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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881 미국 공산당 부서기 가네트(Betty Garnnett)가 한길수에게 보낸 편지(1946. 8. 29)와 New York World-Telegram에 실린 미국 내 공산주의 운동 관련 기사(1945. 7. 23)

    2882 하지(John R. Godge)가 한길수에게 보낸 편지(1946. 3. 29)와 San Francisco Chronicle에 실린 북한내 소련의 핵연구 관련 기사(1950. 10. 26)

    2883 한길수가 작성한 ‘소련의 30년 계획’ 지하운동보고서(1947. 2. 11)와 브래들리(Willis W. Bradley)가 한길수에게 보낸 편지(1947. 5. 29)

    "평양에 있는 한국 조상의 소련 시민, 시베리아의 김일성(Kim ill sung)장군 아래 있는 북한은 스탈린(Stalin)이 소련 최고사령부에 미국을 침략하여 파괴시키는 30년 마스터 플랜을 설계하라는 지시를 내렸다고 말했다." 소련 장교는 독일 전쟁 죄수들 담당으로, 죄수들에게 "우리는 친구이다. 우리는 소련-독일 불가침 조약에 서명을 했다. 그것은 우리가 함께 영국계 미국 제국주의자들을 파괴할 수 있다는 신념하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히틀러(Hitler)는 그가 1941년 소련을 공격하라고 하였을 때 영국계 미국인들쪽으로 돌아섰다."라고 말했다. 소련읜 첫 번째 목표는 미국을 파괴시키는 것이었으며, 우리를 도와 친구가 되는 것이었다. 우리는 한 세대 안에서 미국을 몰락시킬 수 있다. 그 대가가 얼마가 되던지 간에, 소련 군사의 최고 사령부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대 원수 스탈린(Stalin)의 명령을 따를 것이다. 소련 미사일이 준비되는 대로, 소련의 원자 폭탄과 소련의 해군 세력이 미국을 쳐부술 것이다. 소련 과학자와 기술자들은 이미 6개월 이내로 원자 폭탄 생산 준비를 마쳤다. : 보고서 끝.

    2884 미국방부 부장관 드러리(C. M. Drury)가 한길수에게 보낸 편지(1949. 12. 14)와 한길수의 보고서(1949. 10. 26)

    1949년 10월 26일과 1949년 12월 8일에 보내주신 서신을 잘 받아보았습니다. 감사합니다. 두 서신의 내용은 적절한 당국에 의해서 참조되었으며 서신을 받았음을 일찍 알려드리지 못한 점 이해해주시기 바랍니다. 요청하신 대로, 영국 영사관에서 서신의 사진 복사본을 함께 돌려드립니다.

    2885 Standard Times에 실린 그린란드의 미군 공군기지 관련 기사(1953. 10. 21)와 한길수가 작성한 비망록(1949. 10. 20)

    1850년 스탠더드 설립, 1902년 타임스 설립, 1932년 양사 합병

    2886 한길수가 작성한 한인 지하운동 보고서(1945. 8. 18/1945. 9. 29)와 신문 기사

    1945년 8월 18일, 일본 일간지 아사히(Asahi)는 다음과 같이 보도했다. "민족의…(원본판독불가)…에 대한 이상의 관점에서 보았을 때, 대 동아시아의 전쟁에 의해 계속 불타오를 것이다." 1945년 9월 4일, 도쿄 장교의 라디오 방송에서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는 적의 물질적인 그리고 과학적인 힘에 굴복하고 말았다. 그러나 이것은 잠시뿐이다." 경고 : 1945년 9월 29일, 우리가 더글러스 맥아더(Douglas Mac Arthur)장군에게 보낸 보고서 "묵돈(Mukden)-만주(Manchuria)의 일본 장교는 일본의 항복을 알리며 한국인에게 말했다. - 인용 - "우리의 이 세계는 우리, 아시아 인들이 백인종과 나란히 평등하게 설 수 있을 때까지 평화를 누릴 수 없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아시아 인들이 러시아-미국 전쟁을 일으킬 때에 만이 이 꿈을 실현시킬 수 있을 것이다." 1945년, 12월 7일, 한국은 존 하지(John Hodge) 장군에게 경고했다. 한국의 일본 정부 장군 아래에 있는 전임 한국 관료들과 믿을 수 있는 점촉으로 많은 일본계 한국인들이 미국에 군사 지도자들에 의해서 고용되었다는 정보를 폭로했다. 일본 관료들은 한국이 미국과 러시아로 나뉘었다고 확신했다. 일본 전략으로 두 세력 사이에는 실제로 전쟁이 일어났다. 이미 많은 양의 자금이 일본계 한국인들과의 접촉 비용과 선전포고 작업 비용으로 들어갔다. 미국은 북한을 소련의 군사 정권 아래 나두고 말았다.

    2887 한길수가 작성한 한인 지하운동 보고서(1947. 5. 14)와 러시아의 핵실험 관련 기사(1947. 11. 11)외 신문기사

    "구 소련이 폭탄제조를 시작했다." "각하, 정보에 따르면, 미국인들은 구 소련의 핵전력을 알아야 한다고 합니다. "구 소련이 원자탄을 생산할 수 있다라는 미국의 공식 발표가 곧 미국이 구 소련의 실질적인 원자폭탄 연구 상황에 대해 잘 알고 있다라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미국의 안보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다. 따라서, 저는 미국인들이 가능한 빨리 정보원을 누설하지 말고 소련의 핵 연구 진전에 관한 진상을 알아야 한다고 제안합니다.만일 한국 첩보원이 현재까지 알아낸 진상을 미국 국민이 안다면, 미국 국민들은 다가올 세계의 위기를 보다 잘 대처할 준비를 할 것이다.

    2888 Steve Early가 한길수에게 보낸 편지(1949. 5. 5)와 한길수가 대통령의 비서에게 보낸 보고서(1940년대)와 진주만 관련 신문 기사

    귀하의 4월 8일자 편지에 관해 대단히 감사 드립니다. 앞으로의 일은 제 소관이 아니지만, 여태까지 제가 담당해 왔습니다. 앞으로 많은 장애물이 있을 것과 진행이 어려울 것이라는 점을 저는 알고 있습니다. 현재와 같은 시기에 귀하의 자신감과 호의는 제가 계속 일을 수행해 나갈 수 있는 힘과 용기를 주고 있습니다. 저는 당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진심으로 감사 드립니다.…(원본누락)…

    2889 미국 재무부(Treasury Department)에서 중한민중동맹 외교대표 한길수에게 보낸 편지(1948. 5. 13)와 브래들리(W.W. Bradley)가 한길수에게 보낸 전보(연도미상)

    신사여러분, 제시된 증거에 기초하여 미 재무부가 내린 의견은, 미 국세법 101조항과 상기의 세법 법령의 조항에 의거하여 귀하는 연방 소득세를 면제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는 귀하가 오로지 교육목적으로 조직을 결성하고 운영하였음이 밝혀졌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귀하가 운영하는 목적 혹은 운영 방식, 조직특성에 변화가 없는 한 소득세 신고서를 작성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변동이 있으면, 즉시 지역 국세청 담당자에게 보고하여 세금면제 지위 시효가 확정되도록 하십시오.…(원본판독불가)…웨스턴 유니온

    2890 Standard Times에 실린 일제 한국식민통치 관련 기사(1945. 9. 11)와 한길수가 작성한 미국의 일본 점령에 대한 기사(1945. 9. 16)

    샌프란시스코(San Fransisco) 9월 11일- 한국에 상륙한 미국인들은 평화라는 가장 풀기 어려운 문제에 부딪혔다. 국가로서 한국은 35년간의 일제 통치라는 악몽에서 빠져 나오고 있다. 한국 국민은 1910년 이래로 명목상 일본국민이며, 실제로는 일본의 노예였다.내가 1938년 방문객으로 한국을 잠깐 방문하였을 때, 그들이 터무니없이 학대 받고 완전히 지쳐서 빈곤에 허덕이는 민족으로 전락되었다는 인상을 받았었다. 그러나 그들을 잘 아는 선교사들은 한국인은 매우 똑똑하고 일본에 대한 증오가 사무치며 유능하고 근면하다고 말한다. 중요한 질문은 일본인들이 자치 정부의 책임을 질 수 있는 한국의 지식인들을 어느 정도까지 제거 시키는데 성공하느냐 이다. "때가 오면" 약속된 한국의 독립이 카이로 선언에 의하여 연기될 질문이다.한국인들은 당연히 일본 총독 노우유키 아베 장군(General Nobuyuki Abe)과 그의 정부를 당분간 미국의 정책기관으로 유지하려는 미국의 결정에 분노하고 있다. 한국인들은 이를 모독적이라고 생각한다. 긴장한 일본 경찰이 미국 점령군을 환영하는 한국 군중을 향해 사살목적으로 발포하였을 때 그들로서는 이를 받아들이기 쉽지 않았다. 한국에 대한 미국의 책임감은 단지 오늘날의 문제와 유엔의 문제가 아니다. 이 문제는 1862년 미국이 한국과 통상조약을 체결하였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당시의 조약은 만일 한 나라가 제 3국에 의해서 "부당하게 혹은 가혹하게" 대우 받는다면 다른 쪽에서 도움을 주는 "상호 원조" 조항을 포함하고 있다.한국을 정복하고 한국인을 수천 명씩 죽인 후, 일본은 1905년 불운한 한국에 보호령을 실시하였으며 한국 황제는 특사를 통해 루즈벨트 대통령(Theodore Roosevelt)에게 호소했다. 한국인들은 이 특사가 말할 기회조차 얻지 못했다고 말한다. 1910년 일본은 한국을 합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