 잡혀 한국의 경성(京城)에 압송되어 적의 옥중에서 갇히었다가 1936년에 출옥하였다. 비록 여전히 적들의 감시를 받고 있어서 자유가 없지만 각계 동지들과 비밀리에 연락하면서 혁명운동을 지도하였다. 그러다가 작년에 중일전쟁이 시작된 후에 선생은 시기가 왔다고 생각하고 즉시 대규모의 항일운동을 비밀리에 획책하였다. 이 사실을 적들이 알고 다시 구금하였으며 노소(老少) 동지 천여 명도 함께 체포하였다. 연이은 심문에도 선생은 시종 굴하지 않고 큰소리로 적을 욕하였다. 적들은 악에 바친 나머지 식물에 독약을 넣어서 선생을 해쳤으며 선생은 올해 3월 10일에 적의 옥중에서 급서(急逝)하셨다. 향년 61세이고 부인과 3남 2녀를 남겨두었으며 지금 미주(美洲)에 거주하고 있으며 아직 돌아오지 않았다.[신화일보(新華日報) 1938년 4월 15일]

    4995 旅?韓僑昨悼安先生(『新蜀報』 1938.4.18)

    중경(重慶)의 한교회(韓僑會)는 어제 오후 2시에 상회에서 한국혁명지도자 안창호(安昌浩) 선생을 추도하는 대회를 열었다. 회의에는 전체 한교와 각 기구의 대표 백여 명이 참가하였다. 식장은 간단하고 엄숙하게 꾸몄으며 중앙에 중한 약국의 국기가 걸려있었다. 국기의 위쪽에 안 씨의 유상이 걸려있는데 자태가 늠름하다. 유상의 위에는 한교회(韓僑會)에서 정중히 증정한 가로 액자가 걸려있는데 거기에는 "정신불사(精神不死)"라고 씌어있다. 조금 아래의 좌측과 우측에 "선열의 피, 혁명의 꽃"이라고 씌어있다. 그리고 각 기관에서 정중히 증정한 화환들은 무대 위에 놓여있으며 주위에는 추도하는 주련(柱聯)들이 걸려있다. 2시 정각에 추도식이 시작되고 윤기섭(尹琦燮)이 의장을 맡고 반해량(潘海亮)이 진행을 맡았다.1. 애국가를 불렀다. 2. 중한국기와 안 씨의 유상을 향하여 경례를 올렸다. 3. 묵도하였다. 4. 의장이 추도회의 의의에 대하여 보고하였다. 간단히 말하면 다음과 같다. 안 선생은 한국 혁명을 위하여 40여 년간 노력하였으며 침략자들에게 끊임없이 타격을 주었었다. 목전 일본제국주의자들은 중한 두 민족에 대하여 더욱 심하게 침략하고 있으며 우리의 종족을 없애려 하고 있다. 그러나 그들이 그럴수록 그들의 말로가 다가왔다는 것을 나타낸다. 우리는 오늘 안 선생을 추도하면서 매우 비통하지만 이후에 반드시 그의 유지를 계승하고 노력하여 한국 혁명을 빨리 이루어지게 하고 중국의 항전도 완수하여 최후의 승리를 쟁취하자. 5. 헌화하였다. 6. 김홍서(金弘敍)가 안 씨의 약력을 보고하면서 소리 내어 통곡하자 온 장내에 비분의 분위기가 들어찼다. 7. 신영삼(申榮三)이 추도사를 하였다. 8. 한국아동들이 추도가를 불렀다.마지막에 초대 손님 장백금(張伯芩), 칠노어(漆魯魚) 등이 잇달아 연설하였다. 이어서 구호를 부르고 산회하였다. [신촉보(新蜀報) 1938년 4월 18일]

    4996 島山의 臨終(『三千里』 1938.5)

    도산 안창호(島山 安昌浩)는 오랫동안 숙환(宿患)으로 있던 위장병(胃膓病)과 새로이 재발한 폐병(肺病) 기타로 말미암아, 지난 三月 十日 午前 零時 드디어 세상을 떠나버렸다. 도산이 병환이 위중해서 부득이 京城帝大病院 岩井內科에 入院하기는 지난해 十二月 二十四日이었다. 이래 달머리로 四簡月, 날수로 七十七日間, 세상에 살아계신 셈이 이 극히 짧은 동안, 도산은 병석에 누어 쓸쓸한 시간을 보내시었다. 그의 親知나 아는 이들은 어떤 사정으로 찾아 오는 이 드물었고 다만 고향인 平南 江西郡누次面에서 令兄한 분이 上京하여 오로지 그 곁을 떠나지 않으며 極盡한 간호를 하고 있었을 뿐이다. 이번, 도산의 병을 맡아 다스리던 城大病院 岩井內科 金容弼(김용필) 씨는 말하기를 도산이 처음으로 入院하든 그 당시에 페결핵, 늑막염, 복막염, 위하수, 등의 괴로운 병이 세겹 네겹으로 겹쳐있어 도저히 回生시킬 가망이 없었다고 한다. 그런 위중한 병세 임에도 불구하고 七十七日 동안이나 그나마 살아 계신것은 전혀 營養其他의 여러 가지 注射와 數十次의 輸血로 말미암아 견디어 왔었던 것과 또한 病人自身이 이 세상에 사시려 사시려 애쓴 意志의 힘으로 였다. 그러나 워낙 六十歲의 高齡인 몸에다 위하수, 늑막염, 복막염, 폐결핵등의 重態가 겹쳤으니, 병자인 自身도 醫師의 말과 疹斷을 기다릴 것 없이, 목숨의 다함을 미리부터 짐작했었음인지, 入院한 이래, 아무런 質問 한번 없이 고요히 殞命의 날만을 맞이하는 氣色이 보이였었다 한다. 그러면, 二, 三個月 동안을 食事한번도 변변히 못하고, 영양주사와 수혈로만 간신히 목숨을 부지하는 동안을, 하루에 數三次의 영양주사와 수삼일에 한두번의 수혈을 하였다고 한다. 수혈은 한 번에 五○○瓦의 分量을 하였다고 하니 무릇 수십차에 몇 천그램의 피를 받아 들였을 것이다. 남의 피까지 받는 호의도 모르는 듯이, 또한 매일같이 주는 주사와 일백가지 약석은 아무런 효과도 없었다. 그만치 도산의 병은 말하자면 入院初부터 위태했었다. 主治醫師의 간곡한 거절을 물리쳐 가면서 약간의 飮食物을 攝取시켜 보려는 영형의 간곡한 希望도 모르는 듯이, 병자의 입에서는 금시에 자시었던 음식물을 모조리 吐하곤 하였다. 그럴때마다 영형의 얼굴은 더욱 핼쑥히 질리었다. 하루 종일 몸을 운신은 못하시면서도, 밤에는 그래도 꽤 平穩히 수면을 가져오는 것이였다. 만일 수면마저 不充分했었더라면 그렇게 오랫동안 생명을 부지 못했을 것이라고 한다. 각혈은 아니지만 간간히 뱉는 가래가 끓을 때마다 곁에 있는 사람의 마음까지 간즈럽게 하였을 것이다. 지난 三月 一日쯤 해서 부터는, 그 위에 장결핵 하나가 더 생겨졌고, 바른편 肺는 거의 다 기능이 멈춰 있었다 한다. 이렇게 병세가 더욱 더 급박해 가더니 돌아가시기 전 전날인 三月 八日부터는 때때로 정신이 혼미한 상태에 빠졌었다 한다. 곁에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도, 이제 다녀간 사람이 누구인지도, 의사가 무얼 하는지 세상이 낮인지 밤인지도 도무지 분간을 못하시였다 한다. 바로 그 다음날인 九日 午後 八時頃부터는 아주 혼수 상태에 들어가더니 십일 오전 영시에 이르러서는, 약간씩 청진기에 울리는 맥박의 고동은 급기야 딱 멎고 말았다. 다시 숨길을 돌리지 못하시니 이 세상과는 인연이 멀어진 나그네가 되어 버렸다. 이 급보를 미리 알고 달려 온 몇 사람의 친지와 영형이 곁에서 운명하시는 것을 볼 뿐이였다 한다. 돌아가시기 며칠 전부터 혼수 상태에 있던 분이라 임종(臨終)에 이르러서도 별로히 이렇다할 유언(遺言)이라고는 없으시었다 한다. 어느 순간까지 이세상의 어른이요, 어느 순간부터가 저 세상의 손님인지를 분간하기 조차 어려웠다 한다. 지극히 고요한 죽음이었을 것이다. 子正이 넘은 그 순간, 온 천지는 限없이 고요했을 것이다. 병원 뒷 숲 조차 무거운 침묵속에 잠겨 있었을 것이다. 삼월 초열흘날 첫 새벽 날이 새이면서 도산의 시체는 흰수의 속에 쌓여, 고요히 고요히 별실로 옮기고 오랫동안 간호하던 영형이 모든 뒷일을 치르었다 한다. 머나먼 고향 강서에서 친척의 상경을 기다려, 돌아간지 三日만에 장사를 치르게 되었다.육십세를 일기로 생을 끝맺은 도산의 장사는 지극히 간단하였다. 또한 조용하였다.지난 십이일 오후 두시에 성대병원에서 고별식을 거행한 후, 발인하여 장지인 망우리(忘憂里) 묘지에 안장했다. 그 고별식과 망우리 묘지로 가는 상여차 뒤에는 고향 강서에서 올라온 친척 몇사람과 영형이 따를 뿐이였다 한다. 육십세를 일기로 봄바람 아직도 찬 三月 十日에 서울 帝大病院 一室에서 이리하여 도산은 이 세상을 하직했다. 여기에 附記할 것은 島山은 돌아가기 전 며칠 전에 이런 말씀을 하였다.「나 죽거든 내 屍體를 故鄕에 가져가지 말고」「그리면 어떻게 할래요」「달리 先山 같은데도 쓸 생각을 말고」「서울에다 묻어주오」「……」「공동묘지에다가……」「劉相奎(유상규) 君이 누워있는 그 곁 共同墓地에다가 묻어주오」 伯氏와 사이에 이런 對話가 있었다. 劉相奎(유상규)란 京城醫專 靑年 敎授로 上海 當時부터 島山의 가장 사랑하던 愛弟子인데, 그만 年前에 서울서 作故하였다. 그날 葬禮式은 春園이 主宰하였다.

    4997 도산선생은 가시다[

    한 번 왔다가 한 번 가는 것은 천명의 정리요 인생의 운명이라 누가 이 길을 면할 수 있으랴. 그러나 올 때에 기쁘고 갈 때에 슬픈 것은 인정의 피치 못할 일 이로다. 하물며 의인에 가심이리요.슬프다. 선생의 가심이여. 선생의 가심은 조선의 손실이오 인류의 손실이로다. 선생은 오직 조선 민족의 자유와 행복을 위하여 진리와 정의를 위하여 살고 일하고 다투어 왔다. 선생이 십六세 소년으로 고향을 떠난 후 우금 四십 여년 동안의 생활과 사업을 회고할 때에 그 어느 것이 나라를 위하지 않은 것이 있으며, 의를 위하지 않은 것이 있으랴! 선생이 처음 출세할 시대로 말하면 이조 말년에 국가와 사회는 여지 없이 부패하여 조정에는 난신적자의 무리가 조선을 문란케 하고 백성은 흑암중에서 오직 타락의 길을 걸어갈 뿐이었다.선생은 당시 二십 세 청년으로 분투하여 개혁을 절토하는 우렁찬 목소리는 강산을 울리고 쇄국주의에 잠자던 조선의 침묵을 깨트렸으며 병든 二천만을 생명수 가로 인도 하였도다.

    4998 인도자를 불으노라 응답할 자 그 누구뇨 불으난 자는 또한 누구뇨[김성권] 외 (『흥사단보』1938.6・7)

    인도자를 부르노라응답할 자 그 누구뇨부르는 자는 또한 누구뇨 이 연설은 의사부장 김성권 군께서 지난 六월 십일 고 도산 안창호 선생 탈상식 석상에서 하신 것이다. 기자 단우 제군 너와 나와로 뭉친 흥사단이 부른다하면 따라서 너나 내나의 개체 각자가 아니냐고 도산 선생은 자기가 부르고 자기가 대답한 자니 선생은 집이 가난하여 동냥글을 배우는 유년시대부터 어린 동무를 인도하기 시작하는 천부의 지능과 성격이 있음으로 출생으로 임종까지의 철모르는 해제의 시기를 제한 외에는 六십 평생 전부를 다 인도자의 책임에 바친 것이다. 차홉다. 선생은 사업의 중도에 당신의 말로를 지으셨으니 인도자의 일생은 비극이면서도 낙천적이요 낙천적이면서도 고난 뿐이다. 인도자의 자격은 사업의 성공 여부에 있지 않고 오직 그 심리 여하에 있나니 한번 그 마음에 의를 위하여 응한 것이면 평생 불변하는 자이다. 그럼으로 천장만애가 도리어 배우는 과정이요 십생九사가 모두 다 일하는 시간이요 성공여부는 시세의 리불리에 맡길 뿐이다. 어떤 인도자에게나 이것이 아마 천측인가 한다. 교육가도 그러하고 참모가나 군략가도 그러하고 혁명가도 그러하다. 일례를 들자면 멀리 찾을 것 없이 우리의 이웃인 지나 고금사를 삭구하여보자. 다소간 부동한 경우는 있지만은 거의 다 성공 전에 갔나니 중니도 성공 전에 갔고 공명도 성공전에 갔고 일선도 성공 전에 갔고 도산도 또한 성공전에 갔다. 그러나 중니가 감에는 증묵이 계속하고 공명이 감에는 강유가 대신하고 일선이 감에는 개석이 왔거늘 도산이 감에는 아-이을 자 그 누구뇨! 동지 적군 누구나 대답하라. 주저말고 대답하라. 지금은 기회가 가까워지니 만큼 인도자를 요구됨도 제일 급무이다. 선생의 서세후에 선생의 친우인 맥쿤 박사의 조문중에 「시기가 성숙할 때에 거인이 갔다」하는 말씀과 유동열 씨의 애도사 중에 「지금은 선생이 혁명을 요구함보다 혁명이 선생을 요구한다」하는 말씀인 즉 우리의 부르짖음과 일치되는 말씀들이다. 우리는 이에 대하여 황송과 부끄럼과 번민에 쌓여서 발광적 부르짖음을 시작함이다. 다시 묻노니 동지 제군 누가 그 대답할 자뇨? 또 다시 말씀하노니 동지 제군 우리가 이러한 번민을 만날 때에 다만 일시적 열광에 멎지 말고 만일의 실제에 나아가야 하겠고 그러려면 무슨 별일종의 용맹과 또한 가일층의 과감으로 평상에 처한 환경을 초월한 연후에야 될 것이지 그 환경안에 그대로 앉아서 뛰어넘을 용감이 없다 하면 비록 일보의 실제엔들 어찌 나아감을 얻으리오. 별문제 같으나 만일 세상 사람들을 성인, 영웅, 범부 이 세가지로 나눈다 하면 우리는 어떤 지위의 인물일까 한 사람의 말로 단언하기는 여하하나 제일 가깝게 비하자면 제三지위에 처하였다고 생각한다. 만일 그렇다 하면 우리는 범부이다. 범부라 하면 범부는 어떤 격을 가진 자일까? 조금 달리 말하면 범부는 보통 심리를 가진 보통사람이다. 그럼에도 귀한 사람도 그 심리가 보통이면 범부이요 천한 사람도 그 심리가 보통이면 범부이요. 부한 사람도 그러하고 빈한 사람도 그러하고 유식한 사람도 그러하고 무식한 사람도 그러하며 강한 사람도 그러하고 약한 사람도 그러하여 범부의 심리로 만은 귀천, 빈부, 유무식, 강약등에 대하여 하등의 계단이나 구별도 없고 다만 어제나 오늘이나 심상히 지날 뿐이요 또한 이 일이나 저 일이나 등한하게 보는 자다. 그렇다고 욕망이 없지 않으며 또한 분투하며 그렇다고 사회를 반대하지 않으며 또한 찬성한다. 이야말로 무장 공자적 호인이요 유지인사적 몰각자다. 그런즉 이 무슨 까닭일까? 이는 다만 그 심리가 고상적 활용을 잃고 보수에 멎은 까닭이다. 이에 다시 범부의 심리를 다른 말로 갱론한다면 성인의 지위에 오르기는 불능하나 성인의 도리를 즐김으로 성인을 배울수도 있으며 또한 향상할 변역성이 있음으로 영웅이 되기에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변천하는 자가 드물고 변천할 지라도 그 시기가 더딘 것은 범부는 범사에 사를 먼저하고 공을 후로하여 의에 나아가는 애착성이 적음으로 다만 진일보 퇴일보로 자기가 현시에 처해 있는 그 환경 안에서만 배회하는 까닭에 지척에 이로가 있으되 얻어 어행하지 못함은 이는 찾을 수 없다 함이요 월편에 복문이 보이되 들어가기를 기탄함은 저는 너무 멀다함이라. 선자는 허위의 길에 미혹 되여 신의에 정로를 잃음이요 후자는 겁라의 옥에 침륜되여 용감의 비밀을 깨치지 못 하나니 이것이 우리 범부의 심리이다. 제군 우리는 심리학자도 아니요 유심론가도 아님에 이상 담론이 혹 망언이 아닌지 미안하나 성인이 능히 성인이라면 범부도 또한 범부를 능히 할 것이 그다지 억측은 아닐 것 같다. 그런즉 범부의 심리에 대한 결론을 말하면 범부는 아는 자이지 모르는 자가 아니며 알고도 용감의 부족으로 행치 못하는 자이지 몰라서 행치 못하는 천치가 아니며, 또한 알고도 짐짓 행치 않는 고집쟁이도 아니다. 이만하면 범부의 심리 즉 우리의 심리를 우리가 서로 알 것이다. 그렇다 하면 인도자란 어떤 지위에 처한 자냐 인도자는 어느 한 지위만을 가진 자가 아니요 차라리 一, 二, 三, 지위를 다 가졌다 함이 오히려 가까운 말이다. 왜 그러냐 하면 성인도 인도자요 영웅도 인도자요 범부도 역시 인도가 될 수 있는 까닭이다. 성인은 도덕만을 목적하는 인도자며 영웅도 역시 도덕으로 터를 삼되 어떠한 경우에는 설혹 도덕에 위반이 있을지라도 사업에만을 표준하는 인도자인데 차 양자는 다 천부의 지능이 있음으로 누가 부르기 전에 자현하는 자들 임에 우리는 다만 속히 출현되길 기다릴 뿐이오. 이에 우리가 부르는 인도자는 성인의 도덕만을 배우고자 하는 자도 그 사람이며 영웅의 사업만을 배우고자 하는 자도 그 사람이며 양자를 아울러 배우고져 하는 자는 더욱 그 사람이다. 다시 말하면 간단 없는 수련으로써 제二 천부성을 배워 얻는 즉 범부의 환경을 초월한 자이다. 단우 제군 지금 흥사단의 이 부름이 응당 있어야 될 것이고 우리도 대답할 예비를 하여야 할 것인데 이 예비시간은 정녕코 오늘로써 시작 할 것이지 결단코 내일로 밀지 못 할것이다. 이때까지 예비못된 일을 또다시 내일로 연기한다 하면 이야 말로 백년 三만 六천 일이 모두 다 내일이 아니랴. 그런즉 우리는 오늘 이 부름에 대답은 곧 못할 지라도 대답을 예비하는 방식에 대하여 새 약속을 세웁시다. 一, 현시 환경을 뚸어넘는 과감성을 가지자. 「해야만 할 일이요 하면 된다는」 一, 도산 선생의 유훈을 공부하자. 「일단 문답을 중심으로 하고 대소사에 대한 선생의 언어, 동작, 교제, 처리 등을 생각나는 대로 내가 행하는 실지에 체험하면서」 一, 일을 행하기 전에 반성을 먼저하자. 「남을 말하고자 하거나 남의 원망을 만날 때와 같은 모든 일에」 一, 정신의무와 물질의무를 누락 없이 실천하자. 「간부 서무를 각자 조급하며 부르고 응함이 영통하기 위하여」 이상 四조는 우리가 모르던 새조건이 아니요 단 행하자는 새 약속이며 또 어찌 이 몇가지 뿐이리요 만은 우선 이 네가지 약속으로써 과정을 삼아 노력에 노력을 더하고 분투에 분투를 더하여 옛습관에서 떠나서 새습관을 짓고 새습관으로 말미암아 화경을 초월한 제二천부성을 가진 자가 되여 각각 그 재격의 순서를 따라 친구사이에 인도자가 되고 가정에 인도자가 되고 이웃에 인도자가 되여 보일보 나아감으로써 이 부름에 응답이 속히 있기를 기대하노라.끝

    4999 동지여러분에게[차리석](『흥사단보』 1938.6・7)

    우리는 이제 어진 목자, 참된 스승을 잃었습니다. 우리를 인도하여 주시던, 즉 하늘같이 믿던 어른을 잃었으니 우리는 장차 어찌하오리까? 우리를 두고 가신 선생님, 민족대업을 마치지 못하고 가신 선생님-그 가시는 마음이 어떠 하였겠습니까? 아- 이를 어찌합니까? 앞이 아득할 뿐이웨다. 그래도 선생님은 행여나 우리가 그 뜻을 이어주실 거라고 희미하게 나마 기대하셨을 것이외다. 아- 우리들-! 우리는 어찌하리까. 우리가 돌아가신 선생님의 그 기대하신 뜻을 저버리지 아니하여야 할 것이 아닙니까? 그러하외다.우리가 불초하나마 선생님의 뜻을 이어드려야 선생님이 구천에서 근심을 놓으실 것이외다. 이어봅시다. 우리가 생명을 마칠 때까지…. 우리가 생명을 마치게 되면 또 다른 사람이 뒤를 잇도록 하여 봅시다. 생각컨대 지금 국내에 있는 동지들은 전부가 원수의 손에 잡혀있고 이 원동에 있는 동지들은 각산 분리가 되고 오직 미주에 있는 동지만이 여전하리라고 믿어집니다. 선생님은 구천에서도 우리와 함께 들어 맹세한 그 손을 내리지 아니하리다. 그러니 우리가 그 손을 내려서는 않되겠습니다. 적어도 우리 민족을 우리의 손으로 다시 살려 내자고 맹약한 것이 아닙니까? 그러하외다. 아직 이 마음이 진정되지 아니하고 눈물이 앞을 가리우는 중에서 저의 생각의 절반은 선생님이 누워 계신 그곳 선생님의 영령이 가서 계신 그 곳에 있고, 남은 절반은 미주에 계신 동지 여러분에게 가서 있으면서 이 글을 마치나이다.

    5000 도산선생추도가[주요한](『흥사단보』 1938.8-10)

    一. 사람마다 가는 길을 아니 가든 못하여도 그리 쉬이 가실 줄은 뜻하옵지 않았더니 하신 일도 크고 높고 남긴 자취 뚜렷하나 하실 일도 깊고 많아 물과 산과 같사어늘二. 그의 빛이 밝음으로 어둔 땅을 비추더니 그의 소리 맑음으로 자는 무리 깨우더니 맡은 일을 누구에게 맡기시고 가시었나 길모르는 어린 우리 어이 두고 가시었나三. 강남 하늘 궂은 비는 나라 위해 떠신 눈물 새벽 서리 찬 달빛은 거룩하온 말씀인 듯 몹쓸 바람 눈 속에도 뿌린 씨앗 살았으니 바다 안팎 마음밭에 자리마다 엄돋우리四. 용사네의 가슴 안에 주신 뜨거움 끓어 올라 님의 집에 꽃피올 날 머지 않아 다다르리 에시던 길 낮 같으니 자취 밟아 걸으리라 두신 말씀 맘에 심어 물림 없이 나가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