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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5001 통상단우가 되난 오날의 감상[조원우](『흥사단보』 1938.11・12)

    「이 글은 지난 달 단우회 석상에서 통상단우 서약을 행한 동지 조군이 이사부에 보낸 편지인데 여러 동지들로 더불어 같이 읽기 위하여 이에 기재함이니 여러 벗들은 잘 읽고 좋은 동지 한분 더 얻음을 기뻐하자.」 기자 단우가 된 오늘에 단제 자신이 본단에 대한 전후 의리상 관계를 생각하니 본단의 목적을 이해하며 애호하는 마음은 별로 다름이 없으나 전에는 방관자의 지위에서 앙모할 뿐이요 입단한 오늘부터는 본단에 대한 모든 의무를 몸소 당부하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향자 고 도산 선생이 원수의 감수를 피하여 미국으로 돌아오신 후에 선생께서 중가주(중부 캘리포니아)를 심방하실 때에 선생을 모셔 담화하다가 선생께 묻기를 오늘 형편으로는 신민회가 회체를 보전하기 어려우니 전에 독립 협회가 부상의 작대 바람에 해산되 듯하지 않으리까 하니 선생이 적이 묵묵하시더니 말씀하시기를 신민회로 말하면 본시 이상이 있는 학식 계급으로 시작하였으니 형식으로는 파산을 당하나 정신으로는 늘 계속할 터이오 그런고로 나도 미주에 유하는 동안에 그 정신을 계속하기 위하여 무슨 모양으로든지 정신을 수양하는 기관을 조직하여 일로써 우리 민족의 독립 운동을 계속하고져 하노라 하고 말씀하신 것이 지금껏 머리에 기억됩니다. 그 후에 선생의 예언대로 본단이 성립되니 그것보고 앙모하는 마음은 비할 수 없었지오 만은 당시 본 단우 사정으로 말하면 여러방면으로 본단에 대한 의무를 감당치 못할 형편으로 인하여 몸소 참가하여 여러 동지들과 같이 동고동락치는 못하였으나 본단의 목적을 앙모하며 여러 동지들을 경애하기를 마지 아니 하였나이다. 그런데 이번 돌연히 입단을 청원한 원인은 향일 도산 선생의 별세하신 부음을 듣고 극도의 비분한 자극을 받음으로 선생께서 새시에 전수한 정신의 명령을 응하여 여러 동지들로 더불어 같이 본단의 목적을 관철함에 한분자가 되고져 함이올시다. 단우가 된 오늘날에 전후 본단에 대한 각오를 말씀하오면 전에는 단내에 좋은 일이 있으면 기뻐하며 앙모할 뿐이요 단우 중에 혹 불미한 일이 들릴 때에는 그 불행함을 한갖 탄식할 따름이었으나 오늘부터는 모든 일에 직접으로 책임감이 있어 본단사업에 대하여 나의 적은 힘이라도 요구하는 때에는 희생의 감이 있고 단우에게 대하여는 차례로 지기우는 막론하고 설혹 몇번의 예식적 문안에 불과한 이나 혹 아직도 사면치 못한 단우라도 저들은 곧 나와 같이 본단의 二대강령으로써 본단의 목적을 달하기로 손을 들고 맹약한 동지라하여 친애의 각오가 절실하여지며 또한 이제부터는 더욱 조심하여 여러 동지가 단제를 동지로 인증한 것을 후회함이 없게 하며 본단의 강령을 의하여 맹약한대로 처신하여 본단 명의에 손되고 욕됨이 없도록 하고자 하오며 여러 동지들의 몸이 강건하오며 모든 사업에 재미 많이 보시기를 축수하여 그치나이다.

    5002 도산선생 추도회 외(『흥사단보』 1939.1・2)

    二십 六일 하오 二시에 이사부원 송종익 군의 사회로 고 안도산 선생 추도회를 열었다.도산 선생께서 금년三월 십일에 본국 경성에서 원수의 해를 받아 순국하신 후 본단으로서는 즉시 거애하고 일반 단우에게 三개월의 심상을 반포하였으며 각 지방 단우회로서는 각각 추도회를 거행하였으나, 본단의 대회는 도산 선생 서세 이후 처음이므로 금번 二십二회 대회에는 추도의 경의를 표하기 위하여 희락회를 폐지하고 추도회로 대신하여 선생의 유덕과 유업을 다시 추모함으로써 본단의 주의 정신을 한번 다시 더 깊이 인식하기로 하였다. 주석의 간곡한 개회사가 있은 후 김성락 군의 반주로 김종옥 여사가 선생의 지으신 「우리 나라로다」란 노래를 독창하고 이어 이경선 군이 등단하여 약 三십분간 추도사를 진술하고 대회 서기 신두식 군이 지성 지방 단우회의 추도문을 낭독한 후 二십 六일 하오 三시에 정회하다.

    5003 도산선생서세一주년 소상제일을 당하야(『흥사단보」1939.3-6)

    뜻 없는 세월은 사정없이 흘러서 불 같은 고난 중에 부대끼는 二천만 남녀를 차마 잊지 못하시사 가슴에 넘치는 한을 품고 무도한 원수의 노옥에서 선생의 가신 날이 벌써 一년이 갔습니다. 잔인한 원수의 가혹한 계엄으로 선생의 묘문에는 인적을 끊었음에 성긴 가시 거친 풀이 묘상에 덮혔다던 하거늘 자비의 춘신만이 오히려 선생을 어여삐보사 황목공산에 꽃수레를 보내셨다니 슬프다! 선생의 외로운 혼은 지금 이를 보고 우스시는가 우리를 생각하여 울으시는가-. 선생은 이미 가시었도다. 영원한 곳으로! 그러나 과거 一년에 우리는 선생을 공석에서만 모신 것이 이미 五六차가 넘습니다. 어찌 그 뿐이리까. 종일토록 소망없는 길을 가되 앞이 캄캄하여 보이지 않는다고 낙망에 빠져 우는 저녁에 선생을 여러번 만나셨고, 도모하던 일이 그릇되여 평생의 정력이 허지로 돌아가는 때에나 나무를 지고 불을 찾아가는 길에서도 선생을 만나셨고, 게으름의 올무에 걸려 일어나지 못하는 시간, 거짓의 함정에 발길을 디디는 시간에도 선생을 뵈었습니다. 또는 조선사람으로 조선사람의 가해를 보는 시간, 자기의 주장을 펴고져 자기의 단체를 어지럽게 하는 시간에도 선생을 뵈었습니다. 원수의 악독이 동포에게 믿는 시간, 세계의 공리가 눈을 감는 시간에도, 소약국 민족이 악수를 청하며 동정의 우방이 후원을 허할 때에도 우리는 선생을 뵈었습니다. 영과 영이 고요히 접촉하는 시간에 감화가 있고 주의를 정하고 「애인 여기」의 활동을 일으키는 생물이라 하여 二천년 전에 가신 야소의 영생이 비로소 의미가 있나니 선생의 가신 지 一년 소상제일에 우리는 다시 마음에 굳게 작정하고 무실, 역행, 신의, 용감을 심폐에 심고, 입으로 외우고, 손과 발로 실천하여서 선생의 이상으로 용기있게 활동하는 투사가 되게하여 一년 전에 가신 선생의 영생을 광영이 가득한 우리 조선에 실현케하고 계속케하고 발전케함이 우리의 뜻이오 우리의 일이외다.

    5004 "『韓國志士小傳』[菅雪齋](獨立出版社|| 重慶|| 1939)"

    안창호(安昌浩), 자는 도산(島山)이다. 늑약(勒約) 이후에 만주(滿洲), 상해(上海), 미주(美洲) 등 각지에서 활동하였으며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여 혁명사업을 촉진하였다. 1919년 대혁명시기에 임시정부에 참가하였으며 국민대회를 소집하였으며 후에 한국독립당을 조직하였다. 윤봉길(尹奉吉) 사건이 발생한 후 그는 상해(上海)에서 혐의를 받아 체포되어 서울에 압송되었으며 감금형을 선고 받았다. 1938년 3월 10일에 옥중에서 병으로 인하여 돌아갔으며, 그때 나이는 61세였다.

    5005 안도산선생 대상 제문 외(『흥사단보』1940.3-6)

    三월 십일은 본단의 단부요 우리 민족의 영수 안도산 선생이 적에게 피해 순국 하신후 만二년 되는 대상일이올시다. 선생이 우리 민족의 인격 개조와 국권 광복을 위하여 일생을 국궁 진췌하시다가 그 뜻을 다 펴지 못하시고 그 사업을 우리에게 끼쳐주시고 먼저 가셨습니다. 그런고로 오늘 우리는 선생의 서세를 슬퍼하는 가운데 선생의 뒤를 잇기 위하여 선생의 생전의 철저한 주의 주장 및 위대한 인격 본령을 우러러 사모합니다. 삭고하오니 선생이 처음 산문에 나오실 때는 이조 말엽에 있어 조정이 탁란하고 국권이 방락 되었습니다. 당시 선생이 약관에 계셨지만은 때를 밝혀 보시고 금수강산이 귀족 정치에 단송되는 것을 분개하사 쾌재정에서 관료의 전횡을 통론하시고 국민 공치를 제창하시니 이것이 우리나라 민권 창도의 제일성이요 이로 부터 선생의 명성이 국내를 진동하였습니다. 다음 한성풍운에 들어오사 각 정당과 같이 국권 탈회를 동사하시는 가운데 근본적 병폐가 민족 사상 및 인격이 부패한 데 있는 것을 동실하시고 개연히 민족 개조의 뜻을 품으시고 드디어 대성학교를 창립하신 동시 우수 분자를 망라하여 청년학우회를 조직하여 우리 민족의 고유 도덕을 부식 하시고 아울러 신지식을 관수하시니 대개 선생은 일대 정치가요 일대 교육가이었습니다. 오호라 큰 집이 벌써 기울어 지도다. 외나무 작대기가 어찌 홀로 고이고 있으리오. 거국상하는 연작화당에 고식을 탐하며 허당부연에 국시를 정하지 못하고 원수는 제아전승 여위를 가져 한일 합명을 위협하거늘 선생이 대사가 이미 그릇된 것을 보시고 이에 「거국행」을 지어 갈 뜻을 말씀하시고 강화에서 목선을 타시고 중국으로 전왕하사 청도회의에서 당대준걸도 또한 큰 뜻이 없는 것을 보시고 감개무궁하사 수연히 홀로 떠나실 때에 나누어주는 황금을 좋은 말씀으로 사양하시니 대개 선생의 염결이 이같습니다. 선생은 그리로서 아령(러시아령) 각지를 만유하시고 미주 고택으로 돌아오시니 때는 一천九백십一년 가을이 올시다. 선생은 일찍이 미주에 오셔서 공립 협회에 창립자가 되셨고 이 때 다시 미주에 돌아오셔서 미주 한인 사회 광정에 노력하시더니 一천九백십二년에 큰 자극을 받으시고 이에서 의왕에 주장하시던 민족 개조를 다시 생각하시고 우리의 살 길은 여기 있는 것이라 하사 그 이듬해 곧 一천九백십三년 五월 십三일에 동지 십여인과 같이 흥사단을 창립하시고 무실, 역행, 신의, 용감의 四대 정신으로 건전한 인격을 짓고 신성한 단결을 이루어 우리민족의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하기로 투사 훈련의 수양주의를 세웠습니다. 선생의 밝혀 보신 바는 원수가 본래 우리민족의 약점을 타서 우리 민족을 속박하였으니 우리가 원수의 속박을 벗고 국권을 광복하려면 그 일이 먼저 우리 민족의 약점을 고치는데 있다는 것이올시다. 선생의 수양주의가 우리민족 부활의 진리가 되는 것이 금일 중국의 신생활 운동과 같지만은 우리민족 다수의 사상이 성공에 급하여 요행을 바라며 역항에 게을러 이 진리를 믿는 자가 적었습니다. 그 후 수년에 선생은 재미 동포와 감고를 같이 하시더니 一천九백십九년에 三一운동을 당하여 국민회의 사명을 띠시고 상해로 가서 내무총장을 취임하여 임시 정부 건설에 비로소 대계를 베푸시고 그 후 십여년 간을 상해에 계신 것은 차마 환란 동지를 떠나지 못하심이니 선생의 시종여일이 이와 같습니다. 一천九백三십一년 九一八사변(만주사변) 이후 선생이 시기가 온 것을 보시고 장차 생평장도를 펴기를 꾀하시더니 그 이듬해 四월 二십九일에 상해 법조계(프랑스 조계)에서 불행히 원수에게 피포하셨고 한국 대전 감옥에 삼년 금고를 입으셨고 그리고는 다시 오시지 못하시고 거금 三년 전 三월 십일에 마침내 원수의 해를 입어 순국하시니 아아! 선생의 일생은 간란 고통이요 분투 희생이올시다. 선생이 그 주의 주장의 실현을 위하여 일생에 가지시던 인격과 본령은 진실로 근세 우리 민족 가운데 위대한 인물이올시다. 그 생활로부터 범사에 평범과 실제를 힘쓰시고 하시는 일에 취미를 가지시고 낙심이 없으시며 사삭력은 계통이 있어 두야 불철하시고 몽혼에 매시니 대개 선생의 역행이 이와 같습니다. 대도관용은 늘 동포를 측은히 보시고 동지를 애호하사 아무런 그르침에도 일찍이 버리신 일이 없습니다. 이같은 자혜·인애는 사람으로 하여금 애연히 친할 수 있지마는 오직 불의를 미워하심에는 우뢰의 위험을 발하사 원수 이등박문이 세리로 달램을 거절하시고 정운복의 반복 무신을 꾸짖었으니 이것이 이른바 위무 불굴이요 부귀 불요이올시다.선생이 가신 후 三년 이래 우리 민족운동의 진상을 돌아보건대 모든 실패가 적의 침해보다 자체 부패에 있는 것이 많습니다. 허위 겁라와 교사 반복은 서로 면목을 망실하고 이로 말미암아 단결과 조직이 없고 전쟁은 아직 까지 동포 사회에 그칠 따름이니 요컨대 우리가 선생의 뜻을 이어 그 사업을 완성하여 우리 민족을 수화중에서 건져 내려면 반드시 선생주의를 실현한 연후에 있습니다. 선생이 일찌기 말씀하시대 「한 사람이라도 믿을 그 사람이 있어야 믿는 그 사람과 같이 일할수 있다」하셨으니 이 지리 환산하고 부패 문란한 가운데서 믿을 만한 사람을 얻으려면 우리가 먼저 무실 역행으로부터 신의 용감을 가져야 합니다. 우리가 늘 이를 힘쓰면 선생의 주의를 실현할 수 있고 우리 민족의 약점을 고쳐서 적의 속박을 벗고 국권을 광복할 수 있습니다. 오늘 대상을 당하여 참을 수 없이 동으로 바라보니 대보산에 봄빛이 저물었고 망우리에 석양이 비치었습니다. 다시 어디로 조차 선생의 성음 소모를 찾을 터인고 비량 감개가 끝이 없지만은 이같은 비상 시기에 있어 스스로 저상함이 선생의 바라시는 바가 아님으로 삼가 정신을 가다듬어 선생의 뜻을 이어 최후까지 분투 노력하기로 결심하고 이 글을 써서 천추에 계신 영령께 고하나이다.

    5006 도산선생탄신기념(『흥사단보』 1940.8-12)

    십一월 九일은 도산 선생의 탄생일이올시다. 우리는 이날에 선생의 생명을 사모합시다. 선생은 우리민족 가운데 위대한 인물이올시다. 그 위대는 고상한 이상과 평범한 실제를 갖추었습니다. 사람이 다만 고상한 이상만 가지고 평범한 실제가 없으면 이른바 그 이상은 공상이오 또 사람이 다만 평범한 실제를 주장하고 고상한 이상이 없으면 이른바 그 실제가 독선에 불과 하거늘 선생은 이 두가지를 아울러 가졌으므로 일찌기 우리 민중의 영도자가 되었습니다. 민중은 본래 평범합니다. 그 생활도 평범하고 습관도 평범하고 지식도 평범하니 평범한 실제가 아니면 민중을 영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평범한 민중도 바라는 것은 고상합니다. 나도 자유를 가지겠다는 것이 고상이오. 나도 남과 같이 살겠다는 것이 또한 고상이니 고상한 이상이 아니면 민중의 바라는 것을 이루어 줄 수 없는 것이 올시다. 이를 결속하여 말하면 대개 민족사업은 평범한 민중을 이끌어 고상한 지위에 두는 것이 최후의 성공이 올시다. 선생은 평범한 실제를 위하여 민중과 환란을 같이 하시고 또 고상한 이사의 실현을 위하여 분투를 쉬지 않으셨나니 아 아 선생의 일생은 국궁진췌로다. 이 날에 선생의 웃는 얼굴을 거의 뵈옵는 듯 이날에 선생의 경계하는 말씀을 거의 듣잡는 듯 우리의 사모가 더욱 간절합니다. 우리는 선생의 끼치신 자취를 밟아갑시다.

    5007 도산선생 六십六년 생신기념(『흥사단보」1944.11)

    이 가을을 당하여 여러분의 건강을 빕니다. 일전에 공문으로 각 지방 단우회에 통지하였음으로 지방 각 단우들은 다 아셨을 줄 믿거니와 十一월 九일은 우리가 가장 흠앙하는고 도산 안 선생의 六십六년 생신일입니다. 우리 동지들은 다 한마음으로 각각 성의를 다하여 이날을 의미있게 기념하실 줄로 믿습니다. 선생의 사십년 심력을 다하시던 일이 즉 우리 조선의 완전한 독립 자주와 우리 조선 사람의 영유한 생존 번영을 위함 뿐이외다. 이제 선생과 우리가 같이 바라던 조선의 독립 자주에 있어는 머지 아니하여 우리의 공적인 일본의 군벌이 몰락됨을 따라 아름다운 기회가 조선을 향하고 오는 듯 합니다. 우리가 이 무거운 노예의 속박을 벗고 흔쾌한 자유의 소리를 발하는 날을 우리 혼자 당할 때에 「산아래 심은 기장은 익었는데, 같이 가꾼 사람은 같이 먹지를 못하는 구나.」하는 농가의 과부의 설움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온 세상이 이 기쁨을 전하고 우리의 믿음이 이 날을 기다린 즉 실로 우리의 선열들의 눈물과 피로서 뿌려 주신 독립의 열매가 조선 강산에는 무르익은 듯 싶습니다. 이 때를 당한 우리 조선 사람이 해내와 해외에서 이를 추수하고자 하는 급한 마음은 없고 석양볕이 기울어진 산언덕에 서고 뒷짐지고 한가한 휘파람만 불고 있는 것을 보고 팔을 걷고 나설 동지들도 있으리라고 믿습니다. 선생의 생신은 우리가 작년에 기념하였고 재작년에도 기념하였습니다마는 금년에는 더욱 의기있게 기념하자함은 우리에게 오는 시기와 우리의 요하는 사정이 다른 해와 다른 관계입니다. 어느 나라 사람들이나 그네가 가진 어느 단체이나 어느 군중이나 위공이 있거나 사표가 되여 만한 위인의 생신을 기념한다는 말을 우리는 가끔 듣습니다. 그 본의가 단순히 전공을 찬양만 한다거나 추모의 정에만 한한다고 하면 이모임은 형식 뿐이오 아무 효과는 없을 것입니다. 그 보다 더 깊게 위인을 추모하는 감응으로 나 자신이 위인의 심성을 배우며 위력을 체하기를 힘쓸 뿐더러 후생을 장려하여 장래에 많은 위공자를 지어내자 함이 이 기념의 골자이라고 보아서 특별히 일만은 금년, 소망만은 금년에 각각 의미 깊게 지키는 결과로 조령의 부름에 응하고 나서는 수많은 도산이 있기를 바라는 바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가신 선생을 기념하면서 선생의 무슨 자취를 추적하려 하십니까?一 선생의 용맹스러운 자취입니다. 지금으로 五십년 전 조선의 정사는 완전한 집정자의 전제로 하여 왔습니다. 아무 세력없는 평민으로는 어느 집정자를 비방하거나 탄핵하지 못하고 무슨 억울이나 불평을 삼키고 오직 유구무언하는 것만이 유일한 구명도생하는 방법임에도 불구하고 十七세 소년으로 탐관오리의 악정을 여지 없이 탄핵하여 전성중을 떨게 하던 그 용기를 배우고져 합니다. 사람마다 젖어온 풍속 습관에 애착하여 단연히 이것을 제거하기는 용자로도 어려운 일이거늘 선생이 홀로 五백년 적폐인 허위 나약 교사 반복의 명종하는 악습을 혁명하고 무실, 역행, 신의, 용감의 신기운을 우리에게 부어주신 그 용기를 우리가 배우고자 합니다. 二 선생의 결심하던 자취 선생이 二十 세 미만에 한 번 마음과 몸을 민족 발전에 허하신 후에 구 한국 시대에 집정자들로부터 우리 어깨에 노예의 멍에를 메우는 일본의 위정가에 미치기까지 금전으로 달래고 관작으로 유인하되 처음 결심을 어느 때나 변한 적이 있습니까? 천백가지 경영하는 일이 온전히 실패할 때에 처음 결심에 방향을 변한 때가 있습니까? 같이 경영하던 동지가 나를 배반하고 나의 길을 막을 때에 원망이나 낙심한 때가 있습니까? 우리는 선생의 이 결심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三 선생의 청렴한 자취 선생의 평생 생활은 몹시 빈곤하였습니다. 三순에 九식도 넉넉히 못하여 가정에 기한이 심하다 하여 언제나 몸과 마음을 사영에 던졌습니까? 공사간 불의한 금전에 한 때에나 신용을 잃은 때가 있습니까? 우리가 선생의 이 청렴을 배워야 하겠습니다. 四 선생의 관용하신 자취 선생의 마음은 바다같이 넓습니다. 가는 길을 막는 자가 있을 때에 그를 물리치지 아니하고 그 길을 에워가던 것이 선생의 행적입니다. 대인은 원수를 알고 능히 용서한다 하였으나 선생은 원수부터 찾지도 아니하고 원수라는 말부터 인증치 않았습니다. 우리는 선생의 이 발걸음을 밟고져 합니다. 세계의 대세가 조선의 독립을 성숙케 하며 선열의 성령이 추수할 일꾼을 부르는 이 때에 일을 따라 나가려는 동지들은 이 몇 가지 성실 일꾼의 자격으로는 결할 수 없어 선인의 거룩한 발자취를 오늘에 다시 배우려는 각오로써 이날을 기념하며 도산의 바라는 영을 위로합시다.

    5008 Random Thought in English[徐載弼]원고(1938)

    안창호(Mr. Ahn Chang-ho) 씨의 너무 이른 죽음은 한국에 크나 큰 손실입니다. 저는 그의 동료들 중에서 그가 출중한 사람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저와 다른 많은 분들은 그의 비극적 죽음에 통렬히 슬퍼하고 있습니다. 저는 특히나 조직에 대한 그의 재능과 모든 다양한 환경 하에서도 친구들을 사귀는 그의 능력을 존경했습니다. 그의 성실성에 대한 신뢰와 그의 활동에 대한 감탄이 있었기에 그는 그런 친구들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저는 근래에 그의 동료들 중에서 그런 신뢰를 받는 다른 한국인을 보지 못했습니다. 그가 국가적 차원에서 이 능력을 이용할 기회가 없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몇몇 고국을 떠난 한국인들과 그가 캘리포니아에서 이루어낸 것들은, 만일 기회만 있었다면 한국에서 더 대단한 지도력을 그가 보여줄 수 있었다는 것을 확인시켜 주었습니다. 그는 다른 민족들 사이에서도 때때로 발견되는 보기 드문 성격의 소유자로, 고귀한 신분으로 자라지는 않았지만 나중에 그 동포들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아브라함 링컨(Abraham Lincoln)은 보잘 것 없는 가문에서 태어나 가난 속에서 자란 위대한 지도자 중 한 명이었습니다.안창호 씨가 링컨과 같은 기회가 있었다면 세상에 더 잘 알려졌을 텐데 말입니다.저와 안창호 씨와의 관계는 꾸준하지도 그리 친밀한 것도 아니었지만, 저는 그가 동부의 주들을 그가 방문했을 때 몇 번 그와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누었습니다. 그는 고귀한 이상을 가진 남자로서 저에게 감명을 주었고, 동시에 방대한 실천적 지식과 상식의 소유자였습니다. 그의 생각은 좁고 사소한 것이 아니었으며 자신과 다른 견해를 가진 사람에 대해서도 매우 관대했습니다.그것은 저를 매우 기쁘게 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관용이나 타협심을 가진 사람을 거의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의 마음은 자신이 신뢰하는 사람이 주는 제안에 대해서 열려있었고, 그는 솔직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요청되는 경우에도 자신의 생각을 표현하는 것에 두려움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그의 애국심에 대한 진실성과 그의 보호 아래 있는 젊은이들의 복지를 위한 헌신은 그의 적들조차도 남몰래 존경했다는 평가가 있었습니다. 세계 정세에 대한 그의 예리한 통찰력과 미국과 극동에서 얻은 경험은 대학교육을 받지 못한 그의 약점을 충분히 보완하고도 남았습니다. 그는 경험 대학(University of Experience)의 대학원생이었던 것입니다.저는 안창호 씨에게 캘리포니아나 동양에서 몇 가지 사업을 해 보라고 제안한 적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저는 그가 자신의 능력과 나무랄 데 없는 성실성, 훌륭한 인품으로 성공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싫다고 대답했으며, 40년 전에 한국에서 있었던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에서 제 강의을 들은 후에 한국 재건 작업에 자신의 일생을 바치기로 맹세했다고 말했습니다. 그는 1년 동안 혹은 제가 그를 알지 못한 기간에도 저에게 자신을 알리지 않고 제 강의를 들었던 것 같습니다. 1896년에서 1898년 사이에 한국에서 했던 3년 동안의 제가 뿌린 교육의 씨앗들은 많은 젊은이들의 마음 속에 뿌리를 내린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안창호의 죽음에 대해 들었을 때, 저는 여하튼 한국에서 일어난 또 다른 순교자의 죽음에 제가 책임이 있다고 혼자 생각했습니다. 안창호씨는 조국을 위해 괴로워했고 죽었습니다. 그는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 속에서 안창호 씨는 훌륭한 조직가였고, 그가 영향을 미친 단체들은 만족스럽게 설립되었습니다. 하나는 로스 앤젤레스에 있는 대한인국민회(The Korean National Association)며, 다른 하나는 한국인 전문학교(The Korean Academy)입니다. 이것은 특히나 기쁜 일입니다. 왜냐하면 과거에 형성된 많은 다른 단체들은 이런저런 이유로 모두 사라졌고, 최소한 저는 그들의 활동에 대해 듣지를 못했기 때문입니다. 활동을한 유일한 다른 단체는 미국에서 가장 칭찬할 만한 일을 했던 북미 한국인 학생연대(the Korean Student Federation of North America)였습니다. 하지만 이 단체의 대륙간 서비스는 대부분 외국 학생들 사이들에게 호의적인 미국인 위원회(the American Committee) 덕택이었습니다. 물질적이고도 정신적인 원조가 없었다면…(원본판독불가)…. 안창호 씨가 아버지 노릇을 했던 두 단체들은 그를 높이 추앙할 것이며, 그가 다른 회원들과 함께 남긴 잊을 수 없는 감동은 그가 직접 그 단체들과 함께 있는 것처럼 그들이 계속 나아가도록 꾸준히 그들을 격려할 것입니다. 어떠한 창조적인 영향도 그것을 망치고 그것을 얻기 위해 받아들여지지 않는다면, 건물의 기초가 탄탄할 때 재건이 될 것입니다.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이 안창호씨를 기념하기에 가장 좋은 방법은 그가 설립을 도왔던 이 단체들을 통해 그의 사상을 계속 살아 숨쉬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우리는 한국이, 의심할 바 없이 그 시대 사람들보다 후손들에게서 더 높이 평가를 받을 그런 위대한 영혼을 낳았다는 것에 자부심을 느낍니다. 한 개인의 일생을 훑어보는 것은 책 한 권을 읽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페이지를 넘긴 후의 최종적인 감동은 그 책의 가치를 결정짓습니다. 안창호씨의 일생은 결과와 상관없이 선하고 숭고한 것을 따르기 위한 확고한 결심은 저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습니다. 만일 다른 사람들이 그에게서 내가 받았던 감동을 똑같이 받았다면 안창호씨는 정말 유익한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5009 "故鳥山安昌浩同志靈弔辭詩[趙素昻](『韓國獨立運動史資集』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6) ; 悼安島山(『기러기』1986.10 ; 번역)"

    維戊寅 4月 15日, 韓國 獨立黨 同人, 謹告于故 島山 安昌浩, 同志之靈曰,立志報國, 始于建陽, 俊材宏辯, 模楷一方, 憫時病俗, 慨然出彊. 混跡負戴, 西走檀香, 十年刻苦, 重返故鄕, 登壇怒吼, 萬人如狂. 建校設會, 日就月將, 新民蔚興, 大成鏗鏘, 隻手扶廈, 龍戰玄黃.爰及庚戌, 國破君亡, 滿廷狐狸, 遍地豺狼, 志士去國, 天日無光. 敵兵搜捕, 公亦遠航, 爲國興士, 學颱復颺, 歐戰告迄, 海陸滄案. 己未三月, 槿花重芳, 建府立院, 集我將相, 群雄聚首, 公始升堂. 中外多士, 拱衛中央, 根幹未固, 斧斤有戕, 獨立大業, 非黨不彰. 百日風雪, 夙夜靡遑, 樹我黨義, 立我黨綱, 基本確立, 旗幟堂堂. 自公入獄, 黨失倚淫, 離合隨勢, 是非成章, 人散力竭, 統一渺茫. 吳山楚水, 顚倒無常, 嗚呼賚志, 胡然而喪, 國仇未報, 剝我禎祥. 彼岸則遠, 奪我艅艎, 敵獄未破, 奄至束纊, 謦咳在耳, 典型難忘. 三韓抱澤, 飮泣于湘, 如見左右, 偉靈彷徨, 謹掬血淚, 遙奠椒漿.

    5010 島山千古[李承晩](1938):

    처자(妻子)는 하늘가에 울고 친우(親友)는 바다저편에서 놀라니 나라 멀리있는 사람들도 통곡하고 눈물을 흘리며 강도 따라서 울 따름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