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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061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

    작성일: 1950-02-26발신자: 서재필(Philip Jaisohn) 박사님수신자: 서재필(Philip Jaisohn) 박사님수신주소: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메디아(Media)발신주소: 사학부 캘리포니아 대학 캘리포니아(California)주 버클리(Berkeley) 4친애하는 서재필(Jaisohn) 박사님께,요즘 저는 한국의 독립 단체에 대한 간단한 역사적 연구를 하고 있습니다. 이 단체와 관련하여 박사님이 중요한 위치에 있고 믿을만한 자료가 비교적 부족하기 때문에 제게 절실히 필요한 정보를 박사님께서 제공해 주신다면 매우 감사하겠습니다. 몇 가지 의문 사항이 있습니다. 첫째, 1896년 여름에 독립 단체를 처음으로 설립한 6명이 누구입니까? 저는 박사님을 포함한 3-4명의 명단을 가지고 있지만 나머지 인물들을 확실히 알 수가 없습니다. 둘째,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씨는 그의 저서인 “한국의 소멸”에서 독립 단체가 정식 단체가 되기 이전에는 원래 “다소 비밀스런 단체”라고 언급했습니다. 그의 말이 사실일까요? 사실이라면 이 “비밀스런 단체”의 유래는 어디서 찾을 수 있습니까? 셋째, 호머 헐버트(Homer Hulbert) 씨는 이 단체의 목적을 두 가지로 분류했습니다. 즉, 이 단체가 한국의 독립을 지지하는 한편 국왕의 대권을 과감히 제한하는 합법적인 군주 정치도 옹호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볼 때 이 단체가 초기에 성공을 이룰 수 있었던 이유는 첫 번째 목적을 추구했기 때문이고 이후에 실패를 했던 이유는 부패한 관료들이 두 번째 목적에 대항했기 때문이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박사님께서도 그렇게 생각하십니까? 넷째, 이 단체 역사에서 러시아나 일본 같은 외세의 저항이 중요한지 평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외세의 선동으로 독립 단체에 대항하여 직접적으로나 간접적으로 행했던 명백한 활동에 대해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다섯째, 1898년 박사님께서 한국을 떠나신 후로 이 단체 지도자들과 연락을 하실 수 있었습니까?이렇게 폐를 끼쳐 대단히 죄송합니다. 하지만 박사님께서는 제게 필요한 정보를 충분히 주실 수 있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박사님께서 민주적인 노력을 성실히 이행하신 점을 매우 존경하고 있습니다. 박사님의 그러한 노력은 독립 단체의 역사와 독립 신문을 발행하는 데 실례를 제시해 주었습니다. 따라서 타락과 부조리, 그리고 제국주의가 만연하는 시대에 한국의 미래를 위한 커다란 약속을 해주었습니다. 재배(서명)

    1062 서재필과 뮤리엘의 미국시민권에 대한 공증서

    델라웨어(Delaware)에 거주하는 서재필(Philip Jaisohn)은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 자치주의 법에 따라 다음과 같이 제 앞에서 서명하고 공증합니다. 그는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의 아버지이며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은 1910년 2월 18일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k@주 @k@델라웨어(Delaware)에서 장녀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미국에서 태어난 미국 국민입니다. 더 이상의 선서는 없습니다. (서명)1950년 2월 16일에 위 내용이 사실임을 제 앞에서 서약합니다.(서명)공증 사무소저의 위임권은 1951년 1월 20일에 만료됩니다.

    1063 로얄 J. 왈드(Royal J. Wald) 박사에게 보낸 편지

    작성일: 1950-03-06발신자: 로얄 J. 왈드(Royal J. Wald) 박사수신자: 로얄 J. 왈드(Royal J. Wald) 박사수신주소: 사학부 캘리포니아 대학(California University)친애하는 왈드(Wald) 박사님께,한국의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의 역사에 관한 박사님의 2월 26일자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저는 미국 학회에서 10년을 연구한 후에 1896년 1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하기 몇 달 전에 일본과 중국은 평화 협정을 맺고 한국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존에 합의했습니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일부 진보당원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모든 공식적인 지위를 거부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많은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는 민주적인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은 신문 매체를 통해 교육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며 대중 토론, 종교 집회, 기타 방법을 사용하여 대중 교육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이라고 하는 첫 일간지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을 통한 교육 작업은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라는 이름으로 수행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언론의 자유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의 창립 발기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벤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을 졸업한 윤치호(Yun Cho Ho) 남작, 전 재미 한국 대사관이었던 박제순(Park Jay Swoon), 외무장관인 이완용(Ye Waan Yong), 장군인 안경수(Ahn Kayun Su)입니다. 이들은 노련한 정치가들은 아니었지만 진보적이었고 배움의 의지가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저를 좋아했으며 한국이 대중 교육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저의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국왕에 대한 불만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한국을 다스려왔던 보수당원들의 간섭으로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는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고 저희 집에서 창립식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의 목적과 목표를 신문에 발표했으며 매 주 가졌던 토론회에서도 발표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협회의 주요 목적이 국민 교육에 있으므로 정치 단체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군주 정치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특정 개인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항하여 솔직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국왕과 그의 측근들은 이 협회를 적대시하였습니다. 러시아와 일본 공사가 협회와 대립된 입장을 고수하게된 이유는 미국의 민주주의 이상이 한국 국민들 가슴에 심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공사인 웨버(Weber) 씨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에스토니아(Estonia) 사람으로서 그는 한국에서 제가 수행하고 있는 업무가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보면 허용되지 않은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제 업무 목적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웨버(Weber)씨를 대신하여 스페이어(Speyer)라는 새로운 장관이 임명될 것입니다. 그는 웨버(Weber) 씨와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며 교양 없고 무례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처음 만난 이후로 그와는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저는 주한 미국 공사인 호레이스 앨런(Horace Allen) 박사님으로부터 한 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미국 국무성(State Department)으로부터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와 관련하여 수행하는 제가 활동을 그만두거나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워싱턴에 머물러 있었던 러시아 대사 캐시니(Cassini) 백작이 저의 활동으로 인해 한국 내에서의 러시아 이익에 지장을 준다고 국무성(State Department)에 의의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국무성(State Department)은 저를 미국으로 소환시키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제 스스로 활동을 중지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당시 워싱턴 행정부는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국무성(State Department)이나 호레이스 앨런(Horace Allen) 박사님이 제게 그러한 제안을 하는 과정에서 강요는 없었다고 밝히고 싶습니다. 제가 1898년 5월에 한국을 떠난 후, 경찰의 명령에 의해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는 폐지되었고, 신문도 폐간되었으며, 토론회도 금지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금지 명령이 한국의 보수당원들에 의해 실행되었지만 그들 뒤에는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던 1905년까지 한국 왕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좌절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유 정신과 독립을 바라는 열망은 한국인들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한국이 미국의 보호 감독 아래 민주주의 원칙을 기초로 하여 독립하고 민주 정치 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제가 드리는 미약한 정보가 박사님께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박사님의 글 사본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재배서재필(Philip Jaisohn)PJ/eme

    1064 로얄 J. 왈드(Royal J. Wald) 박사에게 보낸 편지

    작성일: 1950-03-06발신자: 로얄 J. 왈드(Royal J. Wald) 박사수신자: 로얄 J. 왈드(Royal J. Wald) 박사수신주소: 사학부 캘리포니아 대학(California University)친애하는 왈드(Wald) 박사님께,한국의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의 역사에 관한 박사님의 2월 26일자 서신은 잘 받았습니다.저는 미국 학회에서 10년을 연구한 후에 1896년 1월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습니다. 제가 한국에 도착하기 몇 달 전에 일본과 중국은 평화 협정을 맺고 한국의 정치적 독립과 영토 보존에 합의했습니다. 해외에 거주하고 있던 일부 진보당원들이 한국으로 돌아와 한국 정부의 지도자 역할을 했습니다. 저는 모든 공식적인 지위를 거부했습니다. 제가 한국에 가장 크게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은 많은 사람들을 교육할 수 있는 민주적인 방법을 도입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방법은 신문 매체를 통해 교육 방법을 소개하는 것이며 대중 토론, 종교 집회, 기타 방법을 사용하여 대중 교육에 힘쓰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정치, 경제, 사회적인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할 수 있는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이라고 하는 첫 일간지를 발행하기 시작했습니다. 신문을 통한 교육 작업은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라는 이름으로 수행되었습니다. 한국에 돌아오기 전에 미국 시민권을 받았기 때문에 한국 정부의 간섭을 받지 않고 언론의 자유라는 특권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의 창립 발기인의 명단은 다음과 같습니다. 벤더빌트 대학(Vanderbilt University)을 졸업한 윤치호(Yun Cho Ho) 남작, 전 재미 한국 대사관이었던 박제순(Park Jay Swoon), 외무장관인 이완용(Ye Waan Yong), 장군인 안경수(Ahn Kayun Su)입니다. 이들은 노련한 정치가들은 아니었지만 진보적이었고 배움의 의지가 강했던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저를 좋아했으며 한국이 대중 교육을 통해 정치적, 경제적 발전을 이루어야 한다는 저의 생각에 동의했습니다. 그 당시 저는 국왕에 대한 불만은 없었지만 오랫동안 한국을 다스려왔던 보수당원들의 간섭으로 희생양이 될 것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는 정식으로 발표하지 않고 저희 집에서 창립식을 가졌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의 목적과 목표를 신문에 발표했으며 매 주 가졌던 토론회에서도 발표했습니다. 엄밀히 말하자면 이 협회의 주요 목적이 국민 교육에 있으므로 정치 단체는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군주 정치를 비난하지는 않았지만 특정 개인이 절대 권력을 행사하는 것에 대항하여 솔직한 의견을 나누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인해 국왕과 그의 측근들은 이 협회를 적대시하였습니다. 러시아와 일본 공사가 협회와 대립된 입장을 고수하게된 이유는 미국의 민주주의 이상이 한국 국민들 가슴에 심어지는 것을 원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공사인 웨버(Weber) 씨는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은 에스토니아(Estonia) 사람으로서 그는 한국에서 제가 수행하고 있는 업무가 러시아 정부 입장에서 보면 허용되지 않은 것이지만 개인적으로는 제 업무 목적에 충분히 공감하고 있다고 말했습니다. 웨버(Weber)씨를 대신하여 스페이어(Speyer)라는 새로운 장관이 임명될 것입니다. 그는 웨버(Weber) 씨와는 상당히 다른 유형의 사람이며 교양 없고 무례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저는 그를 처음 만난 이후로 그와는 교류를 하지 않았습니다. 얼마 후, 저는 주한 미국 공사인 호레이스 앨런(Horace Allen) 박사님으로부터 한 가지 소식을 들었습니다. 그는 미국 국무성(State Department)으로부터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와 관련하여 수행하는 제가 활동을 그만두거나 미국으로 돌아가기를 바란다는 말을 들었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그 당시 워싱턴에 머물러 있었던 러시아 대사 캐시니(Cassini) 백작이 저의 활동으로 인해 한국 내에서의 러시아 이익에 지장을 준다고 국무성(State Department)에 의의를 제기했기 때문입니다. 국무성(State Department)은 저를 미국으로 소환시키라는 명령은 내리지 않았지만 제 스스로 활동을 중지하고 미국으로 돌아가라고 제안했습니다. 그 당시 워싱턴 행정부는 러시아와 우호적인 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국무성(State Department)이나 호레이스 앨런(Horace Allen) 박사님이 제게 그러한 제안을 하는 과정에서 강요는 없었다고 밝히고 싶습니다. 제가 1898년 5월에 한국을 떠난 후, 경찰의 명령에 의해 독립협회(Independence Club)는 폐지되었고, 신문도 폐간되었으며, 토론회도 금지되었습니다. 기본적으로는 이러한 금지 명령이 한국의 보수당원들에 의해 실행되었지만 그들 뒤에는 러시아인들과 일본인들이 있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러시아인들은 일본이 한국을 점령했던 1905년까지 한국 왕실에 영향을 미쳤습니다. 이러한 좌절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유 정신과 독립을 바라는 열망은 한국인들 가슴속에서 사라지지 않았습니다.한국이 미국의 보호 감독 아래 민주주의 원칙을 기초로 하여 독립하고 민주 정치 국가가 되길 바랍니다. 제가 드리는 미약한 정보가 박사님께 도움이 되시길 바랍니다. 박사님의 글 사본을 주시면 대단히 감사하겠습니다. 재배서재필(Philip Jaisohn)PJ/eme

    1065 김창세가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

    발신주소: 루트 밸롱(Route Vallon), F. C. 260번지 상하이(Shanghai)발신자: 서재필(Philip Jaisohn) 박사님수신자: 서재필(Philip Jaisohn) 박사님수신주소: 펜실베이니아(Pennsylvania)주 메디아(Media)C/O 안(C. H. Ahn) 여사N. 피게로아(Figueroa) 스트리트 106번지 캘리포니아(California)주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1932-07-24친애하는 서재필(Jaisohn) 박사님께,제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있는 동안 박사님께서 최근에 보내주신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저는 그곳에서 어제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왔습니다. 제 가족이 증기선에 승선할 수 있도록 증기선 회사와 조정을 하느라 매우 힘들었습니다. 달라(Dollar) 선장이 살아있었다면 그 일이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그의 아들들은 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사람들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처음 도착했을 때 그의 아들들은 여행 중이었기 때문에 그들이 돌아올 때까지 집에서 기다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들은 돌아온 후 저를 만나기를 거부하며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머물렀습니다. 그들이 제 부탁을 들어주길 바라며 달라 회사(Dollar Company)의 간부와 교섭하며 모든 노력을 기울였습니다. 결국 저는 다른 회사에 현금으로 600달러를 지불한 끝에 저의 가족을 승선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렇게 많은 돈을 이틀 내에 구하기란 쉽지 않은 일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볼티모어(Baltimore)에 사는 맥코믹(McCormick)이라는 친구가 돈을 보내주어 그 회사가 원하는 금액을 제시간 안에 구할 수 있었습니다. 저는 이번 일을 성사시키기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습니다. 비록 그회사로부터 좋은 소식을 받지 못했지만 이번 달 말쯤에는 저희 가족이 상하이(Shanghai)에서 배를 탈 수 있을 것이라고 믿고 있습니다. 거의 열흘 동안 마음을 졸이며 지내고 있으며 날마다 그 회사로부터 좋은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제가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있는 동안에는 제 가족의 승선을 위한 일 외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저는 경제적 어려움을 겪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로 올 수 있도록 그곳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 있는 한 친구에게 부탁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제는 최선을 다하고 나머지 일에 대해서는 운명에 달려있다고 생각하니 양심의 가책이 덜어져 한결 마음이 편안해 졌습니다. 다음 주 초에는 사우스 캘리포니아에서 강의를 시작할 것 같습니다. 따라서 얼마간 수입이 생기면 이사를 가려고 합니다. 이 일이 성사되어야 하며 그렇게 될 것이며 그렇게 되야 합니다. 저는 저 스스로를 실망시키지 않을 것입니다. 현재의 어려운 상황에 얽매이지 않고 긍정적인 사고 방식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박사님께서 김승수(Kim Sung Soo) 씨에게 글로 보냈던 내용에 대해 제가 세 통의 편지를 써서 이광수(Lee Kwang Soo) 씨에게 보냈습니다. 그 중 한 통은 크리크 교전(Battle Creek) 중에 박사님 편지를 받은 후 곧바로 우편으로 먼저 전달했습니다. 나머지 두 통의 편지는 샌프란시스코(San Francisco)에서 배를 탔던 한국인 친구를 통해 보냈는데 3주 내에 도착할 것입니다. 그리고 이광수(Lee Kwang Soo) 씨에게 보낼 또 다른 편지는 내일 이곳 로스앤젤레스(Los Angeles)에서 배를 탈 한국인 학생에게 보낼 예정입니다. 저는 이광수(Lee Kwang Soo) 씨에게서 소식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광수(Lee Kwang Soo) 씨와 저의 친구들은 안(Ahn) 선생님의 소송에 대해 걱정을 많이 하고 있는데, 아마 지금까지 안(Ahn) 선생님 소식을 듣지 못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박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안(Ahn) 선생님은 일본인들에 의해 서울로 호송되었습니다. 안(Ahn) 여사님께서는 안(Ahn) 선생님으로부터 몇 통의 편지를 받았는데 그 편지들은 상하이(Shanghai)에 있는 제 가족에게 보내는 편지와 이곳에 있는 안(Ahn) 선생님 가족과 친구들에게 보내는 편지였습니다. 이 편지는 서울 소식을 전하는 동아일보(Dong-A Ilpo)에 게재되었습니다. 그리고 지금까지의 안(Ahn) 박사님의 생활은 꽤 호의적인 대우를 받고 있습니다. 한국에 있는 그의 친지들이 외부에서 음식을 보내주거나 친구 및 친지들의 면회도 허락되었습니다. 안(Ahn) 박사님의 이력을 조사한 후에는 소송이 오래지 않아 끝날 것이라고 합니다. 단지 그후에 일본인들이 어떤 태도를 취할지는 아무도 모르는 것입니다. 일본인들의 감시 아래라도 안(Ahn) 박사님이 석방되어 한국의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얼마간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해 주었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물론 일본인들은 안(Ahn) 박사님이 공식적인 연설을 하도록 허락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안(Ahn) 박사님의 장남인 필립(Philip)이 가족 대표로 안(Ahn) 박사님 면회를 갈 수 있도록 도울 수 있었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필립(Philip)과 함께 가고 싶지만 제 가족들이 곧 미국으로 돌아오고, 경제적으로 큰 부담이 되기 때문에 그렇게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안(Ahn) 박사님은 가족들이 자신을 면회하러 오기를 바라지 않으며 자신의 변호사를 선임하는 것도 원하시지 않습니다. 한국의 변호사협회(Lawyers Association)가 안(Ahn) 박사님을 위해 필요한 모든 일을 자발적으로 착수했습니다. 안(Ahn) 박사님의 소식을 계속 전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안녕히 계십시오. 재배(서명)

    1066 김창세가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

    작성일: 1947-02-08친애하는 서재필(Jaisohn) 박사님께,11월 25일에 보내신 박사님의 편지는 12월 10경에 이곳에 도착해 매우 반갑게 받아보았습니다. 박사님께서도 그 동안 박사님에 관한 일이 진척되고 있는 상황과 현재 박사님에게 도움을 구하는 공식적인 요청이 제기되었다는 사실을 아신다면 기뻐하시리라 생각합니다. 하지(Hadge) 장군은 박사님의 편지 내용을 보시고는 매우 기뻐하셨으며 그 자리에서 즉시 박사님께 다시 한번 도움을 요청하기로 결정하였습니다. 이번 결정은 하지(Hadge) 장군이 지난 10월에 내린 첫 결정보다 더욱 확고한 것입니다. 장군의 요청에 대해 국무부의 24군단 인사책임자인 랭던(Langdon) 씨와 제가 요청사항의 기초가 되는 세부내용을 작성했습니다. 하지만 겨울 중에서도 가장 혹한기에 여행을 해서 이곳에 머물러야 하는데 따른 불편을 박사님께 드리지 않기 위해서 하지(Hadge) 장군은 시행시기를 1월 14일까지 늦추었습니다. 1월14일 당일 하지(Hadge) 장군은 워싱턴에 전보를 쳐서 박사님을 6개월간 특별자문위원으로 임명할 것과 뮤리엘(Murial)이 박사님의 비서로 동행하도록 해줄 것을 요청했습니다. 저는 며칠 전 박사님께 직접 전보를 보내 공식적인 작업이 진행되고 있는데 대해 제가 느끼는 개인적인 기쁨을 말씀드렸습니다. 더불어 박사님께서도 뮤리엘(Murial)이 동행하는 것을 원하시리라 믿고 있음을 알려드립니다. 하지만 박사님께서 스테파니(Stephanie)와 일하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신다면 뮤리엘(Murial) 대신 스테파니(Stephanie)를 고용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든 혹은 다른 세부적인 사항에 관해서든 제 도움이 필요하신 일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전보를 치시거나 저에게 직접 편지를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하지만 이처럼 특별한 사안에 대해서는 현지에서 직접 접촉하실 군정 관리에게 하실 간단한 질문만으로도 충분히 일을 진행할 수 있으실 것입니다. 현재 상황은 제가 지난 8월 박사님을 만났을 때보다 훨씬 더 박사님의 정치적 능력과 뛰어난 판단력을 필요로 한다고 생각합니다. 덧붙여 말한다면 한국에서의 박사님의 노력에 대해 리승만(李承晩)의 지지를 얻기 위해 박사님께서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이든 그것이 비록 단순하고 직접적인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해도 충분히 가치 있는 일일 것입니다. 리승만(李承晩)과 김구(金九), 그리고 극우 진영에 속한 다른 이들이 박사님을 평가할 때 또 한사람의 미 정부 대표자로 보는데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한국의 상황에 대해 편견을 가지지 않은 분석자로서 오직 진실만을 염두에 두고 있고 한국의 실질적인 통일과 독립을 달성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는 인물로 받아들인다면 이는 대단히 고무적인 일이 될 것입니다. 김규식(金奎植)을 비롯한 다른 자유주의자들도 진심으로 박사님을 환영할 것입니다.박사님을 존경해 마지않는 공군소령 클레런스 N. 웸스 주니어(Clarence N. weems. JR, Major. AC) 올림

    1067 김규식이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

    발신주소: 한국, 서울 삼청동 145/6 발신일: 1950-04-05발신자: 서재필(Philip Jaisohn) 박사님(M. D.)수신자: 서재필(Philip Jaisohn) 박사님(M. D.)수신주소: 스테이트 스트리트 330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미디아존경하는 서재필 박사님께,1월 26일 박사님의 호의 어린 편지를 받은 지 상당 시간이 흘렀습니다만 답장이 이처럼 늦어진데 대해 사과의 말씀을 올립니다. 아직도 갖가지 질병과 싸우고 있고 일년 내내 거의 매일 방문객이 끊이지 않고 있으며 해야 할 몇 가지 일이 있어 편지를 쓰기 위해 시간을 내는 것조차 힘들 때가 많습니다. 화창한 봄을 맞이하여 박사님께서 건강을 다시 회복하시고 모든 일이 한층 순조롭게 이루어지길 기원합니다. 박사님의 미국인 친구 분이 별로 환영받지 못하는 외교관과의 회담에 대한 느낌을 적은 글에 관해서는 저로서는 그런 회담은 일고의 가치조차 없는 껍데기뿐인 회담에 불과하다고 말해야겠습니다. 신과 우리 자신이 스스로를 알고있는 마당에 어째서 다른 민족이나 다른 사람들이 우리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대해 걱정해야 합니까? 이것은 나 자신의 경험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들이 나를 좌익이나 다른 무엇으로 낙인찍을 때조차 마찬가지였습니다. 제가 알고 있는 한 한국 내외를 통틀어 박사님처럼 한국인으로부터 진심에서 우러나온 사랑과 존경을 받는 사람은 단 한 사람도 없다는 사실이 진실입니다. 정부에도 거의 없다고 할 수 있습니다. 박사님의 최근 한국 방문은 한국인들이 박사님을 더 잘 알 수 있도록 해 주었습니다. 박사님은 한국인의 사랑과 커다란 존경심을 한 몸에 받았습니다. 한국인 대부분은 오로지 한국을 위해 애쓰는 박사님의 노력에 대해 좀더 실질적이고 의미 있게 자신들의 고마움을 표현할 수 없다는 것을 유감으로 생각할 따름입니다.프레이저(Frazer) 대령은 몇 주전에 이 곳을 떠났습니다. 박사님께서는 프레이저(Frazer) 대령을 만나 한국에 대한 최근 뉴스를 들을 기회를 가지실 수 있을 것입니다.제 아내도 박사님께 안부인사 드립니다. 뮤리엘 양에게도 안부 전해주시기 바랍니다.김규식 드림

    1068 주미대사 John M.Chang이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

    친애하는 서재필 박사님께,저는 그저께서야 박사님께서 입원하셨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 자리를 빌어 박사님께서 병환중이라는 것을 알게 되어 무척 유감스러우며 하루빨리 완쾌하시길 바란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박사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저는 6월초에 한국을 떠나 귀국했습니다. 한국에 머무는 동안 5월 선거를 지켜볼 수 있었습니다. 이번 5월 선거가 철저하게 자유로운 분위기에서 치러졌다는 것을 확실히 말씀드릴 수 있습니다.6월 25일 이후로는 박사님께서도 짐작하시는 바와 같이 북쪽 공산주의자들의 야만적인 침공으로 야기된 수많은 문제에 전적으로 매달려야 했습니다. 우리 대사관은 현재 고국에 있는 정부와 연락이 두절된 상태여서 뉴스를 통한 언론 보도에 의존하고 있는 실정입니다. 우리는 대통령께서 무사하다는 것을 확신하고 있습니다. 또한 이곳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으며 유엔안전보장이사회(United Nations Security Council)의 결정이 전세계 대다수 국가들로부터 그처럼 신속하고 단호하게 지지를 얻은 것에 대해 무한한 감사를 느끼고 있습니다.현 군사적 상황은 ‘그다지 좋지 못한’ 것으로 보도되고 있지만 전세가 역전되어 우리가 승리하리라는 것을 굳게 믿고 있습니다. 아무런 명분도 없는 침략 때문에 고귀한 생명이 희생된다는 것은 정말로 비극적인 일입니다. 우리 모두는 현재 친구와 가족들의 안위조차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정의에 대한 우리의 신념은 확고하며 우리 나라와 우리의 대의명분이야말로 공산주의가 종식되어야 한다는 당위성에 대한 전세계적인 자각을 불러일으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것을 강하게 인식하고 있습니다.박사님의 빠른 쾌유를 빌면서 마음 속 깊은 존경을 보냅니다.장로회 병원펜실베이니아주 필라델피아

    1069 미 주한대사 John J. Muccio에게 보낸 서재필의 편지

    발신일: 1948-09-27발신자: 존 J. 무쵸(Hon. John J. Muccio)수신자: 존 J. 무쵸(Hon. John J. Muccio)수신자: 주한 미국대사수신주소: 한국, 서울존경하는 대사님께,이것은 제가 캘리포니아에 도착하는 대로 대사님께 보내드리기로 약속한 전언입니다. 대사님께서도 이미 많은 것을 파악하고 관찰하셨을 것이므로 제가 한국의 상황에 대해 상세히 기술하는 것을 불필요한 일일 것입니다. 대사님께 말씀드리고자 하는 것은 한국의 현 정부에 있는 몇몇 주요 인사에 대한 내용입니다. 한국의 정부 요인들을 많이 알고 있지는 못하지만 그들 대부분에 대한 기록은 상세히 알고 있습니다. 저는 오랫동안 이승만 박사를 알고 지내왔습니다. 사실 한국 정부의 주요 인사 중 그 누구보다도 이승만 박사를 잘 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저는 몇몇 국회의원들을 알고 있으며 그들이 조국의 위해 뭔가 올바른 일에 헌신하려 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를 포함하여 그들 모두는 통치와 실무에 대한 실제적인 경험이 없으며 아마도 미국에서 대학 교육을 받은 이승만 박사를 제외하고는 기초적인 교육도 거의 받지 못한 것으로 보입니다. 이승만 박사는 대단한 능력을 지닌 인물이며 조국에 대한 애국심을 간직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이승만 박사의 견해는 편협하며 그의 생각 중 일부분은 실제적이지 못한 것으로 이는 경험 부족에서 생긴 결과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승만 박사가 이끄는 내각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남자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다수 한국인들로부터 신뢰를 얻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하지만 저는 오히려 이승만 박사의 내각에 대한 현재의 선입견에 사로잡힌 감정은 정당하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이승만 박사의 내각은 자신들이 만족할만한 근대적인 방식으로 정부를 재건할 수 있는 능력을 가졌는지 입증할 수 있는 시간을 가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저는 서울을 떠나오면서 이승만 정부가 스스로의 능력을 보여줄 기회를 주라고 한국인들에게 충고했습니다. 1년간의 시험기를 거치면 이승만 정부가 과연 한국인들이 정부에 대해 바라는 일을 해낼 수 있는지 여부가 명확하게 드러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저는 한국인들이 이승만 정부에게 기회를 한번 줄 것이라고 바라며 또한 이승만 정부가 조국을 위해서 뿐만 아니라 자신들을 위해서도 훌륭한 성과를 거두하기를 진심으로 바라고 있습니다. 대사님의 충고와 워싱턴 미 행정부로부터의 우정어린 지도로 이승만 정부가 올바른 노선을 견지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대사님께서는 매일 그들의 시책을 주시해야 할 것입니다. 이승만 정부가 정도에서 벗어나는 행동을 한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경우 대사님께서는 이승만 정부에 대해 우정어린 충고를 해야 할 것이며 때로는 단호한 태도를 보여야 할 것입니다. 대사님께서는 대사님의 능력과 오랜 외교적 경험을 통해 이승만 정부를 바르게 인도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합니다. 만약 이승만 정부가 협력하려는 의지를 보인다면 대사님께서 할 수 있는 한 모든 도움을 주시기 바랍니다. 위 내용은 기밀 사항이므로 대사님께서 비밀을 지켜주시기를 바랍니다.우리는 지난 토요일 샌프란시스코에 도착했고 웨스트 해변에서 며칠 머무른 뒤 펜실베이니아주 미디아시에 있는 집으로 갈 예정입니다. 제가 제공할 수 있는 범위 내에서 추가 정보를 원하시면 언제든지 저에게 연락해 주시기 바랍니다.

    1070 박건웅이 Dean에게 보낸 제안서

    발신자: 대한산업부흥협회(Association for Rehabilitation of Korean Industry)발신주소: 한국, 서울발신일: 1947-12-05발신자: 수신: 딘(Dean) 소장수신자: 수신: 딘(Dean) 소장수신자: 주한 미합중국 군사령부 군정사령관존경하는 사령관님께,한국의 재건을 위해 애쓰시는 사령관님의 노고에 충심 어린 감사의 뜻을 표할 기회를 가지게 되어 무한한 영광입니다. 본 협회는 발족한 이래 한국 산업의 부흥을 위하여 산업 경제에 관한 연구와 분석을 계속해 왔습니다. 따라서 사령관님에게 도움이 될 정보를 드리고자 한국 산업의 부흥을 위해 가장 중요한 문제인 광업 재개의 시급한 필요성에 관하여 저의 의견을 간략하게나마 피력할 수 있게 된 것을 커다란 기쁨으로 생각하고 있습니다.단적으로 말해 사령관님도 아시다시피 현재 한국의 산업 여건이 급속도로 악화되고 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 통화량의 과잉 공급이 늘어나고 있어 유통중인 총 통화량은 현재 260억 엔이 넘으며 물가는 해방 전에 비해 720배나 올랐습니다(물가지수는 큰 폭으로 상승하는 추세입니다.). 또한 국민들은 극도로 비참한 상태에 놓여 있습니다. 비중이 큰 광업 분야는 자원 부족과 정부 지원금의 부재, 부실 경영으로 특징지을 수 있을 것입니다. 생산 감소는 심각한 인플레이션을 야기하고 있으며 이는 국가 재정정책과 국민들의 생활을 심각하게 위협하고 있습니다.한국 산업계의 이와 같은 공황상태를 타개하기 위해서는 일시적인 처방으로는 절대로 만족할만한 성과를 가져올 수 없을 것입니다. 적극적이고 광범위하게 생산을 증진할 수 있는 대책의 수립 없이는 결국은 어떠한 근본적인 대안도 있을 수 없을 것입니다.저는 딘(Dean) 군정 사령관께서 1947년 11월 14일 가진 기자 회견에서 산업 부흥을 위해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씀하신 바로 그와 같은 방식의 산업부흥을 말씀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딘(Dean) 사령관님의 말씀에 전적으로 동의하며 감사의 뜻을 표합니다.위에서 말한바와 같이 한국 산업 부흥에 관한 중요하고도 긴급한 문제는 광산업을 최대한 발전시키는데 있다고 생각합니다. 사령관님께서 알고 계신 것처럼 국가적으로 중요한 자원인 이른바 광물자원은 전체 자원의 46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며 광물자원의 개발은 국가 재정정책과 산업 및 외국 무역의 증진에 있어 절대적으로 필요한 사안입니다. 그러므로 광물 생산의 증가는 한국 산업의 활성화와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습니다.이와같은 현실에도 불구하고 현 군정 당국이 어째서 대다수 중요 광물의 개발을 실제로 막고있으며 더 나아가 우리로 하여금 광업 육성의 기회를 차단 당하고 있다고 느끼게 만드는지 한국인들로서는 대단히 납득하기 어렵다고 생각합니다.사령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광물자원이 다양하고 풍부하다는 점에서 세계적인 자원 보유국중의 하나입니다. 이처럼 전망있는 광물 개발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한국에서의 산업 부흥 문제는 생각할 수조차 없다는 것은 이미 상식적인 일입니다.본 협회는 한국의 산업 구조의 근간이 되는 광업의 신속한 개발문제에 대해 우선적으로 고려해 주실 것을 간곡히 부탁드립니다. 더 나아가 과거 일본인의 소유로 있던 모든 광산의 운영을 재개함으로써 주요 광물을 신속하게 생산하려는 국민들의 노력을 고취하는데 힘써 주실 것을 간절하게 부탁드립니다.정치의 주안점을 백성들의 생활을 안정시키는데 두고 있는 동양에서는 정부정책의 원칙은 다방면으로 검토되어야 합니다. 한국 국민들의 생활이 해방이후 어떻게 향상되고 있는가가 바로 사령관님께서 커다란 관심을 가져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실제 생활여건은 해방전보다 오히려 더 나빠졌습니다. 차라리 일제 치하에서 살 때가 더 나았다는 국민들의 볼멘 목소리가 이와 같은 사실을 실증하고 있습니다. 국민생활의 향상을 위해 군정 당국이 산업의 신속한 성장을 위한 기본 대책을 마련하는 것이 필요합니다.이러한 관점에서 다각도에 걸친 세심한 조사를 실시한 끝에 본 협회는 한국 산업의 부흥을 위한 기본 방안중의 하나로 광업의 조속한 개발에 관한 다음과 같은 계획을 제시하고자 합니다. 사령관님께서 이 제안을 수락하신다면 한국 국민들의 복지를 위해서는 더없이 다행한 일이 될 것입니다. 이 제안에 대한 답변을 보내주실 것을 정중하게 요청하는 바입니다.1. 귀속 광산의 개발에 관한 제안A.귀속 광산의 권리 전환에 관한 일반 의견우선 귀속된 광산의 권리전환 문제에 대한 일반적인 의견을 간략하게 말씀드리겠습니다. 전환이라는 용어는 보통 장차 구성될 한국 정부에게로 재산권이 귀속되어야 한다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습니다. 한국을 일본영토의 일부로 간주함으로써 일본인들은 우리 땅에서 광업권을 누려왔습니다. 하지만 1945년 8월 15일 이후로 한반도는 더 이상 일본에 속하지 않는다는 사실이 국제적으로 인정됨과 동시에 일본인들이 광산권을 향유하는 것은 완전히 종지부를 찍게 되었다는 데에는 의문의 여지가 없습니다.법적 권리 문제에 대해 우리는 끊임없이 범 국가적 차원의 권리주장을 제기해 왔습니다. 그러나 일본에 대한 배상문제가 아직 완결되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귀속 재산에 대한 군정 당국의 해석이 너무나 다양하여 아직까지 결론이 나지 않은 점은 매우 유감스럽습니다.이 문제에 대한 끊임없는 논의 때문에 우리는 광산 개발 작업을 착수할 수 없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문을 닫는 광산이 속출하고 있습니다. 계속해서 피해가 늘어만가는 현 상태를 더 이상 두고볼 수 없어 우리는 매각대금이 향후 구성될 우리 정부에 조건 없이 귀속되리라는 믿음을 가지고 이전될 일반 재산권의 양도계획에 따라 광업권을 포함하여 군정 당국의 광산 이전에 동의하기로 결정했습니다. B. 귀속 광산은 다음과 같은 이유로 개발이 허용되어야 합니다.1. 광산업은 한국의 기초 산업중 하나입니다. 단지 실질적인 개발의 착수만으로도 광범위한 산업 부흥의 계기를 가져올 수 있는 기계, 화학 산업에 대한 수요를 이끌어낼 수 있습니다. 이러한 광산 자산의 개발은 국민들의 산업화 노력을 증진시킬 것이 확실합니다.2. 광업의 활발한 개발을 통해서만이 지역 산업을 위한 원료 공급이 가능한 자급 자족적인 산업 구조를 수립이 가능할 것입니다. 한국 산업 부흥의 기본 방향은 자급 자족적인 경제체제를 구축하는데 있습니다.우리가 별지에 기재된 광산원료를 채굴한다면 1,270억 엔에서 2,549억 엔에 달하는 공산품이 생산될 수 있을 것입니다(별지를 참조하시기 바랍니다.)3. 산업 설비의 필수 품목의 공급에 있어 외국에 지나치게 의존했기 때문에 우리는 경제 재건의 첫 단계에서부터 어려움을 겪어야 했으며 따라서 수출액에 비해 수입액이 압도적으로 많았습니다. 이러한 경제적 어려움을 벗어나기 위해서는 광물자원을 최대한 생산해야 합니다. 4. 특히 금광은 6,513개에 달하는 전체 광산의 64퍼센트를 차지하고 있으므로 금광에 대한 즉각적인 개발은 우리 나라의 주요한 재정기반으로 작용하게 될 것입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강탈로 인해 실질적으로 모든 금광은 강제 인수과정을 거쳐 대한광업개발회사라는 국영기업의 손에 들어갔고 따라서 생산성 높은 광산은 모두 일본인의 차지가 되었습니다. 이 광산은 매각을 통해 다시 채굴을 재개하여 최대한 가동하여야 하며 적정 능력을 지닌 개인이나 기업에 우선권을 주어야 합니다. 1947년 정부예산에 포함된 5천만 엔은 금 생산을 지원하기 위한 보조금으로 책정된 것입니다. 하지만 이러한 지원금은 일본인 소유의 이들 금광이 폐쇄되어 생기는 문제에 대한 근본적인 정책이 없어 효과를 거둘 수 없습니다. 5. 한국인이 소유한 광산은 대부분 개발되지 않은 광산으로 이것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오랜 시간과 막대한 비용이 소요될 것입니다. 생산성이 떨어지는 광산을 채굴하고 생산성이 높은 광산을 묵히는 것은 국가 경제적인 관점에서 용납할 수 없는 일입니다. 광산 운영에 관한 문제는 귀속된 광산의 사유화와 재가동이라는 방법을 통해서만 해결할 수 있습니다.C. 귀속 광산 매각의 중요성1. 뉴스 보도에 따르면 금과 텅스텐 광산을 제외한 모든 광산이 매각 대상이 될 것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국민들은 금과 텅스텐 광산에 특히 관심과 기대를 걸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금광과 텅스텐 광산을 포함한 모든 광산이 그 크기에 관계없이 개인 소유로 전환되어야 합니다. 한국이 경제적 난관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능력있는 광산 운영자가 자유기업의 원리에 따라 광산을 운영할 수 있는 기회를 갖도록 해야 합니다.2. 홍수에 의해 갱도가 끊임없이 파괴되고 있고 남아있는 설비와 건설된 광산 도로가 자연적으로 유실되고 파괴되고 있다는 사실은 광산이 현재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관리하는 것도 힘든 자산이라는 것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재개발이 지연됨으로써 파괴범위가 늘어나고 그에 따라 개발 기금이 증가해야 하는데 따른 국가적 손실을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광산의 신속한 양도와 개발은 국가적 관점에서 볼 때 유용하면서도 타당한 정책이라 생각합니다.D. 광산양도위원회 구성1. 목적. 매각될 자산을 평가하고 구매자의 자질을 검증할 의무를 지닌 위원회가 자산관리국 산하에 조직되어야 합니다. 하지만 광산과 일반 가옥, 그리고 공장 설비간에는 명백한 차이점이 존재하므로 각각의 자산을 평가하고 양도하기 위해서는 전문적인 지식이 필요합니다. 따라서 각계 각층의 권위자를 포함하는 위원회 형태의 조직을 구성하는 것이 필요하며 위원회의 구성원과 임무는 다음과 같습니다. 2. 구성원. 위원회는 광산업에 대해 지식이 있는 전문가와 권위자로 구성되어야 합니다. 위원회 구성원 절반은 공무원, 나머지 절반은 민간인으로 구성합니다.3. 위원회의 임무는 어떠한 광산을 매각하여야 하는지 판단하기 위해 가격과 구매자를 결정하는 것이며 또한 매각되지 않은 광산의 운영 방침을 결정하는 것입니다. E. 매각 대상 광산의 평가와 매각되지 않은 광산의 운영 방침1. 광산에 대한 평가를 너무 높게 책정해서는 안됩니다. 그 이유는 이익을 환수하는데 시간이 많이 걸리기 때문입니다. 높은 평가를 매기면 그만큼 가격이 올라갈 것입니다. 광산의 매각 금액은 대한광업개발회사가 이전에 인수했던 가격과 같아야 하며 기타 광산의 가격은 금광과 비교하여 결정되어야 합니다.Ⅱ. 광업 자본광산 개발을 위해서는 광산 업체에 필요한 자본을 조달하는 문제가 대두됩니다. 자본금의 조성과 관리에 갖가지 심각한 문제가 있을 수 있으므로 자본을 조달하기 위해서는 군정 당국이 철저한 정책을 세워야 합니다.A. 광업 투자의 특수성1. 광업은 땅 밑에 숨겨진 보이지 않는 자산을 취급하는 것으로 대단히 위험부담이 큰 업종입니다. 좋은 광산은 이익을 가져오지만 질 나쁜 광산은 아무리 완벽하게 경영한다해도 이윤을 내기가 어렵습니다.2. 광산은 보통 산 속에 자리잡고 있으며 고정 자본 회수에 시간이 많이 걸리며 채굴을 중단할 경우 기존 시설은 대부분 쓸모 없게 됩니다. 3. 광업이 불확실한 산업이고 이윤 획득에 장기간이 소요된다는 점 때문에 금융기관들은 광산 업체에 대한 대출을 꺼리고 있습니다.위와 같은 점을 고려할 때 광산 업체는 국가적 차원에서의 경제 재건이라는 관점에서 다루어야 하므로 국가 정책 수립시 다음과 같은 점을 고려해 줄 것을 요청하는 바입니다.B. 자본관리 기능광산 업체의 경우 일반적인 금융기관에 의존하는 것은 매우 어려우므로 광산 관리는 전문 지식을 지닌 기관이 수행해야 합니다.1. 광업 자본을 조성하고 관리하기 위한 전문 기관이 설립되어야 합니다.2. 풍부한 경험을 지니고 있고 해방 직전까지만 해도 광업 부문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던 대한광업개발회사의 주된 업무는 기금관리 기능으로 재정립되어야 합니다.3. 광업의 급속한 발전을 위해 광산 업체에 대한 대출을 전담하는 산업 은행을 설립해야 합니다.C. 1948년 개발 및 생산 계획과 필요한 개발기금 규모1. 재개발의 추진 범위는 이전시기 실제 생산액의 3분의 1에 해당하는 생산 계획을 달성하기 위해 결정된 것입니다. 이 추정치는 한국의 신속한 산업 부흥을 위한 여러 문제를 검토한 후 나온 최소치라고 할 수 있습니다.2. 매일 7천 톤의 광물을 처리할 수 있는 제련설비와 분리설비가 필요합니다. 일 평균 총 생산량을 처리할 수 있는 시설을 갖추기 위해서는 평균 70만 엔의 기금이 필요한 것으로 예상됩니다. 따라서 연간 총 49억 엔이 필요하며 이 기금으로 건설된 시설로 매년 15만 톤의 광물을 생산해서 처리할 수 있을 것입니다.3. 시추 작업과 광산 설비, 발전소 건설과 도로 건설을 위한 비용은 약 30억 엔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여기에 추가로 다시 20억 엔이 소요되므로 결과적으로 총 100역 엔이 필요합니다.(기존에 투자한 자본에 대한 생산량은 별지를 참고하시기 바랍니다.)4. 정부차원의 보상제도의 근거투자자금의 회수를 보장하기 위해 군정 당국이 치밀한 계획 하에 투자한 기금 총액의 50% 한도 내에서 손실을 보전해 주는 제도를 운영하는 것이 필요합니다.5. 기금 제공 방식군정의 중앙 은행은 대한광업개발회사와 산업 은행의 손실에 대한 보상 체계를 마련한 상태에서 기금을 사용해야 합니다. 토지개혁정책 아래 농지를 매각해서 거둬들인 기금과 일차적으로 상거래를 위해 사용되었던 기금을 광업을 지원하기 위한 용도로 전용하는 것이 바람직하며 이는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기 위해서도 필요합니다. 또한 군정 당국이 광산 업체에 대한 재정지원이라는 중요한 일에 최선의 노력을 다해해 주시기를 희망합니다.(서명) 박건웅(Pak Keun Oong)박건웅(Pak Kun Woong)대한산업부흥협회(Association for Rehabilitation of Korean Industry) 사무국장제출처 : 군정 사령관 딘(Dean) 소장법무부 국장 고문자산인수국(Director of Property Custodian) 국장 고문앤더슨(Anderson) 박사, 국가경제위원회(National Economic Board) 의장 고문긴급한 광물개발 계획(Intention of Urgent Expolitation of Mines)