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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871 미일전쟁후 재미일본인 문제를 보도한 LA Daily News 기사(1942.3.7)

    일본인 2세 다나카(Tanaka)는 일본계 미국인이 미국에 대한 파괴활동에 종사하고 있다고 고백했다. 일본정부가 진주만을 “등 뒤에서 공격” 준비를 위해서 로스앤젤레스 내 일본 비즈니스와 가족을 얼마나 샅샅이 뒤지고 있는지가 어제 국회 반미 활동 조사위원회에서 밝혀졌다. 폭로는 미국 태생이며, 로스앤젤레스 일본 일간지 “라푸심포(Rafu Shimpo)의 영어섹션 편집장인 도고 타나카(Togo Tanaka)의 몇 시간 동안의 심문 끝에 나왔다. 그의 증언은 아래와 같은 폭로를 유도해 냈다.1. 신도 신념의 가르침-천황을 태양의 여신의 후예로서 숭배-을 널리 보급하도록 허가하는 것은 파괴적이고 위험한 일이다.일본인 2세 영향 받아1. 일본인 2세 - 일본인들이 “돈 줄”을 쥐고 미국태생 일본인들에게 전복 계획자 세력에 복종시켰다.2. 일본인이 신문사의 협조를 받아 이곳의 일본인 “주소록”을 만들도록 허가한 것은 “상당히 위험한 계획”이다.3. 이곳 일본 영사관이 이 퍼져가는 선전의 핵심적인 역할을 하고있다.4. 영어보다 일어로 더 많이 발행하는 신문 - “라푸 심포지”는 몇 년간 선전활동에 적극적으로 임해왔다. 타나카(Tanaka)의 증언이 그날 청문회의 하이라이트였다. 조지 녹스 로스(George Knox Roth)가 후원하는 사설 단체인, 공공업무위원회에서 로스는 서기관이다. 그런 그가 일본인으로부터 돈을 받았다고 로이 햄톤(Roy Hampton) 국회의원이 비난하자 로스는 이를 부정했으나 일본인 “친구”로부터 기부금을 받았다는 것은 인정했다. 많은 애국자 일본인들은 아마도 스스로가 일본 선전활동 기술의 “의식하지 못하는” 희생자일 것이다. 타나카(Tanaka)는 잭 B. 테니(Jack B. Tenney) 의장에게 질문을 받았다. “지난 일로 미루어 보아, 일본에서 온 두 개의 기사는 분명 우리에게 좋은 영향을 주지 못했다. 자료는 거의 지난 3년 동안의 선전 활동 내용을 담은 신문 기사였다. 그것이 우리 신문을 포함한 모든 일본어 신문의 편집에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타나카(Tanaka)는 - 많은 일본 어린이들이 복종하고 있는 - 신도 가르침이 사회를 파괴하는 위험한 일이라고 R. E. 콤스(R. E. Combs) 조사 위원장에게 말했다. 왜냐하면 신도 가르침은 히로히또(Hirohito) 황제가 최고라는 믿음을 심어주기 때문이다. 타나카(Tanaka)는 “이는 종교의 범위를 넘어 섰다”고 선언했다. 라푸 심포가 1941년과 1942년 일본에서 발행한 기념호- 연보와 주소록의 복사본을 들고 콤스(Combs)가 물었다. “이 것이 거의 사회를 전복하려는 계획 아닙니까?” “네 맞습니다,” 타나카(Tanaka)가 대답했다.

    2872 한길수의 활동 보도기사(The Constitution|| Atlanta|| 1943.3.5)와 미일전쟁 전황 관련 기사들(1943)

    1942년 2월 비들(Biddles) 법무부장관은 만 3천명이 넘는 일본계 미국인이 일본 군대에 있다. “닛폰 투 아메리카(Nippon To America)” 1941년 2월 발췌록. “일본인이 되고, 육해군에서 복무하는 일본계 미국인의 수가 점차 증가하고 있다.” “예전에, 하와이에서 태어나 상하이 전방에서 영웅으로 죽어 일본인 2세의 충성을 보여준 쿠로카와(Kurokawa). 최근, 해군 중위를 맡은 샌프란시스코의 나카무라(Nakamura)…”

    2873 한길수가 미국무부 극동국장 해밀턴(Maxwell Hamilton)에게 보낸 긴급 통신문(1941.12.5)과 일본의 진주만 기습공격 관련 메모

    일본 급습 함대가 하와이 진주만에 정박해 있던 미해군의 척추를 파괴한 바로 그 날, 자정 즈음, 미국무부의 극동국장 맥스웰 해밀턴(Maxwell Hamilton)은 내게 전화를 했다. 그는 내게 1941년 12월 5일에 우리가 질레트(Gillette) 상원의원 및 코날리(Connaly) 상원의원에게 보낸 보고서를 언론에 공개하지 말아달라고 했다. 그는 위협적으로 내게 경고했다. “만약 공개하면, 난 당신을 한동안 멀리 보내버릴 수도 있어.” 달갑지 않지만 나는 미일전쟁 전에 1941년 12월 5일자 보고서를 공개하지 않기로 그와 약속을 할 수밖에 없었다. 해밀턴(Hamilton)의 위협 때문에 나는 우리의 1941년 12월 5일 보고서를 삭제하고, 스팀손(Stimson) 장관과 코델 헐(Cordell Hull) 장관에게 보낸 우리의 1941년 10월 28일 보고서를 CBS에게 전달했다.

    2874 김동성이 한길수에게 보낸 편지 봉투(1938.2.24 소인)와 한길수가 장녀인 스텔라 한(Stella Haan)에게 보낸 130달러와 70달러 수표(1942.6.25/ 1942.5.19)

    보내는 이: 김동성받는 이: 한길수

    2875 미국무성 극동국 부국장 살리스버리(Laurence E. Salisbury)가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43.5.1)과 한길수의 메모|| 그리고 한길수 활동 관련 신문기사(Stanford Times|| New Bedford|| Mass.|| 1945.9.16)

    1943년 4월 19일 한국에 재정적인 원조 문제에 관한 귀하의 서한은 잘 받았습니다. 귀하의 서한 내용은 주의 깊게 살펴보았으며, 육군부와 해군부에 귀하의 서한 사본이 열람 가능합니다.

    2876 재미일인의 동향을 정리한 한길수의 지하운동보고(1941.7.29)

    일본 영사관 첩자는 시카고와 뉴욕에 있는 흑인 민족주의자의 지도자에게 워싱턴에 있는 일본의 군사 세력에 미국이 항복을 하면, 미국에 있는 흑인들은 해방될 것이라고 약속했다. 현재의 흑인 지도자와 흑인 민족주의자…(원본판독불가)…는 특수 정치적 및 행정 혜택과 특수 경제적 배려를 받게 될 것이다.

    2877 미국전략정보국(OSS)에서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43.9.2)

    2878 미국전략정보국(OSS)에서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43.9.21) : 5점

    조지 맥클루(George McClure) 박사의 메모조지 맥클루(George McClure)의 메모특별 정보 부분 …(원본판독불가)…당신이 …(원본판독불가)…하지 못하도록…(원본판독불가)……(원본판독불가)…지도는 :1.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일본 첩자에게서 빼앗은 일본의 전쟁 준비 지도.2. 히로시마 도시 지도3. 나가사키 도시 지도이 두 지도는 한인지하운동 단체에 의해 일본에서 나에게 전략상의 중요성때문에 보내준 것이다.

    2879 한길수의 활동을 보도한 The Baltimore News-Post 사설(1943.6.4)과 미중관계 보고서 관련 기사(1956)

    (1943년 6월 4일, 사설)

    2880 "질레트 상원의원의 한국독립문제 관련 미국회 회의록 기사와 재미한인의 지위관련 미국 언론의 기사(Honolulu Advertiser 사설|| 1943.7.21/ Honolulu Star Bulletin (1943.5.18) "

    질레트 : 대통령 각하, 지난주는 한국과 미국 간에 협정을 위한 교섭을 벌인 지 60주년이 되는 주였습니다. 저는 이 조약에 관련하여, 재중조선인총연합회의 워싱턴 대표인 한 길수씨가 라디오를 통해 행한 연설을 부록(Appendix of Record)에 인쇄 수록한 것에 대해 모두의 동의를 요청하는 바입니다.어떠한 반대도 없었던 바, 그 연설을 기록(RECORD)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도록 지시하였습니다 :지난 12월 7일 진주만 공습이 있은 후, 잊혀져 왔던 한국인들이 극동지역에서 주목받기 시작하였습니다. 유엔의 중심부에서 한국과 한국민은 몇몇 진지한 고려의 대상이 되어왔습니다.오늘로부터 60년 전, 미합중국은 우연히 한미 조약 협상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아마도 미합중국이 맺었던 다른 어떤 조약도 이 조약만큼 극동지역의 향방에 영향을 끼치지는 못했을 것입니다. 표면적으로 콤모도어 슈펠트(Commodore Shufeldt)의 조약은 전적으로 한국 해안에 난파한 미국선원을 보호하고, 한국으로 하여금 서양과 상업적, 외교적 교류의 문을 열도록 하는 무해한 것이었습니다. 국제학적인 관점에서, 그리고 뒤이은 사건들에 비추어 볼 때, 1882년의 조약은 한국을 놓고 중국과 일본, 러시아가 벌이게 되는 경쟁 속에서 중요한 단계를 의미하고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1 882년 조약은 한국이 서구 열강과 맺은 최초의 조약이었으며, 이러한 관점에서 이는 독자적인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는 전통과의 분명한 결별을 의미하는 것이었습니다. 한국은 더 이상 은거하는 왕국으로 남아있지 않고, 팔을 벌려 조약을 받아들였고 미국을 조력자로 간주하였습니다. 주: 1943년 12월 4일, 하와이의 군정 책임자는 1943년 3월 10자 훈령을 수정하여, 한국민이 미합중국에 우호적인 동맹자임을 인정하였다. 모든 한국인들은 미국에게 일본과 싸울 수 있는 기회를 줄 것을 간청한다.모든 선한 한국인들의 피 속에서는 일본에 관한 모든 것에 대한 증오가 흐르고 있다. 이 증오는 350년을 거슬러 올라가 1592년 어느 날, 섭정 히데요시의 명에 따라 삼십만 명의 일본군이 조선 왕조의 해안에 상륙하여 그 도시들과 농지들 그리고 보물들을 황폐화시켰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현재 한국 전체가 일본의 점령 하에 놓여있다. 그리고 지금 한국인들은 10 세대 전에 그러했듯이, 350년 전에 일본을 상대로 겪었던 굴욕을 갚아줄 날을 고대하고 있다. 한국인은 고유한 민족이다.그들은 고대의 우방이었던 중국인들과도 다르고, 마찬가지로 고대의 적이었던 일본과도 다르다.일본의 전략적인 육해공 기지의 배후에는 일본을 패배시키기 위해서는 무엇이든 하고자 열망하고 있는 수백만의 한국인들이 있다. 우리는 준비되어있다. 한국인들은 이미 중국에 임시정부를 수립하였다.무엇 때문에 미합중국은 한국을 국제연합의 27번째 회원국으로 인정하는 결정을 보류하고 있는가? 그 이유를 추측해 볼 때 유감스럽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국무부가 한국의 임시정부를 인정하기를 강력히 촉구하는 바이다.모든 한국인들은 미합중국이 일본 본토를 공격하기를 간절히 기도하고 촉구하는 바이다. 분명 나는 미국 폭격기들이 일본 점령하의 한국의 공업도시들을 폭격할 경우 나의 동족들이 죽게 될 것이라는 사실을 너무나 잘 알면서도 이를 요구하는 것이다. 분명 나는 말하겠다. 그리고 나의 동포들도 말한다. "그렇게 하시오" 우리는 일본의 하인으로 살 바에는 차라리 미국의 폭탄에 죽을 것이다. (정부 비용을 들여 인쇄한 것이 아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