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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631 간도 일본영사관 전투 상황보고

    당관 관하인 동불사(銅佛寺) 및 세린(細鱗)강 일대지방에 있는 불령조선인 단속을 위해 두도구(頭道溝)분관과 타합하여 순사 26명을 히카리다니(光谷)경부에게 인솔하게하고 전원 무장을 한 채 이달 8일 출발하였다. 도중에 각 부락을 수사하고 동불사(銅佛寺) 북구에서 국민회(國民會) 부구회장 이성학(李成學)이란 자를 체포했기 때문에 순사 7명을 당관으로 호송시키고 일행은 전진하여 천보산(天寶山)에서 두도구(頭道溝) 분관에서 나온 파견대 20명과 만나 11일 그 곳을 출발하여 탄산리(炭山里)를 향하는 도중 우연히도 불령조선인단 약120명과 조우하여 그들과 서로 총을 교전한 결과, 니시다(西田) 부장의 왼쪽어깨에 관통하여 총상을 입어 우선 도움을 주기위해 가도마(門馬) 경부에게 순사9명을 대동시켜 동불사(銅佛寺)를 향해 급행하게하고 곧 당시 전화로 통보해 두고 나서 그 후 일행은 동불사(銅佛寺)에서 귀관 및 두도구(頭道溝)분관에서 응원대와 합하여 같이 참가하게 되어 부근 수색을 모두 마친 후, 지난 14일 오전 무사히 귀착하기에 이르렀다. 불령단과의 교전상황, 그 외에 관해서는 별첨과 같이 히카리다니(光谷)경부로부터 보고가 있을뿐더러 추가되는 사항은 모두 위 와같이 모두 상부 본성대신, 조선총독 그밖에 보고 드리며 가능한 조치해주시기를 이번 기회에 말씀드리는 바이다. 경구

    1632 간도훈춘문제건의요망서(간도훈춘문제건의위원)

    1.간도 훈춘지방에 근거를 두고 있는 부령자(不逞者)의 수괴를 소멸해 없애고 간도 방면 일대에 걸친 치안유지 방법을 확립 하는데 까지 우리 군대를 이지방에 주둔 시킬 것1.일본 중국 서로협력 해서 과격사상의 남하 침입을 방지한다.1.만몽(만주몽고)조약을 간도에 적용 하는 것을 중국 정부에 승인토록 해 간도 일원 구요(摳要)의 각 장소에 우리 경찰관의 주재소를 설치 함과 동시에 치안 유지를 하는데 충분한 우리 경찰관을 증원할 것1.토벌의 일단락을 고하는 요는 양민단(良民團-즉 자위단 과 같은 것)을 조직해 이에 약간의보조를 더해 그 지도는 우리 관헌에서 하도록 한다1재 간도의 조선인을 지도,유액(誘掖)하기 위해 조선 총독 부로부터 사무관을 이곳에 파견 상주 시킬 것1.재 간도 30만의 조선인에 대해 일시동인(一視同仁)의 실(實)를 보일 것, 나아가 문화적 시설을 확장 하고 병원, 학교, 금융기관등의 충실을 기한다1.일본인을 자주 간도에 이주 시켜 동만(東滿)의 부원(富源)을 개척시킨다.1.교통기관의 완비를 요할 것이며 이 기회에 길회철도 차관 본 계약을 체결해 신속히 부설에 착수할 것. 또한 운수 교통을 편하게 하기 위해 조선 함북에서 간도,훈춘에 연락하는 그 요로에 서둘러 경철을 부설할 것을 중국당국에 협상 할 것1.간도의 총영사에는 특히 만주와 조선의 사정에 밝은 민완의 자를 발탁(拔擢)해 그 자격은 칙임(勅任)으로 임명할 것.1.간도의 경비관은 조선 총독부로부터 지휘 감독하는 것이 편함.1.이번 사변에 있어서 직접 간접으로 입은 손해액은 다음과 같다 이번에 간도,훈춘사건 때문에 국경내외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손해는 직접 간접인 것을 총계해 약 600만엔의 견적이 되지만 그중 직접적인 손해는 약 300만엔이고, 조선인이 받은 손해액에 이르러서는 확실히 계산하는 것이 곤란하며, 간도 훈춘 및 그 곳과 연락 하는 지방거주 조선인 약 40만명으로 보아 1인당 약 20엔의 손해를 입었다면 약 800엔의 손해가 된다

    1633 간도출병에 대한 선교사 관련 기사 스크랩

    상하이13년 후(AFTER THIRTEEN YEARS)----------------------------- 3년 2개월 전에 일본정부는 중령과 헌병대 세력을 대한제국의 북쪽 경계지역인 간도(Chientao) 지역에 파병하여, 간도에 있는 대한제국 거주민들이 그 지역의 약탈자로부터 보호해 달라고 호소해 왔다고 강력히 주장하면서 그 지역을 점령해 버렸다. 간도는 두만강의 두 줄기에 둘러싸여 있는 너비 60마일에 길이 300마일의 땅이 펼쳐져 있는 곳이다. 그리고 이 줄기 중 어느 것이 국경선을 형성하는 가에 대한 문제는 1712년 이후부터 중국과 조선 왕국 사이에 있었던 언쟁의 주된 요소로 등장하였다. 이 영토 분쟁을 일본이 점유하자 심양(Mukden)에 있는 비세레갈 야멘(Viceregal yamen)/이 항의를 하였고, 조사단을 지명해 줄 것을 제의하였으며, 고대 경계석과 지도에 있는 북경 옆을 발견해 줄 것을 기대하였다. 일본 헌병대는 그 곳에서 3년 동안 머물러 있었다. 그런 다음 단동-심양(Antung-Mukden) 철도 재건축 분쟁과 간도협약(The Manchurian ConVention)의 시대가 왔다. 만주 협정/ 하에서 일본은 푸순(Fushun)과 옌타이(Yentai) 탄갱과 흐신민튼(Hsinmintun) 철도를 건설할 수 있는 권리와 다른 특권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중국은 손해 없이 간도에 대한 명목상의 통치권을 돌려받게 되었다. 물론, 일본의 출입을 허용하고 쾌거 할 만한 성과를 얻기 위해 아마도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이야기는 잊어 버렸을 것이다. 심지어 간도협약(The Manchurian ConVention)에 대해 거대한 소동을 일으키고 일본인들에게 보이 코트를 시작했던 중국인조차도 잊어 버렸다. 그러나 역사의 자가 반복의 또 다른 예증으로 오늘날 회고해 보는 것은 가치가 있는 것이다. 일본의 강제 점령을 정당화하기 위해 어떤 변화가 있어야 했다. 1907년에 대한제국은 정식으로 일본에 합병된 것이 아니었다. 따라서 그 당시에 도적들로부터 보호를 요청해야 했던 사람은 대한제국 국민들이었다. 오늘날에는 “일본군대가 주둔하기를 원한다고 일반적으로 보고 되는” 사람은 중국 거주민이다. 러시아 제국의 몰락과 대한제국의 불평의 봉기가 최근 역사적 사건에 뚜렷해짐으로, 우리의 옛 친구 만주 hunghutze는 있을법한 이야기를 노골적이고 흥미 없는 다른 이야기에 나누어 줌으로써 볼셰비키 당원들과 폭동을 일으키는 대한제국 사람들로 강화되어야 한다. 이렇게 무대는 설치되었고, 10월 5일에 혼춘(Hungchun, 간도 지역의 북쪽 끝에 있는)에서 도적 떼의 습격이 있었다는 소식을 퍼뜨리기 위해 북경에 있는 일본 공사관이 선택되었다. 위에 언급한 도적들이 다행히도 관용을 보여 아무도 다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그 곳 혼춘에서는 “마을 주민들이 격심하게 고통당하고 있고” 심지어 일본 영사관조차도 약탈당하였다는 것이다. 10월 5일에 도쿄에서는 습격에 대한 “반공식적인 보도”를 했을 뿐이다. 그러나 10월 7일에는 도쿄에서 “혼춘에서 폭행이 일어난 결과로,” “극심한 불안”이 조성되고 있으며, 북경에서는 오바타(Mr. Obata)/씨가 중국 군인들이 행한 부적절한 방어에 대해 와이치아오푸(Waichiaopu)/에게 주의를 기울여 달라고 공식적으로 요청하였다. 10월 8일에는 어제 발표된 도쿄에서 온 장문의 전신이 증언하는 대로 우리는 비공식 대표 그 이상의 존재이다. 도쿄 외무성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중국군대의 확실한 개입 때문에 아마도 북경에 강력한 대표의 필요성이 생기게 될 것이다. 약탈자들이 힘을 얻고 있으며, 완고한 저항을 하고 있는 많은 마을에 있는 일본 영사관과 일본인과 대한제국 거주민들을 위협하고 있다. 군대는 이미 파송되었다.이 전문은, 만일 중국 군인들이 연루된 것이 증명된다면, “그 문제는 그 사건이 만들어낸 다른 문제와 더불어 북경에 제시될 것이라는” 협박으로 끝을 맺고 있다. 우리가 간도와 키린(Kirin)동부에 도적들이 존재하는 것을 의심할 생각은 조금도 없다. 만일 어떤 중국 군인들이 군사행동에 동참했다면 그들은 중국의 다른 지역에 있는 무급의 중국 군인들과는 명백히 다르다. 그러나 우리는, 일반적으로 대중들은 앞에 언급한 도적들이 지금까지 그랬던 것 보다 바로 이 순간에 훨씬 더 포악해졌다는 것에 대해 조금 회의적이 될까 두려워한다.- 특히 지도에서 간도와 혼춘을 찾아보기 힘든 대중들이 말이다. 지도를 찾아 본 사람들은 혼춘이 한 쪽은 대한제국의 국경에, 다른 쪽은 러시아의 국경에 둘러싸여 키린 반도의 연결부에 자리 잡고 있다는 것을 즉시 알아볼 것이다. 혼춘을 지배하는 자는 누구나 이 반도를 지배하는 것이다. 현재 블라디보스톡이 Verkhne-Udinsk와의 이견을 해결하고 극동 공산정부를 세우든가-이 경우 북쪽 국경에 사람이 살지 않는 영토가 있다는 것은 대한제국에 있는 일본 당국에게는 아주 불편하게 될 것이다. 아니면 일본 국방성은, 혼춘 반도가 대한제국으로 “그 소유권이 완결됨으로서” 바람직하게 될 때 블라디보스톡 해안을 궁극적으로 지배할 꿈을 꾸고 있는 것이다. 무질서와 방임정부가 그렇게 먼 지역에서는 정상적인 상태이기 때문에, 품위 있게 지칭되는 “국경지방의 조정”을 갈망하며 대한제국에 있는 일본 당국과 쟁론할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러나 도쿄의 국방성의 방식을 추적하는 것은 항상 흥미로운 것이다.

    1634 의열단 관계기사 스크랩

    종로서발표 작년 말 상해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단의 김모라고 하는 자가 아버지의 환갑을 축하하기 위하여 북경으로부터 조선의 잠입한다고 하여 범죄용의가 있어서 그 달 같은 사람은 작년 말 경성 각지에 있어서 강도사건의 범인과 총격을 하였으며 피해를 입었다고 하며 인속수감 다음날에 이르러 다이쇼 10년 7월 이후에 (이후 판독 불가)

    1635 훈춘사건 보도기사

    훈춘으로부터의 전보에 의하면 2일 오전 3시 갑자기 훈춘마적 약 600여명의 습격으로 정문예를 포함하여 시내가 방화가 되고 피해 다수를 입어서 일본인 사망자가 적지않고 ?? 지금 불에 휩싸여 있으며 구체적인 상황은 조사중이고 훈춘은 거의 전멸한 것 같다. 그 후 마적단은 훈춘 정문예를 습격하여 먼저 우리 영사관에 전력을 집중해서 투석을 날리고 소총으로 공격을 하였으며 주재 일본인에게는 훈춘의 다른곳으로부터 또는 ??계인지는 불명하고 일본인을 공격하는 목적으로부터 본다면 스스로가 ???? 오전 7시를 지나서 ???오는 성의 연락에 의하면 우리 영사관은 반이 불탄 모습이 되었으며 시내 전부 불바다가 되었고 영사는 ?와 운명을 함께 할려고 불과 싸우다가 영사관내에 남아있다고 한다. (주) 부영사는 춘주군삼리씨로서 관원은 ?? 경부다구찌 ?4명이다.

    1636 대한적십자회 관계기사(4)

    6,-최근에 많은 외국인들과 다른 사람들은, 상하이에 있는 프랑스인 거주지에 본사를 둔 “대한 적십자회”/로부터 나왔다고 일컫는 인쇄된 호소문을 우편으로 받았다. 그것은 외관상 회합이 되는 것처럼 보였다. 왜냐하면 악의를 품은 선동자 손 제이 디(J. D. Sohn)/는 회장으로서 이사회의 명예직의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다른 임원들과 명예회계로 관여해 온 미국 장로교 선교회/의 피치(G. F. Fitch)/박사와 명예회장인 필립 제이슨(Phillip Jaisohn)/박사와 더불어 서명을 하였기 때문이다. “적십자”/의 이름 하에 이 서신에 기록된 일본정부에 반대하는 심상치 않은 주장에 대해 내가 주의를 기울이도록 여러 외국인 친구들이 환기시켜 주었다. 이 서신은 블라디보스톡과 만주 북쪽 해안 지역에 흩어져 있는 한인들에게 구호물자를 보내자고 대중들에게 호소한다. 또한 이곳에 있는 이 한인들이 일본의 잔학함과 탄압 때문에 대한제국을 떠났으며, 일본 정부는 이 불행한 대한제국 국민들을 추격하여 소유물을 파괴하고 쫓아내어 추위와 기아를 견디기 위해 이 땅 저 땅을 방황하는 방랑자로 만들고 있다고 이 서신은 주장하고 있다. 이 미국 선교사가 그러한 악의에 찬 선전을 돕는 것이 그의 나이에 맞는 자신의 임무라고 믿는 것일까? 일본이 대한제국을 암울함과 졸렬한 악정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대한제국 정부를 점령하기 수 세기 전에 한인들은 이 외딴 지역으로 이민을 왔고, 이 이민자는 결코 일본의 통치하에 놓인 적이 없으며, 이 미개한 지역에서 견디고 있는 것은, 그 지역과 다른 지역에 있는 가난한 러시아인들이 러시아에서 생겨난 혼돈의 어두운 그림자 아래에서 견디고 있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한 나이든 미국 선교사는, 문명의 선구자의 반열에 있는 것으로 영예를 얻는 워싱턴회의로부터 출발한 나라를 오도하는 그러한 야만적인 진술을 방송에 퍼뜨리는 것을 자신의 특권으로 여기면서, “이 땅에 평화를 가져다주고 인류에게 선의를 가져다주는 것”을 추구해야 하는 자신의 소명을 저버리고 있다. 일본 정부에 반대하는 어떠한 야만적인 주장도 인도주의적인 이름을 가진 “십자군”/, “적십자”/, 또는 어떤 다른 분파의 보호아래 아무런 방해 없이 이루어질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문제시되는 주장을 포함하고 있는 이 인쇄된 호소문은 그러한 모든 [주장들] 중에서 가장 눈에 거슬리는 것 중 하나이다. 이 항의를 신문에 게재해 주신 것을 감사드리며

    1637 혼춘사건 및 관동대지진 관계기사(2)

    만주의 치엔타오(Chientao) 지역에 있는 혼춘(Hungchun)에 현재군사 원정대를 배치한 일본의 목적을 설명하는 주목할 만한 성명서는 최근 이곳에 도착한 국무성의 의장인 미즈마치(Misumachi) 대령에 의해 오늘 여기에서 작성되었다. 토론토에 선교본부를 두고 있는 캐나다 장로교 교회는 치엔타오 지역에서 광범위한 선교활동을 진행 중에 있다. 그들의 센터는 구역 내에 한 개의 규모가 큰 병원과 네 개의 주택이 있는 학교건물을 포함한다. 또한 그들은 이 곳과 다른 지역의 한인이 소유한 많은 학교와 교회를 관리한다.

    1638 혼춘사건 및 관동진재 관계기사(2)

    ●●●대령, 그리고 그가 발표한 정책을 수정할 책임을 받아들이면 아주 상당한 차이가 생기게 된다. 미국과 유럽에 있는 언론들은, 일본 외무성이 미즈마치(Mizumachi) 대령의 서신을 부인하는 것은 일본 군부가 협박을 하려는 시도를 좌절시키려는 위한 일본 정부의 권한 행사를 의미한다고 추정했다. 미즈마치(Mizumachi) 대령의 서신은 일본정부를 곤경에 처하도록 만든 것 같다. 그래서 현재 일본 정부는, 영국 선교사들이 중국 영토에서 선교를 수행하도록 허용하는 조항을 명령하려고 한 것이 아니며, 인도나 아일랜드에서 일어나는 반란을 선동하기 위한 일본인들의 시도에 도움을 주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발표해야 만이 그 위험에서 빠져나올 수 있다. 그러나 일본정부가 이렇게 확신을 시켰음에도 불구하고 간도(Chientao)에서 실제로 일어난 일들로 인해 그 가치가 무색해 졌다. 일본 군부는 그 지역을 철저하게 통제하고 있으며 자신들의 권력에 대해 아주 자부심이 강해서 외국 선교사들을 위협하려고 할 뿐 아니라, 군대에 대해 가해지는 주장에 대한 공명정대한 권한 대행 이사회의 조사심문도 불허하려고 하는 것이 확실하다. 일본 외무성은 조약에 따라 중국의 관할 아래에 있는 한인들을 중국의 영토에서 대규모로 추방했던 책임을 통감하는 것인가? 아니면 부인하는 것인가? 또한 일본 외무성은 수 십 명의 한인 반란 혐의자들을(미즈마치 대령이 직접 인정한대로) 군사법원의 공식적인 재판도 없이 중국 땅에서 즉결처리로 처형을 한 것을 시인하는 것인가? 아니면 부정하는 것인가? 하라(Hara)장관은 실질적으로 간도 지역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의 무장 세력에 하등의 지배권을 행사하고 있는 것일까? 일본군대에 대해 가해진 것과 같은 주장이나 미주마치 대령이 저지른 것과 같은 명백한 경솔함은 영국과 미국에서는 권한대행 이사회의 철저한 심문을 받게 될 것이다. 이 권한대행 이사회가 하는 조정은 국내에서나 해외에서나 신뢰를 얻을 것이다. 문명국의 정부가 군대의 명예를 가볍게 여기는 것과 철저한 조사도 요구하지 않는 미주마치 대령의 진술이 해외에 끼칠 통탄할 만한 영향을 그렇게 가볍게 여기는 것은 거의 믿기지가 않는다. 불과 며칠 전에 세이유카이(Seiyukai) 기관지가 “일본이 진정 군국주의 국가인가?”라는 제목의 하라(Hara)장관의 기사를 게재하였다. 일본이 군국주의 국가라는 신념이 해외 비평가들에게 오해를 받는다고 장관은 주장하였다. 간도에 있는 일본 군부세력이 저지른 중죄에 대한 비난을 수상이 통치하고 있는 정부가 무시할 때, 그리고 외무성의 부인에도 불구하고 일본 국무성이 여전히 일본에서 실권을 잡고 있다는 것이 확실할 때 이러한 오해가 존속될 것이라는 것이 우리가 두려워 하는 것이다.

    1639 간도참변 조선인사상자 일람표

    < 년월일사유주소직업이름나이 9년 10월 25일 화용현불령선인이 확실 兵을 총검으로 죽임불명불명불명불명 동동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9년 10월 31일 대주동에서 죽음 가옥을 수색할때 코이케 대좌를 권총으로 사살함동동동약28세정도 9년 12월 15일 오단하에서 총살의군단 국장으로 불령행동을해 체포 후 조사 중 사망중국 간도 화룡현 덕재 사천병동동김창옥30세 9년 10월 31일 옥천동에서 총살녹국회 과장으로 5연발권총 소지 체포 후 조사 중 사망중국 간도화룡현 강화사 옥천동동이춘근41세 9년 10월 20일청산리 수림에서 사살불명불명불명35세 정도 9년 10월 21일사살불명불명49개의 이름 소유로 불명35세 9년 10월 23일해량촌 전투에서 패배 도주 퇴각중인 것을 사살불명불명불명불명 동해량촌 전투에서 패배 도주 사살동동동동 동해량촌 전투에서 패배 도주 사살동동동동 9년 10월 24일불령선인으로 취조 중 저항 사살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9년 10월 25일교전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동삼도강 잠수하자에서 김좌진의 부하로서 체포 후 취조 중 도망, 사살화룡면 청산리동동25세 9년 10월 26일고하 상류에서 마적과 전투 중 사살불명동동불명 동군정서 통신과장으로 취조 중 사살동동최인홍42세 9년 10월 28일청산리 방면 도망 중 옥석동에서 사살동동동동 9년 11월 7일패주중 옥석동에서 사살화룡현 숭와사대임목김문순불명 9년 11월 8일독립군에서 김좌진의 부하로서 체포 후 취조 중 도망, 사살화룡면 남평동동김규위40세 동독립군에서 김좌진의 부하로서 체포 후 취조 중 도망, 사살불명동불명27세 동탈주를 기도해서 사살동동동불명 9년 11월 12일불령선인으로 취조 중 저항 사살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동동동동동동 9년 12월 9일무기 은닉 등으로 취조 중 도망, 사살화룡현 숭와사대임목안종근42세 9년 12월 11일동동동박창진39세 9년 12월 16일무기 은닉 등으로 취조 중 도망, 사살연길현 허발 원화강동정기선27세 9년 12월 16일무기 은닉 등으로 취조 중도망, 사살연길현동서연봉44세 9년 12월 17일체포 중 도망, 사살화룡현 숭와사대무직한창후35세 9년 10월 24일마적 등과 같이 충돌불명졸병불명22, 3세 동동동동동동 9년 10월 27일동동동동25, 6세 동의군단 재무과 사살동동김무문28 정도 동의군단 병사 사살동동김낙안30 정도 동의군단 재무부장 사살동동이붕재28 정도 9년 11월 2일독립군의 조사책임자 사살구체적인 것은 불명동지익후동 동동동동방길동 동독립군에 가입, 사살동동정상30 정도 9년 11월 4일2도현 부근에서 체포 사살구체적인 것은 불명동김상권25 정도 동2도현 부근에서 체포 사살동동불명23 정도 9년 11월 4일밀정 가족을 살해해서, 사살동동박언28 정도 동군정서 중대장 부하, 사살동동김관회30 정도 동군정서 중대장 부하, 사살동동이진규27 정도 동중국 군인으로 불령자, 사살사살전 중국 군대 보고중국군인김광덕23 정도 9년 11월 11일독립군 가입, 사살불명동김우섭30 정도 동동동동이승범25 정도 9년 11월 13일독립군 경비대, 사살불명동장성원35 정도 9년 11월 19일국민회 통신원, 사살화룡현동지석무19세 동동동동장성오31 정도 9년 11월 19일국민회 통신부장, 사살화룡현동이봉래37세 동동 서기동동김용현25 정도 동동 통신원동동최봉탁20 정도 동동동동이용철21 정도 9년 11월 19일국민회 서기화룡현동이운일45세

    1640 요시찰 조선인 명부

    要視察朝鮮人姓名表 < 事項種別姓名 甲ノ一尹昌錫(윤창석) 甲ノ六盧翼根(노익근) 甲白南薰(백남훈) 甲ノ六白南奎(백남규) 甲ノ一白寬洙(백관수) 甲ノ六白淳濟(백순제) 甲朴錫胤(박석윤) 甲ノ六朴勝喆(박승철) 甲ノ一朴一秉(박일병) 甲ノ六朴淳玉(박순옥) 甲ノ六朴定根(박정근) 甲ノ一卞凞溶(변희용) 甲ノ六董世顕(동세현) 甲ノ六趙尙元(조상원) 甲ノ六張德俊(장덕준) 甲ノ二張基享(장기향) 甲ノ一張仁煥(장인환) 甲ノ二張泳奎(장영규) 甲李光秀(이광수) 甲李齊衡(이제형) 甲李鐘洛(이종락) 甲李英(이영) 甲ノ六李泰熈(이태희) 甲ノ二李達(이달) 甲ノ二林鐘純(임종순) 甲ノ六李義綱(이의강) 甲ノ六李鴻冕(이홍면) 甲ノ六李愚舛(이우천) 甲ノ六李琮根(이종근) 甲ノ一李丙焘(이병도) 甲ノ一劉英俊(유영준) 甲ノ一李揆元(이규원) 甲ノ六林元根(임원근) 甲ノ二李起東(이기동) 甲ノ六李允植(이윤식) 甲ノ六李良傳(이량전) 甲ノ六李昌根(이창근) 甲ノ六林澤龍(임택룡) 甲韓光洙(한광수) 甲ノ一韓軫熈(한진희) 甲ノ六韓林(한림) 甲ノ六咸世豊(함세풍) 甲ノ六韓潤東(한윤동) 甲ノ六孫永壎(손영훈) 甲ノ六曹奎檍(조규억) 甲ノ一宋継白(송계백) 甲ノ六宋福信(송복신) 甲ノ六宋必満(송필만) 甲ノ六南宮㷋(남궁염) 甲玄俊鎬(현준호) 甲ノ二模麟常(모린상) 甲ノ一元達鎬(원달호) 甲ノ一玄德信(현덕신) 甲ノ六文敬憲(문경헌) 甲黃錫禹(황석우) 甲ノ六高志英(고지영) 甲ノ一洪基璜(홍기황) 甲ノ二洪在龍(홍재룡) 甲ノ六璜信德(황신덕) 甲ノ六孔鎮泰(공진태) 甲ノ五高永煥(고영환) 甲ノ六洪承魯(홍승로) 甲田榮澤(전영택) 甲ノ六鄭泰成(정태성) 甲ノ六安業漢(안업한) 甲崔藕植(최우식) 甲ノ四崔東曦(최동희) 甲ノ一崔八鏞(최팔용) 甲ノ六崔業萬 甲ノ一崔謹愚 甲ノ一崔在宇 甲ノ六崔珵淳 甲金在禧 甲金永喜 甲ノ六金雨英 甲金秉瑞 甲金河琪 甲ノ六金志健 甲ノ六金道演 甲ノ六金達浩 甲ノ六金喆寿 甲ノ一姜宗燮 甲ノ一金鐘弼 甲ノ一金尙德 甲ノ一金俊渊 甲ノ二金煥 甲ノ四金恒福 甲ノ五金鐘遠 甲ノ五金銕 甲ノ六金鎮兌 甲ノ六金凞述 甲ノ二金周鳳 甲ノ二金相恒 甲ノ六金用茂 甲ノ二金洛泳 甲ノ六金永達 甲ノ六兪億業 甲辛在昇 甲車泳基 甲徐椿 甲ノ六申興起 甲ノ六申文休 甲ノ六徐相國 甲ノ六車南錫 甲ノ六徐相賢 甲ノ六徐相漢 甲ノ六閔泳吉 甲ノ六閔丙世 以上 甲號總 < 事項種別姓名 乙號尹仁植 乙號白鎮奎 乙號裵斗● 乙號朴寕根 乙號方春鳳 乙號朴有京 乙號朴桂辰 乙號朴賛鈺 乙號朴有成 乙號朴仲漢 乙號朴衡秉 乙號朴泳黙 乙號朴明國 乙號朴瓉熙 乙號趙鏞海 乙號趙甲 乙號趙松吉 乙號張德震 乙號梁鐘善 乙號李喜晋 乙號李春伯 乙號李薰 乙號李鼎魯 乙號李萬順 乙號李䦎春 乙號劉喆洙 乙號李基術 乙號李雲泰 乙號李澤根 乙號李德榮 乙號李時祚 乙號林山吉 乙號李丁奎 乙號李世容 乙號林長和 乙號李斗榮 乙號李重國 乙號李春均 乙號李鳳洙 乙號李圭南 乙號李鎬泰 乙號林世熙 乙號李魯河 乙號柳来禎 乙號李肯鐘 乙號李起鴻 乙號河天源 乙號宋公明 乙號宋淑伊 乙號宋昞朝 乙號宋悳煥 乙號金烱斗 乙號金萬古 乙號金允賢 乙號金時斗 乙號金敬澤 乙號金鳳瑞 乙號金又晩 乙號金奉石 乙號金且萬 乙號姜海英 乙號姜又渊 乙號金達用 乙號金應焘 乙號姜宗秀 乙號金洛俊 乙號金仁寿 乙號金安植 乙號金瑞集 乙號金裕濟 乙號金洪秀 乙號金萬成 乙號金星煥 乙號金鳳九 乙號金文輔 乙號金性徠 乙號金富成 乙號権致三 乙號桂應詳 乙號玄仁祥 乙號夫南凞 乙號洪元潞 乙號髙永珣 乙號洪熙豊 乙號吳永燮 乙號丁来吉 乙號鄭宗善 乙號田凞哲 乙號鄭朮忠 乙號鄭周彦 乙號鄭在鳳 乙號鄭德裕 乙號鄭光好 乙號鄭成澤 乙號崔德用 乙號蔡相郁 乙號崔元淳 乙號崔鐘學 乙號金泳柱 乙號金成麗 乙號金範寿 乙號明麟華 乙號申鴻雨 乙號申泰均 乙號辛在昇 乙號趙正欽 乙號閔丙世 乙號裵凞慶 乙號裵正也 乙號裵雲成 乙號金敏轍 以上 乙號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