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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591 " 이병관이 번역한 The Hawaii Nipu Jiji|| 3월 27일자 기사(1941.9.24) "

    (1934년 3월 27일자 하와이 니뿌 지지 기사를 이병간(Pyeng Kan Lee)이 번역함) 신류 우메하라(Shinryu Umehara) 스님은 내세를 연구하는 청년 불교인 모임에게 불교는 일본인 2세들에게 재 인식되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곳에서 한 한달간 머물고, 하와이 전체 1, 2세 불교 추종자들에게 강한 감동을 준 교토 "켄신 학교"의 교장인 신류 우메하라(Shinryu Umehara) 스님은 오늘의 타쑤타 마루(Tatsuta Maru)로 일본으로 돌아올 것이다. "내가 미국에 있었을 때 느낀 것처럼, 일본사회의 일본어학교와 불교사원의 존재는 대단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들이 국가의 의식, 일본의 문명, 일본의 정신을 촉진하는 모체이기 때문입니다. 혹자는 이 단체들이 일본인의 동화에 장애물이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일본인들은 다른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여,비판의 대상이 되지 않기 위해 자신들의 활동을 위장하는 것 같습니다."

    2592 " 재미일인의 지도자 토가 다나카의 한길수 방해공작 관련 한길수의 메모와 미일전쟁 관련 신문기사(LA Examiner|| 1942.3.25) "

    1941년 12월 7일 전 미국에 대한 일본의 전쟁 준비에 본질적으로 원조한 일본계 미국인 핵심 지도자 중 한 명인 도고 타나카(Togo Tanaka) 편집장의 고백연맹 신문 편집자 전쟁 준비 밝혀

    2593 미국 이민국의 디목(Marshall E. Dimock)이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40.9.5)

    2594 하와이 육군(Army Contact Office)의 믈로트(Byron M Meurlott)가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40.4.30)

    2595 한길수가 작성한 일본의 미일전 승전계획 요약문

    요약미일전쟁

    2596 한길수가 미국의원 셜트(William Shulte)에게 보낸 서한(1940.8.14)

    트리니대드(Trinidad) 8,500

    2597 조지 멕큔(George MCCune이 한길수에게 보낸 전보(1941.4.17)

    축하 드립니다. 귀하는 우리 콜롬비아의 영웅입니다. 오늘 오전 뉴스가 2천 3백만 명의 한인에게 용기를 북돋아 주었습니다. 한길수 씨가 일본으로부터 가장 믿을 수 있는 내부정보를 받아 진실을 방송했습니다. 한국이 워싱턴 내 우리 정부의 요구를 듣지 못했다는 것이 안타깝습니다. 일본, 그리고 일본에 협조하는 다른 나라 지도자들이 한인의 목소리를 침묵시켰습니다. 이러한 25년 동안 우리는 한국이 세계의 여러 나라 사이에서 자신의 정당한 위치를 복구하지 않는 한 진정한 평화는 절대 오지 않음을 절대 잊어서는 안됩니다. 귀하는 정직함, 성실함, 솔직함, 그리고 끈기로 동양에서 몇 세기 동안 ···(원본누락)··· 문화와 계발의 역사를 가진 2천 3백만의 한인에게 위대한 봉사를 하고 계시는 겁니다.

    2598 한길수가 미국무장관 헐(Cordell Hull)에게 보낸 서한에 대한 Washington Daily News 기사(1941.12.5)

    회전목마드류 피어슨(Drew Pearson), 로버트 엘렌(Robert S. Allen) 기자 일본이 진주만과 미국을 기습하기 위해 준비하는 동안 헐(Hull) 장관이 했던 외교협상의 숨겨진 비극적 이야기를 이제는 말할 수 있다. 진짜 이야기는 8월 초로 돌아간다. 당시 코노예(Konoye) 왕자는 대통령에게 태평양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회의에 참석해 달라는 요청을 하는 전보를 보냈다. 국무부가 이 전보를 받았을 때, 맥스웰 해밀턴(Maxwell Hamilton) 극동부장은 미국이 협상해야 한다고 제안했다. 그러나, 일본에 다녀 온 바 있는 극동부 고문들은 일본이 하는 모든 행위는 미국과의 전쟁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고 말했다. 그들은 일본과의 협상은 순전히 전쟁준비를 마치기 위한 시간을 벌기 위한 속임수라고 했다. 이 그룹은 회담과 관련하여 참고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들은 마침내 외교 협상이 재앙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경고하는 두 페이지 분량의 기안을 작성했다. 그리고 그들은 이를 맥스웰 해밀턴(Maxwell Hamilton)의 우두머리에서 헐(Hull) 장관까지 주의 깊게 조사하기를 바랬다.미국 클리브이덴 세트(Cliveden Set) 즉시 그들은 해밀턴(Hamilton) 극동부장 앞에 소집했다. 해밀턴(Hamilton)은 아랫사람들에게 소리를 지르고 그들이 간섭을 할 입장이 아니라고 말했다. 그러나 그들은 그 기안을 헐(Hull) 장관에게 직접 봤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카봇 코빌리(Cabot Coville)가 은퇴했다. 그 사직서를 벌리(Berle) 부장관에게 제출했을 때, 그는 거부했다. 그리고 코빌리(Coville)는 필리핀으로 보내졌다.한국인들, 헐(Hull) 장관에게 경고하다. 이번에 헐(Hull) 국무부 장관은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로부터 수통의 편지를 받았다.편지에는 일본이 미국을 공격하기 위해 준비 중이다라는 경고가 쓰여져 있었다. 식민지 백성으로서 한국민들은 일본 정복자들을 혐오한다. 종종 충실한 조직원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인들은 일본에서 놀랄만한 지하 첩보 체계를 유지해왔다. 1941년 10월 28일, 한 때 일본 영사관에서 근무했던 한국인 한길수는 헐(Hull) 장관에게 8월 26일 흑룡회(일본 군부대의 비밀 파시스트 집단) 집회를 보고하는 편지를 썼다. 이 집회에서 외무 장관 히로타(Hirota)는 “미군의 무장에 대응할 수 있는 전반적인 전쟁 준비”를 밝혔다. 그는 또한 토조(Tojo) 수상에게 수많은 총기류 및 신속 물자를 완비해 1941년 11월까지 마샬-캐롤린 군도로 보내라고 지시했다. 그 모임에서 히로타(Hirota)를 비롯한 여러 사람들은 미국과 전쟁을 치를 수 있는 가장 적합한 시기가 1941년 12월이나 1942년 2월이라는 견해를 스스럼없이 펼쳤다. 한길수는 질레트(Gillette) 아이오와주 상원의원으로부터 헐(Hull) 장관을 소개 받았다. 그래서 다행히 그의 편지는 무명의 미치광이로부터 온 것으로 여겨지지 않았다. 사실, 질레트(Gillette)는 한국의 정보를 아주 중요하게 생각해 상원에 제안하여 일본의 활동을 조사해보고자 하였으나 이는 국무부로부터 제지를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헐(Hull) 장관과 쿠루수(Kurusu) 공사와의 회견이 곧바로 시작되었고 진지하게 이어졌다. 헐(Hull) 장관은 일본인들과 무엇인가를 도출해 낼 수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 같았다. 또한 한편으로 그와 국무부 고문들은 실제로 합의가 임박했다고 생각했다. 처칠(Churchill)의 반대 11월 24일과 25일, 쿠루수(Kurusu) 공사는 갑자기 3개월 간의 통상 휴전 협정에 대해 토론할 의지를 보였다. 국무부에서는 일본군이 더 이상 인도차이나에 진입하지 않고 중국에 잔류한다면 미국은 가솔린, 석유, 고철 및 다른 원자재 “민간인용” 판매를 재개할 것이라는 관련 원칙을 내놓았다. 헐(Hull) 장관이 쿠루수(Kurusu) 공사와 이 계획에 대해 논의 할 때 일본 정부는 이미 하와이 공격에 대한 계획을 세우고 있었던 것으로 현재 드러나고 있다. 그러나 헐(Hull) 장관은 이 휴전 협정을 종결 짓는데 급급한 나머지 영국과 오스트레일리아가 회담에 참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핼리팩스(Halifax) 경이 그 계획을 전보로 런던에 보내 처칠(Churchill)의 승인을 받을 시간을 주지 않았다. 그러나 핼리팩스(Halifax) 경은 끝까지 고집을 부렸고 결국 보고를 받은 처칠(Churchill)은 이 계획에 대해 몹시 분개했다. 처칠(Churchill)은 일본이 신의를 지킬 것이라 생각하지 않았고, 협정이 단순히 일본의 군사력을 증강시키는 시간만 더 주는 꼴이라 주장했다. 동시에 이 계획은 중국인들에까지 유출되어 중국 대사관은 챙카이쉑(Chiang Kaishek-장개석) 장군의 개인적인 항의를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처칠(Churchill)과 중국인들의 반대를 고려, 헐(Hull) 장관은 갑자기 3개월의 휴전 제안을 철회하였고 일본의 모든 군대 철수와 더불어 중국의 문호를 개방하고자 하는 미국의 전통적인 정책으로 물러섰다. 일본이 하와이 침공을 미리부터 철저히 준비하기 시작했다라는 루즈벨트(Roosevelt) 대통령의 말이 사실이라면, 헐(Hull) 장관이 어떠한 제안을 했더라도,그 제안이 유화책이든 문호개방 정책이든, 이로 인해 일본 군벌들의 진로가 바뀌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2599 " 「일본의 전쟁승리계획(How Japan Plans to Win)」(일본 흑룡회 언론국장이자 일본 외교 및 해군 정보 연락관인 키노아키 마쓰오|| (Kinoaki Matsuo 씀)에 대한 한길수의 해제 "

    1941년 1월, 로스앤젤레스의 한 호텔. 한 한인 신사가 조용히 직원에게 열쇠를 건네 받아 일본 장교 두 명이 있는 방으로 들어가 팔에 일본책의 사본을 하나 끼고 유유히 빠져 나온다. 그 한인은 중한민중대동맹의 대표 한길수다. 그 책은 일본 관리들이 일본 국민에게 미국과의 전쟁은 불가피하며 이 전쟁은 일본에게 우세하다고 확신 시키기 위한 책 “3대 강국과 미일전쟁”의 사본이다. 리틀, 브라운 and 컴퍼니는 1941년 12월 7일 이후에 안보의 잘못된 인식을 바로잡기 위해 미국 시민들에게 이 책을 보여줘야 한다고 느낀다. 일본인에게 보여주기 위해 쓰여진 이 책은 미국인에게 “나의 투쟁”처럼 중요하다. 다음 페이지부터는 간행물의 관례와 특성상 질문과 대답 형식으로 이루어져있다.

    2600 미국을 위한 일에 어떠한 인종차별을 해서는 안 된다는 기사(출처미상)

    캘리포니아, 버켈리(Berkeley) - 알라메다 카운티 리퍼블리칸 어셈블리(The Alameda County Republican Assembly)는 최근 회의에서 공식적으로 인종과 피부색 혹은 개인의 신념에 관계 없이 지원하기로 결정했다.결의안은 다음과 같다. “미합중국 헌법 전문에 무엇보다도 정의를 수립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또, 독립선언문에서 ‘모든 인간은 평등하게 태어났으며, 신에 의해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부여 받았다. 이 속에서 삶과 자유와 행복을 추구할 수 있다.” “이 기본적이고 정당한 원칙은 피부색, 종류, 혹은 신념에 관계 없이 모든 소수에게도 적용된다. 정치적 도시, 주, 국가 내에서 모든 이에게 동등한 권리와 기회가 부여될 것이다.” “1941년 1월 25일 알라메다 카운티 리퍼블리칸 어셈블리(The Alameda County Republican Assembly)의 정기 회의에서 우리 미국 시민들은 인종, 피부색 혹은 신념에 관계없이 누구든지 언제나 정치적으로 동등하다.” “우리는 다른 모든 시민들처럼 공군 부대, 탱크 부대, 화학 복지 서비스 혹은 다른 연방 정부의 지부 내에서 성실한 미국인인 소수 그룹에게 동등한 기회를 부여한다.” “우리는 소수 그룹이 국가의 비용에 대한 자신에게 할당된 몫을 다할 것이고, 위급시 다른 이들과 똑같이 방어하리라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