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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831 일본의 미일전쟁 준비 관련 기사(Washington Daily 1941.12.4)

    일본의 하와이 진주만 급습 5일 전 1941년 112월 7일 워싱턴 데일리 1941년 12월 4일회전목마(Mary-Go-Round)드류 패손(Drew Pearson), 로버트 S. 앨런(Robert S. Allen) 눈치 빠른 톰 코날리(Tom Connally) 상원의원은 일본과의 “평화” 협상에 그 어떤 장애물도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래서 그의 외교관계 위원회가 일본의 파괴적인 활동에 대한 깜짝 놀랄만한 증거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조용히 담아두었다. 이러한 움직임에 대한 조사를 실시하는 법안의 입안자인 질레트(Gillette) 아이오와주 상원의원이 제출한 증거에 따르면, 쿠루수(Kurusu) 특별 사절단 친선 관계를 유지해 온 동안 정부 요원들은 미국과 하와이에 비밀 친추축 군대를 조성했다. 질레트(Gillette) 상원의원에 따르면, 이러한 비밀로 행해지는 조직은-일본 군인 동맹, 전국 시민연맹, 일본 제국 동지 협회- 세 개가 있다고 한다. 질레트(Gillette) 의원은 이 중 한 조직은 주로 캘리포니아와 하와이에 약 7,200명의 당원이 있다는 증거가 있다고 주장했다. 그들은 “일본을 위해 죽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그는 또한 그 세 조직이 우리의 국방을 위협하는 활동을 하고 있고, 일본 육군과 해군을 확장 시켰다는 증거도 가지고 있다. FBI(미연방수사국)가 최근 로스엔젤레스에 있는 일본 조직 본부 현장을 급습했다. 이를 통해 상당한 돈이 군사력 강화를 위해 도쿄로 보내졌다는 것이 드러났다. 질레트(Gillette)는 또한 제 5부대(전시에 후방 교란 간첩 행위 등으로 적국의 진격을 돕는 자)에 합류하기를 꺼려 하는 일본계 미국인들이 일본에 있는 그들의 친척들에게 해를 끼치겠다는 말을 들었다는 증거도 있다고 한다. 기밀부대 조성을 위한 신병 모집하기 위해 징병 연령이 된 남자를 “등록”하는 방법을 썼다. 호놀룰루에 일본 영사장관은 최근 일본 출신의 남자들에게 일본 징병법 하에 “징병유예”를 신청하라는 명령을 했다. 등록을 하지 않는 자는 누구든지 (제국의) 징병법에 의해 처벌을 받을 것이라고 경고했다.주석- 미국에 100퍼센트 충성하는 두드러진 일본계 미국인들은 이러한 파괴적인 활동과 격렬히 맞선다. 수지 후지(Shuji Fuji) 태평양 연안 일본 신문 편집장은 “친나치적인 요소가 있는 일본군인동맹과 같은 조직을 활성화하는 선동원들에 대한 미국정부의 즉각적인 대처가 필요하다”고 촉구했다.1941년 12월 7일의 전조라푸 심포 1941년 10월 17일일본계 미국시민 연맹샌프란시스코 - 전국 시민 연맹은 마이크 마쏘카(Mike Massoka) 서기관의 성명을 통해 질레트(Gillette) 아이오와주 상원의원의 비난을 격렬하게 반박했다.뉴욕 재패니즈 타임즈 1941년 11월 8일“타나카(Tanaka) 씨는 1941년 10월 31일 백악관을 방문하여 일본문제에 관하여 논의했다. 일본 뉴욕 타임즈는 “한길수의 신용 완전히 무너져”라며 경계 신호 해제의 깃발을 올렸다. 상원 외교관계 위원회장인 톰 콘날리(Tom Conally) 상원의원은 일본계 미국시민 연맹의 영향 때문에 상원조사가 “1941년 12월 11일로 늦춰졌다. 상원도 1941년 12월 11일에 조사하는 것으로 동의했다.”고 말했다. 한길수(K. H.)워싱턴 데일리 뉴스1941년 10월 29일샘 킹(Sam King), 한길수에 도전 샘 킹(Sam King)은 10월 29일 하원에서 하와이 내 일본계 미국시민의 파괴적인 활동을 언급한 한길수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2832 " 한길수 비방 관련 기사들 (LA Japanese Daily|| 1941.1.12|| 기타 출처불명) ; 2점 "

    논평

    2833 일본의 미일전쟁 준비관련 기사(1941.9.30)

    키노아키 마쑤오(Kinoaki Matsuo)가 쓴 일본의 승리를 위한 전쟁 계획(하랍, 8s, 6d.)이란 제목의 놀라운 책이 일본 전쟁 방침을 확실히 보여줬다. 이는 1940년에 쓰였고, 작가는 진주만 공격에서 일본의 목표를 묘사할 뿐만 아니라, 이에 적용된 대책도 설명했다. 일본의 승리를 위한 전쟁 계획은 최근 출판된 서적 중 가장 결정적인 것이다. 그리고 식별력 있는 독자들은 이를 히틀러의 나의 투쟁만큼 중요한 것으로 분류한다. 우리는 녹스(Knox) 장관에게 도움을 달라고 호소했다. 한길수(K. H.)1941년 9월 30일미국 해군성 장관해군부워싱턴 D. C.프랭크 녹스(Frank Knox) 귀하녹스(Knox) 장관님께 우리는 우리가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서 일본인들의 반미활동을 폭로하는데 해군부가 우리의 도움을 줄 것이라는 희망으로 다음의 정보를 여기에 제출합니다. 우리는 진정으로 일본인들의 반미 활동이 대중에 폭로되지 않고서는 일반 미국인들은 사실과 원인을 평가할 수 없게 될 것이며, 이는 미국 국방부를 효과적으로 원조할 수 없게 한다고 믿습니다.해명과 공식 조사 필요 “과실에 대한 해명과 공식적인 조사만이 유일하게 효과적인 방책” 이라고 토마스 제퍼슨(Thomas Jefferson)에게 충고했습니다. 미국은 일본 영사관 요원들의 하와이와 미국 본토 내 대미 활동에 대해 너무 고삐를 풀어줬습니다. 저는 솔직히 만약 미국이 그들을 비슷한 상황에 처해있던 독일과 이탈리아 영사관 요원들을 다루듯이 다뤘다면 대부분의 일본 반미활동을 제거할 수 있었을 것이라고 생각합니다.우리가 꿈꾸는 예방책 왜 일본인들에게 그들이 원하는 대로 하게 내버려 두셨습니까? 그들이 파괴행위를 하면 그 때 미국이 그들을 “자루에 담을” 희망적인 생각으로 그랬습니까? 애초부터 일본인들은 완벽하게 준비가 되어 있지 않는 한 행동에 옮기지 않을 것이며 일단 행동에 옮기면 그 파괴력은 대단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제 생각에 유일하고 최선의 방책은 일본주의에 대항한 그들의 싸움에 몇몇 일본계 미국인을 돕고, 대중의 폭로를 철저히 추적하는 것입니다.하와이 거주 일본 영사관 활동 장관님께서도 아시다시피 우리는 1937년 10월 합동 하와이 주지위 승격 조사위원회에서 제 증언을 통해 일본인의 반미 활동이 벌어지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이주카 타다이키(Iizuka Tadaaiki) 이주카 타다이키(Iizuka Tadaaiki)장관은 일본에서 하와이로 보내져, 다음 그룹을 조직했다. 첫째, 모든 동양인을 일본 지배 하에 두고 하와이 주로서의 지위 승격에 힘쓴다. 둘째, 미국과의 전쟁시 일본과 미국 시민의 애국 그룹을 조직한다.중요기사:일본인 2세(Nisei)의 애국적 행위“닛폰 투 아메리카(Nippon to America)지” 1941년 2월호 “일본인의 애국적 행위. 일본인 2세가 일본 국적을 소유하고 군대에 간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전에, 하와이에서 태어나고, 남작의 신분을 가졌으며, 상하이 최전방에서 영웅으로 죽은 쿠로카와(Kurokawa) 대위는 일본인 2세의 애국적 행위를 보여준 것이다. “최근에, 샌프란시스코의 나카에몬 나카무라(Nakaemon Nakamura) 씨의 둘 째 아들인 미국 태생 리신 나카무라(Risshin Nakamura)는 도쿄에 있는 쇼와 의과대학을 졸업 한 후 의료군단에서 해군 중위 역할을 했다. “신체검사를 통과하면서, 도날드 세이치 무라타(Donald Seichi Murata)는 지난 1월 부대로 갔다. 와세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방송협회 국제부 라이오 아나운서인 그는 하와이 호놀룰루 내 마노아 일본 학교의 교장인 류이치 무라타(Ryuichi Murata)의 셋째 아들이다.” “닛폰 투 아메리카(Nippon to America)지” 1941년 1월호일본계 미국인 시민들은 미국 징병 센터로 불려 갔다.” “최근 일본계 미국인 관계와 미국 내 평화시 징병법 제정을 예상하여, 많은 일본인 부모들은 자신의 아들이 모국에 총을 겨눌 것이라는 두려움에 징병인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일본으로 돌려보냈다.”일본인 조상을 둔 미국 이중 국적자 동양에 있는 우리의 요원의 보고에 따르면 하와이와 미국 본토에 159,565 명의 일본계 미국인이 있다고 한다 - 이 정보는 1940년 12월부터 1941년 1월까지 일본정부가 실시한 인구조사 이후 일본 고국부에 의해 조사된 통계에 의한 것이다. 지난 1941년 1월 우리는 하와이와 미국 본토 내 모든 일본계 미국인의 인구조사를 허가하는 강력한 항의를 한바 있다. 159,565 명이 “이중 국적 소지자”다.서부해안 주 - 일본인 활동약 3년 간의 부주의한 ···(원본누락)···

    2834 일본의 하와이 침공에 대한 한길수 예언에 대한 미국 언론보도기사

    “12월은 일본이 공격하는 바로 그 달이 될 것입니다. 이는 우리가 심사 숙고하여 관찰한 결과이며 우리의 진실한 믿음입니다. 일본은 하와이를 겨냥하여 급습을 할 것이고, 시기는 아마 12월의 첫 번째 일요일이 될 것입니다.”

    2835 미해군성이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41.4.26)과 한길수 메모 및 기사

    1941년 4월 15일자로 귀하께서 보내신 서한은 잘 받았으며, 매우 흥미 있는 동봉물도 잘 보았습니다. 귀하의 자료와 예언은 시간이 지남에 따라 좋은 증거가 되고 있고, 귀하께서 우리에게 주신 정보는 매우 소중히 다뤄지고 있습니다.···(원본판독불가)···

    2836 한길수의 지하운동보고(1941.7.29)와 미국내 흑룡회(Black Dragon Society) 및 인종주의자의 반미활동기사

    엘리자 모하메드(Elijah Mohammed)라는 별명이 있는 보간스(Bogans)는 존스(Jones)의 공판이 열리기 직전에 선택 병역 법령의 세 가지를 위반하는 것에 대한 유죄를 입증했다. 이 세 가지 위반사항으로 그는 최고 징역 15년과 5만 달러의 벌금을 내야 한다.

    2837 일소(日蘇)불가침조약에 대한 한길수의 지하운동보고(1941.3.25)와 관련 신문기사

    한길수가 국무부에 제출일소불가침조약정보의 하이라이트 “4월 3일이 일본은 독일과 이탈리아와 더욱 긴밀한 협조와 협력을 하기 위해, 코노예(Konoye)와 그의 내각에 더욱 강력한 독재력을 부여하는 내각개편의 날로 알려졌다.” “일소불가침조약은 1941년 4월 29일 이후에 서명해선 안 된다.군사 지도자들은 이것이 북쪽 바다에 주둔하고 있는 일본 해군의 3분의 1을 구제할 것이라고 믿는다. 이는 또한 만주, 한국, 북중국 등 내 일본 최고의 병사들 3십8만 명에서 4십 8만 명을 해방시켜 줄 것이다.” “일본의 남쪽으로의 움직임은 1941년 6월 전에 시작할 것이다.” 확정됨. 일본은 1941년 4월 5일 코노예(Konoye)의 내각을 개편했다. 1941년 4월 5일 뉴욕타임즈 보도. 일소불가침조약은 1941년 4월 13일에 맺어졌다. 1941년 4월 5일 뉴욕타임즈 보도. 뉴욕타임즈에 따르면 “국무부가 일소불가침조약 소식을 듣고 놀랐다면, 이 시(워싱턴 D. C.)에 사무실을 두고 있는 중한민중대동맹은 그렇지 않았다.” 도조(Tojo) 전쟁장관은 “오늘, 일본-독일-이탈리아 동맹은 더욱 더 확고해 졌고, 이제 우리는 일소불가침조약이 ·········이제 국제 정치 상황은 급격히 변화했다.

    2838 " 일인 신문의 한길수 비방기사 (The Nipu Jiji|| 1941.10.30) "

    29일 이중국적법안에 관하여 열린 미국 하원이민원회의 공청회 석상에서 킹(キング)대의사(代議士)는, 하와이에 대해서 자주 거론하며, "누차 하와이 현(縣) 전체에 뜻하지 않게 모욕을 주었다."며 예(例)의 한길수(キルソー・ハン, 韓吉壽)에 대한 개인적 분노를 터트리며 동인(同人, 한길수)에게 격한 반문(反問)을 퍼부었다고 어제 스타 브레틴(スター・ブレチン) 지(紙)는 워싱턴 특전(特電, 전보)에 게재하였다. 한길수(韓吉壽)는 어제도 이민위원회에 출두하여 우측의 법안에 찬성을 한다는 취지를 알리며, "이것은 하와이의 일본계 시민을 이용하여 일본의 침략전쟁을 수행하려는 일본영사관의 세력으로부터 모면할 수 있는 것이다."라고 말한 것에 대해, 킹(キング)씨는 자신은 하와이를 위해 말 할 수 있는 권리를 한길수(韓吉壽) 이상으로 가지고 있다고 주의(注意)를 주며, 국적이탈을 급속화시키는 법안은 어떠한 일이 있어도 하와이의 일본계 시민에게 환영 받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이에 하와이 일본계 시민이 서명한 국적이탈 간이화(簡易化)의 청원서를 비롯하여 기타 이탈에 관한 일본계 시민의 노력을 나타내는 충분한 기록을 제출하며, 킹(キング)씨의 뜨거운 질문을 받은 한길수(韓吉壽)는 그가 설립한지 6개월이 막 지난 로스엔젤레스 시(市)의 유나이티드 아메리칸 국방위원회를 대표하는 자이며, 또한 조선중국연맹의 스포터스맨(スポータスマン)이면서 외국정부의 에이전트(대리인, 첩보원)로써 국무성(國務省)에 등록되어 있다는 취지를 말하고, 연맹의 목적은 “미국에서 일본인의 운동을 폭로한다” 는 것에 있는 조선인을 해방하는 일이 주요 목적이 아니다고 부정하였다. 한편 이민위원회에서는 우측의 법안은 불완전하며 상당 부분 수정을 필요로 한다고 말하는 의견에 일치를 본 것이라고 한다.

    2839 " 재미일인의 민족활동 관련 기사(The Hawaii Hochi|| 1941.8.9)와 한길수 활동기사(1940.3.1) "

    본 신문은 저작권 여부와는 관련 없이 모든 뉴스 급보 지역 뉴스를 이 칼럼에 재발행 할 권리가 있는 언론연합회의 멤버이다. 본 신문은 중앙언론연합의 멤버이며, 빈센트 에드워즈사(Vincent Edwards and Co)에게 광고 서비스를 기부한다.출판인: 프레드 K. 마키노(Fred K. Makino)편집장: 조지 W. 롸이트(George W. Wright) 1879년 3월 법 하에 미국 하와이 준주(準州) 호놀룰루 우체국에 제2종 우편물로 1913년 1월 1일 들어갔다.매주 일요일과 공휴일을 제외하고 발행 재무부는 작업의 경영과 감사 방법에 대해 어떤 요구도 할 이유가 없다. 요청된 정보는 전적으로 적법하며, 어떤 형태로도 단체의 손실을 줄 것이 없다. 연방 당국은 불길한 대상에 대한 조사와 관련이 없다. 재무부는 그 돈이 일본 정부에 위장 수단으로 전환되어 있지 않는 한 동결 명령을 내릴 이유가 없다. 재무부는 하와이 주민을 위해 한결같이 배려하고 도움이 되려 노력해 왔다. 호치(The Hochi)는 요구된 것의 세부 사항을 기사로 싣고, 선서 진술서의 논거로 사용하기위해 준비된 진술서의 형식으로 이 정보를 기사화함으로써 일본어학교에 관한한 상황을 설명하려 했다. 수표의 형식과 문맥은 동결 조치 시행 담당 재무부 관리에 의해 승인 받았고, 샘플 사본은 관계 전체 준주(準州) 내 부서에 전달되었다. 하와이 내 그 어떤 일본어 학교도 재정 및 운영과 관련한 사실을 숨기지 않는다. 요구된 선서서를 기입하고 파일로 모음으로써 학교 관리들은 그들의 신념과 미국과 협력할 준비가 되어있음을 보여줄 것이다. 많은 일본어학교들이 현금 점두로 운영되는 것은 사실이며, 은행의 자금동결에는 거의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다. 나머지 학교들도 똑같이 현금지불 체계를 이용하여 은행 계좌를 인출하지 않고도 운영을 계속할 수 있다. 하지만 일본어학교들은 일본사회에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고, 그들에게 부과된 제약을 받아들이고, 미국 정부가 요구하는 정보는 무엇이든지 주는 등 학회가 미국 사회에 유용한 취지로 공헌하고자 하는 그들의 의지를 보여줄 것이다. 그들은 미국 당국에 자신들의 위치를 ···(원본누락)···할 기회가 있다. ···(원본누락)···.

    2840 재미일인의 미국내 입지문제를 언급한 언론 기사(1940.11.12/ 1941.9.1/ 194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