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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051 독립문(Independence Arch) 축하식에서

    작성일: 1947년 11월 16일 연설작성처: 필립 제이슨(Philip Jaisohn)의 연설존경하는 회장님 그리고 하객 여러분.지금으로부터 약 50년 전 저는 지금 서 있는 이 자리에 실제로 서서 한국인들의 해방운동을 위해 이 문을 헌정했습니다. 그때는 50년이 지나 여기에 이렇게 다시 와서 그 문을 오늘 우리가 하고 있는 것처럼 같은 이유로 다시 개관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습니다.제가 없는 동안 한국과 세계 다른 곳에서는 많은 놀라운 일들이 생겼습니다. 이 문이 세워지고 몇 년 후에 러일전쟁이 발발했고, 한국은 일본의 지배하에 들어갔습니다. 그 후에 일어난 일은 여러분 모두가 잘 알고 계시는 바이니 제가 다시 언급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저는 여기 다시 와서 이 독립문의 재개관식에 참여한 사실을 매우 영광으로 생각하며, 이 문이 왜 세워졌고, 어떻게 해서 세워졌는지를 간략하게 말할 수 있어서 기쁩니다. 1895년 시모노세키 조약(Shimonoseki Treaty) 이후 중국과 일본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습니다. 1881년에 이미 세계 열강들은 한국의 독립을 인정했지만, 시모노세키 조약(Shimonoseki Treaty) 이후에는 한국의 통치권에 구름이 끼지 않았습니다.미국에서 10년의 학업을 마치고 1896년 초반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저는 한국이 서류상으로는 독립 상태였지만 실제로는 독립한 상태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이것은 한국을 지배하고 있던 복잡한 상황과 당시 몇몇 인접국에서 유행하던 침략 정책 때문이었습니다. 한국에 도착하던 날 저는 한국 정부가 일본 수중에 들어가 있음을 알게 되었고, 4일 후에는 러시아 손에 들어갔습니다. 물론 저는 무척 낙심했고, 한국의 미래는 그다지 밝아 보이지 않았습니다. 저는 한국이 인접국 가운데 한 나라의 무서운 영향 아래 잠기지 않을 가능성은 오직 한 가지 뿐이라고 생각했으며, 그것은 바로 한국인들 스스로가 내외 정책을 현명하게 바꾸고 국내 문제에 있어서 급진적인 변화를 이루는 것이었습니다. 특히 대중들의 교육 문제와 모든 조약 국가들에 대해 치우치지 않는 외교를 유지하는 것이 중요했습니다. 저는 당시 한국 정부에 이 생각을 거듭 제안했으나 아무런 효과도 없었습니다. 저는 당시 공공 강습과 공적인 논쟁, 일간 신문 및 기타 당시 이용 가능했던 교육 시설을 이용해 한국의 일반인들을 교육시킬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인들로부터 아주 약간의 후원을 받아, 마침내 일간 신문을 창간하고 이 문에서 조금 떨어진 서대문 바로 바깥쪽에 있는 정부 건물 가운데 하나에서 공개 토론회를 여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 건물은 독립관(Independence Hall)이라고 했고, 신문은 독립신문(The Independent)이었습니다.얼마 후 저는 독립이라는 단어가 한국 국민들의 가슴에 깊이 새겨질지도 모른다는 희망으로 공공 공원이나 공공 건물 혹은 공로(公路) 같은 어떤 영구적인 구조물을 세워서 독립이라는 이름을 붙여야 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결국 저는 이 자리에 한국의 자유를 기리는 문을 세우기로 했습니다. 그것은 경제적 부담은 조금 줄이면서도 실용적일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문을 세우기 위해 이 장소를 선택하던 때에도 여기에는 이미 한국 왕들의 대관식을 위해 한국에 오던 중국 사신들을 영접하려는 목적으로 몇백 년 동안 문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그 문은 사용되지 않아 매우 훼손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것을 치우고 그 자리에 이 석조물을 세웠습니다. 저는 그것을 독립문(Independence Gate or Doknipmoon)이라고 이름 붙였습니다. 이 계획은 몇몇의 한국 사람들이 자금을 댔고, 실제 작업은 심(Simm)이라는 한국인 토건업자가 했습니다. 당시 재료와 노동비는 터무니없이 낮아서 전체 건축비가 1,520엔 들었고, 이것을 세우기 위해 제가 마련한 돈은 몇몇 한국 분들로부터 모금하고 제 돈 500엔을 합해 총 1,600엔이었습니다.이 문이 완공된 후 우리는 지금 우리가 모인 이 자리에서 축하 모임을 가졌습니다. 하객으로는 많은 외국 외교 대표자들이 오셨고, 모여든 청중이 7천 명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했던 연설을 정확히 기억하지는 못하지만, 요지는 한국인들에게 내외 정책에 있어 현대적이고 진보적인 주권국으로서 사고와 행동을 바꾸자고 촉구하는 것이었습니다. 또 영국과 프랑스, 독일, 러시아, 일본, 미국 등 조약국의 대표들에게 한국 국민들이 현대적인 독립국이 되려는 포부를 갖도록 도와 달라고 부탁했습니다. 하지만 그 후에 일어난 일로 볼 때 한국인들과 외국 정부들은 제 요청을 그다지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던 것입니다.이제 그것은 지난 일이며 우리는 과거에 너무 많은 시간을 허비하지 말아야 하겠지만, 오늘 저는 오래 전 한국인들과 외국의 우리 친구들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조언, 똑같은 요청을 다시 하고 싶습니다. 한국은 아직도 많은 변화를 더해야 하며,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다른 열강들의 동정과 우의를 필요로 하고 있습니다.덧붙여 말하건대 한국의 국내 상황과 외국의 정서는 상당히 많이 바뀌었습니다. 저는 한국 국민들이 우리나라의 여러 방면에서 더 나은 변화가 필요하다는 것을 깨달으리라 믿으며, 또한 문명 세계가 자국 정보를 요구하는 한국의 정당성을 더 잘 이해할 것이라 믿습니다. 물론 국제연합 한국임시위원회(United Nations Temporary Commission for Korea)가 어떻게 할지를 예측하기엔 너무 이르겠지만, 그들이 한국 국민들을 호의적으로 또 공정하게 대할 것이라고 확신합니다.한국 국민들에게 전하는 저의 조언과 국제 위원회(the International Committee)에 대한 저의 믿음이 이번에는 50년 전보다 더 나은 결과를 가져오기를 바랍니다.이 시점에서 제가 몇 마디 감사의 말을 전한다고 해도 괜찮을 거라 믿습니다. 한국인으로서 저는 오늘 저를 받아 준 나라인 미국에게 제가 태어난 조국의 해방에 대해 깊은 감사를 표합니다. 또한 능란하고 용맹스러운 존 호지(John R. Hodge) 장군과 그의 장교들이 이끈 미국 군대와 군 조직의 직원들이 해준 건설적인 일들과 막대한 호의에도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한국의 문제가 국제연합에서 성공적으로 처리된 것에 대해서 제가 얼마나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는지도 공개적으로 표현하고 싶습니다. 미국 정부의 노력이 아니었다면 이 일은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이제 저는 진정으로 한국의 미래에 희망이 있음을 느낍니다.마지막으로, 전능하신 신께서 이 나라를 도와주시고, 그 국민들에게 진실의 빛을 주시어 운명을 헤쳐 나가는 길을 밝혀 주시고 그 신성한 빛 안에서 살아가고 나아갈 힘과 지혜를 주실 것을 마음속으로 조용히 기원하고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1052 서울의 기독교 조직들을 대상으로 한 연설

    작성일: 1947년 7월 26일작성처: 한국 개신교 교회들, 기독교 교육 단체, 서울의 기독교 문화 단체존경하는 하객 여러분,저는 오늘 여기서 이렇게 연설을 하게 될 것을 알지 못했기 때문에 연설을 하기 위해 여기 온 것은 아닙니다. 이제 여러분께 말씀드릴 몇 가지는 즉석으로 하는 연설입니다. 대표단 회장께서 해 주신 훌륭한 연설을 듣고 저는 누군가 되도록 한국 사람이 답사를 해야 한다고 느꼈습니다. 한국에서 태어나 미국으로 망명한 제가 여기 한 사람의 한국인이자 미국인으로서 여러분께 이야기를 하는 자리에 섰습니다. 지난 60년간 저는 변화되는 한국의 상황과 외국과의 관계를 지켜보았습니다. 한국을 방문한 대부분의 외국인들은 한국에서 뭔가 가치 있는 것들을 자신들의 나라로 가져가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으나 미국과 다른 나라의 선교사들은 한국인들에게 물질적인 소유물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를 주기 위해 왔습니다. 이분들이 여기에 온 것은 한국 사람들에게 기독교의 이상을 전하기 위해서입니다. 이분들은 다른 이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신의 생명을 주러 이 세상에 오신 예수님의 교훈 중 ‘받는 것보다 주는 것이 더 축복 받은 일’이라는 중요한 원칙 한 가지를 믿는 분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모신 하객들은 예수를 믿고 기독교의 이상을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나누고 싶어한 미국 시민들입니다. 그들은 여러분에게 복음의 기쁜 소식을 전하러 온 것이지, 일부 다른 유형의 외국인들이 했던 것처럼 여러분의 정치적·경제적·사회적 권리를 빼앗으러 온 것이 아닙니다. 분명 모든 미국인들이 다 훌륭한 기독교인은 아니지만 가장 무지한 사람조차도 기독교의 이상과 원칙의 중요한 원칙을 염두에 두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이상에 따라 살지 않는 미국인들은 미국 생활의 가장 좋은 상태를 대표하지 않지만 오늘 여기 오신 분들은 이러한 이상적인 미국을 대표하는 분들입니다.내친김에 현재 미국의 대외 정책이 기독교의 이상주의와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다는 점을 언급하고 싶습니다. 분명 미국의 어떤 공식 대표도 미국이 기독교를 위해서 다른 나라를 돕고 있다고 인정하지는 않겠지만 현재 해방된 국가들에 대한 미국의 정책이 기독교적인 이상에 근거를 두고 있다는 것은 사실입니다.과거에 여러분이 몇몇 외국 국가들을 신뢰했다가 막심한 피해를 입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습니다. 자국의 독립과 번영은 그 나라 국민의 책임이기 때문에 어떤 나라든 자국의 번영과 독립을 위해 다른 나라 국민들에게 의존하는 것은 현명하지 못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원하는 결과를 얻기 위해 도움이 될 유익하고 동정적인 친구도 필요합니다. 저는 미국의 기독교인들이 여러분에게 필요한 도움을 줄 것이라고 신뢰해도 된다고 믿습니다. 무엇보다도 저는 여러분에게 어떤 사람이나 나라보다도 여러분을 더 잘 인도하고 도울 수 있는 신을 믿을 것을 부탁드립니다. 신을 믿으면 성공할 것입니다.

    1053 안창호(Ahn Chang Ho) 선생님에 대한 나의 인상

    발간일: 한국학생회보(The Korean Student Bulletin)갑자기 닥친 안창호 선생님의 죽음은 한국에 있어서 커다란 손실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과 함께 그의 비극적 죽음을 통렬히 애도한다. 왜냐하면 나는 그의 동료들 사이에서 그를 가장 훌륭한 사람으로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그의 조직을 만드는 능력과 어떠한 경우라도 자신의 편에 설 수 있는 동지를 만드는 그의 인품을 존경했다. 그의 고결함에 대한 확신과 동기에 대한 존경이 없이는 어느 누구도 이러한 동지들을 가질 수 없다. 요 몇 년간 그 정도로 이러한 확신을 고무시키는 한국인을 만난 적이 없다. 국가적 수준으로 그의 능력을 사용할 기회가 없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가 한국에서 추방된 소수와 함께 캘리포니아에서 이룬 업적을 생각해 보면 그에게 기회만 닿았다면 틀림없이 한국의 위대한 지도자가 되었을 능력을 갖추었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는 여러 다른 민족을 통해 드물게 발견할 수 있는 인물 가운데 하나였다. 미천한 집안에서 태어나 후에 국민의 지도자로 성장을 했다. 미국에서는 링컨이 미천한 부모님과 가난한 환경에서 태어나 위대한 지도자가 된 사람 가운데 한 명이다. 안창호 선생이 링컨과 같은 기회를 얻을 수만 있었다면 세계는 그를 더 알아주었을 것이다.나와 안 선생님의 관계는 오래된 것도 아니고 친밀한 것도 아니었다. 그러나 그가 몇 년 전 동부를 방문했을 때 나는 그와 몇 차례 흥미진진한 대화를 나누었다. 그는 높은 이상을 지니고 있음과 동시에 광범위한 실제적 지식과 상식을 지니고 있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나에게 남겼다. 그는 관점에 있어서 편협함이나 소심함이 전혀 없었고,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에게도 매우 관대했다. 나는 이 때문에 매우 기뻤는데, 왜냐하면 소수의 사람들만이 관대한 정신과 의견교환을 할 수 있는 정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의 마음은 자신감 있는 사람들의 사심 없는 제안에 찬성했고, 솔직하고 자유로운 토론이 필요한 상황이 오면 그는 자신의 견해를 표현하는 데 두려움이 없었다. 조국에 대한 그의 사랑은 진지했고, 그를 따르는 젊은이들의 복리에 대해 헌신적이었다. 이런 점 때문에 그의 적들조차 그를 존경하고 은밀히 흠모했다. 그는 세계의 사건에 대해 면밀히 관찰하고 미국과 극동 지방에서 겪은 경험이 있었음으로 대학교육을 받지 않았다는 불리한 조건도 상쇄하고 남았다. 그는 경험이라는 대학의 졸업생이었다.한 번은 내가 안 선생님께 캘리포니아나 극동 지방에서 사업을 해보시라고 제안한 적이 있다. 왜냐하면 그의 능력과 흠집 없는 고결함 그리고 매력적인 인성으로 틀림없이 성공하리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는 ‘아니오’라고 대답하며, 40여 년 전 한국의 독립협회에서 나의 강연을 들은 후 한국의 재건을 위한 일에 평생을 바치겠다고 맹세했다는 말을 했다. 나에게 자기 자신을 알리지 않고 나의 강의를 1년 여 정도 경청했던 듯하다. 1895년부터 1898년까지 3년간 한국에 체류하는 동안 내가 뿌렸던 씨앗이 많은 젊은이들의 가슴속에 뿌리를 내린 듯하다. 안 선생님의 사망 소식을 들었을 때 나는 또 다른 한국의 순교자의 죽음에 어떤 면으로는 내가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안 선생님은 조국을 위해 고통을 겪고 죽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자신의 의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다른 특성들 가운데서도 안 선생님은 훌륭한 조직가였고, 그가 영향을 미친 조직은 훌륭히 짜여져 있다. 로스앤젤레스의 한국협회(Korean National Association)도 그렇고, 한국 아카데미(Korean Academy)도 그렇다. 이 점은 특히 더 만족스럽다. 왜냐하면 많은 조직들이 과거에 설립되었다가 이런저런 이유로 아무런 활동도 없이 모두 없어져 버렸기 때문이다. 활동을 하고 있는 유일한 다른 조직은 바로 북미 한국학생연맹(Korean Student Federation of North American)이다. 이 단체의 활동은 미국에서 가장 칭찬할 만하지만, 이들의 지속적 활동이 가능한 것은 대부분 미국 유학생친선위원회(American Committee of Friendly Relations among Foreign Students) 덕분이다. 이 위원회의 물질적·정신적 원조가 없다면 학생연맹의 지속적인 활동은 불가능하다. 안 선생님이 창립자인 위의 두 조직은 그를 무척 그리워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조직원들에게 그가 남긴 지울 수 없는 영감은 그가 같이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길이 남을 것이다. 부식작용이 허용되지 않거나 가능하지 않다고 가정할 때, 한 건물의 기초가 굳건하면 그 상층구조도 튼튼할 것이다.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은 안 선생님이 도움을 주어 창립한 위 단체들을 통해 그의 이상을 계속 살아 있게 하는 것이 안 선생님의 업적을 기리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 할 수 있겠다. 우리는 그의 죽음을 애도한다. 그러나 우리는 한국이 그처럼 위대한 영혼의 소유자를 배출했다는 점을 자랑스러워한다. 미래 세대는 분명히 이 시대인들보다도 더 그의 영혼에 감사할 것이다. 한 개인의 일생을 회고하는 것은 책 한 권을 읽는 것과 같다. 마지막 페이지를 끝내며 받은 최후의 인상이 그 책의 가치를 정의한다. 안 선생님의 인생이 나에게 준 인상은 결과에 상관없이 선하고 고귀한 것을 따르는 굳은 결심이다. 다른 사람들도 내가 받은 인상과 같은 것을 얻는다면 안창호 선생님은 값진 인생을 산 것이다.

    1054 서재필에게 보낸 편지

    수신주소: 이스트 제퍼슨(E. Jefferson)가 33번지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메디아(Media)수신일: 1935-07-14발신주소: 중국, 체푸(Chefoo)발신일: 1935-06-11친애하는 제이슨(Jaisohn) 여사님께,아래의 편지는 오랫동안 저와 서신 연락을 주고받은 젊은 해군 @/k@헤리 메이어스(Harry F. Meyers)@/k@가 보낸 편지의 사본입니다. 여사님께서도 이 편지에 관심을 가지실 것이라 생각합니다. 재배서명사본친애하는 크리스웰(Criswell),자네가 보내 준 4월 7일자 서신은 내가 일본 고베(Kobe)에 머물렀었던 5월 9일에 잘 받아보았네. 정말 고맙게 생각하네. 자네의 편지를 받은 이후로 몹시 바빠서 답장을 쓸 시간이 없었다네. 누구에게나 그러하듯이 관광이라는 것은 내게 많은 감명을 준다네. 일본에 있는 동안 그곳에 푹 빠져버린 나는 많은 사진을 찍었다네. 아마 300달러 정도의 물건을 구입했고 사진기를 구입하느라 거의 100달러를 썼다네. 우리가 해상에 있을 때는 카메라를 소지하지 못하도록 한 해군 장교의 지시 때문에 사진 속에 남겨놓고 싶었던 멋진 바다의 모습을 찍을 기회를 많이 놓쳤다네. 고베(Kobe)는 분명 흥미로운 도시라는 사실을 알았기에 그곳에 갔을 때는 사진기를 몰래 숨겨 가지고 가서 고베(Kobe)의 멋진 바다 풍경을 5통의 필름에 담았다네. 사진은 아주 멋지게 나왔다네. 이 사진으로 일본에서 구입한 커다란 앨범 두 개를 꽉 채울 수 있을 것이라네. 그리고 기념품도 몇 개 샀으니 다음 달에 자네에게 보내주겠네. 필리핀 섬에 대한 간단한 보고서를 완성했는데 매우 힘든 작업이었다네. 이 보고서를 작성하는 데 4개월이 걸렸고 완전히 끝내려면 아직도 찍어야할 사진이 남아있다네. 그래도 사진을 찍는 일은 우리가 흔히 볼 수 없는 광경을 사진에 담아 볼 수 있기 때문에 재미가 있다네. 나머지 사진들을 현상해야 하기 때문에 10월에 마닐라(Manila)로 돌아간 후에나 친구들에게 보내줄 수 있을 것 같네. 지금은 체푸(Chefoo)와 칭다오(Tsingtao)와 관련된 일을 하고 있는데 이 두 지역은 매우 흥미로운 역사적 장소라네. 이 일은 7월말쯤 끝낼 것이라네. 다음 편지에는 재미있는 이 지역의 특징과 사진을 보내주겠네. 현재 일본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겠네. 말로 다할 수 없을 만큼 각 지역에 대해 쓸 말이 많고 보낼 사진도 없기 때문이라네. 물론 내 앨범에 장식해 놓기 위해 구입한 사진은 한 장 있다네. 한 번에 한 지역에 대해 글을 써서 보낼 테니 서두를 필요는 없다네. 고베(Kobe)에서 찍은 사진은 몇 장 있으니 이 도시에 대해 자세히 이야기 할까 하네. 우리는 곧 베이징(Peking)에 갈 예정이며 오는 8월에 있을 승진 시험에 대비해서 열심히 공부해야 하기 때문에 정말 힘들다네. 시험이 끝나면 편지를 쓰는 데 시간을 많이 할애할 수 있으므로 빠른 시간 내에 편지를 완성하여 자네에게 보낼 수 있을 것이네. 멋진 날씨, 조용한 바다, 깨끗한 해수욕장이 있는 체푸(Chefoo)는 광대하며 정말 훌륭한 곳이라네. 나는 이곳에서 나의 취미인 하이킹, 사진 찍기, 수영 이외에는 그다지 많은 일을 하지 않는다네. 요즘은 근거리 사격 연습을 한 후라서 보급 정비함을 옆에 두고 함선 검사를 하고 있다네. 사격 연습에서 우리 사단에 가장 높은 점수를 얻었다네. 함선 검사가 끝나면 우리는 칭다오(Tsingtao)로 이동하여 2주 동안 잠수함 생활을 하게된다네. 칭다오(Tsingtao) 역시 멋진 해수욕장이 있는 아름다운 도시라네. 이곳은 이전에 독일이 점령했던 도시로서 세계대전 당시 7척의 일본 순양함을 격파했던 곳이라네. 일본 순양함을 격파했던 요새는 아직도 남아 있다네. 그곳 사진을 보내주겠네. 그 요새를 함락할 수 없었으며 독일군을 항복시키는 방법은 물과 음식을 차단하는 길 밖에 없었다네. 이곳 체푸(Chefoo)에는 두 개의 요새가 있다네. 그 중 한 요새는 지난 주말에 사진을 찍어 놓았고 아직도 요새로 사용하고 있는 나머지 한 개는 돌아오는 주말에 사진에 담을 예정이라네. 최근에 들은 소식에 의하면 11월에 우리 구축함 두 대가 방콕(Bangkok)과 샴(Siam)(타일랜드)을 순항할 것이라고 하네. 나도 반드시 그곳에 갈 것이라네. 방콕(Bangkok)과 샴(Siam)에는 아주 멋진 사찰과 사당이 있는 도시라고 들었네. 동양에서는 이 도시만큼 멋진 도시가 없다네. 우리 함대가 왜 이전에 그곳을 순항하지 않았는지 알 수가 없네. 이곳에서의 여가 시간이 다 되었으니 다시 바다로 돌아가야겠네. 다음 해상 근무는 알라스카(Alaska)에서 하게 될 것이라네. 다음에는 스프링필드(Springfield)나 매사추세츠(Massachusetts) 또는, 가능하다면 버팔로(Buffalo)에서 2년간 근무하고 싶은 욕심이 있다네. 밤도 깊었고 영화가 곧 시작될 것 같네. 그만 인사를 해야겠네. 잘자게.(서명) 해리(Harry)

    1055 유일한이 Samuel에게 보낸 편지

    발신주소: 유일한 앤 컴퍼니(NEW-ILHAN and COMPANY) 우드워드(WOODWARD) 12914번지 미국, 미시건(Michigan)주 디트로이트(Detroit)수신일: 1926-05-17발신자: 사무엘 펑(Samuel Fung)@/k@ 씨수신자: 사무엘 펑(Samuel Fung)@/k@ 씨수신주소: 와창 무역회사(Wah chang Trading Corpn) 울워스(Woolworth) 빌딩 뉴욕전보 수신인 유일한(NEWILHAN), 디트로이트(Detroit)벤틀리(Bentley) 사기업표준 코드중국, 상하이(Shanghai)한국, 서울(Seoul)수입품중국산 융단수공예 리넨수출품금속 기구류 및 연장소규모 기계류친애하는 사무엘(Sam),지난 토요일 제이슨(Jaisohn) 양이 보내 온 디자인에 대한 조언이 담긴 그녀의 편지를 받았다네. 초안 그림을 제외한 이 디자인은 지난번 자네에게도 보낸 것이라네. 하지만 사본을 만들 최종 디자인으로는 채택하지 않을 것이라네. 제이슨(Jaisohn) 양은 6개의 다른 디자인을 보내왔는데 내가 C5-6-7 및 G 5-6-7로 표시했다네. 이 편지에 동봉하네. 모시 리넨의 견본 냅킨에도 C.8과 G8이라는 번호를 붙였네. C. 계열 번호는 쿨리 천으로 만들 디자인이고 G. 계열 번호는 모시 리넨 세트로 만들 디자인이네. 이렇게 하면 쿨리 천과 모시 리넨 세트로 각각 8개의 디자인을 완성하게 된다네. 개수가 너무 많다고 생각되면 그 중에서 가장 좋은 디자인을 4~6개 골라 제이슨(Jaisohn) 양에게 직접 보내주게. 그녀의 주소는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메디아(Media)시 링컨 and 갤레이(Lincoln and Galley)가 라네. 다양한 바느질 기법을 사용하여 최상의 디자인을 뽑을 수 있도록 이 디자인과 자수의 나머지 반을 십자수로 해달라고 중국에 요청해주게나. C 및 G 계열 번호에서 가장 좋은 디자인을 4~6개 고르는 대로 제이슨(Jaisohn) 양에게 보내주게. 중국에서 바느질 작업을 맡은 여성들이 자세한 문양을 만들 수 있도록 디자인을 완성해 달라고 제이슨(Jaisohn) 양에게 서신을 보내겠네. 벗으로부터(서명)

    1056 유일한이 보낸 편지

    발신자: 유일한 앤 컴퍼니(NEW-ILHAN and COMPANY)발신주소: 우드워드(WOODWARD) 12914번지 미국, 미시건(Michigan)주 디트로이트(Detroit)발신일: 1926-05-11발신자: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양 수신자: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양 수신주소: 링컨 and 갤레이(Lincoln and Galley)가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메디아(Media)뮤리엘(Muriel) 양에게와창(Wah Chang) 사무실에게 두서없이 편지를 썼기 때문에 뮤리엘(Muriel) 양이 내가 의도한 바를 제대로 이해했는지 모르겠군요. 8월말쯤에는 중국으로부터 제품을 받아야 하기 때문에 제시간 내에 디자인을 중국에 보내야 합니다. 따라서 시간이 촉박하여 다시 한 번 확실히 말씀드리려 합니다. 중국산 천으로만 사용할 최종 직물 견본을 도디(Dodie)에게 보냈습니다. 이 직물은 더 무겁고 촘촘히 짜여진 직물로서 자연 색상의 리넨이 될 것입니다. 십자수 스타일이나 연하고 다양한 색상과 부드러운 색 농도를 자수에 사용할 수 있는 디자인을 원합니다. 다음 사항에 유의해 주십시오. 1. 디자인은 간결하고 작아야 합니다. 2. 임금을 절감하여 완성할 수 있는 디자인이어야 합니다. 3. 독창적이어야 합니다. 4. 동양과 서양의 특색이 조합되어야 합니다. 5. 원본을 보고 사본을 만들 수 있도록 색상이 특이해야 하고 윤곽이 뚜렷해야 합니다. 집에서 사용하는 리넨에 대해 뮤리엘(Muriel) 양이 가지고 있는 여성으로서의 지식과 디자인의 작가적 개념을 조합하여 좋은 상품을 개발할 수 있을 것이라고 믿습니다. 우리는 이 상품을 가능한 한 비싸지 않게, 그렇지만 독창적인 제품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할 것이므로 유행이 될 것입니다. 이 디자인을 사용할 품목은 다음과 같습니다. 손님 타월, 티 커버, 뷔페 스카프, 쟁반 커버, 냅킨, 접시 깔개, 기타 집안의 리넨 상자에 사용되는 품목에 응용할 것입니다. 이 새 직물에 사용할 디자인은 4가지이며 각각 다른 품목에 적용할 것입니다. 다른 4가지 디자인은 모시 리넨 재료를 사용할 것입니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고 뮤리엘(Muriel) 양이 원하는 색상 조합과 의뢰인이 원하는 모양으로 만들어주십시오. 단지 평범하지 않게 해 주시고 일반인들이 사용하기 편리하도록 뮤리엘(Muriel) 양이 직접 사용해 보십시오. 이 제품에 대한 책임은 와창(Wah Chang)사의 공동 제작사인 유일한 앤 컴퍼니(New and Co)와 차이나 선적회사(China Shipping Co.)입니다. 특별한 정보가 필요하시면 저희 회사 비용 부담으로 야간발송전보를 보내주십시오. 시간이 촉박한 관계로 제품을 완성하는 대로 소포속달로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서명)

    1057 유일한이 보내는 편지

    발신자: 유일한 앤 컴퍼니(NEW-ILHAN and COMPANY)발신주소: 우드워드(WOODWARD) 12914번지 미국, 미시건(Michigan)주 디트로이트(Detroit)발신일: 1926-05-11발신자: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양수신자: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양수신주소: 링컨 and 갤레이(Lincoln and Galley)가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메디아(Media)뮤리엘(Muriel) 양에게이렇게 급하게 편지를 보내게 되어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어느 정도는 양해해줄 것으로 믿겠습니다. 뮤리엘(Muriel) 양이 새로운 제품을 구상할 수 있도록 아이디어를 제공하는 새로운 손님 타월의 견본을 도디(Dodie)가 고안해 왔습니다. 뮤리엘(Muriel) 양이 어느 정도 작업을 마치셨는지 모르지만 끝내야 할 다른 긴급한 일이 있을 줄 압니다. 하지만 제품이 완성되는 대로 제게 보내주셨으면 합니다. 뮤리엘(Muriel) 양이 제품에 응용하고자 하는 사항에 대한 저의 의견이 궁금하시면 디자인을 그려 제게 보내주십시오. 그러면 제품에 적용할 지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도디(Dodie)는 다른 상점들에서 많은 제품들을 보았기 때문에 새로운 디자인에 대해 좋은 아이디어가 있을 것입니다. 저는 새로운 작품의 아이디어를 중국에 살고 있는 여성 작가에게서 얻습니다. 제품 디자이너인 그녀는 제가 중국에 있을 때 뉴욕에 있었으며 지난 해 중국에서 그녀에 대한 소문을 들었습니다. 새로운 장식에 대한 아이디어가 필요합니다. 따라서 리넨에 사용할 수 있는 좋은 디자인이 있으면 잊어버리기 전에 종이에 그려두십시오. 중요한 것은 제품이 간단하면서도 평범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따라서 특이한 물건이나 교회 물품을 사용해 보고 대담하고 신선미가 있는 제품을 완성해 주십시오. 뮤리엘(Muriel) 양이 인기가 있을 디자인이라고 생각되면 제품에 적용해보도록 하겠습니다. (서명)

    1058 유일한이 보내는 편지

    발신자: 유일한 앤 컴퍼니(NEW-ILHAN and COMPANY)발신주소: 우드워드(WOODWARD) 12914번지 미국, 미시건(Michigan)주 디트로이트(Detroit)발신일: 1926-05-17발신자: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양수신자: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양수신주소: 링컨 and 갤레이(Lincoln and Galley)가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메디아(Media)뮤리엘(Muriel) 양에게,뮤리엘(Muriel) 양이 보내주신 디자인 초안이 포함된 두 통의 편지는 잘 받았습니다. 그 디자인을 보고 처음에는 중국의 바느질 작업을 할 사람들이 도안에 맞게 제대로 일을 할 수 있을지 걱정을 했었는데 단지 초안이라는 사실을 알고 다소 걱정을 덜었습니다. 펑(Fung) 씨가 선택하여 뮤리엘(Muriel) 양에게 보내드린 4개의 디자인은 중국의 바느질을 할 사람들이 세부적인 부분까지 작업할 수 있도록 뚜렷한 형태와 명확한 색상으로 완성해 주셔야 합니다. 마음속으로 생각했던 디자인들 중 일부 디자인은 너무 부담이 되어 포기했습니다. 그 디자인들이 매력적이지 않아서가 아니라 임금이 부담되었기 때문입니다. 제품에 더 부드러운 농도를 나타낼 수 있는 방법이 없었지만 연하고 부드러운 농도가 더 많이 판매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각 디자인마다 사본을 4개씩 만들 필요는 없습니다. 가장 잘 된 작품 중 색상이 들어간 실제 디자인과 흑백이나 색상이 들어간 각 디자인의 사본 한 개씩만 필요합니다. 다시 말해, 자료 보관용으로 우리가 선택한 디자인마다 각각 완성된 원본과 사본이 필요합니다. 다양한 크기로 직물의 대략적인 윤곽과 직물에 들어갈 디자인 배치를 보냅니다. 또한 직물 크기에 맞는 디자인 크기도 보내 드립니다. 직물 크기에 따라 디자인의 크기를 변형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중요한 한 개의 디자인만 중국의 작업자들이 크기를 줄이거나 늘릴 수 있습니다. (서명)

    1059 뮤리엘에게 보낸 편지

    발신주소: 크로웰 출판사(THE CROWELL PUBLISHING COMPANY) 파크 애버뉴 230번지발신자: 뉴욕 여성의 가정 동반자(Womans Home Companion) 미국 잡지 콜리어(Cllier)의 국제 주간지 국내 미술부(Art Department)발신일: 1932-09-21발신자: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양수신자: 뮤리엘 제이슨(Muriel Jaisohn) 양수신주소: 펜실베니아(Pennsylvania)주 메디아(Media)친애하는 제이슨(Jaisohn) 양에게,퀸앤(Quinan) 씨가 지난 번 편지에 우리가 많은 작품을 구입하지 않고 있으며 앞으로도 그럴 것이라고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퀸앤(Quinan) 씨에게 작품을 보내주신 것에 매우 감사드립니다. 죄송스러운 말씀이지만 저희 출판사에서는 귀하의 작품 유형이 맞지 않아 부득이 작품을 돌려보내려 합니다. 거의 모든 저희 미술 장식 및 배치는 한두 명의 경험 있는 작가들이 특정 기사나 글에 맞게 작품을 만듭니다. 저희는 필요할 때마다 잡다한 작품을 사거나 비축해 두지는 않습니다. 또한 가치가 없는 불필요한 자료들도 구입하지 않습니다. 다른 출판사에서는 귀하의 작품이 필요할 것이라고 믿습니다. 재배(서명)

    1060 뮤리엘에게 보낸 편지

    친애하는 제이슨(Jaisohn) 양에게,퀸앤(Quinan) 씨의 요청에 따라, 귀하의 작품 견본을 언제든지 보기를 희망하지만 현재로서는 저희가 미술 분야 작업을 거의 하지 않고 있기 때문에 귀하의 작품을 제출하시려면 오는 가을까지 기다리시는 것이 좋을 것 같습니다. 물론, 아시다시피 저희는 외국 주제나 외국 풍경 그림을 사용할 수 없으며 “예쁜 소녀”를 주제로 한 작품에는 그다지 관심을 두지 않습니다. 저희는 인간이 흥미로워 하는 특성, 대규모 요소, 구성의 간소성을 표지에 다루고 있습니다. 재배(서명)여성의 가정 동반자(Wo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