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上海假政府ニ對スル取締情況[1922. 12. 18](『日本外交史料館資料』) |
상해는 지세(地勢) 상 소위 배일(排日) 조선인이 집합하기 쉬운 곳으로, 현재의 잠정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출현 전 이미 신규식(申奎植), 박은식(朴殷植) 등의 주창에 의하여 대정 4년 중 대동한국당이라는 배일 결사를 조직한 이래 불령(不逞, 당국의 지시를 따르지 않는 것) 운동 기관이 점차 정비되었다. 대정 8년 1월 대한민국 임시정부 조직의 의사가 성숙되어, 동 6월 안창호(安昌浩)가 미국에서 돌아와 이 결사를 성립하게 되었다. 원래부터 내용이 극히 빈약한 것은 물론 그들이 칭하는 바와 같이 조선민중의 대표기관은 아니다. 또한 설립 이래 항상 내분이 끊이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이에 배척을 시도하는 자가 있다. 거기에 최근에는 자금 모금이 두절되고 재정의 궁핍이 극에 달하였으며, 소위 정부의 신임을 얻은 인물은 왕왕 사기로 재물을 얻는 범행을 하기에 이른 상태다. 현재 중외(中外)의 신망이 추락하여 고성낙일(孤城落日)이며, 또한 이전의 모양이 없으나 그 성립 시기 당초에 있어 대세에 소통하지 않는 다수 조선인의 경향으로, 이미 조선은 일본의 통치를 떠나 현실적으로 독립한 것처럼 착각하고 있다. 또한 이를 위해 자금 및 물품을 증여하고 또는 자제를 동지(同地)에 보내는 등 조선 내지의 치안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제국이 조선 통치를 하는데 우려가 되므로 상해에 있는 야마자키(山崎) 총영사는 위 결사가 성립된 후, 곧바로(대정 8년 10월) 동 단체의 해산 및 그 기관지인 ′독립신문′의 발행을 금지할 것을 동지(同地) 프랑스 관청에 요구하였다.[본 성(省)은 재 프랑스 마츠이(松井)대사에 대하여 프랑스 정부에서도 이 결사의 해산 및 그 기관지 발행을 금지할 것을 상해에 있는 동국(同國) 관청에 조달하도록 교섭하였는 바 동국 정부는 우리 측의 신청을 양해하여 호의적으로 그 요청을 허락하고 즉시 위의 뜻을 상해 동국 관헌(官憲)에 전보로 전하였다.] 그 결과 프랑스 관헌은 10월 24일 위 임시정부의 해산을 명하고 동시에 기관지인 ′독립신문(조선어 신문)′의 발행을 금지하고 그 인쇄소를 폐쇄하였다. 프랑스 관헌의 처분은 제국의 요구에 대한 일편의 표면적인 사령(辭令)에 지나지 않은 듯하며 일설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 관헌은 위 해산 명령을 발하기 전날 미리 이를 조선인 관계자에게 내시(內示)하여 두었다고 한다. 그들은 공연히 사무소의 문패를 걸지 않았다고 하나 소위 정부 각 부를 각 소에 분치하고 여전히 불령 행동을 계속하였을 뿐만 아니라, 얼마 안되어 그 기관지인 ′독립신문′ 및 ′신대한(新大韓)′이라는 신문을 새로 발행하기에 이르렀다. 당시 프랑스 관헌의 처분에 대한 조선인 측의 감상을 종합하면, 종교와 관계없이 상류계급 조선인은 당초부터 임시정부의 독립운동이 성공하지 못하고 끝날 것을 예상하였으며, 그들 일당의 망동에 의하여 선량한 조선인은 경제적으로 많은 손해를 볼 것이다. 또한 장래의 생활상 적지 않게 불안한 생각을 품을 것이다. 위 프랑스 관헌의 처분을 듣고 일시 안심을 하는 상태이나,일부 기독교 신자들은 종래 정치범이 타국에 망명하여 정치적 운동을 하는 것은 원래부터 있은 관례로서 국제 사이에서도 이들에 대하여 억압 또는 간섭을 가하는 실례가 없다며, 프랑스 관헌은 이 국제 관례를 무시하고 임시정부를 해산하고 요즈음에는 정치범인 윤원(尹愿) 외 1명을 강도범으로 체포하고 이를 일본관헌에 인도한 등 실로 그 조치가 온당(穩當)함을 잃은 것이다고 한다. 이는 국제연맹 회의의 문제로 미국에서 제의하는 것으로 하여야 한다고 공망(空望) 한다. 또한 일본은 임시정부의 해산에 의하여 국난을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열강은 도리어 우리에게 동정, 향후 일본의 외교상 큰 타격을 줄 것이라고 자기 위안을 하고 있다고 한다.그러나 조선 독립운동은 미국의 원조에 의하여 문화정책으로 이에 맞춰야 한다고 주창하였으며, 이승만(李承晩), 안창호(安昌浩) 등 소위 문치파(文治派)는 이동휘(李同輝) 일파 무단파(武斷派)의 실력에 압도된 듯 하나, 그 운동이 점차 위험화 하고 있다. 대정 9년 2월 8일 및 동년 4월 29일 상해 프랑스 조계에서 그들이 폭열탄 제조 중 실수로 대폭발을 하여 수명의 조선인 사상자가 생겼으며, 프랑스 관헌은 자발적으로 이에 조사 단속을 위하여 경찰관을 파견하였다. 현장을 검사한 동국(同國) 순사 등 3명은 잔류 폭탄의 폭발에 의하여 부상을 당하였으며 폭탄 및 권총 약간을 압수하였다. 또한 위 범죄 혐의자를 구속한 사건이 있으며 동국 관헌에서도 그들 불령자의 행동에 대하여 위험이 있는 자라는 것을 인식하기에 이르렀다.동 년 6월 프랑스 관헌은 다시 ′독립신문′의 발행을 금지하였으나 이 신문은 동년 12월 18일부터 회복하여 계속 발행하였다. 우리 야마자키(山崎) 총영사는 그 발행소의 소재를 내사(內査)하여 이를 돌연히 금지하고 오는 10년 1월 6일로 이를 프랑스 총영사에게 보이고 동소(同所)에 폐쇄 및 활자기계 등을 압수할 것을 요구하였다. 프랑스 경찰관은 동소를 검사한 결과 동 가옥 내에는 인쇄기구 등을 발견하였으나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 같으며 또한, 독립신문지의 형적(形跡)을 인정할 수 없으므로 몰수할 수 있는 충분한 근거가 없다고 생각하고 있으나 아직 동 소를 기밀로 감시하는 모양이다. 경찰 관헌에 명령해 1월 8일 프랑스 총영사가 야마자키(山崎) 총영사에게 회답을 하였다. 우리 측으로부터 프랑스 관헌에 대하여 단속할 것을 요구한 날 오후, 프랑스 경찰은 동지(同紙) 인쇄소와 관계있는 조선인과 중국인을 소환하여 심문하였다. 이에 조선인 등은 작년 동지(同紙) 금지 이래 상해에서 인쇄한 것이 아니라 그 후 대부분 항주 부근에서 인쇄하였다고 변명하고 아무 때나 그 가택을 수색하여도 괜찮다고 서술하였다. 그래서, 프랑스 경찰은 그 이튿날 아침 임시검사를 하였으며, 그 때까지의 사이에 전에 서술한 프랑스 관헌 회답내용과 같은 상태로 가장하고 완전하게 증거 소멸을 하였다는 설이 있다. 그들은 의연히 동지(同紙)의 계속 발행을 실행(특히 일시 발행을 중지한 적이 있으나 재정 곤란에 의해 휴간을 한 것 같다) 하는 상태이므로 야마자키(山崎) 총영사는 다시 프랑스 관청의 주의를 재촉하여 엄격하게 동지의 발행을 중지시키를 신청하였다. 동년 6월 9일 프랑스 경찰이 현장에 임시 검사를 하여 인쇄기계를 몰수하고 동소(同所)를 폐쇄한 후 프랑스 총영사로부터 회답이 왔다.그 후, 일시 그 자취를 감추었으나 동년 10월 5일 다시 추호(追號) 발행을 하였으며(10월 5일 제110호 및 제111호를 발행하였으며 그 제110호는 8월 15일 발행한 것처럼 가장하였으나 사실은 위 두 호는 모두 10월 5일에 발행한 것이라고 한다. 또한 재간 후의 동지(同紙)는 안창호(安昌浩) 개인의 전용 기관지로, 임시정부와는 거의 관계가 없다고도 전해진다. 또한 일설에 의하면 당시 프랑스 조계에서 3.1인쇄소라는 것을 프랑스 관청의 허가를 얻어 설립하였으며, 동소 내에서 조선인 김희산(金喜山)이라는 자가 사장으로 되어 이 발행을 담임하였다고 한다.) 대정 11년 에는 위 독립신문 외에 임시정부의 기관지로 ′부득이(不得已)′라는 제목으로 석판쇄의 조선글 신문을 발행하게 되었다. 2월 27일로 그 창간호를 출판(본 지는 임시정부 비서장 신익희(申翼熙)를 사장으로 하며 동인(同人)은 와세다 대학을 졸업한 동지(同志) 사이에 상당한 존경을 받았다.)하여 오늘에 이르렀다.프랑스 관헌이 소위 단속한 자는 대부분 형식으로 끝났고 조금도 그 핵심부에 미치지 못했으며, 결코 완벽을 기대하기 어렵다. 그들은 여전히 잠정적 임시정부를 존재하게 하고, 위에 서술한 불온 신문지를 계속 발행하게 하였다.최근 이승만(李承晩)이 미국에서 상해로 왔으며 그는 신임 상해 프랑스 총영사 ′우킬덴(ウキルデン)′ 씨(그는 대정 10년 1월 중순 임명됨.)에게 안창호(安昌浩)와 함께 그 공관에 방문하고(대정 10년 2월 7일) 전년 이래 동관(同館)이 조선인에 대하여 보여준 호의에 감사를 표시하고 향후에도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편의를 줄 것을 간청하였으며, 임시정부로부터 동관 관원에게 선물을 증정하였다는 소문이 있다.그 단속이 철저하지 못한 것은 이상의 경과에 비추어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라고 말할 수 있으며, 특히 대정 11년 2월 28일 상해 세관 부두에서의 타나카(田中) 대장 저격사건 이래 프랑스 관헌의 프랑스 조계 내 조선인에 대한 단속이 좀 엄격하게 되었다는 설이 없지는 않으나, 아직 아무 구체적인 현상을 보지 못하였다. 여전히 불령한 행동을 계속하고 있으며, 특히 소위 임시정부의 내용은 재정의 결핍이 극에 달하여 사무소의 임대료마저 여러 개월 간 체납한 상태라고 한다. 거기에 이동휘(李東輝) 일파는 러시아 공산당과 결탁하고, 안창호(安昌浩) 일파는 여전히 미국에 의거하며, 동시에 북경 박용만(朴容萬) 일파는 임시정부에 반대하는 등 내우외환이 함께 있는 상태이다. 고성낙일(孤城落日)의 상황에다 아무 실력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대정 8년 3월1일 경성에서의 소위 만세소동 당시 상해에 있는 조선인의 선동에 가담하여 그 원인의 하나로 된 것, 끊임없이 불온의 선전을 하여 인심의 동요를 시도한 것, 때때로 위험한 행동을 감행한 것 등이 있으나 대세에 통하지 않는 다수 조선인이 여전히 상해의 위 결사에 대하여 혹시나 하는 기대를 가지고 있는 자가 없다고 보증하기는 어렵다. 이의 존재 여부는 직접 제국의 조선 통치에 영향을 끼친 같지는 않으나, 이의 해산, 폐쇄 등을 프랑스 관헌에 의뢰하려고 하나, 종래의 실험이 위에 기재한 바 이상의 대체 실효를 보기 어렵다. 가령 이를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들 불령자는 꼭 상해만을 고수하지 않고 현재 일부는 임시정부를 시베리아에 이전하자고 주장하는 자도 있다.만약 상해를 압박하기 위하여 이를 오늘과 같은 정세에 있어 러시아(露領) 등으로 이전하게 되면 그 단속이 한층 더 어려워진다. 무정부 상태에 있는 북만주의 지방을 사이에 두고 직접 조선 국경의 치안을 문란하게 하지 않는다고 보장하기 어려우며(특이 이전 문제는 친미파가 실족하면 그들의 성격 상 그밖에 기타 결사를 성립하는 것은 별도로 하고 현재의 결사 그대로를 러시아(露領)에 이전하는 것은 쉽게 실현될 것으로는 생각되지 않는다.) 대세를 이미 만회하기 어려워 오늘의 상해 결사는 오히려 그 사이 당분간 이를 그대로 방치하여 자멸할 것을 기대하는 동시에, 한편으론 그 궁상(窮狀), 추체(醜體), 내분, 폭역(暴逆) 등을 할 수 있는 한 우리 측의 기관지 등에 의하여 모두가 이를 주지하게 하여 이에 대한 일부 조선인의 기대를 파괴하는 것이 오히려 좋은 방법이라고 믿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