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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독한인회 일제지배 비난 성명서(독.영어) |
일본에 의해 국민들이 가장 야만적이고 무자비하게 억압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있는 한국의 역사는 4,256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있다. 최근까지 한국 국민은 외세 정복자의 멍에 아래에 놓인 적이 한 번도 없었다. 13세기 무렵 몽고의 대황제 징기즈칸이 아시아에서 유럽까지 영토를 확장했을 때 몽골 군사들은 한국을 정복하기 위해 수십 년 동안 싸웠으나 허사로 돌아갔다. 그리고 2세기 이후 일본은 한국을 계속적으로 공격하였다. 특히 1592년에서 1598년 사이에 일본 원정대는 조선 땅을 자기들의 손아귀에 넣으려고 극도로 애를 썼다. 자기만족에 빠진 조선정부가 너무 약해져서 근대 일본 제국주의가 이 나라에 침투하는 데 성공한 것은 마지막 왕조가 끝나가고 있을 무렵이었다. 전략적으로, 지리적으로 한국은 유럽에서 발칸반도가 갖는 비슷한 위치를 극동에서 차지하고 있다. 30년 이후로 한국은 극동에서 열강들의 정치적 경쟁의 초점이 되어왔다. 일본은 1894년 중일전쟁과 1903년 러일전쟁에서 승전국으로 부상하였다. 따라서 전쟁의 승리로 강력해진 일본은 군사력을 동원하여 1910년 8월 29일에 최종적으로 완결된 합병을 가능케 한 조약을 체결하도록 한국 국민들에게 강요하였다. 이 합병을 통해 8천 2백만 스퀘어 마일의 영토가 2천만의 국민들과 함께 일본 장성들의 야만적인 군사지배에 넘어가게 되었다. 일본의 지배 하에서 자유와 독립을 위해 투쟁하다가 쓰러져 간 무수한 한국국민들이 있었다. 1919년 3월1일 한국의 전 국민은 독립과 자기발전에 대한 양도할 수 없는 권리를 찾기 위해 비무장의 시위를 위해 일어났다. 이 시위는 일본인들에게는 더욱 피비린내 나는 힘을 과시할 수 있는 기회였다.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총에 맞아 쓰러졌고 매질당하고 불에 태워졌고 감금되어서 가장 야만적인 처우를 받았다. 2백만의 시위자들 중 7,509명이 죽었고 15,961명이 다쳤으며, 46, 948명이 장기 금고형을 받았다. 47개의 교회와 두 개의 학교와 715채의 집을 마음대로 태워버렸다. 독립운동이 특히 격렬했던 만주에서는 전해지는 보도에 따르면 3천 명 이상이 죽었고, 2천 5백 채의 집과 많은 학교와 교회가 불탔다고 한다. 일본인들은 정치범을 고문하는 교묘한 방법을 고안해 내었는데, 그 잔인성은 중세시대의 이단 심문보다도 더 심해서 이루 말할 수가 없다. 사형을 시키면 사회에 불안을 조성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지성인들에게는 신경체계에 강력한 전류를 보내 고문함으로써 정신이상자로 만든다. 대나무로 만든 못으로 남녀의 성기에 넣고, 피부를 떼어내며 눈알을 비틀어 빼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것이다. 1919년 3월에 한국 임시정부가 서울에서 조직되었고, 일본의 압박 때문에 나중에 상하이로 옮겨갔다. 이 임시정부는 여전히 한국의 독립에 이바지하는 모든 운동을 수행하며 활동하고 있다. 물론 일본정부는 자신들의 비인간적인 행위를 세계로부터 은폐하는 법을 알고 있다. 심지어 한국 국민들이 전보다 더 잘 살고 있고 일본이 한국의 전체 문화 수준을 높이고 있다고 일본은 선포하고 있다. 이러한 주장이 사실과 부합되지 않는 다는 것은 베를린에 있는 한 미술 거래상이 최근 일본에서 지진을 경험한 것을 설명하는 10월 9일자 Vossische Zeitung의 기사로 증명된다. 그는 일본이 한국인을 어떻게 다루는 가에 대한 진실을 말해 주고 있다. “한국인들 사이의 대학살”이라는 머리기사 아래에 부르카르트 박사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지진이 일어났다는] 불행한 소식이 전해지자마자 일본정부는 질서를 유지하고 약탈을 방지하기 위해 군함과 군인들을 급파하였다. 요코하마에 3천 명의 죄수를 수용하고 있는 한 감옥의 문이 열렸고 방출된 죄수들이 도시에 남아있는 것을 약탈하기 시작하였다. 이들 중에서 몇 몇 한국인이 있었을 지도 모른다. 그러나 군인들은 제일 먼저 한국인이 도시에 불을 질렀고 우물에 독약을 뿌렸으며 지금은 도시를 약탈하고 있다는 소문을 퍼뜨렸다. 그 결과 한국인들을 끔찍하게 죽이는 대학살이 일어났다. 한국인이 발견되는 곳이면 어디나 잔인한 군중들이 린치를 가했다. 마침내 군인들은 강제로 한국인들을 “보호”하에 군대 주둔지로 데려갔다. 이 보호가 어떤 보호였는지는 독일인 목격자가 나에게 알려주었다. “거센 불이 자고 있는 한국인들 위에 타오르기 시작했다. 만일 누군가 벌떡 일어나면 그것은 새로운 대량학살의 신호가 되었다.” 보호라는 명분 하에 모인 1만 5천명의 한국인들 중에 살아남은 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심지어 유럽인들도, 군부대가 한국인들은 사람들을 모조리 죽인다고 주장해서 그러한 표시가 전혀 보이지 않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으로 공포에 싸여 있었다. 한국인들을 몰살시키기 위한 기회만이 이용되고 있었던 것이다. 일본정부의 떳떳치 못한 마음은 다음과 같이 표명되고 있다: “한국에서 정치적 난국과 폭동이 생기지 않도록 일본 정부는 외부 세계와 모든 유무선 통신사용을 금지한다.” 그러나 우리 한국인들은 여전히 자유와 독립에 대한 이상을 우리 마음과 생각속에 고이 간직하고 있고 그것을 위해 어떠한 희생을 치룰 각오도 되어 있다. 우리는 인간애와 정의를 중요하게 여기는 세계의 모든 사람들에게 우리의 힘든 투쟁에 도움이 되어 줄 것을 호소하는 바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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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일 등이 일본수상에게 보낸 편지 |
기미년(1919) 7월 일, 조선인사 서일 계화 김붕 김일봉 정신 김암 등은 삼가 절하고 일본 내각총리대신 원경 합하께 편지를 올립니다. 때는 두 번 다시 오지 않고 세력은 양립할 수 없으니, 시무(時務)를 아는 사람은 귀하게 되고 세력을 인연하여 세력 있는 자리를 조종하는 사람은 귀하게 된다고 들었습니다. 때를 탄다는 것은 이른바 ‘시세(時勢)가 아니면 영웅을 만들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지금 일본은 과연 동아시아의 선진국이 되었습니까? 그렇다면 저희들은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습니다. 훗날 일본은 그 때도 세계의 부강한 국가가 되겠습니까? 그렇다면 역시 저희들은 감히 말씀드리지 않을 수 없으니, 집사께서는 저희들이 조선인이라 하여 조선을 위해 드리는 말씀이라고 치부하고 듣지 말아야 할 것이니, 그렇게 되면 동양을 위하여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한번 보십시다. 서양 세력의 동점(東漸)이 하루하루 심해지는데 아직도 동양인의 위세가 먼 서양의 한 뼘 땅에 미쳤다는 소식을 들리지 않음은 어째서 입니까? 그것은 5대양 민족 중에 가장 앞선 세력을 점하고 있는 자는 오직 백인이고, 6대주(大洲)에서 크게 시국의 경쟁장이 된 곳이 동아시아입니다. 영국이 인도를 통치하고, 프랑스가 안남(安南:베트남)을, 독일이 소아시아를, 러시아가 시베리아에 대하여 모두 그렇습니다. 일본은 아침 해가 떠오르는 기세로 극동지역의 한 모퉁이에 우뚝 서 유신(維新) 50년 만에 울연히 동아시아의 강국이 되어, 한 번 싸움에 청나라로부터 대만을 분할하였고, 두 번 싸워서 여순(旅順)을 러시아 령으로부터 빼앗고 독일의 조계(租界)에서 청도(靑島)를 점령하였습니다. 이에 일본의 세력은 해가 중천에 있는 것처럼 드러났고, 백인들은 극동 지역에 대한 책략은 마침내 크게 꺾였습니다. 그러나 오늘 날 일본은 다만 땅을 넓히는 데만 힘쓸 뿐이라면 그만이거니와 만일 뿌리를 깊게 하고 줄기를 굳게 하여 황인족 사이에서 패자(覇者)가 되어 장차 백인들의 의지를 능가하려 한다면 일본이 현재 동아시아에 시행하는 정책도 이미 늦습니다. 어째서 인가? 다만 19세기이래로 서양인들의 침략주의의 묵은 자취를 주워 모을 수는 있어도 참으로 20세기에 갈수록 더욱 새로워지는 좋은 정책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그 효과는 항상 서양인들의 뒤에서 눈을 휘둥그레 뜨고 서 있게 됩니다. 그러나 얼마나 다행스럽게도 하늘은 가득 찬 것을 누르고 강대한 것은 반드시 꺾는지라, 유럽의 전쟁이 뜻밖에 일어나 우월하고 강한 백인들끼리 서로 죽이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황인족의 재앙은 그로 인해 조금 누그러졌을 뿐입니다. 만일 몇 년 전의 백인 나라들이 한 마음으로 힘을 합쳐 오로지 극동지역을 노렸다면 한 일본으로써 능히 그 기세에 맞설 수 있었겠습니까? 그 형세는 참으로 추(鄒)나로써 초(楚)나라를 대적함을 면하지 못했을 것이요 황인족의 살은 강한 백인들의 먹이가 되지 않을 사람이 거의 없게 되었을 것입니다. 지금은 영국과 독일, 프랑스와 러시아의 세력이 한쪽은 죽고 한쪽은 상하였으니, 만일 중립해 있다가 그 변화를 보아가며 상한 것을 따라 찌른다면 저 백인들이 어찌 시장 점포에 널린 물건 같은 신세를 면할 수 있겠습니까? 이때 황인족이 지지부진함은 그 또한 백인들의 다행입니다. 전쟁이 벌어진 뒤로 지금까지 구주(歐洲) 백인들의 나라에서는 상처받지 않은 자가 없어 백 년 동안 진행해 온 극동에 대한 책략이 한꺼번에 물거품이 되었습니다. 이에 서서 계획한 자는 그 배꼽을 물어뜯을 것이요 앉아서 이야기나 하던 자들은 그 발을 그려 시대를 구하고 형세를 유리하게 이끌 계책을 짜내기에 급급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평화 회의가 마치자마자 국제 연맹에 대한 논의가 다시 일어나고 있으니, 이 두 가지는 백인들을 위한 계책은 되겠지만 참으로 황인족들에게는 이로움은 아닙니다. 어떻게 그렇게 말하느냐고요? 오랫동안 전쟁으로 백인 중에 성년(成年)된 자들이 열에 하나도 남지 않았으니 이렇게 몇 년 만 더 끌어간다면 백인족은 남아 남지 못할 것입니다. 이것이 평화회의가 빨리 열리지 않을 수 없었던 이유입니다. 또 전란을 겪은 여러 나라들이 국미들과 함께 휴식하여 국민을 기르고 나라를 부강하게 할 교훈으로 삼을 계책을 삼지 않는다면 백인족들은 강해질 날이 없을 것이니, 이것이 국제 연맹에 대한 모임을 이어서 일으키지 않을 수 없는 이유입니다. 비록 그렇기는 하지만 저 백인들이 어찌 동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을 두려워하겠는가? 오직 일본이라는 한 나라가 있으니, 백인들이 베개를 높이 베지 못하는 것은 황인들의 화가 일어난다는 설이 계속해서 일어나기 때문입니다. 밖으로는 평화론을 퍼뜨려 동서의 약소한 여러 민족을 단합하기를 꾀하고 안으로는 실제 황인족이 강해지는 것을 견제하자는 것이니, 호주(戶主) 사람들의 차별을 철폐하지 않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며, 미국인들의 배일(排日) 운동이 때로 격렬하게 일어나는 것이 또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습니까? 이는 참으로 동양의 지사(志士)들이 통탄하고 눈물짓지 않을 수 없는 시기요 방관자들은 이것은 황인족의 위기라고 하지 않는 이가 없는데, 당국자는 오히려 스스로 편안할 생각만 하고 있으니 어찌 혼자만 원교근공(遠交近攻)의 계책에 어두운 자가 아니겠습니까?지금 진취주의(進取主義)를 견지하고 있는 자들은 ‘섬나라는 답답해서 살 수가 없다. 반드시 반도(半島)를 병탄(倂呑)해서 대륙으로 진출할 근거로 삼은 뒤에야 동양의 패권을 잡을 수 있고 서양인들의 횡행하는 세력을 넘을 수 있다.’고 선동하고 있으나 이것은 바로 시대를 지나치고 대세를 거스르는 소리입니다. 시대의 대세라는 것은 항상 변하지 않는 것이 아닙니다. 세계에서 가장 전제(專制)를 하고 있는 러시아도 공화정(共和政)으로 변했으니 시대에 따라 변하지 않는 위상은 없는 것이며, 세계에서 가장 강한 프러시아도 패하여 포로가 되어 갇혔으니 그렇다면 대세에는 항상 이긴다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지금은 바로 민족 평등의 시대로서 지난날 한 사람이 횡행하던 시대는 아주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른바 침략주의라는 것은 이미 표주박이 되었습니다. 조선에 대한 한 일만 가지고 논해 보더라도, 합병하여 일본에 유리함은 하나도 없고 불리함을 야기하는 것은 손곱을 수 없을 지경이니 그것은 무엇 때문이겠습니까? 조선은 오래된 나라입니다. 그 역사가 독립되어 있고 그 종교가 독립되어 있으며 언어와 문자와 윤리와 습속 등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 독립되어 있지 않은 것이 없으니, 이는 대만과 유구(琉球:오키나와)에 비할 바가 아닙니다. 만약 그 민중의 지혜가 조금 열려 인심이 스스로 결정하게 된다면 십 수 년 동안 정부에서 동화하려고 고심한 것이 아무것도 없는 곳으로 헛되이 돌아가고 말 것이니, 그 불리함이 하나입니다. 합병 이래 한국에 시행한 정책이 ‘담아 둔 물이 새지 않는다.’고 스스로 여기고 있습니다만, 대나무 순이 눌러도 옆으로 삐져나옴을 염려하여 교활하게 꺾고 남몰래 소매로 가리는 것과 같습니다. 그러므로 관직에 있는 자들은 대도시에서 혼자 나다니지 못하고 항상 경찰의 힘에 의지하여 마음과 재물을 낭비함이 끝이 없으니, 그 불리함이 둘입니다. 조선은 가난한 나라입니다. 온 나라의 재정을 다 털어도 경상(經常) 비용을 댈 수 없습니다. 그렇다 보니 모국(母國)의 재정을 덜어다 보충하지 않을 수 없으니, 그 불리함이 셋입니다. 조선 민족은 강한 민족입니다. 싸움에 나서서는 후퇴함이 없이 등을 적에게 보이지 말라는 유훈(遺訓)의 습관이 이미 오랫동안 사람들의 마음에 젖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른 봄에 독립을 선언한 이래로 맨주먹이지만 붉은 마음으로 하나가 쓰러지면 다른 하나가 일어나서, 비록 주거나 감옥에 들어가는 참상을 겪더라도 용감히 자신을 돌보지 않고 기필코 광복하고야 말겠다고 하고 있습니다. 새도 궁하면 사람을 쪼는 것이거늘, 하물며 온 나라 사람들이 일심(一心) 동성(同聲)으로 부르짖는 것이야 말할 것 있겠습니까? 만일 일본이 대대적으로 진압정책을 써서 수만 명의 군대를 동원하고 수억의 재산을 써 요행이 모두 이긴다고 해도, 참으로 그 마음을 열복(悅服)시키기는 어려울 것이니, 그 불리함이 넷입니다. 또 황인족끼리 싸움은 백인이 이로우니, 그것은 조개가 도요새를 물고 있으면 반드시 어부(漁夫)의 독수(毒手)가 있을 것이며, 참새가 사마귀를 잡으려 할 때는 사냥꾼의 화살이 없지 않으니,4) 그 불리함이 다섯입니다. 일본과 한국의 전쟁이 일어나면 중국의 반대당(反對黨)과 러시아의 과격파도 그 기회를 틈탈 것이니 동양평화를 유지하겠다는 정책은 무너질 것이니, 그 불리함이 여섯입니다. 또 일본의 강함은 구미인(歐美人)이 싫어하는 바라, 그들이 조선의 독립을 도와준다고 하는 것이 어찌 우리 한국을 애련(愛憐)히 여겨서겠습니까? 그 방법은 참으로 점점 일본의 세력을 깎아 내려는 것에서 나오지 않은 적이 없습니다. 그렇다면 반드시 군사를 움직이고 재정을 소비하는 것도 아깝게 여기지 않을 것이니, 혼자 여덟을 굴복시키는 것이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이것이 불리함의 일곱 번째입니다. 이렇게 크게 불리한데도 일본에서는 오히려 이롭다고 여긴다면 이것은 저희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바입니다. 오늘날 동아시아를 위하는 계책은 양쪽이 서로 이롭게 되는 것 만한 것이 없는데, 그것은 조선을 분립(分立)하는 것이니, 이는 실로 옛날 우방을 부식(扶植)하겠다는 맹약(盟約)으로 중국과 친선하여 전 동양의 편화를 유지하는 정책으로, 세 나라가 정치(鼎峙)하여 서서 입술과 이처럼 의지하여 그 주권을 공고히 하고 그 실력을 길러 구미(歐美)의 4대 강국과 균형을 다툴 수 있게 된 뒤에야 나아가 안남과 인도 등 동아시아의 여러 민족을 백인들의 굴레에서 구원할 수 있으니, 그렇게 된다면 서양인들이 감히 동쪽으로 고기잡이 하지 못할 것이요 동양인들은 일본에게 덕을 돌리지 않는 자가 없을 것입니다. 이렇게 된다면 천하를 대적한다 해도 무엇을 꺼려 못하겠습니까? 백인들이 일패도지(一敗塗地)하면 일본이 동아시아에서 홀로 웅거하게 됨도 시세(時勢)의 조화가 아님이 없으리니 그야말로 천재일우(千載一遇)의 호기입니다. 때가 이르러도 실행하지 않는 것은 바로 지혜로운 이들이 경계하는 것으로 그 허물 또한 적지 않으리니, 어찌 당국(當局)의 집사(執事)가 깊이 도모하고 멀리 생각해야 할 것이 아니겠습니까? 일찍이 오늘의 5대 강국이 나란히 있는 것은 일본이 자부하는 기쁨과 영화(榮華)가 되기에 부족하며 인종차별은 일본의 막대한 치욕입니다. 그러므로 저희들이 이 계획은 참으로 제(齊)나라를 먼저하고 진(秦)나라를 뒤로 하자는 등의 계획이 아니며, 일본이 이 계획을 쓰는 것도 초나라를 위한 것이지 조나라를 위한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광부(狂夫)의 말이라고 버리지 마시고 또한 자신을 위한 계책이라고 의심하지 마시길 바랍니다. 그렇게 되면 실로 우리 동양의 다행이고 황인 민족의 복일 것이니, 합하께서는 재량(裁量)하시길 바랍니다. 삼가 편안하시기를 바랍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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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민의 조선망국사 강연 보도기사 |
얼마 전, 한국의 지사 김화민(金化民) 선생이 용주(甬州)(역주: 현재의 영파寧波 지역)에 와서 사사일고소(四師一高小), 성음(星蔭) 진신당(眞神堂), 각 학교, 교회 등지에서 조선의 슬픈 망국사에 대해 이야기하였는데, 다음과 같이 네 부분으로 요약할 수 있다. ① 조선이 망한 이유: 혹자는 도덕이 땅에 떨어진 탓이라 하고, 혹자는 당파 싸움 탓이라 하고, 혹자는 법제의 불평등 탓이라 하고, 혹자는 빈부의 차가 격심한 탓이라 하며, 이러한 원인으로 인해 결국 외세를 빌어 스스로 민족을 멸하고 나라를 망치게 되었다고 하는데 모두 우리나라의 현재 정세를 바르게 설명한 것이 아니라 하므로 고개를 끄덕이지 않는 이가 없었다. ② 보호화(保護化) 시대 일본의 학대 정책: 우선 한국 군대와 경찰을 철수시키고 일본 병력 40만 명과 일본 경찰 10만 명을 한국 전역에 주둔케 하여 한국인의 저항을 막았다. 그 다음으로, 한국의 역사 서적을 불사르고 한국 글자의 사용을 금하여 한국의 국수(國粹)를 말살함으로써 한국인이 애국심을 품을 여지를 근본적으로 없애려 하였다. 또한 한국의 민간 사유지 계약마저 무효화 하여 한국인의 재산권을 빼앗고 생활 능력을 없애는 한편 한국인이 세운 공사립 학교를 폐교하고 일본인이 자체적으로 학교를 세워 운영하도록 했다. 서울에 식민 교육을 담당하는 보통중학교(普通中學)를 세우고 초등소학교(初等小學)에서는 한국인에게 일본 글자를 가르치는데, 외관상으로는 한국인이 자체적으로 학교를 운영할 때와 비슷한 것 같지만 그 내용을 들여다보면 실상은 판이하였다. 한국의 말과 글자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고 교사는 전원 일본인으로 충당하였다. 또 반장은 반드시 교활한 일본인이 맡아 한국인을 감시하는데, 몰래 한국 글자를 배우거나 가끔이라도 한국어로 이야기하는 것을 금지하여, 만약 이를 어기는 자가 있으면 교사에게 보고한다. 처음 어길 때는 한 시간 동안 벽을 보고 서있게 하고, 두 번째로 어길 시에는 지하실에 12시간 동안 가두는데 날씨가 추울 때는 이러한 체벌로 인해 얼어 죽는 경우도 있다. 세 번째로 어길 때는 혀를 자른다. 들리는 바에 따르면 한국 어린이 가운데 이러한 체벌로 벙어리가 된 경우가 이미 10만 명에 달한다고 한다. 다음으로는 보갑(保甲) 제도가 있다. 마을마다 보(保)를 두고, 10가구를 1갑(甲)으로 하는데 보장(保長)과 갑장(甲長)은 모두 일본인이 맡는다. 한국인이 마을을 출입하려면 반드시 갑장에게 보고하고, 허가를 받아야 한다. 또한 기구를 사용하지 못하게 하므로 칼로 야채를 잘라야 할 일이 있으면 반드시 광주리를 얻어 갑장의 집에 가서 베어야 한다. 갖가지 속박은 일일이 열거할 수 없을 정도다. ③ 망국 후, 일본의 학대 정책: 보호화 시기에는 한국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지켜야 할 바 그 범위를 알기에 부녀자를 겁탈하는 일이 없었다. 그러나 한국이 패망한 후, 러시아의 시베리아나 중국의 남만주, 몽고 등지로 배정되는 일본군은 반드시 한국을 거치게 되어있어, 한국에 며칠씩 머물며 황음무도한 짓을 일삼는데 사령관도 이를 금하지 않는다. 한국의 부녀자들은 역사적으로 보아도 중국의 예절을 다른 나라보다 더욱 엄격하게 지켜 예로부터 욕을 당한 여인 가운데 우물에 뛰어들거나 대들보에 목을 매는 경우가 늘 있어왔고 최근 8, 9년 동안 자진한 경우가 이미 20만 명을 헤아리자 일본인은 한국에 거류하는 본국인의 위생을 위해 한국 내에 있는 모든 우물을 메우고 식수는 모두 압록강, 대동강, 한강에서 기계로 퍼 올려 각지로 운수하게 하였다. 이렇게 해서 현재 한국 전역에서는 식수가 소금보다 비싸다. 또한 부녀자들이 긴 끈을 가지고 다니지 못하게 한다. 이러한 까닭으로 한국인은 만약 옷을 세탁하려 하면 반드시 일본인이 운영하는 세탁소에 맡겨야 한다. 심지어 일본인이 각지에 세운 진료소에서는 의사들이 한국의 젊은 부녀자를 대할 때면 창기가 아님을 알면서도 성병 감염을 운운하며 강제로 하체를 보는데 일본 의사의 세척 수술을 받고 나면 임산부의 경우 유산을 하고 임산부가 아닌 경우는 영구적으로 임신을 할 수 없게 된다. 종족을 말살하려는 그들의 음험하고 악랄한 수법이 이와 같다. 가장 분노할 만한 일은 한국 남녀의 결혼 연령을 제한해, 여성은 20세 이전에 출가할 수 없고 남성은 40세 이전에 정혼할 수 없도록 정한 것이다. 남녀가 짝을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20세의 연령차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이 법제화되었으니, 그들의 검은 속셈이 무엇인지는 쉽게 알 수 있다. 남녀가 정혼을 할 때, 반드시 일본 관청에 가서 100원을 내고 혼인허가증을 받아야 하고 이로부터 5년이 지난 후에야 결혼을 할 수 있으니 이때도 반드시 관청에 가서 100원을 내고 결혼증서를 받아야 한다. 즉, 남자는 45세 이전에 아내를 얻어 가정을 이룰 수 없으니 이러한 종족 말살 수단이 미치지 않는 곳이 없다. ④ 독립운동 후, 일본의 잔학한 정책: 보호화 시대와 망국을 거치며 일본인의 갖은 학대를 받는 상황에서도 어느 정도 능력이 있어 출국한 남녀가 약 5백만 명을 헤아린다. 러시아 경내의 거류자가 약 3백만 명, (중국) 동(東) 3성(省) 거류자가 약 1만 명(역주: 1백만 명의 오기로 보임), 구미 각국으로 망명하거나 유학 간 사람이 약 1백만 명인데 이 1백만 명의 한국인은 독립운동 이전에는 우편 왕래를 할 수 있었고 국내의 친척, 친지들과 소식을 주고받았다. 따라서 국내외에 조금이라도 의식이 있는 한국인이라면 나라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굽히지 않아, 국내 각지의 한국 청년들은 우선 각종 조직을 만들고, 기독교의 이름을 빌려 독립의 뜻을 다졌다. 민국 8년, 해외에 거주하는 한국인은 상해 지역으로 각 지역의 대표를 파견해 임시정부를 조직하고 미국에 유학 중이던 한국인 이승만을 임시 총통으로 임명하는 한편, 각부 총장을 선출하였다. 드디어 이태황(李太皇)(역주: 일본에서 고종을 지칭하는 표현)의 출관(出棺)일에 국내외 한국인이 목소리를 모았다. 한 뼘의 무기조차 갖추지 못한 국내의 한국인들이 분연히 일어나 독립을 꾀하여, 당시 각지의 한국 국적의 남녀들 가운데 일본인에 의해 살해당한 이가 약 30만 명이 되었으니 이 얼마나 참담한 일인가. 목적은 이루지 못했으나 우리 한국인의 백절불굴의 정신은 얼마나 가슴을 아프게 하는가. 일이 실패로 돌아간 후, 일본인은 우리나라 청년 남녀 가운데 기독교를 믿는 이가 있으면 어떤 경우를 막론하고 의심하고, 불태워 죽였다. 현재 해외에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은 귀국을 할 수도 없을 뿐더러 서신 왕래도 반드시 검사를 받아야 한다. 국내의 한국인은 더더욱 국경을 한 발자국도 나갈 수 없다. 김 선생이 연설할 때, 그 목소리는 비장하고 처량하여 듣는 이들의 눈시울을 적셨다. 김 선생은 한국 평양 사람으로 나이는 50여 세인데 청조 때 우리 중국 북양무비학당(北洋武備學堂)에서 유학한 일이 있고, 나라가 망한 이후에는 국사를 도모하며 중국과 러시아 양국을 누비고 다녔기에 중국과 러시아 양국의 언어와 문자를 잘 안다. 상해 임시정부가 성립되자 선생은 중국 각 성 내의 선전 활동을 맡아 중국인의 동정심을 불러일으켰다. 그의 족적은 이미 중국 동남북 12개 성에 미치며 이번에 항주(杭州), 소흥(紹興), 금화(金華), 구주(衢州), 엄주(嚴州) 각지에서 출발하여 육로로 온주(溫州)에 이르고, 온주에서 태주(台州), 태주에서 봉화(奉華), 봉화에서 다시 여요(余姚), 그리고 자계(慈溪), 진해(眞海)를 거쳐 7일 밤 용주(甬州)에 도착했고 어제 상해로 돌아갔다 한다. 김 선생의 부인은 한국에 있다가 몇 년 전 일본인에게 화를 당했고, 일본 정부는 지사에게 현상금을 걸었다. 그러나 우리는 지사의 뜨거운 애국심에 경외심과 함께 동정심을 갖게 되었으니 이를 싫어하는 자라 하여 어찌 그에게 또 다른 위해를 가하겠는가? 우리 용주 지역에 온 지 며칠이 되었을 때 그외 의를 흠모한 사람은 잇따라 그를 뵈러갔었다. 그가 떠났을 때 여비를 드렸다. 예를 들면 ●紹公同内의 客友 공사 분들은 10원씩, 채량초(蔡良初) 2원, 진행손(陳荇孫) 2원, 택민원(澤民院) 2원, 장현민(張顯民) 2원, 이소금(李嘯琴) 1원, 왕순전(王舜田) 1원, 사범(師範) 5원, 성음(星陰) 5원, 목사(木社)의 동인들이 10원씩을 내놓았다. 이로써 김 선생이 사람들을 얼마나 깊이 감화시켰는지 알 수 있다. 오직 이해할 수 없는 일이있다. 10일 밤(즉, 일요일) 김 지사가 청년회에서 잠시 연설 시간을 갖고 망국의 한을 호소할 예정이었다. 이 모임에는 세 가지 조건이 붙었다. 첫째는 도(屠) 선생이 먼저 연설하여야 하고, 둘째, 동인들에게 모금을 권하지 말 것이며, 셋째는 시간을 10분으로 제한한다는 것이다. 김 선생은 망국의 슬픈 한을 말하기에 앞서 이 조건을 받아들이고, 분노를 억누르며 자리에 앉아 도 선생의 연설을 들어야 했다. 도 선생의 연설이 끝나고 자리에서 물러나면 대략적인 보고를 하려 했는데 뜻밖에 도 선생의 연설이 너무 길어졌고, 또 남만주 고려의 옛 땅에서 사들인 일본인의 간인 도서 여러 장을 방 한 가득 펼쳐놓으며 말끝마다 일본인이 한국과 남만주에서 얼마나 질서 정연한지, 그리고 해당 지역의 일본 경찰과 일본인들이 얼마나 중국인에게 깍듯한지를 말했다. 현재 남만주에서는 전혀 불만 사항이 없으니 이는 이것(일본 통치)을 인정하는 것과 다름 없다고 하였다. 김 지사는 이(도 선생)에 분노를 느끼고, 더 이상 참을 수 없어 자리가 끝나는 것을 기다리지 않고 나가버리니, 청년회의 일은 그들이 말하는 소위 인격적인 구국과 박애의 인도주의자가 아니다. 도 선생의 언행이 이와 같으니, 이것이 어찌 청년회의 뜻이라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