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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681 간도한인의 중국입적 결의 기사

    간도통신 이번 달 하순 용정촌(龍井村) 중국 관병이 한인을 오인사살했다. 최갈호(崔曷浩) 등 한인들이 시민대회를 열고 60명의 위원을 선출하여 수습방안을 협의했다. 간도한인 삼십만여 명의 생명과 재산이 위험하다고 외쳤다. 이중법률(중일 양국의 법률)의 적용을 받고 있으므로 일본국적을 완전히 버리고 중국법률의 제재를 받기로 결정했다. 결의 이유는 다음과 같다.결의문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 삼십만여 명은 일본국적을 버리기로 결심했다. (1) 간도에 거주하는 한인은 중일 양국 법률을 이중으로 적용받아 일상생활이 매우 곤란하다. 동일사건에서 양국의 재판을 받는다. (2) 생활의 영원한 행복을 추구한다. (3) 중국에 있는 일본의 시설이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완전히 보호할 수 없다. 중국 시설이 없는 것은 완전히 기관의 이유이다. (4) 일본정부는 간도 거주 한인을 보호할 권력이 없다. 중국정부에 다음과 같이 네 가지를 요청한다. (1) 간도는 국제관계로 인해 한인이 거주할 권리가 있고 60년간 열심히 개간해서 오늘날 이 땅을 만들었다. 국민의 공로가 있고 납세의 의무를 다했다. 중국 관소(官所)는 한인의 생명과 재산을 보호하는 책임을 다해야 한다. (3) 세금 무한징수제도는 한인의 생활을 궁핍하게 한다. (3) 한인은 중국 관리의 이유 없는 압박과 불법행위로 안거할 수 없다. (4) 벌금회피와 법률위반은 강제로 징수한다. (5) 향후 중국법률에 완전히 복종하고 국민의 의무를 다한다.

    1682 한국 독립 승인문제 국회제출 기사

    국회의원 장경순(張景順) 등이 조선은 독립국이다. 마관조약을 근거로 일본은 마구잡이로 횡포를 부리고 한국을 병탄할 야심을 가지고 있다. 중국과 한국은 본래 같은 혈통에 속하기에 침묵을 지키고 있을 수 없다. 국회에 비상회의를 제안하고 전국에 전보를 보낸다. 또 태평양회의에 전보를 보내 조선은 본래 독립국임을 성명(聲明)한다. 원안(原案)은 다음과 같다. 조선은 독립국이다. 각국 약장(約章)에 명문(明文)이 있다. 우리나라에 대해서는 특수한 관계가 있다. 천진(天津)조약의 기재에 따르면 중일양국은 서로 조선에 출병할 수 없다. 마관(馬關)조약 제1조에서 중일양국은 조선을 완전무결 독립국으로 확인했다. 신의(信義)가 명백하고 조금의 구실도 용납할 수 없다. 일본은 누에처럼 고래처럼 마구잡이로 횡포를 부린다. 회유수단을 쓰다가 병탄을 실행했다. 지금까지 11년이 되었다. 우리나라 당국은 시종 입을 다물고 올바른 말을 하지 않았다. 약장에 근거하여 일본과 서로 다툰 것은 우리 국민의 크나큰 치욕이다. 일본은 그 약점을 이용해 더욱 거리낌 없이 횡포를 부린다. 만몽(滿蒙)문제, 산동문제, 21개조가 한국병탄보다 더 괴롭겠는가. 비록 근년에 우리나라 재야인사들이 한국지사와 중한협회를 발기하였으나 가장 핵심적인 행동이 부족하다. 이번에 태평양회의가 개막되어 문제가 해결될 것이라고 전해진다. 이 시기를 이용해 안건을 대회에서 의결한다. 한국은 본래 독립국이었으나 일본이 무단으로 침략했다. 전국에 전보를 보내고 태평양회의에 전보를 보낸다. 침묵하는 우리나라 외교의 수치를 씻고자 한다. 한국문제를 구미 각국에 알려 원조를 구한다. 혈통이 같은 중국은 결코 조용히 있을 수 없다. 법에 의거하여 대회에 제출하고 타당성을 따져 공개의결 되기를 기대한다. 제출자 장경순(張景順). 공동서명자 왕유(王猷) 등.

    1683 김지섭의거 관련 문서

    의열단은 본년 1월 5일 도쿄 니쥬바시(二重橋)에서 체포당한 동 단원 김지섭(金祉燮)의 품행 경력 등에 관하여 최근 별지 역문과 같이 초상을 넣은 불온 선전문을 인쇄하여 내외 각지에 발송한 흔적이 있다. 발송지는 베이징(北京)인 듯하나 인쇄지는 지금 내사 중발송지외무차관, 재 중국[支那] 공사, 관동청 경무국장, 봉천(奉天)ㆍ상하이(上海)ㆍ길림(吉林)ㆍ간도(間島)ㆍ하얼빈(哈爾賓)ㆍ천진(天津) 총영사철영(鐵嶺)ㆍ장춘(長春)ㆍ만주리(滿洲里)ㆍ정가둔(鄭家屯)ㆍ요양(遼陽)ㆍ안동(安東),원부(芫罘) 영사내무차관, 경보국장, 경시총감, 쿄도(京都)ㆍ오사카(大阪)부 지사가나가와(神奈川)ㆍ효고(兵庫)ㆍ후쿠이(福井)ㆍ야마구치(山口)ㆍ후쿠오카(福岡)ㆍ나가사키(長崎)현 지사 각 도지사, 도쿄(東京) 후루하시(古橋)사무관, 각 파견원조선군사령관, 조선헌병대사령관역문추강(秋岡) 김지섭(金祉燮)선생선생은 이번 학살된 1만 5천 동포의 복수를 위해, 노예 철색에 매어있는 2천만 민중의 자유를 위해, 압박당하는 인류 해방을 위해 자기 한몸을 혁명제단에 희생하기로 했다. 폭탄을 던져서 마왕(魔王)궁전을 파괴 붕괴한 것이다...... 4257년(1924년) 1월 5일 오후 7시......선생은 4218년(1885년)에 경북 안동군 풍북면 오미동에서 출생했다. 어릴 때는 유교식 교육에 심취되어 널리 시경ㆍ서경을 섭렵하고 인의(仁義) 교훈을 습득하고 최근에 이르러서는 사회주의적 사상에 공감하여 현존하는 모든 제도를 부인하며 급진적 사회혁명을 주장하게 되었다. 선생이 조국의 자유를 위해 헌신하는 것은 즉 세계 인류의 해방을 위해 헌신하는 것이다. 사회혁명에 절규하는 것은 즉 압박당하는 조선민족 해방을 더 한층 철저하게 하기 위함인 것이다. 선생은 분투하고 있다. 일찍이 『이르크츠크』에 가서 극동민족대회에도 참가하고 상하이(上海)의 국민대표회에도 출석했지만, 간단히 말하면 그 어느 곳에서도 선생의 요구에 대답할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다.선생이 그 가슴 깊이 굳게 결심한 바가 있어 뜨거운 결심 을 지금에야 실행한 것은 저 잔학한 살인마들의 혼을 놀라게 하여 우리 혁명정신을 나타내고 광야에서 방황하는 우리 민중 등 혁명전도 방향을 지도하려고 하는 것이다. 그 격하게 뛰는 심장은 실로 우리 형제자매의 가슴 속에 날마다 울려 퍼질 것이다. 그 힘이 넘치는 선혈의 흐름은 반드시 전 세계 인류의 혈관 안으로 흘러 들어갈 것이다. 굳게 다문, 말수 적은 그 입의 수염, 시력 좋은 눈, 적막한 선이 지나가는 그 이마, 명쾌하고 또한 다정스런 그 말씀들...... 거기에도 자주 나오는 천재적인 농담, 고결한 정신이 넘치는 풍채이다.더구나 우리들로 하여금 무한한 흠모를 느끼게 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기술하는 것은 선생이 적지로 향하는 배안에서 지은 한시이다. 여기에는 그 뜻의 단면을 살필 수가 있다.머나먼 만리길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는 좁쌀처럼 하찮은 이 내 신세. 적지로 향하는 배 안에는 모두 적뿐이니 나 홀로 누구와 더불어 친할고 .그 옛날 장랑(張良)과 태자가 원수를 갚고자 진시황을 검으로 죽이게 하였듯 내 가슴에 그 검을 품은 지 오래다. 노중연(魯仲連)이 바다로 나아가고 굴원(屈原)이 호수에 투신한, 이들의 충절. 이 생각 저 생각 끊임없는 생각들. 나는 오늘 부심해서 배 타는 객이 되어 옛날 치욕을 씻고자 쓸개를 핥으며섶 속에 앉았듯이이번 여정에서 이미 평생의 뜻을 결정하고 관문으로 향하지 않고 다시금 나루터를 묻는다.

    1684 간도지역 일본군 활동 보고 전보문

    제19사단장 보고에 의하면 1.용정촌 부근 부락에 불량 조선인(不逞鮮人)이 잠입해 우리후방 연락선 위협을 기도하고 있음을 정찰탐지해 용정촌 보병 제15연대 제 3대대의 일부는 29일 오전 8시 즈이코우도우(용정동쪽 약 1리반)를 포위해 도적의 수괴4명을 체포하고 다음 30일 오전 6시 상암(국지가 남남동 약 3리)를 포위해 도주를 기도하고 있는 도적 20명을 사살했으며 불령단(不逞團)의 기관인 야소학교(耶蘇學校)하나 사립학교 하나 및 그들의 주소 10개를 소각함. 우리의 피해는 없다. 2. 천보산 방면에서는 24일, 25일 아침 도적일단를 우리 수비대에 내습했으나 우리 전초 이를 격퇴함. 이후 도적이 유기한 사체2, 무기, 피복 약간을 획득하였음. 이 도적은 지난22일, 어로촌 부근에서 교전한자들 중의 일당임이 확실하며 또한,천보산 부근에 잠복해 있을 것 같아서 국자가에 있는 이시즈카 소좌에게 보병 일중대 기관총 일소대를 거느리고 천보산에 이르러 그곳에있는 보병 일중대를 통합시켜 지휘해 그 방면의 도적을 소탕하게함.다이쇼(大正) 9년(1920년) 11월 4일 전보 11월 3일 오후 4시 45분 발 오후 7시 30분 착육군 차관 조선군 참모장조특(朝特) 125조특 124호 보고에 있는 야소학교 소각의 건에 관하여 조사하니 이 학교는 보통의 민중을 개량하고 허술한 건물로 얼핏 학교로 인정하기는 어려움 그래서 우리 포벌대를 신뢰하는 조선인으로부터 그 건물은 불량조선인의 음모획책(陰謀畵第)은모두 이 가옥에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알고 이를 포위해 건물 안을 수사하니 다수의 불온문서를 발견 압수해 이것을 헌병경찰관에에 교부한 후 이것을 소각하게 됨 또한 들리는 바에 의하면 포벌대 출발에 있어 우리영사는 이 부락은 전부 불량조선인임으로 전부 소각되어야 한다는 뜻의 진술을 했으나 대대장은 적당하지 않다고 해서 단지 헌병경찰관 수사 결과에 근거해 증거 현저(證跡顕著)한 가옥을 소각시키는데 지나지 않는다는 사단장(師鬪長)으로부터 보고를 받아 첨부함다이쇼(大正) 9년(1920년) 11월 5일전보 11월 4일 오후 4시 25분 발 오후 7시 5분 착육군 차관 조선군 참모장조참(朝參) 480제19사단으로부터 보고에 의하면 11월 20일 오후5시 용정촌 미국인 선교사는 그곳에 있는 우리 병참 사령관 쯔쯔이 소좌를 방문해 20일 동안의 예정으로 시골지방 포교 및 시찰을 위해 여행증서를 청구하였으나 사령관은 비적 때문에 위험함으로 가능하면 약 20일 이후에 할 것을 희망을 하자 그 선교사는 그 돌아오는 길에 북선일보 통신원 돠타나베모를 방문해 나는 오늘까지 일소동맹을 계속하는 일본은 문명국인이라고 믿고 있다. 10월 30일쇼겐도에 있는 자기 관할 학교의 예배소를 불태우고 인민 25명을 사살한 것을 듣고 일본인은 어디까지나 가혹성있다는 것을 앎과 함께 야만인이 다는 것을 알았다 본건은 봉천자 국령사에 보고해야한다는 뜻을 담은 비분적변명을 남기고 떠났다는 이 본건은 이미 조특124및 125호에서 보고한 이외에 다음 증거물건이 있다. 이 야소학교에는 독립신문 다수 붙여 있는 것 독립군 자금 모금증이 있음. 대한독립이라고 크게 쓴 종이가 붙여져 있는 것. 그 외에 본 학교를 불량자가 사용한 형적이 있는것. 분명하다는 보고있음. 본건에 관해 제 19사단장은 간도파견장교로하여금 사카이영사와 협의해 사실의 진상을 발표해 외부의 오해를 피할 수배를 강구한 적이 있음. 군으로서는 본건을 공표해 일반의 의혹을 푸는데 노력을 한다 동경, 북경, 봉천재

    1685 상해한국인 모독 기사

    타나카(田中) 대장 저격사건이래 조락한 독립 임시 정부26일 아침 상해(上海)에서 모지(門司) 입항의 우편선, 야하타마루(八幡丸)에서, 모지(門司) 경유 탑승한 상해(上海) 영사관 외무성 경시 키노시타기스케(木下義助)씨는 말한다. “상해(上海)에서는 각종 노동쟁의의 발발하는 일이 많아, 지난번 시나(支那) 우체국원의 스트라이크, 홍콩에서의 시나(支那) 선원 대파업을 비롯해 근처에서는 일화 무역 종업원의 파업 등, 셀 수가 없을 정도이다. 게다가 점차 증가의 경향이 있는 자본가는 많이 위협되고 있다. 특히 상해(上海) 사업주들은 스트라이크에 대해서 최근에, 심대한 고려를 기울이기에 이르렀다. 거주 조선인의 수는, 500정도이지만, 그들은 부랑의 도배로 일정한 직업이 없으며, 조선 독립 임시 정부는 워싱턴 회의 때, 미국에 거부당한 이래, 점차 조락해, 경제적으로 원조하는 사람도 없으며, 허무하게 몸만 있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한편 거주 외국인은, 지난번타나카(田中) 대장 저격사건이래, 그들을 사갈시해, 그 철저한 박멸을 바라고 있다.” 운운(모지(門司) 발)

    1686 순종 죽음에 대한 봉천지역 조선인 언동 및 봉도식 상황보고

    순종 전하 죽음에 관해 봉천지역 조선인 사이에는 별다른 충동을 주지 않는 것도 부 조선인사이에서 전하는 선천적으로 불구자로써 일찍이 국왕에 있으면서 천명을 알지 못하고 조선을 오늘날의 입장에 처하게 하였으므로 그 죽음을 감히 애석하게 생각하지 않는 불온분자가 있다. 또 왕의 서거는 앞으로 독립운동자들의 표방을 잃게 하고 불리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운운하는 자가 있다지만, 일반에게는 어떠한 불온 장소에 나오는 자도 없고 또 타지방에서 불온문서가 배포해 들어오는 모양도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봉천 조선인들 사이에서는 전하의 망곡식과 요배식 거행에 관해 여러 가지로 협의하는 바가 있다. 그 기일도 6월 10일 국장당일에 집행해야한다고 하는 자도 있어서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장로파 기독교 회원을 주로 하는 청년 상부회 관계자 사이에서는 지난 9일 협의한 결과 드디어 5월 15일 오후 2시 서탑(西搭) 금성(金星)정미소에서 봉도 식을 거행하기로 결의하고 급거 준비에 들어가는 동시에 등사판 인쇄고지서를 시내외 조선인에게 배포했다. 이리하여 마침내 5월 15일 오후12시 당지역 서탑 금성정미소 뒤뜰에서 식을 개시하는데 참석자로써는 당관에서 스기우라(杉浦), 마키다(牧田) 경찰서장대리, 사이토(齋藤) 보통학교장 인솔 하에 보통학교 생도 전원 약 2백 명 외 봉천(奉天) 및 부속지 거주 조선인 등 총수 약 5백 명에 달했다. 먼저 고병찬(高丙瓚)[대안담배공사기사 봉천(奉天) 상부회 부회장] 개회사가 있다. 이어서 오일상(吳一相)(봉천 상부회 생계부장) 별지갑호 복사와 같은 추도문을 낭독하고 봉천(奉天) 거류민회 부이사 임한용(林漢龍)의 별지 을호 복사와 같은 전하의 약력 등에 관한 삼가말씀이 있었다. 마지막으로 일동 남쪽을 향해 경례를 하고 고병찬(高丙瓚)의 폐회사를 끝으로 오후 3시 지나 모두 해산하였다.또 관하무순하게도 같은 지역 조선인민회주최 아래에 5월 10일 오후 2시 영안대(永安臺) 서쪽 공원 높은 곳에서 추도식을 거행하였는데 참열 자는 조선인 측 민회 관 계자를 비롯하여 조선인 보통학교 생도 및 시내외 및 부근거주자 등 남녀 합하여 4백여 명 이외, 일본인측은 경찰서, 탄광, 우편국원 및 학교직원 신문기자 그밖에 일반시민 유지 등 30명으로 오후 2시 10분 무사히 종료했다. 아래는 참고를 위해 보고하는 바이다. 본신복사 송부하는 곳 재지공사, 조선총독, 상하이(上海)총영사

    1687 이영선 자살 사체 검안서

    원적 : 조선 평안북도 철산(鐵山)군 서림(西林)면 강암(江岩)동현주소 : 상하이(上海)법조계(法祖界) 남영길리(南永吉里) 28호 지나인 방직업 : 없음성명 : 이영선(李英善) 23년위 자는 다이쇼(大正) 15년(1926년) 6월 7일 상하이(上海) 일본제국 총영사관 형무소 제5감방 철책 안에서 액사체로 발견됨으로 같은 경찰서 경부 다지마 슈헤이(田島周平)님이 입회하는 아래 같은 날 오전 8시 위 감방 안에서 사체를 검안하는데 소견은 아래와 같다.

    1688 미국유학생 한영호의 대일제안서

    저는 오하이오 주 콜럼버스에 있는 오하이오 주립대학에 다니는 한국 학생입니다. 일본 정부에 대해 불충실한 한국에 있는 한국인들과 장관님에 대한 법적 성명서에 관해서 저는 어려움 없이 한국인들을 통제할 수 있는 몇 가지 저 자신의 제안을 해드리고 싶습니다. 일본정부가 아무리 한국인들에게 관대할지라도, 아무리 한국인들이 일본에 의해서 현대문명에●●●할지라도, 반쯤 개화된 한국 사람들은 항상 자신들이 일본에 의존되어 있다고 생각하고, 한국 정부가 아니라 일본 정부에 의해 지배받는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한국인들이 구한국 정부에 의해 오랫동안 지배받았기 때문입니다. 한국 정부가 아무리 잔인하게 국민들을 다스렸음에도 불구하고 한국인들은 그저 자신들의 정부라고 생각하였습니다. 그것이 개화되지 못한 그 사람들의 인간성입니다. 따라서 일본정부는 한국인들을 지배할 편리한 방법을 선택해야 합니다. 먼저 일본 정부는 이(Lee) 황제의 아들 이(Lee) 왕세자를 왕이나 한국의 총독으로 삼고, 일본관리와 교육을 잘 받은 일부 한국인들을 한국 정부의 내각으로 구성해야 합니다. 이 방식을 사용하면 한국인들은 일본에 대해 불평하지 않을 것이며 완전히 복종할 것입니다. 그런 다음 많은 한인 입법자들을 여러 도나 시, 군에 보내어 일본이 한국인들을 현대 문명의 혜택을 받도록 하려는 것을 설명하게 하십시오. 많은 YMCA 직원들은●●●한국인들에게 사회사업을 실시하십시오. 이렇게●●●한국인들은 전적으로 복종할 것입니다. 충성하지 않는 한국인들이 있는 경우에는 그들 자신의 통치자에게 처벌을 받게 될 것입니다. 저에게도 이렇게 하는 것이 한국인들을 일본사람들에게 충실하게 하고 일본사람과 친목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여겨집니다. 따라서 일본 정부는 상업과 정치적 비중에서 더 많은 유익을 얻게 되고, 또한 한국 노동자들과 일본 노동자들의 임금을 균일하게 하면 한국인과 일본인들 사이의 모든 증오가 사라질 것입니다. 제가 무지한 탓에 다른 어떤 방안은 제안할 수 없습니다. 만일 장관님께서 제가 한국인을 통제하는 데 정치적으로 적격하다고 생각하신다면 기꺼이 저는 한국의 이(Lee) 왕세자의 내각에서 고문 중 한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1689 3.1절 3주년 기념전단 및 애국가

    금일 민국 4년 3월 1일은 우리 대한민국의 국경일이다. 민국 원년 춘삼월 금일 한국 수부(首府) 경성(京城)에서 우리민족 대표 33인의 현복(賢伏)이 반만년 역사의 위령(威靈)과 이천만 국민의 성충을 모아 우리 대한인의 대한을 도모했다. 대한의 역사로 대한의 독립을 이루고, 대한의 인민이 대한의 자유를 누리는 것은 하늘의 명명(明命)이고 인간의 정의(正義)다. 이 선언으로 세계만방에 인류평등의 대의를 극명(克明)하였고 자손만대에 영원한 민족자존의 정당한 권리를 알렸다. 이에 세 번째 기념일을 맞이하였다.그때부터 세계인사는 동양에 한국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 한국민족정신이 어떠한지 알게 되었다. 4년 간 피 흘리며 순국한 우리 충성스럽고 용감한 장사는 몇이었으며 도리(道理)를 모르는 적에게 잡혀 쇠고랑을 차고 가혹한 형벌을 받은 자는 몇이었으며 이역(異域)으로 망명하여 고국을 행해 읍배하며 눈물을 흘린 자는 몇이었던가. 비록 정처 없이 떠돌아다니고 생사를 넘나드는 지경이지만 모든 책략과 힘을 합해 적극적으로 나아갔다. 이는 우리 한민족의 굳은 본심이다. 오천년 조종의 역사를 받드는 것이다. 금일부터 억만대 자손에게 전해지는 정당한 권리다. 금일부터 세계인류가 평등한 지위로 함께 나아간다. 금일부터 우리 민족은 힘차게 나아가며 대한민국 역사의 첫 장을 하늘에 맹세하고 마음에 맹세한다. 금일을 건국의 기념절로 정하고 지켜나간다.천하의 뜻있는 군자는 어찌 동감하지 않겠는가.대한민국 만세, 대한민국 만세.

    1690 미상원에 보낸 국민회 성명서 및 공문

    1918년 11월 30일에 열렸던 뉴욕에 있는 신한국 협회/의 특별회의에서 채택된 결의에 따라, 여기 그 복사본을 첨부, 아래 서명한 저희들은 다음과 같이 한국의 상황에 대한 짧은 성명서를 제출하고 의장님께서 고려해 주시기를 간청하는 바 입니다. 김 식 훈 신 성 구 레이 워니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