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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591 유호청년 임시대회 선언

    우리는 오직 大韓의 靑年이오, 우리는 오직 大韓의 獨立運動者이라.時局의 紛擾와 現象의 沈滯를 坐視키 어려움으로 이에 우리는 正當한 立地에서 此에 匡正을 加하야 써 一日이라도 速히 我全民族의 進向하는 目的에 到達코져 하노니 우리의 忠直으로써 正論을 立하며 우리의 力量으로써 私鬪를 防하며 우리의 誠意로써 確實한 前路를 開拓하려 하노라.

    1592 중국정부에 대한 청원운동의 건

    본건에 관한 별지와 같은 인쇄물을 간도지방 재주 조선인 및 지나인에 배포해 왔으므로 보고 드립니다. 본신송부처북경공사 봉천 길림 하얼빈총영사 안동영사조선총독 함경남도지사 함경북도지사 조선군참모장 제19사단참모장 간도파견장교관내 각 영사관 주임 및 경찰서장

    1593 국민대표회 분쟁의 건

    상하이 불령 조선인의 전부터 개회와 관련되는 국민 대표회의 개조, 창조, 유지의 각파 분쟁에 관에서 다음과 같은 정보가 있었으므로 참고까지 보고하겠습니다. 삼가 말씀 드렸습니다.기(記)국민 대표 회는 우선 안창호(安昌浩) 일파의 개조파와 윤해(尹海) 일파의 창조파의 주장 때문에 대통령 불신임 문제를 가결한 것은 이미 보고했던 대로이다. 그 후 개조파는 몰래 임시 정부의 탈취책을 생각해 국민회에 있어서도 항상 현정부 각원의 개선을 주장하고 있다. 그리고 창조파는 임시 정부 불신임을 주장해, 동시에 북 만주에 신정부 설치를 역설하고 있었으므로, 마침내 창조파는 개조파와 유지파에 대항하는 존재가 되었다. 개조파는 5월 25일, 국민회의 무효를 선언해 동시에 그 회의를 탈퇴했지만, 유지파는 개조와 창조의 양파가 충돌하는 것을 호기라고 생각해 국민회를 탈퇴해 현정부의 유지에 노력하면서 양파 분쟁의 형편을 방관하고 있다.현재 국민회는 창조파의 독무대이다. 창조파는 자파의 목적을 관철하기 위해서 6월3일 자파만으로 국민회를 열어 국호 및 연호의 개정안을 결의했다.그 한편, 윤해(尹海), 원세훈(元世勳), 신숙(申肅), 최찬학(崔贊學) 등은 작년 북 만주 독립군에서 군자금 20만원을 받고이곳에 왔다. 현재, 영계(중국 영국령의 경계)에 잠복 하고 있는 창조파의 수령인 한형권(韓亨權)과 서로 연락을 하면서 격렬한 정부 전복 운동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그 일이 유지파에 간파 돼어 버렸다. 현정부 각원은 매우 분개해 별지 번역문과 같이 포고서를 배포했다. 그 한편 자파의 분자인 민충식(閔忠植), 윤기변(尹琦變) 등의 동료와 함께 의혈단을 조직 하는 것으로 몰래 창조파를 위협하고 있다. 그 때문에 현재 국민 대표회는 해산 상태에 있다. 창조파의 수령인 한형권(韓亨權)은, 유지파의 무모함을 깨달아 가족이나 동지인 최찬학(崔贊學)과 함께 웨이하이웨이(중국)로 향해 출발했다. 그리고 윤해(尹海), 신숙(申肅) 등은 영계에 잠복 하면서 신변의 위험을 피하고 있다.

    1594 혼춘현 내 독립군 인명부

    < 丁數氏名 一金與文(김여문) 二金昌勳(김창훈) 三金允瑞(김윤서) 四金丙謙(김병겸) 五金致明(김치명) 六金宗赫(김종혁) 七金仲三(김중삼) 八金元三(김원삼) 九金官旭(김관욱) 一○金範識(김범식) 一一金東漢(김동한) 一二金進三(김진삼) 一三金明浩(김명호) 一四崔明汝(최명여) 一五崔洪俊(최홍준) 一六崔東俊(최동준) 一七崔致郁(최치욱) 一八崔民世(최민세) 一九崔學龍(최학룡) 二○崔永實(최영실) 二一崔成心(최성심) 二二崔水天(최수천) 二三崔成五(최성오) 二四蔡德民(채덕민) 二五蔡宜熙(채의희) 二六韓京瑞(한경서) 二七韓京天(한경천) 二八韓仁俊(한인준) 二九韓奎良(한규량) 三○韓成奎(한성규) 三一韓瑞岳(한서악) 三二韓萬興(한만흥) 三三韓舜瑞(한순서) 三四李明順(이명순) 三五李昌俊(이창준) 三六李春(이춘) 三七李昌鎬(이창호) 三八李萬三(이만삼) 三九李同春(이동춘) 四○吳洙岳(오수악) 四一吳淳伯(오순백) 四二吳在英(오재영) 四三吳丙黙(오병묵) 四四吳俊三(오준삼) 四五吳玄文(오현문) 四六徐賢瑞(서현서) 四七徐永謨(서영모) 四八徐偵學(서정학) 四九張希淑(장희숙) 五○張通譯(장통역) 五一張舛万(장천만) 五二張大汝(장대여) 五三張鳳翰(장봉한) 五四梁春吉(양춘길) 五五梁允吉(양윤길) 五六梁河淸(양하청) 五七全和錫(전화석) 五八全永基(전영기) 五九全連甫(전연보) 六○方斗國(방두국) 六一嚴成峯(엄성봉) 六二嚴賢七(엄현칠) 六三柳行畯(유행준) 六四尹京喆(윤경철) 六五許仁世(허인세) 六六朴丙化(박병화) 六七朴根榮(박근영) 六八朴石権(박석권) 六九朴天甫(박천보) 七○馬重國(마중국) 七一黃丙吉(황병길) 七二陳善玉(진선옥) 七三朱詩咏(주시영) 七四洪丙律(홍병율) 七五姜在律(강재율) 七六池雲鄕(지운향) 七七白奎三(백규삼)

    1595 신민회사건 판결문 사본 송부

    별책 간치호(干致昊) 외 121명에 대한 모살 미수 사건의 판결서 등본을 참고로 송부한다.다음의 본건은 아직 전부 완료에 이르지 못해서 불취●차진(不取●差進)이다.

    1596 재외선인 회유통일 귀의 문건

    1597 혼춘현내 조선인소유 총기 명부

    혼춘현 내에 거주하는 조선 지난인의 총기 소유자 명부에 관해서는 작년 12월 7일자 기밀 공신 제49호에 보고 드린 바 있습니다. 그리고 조선인의 소유에 관한 동 명부는 별지에 있으므로 참고 하시기 바랍니다.본건 송부처간도 총영사 , 조선총독

    1598 대조선국민군 포고문

    국민, 국민이여, 위대한 우리 대 조선 국민이야, 천명이 왔다. 때가 여기에 이르렀다. 때가 곧 도달해 사람이 또 다시 화한다. 멀리서 들리는 소리는 자유의 북이 아닌가, 서서히 비추는 빛은 독립의 깃발이 아닌가. 10년의 구속을 벗어, 가슴 속은 열혈이 뛰어, 만고의 수치를 확실히 씻는다고 하여 ●●●● 긴 물건 이 스스로 울림. 긴 밤에 자리에 앉아서 동방의 서광을 기다리는 자, 그는 누구인가 궁동(窮冬)에 빠져 대한(大寒)의 가혹한 맹위를 개탄하는 사람, 어떤 것은 지금 아침 해 확실히 올리고 따뜻한 봄이 오고, 만세 소리에 약자 빈자도 모두 일어나 한 폭탄아래에 빈자(貧者)도 렴부(廉夫)도 함께 놀란다. 이런 것을 인화(人和) 라고 하지 않으면 무엇을 가지고 천명이라고 부르는가. 하늘과 사람 함께 하여 때와 생명과 함께 도달할 때에는 우리 민족 중의 충용절의와 과감 건장한 남아는 당연히 일신을 일전에 바치고 일전으로 일승을 결정하여 만세 국가의 영광을 장쾌하게 회복하는 것을 꾀하다. 지금 조선 독립을 위해 승리를 구하는 자는 두 길로 병진한다. 하나는 즉 외교, 하나는 즉 군사이다. 이 양자를 버리고 또 다른 길이 없다. 혹 오로지 한 방향으로 해도 그 공을 세우기 어렵다, 그러면 외교와 군사는 하나다. 사경에 생명은 이 양자에 있기 때문에 모든 조선의 산(山)과 천(川)에서 생장(生長) 한 조선 민족의 성명을 가지는 사람은 이날 이 때에 당하여 그가 가진 능력을 다하여 그가 소유한 것을 기울여 생명과 재산으로 체력과 두뇌의 힘으로 이 양도에 공헌하여 목표로 하는 표적지에 달할 것을 노력해야 한다.세계대전의 휴전 조약 성립한 날을 시작으로 우리의 어진 사람과 뜻을 아는 선비는 이미 외교에 착수해 변사의 말은 미국에서 울고 사원(使員)의 깃발은 파리에 나부끼고 국내 청년의 만세함성은 6주를 경동해 5양을 세차게 동요시키고 조선 민족의 견고하고 확실한 자결심(自決心)은 세계에 공포 되었지만 이것은 우리 조선민족의 외교상 제1보의 성공이다. 실제로 지금 이것 때문에 우리 민족 대부분의 일반 심리는 모두를 외교의 한 길에만 들어 우리의 자유를 평화 회의의 처분에 기대해 우리의 독립을 국제연맹의 관념만 바라고 있다. 이것은 즉 광복 진행의 일병이다. 외교만으로 충분히 국가를 지탱해 국권을 유지할 수 있다면 세상천하에 그 군인이라고 칭하고 각종 군대의 조직 군사 등라고 칭하는 의로운 이름은 없는가.생각건대 오늘날 우리와 적과의 관계는 이러나저러나 동일한 사활 문제이다. 적이 살면 우리는 사망하고 우리 살면 적은 살 수가 없다. 지금 적과 우리 사이의 관계는 단 세치의 혀를 가지고 준조(遵造)한 사이에 해결하려는 것은 그 능하는 것인가 어떤가. 한편 만민의 자유는 신성한 권리다. 일국의 독립은 가치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한마디로 포기하는 것은 쉽지만 이곳을 한마디로 만회하기는 지극기 어려운 일이다. 지금은 단 외교 한 길로 이것을 광복하려는 것은 즉 백치의 미몽이다. 억갑오(億甲午)의 독립과 을사조약은 검은 흉터 아직 마르지않아 우리 조선의 독립자유는 이미 황천에 빠뜨림을 우리는 목격 했다.한마디로 우리 반의 국민이 이미 외교에 종사할 때 다른 반의 국민은 당연히 군사에 헌신해, 하나는 외교의 후원을 만들어, 하나는 내정의 실권을 갖추는 것이다. 하물며 복근(復近) 임시 정부의 포고문을 읽으면 당국의 제군은 이것에 각성 하는 곳이 있어서 일반 국민에 대해 군사 준비에 노력하라고 한다. 아무쪼록 오늘 우리나라 우리민족에 있어 일사를 아까워해 일전을 허가하는가. 10년 마검(磨剣)도 이 때에 있어서 시험하기 위해서 평소의 축시도 여기에 있어서 달할 것. 그로므로 중국, 러시아령 미국령 및 내지 각 단체의 모두가 군사 방면으로 힘을 다한 자는 각처에 기관을 통일해 우방의 원조를 상주해 내외 유일한 대단체를 형성한 후 그 이름을 대조선국민군이라고 명해 일격 아래에 남하 할 것을 계획한다.모든 군사 독립의 신념을 가져 군사 자유에 희망을 교부하는 일반 국민은 우선 신명을 허락해 국민군에 임명해, 그 위에 재산을 기울여 국민군에 교부해, 한편, 각 도 각 군의 호준 영걸(豪俊 英傑)등은 본 사령부와 직접 교통을 열어 각각 그 도군에 기관을 설립해, 군인을 모집해, 군자를 주출해 내외 상응해, 국민 일심으로 우리 독립 자유를 상당한 가치와 상당한 의무로 그의 초연탄우(硝煙彈雨)의 속에 요구하는 것에 면력(勉力) 할 것.

    1599 의병에 관한 건

    경성(鏡城) 헌병대장 보고5월4일 헌기 제814호 고지마 유우(●島 佑)통역관 보고의 최주사(崔主事) 이하 5명에 대해 그 재향(在鄕)중의 행동 내정(內偵)한 건은 다음과 같다.1. 최주사(崔主事) (황준(凰俊)에 관하여, 길주(吉州)군 길성면 동리 김윤변(김允變) 및 전(全)부장 ,백면(白面) 제9리 허을변(許乙丙) 의 말에 의하면 원길주(元吉州) 군장 백면 제9리에 거주했던 자로서 당시 연령 46,7세쯤이며, 지금부터 5,6년전에 포염(浦塩)에서 거주 했는데, 그 거소는 불명(不明)하다. ●인이 포염에 이주하자 폭도(暴徒)에게 살해 당했다는 풍설(風設)을 들었다. 그 가족 4명도 전부 향리(響里)를 인불(引拂)하여, 행●的(行●的) 이지 않아도? ●● 포염(浦塩)에 이주한 것이다. 그리하여 최황준(崔凰俊)이 학식이 있어서 경성(京城)에서 봉직(奉職)[주사(主事) 및 시행(侍行)을 봉직했다고 하나 상세한 것은 모른다]하고 있었기 때문에 향리에 있었던 적은 얼마 없었지만, 재향중의 행동을 아는 자가 있었는데 일러전쟁후 바로 이주했다고 한다.2. 허이●(許李●)(이름 ●규(●奎)) 라는 자, 당시 20살쯤이었으며, 원길주 (元吉州) 도장백면(都長白面) 제9리(里)의 자이지만, 일러전쟁후 바로 포염에 이주했었다. 작년 여름 길주에 ●인(人)의 첩(妾) ●인을 찾아가서 포염에 가서 둘이서 술집을 하고 있었다고 한다. ●인은 일러전쟁 당시 수군(需軍)의 용위(用違)?를 하고 인민에 대하여 사기적인 행위를 한 적이 있었다. 또 도일(挑日)사상을 가지고 일러 전쟁 후 바로 포염에 거주했는데, 그후의 상황이 ●할 때라고 한다.3. 윤군열(尹君烈)은 지금부터 지난 11년 전에 회령군(會寧郡) 공북면(拱北面)에 거주하면서 회령군의 주사(主事)를 담당하고 있었지만, 지금부터 10년전에 이범원(李範元) 이 회령군 부남면에 재주 중, 그 부하가 되어 남동생과 간도(間島)지방에 살고 있었는데 시치(時治)?하고, 18년 7월쯤에 아군이 회령에 진입하고자 해서 이범원(李範元)과 함께 가족을 데리고 러령(露領)인 포염에 수거(遂去)하여, 그후 한번도 회령 지방에 온 적이 없다.4.정남수(鄭南洙)는 전에 회령지방에 거주한 형적(形跡)이 없다. 따라서 그의 행동을 아는 자는 없다.5.김영준(金英俊) (또는 영창(英昌) 이라는 자에 대해서는 내정(內偵)했지만 길주 지방에서는 그 이름을 아는 자는 없다.본건 보고 통보처

    1600 불온우편물 차압에 관한 건

    불령단체 임시정부 13도 총 간부가 보낸 불온 문서에 관해서 작년 11월 고경 제32,899호 민정 훈보 소재의 통하여 금회 또는 통신당국에 의하여 위와 같은 우편물 중에서 별지 번역물과 같은 불온 문서를 발견하여 차압,처분해서 본 우편물은 받는 자 주소불명으로 배달 불능이고 발신자에 환부시킴에 있어서 주소불명이다.발신자 경성 남대문통 후화상회 안수신자 부산부 본정 백산상회 내 정재원(鄭載源)발송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