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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2611 LA FBI특수요원인 르드란드(Le Drand)가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41.1.22)

    귀하께서 워싱턴 국무부에 보내신 서한과 관련하여 귀하와 담화를 나누고 싶습니다. 저는 귀하와 약속 시간을 잡고자 여러 차례 전화를 했으나 연락이 되지 않았습니다. 하오니 이와 관련하여 귀하께서 제 사무실로 연락을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미시간 FBI 특수요원 1161 메모: 나는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 FBI 특별 요원인 르 스트레인드(Le Straind) 씨와 ‘3국 동맹과 미일전’이라는 일본 책에서 드러난 일본의 진주만 급습과 관련한 안보 문제에 대하여 논의하였다. 1940년 12월 나는 이 일본책 ‘나의 투쟁’을 입수했다. 한길수(K. H.)

    2612 한길수가 작성한 언론보도자료(1941.12.7)

    워싱턴 D. C.N. E. D가 101

    2613 이중국적자인 재미 일인과 독일인의 대미충성을 밝힐 법안을 발의한 미국회 의원 딕스타인(Samuel Dicksein)에 대한 신문기사(1941.10.22)

    사무엘 딕스틴(Samuel Dickstein) 하원 이민귀화국 위원장은 십만 명의 재미 일본인과 2십만 명의 재미 독일인이 미국에 충성을 “밝혀야 한다”고 한다. 딕스타인(Dickstein) 씨는 어제 미국 시민 중 다른 나라의 국적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국외 이주를 하든지 이 나라에 완전한 충성을 맹세할 지를 요구하는 법안을 발의했다. 전쟁부에 의해 요청된 이 법안 관련 청문회가 다음주에 시작 될 것이다. “이 나라가 내일 전쟁을 선포한다면, 이 사람들은 큰 골칫거리가 될 것이다.”고 그가 말했다. 난 그들에게 지금 결판을 낼 기회를 준다. 그들은 미국에 충성하던가 그렇지 않던가 결정을 내려야 한다.” 1943년 5월 27일 사무엘 딕스틴(Samuel Dickstien) 뉴욕시 국회의원은 1941년 10월 하원위원회 청문회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해 미국 언론에 밝혔다. 뉴요커에 따르면 한길수는 1941년 10월 ···(원본누락)··· 그의 위원회에 일본의 태평양 ···(원본누락)··· 공격을 계획을 보여주는 세부 지도와 ···(원본누락)··· 문서를 제출했다고 한다. 한길수는 당시 하와이 정부와 친밀한 사람들이 자신을 하와이 내에서 “민중선동가”로서 활동을 하고, “문제를 일으키려고 하는” 것 때문에 그를 고소했다고 말했다.

    2614 미 FBI 극동국 국장 브라톤(R.S.Bratton)이 질레트(Guy M. Gillette) 미국회 의원에게 보낸 서한(1941.11.21)

    2615 한길수가 미국무부 극동국장 해밀턴(Maxwell Hamilton)에게 보낸 서한(1941.11.23)

    2616 미국무부 여권부장이 웨런(A.M.Warren)이 한길수에게 보낸 서한(1940.4.2)

    미국에 학생신분으로 임시 거주하고 있는 한국인들에게 그들 조국의 정치적 상황에 변화가 있을 때까지 미국에 남을 수 있도록 허가해 달라는 동료 법안, S. 2870과 H. R. 7399에 관한 귀하의 의견이 담긴 1940년 3월 14일자 서한은 백악관을 통해 잘 받았습니다. 비록 귀하의 서한 내에 있는 성명서가 주목을 받았지만 제안된 법률 제정은 국회가 고려할 문제 입니다.

    2617 한길수가 소속한 인종연맹(The League of Races)의 활동 보고서

    미국 워싱턴 D.C.회장핀리 윌슨(Finley Wilson)미국 캘리포니아 로스앤젤레스부회장휴 E. 멕베스(Hugh E. Macbeth)인도 캘커타비서마넥 안클레사리아(Maneck Anklesaria) 박사한국출납원한길수미국 워싱턴 D. C. 법률 고문페리 W. 하워드(Perry W. Howard) 1945년 5월 7일 캘리포니아 샌프란시스코에서 조직됨. 인간 삶의 한 방법으로서 전쟁보다 정의와 평등의 평화를 더 매력적이게 만들자는 의지, 몇몇 국가와 사람들의 무장세력과 권위자 필요성을 줄이자는 의지, 그리고 인류의 평화적으로 조직된 정부를 필요 불가결한 수단으로 한다는 의지, 그러한 진보적, 인간적, 그리고 우애적인 조항의 계속적인 주입 및 수행, 그리고 세계적인 교육 과정으로, 샌프란시스코에서 개회 중인 세계 기구를 위한 유엔회의에서 발의된 대로, 그리고 창설된 대로 세계헌장을 이행하고자 하는 신념에 전념함. 하나의 공공사업으로서, 그리고 위 신념을 추진하면서, 샌프란시스코 국제 기구를 위한 유엔회의의 관리와 대표에게 인종연맹을 기쁘게 소개한다. 미국 캘리포니아 그리고 널리 세계에서, 미국 유색인종과 억압 받는 사람들의 상당히 유용한 사고방식과 행동은 다른 메모에서 최근 에드워드 R. 스테티니어스 주니어(Edward R. Stettinius Jr.) 미국 국무장관에게 최근 보내진 문서에서 증명되었다. 이곳의 조직은 아래와 같다.1. 미국 흑인교회 형제회 - 6백만2. 엘크스 자선 보호회 - 5십만3. 전국침례파협회 - 4백5십만4. 전국 바협회 - 4천5. 전국 흑인 여성회 - 8십만6. 전국 유색인종 여성클럽 - 3십만7. 전국 의사회 - 2만 5천8. 전국 유색인종학교 교사엽합 - 2만 5천9. 유니버셜 흑인 진보회 - 2만 5천10. 인종혼합의 영화와 라디오 조합 - 5만11. 주님의 교회 - 6천12. 졸업한 유색인종 간호사 전국연합 - 8천 5백

    2618 한미조약 60주년 기념 한길수의 방송원고(1942.5.22)

    1942년 5월 22일 라디오 방송원고 WINX 7:45에서 8:00까지 지난 12월 7일 진주만 공격 이후 잊혀졌던 한국인들이 극동의 관심사로 부상했습니다. 한국과 한국 사람들은 UN의 심각한 고려대상이 되었습니다. 60년 전 미국은 아무 생각 없이 한미조약 협상에 들어갔습니다. 아마도 극동에 미국이 가입한 조약만큼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이 없을 것입니다. 셔펠트(Shufeldt) 준장의 협약은 한국 해안에서 난파될 수도 있는 미국 어부들에게 제공되며, 서양과의 상업적 및 외교적 왕래를 열기 위한 것으로 완전히 무해한 협정으로 보였습니다. 국제적인 시각으로 볼 때에, 1882년의 조약은 한국에 대한 중국과 일본. 한국에 대한 소련의 경쟁관계에 중요한 발자취를 남긴 듯합니다. 1882년의 조약은 한국과 모든 서양 강대국들과 처음 협상을 맺게 되어 있었습니다. 이러한 점에서, 이 현상은 독특한 과거의 독특했던 전통과 분명한 단절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한국은 더 이상 은자의 왕국으로 남아 있지 않습니다. 한국은 미국과 조약 맺는 것을 두 팔 벌려 환영했고, 미국을 한국의 후원자로 간주했습니다.

    2619 한길수가 워싱턴주재 중국대사 Wei Tao-Ming에게 보낸 서한(1942.12.4)

    2620 한길수 칼럼 기사(1942.7.30)

    한국은 지난 20년 동안 국제적으로 불공평한 협정을 많이 목격했습니다. 또한 한국은 1882년 5월 22일의 한미 협정 이래로 친일 미국인을 많이 만났습니다. 지난 60년 동안 한국은 정치적 편의주의의 볼모가 되어 왔습니다. 미국(Anglo-America)은 1904년과 1905년의 러일전쟁 이후 일본을 위해 한국을 개척했습니다. 1910년 8월 29일부터 한국은 더 이상 자유롭고 독립적인 나라의 특권을 누릴 수 없었습니다. 사실 일본 혼자의 힘으로 한국을 점령하지 않았습니다. 미국 백인 정치가들이 일본에 허가를 내준 것입니다. 1941년 12월 7일에 한국 애국자들은 희망으로 가슴이 부풀어 올랐습니다. 우리는 대서양헌장에 관해서 들었습니다. 각계 분야의 미국 지도자들과 관리들은 그 때에 격려의 말을 전달했습니다. 그렇습니다. 한국인들의 가슴에 희망이 부풀어 오르긴 했는데, 사실 그것은 지나친 낙관주의로 부풀어 오른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거의 6개월 동안 미국이 우리의 공공의 적인 일본놈들과 싸우는 것을 도울 실질적인 기회를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마른 하늘의 날벼락처럼, 유력 주간지 중의 하나인 콜리어의 한 기사가 희망에 찬 한국인 가슴에 비수를 꽂았습니다. “신 세계를 위한 새로운 지도” 라는 조지 T. 레너(George T. Renner) 교수의 기사는 악취가 납니다. 그 기사의 구역질 나는 냄새는 불쾌하며 역겹습니다. 레너(Renner) 교수는 미국의 승리 이후에도 유엔이 일본과 오호츠크(Okhotsk)해를 마주하는 시베리아(Siberia) 연안의 대부분을 인계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그는 또한 2천 3백만 인구의 한국을 일본에게 넘겨주어야 한다고 제안합니다. 게다가 대만(Formosa)과 태평양 위임통치령의 섬들도 포함시켰습니다. 레너(Renner) 교수 학파가 보여준 그 관대함은 중국의 대문을 닫게 만들었고, 알래스카(Alaska) 앞 베링(Bering) 해협에서 일본의 위상을 강하게 했으며, 또한 일본이 태평양 위임통치령의 섬들을 확실히 장악 하도록 했고, 1941년 12월 7일 이전보다 하와이 섬들을 더 취약하게 만들었습니다. 물론, 냉혈적인 친일 과학연구소의 지정학 전략가들의 눈에는 이러한 모든 것들이 평화를 위한 이상적인 계획으로 보일 수 있습니다. 이런 유형의 과학 연구소 독재자를 일본놈으로 개조할 수 없다는 것이 얼마나 유감스러운 일입니까! 콜리어의 레너(Renner) 교수 기사는 실질적으로 유엔에 대항하여 극동의 소수 인종 사이에 불화를 야기하기 위한 시도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이 기사는 태평양 내 미국의 안보를 위협하는 것입니다. 썸너 웰레스(Summer Welles) 미 국무부 차관은 전몰 장병 기념일 알링턴(Arlington) 원형경기장에 모여든 군중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 미국인들이 지난 전쟁이후 국제 협력에 합류하는 데 실패 한 것이 현재 대규모 분쟁을 초래한 큰 원인이 되었고, 유엔이 “미래 세계조직의 핵심”이 될 것이라는 자신의 믿음을 표명했습니다. 웰레스(Welles) 차관은 “만약 이 전쟁이 사실상 사람들을 해방시키기 위한 것 이라면, 우리의 승리는 사람들을 해방시켜야 합니다. 인종, 종교적인 신념, 피부색으로 인한 사람들 사이의 차별은 없어져야 합니다. 제국주의의 시대는 끝이 났습니다. 오래 전부터 문명화 된 사회에서 인간의 자유에 대한 개인의 권리를 인정해온 것처럼, 사람들이 자유를 누릴 수 있는 권리는 인정되어야 합니다. 대서양 헌장의 근본 방침은 전세계 어디에서든 모두 보장 되어야 합니다.”고 말했습니다. 우리는 미국의 시민들이 공정하고, 마음이 넓고, 관대하며 선량한 사람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부디 우리가 진실하고 지속되는 평화를 위해 레너(Renner) 교수 학파를 저지할 수 있도록 도와주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