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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독립운동가 자료

    콘텐츠/독립운동가 자료 [] 에 대한 전체 5845 건의 기사검색

    번호 자료명 자료내용
    1951 "김규면|| 『誠齋略傳에 관한 回想記』(1963.6.20)"

    김규면 백추선생은 세상을 떠나가시었다. 그의 생존시 나의 아버지와 함께 조선의 독립과 해방을 위(爲)하여 남북만주에서며 또는 현해에서며 소련 원동지에서며 그는 아버지와 같이 만나 보던 생각은 지금에 와서 더욱 갖추었음을 느끼게 된다. 더욱이 그는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친히 새기는 아버지에 대한 감상문과 합동투쟁의 역사의 한 부분을 읽어볼 때 다시금 ●●의 상상이 되며 그 모양이 눈앞에 나서고 있다. 이책은 우리나라 혁명역사에 중요한 사연을 가르쳐 주었으며 우리나라 혁명역사를 연구하는데 비할 데 없는 귀물로 되어있다. 물론 앞으로 이 백추선생이 친히 쓴 감상서는 우리나라 역사 연구소의 책상위에 귀물로 놓여 있을 것을 확신한다.이동휘(李東輝)성재(誠齋) 약전(略傳)에 관한 회상기「성재」 이동휘는 1873년대 6월 20일 북조선 단천읍 평민 가정 출생이다. 그의 부친 이말은 애국지사로 독립협회 활동분자였다.이동휘 유년 - 청년시기는 봉건조선의 수구당과 유신개화당의 정권 쟁탈 시기, 중(중국)·일(일본)·로(러시아)·영(영국)·미(미국)·법(프랑스)·덕(독일)의 침략 간섭 시기, 농민폭동은 보편현상이었고, 동학당 의병운동이 창궐하는 시기, 더욱이 일청전쟁(청일전쟁)과 일로전쟁(러일전쟁)은 조선정국을 좌우하는 판국에서 싸우던 계급은 수구당과 개화당이 함께 멸망하는 것으로써 망국의 치욕을 당하는 때이다.이러한 전반적 소동 당시에 조선청년의 혁명적 첫 운동은 : 비밀운동인 ‘신민회’조직이고, 표현운동인 ‘교육회’ 설립이었다. 이동휘는 신민회원이다. 사관학교 제일회 졸업생으로 군대에 복무하여 육군 참령직에까지 승급되었다. 원수부 검사국 당번 무관으로 보직되어 근무하면서 공무 시간 밖에는 경성 각동 야학 강습소로 돌아다니면서 계몽운동에 적극 참가 하였다. 국민개명, 국민개학이라는 표어를 들고서 선전, 선동사업에 열성적으로 분투하였다. 청년군관으로서 교육계에 명성이 자자한 때이다. 다음엔 전주 지방 대대 검찰관으로 출장 시무하는 때 역시 한 가지로 : 국민의 의무병역과 국민의 의무교육은 : 보국, 안민의 유일한 방책이란 제목으로써 도처마다 군중적으로 설명하는데 땀과 눈물이 흐르도록 자신뿐 아니라 청중이 열렬하게 격동되어 환호성뿐 아니라 울음소리까지 있었다고 한다. 결국은 : 군사 훈련, 조직, 기율, 풍습이 정돈될 뿐만 아니라 ‘호남 지방에 학교설립운동이 경쟁적으로 진흥되었다’고 하였다. 그 다음의 이동휘는 강화도 지방 대대장으로 전직되었다. 그 내용은 : (서울 야학 강습소에서 진행된 사실들과 호남 지방 선전운동에 너무 소문이 굉장한 까닭에 완고편으론 반대있고 정부측에서는 조심성을 가지고 대륙에 두지 않고 섬으로 보낸 것이다.)이동휘는 강화 지방 대대장으로 취직한 후에도 역시 한 모양으로 군대사무 밖의 시간을 이용하여서는 학회발전 운동에 주의를 집중시켰다. 그래서 학회조직이 발전되어 강화도 일대에 주학교, 야학교로 망라되었고, 창신중학까지 설립하셨다. 그 때 강화 유수 민철호는 수구파 귀족으로서 신교육을 반대하여 일변으로는 주민을 충동하여 학회조직에 반대운동을 일으키고 일변으로는 당부에 무소하여; (군부, 내부) 이동휘는 교육을 혁신한다고 무력으로 위혁하여 민간질서가 문란하다고 고소하였다. 민철호의 고소장과 이동휘의 반박 호소문은 당시의 관방보도와 신문에 공개되었다. 심지어 법정에 심리까지 되었다. 결과에 강화부 유수는 면직되었고 이참령은 원수부에 소환되었다. 당시 계몽사상파 “신민회”원들은 새 사회, 새 국가 건설을 목적할 인재, 우선 당면과업은 혁신교육에 총동원하여 학회 조직은 야학 강습소로부터 시작하여 교육협회 중앙은 서울에 전국적으로 : 기호학회, 호남학회, 교남학회, 관동학회, 서북학회, 5학회 중앙은 교육협회 구성부분으로 서울에 두고서 각 도, 군으로는 지방학회가 조직되는 운동이었다.이동휘는 마침 구실을 기회로 군관직무를 사면하고 평민 자격으로 교육전선에 헌신하였다. ‘서북학회’ 위원의 직무를 가지고 각도지방으로 순회 강연하는데 도처마다 환영하는 군중이 열광적으로 선동 선전에 학회조직이 급속도로 발전되고 학교설립이 경쟁적으로 진흥되었다. ‘이동휘의 땀과 눈물이 떨어지는 곳마다 우후죽순으로 교육망이 확장되고 학교설립은 일개월에 ●로 70여 학교씩 발생된다고, 유년아동의 주학교 수에 비하여 성년자들의 야학교 수는 공배수(公倍数)로 동동 촌촌이 증가되었다고’ 당시 학회 월보들에 기재되었다. 20세기 초 10년 기간은 조선사회의 교육혁명 시기였다. 5학회의 경쟁적 활동으로써 신교육이 전국적으로 보편화되었다. 당시의 학회 운동자들은 혁명 선동자로서 주목되어서 취체, 구금, 감옥, 징역이 부지기수이고, 부득이 해외 망명자들도 적지 않다. : 우선 노백린, 안창호, 이갑, 이종호, 양기탁, 신채호 기타 등등이 망명하던 시각부터 학회 활동자들에게 경찰의 주목이 집중되었다.' 그 중에도 이동휘는 자기의 별호와 같이 정성껏 쉴새 없이 활동하는 길에서 여러 번 취체, 구금을 당하다가, 필경엔 주민이 적은 바다섬 무의도로 정배살이까지 하였다. 섬 중 정배 생활을 필하고 다시 대륙에 나왔으나 활동이 자유롭지 못하여 감시와 추종이 그림자를 따라 다니었다. 그래서 전도회의 일꾼이 되어서 선교사들과 함께 지방으로 돌아 다녔다.'그 때 기독교 선교회에서는 백만 명 전도부흥회를 서울에 개최하고서 영·미(영국·미국) 선교사를 선두로 하고 전도사 내서인 기백, 기천 명이 전국에 활동하는 때이고, 교육계 활동분자들은 거의 다 교회의 탈을 쓰고 행세하는 때이다. 그 해 학교 있는 곳마다 교회, 교회 있는 곳마다 학교였다. 18세기 구라파(유럽)에서는 기독교 사상이 계몽사상한테 정복되었다는데, 20세기 초두 조선에서는 기독교운동이 계몽운동과 경쟁하였다. 물론 세기적으로 낙후한 동방이다. 그러나 그 경쟁운동은 내용으로 보아서 결국 계몽운동 전선이 승리한 것이었다.'이동휘는 1910년 중에 전도사들과 동행하던 길에서 피신하여 요행이 국경을 넘었다. 망명자의 생활이 도둑 신발을 신고서 만주와 연해주를 왕래하면서 '간민회', '권업회'를 방문하고, 교육장려와 광복운동에 전력하였다.그 때 동안은 '간민회'의 조직 범위를 따라서 교육망이 확대되는데 : 활동분자는 김립, 장기영, 이동춘, 박용헌, 구춘선, 김약연 등등이고, 연해주에는 해조신문이 발행되는데 사장에는 유진률, 주필에는 신채호 동시에 이종호, 정재관 등 발기로 권업회가 조직되고 권업신문이 발간되는데 사장엔 한형권, 주필엔 김하구 당시 환경에 성재 선생의 일거일동은 조선광복운동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본격적 혁명자였다.이동휘 망명한 시각부터 조선 교육계에 탄압정책이 더 심각화하였다 :경성종로의 이재명 사건과 할빈(하얼빈) 정거장의 안중근 사건으로 긴장된 검거취체는 전국이 소동하였다. 더욱이 국권박탈 준비정책으로서 교육계의 지도층과 선진 청년층을 망라하여 검거 수색하는 바람에 기백 기천 명이 수금되었고, 기백 기천 명이 망명하였다. 그런 판국에서도「동학당」일진회에서는 백만 명 서명으로 합방을 찬성하였다. 5적, 7적으로부터 매국적이 백만 명에까지 달하였다. 그 매국적들의 반역적 죄악을 성토하기 위하여 내외지의 수백만 명의 연명장서로서 성명서를 발표하여 반인민적 죄악을 성토하였다. 그때 검거의 폭풍은 쉬지 않고 계속적으로 가일층 긴장되었다. 수천 명을 취체고문하는 결과, 조선의 교육혁명 창도자는 '신민회'인 것을 발견한 이상에? 교육혁명자에게나, 계몽운동자에게? 공개적으로 적용할 형법 조건은 없는지라, 그래서 데라우치(寺內正毅) 총독 암살 음모사건을 '신민회'의 소위라고 협잡증거로 꾸며 만들어 놓고서, 전국적으로 '신민회'원을 검거하면서 이미 검거된 사람들 중에서 윤치호, 옥관빈 등 131인을 우선 그 협잡으로 꾸민 증거에 항복받으려고 고문·난타·악형 취조에 폐인되도록 5, 6년을 계속 심사하는데 '신민회'원들을 총독암살미수 형사범이라고 세계가 들썩하게 떠들었다.'이동휘는 망명한 동지들 김립, 이종호, 김규면 등과 협력하여 왕청현 나자거위 밀림 속에 무관학교를 설립하고, 혁명청년 사오백 명을 양성하는데 : 곤란이 많았다. 1914년 소위 '제일차세계대전' 시기 엄동설한 어느 날 밤에 동만 왕청현 부근 하마탕 지방에서 포위를 당하여 동무 계봉우는 적에게 포로되었고 이동휘 자신은 권총으로 시위하면서 얼마 거리까지 추격하는 적들을 방어하면서 손발을 다 얼리도록 장시간 먼 거리로 피신하였다. '일본 영사관 비밀 정탐대의 활동은 무제한이었다. 만주질서에서는' 로서아(러시아) 차지정권 마지막 해인 1916년 후에 이동휘는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검거를 당하며 알륵서임스크의 지방구금이 되었다가, 1917년 2월 혁명 당시에 해방되었다. 동시에 김립이는 소왕령(우수리스크)에서 감금되었다가, 해방되었다. (구실은 나자거우 무관학교 교관으로 독일장교 두세 사람을 사용한 일이 있는데 그것의 구실로 김립, 이동휘를 취체한 것이다.)'당시 로서아(러시아) 원동 바이칼 이남은 총독정치였다. 치타부터 해삼(블라디보스토크)까지 정치기관 군사부분 기밀 정탐부에는 조선사람을 사용하였다. 이것은 로서아(러시아) 입적자 고려인이 아니라, 서울 양반 귀족의 자제들이다. 이조 말년에 수구파 정당들이 자기 자제들을 국비생으로 로서아(러시아) 황성에 파견하여 다수로 군관학교, 기타 각 학교로 공부시켰다. 1904, 5년 일로전쟁(러일전쟁, 1904) 당시에 그 유학생 사오십 명은 전부 동원되어 만주와 조선에 출동하는 로서아(러시아) 군대에 종군하는데 사관 학생들은 직접 군관으로 사단, 여단, 연대, 대대 참모부 정탐국에 종사하였고, 기타 유학생들은 통신, 정보, 번역, 정탐원으로 각 부대 기밀부에 종군하였다. 일로강화(러일강화) 후에 군대와 함께 연해주 원동에 퇴각하였다. 이 유학생들의 부형 친척들은 조선 망국정부의 각원들이다. 그래서 로서아(러시아) 당국에서는 그 유학생 그룹을 이용하여 계획적으로 원동 정치기관, 군사기관에 종사케 하였다. 그 그룹의 후견자는 이상설, 이동녕 등이었다. 나자거위 사관학교 비밀 고발도 그 그룹의 소위라고 한다. 그 전날의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에서 양성춘, 정순만, 한길명 등 피살사건이라든지 동양대학에서 김현도가 단총을 안고 이용익을 살해하려고 피득보에 따라 갔다가 온 일이라든지 모든 총살 암살 사건들이 이 그룹을 배경삼고 된 일이라고 한다. 그때부터 기호파(서울파)라는 말이 있었다. 물론 지방별로가 아니라 계급별로 보아서 : 귀족별이나, 양반별은 골육상쟁하던 유전성이나, 서민을 착취, 압박, 멸시하던 교만성은 시기적으로 청산될 수 있지, 시간적으론 불능한 것이다. 그러니 계급성과 지방성은 혼동하지 말 것이다. 그 유학생 그룹은 백당의 말일까지 그리하다가 제길대로 자기 부형들과 마치 한 가지로 일본정치에 귀화했다.'1918년 초에 이동휘는 김립, 이한영, 유스테판 등등 수십 인의 발기로써 원동 변강 비입적자 고려인 소작농민, 고용노동자 회의를 하바로프스크에 소집하여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 이 한인협회의 과업은 무산계급 시월혁명의 의의를 선전하며 원동의 소비에트 정권 수립을 위하여 적극 분투하도록 고려인 군중을 동원 시켰다. '한인협회' 총회장은 이동휘였고, 원동소비에트 위원장은 크라스노시체코프였다. 1918년 2월의 '한인협회' 표현운동 활동과정에서 비밀조직체인 '한인사회당'이 성립되었다. 의장에는 이동휘, 총서기에는 김립이었다. '한인사회당'의 당면과업은 볼셰비키주의선전, 지부조직, 적위군 모집 편성, 소비에트 주권화에 적극 분투할 것 등, 목적은 고려민족의 혁명운동을 사회주의 혁명운동 내용에 접근시키려는 것이었다.'당시 로서아(러시아) 원동 변강 주민은 : 토지 백일경씩 소유한 끄사크 농촌들과, 토지 이십일 경씩 소유한 입적자 고려인 농촌들, 밖에는 비입적자 고려인 수삼백천 명은 모두 다 소작인, 고용농군, 노동자들이었다. 연해주의 입적자 고려인들은 니코리스크 우스리스크에 고려족총회를 설립하고 골챠크 정권을 찬동하며 백광군대 모집에 음모하고 소비에트 주권에는 반대행동이었다.'1918년 8월의 백파 가마꼬프의 습격으로 인하여 하바로프스크가 실수됨으로 소비에트 기관 및'한인협회'는 피난하면서 로서아(러시아) 적위군과 '한인사회당'적위군은 시가전에서부터 희생분투하면서 퇴각하는데 알렉산드라 쓰딴게비츠 김은 불행히도 적에게 포로되어 피살되었다. 기타 '한인사회당' 동무들은 부리아물주 각 지방에 산재하여 비밀연락으로 사업을 계속하였다.1919년 2월 8일의 동경 유학생의 시위운동과 뒤이어서 3월 1일의 서울 독립선언만세운동은 전민족적으로 동원된 때 1919년 5월의 이동휘는 '한인사회당' 의장의 명의로서 '한인사회당' 확대회의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산촌에 비밀히 소집하였다. 이 회의의 참가 단체 단표들은 : 신민단, 창해소년단, 독립단, 군비단, 동경, 서울만세폭동 청년단, 사회혁명당 대표들이 참석하였다.회의순서 :1. 신입회원 접수.2. 시국문제 토론.3. 독립운동 방향 지정.4. 빨치산 운동 참가 문제.5. 혁명적 총 노선 설정.6. 상무 집행위원회 선정.7. 레닌정부에 축하문, 대표 파송문제.1. 신입회원 접수 : 단체론 시민단, 사회혁명당이 가입하였고 기타 단체 대표들은 개체로 입당하였다.2. 시국문제 토론 : 1917년 로서아(러시아) 노동계급의 시월 혁명은 위대한 사회주의 국가를 창건하였다.전세계 무산자는 단결하라는 기치로써 붉은 사회주의 새 천지를 개벽하였다.세계 혁명의 총 참모부인 소비에트 레닌정부는 무산계급 독재로써 모스크바에 수립되어 있다!!!이 위대한 사회주의 시월혁명 제2년 3월 1일에 서울 탑골공원 큰 광장에서 조선독립선언 만세운동이 폭발되었다. 시위행렬 만세소리는 한성거리가 진동되었다. 서울 장안이 막 뒤번져지는 이 3·1운동은 두 가지 의의로 설명된다 : 첫째로는 조선의 재산계급 민족운동 시기는 결속되었다는 선고이고, 둘째로는 조선의 노동계급적 민족해방운동의 세계관이 개시된다는 광고이다. 이 3·1폭동은 조선인민의 해방투쟁 과정의 분수령이다. 이 분수령에서 폭발되는 파도는 전국에 범람되었다. 계속되는 운동은 한 방향으로 빈손을 들고, 독립만세를 부르면서 시위 행진하는데 : 전국적 2백 18군의 노동자, 농민, 학생, 소시민 2백여 만명이 참가한, 완강한 투쟁에서 약 8천 명 애국자가 참혹한 희생을 당하였고, 1만 6천여 인이 중상되었고, 5만여 인이 포로 되었다고 한다. 인민 군중은 거대한 희생을 불구하고, 악독한 진압을 무릅쓰고 완강히 투쟁하는 : 이 운동을 배경하여 표현되는 비혁명적 활동방향은 가지각색이다. 예하면 : 정부조직 통신운동이 두 세 곳이고, 동경, 파리, 청원운동이 세 네 곳이다. 행정사법 토대도 없는 정부를 하나도 불가한데, 셋이나? 이것은 대신 병에 중독된 사람들의 발광증이고, 동경 청원단들은 5적 7적의 부활운동이니 물론 총살이 당연한 것이고, 파리 청원단들은 소학교 생도들이 하다시피 윌슨 대통령 14조문을 소약국 해방 주문처럼 낭독 연습하면서 파리 거리에서 천국의 강림을 희망하는가? 미련하다 박사들, 파리 회의는 세계 재분할, 식민지 쟁탈, 압박, 약탈을 법적화하려는 강도들 회의인데, 해방문제, 독립청원이 용납될 수 있는가? 체코, 폴란드는 전패국 식민지이니 물론 문제이지만 조선은 전승국 측의 식민지이니, 종주국 강도가 참석한 회의에 무슨 처분을 바라는가? 아니 국제위임통치 청원서를 제출하려고 한다지? 이것은 독립운동의 반역자 행동이다. 그리고 연해주 대표는 무엇을 청원한단 말인가? 조선독립을 찬성하면서 연해주 고려족의 자결권을 요구한단 말인가? 광시환경 : 14국이 연해주에 출병하고, 동서남북으로 백파 장군들을 후원하여 소비에트를 침공하는 강도 열강은 물론 소비에트 반대운동은 찬성할 것이라고? 위선 일본정부, 조선총독부 일치행동으로 연해주 입적자 고려인 농촌마다 친목회를 조직하고, 자위단을 설치하고, 일본 군대 직접 주둔하였으며, 일반 정치, 문화, 습관을 일본화하려고 각색 관광단을 조직하며, 아편 농사와 아편 장사를 장려하며, 빨치산 운동과 볼셰비키 주의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계엄상태 중에 있다. 하여튼 로서아(러시아) 입적자 고려인으로서는 소비에트 주권에 반대되는 강도 열강회의에 호소하려는 것은 반혁명 행동이다. 그 밖에 또 웨나의 제2국제당회의에 청원단은 조선 독립을 찬성한다는 결의를 받고서 독립승인을 받았다고 신문에 발표하였다. 제국주의에 투항한 카우츠끼 당의 결의가 무슨 가치가 있겠는가? 이 동향들을 객관적으로 평가한다면 : 동경의 민원식, 여운형, 파리의 김규식, 이승만, 윤해, 고창일, 웨나의 조소앙(조용은), 이관용 등등은 조선의 재산 계급민족운동의 파산과 함께 투기 운동자들 자신까지의 매장하는 행동, 행동이다. ※ 그래도 천진이 난만한 사람들은 독립 허가를 누가 가져오는가? 무의식적으로 청원단들의 활동회비를 연조한다. 각오있는 사람들은 소용없는 협잡운동이라고 거절하려다가도, 독립운동 반대자라고 위협하는 바람에 국민의 양심을 불안케한다. 심지어 총독부 비밀 행세꾼들까지도 모연단에 활동하여 모집한 금액을 가지고 청원단에 지불하려고, 미주와 파리로 분주히 왕래하는 일까지 있다고 한다. 이것은 보다 운동선을 산만케 하며 투쟁 방향을 문란케 하는 협잡투기 행동이고, 독립운동자의 행동은 아니다. 시국문제의 결론은 이러한 환경에서 운동방향을 바로 지정하며, 투쟁이론을 옳게 주장하자고.3. 독립운동 방향 지정;우리는 독립운동의 경험도, 혁명적 이론의 수양도 부족하다. 다만 선배들이 애국운동에 열성을 희생한 것만은 우리에게 유전성으로 모범된다. 1894. 5. 6. 대의, 명의상 독립으로 유신파 개화당이 접정하였다 : 총리 김홍집 내각 각원들은 박영효, 서재필, 유길준, 정병하, 장박, 김학우, 김옥균 등등 이었다. 유신내각이 집정 초에 국립사범학교, 사관학교를 창설하였고, 각도 각군엔 공립학교를 설립케하고, 구학을 폐하고, 신학을, 음력을 폐하고 약력을 사용케 하고, 연호는 '건양'이라 하고, 단발명령을 발포하였고, 관리주의의 폐습을 청산하며 만반 정치개혁에 착수하는 동시에, 지방으로는 학교반대, 단발반대 운동이 완강하여, 학교 교사 학생을 살해하는 일, 단발한 사람은 만나는 대로 구타, 살, 소위 의병은 척양, 척왜, 표어로 개화당정부에도, 반기를 돌리는 일, 전국적으로 수구사상, 완고무지한 소요가 분주한 형편을 이용하여, 5적, 7적이 될 이완용 귀족당들은 개화당에게 정권을 빼앗기는 시간부터 로서아(러시아) 세력 밑에 피신하였다. 로서아(러시아) 대사관은 피난처 뿐만 아니라 정권 쟁탈의 음모 참모부이었다. 양반 귀족들은 서울역 골목 골목따라 몰려다니는 무직업자, 불한당들과 부상협 족지게꾼들을 매수하여 수백, 수천 명씩 떼를 지어, 독립협회 회원들이 선전, 선동하는 군중대회와, 가두연설과 선전문, 독립신문 배달과, 독립회관 소집회의에다 모든 유신 개혁사상 고취 연설회에는 질서를 문란케 하는 반란행동이었다. 결국엔 유신정부를 습격하여 총리 김홍집, 농대 정병하는 피살되고, 기타 각원들은 도피하였고, 개화당정부는 해체되었다. 동시에 벌써 로서아(러시아)대사 빠울노프는 자기 본국에 주문하여 연해주 입적지 고려인 2백여 명을 서울에 실어왔다. 수구당들은 개화당 정부를 전복하고, 자기들이 정권을 장악한 후 황제를 환궁시키고는 외교매음 정책을 돌변하여 로서아(러시아) 측에는 형식적으로 연해주에서 실어온 사람들을 대신 협판, 참장 참령, 군수, 도장광 주사 참봉, 참서 국장 등 7문무관리를 취직시키고, 자기자제들 사오십 명을 피득보에 유학보내고 : 이미 약속이 있던 진해만, 용암포 조차문제는 유안하였고, 일본 측에는 실제내용으로 충성을 다한다. [어제는 일본을 배척하고 로서아(러시아)를 친하던 것이, 오늘은 로서아(러시아)를 배척하고 일본을 친한다.] 일본이 개화당 정부에 동정하던 감정을 변환시키려고, 또는 망명 정객들을 후원하지 말게하기 위하여, 자기들의 협상을 유지하기 위하여서 노예적 충성을 다하여 동경 측에 신임을 얻으려고 ; 일본 주식회사 은행권을 통용하도록 하고, 일로전쟁(러일전쟁, 1904)시에 필요한 사용지대를 허여하기로 의정서를 비밀히 협정하였고, 또 남산 밑 중고개 지대를 일본 잡화 상점 시장으로(상인거류지) 허여하였고, 경부 철도 부설권을 주었으며, 일본 동맹국인 영국엔 운산 금광 채굴권을, 서울 전차 시설권을 주었고, 미국에는 경인 철도 부설권을 주었다. 이렇게 열강에 매음하면서, 로서아(러시아)와는 이혼하였다. 형식적 아첨도 다 걷어치우고 로서아(러시아)대사 빠울노프가 데리고 있는 통역관 김홍륙을 대신 시켜놓고 각원으로 같이 일하다가 죄인을 만들어서 사형에 처하고 기타 2백여 명은 이탈, 저탈 범죄자로 다 면직시켜 축출하였다. (빠울노프, 위피는 패군장으로 공상에 빠졌고, 연해주 사람들은 패군지졸로 무면강동으로 돌아왔어도 사람 구실하지 못하고 말았다. 관리로 행세하던 버릇이 다른 일하기도 싫고, 골패, 투전, 술꾼으로는 유명하였다고) 수구당정부는 국호는 대한으로, 연호는 광무로, 독립신문을 폐지케 하고, 황성신문을, 단발명령은 폐지하고, 독립협회는 해산, 대한협회 설립, 반동정책에 유신운동은 질식되었다. 이러한 반동 시기에 혁명이 발생되지 못하였고 독립운동이 성공되지 못하였다. 오늘 (지금 우리들이 당면한 문제 독립운동은 객관적으로나 주관적으로 다 불리한 조건에 발생되었다): 제국주의 열강들은 식민지 쟁탈, 약탈물 분배에 눈이 어두웠고, 침략, 착취, 압박, 소약국에 대한 정책을 법적화하려고 쟁론하는 판국에 일본 제국주의는 조선식민지 밖에도 더 얻어보려고 애쓰는 판이고, 조선의 형편은 : 산업이 발달되지 못하여 노동운동이 장성하지 못하고, 농민생활은 급격한 빈궁화에 파산되고, 동양척식회사의 소작농으로, 고용노동으로 호구책이 곤란한 형편은 해마다 더 심하다. 그러나 국내의 아직 직접 혁명형세는 조성되지 못하였다. 이러한 내외 정서가 불리한 조건에서 통일적 강령계획이 없이 각자 행동으로 투쟁하는 것은 해독사업이 될 것이다. 국민이 다 총을 메고라도 중국 독군식으로 각각 행동한다면 희생에 희생을 가할 뿐이고, 아무 성공이 없을 것이다. 그러니 이론준비가 제일차적이고 무장 준비가 제이차적이다. 정치적 이론 중앙의 영도 밑에서 진행되어야 성공이 가능하다. 역사적 새 계단에서 발생되는 조선의 독립운동 방향은 노동계급적 민족해방운동 방향으로 지정되는데, 그 방향으로 이론을 집중하며, 투쟁을 계속할 '혁명적 위원회'의 조직을 지적하며 주장하였다.4. 빨치산 운동 참가문제피압박 민족 조선의 해방도 붉은 시월 개벽한 천지에서 진행될 것은 필연적 불피의 기회가 된다. 우리는 시월 혁명을 축하하면서 소비에트 주권화를 위하여 분투하지 않겠는가? 소비에트 원동 해방은 조선해방의 전제조건이 된다. 그러니 붉은 빨치산 운동에 우리는 적극 참가하기로 제의한다. 그러나 빨치산은 지원군이고 의무병은 아니다. 누구나 자유결단으로 자원하여 할 것이다. 벌써 창해 소련단 무장대는 무한스크 빨치산 운동이 준비되어 있고, '신민단' '독립단' '군비단' 무장대는 연해주와 부리아물주로 이동하기로 결정되었고, 이만 지대의 김덕보, 최빠사 영솔한 무장대와 다반의 최니꼴라이, 김억활이 영솔한 무장대는 부리아물주 빨치산 운동에 연합참모부를 조직하고 '한인사회당' 군사정치 고문을 맡고 있다. 추풍구역 솔밭관, 자피거위, 십여창 등지로 집중되는 빨치산 부대를 훈련 지도하기 위하여서는 : 사령관엔 채영, 참모장엔 김청남이 지정되었고, 이만, 부리아물주로 집중하는 빨치산 부대를 훈련지도하기 위하여서는 이용, 한운룡, 김홍일 등이 예정되었고, 내, 외, 수청 지방의 빨치산 운동의 연락, 지도관계는 정재관, 강석봉, 박치영 등이 담임하였고, 기타 독립군부대 : 압록강, 두만강 연안에 산재한 부대들에게는 : '국가광복운동에는 유일전선을 결성하며 무장훈련보다 정치지식, 혁명적 이론을, 그리고 조선의 직접적 혁명형세가 조성하기 전에는 당분간 소비에트 원동지대로 이동하여 단체조직 그대로 혹은 농업지대, 혹은 광업지대, 혹은 빨치산 부대, 자원대로 선택하여 단체활동하면서 무산계급의 혁명이론을 실지에서 연구하며 홍백전쟁의 전략전술을 실제적으로 견습하면서 우리의 건국운동에 실지적 경험지식을 소유하는 것이 준비시기의 과업이라고' 제의하며 권고한다. 물론 빨치산 운동 참가 여부는 자유선택에 있지만, 우리는 빨치산 운동은 혁명전투의 특색이라고 주창한다.5. 혁명적 총 노선 설정 :물론 식민지 해방은 각개 종주국의 제국주의 박멸을 의미함이고, 무산계급 해방은 각개 자국내의 자본주의의 박멸을 의미함이다. 독점자본, 착취, 압박, 약탈 노예화 : 제국주의는 자본주의의 최고 계단, 최후 단계이다. 조선민족의 해방은 : 일본 제국주의의 박멸을 의미함이고, 일본 무산계급의 해방은 일본 자본주의의 박멸을 의미함이다. 일본의 무산계급 혁명과 조선민족의 해방운동은 동일한 목표이고, 동일한 노선이다. 그러므로 일본의 혁명군중과 조선의 혁명군중은 공동투쟁에, 호상 부조할 의무가 있다. 우리 '한인사회당'의 혁명적, 강령적, 총 노선은 : 사회주의 혁명적 노선인 것이 공식으로 설정되는 것이다.6. 당무 집행위원회 선정 :중앙위원회 개선 : 중앙위원 15인, 후보위원 7인, 총의장 1인, 부의장 2인, 총비서 1인, 서기 3인, 상무집행위원회 성분; 조직부, 선전부, 군사부 위원장, 총의장, 총비서, 총회장 이동휘 총비서 김립 선정.7. 레닌정부와 국제당에 대표파송문제 :국제당 창립대회에 '한인사회당' 사업보고와 레닌정부에 축하문 전달할 대표 3인 : 이한영, 박진순, 박애이를 파송하기로 대회는 일치 찬성하면서 레닌주의의 만세를 부르면서 폐회하였다.대회 후 사무 분담 :대표 3인은 모스크바로 출발하였고, 조직부 위원들은 조선으로, 선전부 위원들은 상해로, 군사부 위원들은 연해주, 부리아물주, 만주로 출동하였다.1919년 3월에 이동휘 동무는 총비서 김립 동무를 데리고 상해로 출발하는데, 미진한 사무는 부의장 김규면에게 위탁하고 떠났다. (김규면은 부의장 겸 군사부 위원장으로서 군사부 위원회를 조직하고 원동 변강, 만주리의 고려인 빨치산 운동을 지도하였다.)이동휘 동무는 중국 땅에 도착한 이상에는 우선의 중국혁명의 주인공인 손문을 방문하게 되었다. 광동에 가서 손일선을 면회하고 친목한 담화의 내용은 ; 동반구의 큰 나라들 대혁명 역사적 의의를 평가하는데 ;첫째로 1911년 중국의 시월혁명은 청황설 주권을 전복하고 중화민국을 창건하였으며, 1917년 로서아(러시아)의 시월혁명은 차기 주권을 박멸하고 뒤이어 부르주아지의 정권을 전복하고서 사회주의 소비에트 국가를 건설하였다. 이 두 혁명의 의의는 : 하나는 피압박민족의 해방을 선언하며, 제국주의의 박멸을 의미함이고, 다른 하나는 피압박 계급 무산자와 해방을 선언하며 자본주의의 박멸을 선고함이라고, 로서아(러시아)혁명은 마지막 계단까지 철저하게 성공하였으나 중국의 혁명은 아직도 두 계단이 성공되지 못하였다고, 조선은 일청전쟁(청일전쟁, 1894)에 조건부로 명의상 독립이었으나 일로전쟁(러일전쟁, 1904) 끝에는 무조건으로 병합되었다고, 이제 조선의 해방은 일본 제국주의의 박멸과 함께, 동시에 대만의 해방도, 남화태(사할린)의 해방도 가능할 것이라고, 그러니 조선의 해방운동은 고립이 아니라, 중화민국과 소비에트 국가의 찬동, 지지를 가지고 있다고, 이렇게 담화를 필하면서, 손중산 선생의 건강분투와 혁명 성공을 축하하고 친목한 분위기에서 사퇴하였다.이성재 선생은 상해에 돌아와서 소위 임시정부 국무총리 취임석에서 시국문제에 대한 연설과 자기의 정견을 발표하였다. 얼마 후에 국무원과 의정원의 연석회의를 개최하고서 정부개혁안을 제출하면서, 개혁에 대한 필요와 이유를 해석한 설명서를 첨부하여 연구 토론에 부쳤다.《그 설명서의 내용은 : '대한민국 임시정부'? 우선 '대한'이란 글자 의미로 보아서 국명이 아니고 크고 크단 의미이다. 국명은 적어도 물질적 성질이 포함한 의미로 되어야 한다. ′한(韓)′ 자(字)의 의미는 크고, 하나이란 것이고 다른 의미는 테두리한, 물질적 의미없고, 빈 테투리이다. 글자 의미보다도 우리민족 방언에 한이란 말이 퍽 많다. 예하면: 한 아버지, 한 우님, 한 바다, 한 물, 한 길, 한 울 , 한 복판, 한 꼭대기, 한 벌판, 한 가운데, 이것은 다 「크고, 하나」라는 형용사이다. 명사로 쓰자면 테두리 한이 된다 : 「채원장」(菜園墻)「감옥란」(監獄欄)「목장책」(牧場栅) 등등 기타로 해석된다. 국명에는 부적당하고, 불길하다, 한이란 국명은 역사상에도 희미하고 수치스럽다. ′주′나라 말년에 한건이란 봉건 영주가 있었다, 그 땅을 한이라고 칭하다가 춘추전국시대에 진시황에게 병합되었고, 1890년대 말에 이왕설은 황제로, 국호는 대한으로, 불과 십년에 일본에 병합되었다. 5적 7적과 함께 멸망한 국호를 부활시킬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동방태고 시절에 ′변한′, ′마한′, ′진한′은 부락 자치의 취장들의 존칭이고, 국명은 아니다. 성길나한, 애친각나한 그러한 천호가 삼한 갑족의 칭호와 같은 의미이다. 한이란 말은 국명에 근거할 의미가 없다.이조 5백년의 국명은 처음이나 마지막이나 다 불길하고 허무하다. : 조선이란 말은 문자 그대로 직역하면 아침 생선이다. 해설하면 생선을 바친다(朝貢)는 의미이다. 한문자(漢文字)는 상형자(象形字)니 만큼 부름대로 단순치 않고 내용에 의미가 포함된 것이다. 그래 조선(朝鮮)이란 글자를 해부하여 본다면 십일(十日) 시월(十月) 어(魚) 양(羊)이다. 해설하면 입동(立冬)시절의 물고기는 물 위에 뛰놀지(游泳) 못하고, 물 밑에 잠기어 서식하는 시기이고, 山羊은 풀밭에 놓여있지(放牧) 못하고 울 안에 들어서 굶주리는 시기이다. 이것은 생활이 곤궁하고, 활동이 자유롭지 못한 상징(象徵)이다. 인구(人口)밀도에 비교해 말하면 선문(鮮文)하다. 이선(移鮮) 하다는것 : 분산되고 희소(稀少)한 인구(人口)를 말함이다. 국민성에 비유하여 말하면 해어(海魚)와 산양(山羊)이 친목 단합치 못할 것이다. 아침 공기가 신선하다, 아침 일기가 선명하다는 말은 : 공간 기후에 대한 표증이고 토지 인민에 대한 표증은 아니다, 그러니 조선이란, 국명에는 불길하다, 그런데 이성계는 고려국 왕위를 찬탈하고서 국호를 조선이라 칭하고 도읍을 한양에 정하였다. 등극 초 산하지맹에 서북 사람을 크게 쓰지 말라고 : 산천에 기도 맹세하였고, 금 극목아라고 금(金)가 성째 음을 김으로 개정하였고, 송도는 자기가 역적한 곳이니 미안하여 개성이라고 : 자기에게 '개성투항' 하였다는 의미 : 자기처럼 역적 반역자가 있을까 봐서, 산천에 제사하였고, 나무를 쇠가 버린다고 멸망할까 봐서, 쇠금자 음을 변하였고, 송도는 성문을 열고서, 영접하였다고 명칭하였다. 이렇게 길흉화복을 조심하면서도 한문자(漢文字)는 명의상 음조만 취하고, 상형자(象形字)의 내용상 의미의 변증법 측은 이해하지 못하였다. 애급왕(이집트왕)이 그믐달을 생각지 않고, 초생달을 미신하던 것처럼, 이태조는 조선이란 글자 내용 의미는 생각도 않고, 아침빛이 선명하다는 희망을 미신하고서, 주(朱), 대명(大明)의 국호를 모방하여, 이(李), 조선(朝鮮)이라고 칭한 것이다. 그리고 대궐은 경복궁(景福宮)이라고, 대궐 앞 큰 대문은 광화문(光化門)이라고, 황금 대자로, 대서특서하였다. 이것을 보면 태양 광선이 광명(光明)하게 발사한다는 의미를 취한 것이고, 궁궐 이름은 '태양 서울의 행복'이란 미신적 내용에, 경치 좋고 행복하다는 형식을 취한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일본 서울의 행복이란 상징(象徵)이 되는 것은, 생각지도 못한 모양이다. 태양의 서울은 하늘위 공중에 있지만, 일본 서울은 땅위의 근방에 있다. 그때 일본을 왜놈(일본인)이라고 불렀으니 골에 생각이 돌지 않았을 것이다. 창피막심한 일이다. 임진란에 불을 맞아 파상된 것을 개건하면서도, 그 이름들을 변경하지 않았다. 5백년 28왕이 다 야만무식이었고 서로 잡아먹는 사색(四色) 양반들은 자신의 이해만 상관하고, 국가 인민의 이해는 상관하지 않았다. 무, 복, 풍, 잡술의 유교를 수입하여 정치, 경제, 문화를 지배케 하고, 국문 대신에 한문을, 국민을 암매케 하고 무당, 복술, 풍수, 음양잡술 장이들이 : 대궐 안에서 민간촌까지 국태민안의 길흉화복을 지배하였고, 갈취 압박으로 전 국민은 빈궁화에, 조선은 멸망에 기울어지는 동시에, 통치계급의 5적 7적의 대한은, 일본에 병합되었다. 이조와 함께 멸망한 조선을, 매국적 함께 멸망한 대한을 다시 심방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독립국가 광복운동이지 이왕실 회복운동은 아니다. 그 이름도 소용없다. 5백년 동안 계속적 순번으로 자주, 독립이 없이 : 대명(大明), 대청(大淸), 대일본(大日本)에 노예(奴隸)로 복종하던 국명(國名)을 소용할 염치가 있는가? 어찌 통분하지 않은가? 그러면 우리의 조국의 이름은 무얼까요? 우리는 이름을 창조할 것 없이 우리 민족 5천년 역사에 있던 국명 가운데서 선택합시다. 그런데 단군 조선(朝鮮)이란 말은 후대에 와서 단군 조선(祖先)이란 말과의 바뀐 말이다. 왜냐하면 : 사회발전 제단 역사에 모순되는 말이다. 그때에 부락들 명칭은 있었지만 국가적 명칭은 없는 때이다. 동시기의 중원(中原)에 신농황제(神農黃帝) 요순(堯舜)시절에도 국명은 없었다. 우리 민족 역사에 뚜렷하게 알려진 국명은 : 부여(扶餘) 동남북, 삼부여(三扶餘), 신라, 고구려, 백제, 발해, 고려, 조선 등등 이중에서 '고려' 는 세계적으로 공인되는 국명이고, 또 고구려 이름의 계속이다. 그러면 고구려부터 1300여 년의 비교적 독립국으로 존재하였고, 라·려·제(신라·고구려·백제) 삼(三)국의 지대를 통일하였고, 무력보다 위신으로 통일 건국한 왕건이다. 강토와 인민의 통일적 국가는 고려왕조 5백년 시기였다. 또 고려는 문자 그대로 높고 아름답다. 산고수려(山高水麗) 화려 찬란한 금수강산을 의미함이다.'고려'란 국가로나 민족으로나 세계에 공통되는 이름이요 인류(人類)에 통일된 음성(목소리)이다.'고려(高麗)'란 청산, 녹수의 만고장청(靑), 만고장류(長流)로 ′청구강산(靑丘江山)′의 삼부여(三扶餘) 자손만대(子孫萬代)의 번영(繁榮) 발달을 상징(象徵)함이다. 그래 우리는 '고려'국민인 것이 본격적(本格的) 영광(榮光)이다.'국기(國旗)'는 푸른 폭에 붉은 별 셋을 묘사 한 것이 당연하겠다.해설은: 푸른 폭은 동방본색 '청구강산' '고려' 를 의미함이고, 붉은 것은 찬란한 빛의 본색이요, 별은 세계를 의미함이고, 별 셋은 삼(三)부여 자손 삼(三)국의 통일을 의미함이다.[삼홍성청폭기(三紅星靑幅旗)]국제별(國際別)로 예를 들면 1. 중화민국 오색기(五色旗)는 : 한(한족), 만(만족족), 몽(몽고족), 회(무슬림족), 장(티벳족), 오족평등(五族平等)을 의미함이고2. 북미합중국(北美合衆國, 미국) 기(旗)는 홍, 백 13폭에 검은 별 48개를 묘사한 것 : 13폭 홍백(紅白)은 13주의 홍백인의 잡거를 의미함이고, 48개 검은 별은 48연방이 합동한 것, 별의 검은 빛은 북미주(北美洲)이기에 북방본색(北方本色)을 의미함이다.3.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기(旗)는 : 붉은 폭에 붉은 별 '하나' 결합된 낫과 망치를 묘사한 것 : 이것은 노동자, 농민, 동맹으로 '온' 세계를 혁명한다는 의미이다. !!!그 밖에 태양기니 반월기니 수루개, 매, 광패, 나는 용, 뛰는 말, 이런 것들은 다 비과학적 미신으로 된 것이니 취론할 것 없다. 그리고 우리가 미신하는 태극기는 너무도 누추하니 말하기도 창피하다. 그러나 지금도 그 미신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이 전부인듯 하다. 의미는 첫 끝이나, 마지막 끝을 가르치는 형용사이고, 붉은 빛, 검은빛, 동그라미는 음과 양을 표시한 것 : 음, 양은 기체(氣体)이다. 사면(四面) 그림은 : 건 삼련 : 하늘, 곤 삼절 : 땅, 이 허중 : 불, 감 중련 : 물 이다. 그러면 천지수화음양기(天地水火陰陽旗)이다. 또는 주역 팔괘(八卦)에서 사괘(四卦)만 그림한 것 :그것은 국기(旗)가 아니다. 곧 바로말하면 음양잡술 복술장의 점괘도본(占卦圖本)이다. 그러나 주역팔괘(周昜八卦)에서 뇌(雷), 풍(風), 산(山), 택(澤)이 없는 사괘(四卦)뿐이니 점괘의 반도본(半圖本)이다. 소위 주역(周昜)(두루 바꾸어)은 주문왕(周文王)이 창작한 하도낙서(河圖洛書)이고, 그 후 공자(孔子)가 계사로 설명한 것이다. 공자(孔子)는 주역을 독습하는데, 가죽책심이 세 번이나 끊어졌다고 한다. 그래 공자(孔子)는 문학가(文學家)도 철학가도 못되고, 점술가(占術家), 미신가로 천(天), 지(地), 산(山), 천(川), 종, 묘, 사, 직에 제사, 기도 하는 법측, 三강五륜, 효,제,충, 신의 제례, 상려, 범절을 : 강연하며, 제자들에게 그런 제례제악을 강습하였다. 그때 당시의 ●평론가들에게 누추한 제사집, 상가집 개란(累累然喪家之狗)비평을 받았다. 이조의 문화, 정치, 사상은 유교가 지배하였다. 그때 공자(孔子)및 칠십이제자(七十二第子) 춘추대향에는 전국이 동원하였다. 유교의 근본 내용은 음양복술 미신인데, 그때 국기도 미신의 「점괘도본」을 등사한 것이다.―공자(孔子)가 비평받던 상가집 개들은 이 왕실 멸망을 마지막으로 짖었(吠)다. 이조의 국명과 국기는 5적7적 이 왕실과 함께 매장된 것이다. 1910년 8월 29일 皇城新聞은 : 대성통곡하였다.(嗚呼痛哉라 八月 二十九日)지금 우리는 과거를 그 만큼 해설하고, 당면문제들 : '임시정부' 운전방법을 토론하여 봅시다. : 행정, 사법 토태가 없이 공중누각처럼 상해 법조계 안에 있어 가지고는 빈 이름뿐이지 실지 운동엔 상관없이 되는 것이다. 정부체계에 연관되는 지방 기관을 조직할 수 없으니, 행호시령 행정 처분할 도리가 없다. 참의부니, 정의부니, 통의부니, 독군부니, 총군부니, 의문부니, 총군영이니, 군정사니, 군정서니, 국민회니, 한민회니, 모두 다 각자 행동으로 통일이 없다. 통일적 행동이 없이는 독립운동의 성공이 불능하다. 계통적 조직에 불합리한 기관들은 취소하고, 조직적 통일 운전에 적합되는 단일제기관 명칭을 사용하게 합시다. 우선, 대한민국 임시정부를 : '고려혁명위원회'로 개혁합시다. 혁명위원회 조직, 즉시로 각 지방 단체기관 대표회의를 소집하여 혁명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중앙집권제로서 : 참가한 대표들의 지방, 단체는 그 지방 혁명위원회로 하고, 내지도와 군에도 혁명위원회를 비밀히 조직하고, 혁명당의 통일적 강령 규칙으로 동작하며 사업하는 것이, 위신도 있고, 성공도 가능하다. 정부란, 기성국가에는 물론이지만, 미성국가에는 불필요하다. 개혁하라는 필요와 이유가 그러그러 하다고"이 ●●에 대한 토론이 이틀을 계속하는데 질문과 찬성이 있었고, 반대토론은 없었다. 제3일 회의에 정부개혁안을 표결에 부쳐 : 반대편이 다수로 제의안은 부결되었다. 의장 이동휘는 즉석에 일어서서 성토하기를 입에는 꿀이 있고 뱃속에는 칼이 있다는 말과 한가지로 입으로는 찬성하는 체하고 손으로는 반대하는 음모술책은 독립운동의 혁명자의 본의가 아니고, 망국운동자의 반복행동이나, 우리 혁명운동자는 이런 망국운동 정부에서는 탈퇴한다고 선언하였다. 동시에 개혁안 찬동자들도 다 탈퇴를 선언하였다.(성재 선생의 정부 개혁에 대한 제의안은 '한인사회당'의 의견과 주장을 대표한 것이다. 성재 선생이 해삼(海三,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해(上海)로 출발할 당시에 '한인사회당'집행부위원회의에서 독립운동 방향문제 결론에 지적한 바 : '혁명위원회'의 조직, 실현방법을 토론하면서 임시정부 개혁할 필요에 대한 토론과 설명의 구체적 결의가 있었다. 그런데 정무부원 다수가 완고, 당귀족 이시영, 이동녕, 신규식, 신익희 기타이고, 의정원 의원은 정부 창조자들이 친근, 추종자들을 모아 놓은 것이다. 기계적으로 둥지 튼 것이다.)성재 선생은 '한인사회당' 의 장본인으로 선전부 위원들과 함께 공산주의 선전사업에 전력하였다. 선전물출판은 : 공산당선언 번역, 공산, 효종, 주보, 신문 잡지를 발간하였고, 일본●●, ●남, 대만투사들과 함께 ●●●●●을 조직하고, 잡지『平平』을 발행하였고, 일본 사회주의자 ●●●을 , 大●●●●●●●高津正道와는 공동투쟁의 실천방법을 ●●토의하였다.1920년 7, 8월에 제3국제당 제2차대회에 '한인사회당'은 정식으로 참가하였다. 국제당 결의에 참가한 각국 당들은 다 공산당으로 변명하기로 결정되었다. 국제당 제2차대회의 선언서에 각국 당들은 대표 두 사람씩 서명하기로 제정되어, '한인사회당'대표는 박진순, 김규면 두 사람이 선언서에 서명하였다. 국제당 제2차 대회로부터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으로 선정되었다. '한인사회당'본부에서는 국제당 제2차 대회의 결정서, 선언서를 접수하고서 긴급히 '한인사회당' 대표회의 소집을 준비하였다. 비밀연락 시간상 관계로써 1921년 3, 4월에 '한인사회당' 대표대회는 상해에 소집되었다. 개회벽두에 의장 이동휘는 선언하기를 오늘 '한인사회당' 대표회의는 공산당으로 승급하는 대표대회이다. 공산당 만세로써 개회합시다. 대회 일동은 공산당 만세를 부르고, 회의순서대로 '한인사회당' 사업보고를 들었다. 사업보고를 필한 후 국제당 제2차대회의 선언서, 결정서를 낭독하고, 대회는 즉석에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로 선포하였다. 국제공산당 만세, 고려공산당 만세소리가 긴장하였다. 강령 규칙은 통과하고, 중앙위원회를 선거하였다. '고려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이동휘, 이한영, 이봉수, 장필수, 주종건, 유진희, 박진순, 박애, 최팔용, 홍도, 계봉우, 도용호, 김인, 김덕, 김립, 김철수, 김규면 등이 피선되었다.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의장에 이동휘, 총서기에 김철수가 선정되었다. '고려공산당' 대표 세 사람 이동휘, 박진순, 홍도 국제단에 파송하기로 결정하였다. 폐회사 끝에 의장은 결론하기를 오늘날 우리 대표대회는 '한인사회당'사업보고에서 들은바 '한인사회당'의 사업경비는 신민단 적립금으로 수만원이 지불되었고, 지금부터는 국제당 보조금으로 보충한다는 말은 무엇을 증명하는가? 이것은 '신민단'은 '한인사회당'의 유모가 되었고,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의 산모가 되었다는 것이다. 우리 대표의회는 1920년 국제당 제2차 대회에서 탄생한 '고려공산당'을 축하합시다. 대회일동은 두손을 들어 박장하면서 '국제당' 만세 '고려공산당'만세를 고함쳤다.대회 후 공산당 대표단 이동휘 등은 모스크바로 출발하는데 시베리아로 경유하지 못하고 바다로 구라파(유럽)로 경유하게 되었다. 까닭은 이르쿠츠크를 통과할 수 없다는 통지를 받은 것이다. 《그때 이르쿠츠크에서 소위 동양민족대회를 소집하는데 중국 측으로는 진독수, 강항호, 요작빈 등이고, 일본 측으로는 무끼(茂木), 조선인 측으로는 [김규식, 여운형(파리, 동경 청원관)], [장건상, 안병찬(임시정부 차장들)], 김찬(역적아들), 박철환(조봉암), 김주연(김단야), 최창식(의정원) 또 국민의회 간부전체 인원이었다. 동시에 이르쿠츠크 옵꼼 둘째서기 수야츠끼는 국제당 동양부 원동국 서기로서 권리를 남용하여 전권 독재로 고려공산당을 창조하였다. 소위 이르쿠츠크 고려당 중앙위원들은 : 백당 골챠크 장교들 : 남만춘, 채동순, 오하묵 등과 국민의회 반동파 문창범의 부관들 :한명세, 김기룡, 최고려, 김하석, 김철훈 등과, 상해정부 외무차장 장건상, 범무차장 안병찬 등등이다. 이렇게 고려당이라고 조직하고서 또 군정의회라고 만들어서 김하석, 최고려, 오하묵 등과 갈난다라시 빌리 마병대를 자유시에 파견하여 마사노프스크에 배치하여 둔 군대 : 니꼴라이스크와 간도에서 피란하여 온 고려독립 군대를 백두산 지대로 출동하겠다고 유인하여 모아놓고서 포위 공격으로써 사상자가 수백 명이고, 강에 침몰한 자들과 〔미〕병대 축격에 사상자 수백 명이고, 우수문나겔이에 구금된 자 팔구백 명이고, 기타 장교, 하사급, 정치수, 수백 명은 이르쿠츠크 감옥으로 실려왔다. 이런 대 사변들을 준비하느라고 이르쿠츠크 요색은 계엄상태였다. 연해주 빨치산 대표로 장기영, 김아파나스, 일세당 대표로 장도정 등은 이르쿠츠크 당조직 슈먀츠끼 회석에서 고려당 조직준비회의의 성분이 부적당하고, 또 고려공산당은 '한인사회당'이 변명된 것인데 일국일당의 규칙에 위반되는 것이니 여기서 당조직이란 것은 만만불가하다고 토론 반대하였다. 그때 장기영, 김아파나스는 크라스노야르스크 지방으로 정배 보내고, 장도정은 이르쿠츠크 감옥에 구금하였다. 동시에 푸시니츠를 전권 대표로 치타에 파견하여 원동에서 활동하는 '한인사회당' 일꾼들을 취체 구금하도록 그래서 치타에 있는 박애이, 계봉우, 권하순, 김진 등은 : 붙잡아서 이르쿠츠크 감옥으로 보내고, 하바로프스크 크라이꼼에 소개하여 김규면 등의 활동을 금지하고 될수 있는대로 붙잡아서 이르쿠츠크로 압송하여 달라고 부탁하였다. 국제공산당 제2차 대회에서 '한인사회당'은 정식으로 참가하여 선언서에 박진순, 김규면이 대표로 서명하였고, 고려공산당으로 변명된 것을 누구보다도 슈먀츠키는 더 잘 아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르쿠츠크에서 고려당을 조직한다는 것은 고의로, 일부러 하는 일이다 : 당시 소비에트 원동은 14국 군대가 침입한데, 일본 군대는 선봉의 역할을 하다가 1920년 4월 4,5일 정변 후로 연해주는 일군이 점령하다시피 되었다. 그리고 니항사건으로 질문교섭이 비상한 때이다. 또는 이론상으로 조선독립운동이 잘 되고 잘 못되는 것이 소비에트 국가에는 하등의 이해관계가 없지만, 일본에는 직접으로 이해관계가 큰 것이다. 《'한인사회당'이 연해주에 활동하면서 :조선독립군을 몰아다가 빨치산 부대에 합동하는 일, 조선에 공산주의 선전하는 일, 두만강, 압록강 연안의 불안을 끼치는 일, 간화회, 교육회를 반대하는 일, 일본 군대 있는 곳마다 선전문을 산포하는 일, 일본군의 별동대 홍후적코산 부대를 수청, 추풍, 구역에서 토벌 청산한 것을 ,(그리하면서도 일본 군대에는 꼭 할 수 있는 경우에도 무장 출동을 엄금하였다. : 로서아(러시아) 땅에서는, 문제 생길까봐 그리한 것이다.) 남대문 정거장에서 재등총목에게는 습격하였다. 이러한 '한인사회당'이 고려공산당으로 승급되었으니, 조선에 큰 불이 떨어졌다고, 총독부 정치에 위혁이고, 불안이다. 일본 정국에 큰 두통거리 문제이라고,》 그때 일본 잡지 '중앙공론'에 장편 논술이 있었다. 원동에서 '한인사회당' 활동과 고려독립군의 활동을 중지하지 않으면 일본 측의 질문구실을 답변하기 곤란한 것이었다. 그래서 '한인사회당'이 고려에 유일한 혁명 그룹인 줄로 아는 것이고, 국민의회, 기타 상해정부는 '한인사회당'의 반대파인 줄도 잘 아는 것이다. 수먀츠끼는 미련하다, 총명하다, 자기가 직접 책임을 회피하려고, 고려사람 저희끼리 싸움하게 만들어 놓았다. 자유시에서 독립군을 토벌한 것도 오하묵이 전투사령으로 장갑차에 서서 자유시 군대 수백 명과 가는다시 빌이 마병대 수백 명으로 포위 공격한 것이고, 모스크바에서 상해당을 반대 공박한 것도 남만춘, 한명세, 선두로 : 일꾸쓰당 중앙위원들 전부와 민족대회에 왔던 조선사람들, 오하묵이 데리고 온 군인들 사십여 명, 슈먀츠키까지 합동대회로 상해당을 반대공박하는데 문서로, 구두로, 몇 주일이 계속되었다고 한다. 이 반대파들의 행동, 사실, 내용을 변증법적으로 해석한다면 "상해당은 과연 혁명당이고 자기들은 과연 반혁명자라고 자박하는 것이 된다. 하여튼 수먀츠키 행동은 소비에트 측에는 외교정책의 완화수단에 보조재료나 되겠고, 일본 측에는 큰 이익이 되고, 고려혁명에는 큰 해독이 된다. 국제당 제2차 대회 결정을 무시하고, 한인사회당 승급된 고려공산당을 멸시하는 사람이 고려혁명에는 하등의 관념이 없을 것이다. 한명세, 남만춘 등 기타는 높이 평가하여 말하자면 : 개인 활동 출세 욕망이 제일차적이고, 혁명이 잘되고 못 되는 것은 제2, 제3차적이다.》 (사람들을 평가하는 것은 그 사람들 출세 행동역사의 역을 보는것)《1921년 5월경에 마사노프스크에 있는 독립군 부대를 나선의 금광지대로 이동하려고 준비하는 중이었다. 암물쓰크 옵꼼과 제2군단 참모부의 동의를 가지고,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군사부 위원으로 마사노프스크 군대 사령부원들, 경리부원들을 데리고서, 이동할 군인들의 보선, 수건, 내의, 약품 등 소용물을 준비하려고 또는 이동 부대를 강배로 수송하기 위하여 아물주 당국에 협의하려고 블라고베센스크에 임시로 있었다. 그때 암물쓰크 옵꼼 서기는 그사꼬프이고, 오불나꼼 회장은 뜨릴노프, 오께비스나차니크는 두루츠꼬프이었다. 어느날 밤중에 무장대 수십 명이 달려들어서 김규면 기타 13인을 체포하여 울니채로 끌고 나가서 정거장 길로 향하는데 파수병을 만났다. 한참 힐거하더니 정거장을 채 당도하기 전에 수비대 당번 장교가 군인 부대를 데리고 와서 둘러싸고 검사하는 동시에 오케비토에서 도왔다. 독구면트를 검사한 결과 원동정부 허가도 지방당국 문의도 없이 하는 행동이었다. 불법행동을 책망하여 쫓아보내고 김규면 등 13인은 정치부 울안 보호실에 유숙하게 하였다. 소위 이르쿠츠크에서 파견한 갈란다라시빌리, 오하묵, 최고려, 김하석 등 군정의회에서 자유시 나와서 첫행동이 그것이었다. 군대를 토벌하기 전에 그 군대의 정치지도 후견자들을 체포하려는 불법행동이었다. 그 이튿날 블라고베센스크 로서아(러시아)신문 "ВОЛНС●" 에 대서특서로 김규면이는 일본의 육군대학을 필하고, 일로전쟁(러일전쟁) 시에 고급장교로 공훈이 많고 19년 3·1폭동 후부터는 일본 군사정탐부 고등계 장교로서 평복하고 조선, 만주, 원동으로 비밀히 왕래하는데 붙들지 못하다가, 요행으로 체포되어 블라고베센스크 오께비토에 구금되었으니 불구에 총살될 것이라고, 기재하였다. 신문광고 이튿날엔 문창범 소위 국민의회그룹은 긴급회의로 김규면에게 대한 성토문을 만들어서, 신문에 기재된 사설을 꼭 그대로 반복하였고, 첨부하기를 김규면을 시급히 포살하지 않게 되면 국민의회에 내어 달라고, 그러면 우리는 그 정탐관계 연루자를 많이 알아낼 수 있고, 고려사람 군중 앞에서 성토하면서 포살하겠다고 우리 집행부에서는 이렇게 결정하고 외무부장 김기룡을 파송한다고 하였다. 김기룡은 이런 결정서를 가지고 정치부 나차니크에게 와서 질문하니 나차니크는 한마디로 당신들에게는 치외법권의 권리는 없다고 거절하며 쫓아보내었다. 그 이튿날은 자유시에서 오하묵이 와서 정치부 나차니크에게 엄중히 교섭하기를 김규면을 우리 군정에 넘겨달라고 한다. 나차니크는 대답하기를 우리는 그런 불법행동을 허락지 않는다고 한마디 말로 거절하였다. 그 이튿날은 자유시에서 갈란다라시 빌리, 오하묵이와 기타 부관들을 데리고 또 국제당 대표란 사람도 데리고 장갑차를 타고 위세등등하게 와서 나차니크에게 질문하기를 "당신은 어찌하여서 우리 군정의회의 행동처분을 반대하여 김규면을 보호하고 내어주지 않는가고 한다." 나차니크는 대답하기를 아무 명령허가도 없이 지방기관에 문의도 없이 밤중에 달려들어 도적놈 붙잡듯이 김규면을 아무 문답없이 강제로 끌고 가는 것을 우리는 불법행동으로 인정하며 지금 당신이 말하는 것도 비법적 행동을 반복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갈란다라시 빌리는 엄숙한 태도로, 질문하기를 우리는 이르쿠츠크 고려공산당 중앙명령을 실행하는 것이고, 나는 고려군, 정의회 총사령관으로, 오하묵은 부사령관으로 말하는 것이니 어찌하여 불법적이며 비법적인가? 또 동양이 서부 슈먀츠키 앞으로 온 국제당 대표도 같이 왔다고, 김규면이를 당장 인계하여 달라고 하니 나차니크 말이 김규면은 고려 혁명군사회의 위원장이고, 고려공산당 대표로 꽁그레스 선언에 서명한 국제당 청년이고, 중앙정부와 비밀관계 있는 사람이다. 지위계급과 사업관계로 보아서 당신들보다 고급적 우월한 혁명자이다. 직접 중앙정부 명령이나, 국제당 명령 밖에 다른 명령은 김규면에게 소용되지 않는다고, 김규면의 활동을 방해치 못한다고 엄중히 거절하였다. 장갑차에 왔던 장군들은 더 말 못하고 묵묵히 돌아가고 말았다. 정치부 나차니크는 김규면 등 13인 기숙실에 늘 다니면서 김기룡, 오하묵 등 왔던 이야기를 하고 또 갈란다라시 빌리 왔던 이야기도 전말을 자세히 말하여 준다. 그리고 하루는 와서 장시간 이야기로 어찌하여 고려사람들은 독립국가도 아직은 없는데 권리탐욕 전쟁이었는가고? 시끄럽다고 한다. 김규면 등은 활동사진식으로 이야기를 1890년대 말엽의 로서아(러시아)대사 빠울토프, 위버가 연해주 고려사람 수백 명을 서울에 실어다가 고관대직을 시켜놓고, 조선정국을 좌우하려다가 실패당한 사실을 역력히 말하였다. 그때 나차니크는 처음듣는 이야기라고 웃으면서 슈먀츠키는 빠울노프의 정책을 복습하는 구려라고 한다. 그때 김규면은 웃습니다. 이르쿠츠크 고려당 중앙과 또 자유시 군정의회와 문창범 그룹 국민의회는 다 연해주 입적자 고려인 종족이옵니다. 일반 조선사람들과는 국가적 이해관계가 다른 사람들이 옵니다. 그제는 차리에서, 어제는 골챠크에서 오늘은 볼셰비키에서 아첨하는 사람이라고 할 수있다고 하였다.1921년 6월 어느 날이다. 김규면 등 13인이 정치부 보호 기숙실에 있은지 한 주일이 되자마자, 자유시사변(흑사사변)이 발생되었다. 《정치부장 드루츄코프는 시간적으로 사변에 대한 소식을 알려준다.: 장갑차 포위공격으로 현장에서 사상자들, 수람쓰고 강에서, 마병추격에, 사상자 아침부터 석양까지 포격소리 요란하다고 한다. 원동공화국 안에 큰 사변을 만들어 놓았다고 한다. 일본군에서는 원동정부에 또 큰 질문 조건을 (고려독립군 양성한다고) 가졌다고 말한다.》김규면의 말이 물론 일본 측에서는 형식상 질문은 있겠지만, 내용으로는 환영할 것이라고, 우리는 문제를 피하기 위하여 처벽한 지대로 이동하기를 준비하는데, 또는 무장해제 하려면, 포격말고, 순한 말로 이유를 설명하여, 얼마든지 할수있는데, 백주에 들어내 놓고서, 넓은 광장 철도 역장, 도시 앞에서, 장갑 철차 대포로써, 원거리 진동하도록 소문나게 하는 일은, 오하묵 자유시 군대 문창범의 독립군대로서, 조선독립군을 토벌하는 짓을 광고하는 것이라고 말하였다. 김규면 13인 : 한운룡, 김춘호, 한빠샤 등 십여 명은 리만 빨치산 전선으로 파송하고, 김규면은 서기, 통역원들을 데리고 원동국민군 30연대 병영 장교 기숙실에 유숙하면서, 이르쿠츠크의 사변을, 자유시사변을, 모든 사변들을 자세히 기록하여서, 중앙정부와 국제당에 보고서와 고려 공산당 대표 이동휘에게 전달하여 달라는 서류를 작성하여 가지고, 치타에 가서, 원동정부(공화국) 직통서류 특별우편에 모스크바로 부송하고 부리아물주로 돌아왔다. 《삼십 연대 병영 본부는 불타고 대신 쓰고에 있었다. 30년대 장교들 삼, 사 명은 흑룡강변 방어선에 수비대장으로 있는 사람들은 신문에 기재된 김규면 소식을 보고서, 혹 다른 사람인가 의심하면서도 찾아왔다. (이미 아는 빨치산 장교들이다.) 그때 정치부 보호실에 있을 것 없이 우리 연대 본부장교 기숙실에 넓직한 방에 들어가서 숙식하자고 하기에, 옮겨와서 편의하게 있으면서 일했다. 고한 이것다 '한인사회당', '고려공산당' 직접 관계되는 사실들이기에 기록함. 》고려공산당 대표단 이동휘 등은 상해로부터 배타고 수에즈 운하로 구라파(유럽)를 경유하여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 국제당에 도착하니 벌써 몇 주일 전에 이르쿠츠크에서 고려당을 조직하고 대표로 한명세, 남만춘이 왔다고 한다. 아! 이동휘는 직업적 혁명자로서 동일한 혁명동지들과 함께 수십 년 동안 내외지에서 분투 고생하다가 로서아(러시아)의 시월혁명 이튿날부터 '한인사회당'붉은 기치를 들고서, 원동 해방 빨치산 운동 찬동자로서, 조선독립운동 고취자로서, 공산주의 선전자로서, 국제당 제2차 대회의 '고려공산당'으로 변명된 '한인사회당'의 장본인으로서, 1921년 3,4월의 창립대회 '고려공산당' 전권대표로서 국제당에 도착한 첫날부터 한명세, 남만춘 등과 대치하여 '당'문제를 쟁론하게 되는 것은 참말 창피막심한 것이다. 왜 한명세는 문창범의 부관―국민의회 총참모이고, 남만춘은 백당골챠크 장교이었다. 하바로프스크와 '한인사회당'은 소비에트 주권화를 위하여 적위군을 모집하는데, 니꼬리쓰크 한족회는 골챠크 주권을 찬동하면서 백당군대 징병에 동원하였다. '한인사회당'에서는 모스크바로 대표 파송하는데, 국민의회로 변한 한족회에서는 파리로 대표를 파견하였다. '한인사회당'에서는 비밀연락으로 독립군 부대들을 연해주 빨치산 지대로 이동시키는데, 국민의회에서는 공개적 선전광고로 독립군 모집과 사관양성 한다고 떠들어서 모여드는 청년들을 수백 명씩 부대를 지어서 화차에 무료로 수송하여 중동선 '에호'에 집중시켰다. (이것은 빨치산 운동에 방해뿐 아니라, 조선독립군을 일본과 합작하는 백당 호르빠트 군대에 부속하는 것이었다.) '한인사회당'에서는 조선총독을 반대하여 비밀 특파원 강우규는 최자남, 김례완(김병하) 등과 연락협동 준비로써 남대문 정거장에서 재등이를 포격하였는데, 국민의회에서는 조선총독을 환영하여 국민의회에서 오창환이 백성환 등 연해주 교육회, 간화회, 대표 관광단 수십 인을 데리고 총독부에 가서 재등이를 방문하고 대환영, 대상급을 받았다. 이것은 : 혁명적, 반혁명적 두 계선으로 갈라지는 판박은 철증(鐵証)이다. 그렇게 행동강령과 주의 주장이 원칙적으로 다른 사람들이어서 한 자리에서 '당'문제를 토론할 수 있는가? 그러나 국제당 동양부에서는 두 편 말을 들어가지고 심사토론하지 않고, 마구 덮어눌러, 무원축적 파당싸움이라고 취사할 말이 없다고, 그저 합동하라고 한다. 참말로 이해치 못할 애매몽롱한 말이다. 그때 국제당 회장은 지노세여브이라, 무슨 다른 원칙이 있는가? 아니 혁명분자와 반혁명분자와 합동은 원칙적이고, 반혁명분자와 혁명분자와 분열을 비원칙적이란 말인가? 백당장교들, 국민의회 간부들, 합동은 물론 원칙적이다. 동일한 행동강령이기 때문에, '한인사회당'과 합동하라는 것은 무원칙적이다. 고려공산당 조직운동에 파괴뿐만 아니라, 일반적 고려혁명운동 전에 분간치 못할 착란을 가져올 것이다. 그러한 예견적 위험성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뒤덮어 놓고서, 막 두드려 한덩이를 만든다는 것은 될 수도 없거니와, 된다 하여도, 즉시 와해될 것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동의하지 않고, 미결로 여러날 계속되었다고 한다.상해 당대표와 이르쿠츠크 당대표의 논쟁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특별 Kouuecug가 지정되었다. Kauueeug에서는 문제를 취급하여 토의한 바 꾸닌 동무는 상해당을 지지하였고, 사파와놉프 기타는 이르쿠츠크당을 지지하였다고, 그러니 이론상으로 : 상해당을 지지하는 동무는 이르쿠츠크당을 반대하는 것이고, 이르쿠츠크당을 지지하는 사람은 상해당을 반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한 당을 단독히 승인할 가능성도 불충분하고, 두 당을 병립시킬 규칙은 없는 것이라, 토론 결과의 : 두 당은 합동대표회의를 소집하여 유일한 당을 조직하라고 결정하고, 두 편 대표단을 연합준비위원으로 지정하였다. 울며불며 이 결정에 복종하였다고 한다.《성재 선생이 이 무원칙적 결정에 복종한 것은 큰 실수이다. 반대파와의 타협이 아니라, 반혁명파와의 타협인 것이다. 만일 그 결정에 불복하였다면, 문제는 달리 되었을 것을 》(그후의 자기도 후회하였다 : 잘못을 알면서도 소집될 대표회의 회담을 가지고, 국제당 위신과 명예를 위하여 부득이한 일이었다고 한다.)1921년 11월 어느날 오후 시간에 이동휘는 고려공산당 대표관장으로서 대표단원 : 홍도, 박진순, 서기 김아파나스를 데리고서 레닌 선생을 방문하였다.레닌 선생은 친절히 영접하면서 겸손한 말씀으로 : 나는 1905년 고려사변을 들은 후에는 원동에 대한 사정은 잘 모르신다고, 고려 형편과 근방사정을 통신적으로 자세히 알려달라고 하신다. 답은 서면상 기록으로써 : 일본간도 식민주의 정치, 경제 형편과 고려민족 해방운동 발전상황을 진술하였다. 선생은 주의심대하게 들으셨다. 그리고, 대표단은 상 위에 펼쳐 놓은 지도책에 고려에 부설된 철도선의 배치와, 연장을 지적하고, 제국주의 일본이 개선하는 공장, 제조소들을 표시하였다.레닌 선생은 신중하신 예언적으로 : 혁명적 사변들이 급박할 때마다 철도공인들과 전차 노동자들의 역할에 관하여 언명하시기를 : 그들은 원동에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투쟁에서 군중의 선봉대로 자청하고 출동할 것이라고 표증하셨다. 마지막으로 레닌 선생은 고려혁명자들의 투쟁에 관한 조건들을 자세히 물으시고, 말씀하시기를 우리는 문화적 중앙에 산다. 이러한 시기에 당신들은 제국주의자의 추격 때문에 거류가 일정하지 못하고, 산으로, 삼림으로, 유리 표박하여 고생 분투하는 당신들을 위하여서 국제적 방소를 조직할 필요가 있다고 언명하셨다. 이렇게 55분 동안의 친절하신 문답으로 경애하는 세계노동계급 수령을 면회하고 뜨거운 악수로 사퇴하였다.상해 압북 보산로에서 동무 김립은 피살되었다. 1892년 상해에서 김옥균이 조선 이 왕실 정탐 홍종우의 손에 피살되었고 : 1922년 김립도 상해정부 정탐들의 손에 피살되었다.김립은 신민회원으로, 서북학회 선봉청년으로 '간민회', '신민단', 활동분자로, '한인사회당' 비서로, '고려공산당' 중앙위원으로, 공산주의 선전에 적극분자였다. 상해정부 비서장으로 정부 개혁안에 찬동자로서, 정부에 탈퇴하고서 공산주의 선전사업에 전력하였다. 물론 시월혁명이 처음 개벽한 천지에서 동방이 아직 채 밝지 못하고, 컴컴한 때 새벽빛과 같이 희미하게 비치는 '한인사회당'으로부터 공산주의 선전선동 : 새벽종 소리를 잠깨지 못한 사람들 백에 구십구는 듣기 싫어 원수같이 미웠을 것이다. 무지몽매한 사회에서는 선전인물이 박해를 당하는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다. 백절불국의 투사 김립은 반혁명 역적들에게 희생되었다!!! 혁명자에게는 승리와 죽음이다. 원수를 이기면 승리이고, 이기지 못하면 죽음이다. 혁명자 김립에게는 타협이나 굴종은 없는 것이다. 모범적 혁명자 정직한 우국지사 김립 동지이다.!!!상해당, 이르쿠츠크당, 합동대표회의는 1922년 시월에 울란우테(웰한시우진스크)에 소집되었다. 국제당 위탁으로 대표회의 감시원은 보스트세브이었다. 개회 순서대로 위임장 심사 위원회의 보고에 의하면 로서아(러시아) 당적가진 대표가 근 50명이었다. 그래 의장은 선포하기를 로서아(러시아) 당적가진 사람은 발언권은 있지만 표결권은 없다고 하였다. 이것은 다 이르쿠츠크 측의 대표들이다. 그래서 이르쿠츠크 측 대표들은 다 탈퇴하였다. 떠들고서, 욕설하면서, 보스트세브 동무는 질서를 문란케 하는 그 사람들을 붙잡아 구류하려고 하다가, 의장이 만류하기로 그만 용서했다.이르쿠츠크에서 1921년 봄, 여름 조직한 소위 고려당 전체인원은 일차 즉시 로서아(러시아) 당원으로 변신하였다. 그것은 그 사람들의 목적이다. 고려당을 조직한다는 것은 시험운동이었고, 실상은 로서아(러시아) 당원이 되어서 원동이 해방되면 출세인물이 되어보자는 것이었다. 이르쿠츠크서 두 번 변신 : 처음 고려당원이라고, 두번째 로서아(러시아) 당원으로 변명한 것은 그들에게 큰 성공이다. 그들은 골챠크, 문창범의 외투를 벗고서, 슈먀츠키, 푸시니츠, 외투를 입고서, 변장 변태하는 투기 활동가들이다. 사실상 고려당 조직이야 잘되든 못되든 그들의 목적이 아니다, 그래 탈퇴하여 가는 것을 만류할 것 없이 순서대로 대표회의를 필하고, 대표 세 사람 이동휘, 윤자영, 김아파나스를 국제당으로 파송하였다. 이동휘 등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하니 벌써 이르쿠츠크 측 대표들은 탈퇴한 날 치타로 가서 밤사이로 회록을 만들어가지고, 대표 한명세, 남만춘은 몇 날 전에 국제당에 왔다고 한다. 작년에는 상해대표, 이르쿠츠크 대표 논쟁이던 것이, 금년에는 울란우데, ●●, 치타 대표 논쟁이었다. 이번에도 잘못되었으니 또 다시 하라고, 국제당 동양부에서는 이동휘, 한명세 등 연합 ●●부를 지정하여서 쫓아 보내었다.때는 극동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가 해방된 후이다. 푸시니츠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임 서기이고, 고려인 이르쿠츠크 당원들은 연해주 각 구역 각 기관 일꾼으로 등용되었다. 예하면 : 김기룡은 하바로프스크 크라이 소수민족 부장, [김기룡이는 1919년 말까지 해삼항(海三港, 블라디보스토크항) 일본(日本) 삼정물산(三井物產) 회사(會社)의 청원업(請員業)[용달(用達)]한 사람이다. 문창범의 외교부장] 기타 사람들은 각 기관 Coinpyghuk로서 활동한다. 또 한가지 사변 : 푸시니츠가 조직한 사변 : ―1922년 9월말 시월초에 [그때는 원동이 숙청되고 다만 해삼(海三, 블라디보스토크) 부두에 일본 군함이 떠나가기만 기다리는 때] 에 안우치나에서 안동백, 최호림, 이중집, 한창걸 등을 모아 놓고서 '연해주 군정의회'라고 조직하고서 반동파 김좌진 그룹 김규식을 데려다가, 총사령을 시키고, 최호림은 군정위원으로, 솔밭관 소위 이중집 부대 수백 명을 영솔하고, 추풍 로서아(러시아) 농촌으로 돌아다니게 하였다. 해삼(블라디보스토크) 해방 후 달이 넘도록, 마지막 오봉산촌에서 로서아(러시아) 농민 사, 오명을 총살하고서 중동선에 가서 장종창에게 무기를 팔아먹고, 군인들에게는 대양 열두 량씩 주어서 네 갈 데로, 가라고, 흩어지고 말았다. 이것은 푸시니추의 전략적 술책이다. : 자유시에서 토벌한 군대나, 이만이 북에서 전투한 군대나, 그 때의 빨치산은 다 김규식과 같은 반동파들이라고 증명하려고, 공연히 평화시기에 꾸며놓은 전술이다. 그때, 이만 군대 종사하던 정치일꾼 박형 등 사십여 명을 다 출당시키고, 김규면, 이용 등은 포착하라고 각 기관에 암시를 주었다고 한다. 슈먀츠키는 고려당 조직을 반대, 훼방, 파괴하려고 이르쿠츠크 반동파들을 모아놓고서 '딴'당을 조직하던 것처럼, 푸●는, 고려인 빨치산 투쟁의 명예를 더럽히고, 훼방, 허●●●연해주에서 반동분자들을 불러다 놓고서, 소위 빨치산 군대라고 명칭하고, 그러한 반란 행동을 준비하게 만든 것이다. 최호림은 그런 연극 전술에 출연하고도, 빨치산 운동은 제가 다 하였다고 한다지, ;오하묵의 정치수, 김규식의 군정위원 그 ●●●● ●●●●●● 1923년이다. 울란우데대회 대표 이동휘와, ● 치타대표 한명세 등은 연합조직부원으로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무얼 하는가? 그때는 마침 상해에서 소위 국민대표회의가 개최되는 때이다. 국민대표회 준비는 벌써 일년 전 부터이다. : 한형권이 상해정부 대표로 모스크바에 와서, 운동 보조금 수십만 원을 가지고 돌아가는 길에 파리에서 윤해, 고창일, 김규식 등이 따라왔다. 그때는 이동휘, 기타 개혁파들은 정부에서 탈퇴한 후이고, 완고 수구파들이 빈 이름만 가지고 있는 판이었다. 그때 정부에 관계할 것 없이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를 조직하였다. 주비위원들은 : 윤해, 김규식, 원세훈, 남공선, 신숙, 강구우, 남형우, 기타이다. (원세훈 남공선은 북경주재 문창범의 대표) 이 주비위원회를 이르쿠츠크당 측에서는 적극 찬성 하는 바 : 슈먀츠키 지도 하에 당을 조직하고 , 웨진스크 후원 하에 국민대표 기관을 형성하게 되면, 고려민족운동에나 공산주의운동에 ●е●емон를 가질 수 있는 희망, 또는 국민의회는 정치적 파산과 신임을 상실한 까닭에 전국민대표 기관에 새로 입각하여 보려는 욕망으로 그런 것이다. (웨진쓰크는 공식으로는 상해 소비에트 총영사관 직원이고, 비밀직임은 국제당 동양부 연락 통신원이다. 1921년 이르쿠츠크 원동민족대회 중국인, 조선인은 위진쓰크가 소개한 것이다. 천독수, 여운형은 비밀 친구이다. 위진쓰크에게) 1920년부터 위진쓰크, 연락부에 통신원으로 있는 김만겸은 위진쓰크의 후원을 가지고, 문창범 국민의회 이르쿠츠크 당 측을 대표하여,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를 적극 지지하며, 대표회●●을 촉성하도록 적극 활동하였다. 근 일 년 동안 ●●●고 연락 소개로써 120여 명이 모여 들었다. 회의는 ●●●제 토론에 결론이 합일되지 못하였다. 당조직부 위원들 이동휘, 한명세 등은 국민대표회에 대한 의견이 불일치하다. 본래 상해당 측에서는《주비위원회 본신을 부인하였고, 또는 당시 환경에는 전국민대표의 소집은 불가능하다고 하였다.》그러나 소위 대표회의는 개막되었다. 김규면은 관찰원 자격으로 출석하였다. 회의 주석단은 : 주비회위원 전부와 기타 몇 사람이고, 비서 부원들은 : 배천택, 유선장, 오창환 등 기타이다. [유선장은 오하묵 군정회 선전원이고, 오창환은 문창범 국민회비서(山崎事務官)산기-연해주 교육회에서] 회의순서 : 시국문제에 대한 토론은 백여 명이 한 두 마디 씩이라도 다 말하게 되어서, 퍽 여러날 지루하게 토론되었다. 여러 사람들의 토론한 의견을 종합하여 총괄적으로 비판 토론이 다시 계속되어 여러 날 반복되었으나, 결론이 합일되지 못하고, 분열상태의 위험성이 있었다. 예하면 : 절대 다수의 의견, 주장은 :《독립운동을 표방하고 이미 조직된, 단체, 기관들 = 의군부. 신민부, 통의부, 참의부, 임시정부, 기타 등등은 독립운동기관으로 자처하면서 각자 행동으로 통일이 없다. 이렇게 통일적 행동강령이 없이 활동한다면, 독립운동에 이익을 못 줄 뿐만 아니라, 민족해방 운동에 큰 해독을 끼칠 것이다! 벌써 해독을 끼치었다. 이제 우리는 각 단체 기관 주무자들을 불러다 놓고서, 한자리에서 토론 협상하여, 실제운동에 적응되는 중앙집권제 통일기관을 조직》하자고 한다. 주비회위원들 기타 소수의 의견, 주장은 : 소위 그 단체기관들은 빈 이름 뿐이고, 다 파산된 기구들을 우리는 어루만질 것도 없고 개조할 필요도 없다고, 우리 혁명운동자들은 창조적으로 전 국민대표 기관을 형성하려는 것이라고 한다.! 이렇게 창조파 견지에서와, 개조파 견지에서 여러 날 동안 쟁론하다가 필경에는 개조파 측 다수 80여 명이 탈퇴를 선언하였다. 동시에 주석단에 안창호, 김동삼, 남형우도 탈퇴를 선언하였다. (남형우는 주비회 위원이 된) 3분의 2 이상, 거의 4분의 3 이상이 탈퇴한 회석에서 사실상 법적으로 회의는 파열된 것이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창조파 주창자들이 회의를 계속한다, 탈퇴선언에 서명하지 않은 사람 십여 명이 자칭 중립파라 하고 참관한 바 : 조직 문제에 있어서 국민위원회를 조성하고, 중앙위원회와 상무집행위원회를 선출하는데 : 중앙위원은 다소간 신임이 있고, 명망이 있는 사람들을 심지어 안창호, 김동삼, 노백린, 이동녕까지 선출하여 놓고, (이것은 형식적) 상무집행위원회는 : 주비회위원 전부와 박용만, 문창범, 한명세, 김하석 등을 선출한다. 소위 중립파 임영선 등 13인은 그 만큼 참관하고는 더 볼 것 없다고 협잡투기 그룹 행동이라고, 지적하면서 탈퇴 성명서를 발표하고 퇴석하였다. 김만겸이는 위진쓰크 사명으로 최후 일객까지 회의를 지지하였다. 주석단(주비회) 소수는 5분의 1도 못되는 소수를 가지고 단독 행동한 것이다. 회록을 꾸며 가지고 소위 국민위원회 집행부 일동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왔다. 한명세, 문창범 등은 윤해, 김규식, 원세훈, 신숙 등 각원들을 환영하여 추풍사사로 돌아다니면서 소 잡고 돗 잡고, 정부 대신들을 대 환영하였다. 국제당에서 가타야마센(片山潛)이 대표로 와서 보고 듣고 간 후의 소위 국민위원회 집행부 전체를 축출하라고 (24시 안으로) 지방 당국에 명령하였다. 그때 통곡하면서 쫓겨갔다. 천도교회에서는 신숙, 강구우는 천도교회 대표 아니라고 성토문을 발표했다. 벌써 상해당 측에서는 국민대표회 주비위원회 위원들 본신을 부인한 것은 옳게 증명되었다. {윤해, 김규식은 파리 강도회의 청원단이고, 신숙, 강규우는 천도교 협잡군이고, 원세훈, 남공선은 북경주재 일본공사관 특무관 목등(끼도 本藤)과 교섭하는 문창범의 대표, [목등이는 海三(블라디보스토크) 총령사관 특무로 있을 때부터 문창범의 고문]남형우는 경상도 촌선배}, 파산된 국민의회를 부활시키려고 하던 운동은 참패를 당하였다. 한명세는 이동휘 일파가 반대한 까닭에 국민대표회가 파열되었다고 원망하며 호소한다. 그리고 연해주 정권파에는 자기들만 참여하고, 한인사회당 상해파 사람들은 이류분자로 몰아서 푸시니츠의 소원을 맞추어 준다. 그때 아파나스김은 니콜라옙쓰크로 귀양보내었다. 옴스크 골챠크정부에 일본 мцссц●는 이동휘 일파를 붙잡아 달라고 청구하였다고 한다. 슈먀츠키와 푸시니츠는 이동휘 일파를 이류분자로 지목한다. 이르쿠츠크에서, 모스크바에서 상해당 반대운동에 광고 선전으로 : 상해당 일꾼들 박진순, 김립 등은 국제당 보조금 수십만원을 가지고, 간도에 토지를 쌓고, 광동 기생을 첩으로 하여가지고 방탕생활 한다고 전 동양천지 다 알만큼 떠들었다. 그래 전 조선 청년 연합회 중앙에서 활동하는 장덕수, 최팔용을 더욱 주목하게 되었다. 하루는 '적박단'이란 난류배가 달려들어 장덕수, 최팔용을 구타하면서 질문이 : 너희들이 국가돈을 얼마를 낭비하였는가고, 후욕하며 구타하여 경찰 당국은 난류배들의 증거로 장덕수, 최팔용을 호출하여 책망하기를 : '공산주의를 선전하여 전국 청년을 마취하며 해독사업하는 것을 용서할 수 없다고, 오늘은 첫번이니 주의만 주지만, 다시 검거 되는 날에는 용서가 없다고 한다.'벌써 그 전날의 청년연합회 안에 분열운동이 생겨서, 주창자 김사국 등의 분쟁토론이 지리하였다. 이간중상으로 사업적보다 개인 감정을 충동하여 결국은 김사국 등이 연합회에서 탈퇴하여 「서울청년회」라고, ●립적 행동한다, 주관적으로 청년운동에는 해독이 되고, 객관적으로 총독정치에는 이익이 되는 것이다. : 「서울청년회」김사국 등 분열관계와, 적박단난류 허일 등 활동으로 인하여, 청년연합회 중앙과 지방회에는 날마다 호출, 사람마다 심문 : 공산주의에 얼마나 마취되었는가고? 장덕수 최팔용의 통신은 몇 번 받았으며, 금전은 얼마나 받았는가고? 취문, 힐거가 자심하였다고, 부닥뜨리다 못해, 망명한 청년들도 많다. 연합 측에는 감시와 진압이 심하고, 분열과 반동 측에는 활동이 자유롭다. 얼마후에는 또 「북풍회」니 「일월회」니 하는 사상 단체가 출세하였다. 「화요회」까지.― 김사국은 「서울청년회」라고 독립적 행동을 하면서 청년연합회 말고 다른 무엇을 연락하려고 전선을 도와서, 간도 용정, 영안, 연해주까지 유람하면서 문창범, ●●●, 김하석, 한명세 등을 방문하고 돌아갔다고 한다.― 남만춘은 상해로 가서 여운형과 함께 위진쓰크 연락부 후원으로 조선운동에 대한 신통한 계획을 준비하●●고 : 국제청년부에 있는 조훈도 상해로 나오고, 서울에 있는 박헌영도 상해로 나와서, 여운형 집에서 위진쓰크의 사무실에서, 신통한 계획들을 : 교환하였다. 계획 실행은 「화요회」에 담임시킬 것이었다.― 이성(이영휘)는 선전사업을 위하여 자원출동으로 서울에 가서 활동하려다가 검거되어서 고문, 구타로 폐인이 되었다. 이성은 학생 시대부터 혁명청년계의 선봉이다. 창동학원원장으로 일하다가 학교 연조금 모집을 위하여 세탁업 노동까지 하다가 골챠크가 멸망하고 소비에트 주권화 시베리아에서 당원으로 되었다. 언제 김규명을 만나서 장시간 이야기 하는데 : 국민의회에 이르쿠츠크파니 두 가지로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책임회피에 소용하려는 말이니 실상 하나이고, 둘이 아니라고, 그 사람들은 혁명운동이나 정치활동에도 투기상 업적 방식으로 성의없고, 애국심이나 동포애도 볼 수 없다고 하며, 나는 내몸이 폐인된 것 보다도 조선혁명이 마비된 것을 더욱 애통하여 합니다. 형님은 아직 폐인되지 않았으니 끝까지 분투하시기를 축원한다고, 손쥐고 작별하면서, 눈물 흘리며, 성재 선생에게 문안을 전한다. 이류분자로 부리아물주 고려부 책임자(빨치산) 임상춘 등등, 하바로프스크 고려부 책임자 박입 등, (인전쟁 부상자) 빨치산 연락부 책임자들 김철, 허기, 장철, 기타 혁명청년들 다수가 남중국, 만주, 간도, 조선으로 분산되었다. '적기단' 최계림 ●기타 청년단체로 선전운동에 : 상해당 측에서는 공산주의자 동맹을 조직하고, 『재건설』월보를 발간하여 산만한 궁중에 비밀분전으로 사상통일을 고취하였으며, 『횃불』(炬火)잡지를 발간하여 : 혁명적 이론 투쟁에 주의를 집중시키었다. : '혁명의 중심은 혁명 이론의 집중에 있다고'그때 만주와 중국●조선으로, 산재한 운동선에 「고려공산단」재건설을 준비하는데, 김규면은 국민대표회 관찰원 사명을 필하고서는, 상해에서 공산주의자들과 함께 『횃불』잡지 출판사업과 「청년동맹회」고문으로서 남중국에 모여드는 청년들에게 활동방향을 소개하는 일 : 이것이 표현운동이고, 비밀운동에는 : 중국 혁명계에 연락하는 일, 조선, 만주, 운동선에 인원 왕래, 통신 연락 등, 해삼(블라디보스토크) 성재 선생에게 통신문답 왕복과 「공산주의자 동맹」사업 진행에 대한 보고와, 재건설 월보사와 협상하는 일, 이것이 비밀공작.이동휘 한명세 연명하여 국민대표회에 청원하기를 '우리는 국민대표회의 의견과, 결의를 청취하기 위하여서 대표 김규면, 김만겸을 파송하니 방청석을 허여하여 달라고' 공동발표 있은 후에는, 일 년이 넘도록 아무 의견 발표나 협의 소식이 없다. : 국민대표회의의 파열과 함께 당연합 조직부도 파열된 것이다. 물론 월흐니 우린쓰크 대회를 하등의 평가도 없이 치타에 탈퇴한 그룹과 합치운동 하라는 것은 : 국제당의 기정방침이 슈먀츠키 위진쓰크 소원대로 상해당은 박멸하고, 조선에 다른 당을 조성하려는 것이고, 이르쿠츠크당은 연해주당으로 변화하는 정책이다. 상해당 대표들은 천진이 난만한 도덕군자로서 파당싸움이 난 통에 자기주장을 고집하지도 못하고, 국제당 명령에 굴복했다. 투기 협잡배들의 활동무대에서 조선혁명운동은 비참한 고통을 당하게 되었다. 1924년부터 창발적「화요회」발기로서 「민중대회」소집을 주창하는데 : 소집운동 방법은 신문지상 광고로써 주고, 받고 한다. : ′광고양식′은 '우리는 민중대회 모집을 찬성하오, 단체이름, 지명.'이렇게 신문지상 광고운동에 전국적으로 500여 단체가 찬성편에 등록되었다. 이와 동시에 '서울청년회' 발기로서, 반대편에 등록된 단체가 또 ●●●여에 달하였다. 「민주대회소집」 찬성 반대 신문광고 운동은 : 「화요회」,「서울청년회」근 반년동안 ●ес●●цьал●이다. 이것은 신통한 계획의 제1막이다. 개회일자를 광고하고, 민중대회 개막을 선포하는 순간에 경찰당국의 금지를 당하였다고 한다. 약속대로 모여왔던 군중은 격분하여, 거리로 몰려 나와, 시위행렬을 지었다. 중마동서부터 배고개로 통한 좁은 골목에 수백 명 군중은 붉은기를 들고서 시위행진 하는데 경찰부대의 습격충돌로 인하여 뒤죽박죽 난장판에, 사기점에 진열한 사기들이 무너져서 깨어지고 말더니, 사기상점이 결단나고, 미전(쌀전) 마루 끝에 내어놓았던 쌀자루들이 번져지고 엎어지고 흩어지는 바람에 좁은 거리는 참말 백사장이었다고, 결국 수삼십 명이 붙잡혔다고, 시위행렬의 선두에서 고함치던 김찬, 조봉암은 신통하게 붙잡히지 않고, 교묘하게 피신하였다고, 그날 호외 전문으로 '붉은 깃발에 서울 장안이 진동되었다고'대서특서로 광고하였다. 그날부터 서울 신문들은 '민중대회의 소집, 개막, 금지, 시위운동, 항쟁진행, 경찰부대 진압, 현장상황'을 역력히 기재하여, 여러 날 계속하였다. : 「적기운동이 조선에 처음이라니」「붉은 기치로써 서울을 덮었다느니」「격분한 민중은 완강하게 행진했다느니」신문지 전면에 찬란하게 과장하였다. 동경신문에도 「조선에 적화운동이 직면폭발 하였다고」떠들었고, 상해 중국신문에도 번역되었다. 이것은 신통한 계획의 제2막이다. 그런데 : 이상하다. 재등 총독은 자기 '火曜會'처럼 동정하며 ●●하는지 저기●● ●●●● ●●● ●●●●●도 안하고, 민중대회 주창자 「화요회」간부는 검거도 취체도 없다. [일본 취밀원 소속 : 화요회(火曜會)(백작들 모임) 목요회(木曜會)(자작들 모임) 토요회(土曜會)(남작들 모임)정치 연구회가 있다. 재등이는 화요회주석(火曜會主席)이었다.] 며칠 후에 김찬, 조봉암이는 신통하게 붙잡히지 않고, 교묘하게 피신하여, 상해로 나왔다. 상해 참모부 위진쓰크, 남만춘, 여운형에게 신문, 광고, 재료, 모든 정황 사실을 보고한 바 : 계획 실행이 신기하게 되었다고, 만족을 느끼면서 위진쓰크 연락부에서는 「민중대회」적기운동의 신문재료 뭉텅이와 찬동소개서를 첨부하여 조봉암을 국제당으로 파송하였다. 그 때 국제당회장은 뺑지니츠이었다. 조선운동에는 「화요회」제일이란 칭찬을 받고, 조봉암은 상해로 돌아왔다. 상해「화요회」참모부에서는 조봉암(백철환)의 보고를 듣고서, 조선공산당 조직을 준비하였다. 준비위원은 : 위진쓰크, 남만춘, 여운형, 김찬, 조봉암 등이다. 조선공산당 강령, 규칙을 제정하고, 중앙위원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회 안에 해외부(海外部)를 설치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이 다 검거되면 해외부에서 중앙위원회 전권을 행사하기 위하여) 그리고 중앙위원회 위원 등, 후보위원 등, 검사부위원 등, 후보위원 등, 서기부위원 후보위원 등, 해외부위원 등등을 선정하였다. 중앙위원회 위원들은 각 사람을 주워 모아 선택하고, 해외 부위원은 「화요회」창조자 간부 : 김찬, 조봉암, 박헌영, 감단야, 기타 남만춘 , 여운형 등을 선택하였다. 이렇게 강령규칙, 중앙위원 성명들을 기록한 회록을 꾸며 가지고, 여운형 등은 북경가서 조선가는 화차 편으로 송달하려고 누구에게 부탁하였던지? 신의주 발 객차에서 조선공산당 조직회록이 발로되었다고 한다. 누가 가지고 가다가 놓고서 피신하였는지? 혹은 주고 받고 하였는지? 하여튼 그때 신문에 '●●의 주화차에서 당조직 문건이 발로된 단서로 시작하여 전국에 검거폭풍이 일어났다고'보도하였다. 참말 청천벽력이었다. 조선에 제일차 공산당 사건이라고 ? 전국적으로 검거취체가 계속되었다. 위원 검거진 중, 백일인(101)이, 제1차 공산당사건의 주인공이라고 지적되었다. 백일인의 심사취조에, 그 중 박헌영의 답변이 가장 철저하고, 격렬하였다고 그때 신문보도를 보는 사람들은 철저한 공산주의자라고 말할수 있게? 이것은 신통한 계획의 제3막이다. 철저한 박헌영은 취문한 후 인차 인명 보석되었다. 이 일백일인 사건부터 시작하여 달마다, 날마다, 해마다, 검거가 긴장되어 제2차, 제3차, 제4차 공산당 사건이 분주하고, 요란하였다. 이것은 : 조선에 진정한 공산주의의 발전을 말살시키는 운동이었다. 상해 「화요회」참모부는「화요당」대외부 출장 사무소가 되었다. 여운형, 남만춘, 김찬, 조봉암, 김단야 등은 (김주연) 해외부 의원으로서 위진쓰크 고문으로 「화요당」중앙전권을 행사한다. 김단야는 국제당으로, 모스크바에 파송되었다. 병으로써 보석되었다는 박헌영이는 지방으로 돌아다닌다. 함흥, 간도 용정까지 박헌영이 돌아다니는 지방마다 검거는 호열자병처럼 전염된다고 하였다. 검거준비에 필요한 전제조건을 지어주는 것이다. 1925년은 남중국에 파공운동이 대규모적으로 확장되는 시기였다. 우리 공산주의자 동맹회원들은 파공운동을 적극 찬동하였으며, 청년 동맹회원들은 중국 학생계와 연락하여 노동자 파공운동에 열성적으로 방조하였다. 하루 어느 날 청년동맹회관에서 공산주의자 동맹원들 청년동맹회 지도원들 연석회의가 있었다. 그 회석에 망명하여 온 신일룡 ●●, 연해주로 온 이용 등이 참석하였다. 별안간 난류분자 십여 인이 달려들어, 회석에 돌입하면서, 호령하기를 꼼짝달싹 말라고, 우리는 일정탐을 붙잡으러 왔다고, 김규면은 백추로 변명하고서 상해와서 국민대표회를 정탐하고, 지금은 조선공산당을 정탐한다고, 즐욕하면서, 한 손엔 권총을 쥐고, 한손에는 권봉을 들고서 위혁한다. 옳지 못한 행동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은 몽치로써 구타하면서 김백추를 구타하려는 즉석에 이용이 앞을 막아 나서면서 큰 목소리로 꾸짖었다. : '김백추는 국민대표회다. 조선공산당을 검●●● 감독할 책임이 있다. 혁명자를 박해하려는 것은 역적이다. 우리는 일제히 이 역적들과 격투하라.'크게 구령했다. 회석일동은 다 일어서며 「격투하라」고함을 쳤다. 김백추를 향하여 단총 두 방을 발사하고는 즉시 도망하였다. 김백추는 왼팔이 부상되었다. 이것은 소위 「화요당」해외파 역적들과 위진쓰크의 협동으로 일본조계에 거류하는 조선인 불한당을 매수하여, 파시스트 행동한 것이다. 이르쿠츠크나 조선이라면 즉시 고발하여 감옥으로 보낼 수 있지만, 상해에서는 직접 살인강도배를 이용하였던 것이다? 그 이튿날 위진쓰크는 천두수(진독수)에게 명령하고 천두수는 상해시 당부에 명령하기를 : 고려공산주의자 동맹과 연락하지 말며, 또는 김백추 개인과 접촉하지 말며, 상해대학에 고려청년 동맹회원들은 접근시키지 말라고 하였다. 그러나 그 명령은 실효없었다. 그 후 5·1절 기념이나 손일선 추도회나 우리는 그 전래로 일치동작하였다. 상해대학 유학생도 증가되었다. :청년동맹회원들.조선의 공산주의 운동은 : 상해당을 한편으로 하고, 각 그룹은 파당을 청산하자는 표어를 들고서 각자 활동하는 것이, 실상인즉 파당을 형성하는 활동이었다. 이놈 때문에 저놈을, 저놈 때문에 다른 놈을, 서로 정탐 혐의를 가지게 된다. 조선뿐 아니라 '일본도 그러하다. 무슨 운동이 있을 때마다 : 극좌경적 표어를 가지고 나서든지, 붉은 기치들을 들고 나서든지, 운동선에 막 섞기어 고함치는 그룹들이 한 둘이 아니라고, 그럴 때마다 군중적으로 검거 된다고 한다. '(일본 대표 국제당에 보고한 자료) 조선에서도 몇 차례로 공산당 사건이라고 만들어 놓고서 군중적으로 검거할 때마다 : 진짜 운동자들은 감옥으로, 초짜 운동자들은 뒷문으로 방송한다, 매수정책은 진압수단에 포함된 것이다. 「서울청년회」에서는 민중대회 반대로 「화요회」와 경쟁하다가 「화요회」당 , 조직문서 발로한 까닭에 전국적으로 검거의 폭풍을 일으키고, 해외부로 협잡하는 것을 공박하면서 「서울청년회」의 주동으로서 각파의 비교적 정수분자로서 당을 조직하고, 국제당 파송대표단 단장으로 이동휘를 선택하였다. 대표단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와서 이동휘에게 대표위임장을 전하고, 모스크바로 동행하기를 요청한다. 성재 선생은 사양치 못하고, 대표단을 데리고 국정당으로 들어왔다. 국제당에서는 대표단의 보고를 받고서 논단하는 말이 '우리는 조선운동의 각 단체들을 「다」공산당 그룹으로 인정한다고'하였다. 그때 국제당 회장은 뺏지니츠이었다. 대표단은 「화요회」가 투기 협잡한 사실들을 자세히 고발하고, 조선당 건설문제를 옳게 지도하여 주기를 바란다고 하였다. 동시에 「북풍회」,「일월회」, 천도교 농민사, 기타 대표들이 국제당에 다 모여들었다. 천도교회 농민사에서는 조기간 등 대표단을 국제당에 파송하면서 박진순에게 대표단원 위임장을 주었다. 박진순이는 대표단으로 함께 국제농민부에 연락교섭하였다. 고려당 재건설운동에 분주분투하던 동무들은 감옥, 징역에 희생된 자가 많다. 예하면 채규항, 송무영, 박승진, 오성제, 이철영, 조덕진, 김일수 등등 기타이다. 이용, 김종철 기타 수십인은 간도와 남중국으로, 김원, 임원은 내시와 연해주로 연락함, 1926년은 중국에 남북전쟁이 발생된 시기였다. : 북은 반동 군벌들이고, 남은 국공합작으로 (연아, 연공, 공농합작, 三大정강 손일선의) 서북벌전쟁이었다. 우리는 연해주에서 이동하여 온 빨치산 동무를 중심하여 지원군을 모집하여, 정잠(程潛)군단에 편입하고서, 이용, 박영, 손두환 등의 참모지도로서 북벌에 참가하였다. 김백추는 상해 광동으로 내왕하면서, 참모지도부에 고문하였다. 특히 기억할 것은 : 한쿠전역민 이범홍(●자거위 이성열 아들)이는 통역관으로 부상되어 야전병원에서 사망하였고, 남창전쟁에는 김화일(김중섭)이는 (경흥 아오지 김중진 동생) 속사포 장교로서 남창점령에 큰 공헌을 드리고 승리 만세소리를 들으면서, 부상한 자리에서 희생되었다. 김중섭(김화일)은 소비에트 빨치산 전쟁에서도 속사포 선수였다. : 남창점령 군대는 승전가를 부르면서, 예포를 발사하면서, 김화일 장례식에 : 영웅 장군을 추도하는 비절장절한 감개무량한 추도사가 있었다.!! 마지막 장개석의 반동시기에 광동 시가전에서 박영은 고려인 부대의 군정위원으로서 중국공산당 소조징(蘇兆徵)의 군대와 합동하여 일치동작하면서 악전고투하다가 중과부적으로 박명 형제, 김용배, 이의준 등 28인이 전망하였다! 박명이는 (경흥 백운포 박시겸 아들) 이의준은 (소추풍 이능백 조카) 김용배는 충청도 붉은 빨치산, 박영은 '인'전쟁에 부상한 당원이다. 하마로프스크 고려부 책임자이었고, 금릉대학 출신이고, 한학에 박식하고, 공산주의 이론에 명석하고, 철저한 혁명자였다!!! 조선엔 새 운동이 허헌 등의 주창으로 신간회 발기운동이 시작되었다. 이것은 없지 못해 마땅히 있어야 할 운동이었다. : 이것은 민족운동에 필요한 관념을 집중시키는 모임이고, 민족의 자주독립의 방향과 지향을 의미하는 새 간부를 조직하려는 운동인 것이다. 물론 총독부에서는 자각적 의식이 있는 사람들의 행동은 직접 매수할 수 없기로 이미 매수한 분자들 충동하며 각방으로 반대하게 하는 것이다. 회의 있을 때마다 야지, 분규, 분쟁, 질서를 문란케 소요가, 경찰의 취체를 불러오게 한다. 이렇게 불란 반대로써 운동이 발전되지 못하고 말았다. 1926년 6월 10일은 멸망한 이조 마지막 왕 융희제가 매장되는 날이었다. 김단야는 이 기회를 이용하여 「화요회」의 활동을 자랑하려고, 모스크바 : 장춘에 남아서 설계안을 만들어 서울 자기 동지들에게 전달하였다. 그들은 3·1만세 운동은 광무제 장례날을 이용한 줄로 아는 것이다. (광무제 장례날은 2월 25일이었다.) 그때 융희제 장례날을 육. 십. 만세 운동일로 만들어 보려고 큰 의의가 있는듯이 숙설거리였다. 3·1운동은 신성한 발작이다. 썩은 송장을 따라가는 운동이 아니었다. 3·1시위 운동은 독립사상, 애국열성이 끓어넘치는 군중의 만세소리였다. 소위 육.십. 운동은 썩은 송장에 호소장이고, 망국왕 장례식에 추도사이다. 상여 뒤에 따라가는 군중은 : 상가집 개들 유교에 마취된 완고당들과 혁명적, 애국적, 사상이나 행동이 없는 사람들을 각도에서 선택하여 온 것이다. 이러한 군중행렬이 늘어서고, 경찰, 헌병 호위와 의장병의 보호로 상여가 진행하는데 별안간 군중행렬을 뚫고서 뛰어나와 선전문 우리만세, 만세 부르는 청년학생이 네다섯 곳에서 고함쳤다. 이것이 육.십.만세운동(6·10만세운동, 1926년) 이란다. 그리고 선전격문 기천 기백부를 인쇄 준비한 것은, 여러 학교, 인쇄소와, 천도교 회관 마당 안에서 발로되었다고 한다. (파묻은 것)이것은 학생계와 천도교인을 검거하여 큰 소문을 내려는 계획인 것이다. 이것을 이왕 장례식 운동을, 독립만세운동이라고 할 수 있는가? 염치없다. 그 동안 또 조선에서 일월회 안광천 등 주동으로서 순결분자들 각 사람들이 모아서 공산당을 조직하는데, 이동휘, 김철수 등을 중앙위원회에 선거하였다. 그리고 국제당 파솝 대표단에 대표로 김철수를 선정하였다. 김철수는 대표단을 데리고 국제당에 들어왔다. 대표단의 보고를 듣고서 답이 물론 공산주의 그룹으로 인정한다고, 당으로 인정한다고는 하지 않는다. 김철수 등 대표단 말이 「화요회」활동은 객관적으로 총독부 진압정책 보조되는 것이니,「화요회」를 제외하고, 조선에 유일한 당을 조직하였으니 일국일당의 지도를 달라고 하였다. 답이 우리는 동무들 말을 긍정한다고, 나가서 말하면서 결정적 통지를 기다리라고 하였다. 한가지 지적할 것은 : 조선 운동 각 단체에서 자기 단체 중앙 일꾼으로 국제당 대표단 단장으로 : 이동휘나 박진순이나 김철수를 선거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함인가? 이것은 상해당 간부일꾼들은 순결한 진정한 혁명당원이라는 것을 의미함이다! 그래서 상해당 계통으로 출세하는 것이 창피하지 않다는 것이다. 모스크바에 있던 김단야는 신의주에 나와서, 고등계 정탐의 딸, 고경자를 데리고 조선을 순행하면서 비밀히 운동사들과 연락 소개하기를 : 벌써 엠렬파와는 합동하였지만, 기타 각 그룹과 합동, 통일당을 조직하라는 사명을 가지고 왔노라고, 각파를 물론하고 연락하는데 활동이 비상하였다고, 결과에 '동대문 밖의 청량리 어느 별장에 비밀회의를 소집하였다가, 검거에 들켜 김단야 부인, 고경자까지 다 붙잡히고, 김단야는 신통하게 피신하였다고, 그리고 전선적으로 검거가 확대되어 남은 운동자들이 취체되었다고, 동시에 김철수도 검거되었다고, 신문보도에 청량리 사건으로 전국에 검거 폭풍이 긴장하였다고,'기재되었다. '청량리 사건은 고경자를 데리고 다니면서 소개 연락한 운동자들 주소를 : (특히, 「화요회」반대운동자들의 비밀주소를)고발하는 소집이었다.'소위 육.십. 운동(6·10만세운동, 1926년)은 「화요당」이 매장되는 운동이었고, 청량리 회집은 김단야 자신이 주구로 자백하는 소집이었다. 안광천에게 미행을 따라 광주학생회 연설시간에 총독부 정탐이라고 즐욕하며 야지하는 통에 경찰이 취체를 만나게 했다. 김단야는 국제당에 보고하기를 김철수, 안광천 때문에 검거가 긴장되어 요행 도망하여 왔노라고 하였다. 국제당에서는 소인지, 말인지, 사람인지, 원숭인지 분간할 수 없어 들을 말이 없다고 국제당의 조선부문은 아주다다 뿌리었다. 이것이 조선공산당 승인문제의 폐막이다! 박헌영이는 조선으로 도망하는 준비연●은 : 자동차에 선전삐라를 가득 담아 싣고서 서울 장안을 돌아다니며, 서울, 용산으로 왕래하면서, 선전삐라를 뿌리며, 공산주의 만세를 부르며 달아나곤 한다. 경찰이 붙들려고 애쓰나 붙들지 못했다고, 선전문을 뿌리며 공산당 만세를 부르며 자동차를 타고 왕래하는 바람에 큰 소동이 있었다고 하루는 서울서 용산가는 길에서 그 모양으로 하는 것을 따르던 경찰들은 한강다리 밑에 매복하고, 돌아오기를 기다리다 붙잡아 검사 수색한 바 박헌영의 지령사와 상해의 비밀주소를 발각하여 즉시 상해 총영사관에 통지하여, 박헌영이를 붙잡아 왔다고, 이 사실을 서울신문에 여러날 광고하였다. 이것은 박헌영이와 고등계의 합작요술이다. 물론 「화요회」본신은 총독부 출신이다. 김찬이 법정에서 고발한 말대로 「화요회」이름과 운동 경비를 재등 총독에게서 받은 것이 분명한 사실이다. 이제「화요회」간부 성분을 분석하여 보자. 김찬은 명천군 매국적 일친회 김자섭의 손자 : 아비 삼촌 군수 현령, 1908년 의병운동에 집이 불을 맞았고, 아비 김병규는 경원군수로 황병길 의병대 포로로 붙잡혀가고, 김찬(락준)이는 호부자의 자식으로 서울, 동경, 유학 한다고 돌아다닌 것, 낙준이는 「화요회」출세시 김찬으로 변명한 것, 조봉암은 강화군청 고원으로 있다가, 이 운동 후 동경가서 김찬을 만나 동경, 서울로 같이, 원동 민족대회의 일본 군사정탐 茂木이와 김찬 동행으로, 「화요회」출세시에 박철환으로 변명, 찬, 환,(불꽃회를) 김주연은 (단야) 박헌영의 비밀친구, 박헌영은 여운형과 함께 배재학당 출신 : 학생시기부터 교육을 잘 못받은 놈을, 여운형은 원경총리 방문한 것, 민원식이와 동등이다. 여기 첨부된 것은 골챠크 백당장교 남만춘이다. 이밖에 여운홍은 (여운형 동생)은 내외지로 무상출입하는 「화요회」비밀통신원이다. 이 5적, 7적이 조선의 독립운동 공산운동을 망쳐 먹은 것이다. 청량리 검거자들은 다 유예미결에 부치고, 김철수 한 사람은, 십년 선고를 받았다고, 십년 선고가 역사적 처음이고, 마지막이다.이제 간단한 결론 : 1. 슈마츠키 원동의 입적자, 비입적자, 고려인 형편과, 「한인사회당」의 역할과 「국민의회」의 반동적 역사를 알리고, 백당장교 남만춘 등과 반동파 그룹 한명세등을 규합하여, 이르쿠츠크당을 조직한 것은 : 고려혁명운동에 방해를 주었고, 연해주 거주 고려인 질서에 불안을 끼쳤다.2. 위진쓰크는 조선운동의 혁명파와 반혁명파의 계통을 모르고, 국제정탐계에 활동하는 여운형의 말을 신임하여, 총독부 출신, 「화요회」를 접촉하여 조선당 조직운동은 세계에 제일 굉장하게 소문나는 공산당 사건들을 인공적으로 만들어서 쉴새없이 군중적으로 검거취체로, 앞문으로 들어가고, 뒷문으로 내 놓으면서 진정한 운동자들을 소탕하였다. 이것은 조선의 독립운동와 공산주의의 운동이 장성치 못하게 진압하는 총독정치에 편리하게 되었다. 슈먀츠키와 위진쓰크는 국제 동양부 배경으로 혁명한다는 것이 반혁명으로 되어 지었다. 그러니 조선에 관한 죽쟁동양부 사업은 실패되었고, 총독부 진압수단―매수정책은 승리하였다. 결과의 상해당에서 크게 잘못한 책임은 : 파당싸움을 공개적으로 내놓고 전개하지 못한 거기에 있다. 그러나 이것은 상해당이 혼자가 아니라 국제당에서 그렇게 했다. 상해당 혼자 잘못은 국제당●●● 결정에 억지로 굴복한 거기에 있다. 볼셰비키, 멘셰비키 강령토론에 갈라진 것처럼, 공개적 토론에서 혁명적―비혁명적, 반혁명적 이론투쟁이나 행동강령이나 왈가왈부를 분석하여 논쟁하며, 말로와 계급투쟁이란, 주의주장을 불관하고, 합동하는 것을 거절하며 덮어놓지 말고 명백하게 비판하여 시비곡직을 군중이 다 알도록 말로나 글로나, 공개적 투쟁을 할 대신에 덮어 놓고 소근거리는 것은 비혁명적이다. 후대에도 경험적, 교양적, 의식적 수양을 주지 못하는 것이다. 파당싸움, 파당싸움 하면서 무슨 이유로 파쟁하는지 : 그 이유는 말하지 않고, 그저 종파라고 한다. 분명치 못한 말이라. 운동시기에는 광명정대한 파당싸움이 있어야 한다. 건설시기에도 물론 그러하다. 우리는 광명정대한 파쟁이 없었기 때문에 과거의 운동을 망쳐 먹었다고 나는 단언한다, 목적 의식적 광명정대한 이론적 투쟁 파당싸움을 공개하지 못하게 한 까닭에 공도 공망한 것이라고 한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파당싸움이 있어서 운동이 잘못되었다고 한다? 아니다. 공개 비판적 파당싸움이 없이 되기 때문에 운동자는 다 정치적 문맹이 되었다! 성재 선생은 근 사십년 혁명투쟁에 땀과 눈물이 마를 시간이 적었다. 무의도섬에 가서 정배생활 할 시기가 휴양시기였다. 그밖에 시기는 분투고생의 풍찬노숙으로 쉴새없이, 거처숙식이 자연치 못하였다. 물론 식민지 해방 운동자에게는 직접 대상 종주국 원수보다도, 자체의 반혁명분자들이 더 위험 고통거리인 것이다. : 반혁명분자들은 의례히 원수에게 매수되는 까닭이라 중국의 손일선은 독군들이 각 제국주의에 매수되는 일, 한때는 진형명이 반동하는 것, 고통을 당하였으며, 인도의 간디는 무저항주의로 인도를 해방하려는데 다른 과격한 운동자들은 간디를 반대하였다. 엽제국주자는 그래도 과격운동자보다 무저항주의자 간디를 더 무서워서 암살하였다. 간디는 인도해방을 보지 못하고 피살되었지만, 인도는 유혈적 전쟁이 없이 해방되었다. 손일선은 중국혁명을 위하여서 '혁명이 상미성공, 동지는 필수노력'(革命尙未成功 同志必須勞力) 유언을 써놓고 사망하였지만 지금 혁명이 성공되었다.성재 선생은 교육혁명에서는 반대파들을 이기고 성공하였지만, 독립운동과 공산주의운동에서는 반동파들과 투쟁에서 많은 고통을 당하면서 독립운동의 승리와 공산주의 운동의 성공을 기필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선생의 백세 후에 고려의 독립운동이 성공될 것이며, 공산주의 운동이 승리할 것이다. 선생이 마지막 시기까지 활동하던 웨나의 반제동맹사업과 소비에트에서의 혁명후원회의 사업은 : 세계 혁명무대에서 성공될 것이다. 이동휘 성재 선생은 60세를 일기로 1935년 「1월 29일」 소비에트 원동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자택에서 별세하셨다.나 김규면 백추(白秋)는 신민회, 교육학회 운동시기부터 성재 선생과 혁명전선에서 공동분투한 동무로서 성재 선생의 90주년 기념 1963년 6월 20일을 제하여 기억 나는대로 회상기를 써서 보았다.

    1952 "김규면|| 『老兵 金規勉 備忘錄』"

    위대한 10월 사회주의 혁명이 파도에는 로서아(러시아) 경내 각 민족들이 다 격동되는데 원동 변강(시베리아) 고려인 중에는 절대 다수인 소작 농민 및 고용 농군들과 노동자들이 누구보다도 먼저 10월 혁명의 세례를 받았었다.그때 원동 변강에 거주하는 고려 인민은 근 5백 천 명(50만명)에 달하였다. 19세기 하반기 초부터 로서아(러시아)에 입적하고 토지 소유한 고려인에 한하여 백분의 95는 이 입적자 소작 농민과 고용 농군들이고, 그 밖에 계절 노동자 수만 명이 매년 내왕하였다.토지 소유는 : 고려인 입적자 농호에는 25일경(日耕), 로서아인(러시아인) 농호에는 백일경(日耕)[로서아(러시아) 일경(日耕)]이었다. 그때 입적자 고려인 농촌들은 다 부농들 부락이고, 로서아(러시아) 농촌들은 다 지주들 부락이었다. 각 지방 로서아인(러시아인) 농촌 부근마다 고려인 소작 농민이 수백, 수천 호이었다. 각 지방을 통합하여 수천 수만의 소작 농호와 수만의 고용 농군과 노동자들이었다.1918년 2월에 원동 변강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КрасНо Шокоь(크라스노시체코프)의 주최로 고려 정치 망명자들이 하바로프스크 시에 회집하여 시국 문제를 토의하는데, 순 민족적 운동을 주장하는 의견과 볼셰비키주의를 찬동하는 의견이 합일되지 못하였다.그래서 볼셰비키주의를 찬동하는 적극분자 : 김알렉산드라, 이동휘, 김립, 박애, 이한영, 오와실이, 유스테반, 박원섭 기타 수십인의 발기로써 소작농민, 비입적자, 고용 농군, 노동자를 망라하여 “한인협회”를 조직하였다.이 “한인협회”의 주장은 : 원동에 소비에트 주권 확립과 볼셰비키 주의를 따라 갈 것과 고려 독립운동을 사회주의의 길로 촉진시킬 것을 과업으로 정하고, 원동 해방운동은 고려해방운동의 전제 조건으로 주장하면서 적위군 지원부대를 조직하기에 일치 동작하였다.그런데 원동의 로서아(러시아) 농민들과 마찬가지로 고려인 입적자 농민들도 토지문제 때문에 방황하며 방관할 뿐만 아니라, 소작 농민·고을 농군들의 활동을 가소롭게, 가증하게 보았다. 그런 까닭에 원동 변강의 토지분배는 1927~1928년부터야 시작되었다.1918년 4월에 “한인협회”위원회 확대회의에서 김알렉산드라 동무의 동의로써 “한인협회”의 기초와 주장에 근거하여서 “한인사회당”을 조직하였다.“한인사회당”은 조직·선전·군사 3부를 설치하고 당원 모집, 지부 조직, 주의 선전, 지원군 적위부대 편성에 전력하였다.1918년 8월에 하바로프스크 시는 백군의 손에 점령되었다. 이 전쟁에서 로서아(러시아) 적위군과 함께 “한인사회당” 적위군은 하바로프스크 시가전으로, КрасНа реука(크라스나 례우까)에까지 격렬한 전투에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고려인 적위군은 사상자가 반수 이상이었다.하바로프스크 소비에트 정부의 외교 위원장이고, 당부의 책임비서이고, “한인사회당”의 지도자인 김알렉산드라뜨브나는 적에게 잡혀 총살을 당하였다.김알렉산드라뜨브나는 가장 열렬하고, 민활한 정치 수완이 있는 혁명자이었다. 동무는 일찍이 우랄 베림 나제쓰진스크 공장에서 자본가들과 투쟁하여 결국은 그 노동자들을 적위부대에 동원시키었다. 동무는 시월혁명의 참가자이다.김알렉산드라 동무가 희생당한 후에 남아 있는 것은 다만, 안반 산촌에 퇴각한 적위군 부대들과 각지에 산재한 당원들이었다.한인사회당 당원들은 비밀리에서 연락을 취하면서 선전, 조직, 사업을 복구하며 적위군 부대를 보충 확대하는 사업에 적극 전력하였다.1919년 3월 1일 조선독립선언운동(3·1운동)은 전국을 통하여 빈주먹을 들고 만세를 부르면서 시위하는 것뿐이고, 압록강·두만강 연안 지방에는 무장 준비하는 독립군 활동이 시작되었다.이 절박한 문제를 토의하기 위하여 1919년 5월 어느 날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부근 삼림 속에 비밀회의가 열리었다. 이 회의는 한인사회당 대표들, 신민단 대표들, 사회혁명당 대표들 3단체의 협의회이었다.이 회의에서 3단체의 통일연합을 선언하고, 한인사회당 기치 하에 합동하기로 결정하였고, 민족운동을 국제운동으로 연결하기 위하여, 조선 독립군을 빨치산 부대와 합동하기로 결정하였다. 선전, 조직, 군사 3부를 개선하여, 선전부 위원은 이동휘, 김립, 김덕 등, 조직부 위원은 김철수, 홍도, 한위건 등, 군사부 위원은 김규면, 정재관, 이용 등등. 이 합동회의에서 일치찬성으로 축하문을 레닌정부에 보내며, 한인사회당 명의로 대표단을 국제당에 파견할 것을 결정하였다.대표단은 : 이한영, 박진순, 박애 이 세 사람을 모스크바로 파견하였다.한인사회당 선전부 사업은 상해로, 조직부 사업은 조선으로, 군사부 사업은 원동으로 중심하여 원동 해방 전쟁에 적극적 참가하기로 결정하고, 우선 신민단 군대들은 연해주로 이동하여 한인사회당 적위군 부대에 편입하여, 연해주 빨치산 부대들과 합동하여 투쟁하기로 결정한 대로 그대로 실행하였다.이 치열한 때에 하루는 로서아(러시아) 동지들의 비밀회의가 있었다. 장소는 고려인이 새로 건축하는 집이었다. 발각되면 건축노동자로 핑계하려고 행장 기구를 준비하여 가지고 모인 것이다. 우리의 통역원은 박동헌이었다. 회의를 필한 후 아픈 배를 끌어 쥐고 하는 말이 회의석상에서 죽지 않은 것만은 다행이나, 원수와 싸워서 죽지 않고 병으로 죽는 것은 남아의 불행이라고 동무들은 건강분투 하라고 로서아(러시아) 동지들을 전송하고, 다른 집에 가서 누웠다가 잠시간 후 사망하였다. 그 뿐인가, 회의 장소를 방위하느라고 밤새도록 밖에서 수비하던 동무들 중에서 이종덕 동무는 호열자병에 걸려서 그날 아침 해돋이에 사망하면서 곁에 있는 동무에게 말하기를, 붉은 빨치산 대열에서 희생한 동무들과 같이 내 이름도 기억하여 달라고 하였다.1919년 8월 어느 날 레닌정부에 축하문과 보고서를 가지고 가는 한인사회당 대표단 이한영, 박진순, 박애 이 세 동무는 출발 도중에서 2중, 3중의 전선을 통과하느라고 언제나 목적지에 도달할런지 난관이 막심하다는 비밀 통신을 받았다.연합국 침략군에게 더구나 일본군에게 대한 선전 사업은 로서아(러시아) 동지들과 비밀공작을 같이 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선전문을 번역, 인쇄, 등사, 분전, 배부하는 일, 일본 군대 있는 곳곳마다 따라 다니면서 선전문을 비밀히 산포하는 일이 퍽 복잡하고 곤란도 많았지 만은 재미있는 효과도 있었다. 정거장·부두 노동자 동무들의 보도를 들으면 일본군은 부대적으로 수족을 결박하고 소음 붕대로 입을 싸서 동여매고 비밀 차량에 실어다가 밤중에 부두로 가져다가 함대에 실어가는 일이 두세 번 있었다고 한다. 선전문 인쇄하려고 다니다가 전일 동무는 붙잡혀 조선감옥에 갔다. 그 뿐인가. 어느 날 밤중에 일본 소대는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신한촌 한 모퉁이를 포위하고 임국정 등 5인을 체포하여 조선에 가져다가 사형에 처하였다. 그날 밤 그 자리에서 최계림 동무는 육박전으로 박차 헤치고 달아났다. 총탄에 상하여 피를 흘리면서 포위선을 피하였다.(일본 우편부대를 습격하고 15만원 은행권을 탈취한 사건)그때 1919년 조선독립운동단체들의 정치적 경향이 여러가지이었다. 예를 들면 1)동경정부에 청원단 : 민원식· 여운형 등, 민원식은 동경 호텔에서 애국청년 양근환의 손에 피살되었고, 여운형은 엄밀한 일본 보호로서 상해에 돌아왔고, 2)파리열강회의(강화회의)에 청원단 : 이승만, 김규식, 윤해, 고창일 등(윤해, 고창일은 원동 연해주 고려인 소위『국민의회(대한인국민의회)』대표다) 3)제네바 제2국제당에 청원단 : 조소앙, 이관용 등인데 제2국제당회의(제2국제사회당대회)에서 조선독립승인을 받았다고 신문에(조선신문) 떠들썩하게 기재하였다. 이 어리석고 비루한 경향들은 조선독립운동에 큰 해독을 주었을 뿐만 아니라 빨치산 운동에 더욱이 방해를 주었다. 그래서 원동 해방운동과 조선독립운동을 연결하는 것이 다시 말하면 조선독립군을 붉은 빨치산군대와 합동하는 것이, 민족주의를 국제주의화 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토론이 정치적 중심문제로 되어졌다. 그래서 붉은 빨치산 운동에 반대파와 찬성파가 생기었다. 결국은 찬성파가 승리하였다. 마침 때맞추어 빨치산 운동은 더 조직화되고, 더 확장되었다. 시베리아에서 콜챠크, 세모노브, 까베리츠 백군과 투쟁하던 볼셰비키당 청년 영웅 세르게이 라조 동무가 원동 전선에 나와서 조직, 선전 사업과 빨치산 운동을 더욱이 촉진·강화시켰다.1920년 초부터는 이전보다 더 연해주에 사는 고려인민과 두만강 건너 만주에 사는 고려인민에게는 조선 내지에 사는 고려인민에게 보다 몇 배 더 압박과 학살이 심하였다. 왜냐하면 조선내지에서는 빈주먹으로 소리치지만은, 만주와 연해주에 고려인들은 총, 창을 들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본군벌은 안심치 못하는 것이다.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빨치산 운동은 만주로 와 연해주로 연통하여 더욱 확대되고 증원되어 간다.어느 날 아침 중국신문 “원동보”에서는 “한인사회당” 대표단이 모스크바에 도착하였다는 보도를 전하였다. 이 소식을 우리는 각 지방 빨치산 부대에 전달하여 주면서 레닌주의 만세를 부르라고 제의하였다. 이때에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시가에는 광범한 시위운동이 열리었다. 우리는 다 비밀리에서 출두하기 시작하여 띄엄띄엄 사람의 바다 속에 잠기어서 시위 행렬에 들어섰다. 그 운동에 로서아(러시아) 빨치산 동무들은 산으로 들로 많이 모여 올 뿐만 아니라 도시에 잠재하여 있던 동무들, 노동자들, 시민들이 총동원 되어서 사람의 바다, 좌우편에는 사람의 산이 층층 첩첩이었다. 출연자들 중에는 빨치산 거두 대장들이 있었다. 우선 셰브첸코, 세르게이 라조 동무들이 출연하였다. 세르게이 라조 동무는 자동철차 위에 서서 수십만 군중이 앞 뒤 가슴을 대이고 어깨를 맞추어서 답보하고 있는 큰 거리 “시베틀란”(레닌스크울니츠:광명로)을 동행하면서 분노한 태도와 열렬한 정신으로 엄정하고도 명백 정직한 웅변을 토하였다. 시위 군중에게 박수갈채뿐만 아니라 심장, 간, 담, 열정이 분발 격동되었다.… 그날 라조 동무 연설은 원동 해방전의 공성포로 되었다. 질서를 문란하게 하려고 주정 5백통재를(아래꼬리) 선사하려던 일본 군함의 괴악한 추태를 맹렬히 질책하면서 일반 제국주의자들의 악독 근성을 여지없이 발로하였다. 그날 시위 군중은 누구나 다 고급정치 강습생으로 자부심을 가졌다고 라조 동무의 열정과 열변에 머리를 숙이고 자복하였다. 그때 원동 중심 도시에는 이렇게 광대한 시위운동이 처음이었고 이렇게 노천 대회에서 공개적으로 대성질호하여 정정 당당하게 해석하여 주는 연설은 처음인 까닭에 더욱 그러하다. 우리는 세르게이 라조 동무의 연설을 등본 변역하여 각 지방 빨치산 부대들에게 전달하여 주었다.이 시위운동 후에 몇 날이 아니 되어서 우리는 라조 동무를 잃어버렸다. 들으니까 짐승 같은 일본군벌은 비인간적, 야수악행으로 세르게이 라조 동무를 살해하였다고 한다. 기관차 불속에…통분하고 애석한 사변이다! 동무는 레닌당의 소년 영웅이고, 빨치산 운동의 노숙한 지도자로서 공산주의 혁명운동, 원동 소비에트 주권 수립에 희생하였다. 라조 동무의 피는 원동 해방전 승리의 기치에 물들이어 천추만세에 영광의 빛을 날릴 것이다!1920년 4월 4~5일, 일본 침략군대의 정변은 라조 동무의 희생을 준비하는 사변이었고 동시에 특별히 고려인에게 대하여서 참혹한 토벌과 박해를 주었다. 하바로프스크부터 보세트구역까지 도시와 도시 부근에 거주하는 고려인촌에 학교는 보는 대로 다 불 질러 버리고, 교사들은 붙드는 대로 학살하였고, 곳곳에 수백 인, 수십 인씩 붙잡아 놓고 며칠씩 구타하며, 볼셰비키, 빨치산과 연락하면 죽는다고 호통하는 일, 1)보세트 구역에서는 교사 세 사람을 죽이었고 수십 인을 구금하였으며 2)쓰꼬따위에서는 빨치산 유여균 등 십여 인은 부상당하고 빨치산 이춘삼 동무는 총살당하였다. 3)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는 신한촌을 포위하고 학교, 신문사, 구락부를 불 지르고 수삼백 호를 일시에 수색하였고, 삼사백여 명 사람을 체포하여 일본 헌병대로 끌려갔다. 그러나 그놈들의 말대로 『폭도를 붙잡자고 한 것인데, 양민들을 붙잡았다』왜냐하면 폭도들은 집에서 밤잠을 평안히 자는 사람들이 아니고, 산에서 사는 까닭에 그러하다. 신한촌을 뒤져서는 빨치산은 없다. 4)니콜리쓰크-우수리스크에서는 최재형, 김리직, 엄주필, 황거삐똔 등을 일본 토벌군은 붙잡아 실어다가 학살하였다. 그뿐인가. 우리의 통신원 최위진도 죽였다. 5)하바로프스크에서는 이경수 등 수십 인을 붙잡아 가두었다. 이경수는 다반지방 빨치산 이성천의 부친이다.(한인사회당 군대)연해주는 간접으론 조선독립운동의 후비지대이고, 직접으론 붉은 빨치산 활동 지대이기 때문에 일본침략 정책은 연해주 고려인에게 한하여 그렇게 특별히 악독, 주밀하였다. 예를 들면 : 로서아(러시아)에 입적한 고려인 촌마다는 친목한다는 구실로 간화회를 설립하고, 생명재산을 보호한다는 구실로 지방 자위단 무장대를 설치하였고, 문화교육을 장려한다는 구실로 연해주 『한인교육회』를 설립하였다. 이것은 회유정책, 다시 말하면 매수정책이었고.다른 편으로, 소작인 고려농촌들에는 마적(홍후적)들을 파견하여 농민 촌락들을 약탈, 파멸하게 하였다. 1920년 하반기부터 1921년 상반기까지는 연해주에서 고려인 빨치산부대는 일본군의 침입과 마적 부대의 활동을 방지하는 전투에서 번번이 승리하였다. 촌락을 불 지르고 약탈하던 코산파 마적 7백여 명은 수청지방 우지미, 허포수동, 석탄광에서 창해소년관 부대의 토벌에 소탕되었다. 허포수동 농촌에 출병하였던 일본 군대는 마적 부대가 패주하는 바람에 다른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창해소년단 부대 사령장은 김경천, 참모장은 정재관, 명예단장은 김규면이었다.니콜리쓰크-우수리쓰크 수이푼쓰크 지방으론 마적 코산파라는 부대와 동해승파 마적이 활동하였다. 이 지방에 우리 빨치산 군대는 “혈성단” 부대가 있었다. “혈성단”군대 사령장은 채영이고, 참모장은 김청남이고, 명예단장엔 김규면이었다.채영 사령장은 “혈성단” 빨치산 부대를 영솔하고 마적 중심부대를 포위하고, 공격하려고 준비 배치하여 놓고서 군대에 약속 명령하고, 단신으로 흰 기를 손에 들고 마적 부대로 가서 유창한 중어로 직접 담판하였다 : 나는 빨치산 군대 대장이다. 나는 일본 군대와 백당 군대를 토벌하려는 것이고 중국 사람을 죽이는 것은 내 마음이 허락치 않는다. 나는 남중국에서 고학생으로 공부하는데 중국동지들의 도움을 많이 받았다. 그래서 인연이 깊다. 그러니 당신들이 지금 결정할 것은 두 가지에서 하나이다. 우리와 싸우든지, 돌아가든지. 만일 싸우게 되면 나 한 사람만 죽을 수 있고 당신들 3백 명은 아마 이 자리를 멀리 피치 못 하고 다 죽을 것이요, 만일 거저 돌아가신다면 당신들 한 사람도 손해 없이 가시도록 보호하여 주겠으며, 양단간에 대답하시오 하고, 손목에 시계를 보면서 우리는 약속한 시간이 있소 말하였다. 마적 두령들은 악수하면서 대여의 말씀대로 우리는 돌아가겠으니 길을 열어 주소서 하니, 외줄로 걸어가라고 어느 방향으로 지시하였다. 그래 수이푼 지방으로 침해하던 마적 부대들은 채영 장군의 호령소리에 다 도망하였다. 그러니 농촌인민들은 “혈성단” 군대에 대한 환영심과 특히는 채영 사령에게 대한 감사가 대단하였다. 그리고 니콜리쓰크와 뿌질노브쓰크촌에 있는 일본 군대는 채영 군대를 토벌하려고 대부대로 세 번 출병하였다. 번번이 비상한 실패를 당하고, 다시 출동하지 못하였다. 수이푼지방 농촌인민들은 빨치산 군대가 자기들 농촌에 오는 때면 일본 군대에 알려준다. 이것은 빨치산 군대에서 시키는 일이다. 그래서 일본 군대 있는 근방 농촌에 빨치산 군대가 출동하면 일본 군대는 긴급히 그 농촌을 포위하려고 대부대로 출영한다. 포위가 거의 다 될 임시에 한 모퉁이로 도망하는 빨치산 부대를 일본 군대가 친히 눈으로 보게 된다. 그 빨치산 부대를 따라서 몇 십 킬로미터까지를 추격하게 된다. 심여창골 어귀에서부터는 길에서 죽어 넘어지는 자, 상하여 엎드려지는 자 부지기수였다. 일본 군대는 자기들이 도로 토벌에 싸워서 황겁하여 퇴주하게 되었다. 사상자를 끌고 도망하는데 퇴각하는 길에서 수십 리까지 죽고 상하는 자가 있었다. 그것은 먼 거리로 3인조 명포수를 몇 곳에 매복하고 적이 돌아가는 길에서 사격하라고 준비하였던 것이다. 그 후에는 고려농촌 3, 4곳에서 일시에 일본군 뿌질노브쓰크수비대에 고발하였다 : “빨치산 부대가 활동한다고” 즉시로 일본군 연대부는 총동원하다시피 출동하여 솔밭관, 다아자골, 소막골, 자피거위 등지로 각각 부대로 출병하였다. 이것은 다 빨치산 군대에서 작전 계획대로 농촌보고로서 일군이 출병한 것이다. 이곳에 이때에는 “혈성단” 군대와 백두산 부근에 있던 의병대장 조맹선은 자기부대를 데리고 와서 자피거위에 있었고, 솔밭관에 있던 이중집·신우여 부대, 연합적으로 일본 군대를 유인하여 끌고 다니면서 파멸시키려는 작전계획이었다. 여름 더운 날 아침부터 저녁까지 이 촌, 저 촌, 이 고개, 저 고개, 이 물골소로, 저 물골소로 도망하는 빨치산을 따라서 출격하느라고 땀이 물이 되고 얼굴이 불빛이 된 일본군은 더구나 목독이 같은 구주(구두)는 발이 아파서 잘 걷지도 못하였고, 다리 아프고 배가 고파서 죽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점심 먹자고 물골새 모였다가도 총살을 당하였고, 고개에서 쉬자고 앉았다가도 총탄에 맞아 죽는 자가 많았다. 심여창 학교촌 부근 산골에서 일군은 대 타격을 당하였다. 심여창 학교촌부터 자피거위 학교촌까지 10킬로미터 거리에 대부대의 충돌의 전투가 있었다. 좌우산간 돌 틈에 매복한 우리 빨치산 군대는 소원대로 사격할 수 있었고, 일본 군대는 물골소로 이 촌락 저 촌락 통하는 큰 길로와 조그마한 농전벌판으로만 해동하게 되었다. 그래서 우리 빨치산 군대는 이 10킬로미터 산간 돌 틈에서 총사격이 아니라 보는 대로 조준하여 사격하였다. 결국 우리 측에서는 조맹선 군인 두 사람만 죽었고, 일본 측에는 장교 2명과 군인 40여 명의 사상자를 농촌마차에 싣고서 퇴각하였다. 그 후에는 농촌인민의 고발이 없이 일본군대 자의로 밤중에 출동하여 빨치산 있음직한 지방으로 수색대가 순회하였다. 그래도 우리 빨치산 군대에서는 농민들이 전달하여 주기로 일본군대 동작하는 방향을 잘 알게 되었다. 종일토록 각 촌으로 돌아다니며 수색하여도 빨치산 흔적을 보지 못하였고, 농민들 말이 이즈음은 빨치산을 못 보았다고, 보면 곧 알게 하마고 하였다. 날이 저물어 돌아가는 길에 간화회, 자위단 있는 농촌(입적인 촌락) 바로 근방 목독고개 밑에 물역에서 시름 놓고 앉아 들 땀을 들이며 쉬다가 불의의 공격을 만나서 혼란상태가 되었다. 위험한 지대는 다 지나와서 자위단 촌락이 곁에 있으니 안심하고 신발도 털어 신고, 의복도 벗어 놓고, 땀 들이고, 총은 세워놓고 눕혀 모아놓고, 쉬는 판에 봉변을 당하게 되었다. 이것은 우리 빨치산 군대에서 일군이 퇴각할 시에 안심하고 쉴만한 마지막 지점에 짐작한 몇 곳에 포격선수 부대들을 매복하였다가 적의 간담을 타격하라고 준비한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군은 사상자를 버리고 두 길로 - 며뜨리나 잘되는 자위단 촌락으로 정신없이 도망하였다. 일본 군대는 두 중대이었는데 뒤에 오던 중대는 앞서오던 중대의 포격소리에 다른 길로 목독고개산을 넘어 도망하였다 한다. 그 후에는 농촌에서 빨치산이 왔다고 보고하여도 다시는 출병하지 않고 자기들 수비대 근방에 참호를 파 놓고 방위하면서 농촌으로 출동하지 못하였다. 그리고 한 가지는 수이푼구역 여러 농촌 학교나 구락부는 불 지르지 아니하였다. 왜 그러냐 하면 농촌 인민이나 학교 직원들이 빨치산이 오면 즉시 즉시 일본 수비대에 가서 일러주는 까닭에 그러하다. 이것은 우리 빨치산 “혈성단”군대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농촌인민과 계약한 조건이었다. 일본 군대의 출동을 꼭꼭 아는 대로 보는 대로 전달하여 줄 것과 빨치산이 자기 농촌에 오면 알려주라고, 이렇게 비밀 계약한 것이다. 채영 장군은 작전계획에 선수이고 인민보호에 덕망이 있고, 훈련지도에 특재가 있는 백전백승하는 명장이었다. 참모 김청남 장군은 한국군대 무장해제시 부터 일본 군대와 싸우던 자이다.연해주의 일본 침략군은 저희들이 직접으로 토벌할 수 없는 먼 지방 고려농촌들에는 마적단을 무장·기타비용을 공급하여 토벌하게 하던 계획은 일 년 이상을 애썼지만 실패하였다. 빨치산 활동지반을 파멸하려고 하던 시험은 도리어 빨치산의 전투력을 단련시키었다. 연해주 각 지방 소작인 농촌에는 곳곳이 빨치산 부대들의 활동하는 것이 점점 더 확대되는 바람에 마적 부대를 앞에 세우고 따라다니던 일본군이 수비대에 감춰 농촌으로 나오지 못하였고, 마적들은 수찬이와 수이푼에서 총타격을 당한 후에는 다시 활동이 없게 되었다. 각 농촌 부근으론 우리 빨치산 군대들이 활동하는 것뿐이었다.“한인사회당” 군사부 사업은 붉은 빨치산부대 조직과 독립군 부대들을 빨치산 운동에 연합시키는 일에 즉 원동 빨치산운동에 적극 참가하도록 힘쓰는 일이 제일 주요 과업이었다. 더하면 :1. 다반군대. 1918년부터 “한인사회당” 창립시기에 조직한 근본 부대 영솔자들 : 최니꼴나이, 김억활, 이두일, 백수동, 이금돌, 박노순, 이성천, 김안드레이, 이표돌 등.2. “혈성단”군대. 1919년 초부터 영솔자들 : 채영, 김청남 등 수이푼구역에서.3. “의군부”군대. 1919년부터 중령과 노령에. 영도자는 이명윤, 허근, 신일헌 등.4. 제1리만 군대. 1920년 초부터 영솔자는 김덕보, 박공세 등.5. 제2리만 군대. 1920년 여름부터 1921년 여름까지 백두산 장백부에서 “군비단”군대가 범 56차례로 남만주, 북만주 산길로 수천 리를 도보하여 이동하여 온 군대이다. 원동해방 빨치산전투 부대로서는 제 일등 공훈이 있는 군대이고, 원동숙청 전쟁에 제일 많이 희생당한 군대이다. 우선 한운룡의 군대가 이만정거장 전쟁에 부대적으로 피 흘린 것. “인”과 Волочаеьк(블로차예프카) 전쟁에서도 군비단 군대의 전공이 많다. 영도자는 윤덕보, 김덕은, 박동규, 김탁, 김찬, 임표, 김일수, 박춘군, 조덕진, 이순조, 사령장은 이용, 부사령들은 한운룡, 임표, 김홍일, 한무학, 최계립, 김현기, 김일수 등.6. 독립단 군대. 1910년부터 압록강 연안, 장백산에서 다년간 활동하던 유명한 의병대장 조맹선은 독립단 군대라는 이름으로 수백 명 부대를 영솔하고 연해주 고로치크꼬프에 이동하여 와서 자위단의 충돌을 만나서 수십 명 동무를 잃고서 “혈성단” 있는 지방으로 부대를 이동하여 왔다. 그래서 “한인사회당” 군사부에서는 한인사회당 군대(임의 신민단 부대를) 몇 분대를 갈라서 독립단 군대와 합동 편제하여 독립단 군대의 그 이름대로 활동하게 하고, 사령장은 조맹선으로, 부사령은 박그레고리·최빠사로 지정하여 안우치나 방면에서 훈련 준비하게 하였다. 최빠사는 최재형의 아들이다. 박그레고리는 우리 빨치산 군대 영웅이다.7. 안수청 군대. 1920년부터 수주허, 홍더허, 올긴스크 지방으로 이동하여 온 “신민단” 군대가 그 지방인 부대들과 합동하여 “한인사회당” 안수청 군대라고 활동하였다. 영솔자들 : 정재관, 강백우, 한창걸, 이승조, 박경철, 고상준, 임한준, 최득룡, 신용걸, 정와실레, 안일니야, 김식 등. 1921년~1922년에 올긴항(올긴스크항구) 쟁탈전쟁 두 번에 백당과의 전투에서 많은 희생을 당하였다. 러시아 빨치산 군대는Сержант(세르잔트)군대가 연락하였다.8. 외, 수청 군대. 1920년부터 영솔자들 : 김정하, 김려하, 김병하 등. 1921년 여름에 쓰고따위 부근 해변 지방에서 백당과 안이시모브 동무가 빨치산 군대를 영솔하고 전투하다가 승리하였으나 그 싸움에 안이시모브 동무가 부상하여 십여 일 만에 죽었다. 그 전쟁에 안이시모브 군대와 합동하여 전투한 고려인 빨치산 부대는 김병하 동무 부대 70여 명이었다. 안이시모브 부대는 그 후에도 계속하여 고려인 빨치산 부대를 합동하여 활동하였다. 이 외 수청 군대에도 “신민단” 부대가 합동한 것이다.9. 솔밭관 군대. 1920부터 훈춘지방에서 이동하여 온 “신민단” 군대와 합동한 부대이다. 영솔자들 : 이중집, 신우여, 한경세 등등.10. “창해소년단” 군대. 1920년부터 중부 수청지방에 활동하던 부대, 영솔자들은 : 유명한, 김경천, 정순철, 장지호, 황군애, 김병철, 백발백중 명포수 한명극 등이다. 수청지방에 출몰하던 마적 부대들을 다 청산하였고, 일본 군대는 수청 우즈에 근방 허포수동에서 도망한 후에는 다시 출동하지 못하도록 방어하였고, 리만시를 삼일동안 점령하고 까베르츠 백군의 후방을 문란케, 황겁하게 활동하는데 로서아(러시아) 빨치산 야로센코 부대와 합동 연락하여 백군의 후방을 요란케 한 군대이다.1920년 4월 연해주사변(4월참변) 후 고려인민에게 대한 토벌행동과 마찬가지로 1920년 9월부터 두만강 연안 만주지방에 거주하는 고려인 농촌에도 훈춘 산촌에서부터 백두산 기슭까지 연해주 침략군과 조선총독부 군대가 합동하여 대부대로 총출동하여 촌락을 불 지르며 인민을 살해하여 포위 토벌하였다. 독립군을 토벌한다는 것이 아니고, 전 농민촌락을 파멸하고, 학교들을 불 지르고, 농산물을 소각하고, 삼림에 불 지르고, 주택을 소화하며 남녀 수천 명을 살해하였다.(경신참변)두 달 전에 “봉오골(봉오동)”전쟁에 일본 군대는 대 실패하였다. “봉오골(봉오동)”은 중국 훈춘현과 왕청현 어간에 있는 산골이다. “신민단” 군대가 연해주로 이동하는 길에 “봉오골(봉오동)”에서 수일 체류하였다. 그 곁의 촌에 간도 국민회 군대 한 중대를 홍범도가 영솔하고 있었다. 조선총독부 군대는 밤에 두만강을 건너서 이른 아침부터 봉오골(봉오동)로 침입하였다. 그래서 한편 산 고지에는 “신민단” 군대가 매복하고, 다른 편 산 고지에는 “국민회”군대가 매복하고 일본 군대의 동작을 감시하고 있다가 적당한 모멘트에 똑바로 조준하여 사격하는데 벌써 기치든 곁에 있는 장교와 중간 열에 말 탄 장교와 보병 앞에 칼 든 장교들이 엎드러지며 넘어졌다. 그러자 일본 군대는 혼란상태의 순간에 집중된 부대는 산산이 엎드려 개미처럼 기는데 앞줄에 있는 적은 조준하여 풀밭에 기는 오리와 꿩처럼 사격하고, 왼 뒤 줄에 오는 적에게는 총몰사격을 하니까 적들은 독립군의 공격의 중심이 앞인지, 뒤인지 모르게 되었다. 우리는 빈총을 가지고 도망할섬 잡고 탄환이 진할 때까지 사격을 사령군처럼 하였다. 다른편 산에서 싸우던 “국민회” 군대는 퇴각한다는 신호를 우리에게 주고서 벌써 퇴각하였고, 우리 신민단 부대는 13인의 전사한 동무와 11인 동무의 부상자를 수습하느라고 몇 시간이 더 지체되었다. 일본군대는 독립군을 토벌할 생각보다도 도망하며 퇴각하는데 멸망하지 않도록 하자는 생각뿐이었다. 왜 그러냐 하면 저희들 총지휘관 연대장이 총살되었고, 그 외 부관 장교 34명이 총살되었기 때문에 아무리 강한 군대이고, 용병술이 능하여도 별 수 없는 것이다. 그러자 때마침 벽력같은 소낙비에 눈코를 뜰 수 없다고 할 만한 모멘트가 또 닥쳐왔다. 사상자 수송 때문에 그날 저물어서 두만강을 도로 건너갔고 근방 농촌 우차를 50여 대를 붙들었다가 사상자를 두만강역까지 실어갔다고 한다.이 “봉오골(봉오동)” 전쟁사변은 동경신문에 논평하기를 “제1공일 ‘신민단’ 군대”란(第一功日新民團이란) 제목 하에 게재하기를, “두만강 연변에 조선 독립군이 극성하니까 그중에 “신민단”군대가 제일선봉이라고 하였고, 일본제국 군대의 출병에 이렇게 수치한 참패는 첫 번이라고, 독립군의 죽은 자나 포로한 자는 한 사람도 만나보지 못하고 한 여단이 패망한 거나 다름없이 패주한 것이 군대의 수치라고, 빨리 토벌하여 설치하라고” 동경신문들, 잡지들이 분주히 떠들었다. 봉오골 전쟁(봉오동전투) 후 “신민단 군대”는 그 길로 연해주지방으로 이동하여 왔고, 국민회 군대는 홍범도와의 영솔 하에 백두산 뒤로 이동하여 갔다.“봉오골(봉오동)”전쟁 실패를 보복하느라고 일본 군대는 두만강 일대의 고려농민 촌락을 파멸하며 남녀노소를 살해하며 전 촌락을 소각하며 토벌하는 일을 1920년 8월부터 9월~10월까지 살풍경이었다. 그리고 훈춘 산촌에서부터 백두산 부근에까지 촌마다 우차를 붙잡아서 군용품, 탄약, 총, 폭탄을 운반한다고 성언하면서 수백 차, 수십 차씩 무거운 짐을 싣고 끌고 다니었다. 궤짝 틈으로 보면 돌덩이들을 담은 궤라고 하더라, 위혁하노라, 인민을 곤고하게 하노라고 인민을 그렇게 하였다. 무장파 독립군은 하나도 보지도 못하고 또 독립군을 심방하려고 아니하고 주민을 학살하는 것이다. 이 사변에 독립군 무장대는 다 피란하여 산으로 산으로 원동 공화국 국경 이만 건너편에 도착하였다. 그래서 이만시에 건너오는 대로 즉시 무장해제하여 수랍쓰고철도 60리허 마사노프스크촌에 이동하여 놓고 무장은 비밀히 실어다가 도로 무장시키고, 군사훈련과 정치 강습을 시키고 빨치산 운동에 참가하도록 준비 중에 있었다.두만강 연안 일본군 토벌에 밀려서 피란하여 흑룡주에 이동하여 마사노프스크촌에 주둔한 조선독립군대의 명칭은 :1. “독군부” 군대. 영솔자들 : 최진동, 이택, 박영, 오병묵, 김우범 등.2. “의군부” 군대. 영솔자는 허재욱.의군부 군대 본부대는 로서아령(러시아령)에 있고, 제1선 대대를 허재욱이 영솔하고 두만강 연안 간도에 먼저 나갔던 것이다.3. 간도국민회 군대 :A. 제1부대는 홍범도 영솔 하에 피란하여 이동하여 왔고,B. 제2부대는 간도국민회 본부대인데 영솔자는 : 안무, 김철, 정일부, 김규찬, 주건, 마건 등등4. 군정서 군대 :A. 서로군정서 군대 . 영솔자는 : 이청천, 김승빈 등.B. 동로군정서(북로군정서) 군대 . 영솔자는 : 서일, 김좌진, 김규식, 박두희인데, 이만에 도착하여 무장해제하는 때에 박두희 부대는 순순히 복종하고, 김좌진·김규식 부대는 반대하고 도로 중령지로 갔다. 서일은 오던 길에 봉밀산 삼림에서 자살하였다고 한다.5. 니항에서 뜨레삐진 군대와 함께 일본군 7백여 명을 진멸하고 일본 함대와 흑룡강 하류에서 전쟁하다가 밀려온 고려인 빨치산 부대 : 영솔자는 박일리아, 고명수 등 5, 6백 명이 몇 달 전부터 마사노프스크촌에 주둔하여 있었다. 그러니 모두 합하여 근 3천여 명의 고려인 무장대가 마사노프스크촌에 있었다.연해주 고려 빨치산 대표 대회에서 연락, 교통, 통일전선의 작전계획을 토론하여 결정하고, 또 이만·다반구역 빨치산 부대들과 마사노프스크에 이동하여 온 니항 빨치산 부대와 독립군 각 부대들을 통일전선에 단합하기로 결의하고, “사회당”군사부 위원들과 기타 신망이 많은 빨치산 대장들을 대표로 정하여, 연해주·부리암물주·흑룡주 지방에 있는 고려 빨치산과 독립군 부대를 합동 통일할 사명을 주어서 김규면 군사부위원장과 이용·한운룡·채영·박그레고리 및 부관 몇 동무를 따라서 대표로 흑룡주로 파견하였다. 김규면 등은 치따에 가서 치따정부에 선후책을 문의하고 마사노프스크촌에 와서 군관협의회를 하고 또 이어 군대대표회의를 하고 마지막 군인 대표 확대회의를 하고, 군사의회를 조직하고 중앙위원을 선거하고, 각 부대를 재편성하되 소원대로 합의적으로 조직하고 군사·정치·문화·사업을 분명한 규모 있는 빨치산 군대를 양성하도록 준비공작이 열성적으로 되었고, 훈련정도와 지원하는 정도를 따라서 니어니어 빨치산 지방으로 보내기를 약속되었다. 그리고 이용 동무와 기타 부관 경리원들은 빨치산 중심지대 리만으로 나가고, 김규면·한운룡 등은 흑하(블라고베슨스크)로 내려가서 마사노프스크에 있는 군대(독립군 빨치산)들의 후원준비사업에 분주하였다. 마사노프스크 우리 군대 총사령관인 그레고리와 원동공화국 국민혁명군 제2군단 특파원-전권위원 박원성·이하유 동무도 김규면·한운룡 등과 함께 마사노프스크 군대 공급수응 준비사업에 블라고베슨스크시에 체류하게 되었다. 채·박그레고리 등은 마사노프스크 군대 훈련교관으로 있었다. 모스크바에 주재하며 있던 상해임시정부 대표 한형권은 만주에서 이동하여 온 조선독립군을 후원하기 위하여 소비에트 중앙정부에서 보조금을 받아가지고 치따에 나와서 김규면·이용 등을 면회하고 모든 형편, 사정을 협의하고 금화 4만원을 주면서 독립군대를 빨치산군대와 연합시키는 사업 준비에 부족품을 보충하는데 소용하라고 하고, 한형권은 즉시 모스크바로 돌아들어갔다. (1921년 초에) 한인사회당은 1920년 8월 경에 제3국제당(인터네셔널) 제2차대회에 참가하였다. 국제당 제 2차대회 결정에 의하여 국제당에 참가한 각국 당들은 다 공산당으로 이름하게 되었다. 그래서 한인사회당은 고려공산당으로 이름하였다. 국제당 제2차 대회선언서에는 “한인사회당” 대표로 박진순·김규면이 서명하였다. (국제당잡지 8-13호에)국제당 결정에 의하여 “한인사회당”은 1921년 초에 상해에서 공산당 창립대회를 소집하였다.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를 대표하여 이동휘·홍모·박진순 등은 국제당에 파견되었다.상해의 당대회를 대처하여 밀라트스크에서 슈먀즈키 주최로 고려당대회를 소집하였다. 우리 빨치산군대 대표로 신망있는 동무를 택하여 김아파나스, 장기영 등을 파송하여 대회소집을 하지 말도록 슈먀즈키에게 충고하라고 하였다. 그럼에도 불고 슈먀즈키는 대회를 개최하였는데, 일국 일당인데 상해 당대회 또 이르크츠크에서 당대회 하는 것이 불가하다고 반대하는 김진·장도정 등은 즉석에 이르크츠크 감옥에 가두고, 김아파나스·장기영 등은 크라스노얄스크 지방에 정배보내고, 김규면·박진순·이용 등등은 포착하라고 명령소개서를 각 지방에 보내고, 슈먀즈키 전권 대표 푸시니츠는 치따에 나와서 박아이·계봉우·권하순 등 십여 인을 붙잡아서 이르크츠크 감옥으로 보내고(치따기관엔 못 제안하고) 이르크츠크를 지나 모스크바나 모스크바서 나오는 사람이나 고려사람은 교통을 막고 이르크츠크에 구류시키고 국제당이나 중앙정부를 속이고 몰리우고 슈먀즈키 제 마음대로 하는 일이었다. 이르크츠크당 중앙간부는 : 남만춘, 채동순, 오하묵 세 사람은 백당 장교이고 그밖에 김하석, 최고려, 한명세, 김철훈 등은 “국민의회(대한인국민의회)” 부장들이다. 이렇게 중앙간부를 조직하고 국제당으로 남만춘, 한명세를 대표로 보냈었다. 그리고 이르크츠크 그 자리에서 “군정의회”를 조직하고, “군정의회” 위원은 : 가르다시빌리, 오하묵, 김하석, 채동순, 최고려 등을 선정하고 마병 6백 명을 주어서 흑룡주 자유시로 파견하였다. 자유시에는 “국민의회”에서 조선독립군이라고 이름하여 모집하고 흐르마뜨 장군 부하에 있던 고려인 장교들 오하묵 등이 영솔하고 있던 것이 고려인 부대 근 3백 명이 있었다. 그러니 이르크츠크에서 온 마병 6백 명과 자유시 “국민의회”군대 오하묵이 영솔하고 있는 것 합하여서는 “군정의회” 근위대이었다. 그래서 마사노프스크에 있는 고려독립군부대와 니항에서 온 군대를 억지로 유인하여 자유시로 불러내다가 강제로 장갑차 속사포로 포위하고 무장해제하는데 대항없는 군대를 포격하여 사상자 수백 명을 내면서 토벌하였다. 그리고 장교들 90여 명과 하사, 상등병, 정치수들, 참모일꾼들 합하여 3, 4백 명은 차에 실어서 포로병으로 이르크츠크 감옥에 가져다가 구금하고, 기타 군인부대 1천여 명은 우수문 삼림 나게리에 수금하였고, 기타 도망한 군인들은 하물주 각 농촌에 흩어졌다. 이 반혁명적 “군정의회”는 마사노프스크 있던 고려인 부대를 자유시에서 토벌청산하고 자기들 근위대를 데리고 이르크츠크로 도로 들어갔고, 자유시 잡판은 텅텅 비어 있었다.그때에 김규면·한운룡 등 13인은 블라고베슨스크시에서 마사노프스크 우리 독립군 부대들을 빨치산 활동지대로 이동하려고 모든 내복, 신발, 의복, 수건, 세수기구, 물통, 붕대, 약품 등을 준비하느라고 분주한 시기에 청천벽력의 봉변을 당하였다. 자유시 토벌사건(자유시참변) 몇날 전에 밤중에 김규면 등 13인은 무장부대에 붙잡히어 블라고베슨스크 정거장 길로 나섰다. 시가 수비병의 신호로 수이대 군대들이 길을 막고 질문하니 자유시 고려“군정의회” 명령이라고 하면서 원동 정부나 흑하 당국에 문의없이 하는 일이었다. 그래 수비대와 정치부에서 김규면 등 13인과 모든 행리를 다 취급하여 정치부 보호실에 안치하였다. 그 후 날마다 세 번이나 자유시에서 오하묵, 가르다시빌리, 소위 “군정의회”에 감시한다는 국제당 중앙부대표들이 와서 김규면 등을 “군정의회”에 넘겨달라고 강경한 교섭이 두세 번 있었다고 한다. 그러나 흑하 당국에서는 국제당 명령이나 중앙정부 명령을 가지고 오면 김규면이를 내어주마고, 그 외에는 다 거절한다고 하니 분을 토하며 돌아갔다고 한다. 김규면 등은 모스크바로 가서 호수하려고 치따까지 갔다가 그때는 대련 꼼페덴츠 시기이다. 잘 아는 동무 Блюхер(블류헤르)이는 대련으로 간 때이다. 다른 동무에게 문의한 즉 일꾸스크 정거장을 무사히 넘을 방법이 없으니 보장할 수 없다고 하면서 지금 이곳에서 부시니츠 전문으로 상해당 측 사람을 수색하여 이르크츠크로 압송하는 것이니 치타정부에서는 고려인 반혁명자들을 옹호한다고 국제당에와 중앙정부에 호소하는 모양이라고 한다. 그래서 김규면은 할 수 없이 흑해로 도로 내려와서 보호실에 같이 있던 동무들 중에 11인을 위임장과 호소문을 주어서 흑룡주 각 농촌에 도망하여 있는 독립군인(자유시 토벌 시)들을 심방하여 데리고 다반지방으로 이만지방으로 모여오라고 운동경비를 몇백 원씩 주어서 파송하였다. 김규면의 말은 보조금은 1만원은 이용을 주어서 이만에 군비단군대 수응에 보태어 쓰게 하고, 3만원은 흑하 당부에 맡기고 소용할 때마다 김규면의 명의로 청구하여 소용한 것이다.김규면·한운룡 등은 “국민의회”와 슈먀즈키의 반혁명 행동을 통분히 생각하면서 빨치산운동을 더 강화하려고 만반으로 준비하면서, 흑하 당국에 약속하고, 아무르강 배를 타고 하바로프스크에 와서 Поетьсеь(뽀에찌세프) 동무를 면회하고 모든 사정형편을 토의한 결과, 이제부터 고려인 빨치산부대 활동을 원동혁명 국민군과 보조를 같이 하여 다시 말하면, 연합 합동으로 행동하기로 결정하고 김규면은 브리아물주 “군정의회” 전권위원으로 겸 고려 빨치산 군사회 위원장의 이름을 가지고 원동 브리아물주 “군정의회”의 지도에 따라 고려 빨치산 군대를 지도하게 하였다. 다시 말하면, 고려 빨치산 부대들은 원동국민 혁명군과 유일전선으로 연합동작하기로 결정하고 김규면, 한운룡 등은 리만에 나가서 빨치산 부대 대표회의를 소집하고 자유시 참변보고와 시국문제를 토론한 후 연해주, 브리아물주 고려인 빨치산 운동을 통일적으로 일치 동작하되 원동국민 혁명군의 진퇴동작을 따라서 전투에 적극적으로 참가하되 영웅성과 희생성을 발휘하여 소비에트 원동의 침략군을 숙청하고 조선의 침략군을 구축할 때까지 건강분투하기로 빨치산 대표회 대표 일동은 한 사람도 투항 말고 최후 일인까지라도 포로는 되지 말고 악전고투라도 사양치 말자고 일치 서약하고 국제가로 레닌주의만세를 부르면서 회의를 마치었다. 대표회의 명예 회장은 Поетьсев(뽀에찌세프) 동무를 추천하였고 대표회의 참석한 원동국민혁명군 동무는 리만수비대 사령관 Нельсончельв(헤리손체리프)이었다.연해주에서는 일본 침략군의 후원으로 백당군대들의 활동은 마지막 발악이었다. 수청지방으로 바다로와 육지로 진공하는 백군들을 방어하는 투쟁에 로시아(러시아) 빨치산 부대들 Сержант(세르잔트)동무들 부대가 적극 참가하였고, 고려 빨치산 부대들은 임한준, 신용걸, 김식, 이승조, 고상준, 박경철 등과 정재관, 강백우 군대들이 수삼년 동안 계속적으로 열성적으로 전쟁한 부대들이다. 더욱더 1921년 여름부터 더 전쟁이 심하였다. 올긴스크 올가항 두세 번 쟁탈전쟁에 고려 빨치산 군대의 신용걸 중대와 김식 소대와 임한준 대대는 수청 고려인 빨치산 부대들 중에서 가장 격렬한 전투에 참가하였고 많은 희생을 여러 번 당하였다. 1921년 10월부터 1922년 4월까지의 전쟁에 참가한 고려인 빨치산 보병 3중대, 기병 1중대, 속사포대 1소대가 올긴스크 전투에서 중대장 신용걸 동무와 소대장 김식 동무와 군인 김양섭, 김병식, 이봉춘, 채미하유, 김락현, 신봉재, 김성범 등 27인은 전사하였고, 기타 십여 인은 부상하였다. 올긴스크 올가항에 그의 희생 영웅들의 무덤이 있다. 기념비석도 완전치 못하여 풀 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러만전쟁의 고려 빨치산 대장 한운룡 동무의 희생과 영웅열사 48인의 용감한 전투는 장편 논문으로 기록하지 않고서는 그 진상과 형편을 다 표현할 수 없다. 까베리츠백당 대군이 철로선과 우수리강으로 수만 명이 진공하는데, 우리의 방어는 형세 불리하였다. 좌우선으로 방어하는데 한편은 국민혁명 군대로 다른 한편은 우리 고려 빨치산 부대로 방어하면서 퇴각하였다. 한운룡 동무 부대는 무라비우 정거장을 수비하다가 적의 포위공격에 들어서 악전고투하여 수십 명을 희생하면서 포위를 벗어나 이만 정거장으로 퇴각하고 보니 벌써 사령부 본부대는 거라브스크로 퇴각하였고 적은 이만시를 포위하는데 전초부대는 이만을 지나서 거라브스크를 행진하여 추격하는 판이었다. 총사령부와 격리되어 고군약졸로 종일토록 항전하여 적을 수백 명을 섬멸하고 수천 명을 격퇴하였으나 마지막 속사포나 장총이나 다 탄환이 없어지고 육박전에까지 최후 일인까지 격투하다가 다 희생하였다. 이 영웅들 무덤은 이만 정거장에 있다. 기념비도 없이 있었는데 사실만은 살아 있는 것이다. 죽은 시체에 천참만륙 한 것을…… 이만 부근 거라브스크 지방에서는 고려인 빨치산 12인이 백군 수백 명과 격전하다가 적의 총, 칼, 창에 희생하였다. 12인 빨치산 신체의 팔, 다리, 귀, 눈, 코, 손, 손가락, 입들은 창과 칼로 찌르고, 베이고, 찢어 놓고, 끊어 놓았다. 손들어 항복하지 않고 숨이 있을 때까지 싸움하는 까닭에 적들은 부상한 빨치산에게도 그렇게 악독하게 한 것이다.우리 총사령부와 부대들은 미낀에 퇴각하여서도 쉴 시간 없이 적군추격을 방지하였고 어르진깔도 야심스크지방에서도 추격을 방지하면서 하바로프스크에 퇴각하였다.우리는 브리아물주 “군정의회”의 당국과 의존하고 우수문 나게리에 자유시 토벌사변(흑하사변)때에 감금하여 둔 빨치산 독립군 부대들을 풀어내어 석방하여 1천여 명을 군용차로서 실어다가 다시 무장시키고, 부대, 부대로 다시 편제하여 전선부대에 편입시키었다. 우수문 나게리에서 석방하여온 군인들은 너무 기뻐 뛰면서 우리는 원동해방 전쟁판에 다 죽고 다 희생할지라도 목숨을 아끼지 않고 소비에트 주권수립에 열심분투하여 우리를 타격하던 반혁명자들 백당 장교들과 “국민의회” 군대, 자유시 군대들, 슈먀즈키 반혁명자들 얼굴에 수치와 죄악을 인찍겠다고 하면서 공산주의 만세를 부르면서 전쟁에 참가하는 것을 영광으로 환영하였다. Поетьсев(뽀에찌세프) 동무는 종이 뭉텅이를 여러 묶음을 자기가 친히 안고 매고 하여 우리 고려 빨치산 총참모부 사무소에 가져다가 주면서 선전문 번역과 통신서류, 호소문, 타자기와 등사판에 소용하는 용지를 몇 부대 가량을 Поетьсев(뽀에찌세프) 동무는 친히 날라다가 우리를 주면서 일 많이 하라고 친절히 말하였다. Поетьсев(뽀에찌세프) 동무는 정직, 순박하고 열정있고 사치없는 검소한 볼셰비키이고 무섭지 않고 다정한 혁명자이었다. 우리는 Поетьсев(뽀에찌세프) 동무가 날마다 주던 종이 뭉치를 그 전쟁 시기에 다 썼다. 우리에게 타자기 수삼 개와 등사판(일본식) 세 개가 있었다. 소원대로 출판등사 하였다.어르진갈도 야심쓰크에서부터는 전선 총사령관은 Серышев(세르셰프) 동무이었다. 그 때의 백군마병 수삼천 명은 하바로프스크시를 포위하려고 우쑤리강 얼음판으로 급속한 돌진 시간이었다. 우쑤리강 부근 울라지미르촌으로 고려 빨치산 3중대와 국민군 2중대가 방위하고 있었다. 백군의 기병 전초부대는 최계립 중대의 방어선에서 타격을 당하였다. 새벽부터 저물녁까지 울라지미르촌 벌판에서 빨치산 군대와 국민군대의 방어전쟁에 눈밭에서 헤매고 있는 백당기병은 하바로프스크 포위 계획은 늦어졌다. 국민군은 포로도 있었고, 패주도 있었지만 고려 빨치산 군대는 얼굴과 손과 발이 얼어서 부었음에도 불고하고 40여 도의 추위, 설한풍은 전사들의 몸에 더운 땀을 흘리게 함에도 불고하고 밤부터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쉬지 못하고, 고려 빨치산 3중대는 연락 협동으로 깊은 눈밭에서 퇴각하면서 마병들에 대한 방어전을 백발백중의 선수로 싸웠다. 그래서 Серышев(세르셰프) 동무는 하바로프스크 아무르강 건너 브꼬로브쓰크에서 연설하기를 “하바로프스크시에서 질서정돈하게 안전하게 퇴각한 것은 울라지미르촌 방어전쟁의 승리한 까닭이라고. 다시 말하면 고려 빨치산 동무들이 영웅적 투쟁한 덕택이라고 하면서” 고려 빨치산 군대 우리 축하하였다. 그리고 총상한 자, 동상한 자를 병원차에 안치하고 울라지미르촌 전쟁 군대는 한 달 동안 휴가로 “인” 후방 철로선을 수비하게 하고 다른 생력군(生力軍)으로 전선부대에 보충하였다. 한 가지 지적할 것은 우리 빨치산 군대의 경리공급 부대 대장 최동욱이와 장철 동무는 울라지미르촌에서 방어전쟁하는 우리 군대에 만두를 잘 준비하여 공급하였던 것이다. 그래서 눈밭에 뒷걸음하며 마병과 싸우는데 만투(만두)를 입에 씹어 먹으면서 힘있게 싸웠다고 하였다. 그래 경리부에서 때맞추어 공급 잘하는 방법을 찬성하였다. 전쟁 군대에 공급 : 탄환, 식료 등이 생명보험의 제일조건이라고 하였다.우리 총사령부와 본부대는 “인”에 퇴각하였다. “인”은 역사적으로 유명한 요새 지점이다. 1918년의 일본군을 선봉으로 한 연합군도 “인”을 점령하지 못하였다. 1921년 12월 23일에 백군 수천 명이 “인”을 침공하였다. 여러 시간 전투에 양편에 다수의 사상자가 있었고, 적군은 퇴각하였다. 고려 빨치산 부대에서는 장원준, 조봉옥 두 동무는 전사하고, 박영 동무는 군정위원으로 부대를 데리고 산병선에 지도하다가 적의 사격에 부상당하였다. 부상한대로 그냥 싸웠다. 그 익일 25일에 적을 추격하여 고려군 3개 중대와 국민군 2개 중대와 함께 이봉 사령장은 Олицохты(모라초흐띠)를 협공하려다가 적의 공격에 두 동무를 잃고 돌아왔다. Олицохты(모라초흐띠)의 출정에 전망한 고려 빨치산 두 동무는 코이니, 눈이니, 손가락이니, 귀이니 다 찢어 버리고 입을 다 파열하여 놓았다.적은 대군을 Волочаеьк(블로차예프카)에 집중하고 과동할 준비로 12겹 철조망과 3계단 참호방어선을 파고 굳게 수비하고 있었다. 그때 원동공화국 국민혁명군 총사령장은 Блюхер(블류헤르) 동무이었다. “인”전선을 후원하기 위하여 치진스크 Бричад(여단)을 동원시켜 출전하였고, 고려 빨치산 군대도 우수문에서와 암불농촌에 도망하였던 군인들 다 모아다가 전선부대에 편제하여 놓았기 때문에 수량으로 보아서 혼성 여단으로 활동 동작하게 되었다. 그래 Волочаеьк(블로차예프카) 백군소굴을 근본적 타격 청산하기로 준비 계획하였다. 1922년 2월의 엄동설한의 큰 추위가 용서없이 맹렬하고 혹독한 시기에 Волочаеьк(블로차예프카) 총공격을 시작하였다. 사면팔방의 설풍 밤중 포위공격 소리는 이려일 앞으로 구령소리가 고려말로 떠들썩하였다. 이것은 백당 군대들이 너무도 고려 빨치산의 악전고투를 겁내는 것을 이용하여 밤중에 더 겁을 내게 간담이 놀라게 우리 국민군대 장교들의 단마디 구령을 그렇게 이용한 것이다. 백군은 총공격에 불패되어 사상자 수천 수백을 수습하지 못하고 사산분주로 도망하였다. 이 전쟁은 원동숙청전쟁의 마지막 큰 싸움이기로 다 잘 아는 바이니 더 길게 논술할 바 아니다. 그 전쟁에 우리 빨치산 중대장 김일수 동무는 말하는데 백군의 시체를 이틀 동안이나 쉴 시간 없이 우리 빨치산 부대들은 수습하였다고 한다. 살아 도망하는 백군들은 바로 오던 길로 퇴각하지 못하고 중령지로 도망하여 달아났다. 왜 그러냐하면 창해소년단 군대 김경천 기병부대 야로센코 러시아 빨치산 군대와 연합활동으로 몇 달 전에 이만시를 삼일동안 점령하였고 하바로프스크 이남 각 지방에 빨치산들과 다반 빨치산 부대의 활동 공격에 백군후방은 위험천만으로 공포상태에 있었다. 그때 백군은 Волочаеьк(블로차예프카)가 마지막의 멸망타격이었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까지 다시는 저항력이 없었다. 그래서 1922년 2월 12일 Волочаеьк(블로차예프카)를 점령하고, 2월 14일 하바로프스크를 무인지경 같이 점령하였다.그런데 이 전쟁은 1921년 10월 말부터 1922년 3월까지의 엄동설한의 원동추위에 고기와 떡을 군인들에게 배고프게 겨우 먹이면서 완전 준비 못된 무장을 가지고 일본군이 공급 후원하는 백군을 대적하여 구축하는 것과 일본 침략군이 물러가게 되는 일이 45년 동안 희생과 고초를 겪어 왔다는 결과란 것이다.1921년 6월경의 자유시에서 포로하여 간 장교, 군인들 3~4백 명과 이르크츠크 소집당 대회를 반대한다고 이르크츠크 감옥이 차고 넘도록 구금하였던 고려사람들은 레닌정부 명령에 의하여 1922년 8월에야 석방하였다고 한다. 감옥에서 석방한 사람들을 어느 금광으로 실어 갔다고 한다. 감옥에서 병으로 굶어 죽은 사람이 많았고 자살한 사람도 있다고 한다. 슈먀즈키 행동은 일본 토벌군보다도 더 악독하다. 트로츠키주의자 고약한 놈이었던 자이다.우리 고려 빨치산 “군사의회”에서는 하바로프스크를 회복한 후부터 장교단을 조직하여 빨치산 무장해제 문제를 토론하여 각 부대에 해석사업하게 하였다. 빨치산 무장해제에 대한 해석사업은 : “지금 원동숙청은 시간문제이다. 백군은 다시 궐기할 힘이 없어졌고 약간 남은 잔부는 다 도망하는 것이고 원동 소비에트 주권화는 다 되었는데 다만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있는 일본 군대와 함대뿐이다. 일본 함대가 차일피일 지체하면서 대발한다. 무슨 구실을 핑계하여 작란하여 불가고 애쓰는 것이다. 우리 고려인 빨치산 부대는 무장하고 연해주 이남으로 빠쓰깨 이남으로 국민군대와 보조를 같이 하여 나가지 말고 미리 지금부터 무장을 해제하자고 설명하였다. 또 문제는 우리 고려 빨치산 군대는 조선해방까지 계속 투쟁하겠으니 무장해제할 필요가 없다고 한다. 사실은 그러하다. 그러나 지금 조선에 직접 혁명행세가 없는데 우리가 무장출동으로 가령 일본 수비대나 헌병대나 경찰서를 토벌한다고 하자. 그러면 일본군은 우리 인민촌락을 소화하고 토벌한다. 이미 경험에도 우리 군대는 일본군 토벌에 피하였고 지방인민들이 학살당하였다. 그러니 지금 우리는 무장 없는 비밀운동으로 주의선전과 사상고취에 전력하여 직접 혁명형세를 적응하게 준비하자라고.”장교단은 자기 부대마다 해석하여 모두 일치합의로 무장해제하기로 승낙하였고, 원동 소비에트 주권 하에 다시는 소작농이나 고용농으로 생활할 것이 아니고 공동 소유의 토지에서 공동노택으로 사회주의 사회생활을 준비할 것이다고 모두 자부심을 가지고 원동해방 전쟁의 승리를 경축하면서 무장을 벗었고 우리 고려 빨치산 “군사의회”도 취소하기로 결정하였다. 이것은 1922년 9월 경이다. 그리고 이만전쟁에 희생한 한운룡 부대 48명의 시체를 동삼언땅 눈밭에 파묻었던 것을 다시 수습하여 장례하였다. 우리 빨치산 군대가 무장해제하기 전, 며칠 앞서 전군이 모아서 비절 장절 강개한 추도로써 장례식을 거행하였다. (1957년 1월에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법성에 근무하는 김일수 동무는 조선에 있는 이전 빨치산 동무들 동의에 의하여 대표로 이만에 가서 한운룡 등 48명의 묘지를 방문하는데 이만구역 기관대표들, 당부직원들, 시민들이 회집하여 추도회를 거행하였고 나무장재와 나무패를 기념비처럼 세웠다고 한다. 김일수는 이만전쟁에서부터 Волочаеьк(블로차예프카)전쟁까지 직접 참가한 장백부 군비단 군대 중대장 겸 경리부원이었다. 기타 수다한 동무들은 : 연해주 빨치산 운동에 참가하였던 동무들은 조선감옥에서 죽은 자들과 병으로 죽은 자를 제하고 살아남아 조선에 있는 자도 많았다.) 또 1922년 9월 말에 이르크츠크에서로부터 또 반혁명분자들이 작란을 시작하였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Шумяцкий(슈마츠키)의 사명을 가지고 차따에서 활동하다가 안우치나에 나와서 “연해주 고려인 빨치산 군정의회”를 조직하는데 중동선(К.B.ЖД)에 반동단체 『군정서』장교 김규식을 불러오고 한창걸, 안동백, 최호림, 이중집 등을 데리고 『군사의회』를 조직하였다. 이 "군정의회" 위원은 김규식, 최호림, 안동백, 한창걸, 뿌시니츠부관, 로서아인(러시아인) 한 사람이고, 이 "군정의회" 연해주 빨치산 총사령관은 김규식이로 임명하고, 군정위원은 최호림이로 임명하고,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최고집정관처럼 행호시령하였다. 최호림은 자유시에서 독립군 무장해제 토벌시에 오하묵 부하, 자유시 군대("국민의회"군대) 장교이고, 김규식은 『군정서』 반동파 단체 장교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1922년 9월은 원동 연해주 빨치산 군대는 : 러시아 사람의 부대나 고려인 부대나 물론 다 무장해제하는 시기이었다. 그런데도 불고하고 "군정의회"를 조직하는 일이 무슨 이유인가? 또는 반동장교 김규식을 불러다가 총사령을 임명하는 일이 무슨 이유인가? 또는 자유시에서 독립군 빨치산 부대를 토벌하던 최호림을 군정위원으로 임명하는 일이 무슨 이유인가? 또는 솔밭관 군대 : 이중집, 신우여 등이 영솔하고 있던 부대들이 : 무장해제할 시기에 그 부대들을 무장한 대로 김규식 총사령 지도 하에 넘겨주었다. 그리고 김규식이는 그 부대들을 영솔하고 수이푼구역 로서아(러시아) 농촌으로만 돌아다니게 하였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점령 후까지 근 일삭(한달)이 넘도록 김규식은 무장부대-고려인 4,5백 명을 영솔하고 로서아(러시아) 농촌으로만 돌아다니게 하였다. 로서아(러시아) 농촌에서는 불안, 미안하나마 소위 연해주 빨치산 총사령이라 하고, 더구나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임명한 총사령이니까 농촌에서 영접하며 공급할 따름이고 괄시하지 못하였다. 이중집은 안우치나 가서 Пшеница(프셰니짜)에게 복종하고 자기 군대를 김규식에게 위임하였고, 한창걸이는 안우치나에 가서 Пшеница(프셰니짜) 소집회의에 참가하고 그 “군정의회” 위원이 되었고, 한창걸 자신이 본래 소속하였던 수청 빨치산 군대는 수청지방에서 벌써 무장해제를 하였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해방 소비에트 주권이 완전 수립한 후 몇 주일 안에 복땁스크 구역, 오봉산촌, 로서아(러시아) 농촌에서 김규식은 로서아(러시아) 농민 네 사람을 총살하면서 성명하기를, 우리는 붉은 주권을 반대한다. 그래서 너희들을 총살한다고 하고 그 즉시로 군대를 데리고 중국땅으로 넘어서 도주하였다. 그 길로 중동선(К.B.ЖД)에 가서 장종창 군벌에게 무장을 팔아서 12원씩 군인에게 주고서 도망하였다고 한다. 지금 그놈들의 구룹빠(그룹)는 남선에 이승만측 이범석 등이다. 최호림은 군정위원으로서 김규식 총사령과 같이 아니 달아난 것만은 Пшеница(프셰니짜) 총참모부 계획대로 꼭 실행하였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계획은 소원대로 되었다. Шумяцкий(슈마츠키)가 자유시에서 조선독립군과 빨치산 부대를 토벌하여 무장해제한 것도 옳게 잘하였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고 이만서부터 “인”-Волоиаевк(하바로프스크) 방어하며 추격하며 반년 이상의 엄동설한에 희생, 전투하던 고려 빨치산 군대들은 다 김규식이와 같은 놈들이라고 증명하자는 것이고, Шумяцкий(슈마츠키)가 백파장교이던 : 남만춘, 채동순, 오하묵 등과 문창범 『국민의회(대한인국민의회)』간부 임원들 데리고 고려당도 조직하고 군정의회도 만들어 가지고 조선독립군대를 토벌하는 것이 다 옳다는 것을 증명하여 자기들의 변명재료로 상부를 속여 보고할 재료를 만드노라고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김규식이를 불러다가 그렇게 만든 것이다. 로서아(러시아) 농촌에서도 고려 빨치산이 고약하다고 증명하기 위하여 근 두달 동안 로서아(러시아) 농촌으로 군대를 데리고 다니면서 행패하게 한 것이다. Шумяцкий(슈마츠키)나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고려 사람 무리들을 가야지 무리만도 못 먹이고 업신여겨서 자기들 반혁명행동을 기탄없이 임의대로 실행하였다. Шумяцкий(슈마츠키)는 고려인 백당장교들과 "국민의회"에 속하여서 그리한 일인가? 아니다 알고 한 일이다. 트로츠끼 주의자들 하는 투기운동이다.우리는 쓰빠스크 이북에서 빨치산 군대들을 무장해제하고 그 부대들을 해송하는 처리를 하느라고 시간이 퍽 여러 날 동안 지체되었다. 자기 가족들이 농촌에 있는 사람들은 다 자기 가족 있는 농촌으로 가게하고, 의식적 각오가 있고 선전지식이 있는 사람들은 자원대로 부대를 지어 자기들의 활동이 적당할 만한 지방으로 혹은 만주지방 고려인 집중생활 하는 곳으로 혹은 조선으로 비밀공작 사업으로, 중어중문하는 사람들은 남중국으로, 기타는 농업조합을 경영하여 생활하도록 적당한 농업지대에 보내고, 교원자격 있는 동무들은 각 농촌학교 있는 곳으로 보내고, 혹은 어업조합을 경영하도록 주선하여 주고 무장해제한 군인들을 처치 배속하는 일이 빨치산 전쟁시기보다 못지않게 다사 골몰하였다. 선전하는 힘만 드는 것뿐 아니라 물질 힘도 많이 들어야 되는 일이었다. 그래서 김규면 등은 1922년 10월 25~26일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시 점령 시위운동에 당도하지 못하고 해제 군인들, 부대를, 감정 없도록 호의친목으로 조선해방전선에 다시 만날 때에 서로 부끄럽지 않게 행동하다가 동지적 기쁨으로 다시 만나자고 작별하는 약속과 사우처리가 그렇게 두달 동안이나 지체되었다. (무장해제 꼬미씨야)쓰빠스크로부터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나와 보니까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꿈꼼 책임비서로 취임하였고, 연해주 각 기관 고려인편으로 책임 일꾼은 정치부, 당부, 소비에트, 군, 면, 변강, 도, 현, 모든 기관 고려인 일꾼은 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소집한 이르크츠크 당대회 준비 조직자들이다. 이것은 1921년 봄에 이르크츠크에서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고려당 중앙을 조직한 후 국제당으로 남만춘, 한명세 등을 대표로 보내고서는 그 중앙위원들 후보위원들은 고려당원이란 이름으로 행세하다가 즉시 로서아(러시아) 당원으로 넘어갔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 마술정책은 비상하다. 백당을, 적당을 만드는 수단이 용하다. 어제는 백당을, 고려당원을 만들고 오늘은 로서아(러시아) 당원을 만들었다.그래서 Пшеница(프셰니짜)와 같이 연해주 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 Пшеница(프셰니짜) 손으로 두 번 만들어 놓은 사람들 : 고려당원 며칠 동안(이르크츠크 대회 때) 그 후는 로서아(러시아) 당원이다. 해방 후 하바로프스크변강 책임서기는 가마린린크, 크라이 고려인부 부장은 김기룡이다. 김기룡이는 아편대왕 문창범의 외교부장으로 있던 정객이다.원동해방 후 1922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꿈꼼 첫 책임서기로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몇 해 계속하였고, 또 두 번째 1932년 연해주 Облаеком(오블라예꼼) 책임서기로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있었다. 그러니 연해주 해방된 후로 부터 1937년 고려인을 중앙아시아에 이주할 때까지 고려인측 책임일꾼으로 등용된 자들은 : 이르크츠크에서 1921년에 두 번 변신(1. 고려당원으로 2. 로서아(러시아) 당원으로)한 "국민의회"영웅들과 백당장교 구룹빠(그룹)들이었다. 사람들은 말하기를, 원동 고려인 사회에 파당싸움이 많았다고 한다. 그것은 내용을 모르고 덮어놓고 다 같은 혁명자들이 파당 싸움한다고 비난하는 것이다. 이것은 모르고 하는 말이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의 주먹 밑에서 그 사람들 구룹빠(그룹)가 독재 전권하는데 누가 대적할 수 있는가?1917년 위대한 시월혁명 후부터 1922년 10월 26일까지의 원동고려인 사회에는 비혁명적 구룹빠(그룹)와 혁명적 구룹빠(그룹)가 있었다.하나는 고려족 총회에 철광단 부분이 합동한 "국민의회"이고, 다른 하나는 신민단과 사회혁명당이 합동한 『한인사회당』이다.Ⅰ. 국민의회는 ㄱ. 꼴차크 정부에 축하문을 보내었고, ㄴ. 파리열강회의(파리강화회의)에 청원단 대표를 보내었고, ㄷ. 19~20년 조선독립운동과 원동 빨치산운동이 극성하는 때에 할빈(하얼빈) 호르바트 총독부하 고려인 장교들 합동하여 중동선(К.B.ЖД) “에호”에 독립군을 모집한다느니, 독립군 사관양성 한다고 하면서 몇 달 동안 떠들썩하다가 모집한 군인들과 사관학생들이 스스로 해산되며 빨치산 지대로 도망하는 바람에 “에호”모집 사업이 성공하지 못하였다. 독립군 모집이나 사관양성이 옳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호르마트 부하 장교들과 합작하는 일과, 또 “에호”는 일본 군대가 활동하는 철도선인데 거기다가 군인모집이란 것 절대 불가하다고 하는 것이고 연해주 빨치산 운동에 방해를 주는 것이었다. 아니 바로 반대하는 것이다. ㄹ. 1921년 "국민의회"는 흑하에서 독립군을 양성한다고 자유시에 수백명 군대를 두고, 백군장교들 이전 그때 “에호”에서 합작하던 군관들의 지도하에 있다가, 1921년 6월 자유시 토벌 마사노프스크 독립군부 무장 해제시에 오하묵 지도하에서 자유시사변(흑하사변)이 발생하게 한 것, 일본측에 호의를 사는 것이다. ㅁ. "국민의회"는 1921년에 이르크츠크에서 고려당 중앙을 조직하고 동시에 자유시 토벌 "군정의회"를 조직하였고 반동적 행동. ㅂ. 자유시에서 조선독립군을 토벌한 후 이르크츠크의 고려당 중앙위원 전부 "국민의회"의 본신분자들은 모두 로서아(러시아) 당원으로 변신하였다. 투기주의자들이 변장하는 방식. ㅅ. 원동해방 후 즉시로부터 1932년 원동 고려인이 중앙아시아에 이주하기 전까지 시기는 Пшеница(프셰니짜)파의 활동세력 밑에는 이르크츠크에서 변신한 구룹빠(그룹)가 출세하는 일꾼이었다.Ⅱ. “한인사회당”은 1919년에 레닌 정부에 축하문과 국제당에 대표를 보내었고, 1920년에 제3국제당에 참가하였고 제3국제당 결정에 의하여 고려공산당으로 변명하였고, 1921년 초에 상해에서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를 조직하였고, 1918년부터 원동 빨치산 운동에, 고려인 빨치산 조직과 원동해방전쟁에 희생적으로 참가하였다. 1. “한인사회당”은 1918년 8월 하바로프스크 까마꼬브 각당군대와 싸움에 적위군 부대로서 싸웠고 영도자 김딴게이츠 알렉산드라브나를 우리 지도자 혁명자와 우리 적위군대, 반수 이상을 희생하였고 2. 1921년 동절에 이만서부터 까베리츠 백당군대와 싸움에 원동국민군과 합세하여 빨치산 군대로서 싸웠고, 중대장 한운룡 동무와 48명 영웅 동무의 희생을 당하였고, 기타 전쟁의 올긴스크, 수이푼, 수찬이 백당, 마적, 일본군 토벌전쟁에 마지막 “인” Волочаеку(볼로챠예꾸) 전쟁에 희생적으로 싸움하였다. 그리고 수청전쟁, 올긴스크에서 신용걸 중대, 김식 소대를 희생한 것 등. 3. “한인사회당” 선전부 사업은 상해에서 신문 『효종』(새벽종) 잡지-『공산』을 출판하였고, 『공산당선언』을 번역했고, 중국, 안남(베트남), 대만 동맹으로 잡지 『평평』을 발행했다.(평평은 평등, 평화란 말) - 선전부장 김립은 반동파에게 암살당하였고, 4. “한인사회당” 조직부 사업은 조선청년연합회, 교육회, 노동공제회, 신간회, 천도교회 농민사 등등을 연락지지하면서 비밀망 조직에 전력하다가 김철수는 십년 감옥 후에 인병치사 하였다.1921년 상해당 중앙 대표 이동휘, 박진순 등과 이르크츠크당 중앙 대표 남만춘, 한명세 등이 국제당에 서로 옳다고 호소한 결과 연합 대회소집을 1922년 12월에 Верхнееудинская(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고려공산당 연합(상해당, 이르크츠크당) 대회를 개최하였다. 개회벽두에 대회는 선포하기를, 로서아(러시아) 당적을 가진 대표들은 발언권만 있고 표결권은 없다고 하였다. 그래서 이르크츠크당 측으로 로서아(러시아) 당적 가진 대표가 40여 명이었다. (그것은 1921년 6월 자유시 사변 후 이르크츠크당 중앙위원 및 후보위원들이 다 로서아(러시아) 당원으로 슈먀즈키 공장에서 다시 제조한 것이다.) 그래서 이르크츠크당 대표들은 전부 탈퇴하였다. 그때 연합대회에 국제당 명의로 감시한 대표는 Пшеница(프셰니짜)동무이었다. 이르크츠크당 대표들은 탈퇴하여 치따에 내려와서 밤사이로 대회수속을 만들어 가지고 국제당으로 남만춘, 한명세 등을 또 파송하였다. 그때 치따 달비로 총서기는 구뱌크이었다. Верхнееудинская(베르흐네우진스크)에서 대회를 맞추고 국제당으로 대표로 이동희, 윤자영, 김아파스를 파송하였다. 그래 또 두 당 대표는 국제당에서 서로 옳다고 호소한 결과, 또 다시 연합하라고 연합위원회를 조직하였다고 한다. 1921년엔 상해당, 이르크츠크당 대표, 1922년엔 Верхнееудинская(베르흐네우진스크)당, 치따당 대표가 서로가 서로 옳다고 하는 싸움이 바로 해결되지 못하고 또 연합하라고 억지로 될 때로 되라고 하는 것이었다. 다시 말하면 상해당, 이르크츠크당 행동 강령이다. 주의·주장이 서로 판다르게 반대 방향이다. 그래서 다시 연합하지 못하고 만 것이다. 혁명과 반혁명의 두 길이다.1932년 10월 혁명 15주년 기념-원동해방 10주년 기념의 원동 고려문신문(『선봉』)에 기념호 신문에 안우치나 "군정의회", 1922년 9월말에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조직한 것 : 김규식 총사령, 최호림 군정위원, 한창걸· 안동백 등 "군정의회" 위원이 『연해주 고려빨치산 군정의회』를 자랑하며 기사하였다. 그리고 한창걸의 빨치산 역사를 들어 자랑하였다. 한창걸은 수청 빨치산에 물론 참가자이고, 1922년 9월 말의 Пшеница(프셰니짜) 빨치산 "군정의회"에는 위원 뿐이고, 김규식 반동행동을 도와주는 것 뿐이었다. 그런데 최호림은 그때 『선봉』신문 임시 주필로서 그 반역운동 "군정의회"를 자랑하여 기재하였다. 그 때는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연해주 Облаеком(오블라예꼼)책임 서기로 있는 때이니 의기당당한 시기이다. 부끄럼 없이 기재했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연해주 꿈꼼 Облаеком(오블라예꼼)두 번 집정관으로 있으면서 고려인민이 소비에트 국가 행정에 신임을 얻지 못하도록 만들었다. 결국 1937년에 원동 거주 고려인은 전부 이동하여 중앙아시아에 거주제한을 받았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원동 고려인에게 대한 십여 년 동안 정책은 객관적으로 일본제국주의의 소원을 맞추어 주었다고 할 수 있다. 일본제국주의자는 조선 국내에 있는 조선인민 3천만 보다도 연해주에 있는 고려인 3십만을 더 미워하고 겁내는 것이다. 그래서 백방으로 애쓰는 것은 원동에 거주하는 고려인이 소비에트 당국에 신임받지 못하도록 다 친일분자로 의심받도록 만들자는 계획이 취밀원, 고등정탐부의 일상적 임무일 것이었다. 동시에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연해주 집권 당시에 이전 "간화회"회원이나 "자위단" 단원에게는 당문을 열어주었지만, 빨치산 운동 참가자들에게는 당문을 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이미 입당한 자들까지라도 출당시켰다. 예를 들면 이전 이만 군대조직원 간부, 군관들 당원이 40여 명이 있었는데 다 출당 맞았다. 이와 반대로 자유시에서 독립군 토벌한 자들, 1922년 9월 말 "연해주 군정의회" 참가자들,Шумяцкий(슈마츠키)와 Пшеница(프셰니짜)의 덕택에 당표를 가지고 활동하는 무대이었다. 만일 고려인 "국민의회"가 Шумяцкий(슈마츠키)가 아니면 자유시 유혈참변을 만들지 못하였을 것이고, 만일 그 자들이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아니면 연해주 고려인 질서에 좌우하지 못하였을 것이다. 그러니까 Шумяцкий(슈마츠키)와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빨치산 운동을 방해하였으며, 원동질서를 문란케 하였으며, 고려혁명에 큰 해독을 끼치었으며 공산당, 고려중앙당 조직문제에 큰 착란을 끼치었으며 원동 연해주 고려인 사회질서를 파멸케 하였다. 그러니 Шумяцкий(슈마츠키)와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모험투기주의적 트로츠끼파로서 조선에도 트로츠끼주의자를 만드노라고 그렇게 한 것이고, 또는 연해주 고려인을 미끼를 만들어서 일본제국주의자들을 낚시질하노라고 그렇게 한 것이다. 이영선이 같은 놈을 특무원으로 쓰면서 이르크츠크에서나 연해주에서나 고려인 일꾼 취급방법은 "국민의회" 즉, 이르크츠크 당대회 참가자들이라야 합격되었다. 폐일언하고 Шумяцкий(슈마츠키)와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국제당에는 큰 죄인이고, 소비에트 정부에는 반역자이고, 당시 원동공화국에는 강적이었고, 고려혁명운동에 해독자이고, 원동고려인 사회에 불신임할 만한, 비 없는 구름으로 덮어씌운 것이었다. 그러니 그 반역자들의 죄악은 용서 못할 것이다. 공개 재판하지 못했다.위대한 세계 혁명적 수령이고, 세계 혁명가의 위대한 선생 레닌이 말씀하시기를 : "위대한 혁명주년을 기념하는 좋은 방법은 혁명의 해결되지 못한 임무에 주의를 집중시키는 것이다"라고 하셨다. 그래 나는 우리 빨치산 운동에서 옳게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을 기억하게 된다. 이것이 묵은 사실들이지만, 참고 재료로 될 수 있고, 지금 조선문제 연구하는 방법에도 필요한 보조가 되리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필법이나 문장을 불고하고 대강 그 사실만을 기록한다. 독자들이 자세히 알기 위하여서는 수삼백 페이지를 더 기록해야 되겠으나, 시간상 노무력 관계로 이만하고 후일 다른 기록에 미진한 사실들을 연출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간접, 직접으로 빨치산 운동에 관계되는 사실만을 가급적 다 소개된다고는 생각지 못한다. 그리고 1918년 이후 조선 사람으로 의병운동, 붉은 빨치산운동 참가자들, 유명한 자 보다도 한 사람도 빼지 않고 다 사실, 정말, 그대로 기록하기는 불능한 것이다.1. 최재형은 북조선 함북 경원군 출생인데 농노의 아들이다. 8세 시에 자기 부친과 함께 연해주 보세트 구역에 망명하여 왔다. 이것은 19세기-60년대이다. 부친과 함께 농업도 하며, 어업도 하며, 부두건축 노동도 하다가 장성한 후 로서아(러시아) 입적민이 되어서 다른 고려인들과 같이 부락생활 하였다. 점점 고려인 망명 이주민이 증가되어 아즈미, 씌즈미, 연추, 마라바스, 살라반스크, 두 세 구역에 고려인 촌락이 수천 호이었다. 최재형은 도소회장(면장)으로 수십 년 일하는데 신망이 많았고 남도소 개척사업과 교육 사업에 로서아(러시아) 문화교육에 주창자이고, 청년교양 사업과 봉건사회 구습 풍습을 폐지하고 문명 사업에 선진자이었다. 짤시애에 원동 고려인 대표로 니콜라이제오 대관식에 참여했고, 일본에 망명한 고려 혁명자들을 방문하였고, 또는 1906. 7. 8 북선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후원하였고, 17년 2월 혁명 후 즉시로 연해주 거류 고려족 연합총회를 소집하여 고려족 총회를 창립하고, 총회장은 최재형이 피선되었다. 그래 붉은 주권 밑에서 연해주 고려인민은 통일적, 조직적으로 잘 준비하여 진행하는 중에 1918년 말 1919년 초의 연해주 북도소 니콜리스크 아편장사 구룹빠(그룹) 거두들이 고려족 총회를 점령하고 총회장은 문창범 아편대왕을 선거하고 부회장 기타 주요임원은 다 투기업 영웅들이었다. 최재형은 김좌두 등과 같이 빨치산 조직운동에 연락 방조 후원하고, 고려족 총회 행동을 조종하지 못하였다. 최재형은 소비에트와 조선의 애국자이고, 진정한 혁명자이고, 원동 고려인에게 혁명적 선진적 인물이다. 붉은 주권의 적극 지지자이었다. 그래 일본정탐국은 언제나 비혁명자와 혁명자를 똑바로 정탐하여 아는 것이다. 1920년 4월 정변 날에 최재형이를 붙잡아다가 학살하였다. 일본제국주의자는 악독하고도 영리한 것이다. 아편장사꾼들은 매수할 수 있지만, 최재형 같은 애국지사들은 매수할 수는 없으니 학살당하는 것이다.최빠사는 최재형의 둘째 아들이다. 원동 빨치산 운동에 조맹선, 박그레고리와 같이 독립단 군대 영솔하고 빨치산 전쟁에 참가하다가, 원동해방 후로 해군함대 포병대장으로 근무하였다.2. 최니콜라이는 다반군대를 영솔하고 “한인사회당”군대로 편입되어 1917년부터 가메꼬브백파와 유혈전투하였고, 그 후도 전투마다 참가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 토벌시에 부상하여 두다리 상하였다. 그래도 포로병처럼 군용차에 실리어 이르크츠크 감옥에 있다가 일년 후에 레닌정부 명령에 석방되었다. 인발니트로 뼌씨도 없이 일차였다.3. 한운룡은 북선 함남 정평군 애국지사 한석봉 3남 출생이다. 중국사관학교를 필하고, 1919년에 연해주에 와서 막스주의적 정당인 “한인사회당”에 입당하고 사관양성에 대한 과업을 맡았다. 1921년 6월의 자유시에서 김하석, 오하묵, 최고려 등이 독립군 피란군대를 토벌할 시에 김규면 등 13인이 흑룡주 불라고베신스크 정치부 보호실에 구금되어 있다가 김규면이와 함께 하바로프스크에 내려와서 하바로프스크 성장 겸 부리아물주 "군정의회" 위원 Поетьсев(뽀에지에프)동무를 면회하고 선후책을 의논하고 이만에 가서 군사훈련사관양성소에 일하다가, 1921년 10월부터 우수리방어 전선에 참전하여 수십 주야로 엄동설한에 땀 흘리며 싸우다가, 1921년 11월 초의 이만지방에서 악전고투에 마지막 단명전에까지 수천의 적을 이기면서 분투하다가, 4일날 아침부터 석양까지 탄환 한 개 깃지 않고 항복한 자 하나 없이 48명 영웅지사들과 함께 전망하였다. 한운룡 장군은 25세 소년영웅, 청년 혁명가로서 레닌주의 만세를 리만정거장에서 마지막 소리치어 불렀다.4. 이용은 별호는 추산, 북선 함남 북청군 유명한 해아(헤이그)사변 우국지사 이준 공의 장남이다. 중국에서 군관학교를 필하고 1919년에 연해주에 와서 “한인사회당”에 입당하고 군사부위원의 책임을 가지고 빨치산 조직, 훈련, 사업에 근무하다가 1921년~22년 이만 Волочаеку(볼로챠예꾸) 전쟁시기에는 고려 빨치산 군대 사령관으로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분투하였다. 1921년 초에 남중국에 가서 북벌전쟁에 참가하였고(소비에트 원동에서의 빨치산 동무들과 함께) 북벌전쟁 후 만주에 와서 공산주의 운동에 비밀공작하다가 검거되어 조선에 가서 지방 안치구금을 당하고 있다가, 1945년 해방 후 북청군 위원장으로 다음에 도시건설상으로 마지막 시기엔 사법상으로 있다가, 1954년 8월 18일에 평양에서 병으로 사망하였다.5. 정재관은 북선 황해도 재령 출생이다. 일찍이 북미주 샌프란시스코 유학하였다. 조선 망국정부 고문관 미국인 수지문(스티븐슨)이 옥란(페리)정거장에서 전명운이와 육박전하는 순간에 장인환이 총살한 사건에 직접 선도자로 미주에서 망명하여 원동 연해주에 와서 당시의 권업회사업과 『해조신문』 사업에 한형권, 이종호, 신채호 등과 함께 활동하였으며, 의병대장 김두성의 부하 안중근 중장이 할빈(하얼빈) 정거장에서 이등박문(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을 총살한 사건에 직접 참모자이고, 그 후는 “신민단”조직부 위원으로 활동하면서 “신민단” 유격대장 강우규가 경성 남대문 정거장에서 재등(사이또) 총독을 포격한 사건에 직접 조직자이다. 강우규 기타 대원들은 석왕사에서 맡은 책임들을 준비케 하고 원산에 최자남이와 경흥에 김병하는 운반 연락원으로 조직하였다. 그 다음부터는 “한인사회당”군사부 위원으로 수청일대의 빨치산 고려인 부대 조직, 지도 사업에 마지막까지 분투하다가 풍한서습에 병으로 죽으면서 신체를 화장하여 달라고 유언하였다. 그래서 빨치산 일동은 정재관 동무를 통나무가지 불속에 장례하였다. 별호는 해산(海山). 그리고 그곳을 정재관 골이라고 기념하였다. 그의 자식들은 그의 형이 와서 데리고 재령 고향으로 나갔다.6. 강백우(강석봉)는 수청지방의 소작농민이다. 수청일대의 청년운동과 교육운동의 선봉대 대장이다. 수청고려인 청년연합회 회장으로 다년 근무하였고, 정재관과 함께 연해주 “한인사회당”군대, 빨치산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가 활동하였다. 무장해제, 원동해방 후 협동조합 운동으로 어업조합, 꼴호즈 조직운동에 적극 활동하면서 당사업과 사회주의 건설사업에 열성적으로 공작하였다.7. 박그레고리는 보세트구역 입적농민의 아들이다. 코챠크 징병령에 도망하여 빨치산 군대에 참가하였다. 독립관 군대, 조맹선의 부사령관으로 빨치산 운동에 영웅적으로 투쟁하였다. 자유시 사변에 이르크츠크 Шумяцкий(슈마츠키)감옥에 일년동안 구금되어 있다가 이만 나와서 야로선꼬 부대와 합작하여 백당 군대를 추격하여 봉밀산까지 추격하였고, 원동해방 후엔 Красио(크라씨오)알미에 장교로서 복무하였다.8. 한창걸은 수청지방 입적농민의 아들이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체크 가이다 장군 정변시에 일본 군대 감옥에 구금되어 있다가 석방되었고, 수청 빨치산 군대 이승조, 박경철, 고상준 등과 함께 빨치산 운동에 통역 연락부장으로 일하다가 원동해방임시, 무장해제임시에 안우치나 Пшеница(프셰니짜)의 「군정의회」위원으로 김규식, 최호림, 안동박 등과 함께 Пшеница(프셰니짜)의 지도하에 있었다. 원동해방 후 1937년 원동 고려인이 이주할 시까지 고로지꼬브와 하바로프스크 크라의 내무부 정치국에서 일하였다. 마지막 오체리로 검거된 모양이다.9. 김경천(김응천)은 북선 북청군 출생이다. 무관 가정 출신이다. 일찍이 일본 사관학교 기병과를 마치고 기병중위로 있다가 1919년 조선독립선언(3·1운동)과 동시에 탈주하여 백두산 뒤에 와서 사관학교를 조직하고 이청천, 신동천과 함께 교관으로 있다가 연해주에 와서 빨치산 운동에 참가하였다. 수청 창해소년단 군대를 영솔하고 마적 부대를 토벌 청산하였고, 백당 군대를 출두 못하게 방어하였고, 안우치나로 이만 점령에 백당 군대 후방을 격동케 하였고, 원동해방 후엔 국경 경비대에서 근무하였는데 마지막 시기 검거에 들어간 모양이다.10. 채영은 중국 훈춘현 두만강역 회롱봉 출생이다. 중국 절강성 항주 군관학교 출신으로 힘이 장사이다. 그래서 채영 장군이라 한다. 1919년에 원동 연해주에 와서 “한인사회당”에 입당하고 빨치산 운동에 “혈성단” 군대 사령관의 책임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마적단 부대들을 구축하는 일에 영웅적 활동을 하였으며 일본 군대 토벌을 방어하는데 두세 번 각각 다른 방식의 전술로써 적의 사상자 뿐 아니라 일본 군대 사령부, 참모부 장교들의 간담을 떨게 놀라게 해서 채영 장군의 이름 있는 곳에는 다시는 출병하지 못하였다. 자유시 사변에 아무 대항없이 붙잡히어 이르크츠크 감옥 Шумяцкий(슈마츠키)처분에 구금되어 일 년 이상을 고생하다가 레닌정부의 덕택에 석방되어 원동에 나와서 이르크츠크 감옥에서 굶어 죽게 된 것을 날마다 공급하여 먹여주던 로서아(러시아) 여자를 데리고 자식 기르고 생활하였다. 원동 고려인 질서를 청산할 때에 옥석의 구분으로 채영 장군도 청산된 모양이다.11. 홍범도는 북선 평안도 평양 출생이다. 조선이 합방(강제병탄) 전 함경북도 의병운동이 극성한 때에 홍범도는 삼수, 갑산 등지에서 일본 군대 연락병들을 습격하는데 명성이 있었다. 그러자 지원군들 모여드니 부대적으로 행동하게 되었다. 홍범도는 백발백중의 명포수이고, 부대적 편성지도 능력은 없는 중세기 무사와 같은 장군이다. 그러자 일본 군대의 수색부대가 삼수, 갑산 등지를 침입한다. 형세불리하였다. 두세 사람 명포수로 산짐승 잡듯이 일본군 연락 교통병을 북청, 함흥으로 갑산산골로 내왕하는 것을 습격하기는 편리하였지만, 부대로 출동하기는 불편리하였다. 뿐만 아니라 수색대에 붙잡힐 수도 있었다. 그래서 이병채와 두 사람이 연해주 Новокиевск(노보키예브스크)로 피신하여 왔다.1919년 3월 운동(3·1운동)이 조선에 발발할 때에 홍범도는 조선에 가서 일본군과 싸우겠다고 결심하는 것을 간도 “국민회”에서 군인 한 부대를 홍범도 명의하에 주었다. 간도 “국민회”에서 박경철을 참모장으로 지정하여 주었다. 한 달 후에 박경철은 탈퇴하여 훈춘구역 “신민관” 군사부에 와서 한경세, 신우여, 이승조 등과 함께 일하였다. 그리고 홍범도는 군인부대와 간도에 있다가 마침 봉오골 전쟁(봉오동전투)에 참가하였고, 그 후 백두산 뒤에 갔다가 일본군 간도 토벌시에 남만, 북만 산으로 피란하여 자유시에 왔다가 자유시 토벌(자유시참변)에 군대들이 무장해제 당한 후 홍범도는 단신으로 Шумяцкий(슈마츠키)에게 대접 받으면서 모스크바까지 행세하면서 자유시 토벌이 유감이 없는 듯 시키는 대로 말하며 돌아다니는 것이었다. 슈마츠키 일파는 홍범도를 조선독립군의 총지휘자처럼 떠들어 소개하면서 자기들 범죄사변을 완화시키려고 홍범도의 변호비판을 요구하는 충동이었다. 홍범도가 영솔하고 자유시에 왔던 부대는 우수문 나게리에서 석방되어 “인”에서부터 백당 숙청전쟁에 참가하였다. 홍범도 개인은 원동 빨치산 전쟁엔 직접 참가한 일이 없다.12. 이범윤은 한국정부의 관리사로 간도거류 조선인민을 관리하라는 임무를 가지고 두만강변에 주재하고 있었다. 일로전쟁(러일전쟁)시에 로서아(러시아)편에 가담하여 싸웠고, 1906~1908년 북선 의병운동에 활동하였다. 그때 한국 대사 이범진이 페테르브르그에서 자살하면서 자기의 재산 수만 원과 유서를 최재형에게 보내었다. 내용은 : “국권회복 운동에 쓰라고” 신신부탁하였다. 그래 최재형이는 그 돈을 받아가지고 의병부대 조직에 착수하여 이범윤 부대 무장준비와 안중근 부대 무장준비와 전제익 부대 무장준비에 도와주어서 1906~1908년 북선 의병운동이 시작되어 경원 신아산, 신전원, 경흥 홍의골, 회령 홍산동, 중태골, 경성, 명천 등지 의병대 전쟁이 확대되었다. 그리고 1919년 독립운동 시기의 군대를 모집하여 제1선 부대를 허근(허재욱)에게 맡겨서 간도로, 두만강 상류연안으로 파견하고 그나마 부대는 연해주에서 확충하면서 붉은 빨치산 부대와 연계를 취하고 있었다. 간도에서 허근이 영솔하고 자유시에 왔던 부대는 무장해제한 후 감금되어 있다가 석방되어 원동해방전쟁에 적극 참가하였고, 허근이는 모스크바까지 가서 울고 다니었다. 자유시 토벌에 의군부 군인이 더 많이 죽었다고 한다. 이범윤 자신은 늙은 몸으로 빨치산 전쟁에 직접 참가 못하였으나 그의 군대 일부분은 빨치산 운동에 희생 분투하였다.13. 조맹선은 “독립단”의 제3차 수령이다. “독립단” 군대 조직자 첫 수령인 유인석은 남선 경상도 유림학자이다. 별호는 의암이다. 그는 “독립단” 의병운동 당시에 연해주 바라바스에 와서 있으면서 당시 권업회, 『해조신문』 있을 때에 당지에 있는 운동자들과 시국문제를 토의하는 일도 있었다. 유의암(유인석) 선생이 사망한 후 “독립단” 군대 둘째 수령은 이석대이다. 이석대는 백두산 장백부에 근거하고 활동하였다. 이석대는 부대를 영솔하고 평안도 운산금광에서 금덩이를 운반하는 차 보호병들을 습격하고 운반 금덩이를 탈취하였다. 그 금덩이를 당일에 재운하지 못하고 후일 다시 재운하게 되었다. 너무 커서 경편히 재운할 방법을 연구하느라고 시일이 지체되었다. 그래서 포위에 붙잡혀 죽었다. 그 다음 조맹선이 독립단 군대의 총지휘자가 되었다. 1918년 10월 혁명 후부터 조맹선은 붉은 주권나라로 오기로 원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1919년에 일부분 비무장 군인들을 연해주로 보내었다. 그 군인들이 오는 길에 북만주 할빈(하얼빈) 지대에서 호르바트 부하 고려인 장교들이 붙잡아 자기들 부대에 편입시키었다. 그래 그 다음에 보내는 부대들을 할빈(하얼빈) 중동선(К.В.ЖД)으로 경유하지 말고 훈춘 상부로, 동령현 지방으로, 연해주로 이동하게 하였다. 그래서 둘째 번 이동부대는 동령현 상부 우잔으로 넘어서 고로지꼬브지방 장재촌에 당도하였다. 그 지방 자위단에서 토벌하여 죽은 자, 상한 자 십여 명이었다. 장백부에서 조맹선은 그 소문 듣고 본부대를 데리고 연해주 추풍 자피거위로 채영 부대를 찾아 왔다. 조맹선은 채영 동무와 합작하여 진퇴를 같이 하면서 고르지꼬브에서 흩어진 군인들도 모아오고 하얼빈 호르바트 군대에 붙잡히어 있는 군인들도 유인하여 도망하여 오게 만들고 다시 편제하여 조맹선의 지도하에 부사령들은 박그레고리와 최빠사를 지정하였고 “한인사회당” 지도하에서 빨치산 운동에 일치동작하기로 하였다. 채영 군대와 합동하여 일본 토벌군을 구축하는 전쟁에서 조맹선 독립단 군인이 둘 전사하였다.(자피거위 곡식 밭에서) 조맹선 선생은 늙은 몸으로 여러 해 동안 고생과 병을 이기지 못해서 만우치나에서 사망하였다. 그의 평생 애국주의 사상과 류의암(의암 류인석) 선생으로부터 3대로 투쟁하던 의병운동은 붉은 빨치산으로 합동되었고 류인석(의암), 이석대, 조맹선 3대 계승한 애국주의는 국제주의로 합류되었다. 그이들은 정직·개결한 지사요, 혁명자들이다.14. 최계립은 북선 회령군 출생이다. 와룡동 중학, 나자거위 사관학교 출신. 1919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서 상한 다리로 탈주한 것, 그 다음 이만서부터 “인”까지 진퇴양난의 전투에 더구나 울라지미르 전투에 영웅투쟁성은 누구나 다 아는 바이거니와 지금 중앙아시아 콜호즈에서 노동하고 생활한다.15. 박영(박근성)은 북선 경흥군 백운포 출생이다. 중국 남경대학 출신이고 고려 빨치산 군대 군정위원이다. “인” 산병선 전투에서 부상하였다. 원동해방 후엔 이만 지방학교 교사로 있었다. 한때는 하바로프스크 고려부서기로도 일하였다. 그러나 하바로프스크 크라이꼼 서기는 가마린크 변강 고려부주임은 김기룡이 전 "국민의회" 외교위원장,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는 Пшеница(프셰니짜) 그런 환경에서 박영은 출당되었다. 박영 뿐 아니라 피난만군대 희생적으로 전투하던 빨치산 지식분자들은 각처에서 다 출당된 모양이다. 그래서 박영 등 기타 수삼백 명, 이미 빨치산 동무들은 떼를 지어 만주, 조선, 남중국으로 가는 바람에 박영 등 육십여 명은 남중국에 가서 북벌전쟁에 참가하였고, 박영은 중국 당원으로 군정위원 책임 가지고 고려의용군 부대와 같이 광동폭동(광동꼼뮨)에까지 참가하여서 시가전에서 박영 형제, 김용배, 이원준 등등 24명 동무가 희생하였고, 김화일(김중섭)은 유명한 기관 총수로서 남창 점령 전쟁에 큰 공을 세우고 죽었고, 김화일 동무 장례에 남창 점령군 전체가 참가하였다고 김화일(김중섭)은 북선 경흥군 아오지 김중진의 동생이다. 이범홍은 한구에서 전사하였다. 이범흥이는 중국 왕청현 나자거위 이성렬의 아들이다. 이 위에 박영 동무와 같이 기록된 수십 여명 사람들은 다 아라사(러시아) 원동, 빨치산 전쟁으로부터 북벌전쟁에까지 마지막 광동 소비에트 창립 폭동에까지 희생하였다. 이 동무들은 과연 국제주의 혁명자들이고 애국지사들이다.16. 김홍일은 북선 평북 용천군 출생이다. 중국 귀주 군관학교를 필하고 마침 1919년 조선독립운동 폭풍(3·1운동)에 상해로부터 연해주에 왔다. 이만전쟁에서부터 “인”까지 “인”에서부터 연해주까지 왕복전쟁 때 빨치산 군대의 중대장의 책임을 가지고 엄동설한에 주야를 불문하고 잘 싸웠다. 그러나 울나지미르전쟁에 전공이 많았다. 긴급한 시간이라도 지세형편 시찰이 예민하고 산병, 보초, 작전, 계획과 기변전술이 특이한 점이 많이 있는 청년장교이었다. 그러므로 김홍일 중대부 군정위원 이규선 동무는 항상 말하였다. 김홍일 중대장이 사령부작전 계획에 참가할 때마다 지도를 펴놓고 도형을 그으면서 계획을 작성하는데는 선수이더라고 하였다. 원동해방전쟁이 끝난 후에 김홍일이는 남중국으로 돌아가서 북벌전쟁에 참가하였고, 북벌전쟁 후엔 상해 병공창, 창장으로 있었다고 한다. 1945년 후부터는 남조선에 가서 군관학교 교장으로 있다고 한다.17. 임표는 북선 북청군 출생이다. 북청 진위대 소대장으로 있었고, 1919년 독립운동(3·1운동) 당시에는 장백부 “군비단”에 입참하여 “군비단” 군대 사령관으로 있었다가 “군비단” 군대가 연해주 이만으로 이동하게 될 시에 제1차 이동부대를 영솔하고 이만에 와서 사관양성, 군대배치에 주무자로 일하였다. “군비단” 군대 45차례로 이동하여 이만지방에 배치하는 일에 대단한 힘을 들이었다. 모든 시설 준비사업에 임표의 힘이 많이 들었다. 전쟁시에는 임표는 중대장의 책임을 가지고 활동하였다. 원동 빨치산운동에 “군비단” 군대의 역할이 크니 만큼 빨치산 전쟁에 “군비단” 군대의 희생도 크다. “군비단” 군대의 전공이 많은 것만큼 임표 동무의 공훈도 크다. “군비단”을 말할 때 임표를 뺄 수 없으며 임표를 말할 때는 “군비단”을 뺄 수 없는 것만큼 관계가 그러하다. 원동해방 후 임표는 무장 벗고 농촌생활하면서 학교교육을 힘쓰며 농업조합으로 콜호즈운동에 열성적으로 힘쓰고 있었다. 심야곱가 콜호즈 회장으로 신망이 많았다. 1932년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두 번째 연해주 Облаеком(오블라예꼼) 책임서기로 있을 때부터 기관에서 임표를 자주 불러 가는 일이 있고, 하바로프스크 정치부에서도 자주 부르는 일 있다고 하더니 한 때는 하바로프스크에 구금되었다가 놓치고, 또 그 후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에 구금되었다가 놓쳤다고 하며 임표를 빼앗겼다고 하더니 여러 번 그러다가 어디로 정배 보냈다는 소식을 들을 뿐이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와 하바로프스크에서 서로 주고받고 하는 틈새 끼운 것이다. 그렇게 만드는 틈에 걸리면 임표 하나 뿐만 아니라 임표 백이라도 못 견딜 것이다. 그런 조짜 문건 재료를 만드는 기술자들은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신임하는 자들이다. 조선과 연해주에서 주고받고 하는 이야기나 편지들이 얼마든지 그렇게, 이렇게, 저렇게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임표는 전쟁에 공도 있고 신분도 좋은 이다.18. 박경철은 북선 평북 의주군 출생이다. 일찍이 간도 명동학교 교원으로 있었고, 1919년 3·1 운동 후 간도 “국민회” 군인 1중대를 홍범도가 영솔하게 될 때에 “국민회”에서 박경철을 홍범도 참모장으로 임명하였다. 불과 며칠에 박경철은 의견이 불합하던지 홍범도 중대에서 탈퇴하여 훈춘 상부 산촌 “신민단” 군대에 와서 한경세, 신우여, 이승조 등과 같이 일하다가 1920년 9월에 이승조가 “신민단” 군대 일부대를 영솔하고 연해주 빨치산 지대로 이동할 시에는 박경철은 이승조 부대의 참모로 종군하였다. 그래서 안우치나, 수청, 흥더자, 수주허로 군대와 함께 빨치산 운동에 한창걸 부대와 합동하여 안수청 빨치산 운동 지도자들 강백우, 정재관 등과 함께 적극 분투하였다. 마지막 이와노브까 전쟁에는 박경철은 사령관으로 지휘하였다. 원동해방 후 박경철은 학교교원으로 있다가 중앙아시아에 거주제한을 받았다.19. 이중집은 북선 함남 원산 출신이다. 일찍이 간도 소영자학교 교원으로 있었고, 1919년 3·1운동 후 연해주에 와서 “한인사회당” 군대 솔밭관 부대에 군정위원으로 있었다. 신우여, 한경세 등이 “신민단” 훈춘지방 부대와 무기를 가지고 솔밭관에 와서 이중집 부대와 합세하였다. 마적 침입과 백당 충돌과 일본 군대 출동에 (솔밭관은 일본군 대대부가 주둔한 뿌질노브스크에서 멀지 않다. 그래 범의 굴 앞에 있다고 자랑하였다) 여러 번 위험처지에 있었다고 한다. 마지막 원동이 숙청되고, 무장해제하는 시기에 1922년 9월28일 이중집은 대표로 안우치나 Пшеница(프셰니짜) 소집 "군정의회"조직에 참가하고 솔밭관 군대를 김규식 총사령에게 맡기게 하였다. 이중집은 김규식이 중동선에서 반동자인 줄 환히 알면서도 총사령 위임을 반대하지 않고 더구나 자기 빨치산 부대를 백당 김규식에게 주어서 러시아 농촌으로 돌아다니게 하였다. 신우여, 한경세 등은 이중집 의견행동과 반대로 김규식 총사령의 명령과 행동을 부인하고 니콜리스크에서 벌써 무장해제하고 차거위 고려인 소작 농민촌에서 해제군인 백여 명을 데리고 앞으로 생활 선후책을 토론하는 시기인데 김규식은 무장부대를 데리고 러시아 농촌을 돌아다니다가 무죄한 농민 4명을 총살하고 탈주하였다. 이것이 Пшеница(프셰니짜) 안창걸, 안동백, 최호림 등이 한가지로 같이 한 일인데, 이중집 개인의 범죄도 있는 것이다. 때 아닌 시기에 군사회를 조직하고 반동분자에게 군인을 넘겨주는 일이 옳지 못한 것을 알면서도 Пшеница(프셰니짜) 세력에 팔린 것이다.20. 한경세는 훈춘현 상부농촌 사람이다. 교육사업에 전력을 다하여 일하던 사람이고, 그의 부모, 형제 다 애국주의자들이고 교육에 열성자들이다. 1919년 3·1운동 후 한경세 거주 농촌은 독립군의 무장준비 지대이었다. 한경세는 “신민단” 군대 훈춘 부대 지휘자이었다. 일본 군대 간도 토벌시에 한경세의 부친과 윤락세의 부친은 일군의 총창에 사망하였고, 주택과 학교는 소화되었다. 연해주 수이푼에 넘어와서 솔밭관 부대와 합세하여 원동 숙청시까지 투쟁하다가 무장해제 후 중령으로 돌아갔다가 중동선에 반동자 김규식에 암살당했다고.21. 신우여는 훈춘면 경신향 사람이다. 출생은 북선 경흥군 웅산동 어업 가정이다. 교육운동에 열성자이다. 경신향 금당촌학교와 청년교육에 힘썼다. 1919년 3·1운동 후 선봉대로 “신민단” 후춘구역 부단장으로 청년운동과 무장준비에 주야불구하고 열성적으로 경신향 일대와 후춘 상부지방까지 활동 성적이 많았다. 그래서 1920년 일본군의 토벌에 경신향 일대 “신민단” 동정자와 일꾼, 적극분자 18명을 금당촌학교에 모아다가 총창으로 찔러 학교 강당에 밀어 넣고 석유통을 부어 불 질러 죽였다. 그래 경신향 청년은 다 빨치산 군대로 합동하여 마지막까지 분투한 자가 다수이다. 지금 살아 소비에트 공민으로 생활한다. 더하면 김봉세, 유문관, 김옥진, 김응만 등이 신우여와 한 동리 사람으로 같이 분투한 사람들이다. 신우여는 해제 후 Новокиевск(노보키예브스크)에서 병으로 죽었다.22. 이승조는 북선 함북 온성군 출생이다. 일찍이 직조업 하다가 그 후는 제화공인이었다. 1919년 3·1운동에 직업을 폐하고 독립군 조직운동에 열심하였고, 열길현 상부 묘을거위구역 “신민단” 부대의 선봉대이었다. 묘을거위 사관학교 경리부 주임으로 있다가 지대가 불리함으로 이용 동무와 전후하여 부대를 데리고 연해주로 이동하게 되었다. 이동하는 길에 훈춘상부 “신민단” 부대 무장준비소에 와서 무장을 하고 연해주 와서 혈성단 군대와 전투하여 수청 가서 마지막까지 올긴스크 전쟁, 기타 각방 빨치산 운동에 고상준 동무와 같이 누구보다도 가장 열성적으로 성과적으로 일 많이 한 이승조 동무이다.23. 박일리야(박윤천)은 두만강 연안 녹등촌 입적 농호의 고용농군의 아들이다. 그 촌 학교에서 공부하였다. 장성하여 아물주 니콜라이스크 지방에 가서 나나이스크 마가이촌에서 소학교 교사 노릇하다가, 1917년 시월혁명 운동 소문을 듣고 따라서 1919년 3-1운동 조선독립 선언을 듣고 교사하는 일을 그만 두고 혁명의 길에 나섰다. 어장, 광산에서 노동하는 고려 노동자를 모아서 군대를 조직하여 가지고 우선 로서아(러시아) 빨치산 운동에 참가하고 조선독립운동에까지 참가할 목적으로 활동하였다. 마침 1920년 뜨레픠진 군대가 니콜라이스크를 점령하고 일본 군대를 박멸할 때에 고려 빨치산 군대 박일리야 지도하에 참가하였다. 그 후 일본 함대의 공습에 저항치 못하여 흑룡주 마사노프스크로 이동하여 왔다가 오하묵 "국민의회"군대 토벌에 무장해제 당하고 우수문, 이르크츠크 감옥에 군인들은 구금당하였다. 그때 자유시 토벌에 박일리야는 붙잡혀 자유시 산념에 철창집에 가두었는데 간수병이 밤에 박일리야와 같이 도망하여 흑룡강을 넘어서 중국땅으로 피란하여 다니다가 이만전쟁 당시에 중국 흑룡강성 요하현으로부터 어리진갈도로 동무들을 데리고 왔다. 그래 중국 땅에 흩어진 군인들을 다 불러다가 무장시켜서 밋낀전선부터 참가하여 “인”까지 “인”에서부터 연해주까지 원동해방전쟁에 참가하였다. 박일리야는 하바로프스크부터 부리아물주 "군정의회" 전권위원으로 고려 빨치산 군대 참모부위원으로 마지막까지 자기 책임을 잘 근무하였다. 1923년부터 원동 변강 지방에서 정치부와 검사부에서 보조일꾼으로 일하다가, 1935년 김아파나스, 홍도, 김미하유, 김진, 장도정, 이규선, 장범태 등과 함께 잡히어 감옥살이 하다가 그 사람들과 다 같이 부지거처이다. 지금도 소식을 알지 못한다. 죄는 상해당파라고, 패당장이라고, 일본 정탐이라고 만들어 놓은 거짓말 무소 구실에 걸린 모양이다. 이것이 연해주 소비에트 원동에서 고려인 일꾼들 검열하는, 청산하는 마지막 시기였다. 김아파나스는 슈마츠키 명령에 정배갔던 사람, 보세트구역 당비서로 일하다가. 홍도는 상해당 대표로 국제당에 갔던 사람, 조선 감옥에 갇혔다가 보세트신문사에서 일하다가. 김미하유는 상해당 창립대회에 대표로 갔던 사람, 손야선 솝호즈 지렉토리로 일하다가. 김진은 이르크츠크 당대회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갇혔던 사람, 보세트 구역에서 일하다가. 장도정은 Шумяцкий(슈마츠키)당대회를 반대하다가 감옥에 있던 사람, 수찬이구역 당비서로 있다가. 이규선은 이만 군대 전투부대 군정위원으로 끝까지 일한 사람, 수이푼 구역 엠.떼.스. 콜호즈 지도자로 일하다가. 장범태는 모스크바 꾸틉의를 공부하고 보세트구역 청년회에서 일하다가. 또 김아파나스·김미하유는 17차 당대회 대표로 참가하였다. 다시 말하면 박일리야는 자유시 감옥에서 도망하였다가 빨치산 전쟁에 참가한 사람으로 하바로프스크시 검사부에서 일하다가. 이후에 기록한 사람들과 동시에 검거되었다고 한다.1935년부터 1937년 이민할 때까지 양년 반 동안에 연해주 고려인 사회는 아주 청산 파탕되는 시기이었다. 원동해방 후 근 15년 동안 일본 고등정치국은 어떻게 하든지 연해주 고려인을 나쁜 사람으로 만들어서 소비에트 나라에 신임을 얻지 못하도록 하자는 것이 과업일 것이었다. 그래서 예를 들면 철로 파괴, 기구를 주어서 몇 사람씩 연해주로 보내어 고려인 농촌을 돌아다니게 한다. 그 놈들은 철로 파괴보다도 돌아다니는 명령을 꼭꼭 실행하게 한다. 그러다가 붙들리면 돌아다니던 사실이 다 폭로된다. 그렇게 고려 농촌을 의심스럽게 만들고 또는 편지를 우편으로나 사람을 보내며 수다한 편지를 각 처 사람에게 전하라고 한다. 무식하고 어리석은 여자나 남자를 시켜서 그러면 그 편지에 걸린 사람은 의심받게 된다.이렇게 사람 보내는 일, 편지 보내는 일을 쉴 새 없이 일본놈들은 하는 법이다. 이것이 연해주와 조선의 국경관계를 복잡, 혼란케 하는 것이다. 그리고 근 15년 동안 연해주 기관에서 각 부문 : 당, 소비에트, 내무부, 출판, 교육, 기타 고려인 관계에서 일하는 사람은 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신임하고 등용한 사람들이다. 그래 『간화회』 회장이나 서기하던 사람들도 다 사용하여 책임일 시키고 『연해주교육회』서기, "국민의회"비서장으로 관광단을 데리고 총독을 면회하고 교육비 3십천을 받아가지고 조선도시를 돌아다니면서 총독정치를 찬성하던 사람들도 교육고급학교에 등용하여 쓰는 일 등등이고, 자유시 토벌자들이나, 김규식 연해주 총사령인 "군정의회"위원들 다 큰 책임일꾼으로 사용하는 그런 판단에 잘 된 일이 있을 수 없는 것이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의 정치는 소비에트 국가에 유익을 주지 않았고, 고려인민에게는 패망을 주었다. 이 책임은 고려인 "국민의회"와 Шумяцкий(슈마츠키)와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용서 못할 책임을 지는 것이 옳다."국민의회"와 이르크츠크당은 둘이 아니다. 하나이다. 한 사람이 두 가지 이름을 가진 것과 마찬가지이다. 또 한 가지 예를 들면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고려인 사범대학 교장은 오표돌은 자유시 토벌대장 오하묵의 동생이고, 교사는 오창환 등이다. 오창환 "국민의회"서기장으로 『연해주교육회』(친일문화운동단체) 서기를 겸하여 가지고 관광단 단장으로 조선총독을 방문하고, 보조금 3만원 받아가지고 와서 연해주에서 활동하던 자이다. 사범학생 수백 명이 꼼짝 말못하고 있었다. 변적하면 출학하고 감옥을 무서워서 그 뿐인가? 어느 기관이든 주무자는 그 사람들이니 꼼짝달싹 할 수 없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최후 원동고려인 사회가 마지막 시간에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중앙에서 불리워 모스크바로 들어오고 Пшеница(프셰니짜) 깜반이 고려일꾼들 : 김하석, 최고려, 한명세, 김기룡, 오표돌, 문창범, 채동순, 최호림, 남만춘, 한성걸, 임호, 오창환 등등은 다 원동감옥에 몰아넣었고, 일만 주민은 원동 정거장마다 모아다가 열차에 실어 이동하는데, 집에서 떠날 때 혹은 정거장에 오는 길에서, 혹은 열차 떠날 시에 차에서 붙잡아 내린 자가 수천 명이라고 한다. 이것은 마치 무엇과 같으냐 하면 큰 나무가 몸뚱이 속이 썩어서 넘어질 때에 그 곁에 잔 나무들이 생생하지만 썩어서 자빠지는 큰 나무 밑에서 상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러하다. 한창걸은 최후 마지막 사람으로 붙잡히어 구금되었다는 소문도 있고, 유태인 자치구로 도망갔다는 소문도 있는데 하여튼 한창걸은 혁명자는 아니다. 자기 소속하였던 수청 빨치산 군대가 무장해제할 시기에, 왜 안우치나 "군정의회"를 조직하는데 참가하였으며, 김규식 반동행동을 만들어 주었는가? 그리고는 원동해방 10주년 기념 고려신문 『선봉』에 그 "군정의회"를 자랑하였고, 그 군정위원 최호림이와 같이 자기들 특호신문을 내었는데 크라이 변강 정치부에 있으면서 조심 없이 반혁명 군정의회를 사진박아 광고하는 일이 무슨 일인가?(1932년 시월 기념호 『선봉』신문) 그리고 근 15년 동안 변강, 연해주 정치부 일꾼 전권위원으로 있으면서 사람들 허물을 얻어 보느라고 하면서 어찌하여 자기 동생 한성걸이 일본간화회회장 서기로 오래 동안 일한 것은 상관없는가? 당원으로 큰 책임일까지 하게 하는 것은 창피한 일이다. 혁명적 의리는 부모형제간 의리보다도 더 큰 것이다. 그러니 한창걸은 다년 정치부 사업에 공정하지 않게 일하였다고 말할 수 있다. 공정하지 않게 일하였다면 한창걸이는 Пшеница(프셰니짜)의 특별 보조원 노릇을 하였을 따름이었을 것이다. 고려인 질서 문란자의 책임이 있다.자유시 감옥에서 박일리야가 도망할 때의 큰 사변이 있던 것과 마찬가지로 하바로프스크 감옥에 박일리야가 들어가자마자 연해주 고려인 사회에 큰 사변이 발생하였다. 그래서 박일리야의 사실을 말할 적에 연해주 고려인 큰 사변 사실을 대강 말하게 되는 것이다. 자세히 말하자면 너무 많아서 간단하게 대강만 말한다는 것도 이렇게 길어진다. (1917년 혁명 후 원동고려인 역사를 1937년까지 명백히 아는 사람이 많은가?)24. 한무학은 부리아물주 고용농군의 가정 출생이다. 어장, 광산, 농촌 노동자로 다니면서 문맹퇴치는 한 사람이다. 박일리야 군대에 있다가 자유시 토벌에 피신하여 몇 동무들과 함께 흑룡주 농촌에 도망해 다니면서 노동하면서 도망한 동무들을 자주 심방하여 모아가지고 “인”전선에 왔다. 그래 한 중대를 편성하여 중대장으로 그 전쟁에 분투하였다. 무장해제 후 자기 중대와 다른 동무 지원자를 데리고 자기 있던 농촌으로 가서 농업조합을 조직하고 생활한다고 한다.25. 장기선 - 장철(장해우) 부자는 북선 북청군 출생이다. 붉은 빨치산, 부친 장기선은 수청 빨치산 군대에, 아들 장철이는 리만 빨치산 군대에 와 군수품, 양식 공급 부장으로 성실하게 일하였다. 부자 각각 자기 부대와 같이 무장해제 후 부친 장기선은 연해주에서 사망하였고, 아들 장해우는 중령 만주와 조선에서 비밀조직, 당사업 하다가 검거되어 만주감옥, 조선감옥에 수삼 차 15년 이상 징역하였고, 지금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육·해·공군 후원회 위원장으로 근무하고 있다.26. 김태준 - 김병하 아비와 아들이 붉은 빨치산 선봉대이다. 부친 김태준은 풍범선 항해술이 능숙한 사공이다. 그래 “한인사회당” 빨치산 군대, 공급운반선 선장으로 일하였다.(3000부대 용적목선) 군수품, 무기, 양식, 의복, 군인수송 등 모든 운반사업에 밤낮 가장시키고 비밀행동으로 항행하는데 퍽 위험도 하고 곤란도 하였다. 수청지방 연안으로 와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건너로도 자주 다니게 되었다. 체코 군대에서 무기탄약, 폭탄 등을 구매하여서는 각 곳으로 비밀히 공급하느라고 풍범선의 역할이 컸다. 그 배안에 일꾼들이 앉아 다니면서 선전문 인쇄하는 일, 채소 실어가지고 파는 일 퍽 복잡하였다. 가장시키고 이삼 년 동안 일하다가 비밀이 발각되어 풍범선은 일군이 소화하였고, 김태준 동무는 일군에게 총살되었다. 아들 김병하는 1919년에는 조선으로 폭탄수입 운반하는 일에 종사하였다. 강우규 남대문 재등(사이또)총독을 포격한 것도 김병하가 운반하였다. 1920년부터 수청 꼬따위방면으로 빨치산 운동에 김정하, 김영하 등과 연락 활동하면서 아니시모브 군대와 합작전투도 많이 하였다. 아니시모브 동무가 전망한 후에도 그 군대와 합작운동을 계속하였다. 그래서 김태준·김병하 아비와 아들이 다 희생적으로 빨치산 운동에 종사하다가 부친은 일군에게 학살당하고, 그 아들 병하는 해제 후 교육사업에 근로훈장도 하고 지금도 교과서 출판사업에 근무하고 있다. 김태준 부자는 북선 함북 경흥군 사포항 출생이고, 김병하는 명동중학교 출신이고 소련에서 사범대학 고려과를 필하였다. 지금 모스크바 교육성 출판부에서 일한다.27. 김립은 북선 함북 명천군 출생이다. 일찍이 서북학회 청년운동에 선봉대로 활동하였으며, 간도 교육운동에 선도자이며 간민회를 조직하였고, 광성중학교 나자거위 사관학교 창립자이며, 1918년 하바로프스크 한인협회 발기자로 “한인사회당” 창립자 중 한 사람이고, 적위군 군대 조직자 한 사람이고, 1918년 8월 하바로프스크 백당 가메꼬브 반란시에 김쓰딴게비와 적위군대와 함께 항전하다가 김알렉산드라 쓰딴게비츠는 희생되고, 김립은 적위군대와 같이 퇴각하였다. “한인사회당” 선전부 위원으로 상해에서 신문 『효종』, 잡지 『공산』을 발간하였고, 공산당 선언 번역하였고, 중국, 안남(베트남), 대만, 동아동맹으로 잡지 『평-평』을 발행하였고, 고려공산당 창립대회 소집자의 한 사람이고 고려공산주의 선전사업에 첫 사람이고 적위군 조직과 적위군과 같이 백당과 전투한 자의 한 사람이다. 상해에서 1922년 초에 반동파에게 피살되었다. 이전의 김옥균이 상해에서 한국정부 간첩 홍종우에게 피살되었는데 김립은 상해 소유 임시정부 반동파에게 피살되었다 한다.28. 이동휘는 북선 함남 단천군 출생이다. 일찍이 사관학교를 필하고 군관으로 강화 참령으로 있다가 사직하고 그 후는 신교육 운동에 전문으로 활동하면서 서북학회의 교육선전원으로 적극 분투하다가, 전도에 정배도 여러 번 갔다 왔고 교회일꾼의 이름을 가지고 활동하다가도 취체 때문에 망명하여 해외에서도 교육장려에 다년간 분투하였다. 간도 교육계에서 나자거위 무관학교에서 1918년 한인사회당 조직에, 적위군 조직에 김립이와 김알렉산드리아와 함께 분투하였으며 상해 임시정부총리로 임시정부는 그만 두고 혁명위원회란 제안이 부결되니 탈퇴하여 사회운동에 헌신하여 고려공산당 창립대회대표, 연합대회대표로 국제당에 두 번 갔다 왔다. 1918년부터 “한인사회당” 의장으로 원동 빨치산 운동 조직의 주창자이다.원동 소비에트 주권 수립 후에 “모쁘르” 일꾼으로 지방으로 돌아다니면서 일하다가 늙은 몸으로 풍한서습에 병들어 사망하였다. 29. 김일수는 북선 함남 이원군 출생이다. 1919년 3·1운동 시기에 장백부 “군비단” 청년 선봉대로 활동하면서 “군비단” 군대 전부가 연해주로 이동하여 “한인사회당” 군대와 합동하기로 주장하여 선발대로 이만에 이동하여 왔다. “군비단” 군대가 전쟁할 때에는 경리부 중대장으로 마지막까지 악전고투하였다. 필요한 시엔 대대부관으로도 일하였다. 가장 열성이 많은 빨치산 동무 중, 더욱 열정분투하는 동무이었다. 무장해제 후 빨치산 동무들을 데리고 어업조합에서 일하다가 그것도 이만 군대를 미워하는 자들의 방해로 인하여 여러 해 동안 계속할 수 없었다. 그래서 동무들 데리고 만주와 조선으로 비밀조직 당사업에 종사하다가 여러 동무들이 감옥, 징역, 병으로 죽은 자도 많았거니와 살아있는 동무들도 많았다고 한다. 김일수 자기도 십여 년 감옥생활 하다가 지금은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 사업성에서 일한다. 1956년 말 57년 초에 사법기관 대표단에 소련으로 오는데 조선에 있는 이전 빨치산 동무들의 부탁을 받아서 이만전쟁 희생 영웅 한운룡 중대장, 군인 48명의 긴 무덤을 방문하고 갔는데 이만 소비에트 기관, 당기관 모든 대표들과 시민들의 추도회가 있었다고 한다.30. 안무, 김철 등은 자유시에서 무장해제 토벌에 자기들이 영솔하고 왔던 간도 “국민회” 군대는 감옥과 나겔이에 보내고, 자기들은 두만강 연안에 다시 돌아가서 운동하다가 안무는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죽고, 김철은 만주 감옥에서 죽었고, 최진동은 자기 부대를 자유시에서 잃고 Шумяцкий(슈마츠키)에게 환영받으면서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만주 자기 전토에 돌아가 있다더니 나이 모자라 죽었을 것이고, 이청천은 자기 영솔하고 왔던 80명 군인은 오하묵의 토벌에 주고, 모스크바까지 갔다가 돌아나가서 만주에 있다가 1945년 후 남선에 가서 날마다 술먹고 있다는 소문이 자자할 뿐이었다. 나는(김백추)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과 사실을 기록하고, 회상하는데 주관적으로 아니고 제삼자의 객관적 견지에서 비판적 이해를 붙이어서 솔직하게 서술하였을 뿐이다. 이제는 남에 대한 사실 이야기를 그만하고 자기 사실 이야기를 아니 말할 수 없다.31. 김규면(김구린-김백추)은 북선 함북 경흥군 두루봉촌 출생이다. 일찍이 서울 국립사범학교, 사관학교 속성과를 공부하였고, “신민회”회원으로 신교육 운동에 참가하였고, 1910년부터는 교육 자유도 없기로 예수교회에 입참하여 교사로, 목사로, 교육 장려에 적극적으로 힘써 보았다. 교회 안의 교육도 서양 영·미(영국·미국) 선교사들과 같이는 자유로 할 수 없었다. 기도니 찬송가니 성경말씀이니 하는 미과학적 객담으로 시간을 허비하게 되고 또는 천만수상한 허무잡담의 논리를 분간성이 약한 학생들에게 주입하는 것을 절대 못할 일이다. 그래서 김규면 창의로서 독립교회를 선언하는데 찬동자 내외지에 300여 교회이고 인원으론 불과 3만여 명이었다. 노약을 제하고 좀 의식있는 사람 2, 3백 데리고 김규면은 독립교회 감독으로 행세하면서 전조선 예수교회 독립운동을 하려고 힘써 보았다. 얼마 안 되어 총독부 포교규칙이 발표되었다. 이 규칙은 교회일꾼 목사로부터 매서인까지 다 총독부 승인받은 자로서만 일하게 하였다. 그때 영어선교사 원두우(언더우드)· 기일(게일) 기타는 총독부 규칙을 복종하고, 총독부에 행사하였다. 영어선교사를 반대하고 교회독립운동 할 좋은 기회이었다. 그러나 만일 조선인 독립교회가 성립된다면 총독부에서는 더 좋아할 것이다. 꼭 목을 쥐고 저희 마음대로 하겠으니, 그래 그만두고 그 독립교회 기초에 근거하여 “신민단”을 조직하고 민족혁명운동을 목적하고, 조선민족독립운동에 적응하려고 “신민단”의 임무를 세운 것이다. 그래서 군자금 모집과 군인 동원에 힘껏 많은 준비하였다. 그러다가 1919년 2월 8일 동경학생운동(2·8독립선언)과 1919년 3월 1일 독립선언운동(3·1운동)에 전민족이 동원되는 시기에 본래 “신민단” 강령, 목적이 신조선의 신민이 되고, 신세계의 신민이 되자는 것이다. 그래서 세계혁명, 막스주의적 집단인 “한인사회당”에 합동하여서 공산주의 혁명운동선에 입각하였다. “신민단”이 “한인사회단”과 합동한 후, 김규면은 “한인사회당” 부의장으로 겸 군사부 위원장으로 일하면서 전쟁시엔 고려 빨치산 군대 “군사위원회” 위원장으로 부리아물주 “군정의회”전권위원으로 전선, 후방, 조직, 지도를 총주관하였다. 1920년 국제당(국제 공산당) 제2차 대회선언서에 한인사회당 대표로 서명하였다. 1921년 6월 자유시 사변(자유시 참변) 임시에 흑룡주 노문신문 『Волна(볼나)』에 김규면은 일본 육군대학을 공부하고 일본장교로 일하다가 지금은 군사정탐으로 다니다가 지금 흑하 감옥에 붙잡아 있다고 급히 총살할 것이라고 대서특서로 기재하였다. 그 신문광고 이튿날에 “국민의회” 외교부장 김기룡은 흑하 당국에 교섭하기를, 김규면을 “국민의회”에 넘겨달라고 조선사람들에게 광포하고 총살하겠다고 하니 흑하 당국에서는 대답하기를, 당신들 국가도 독립 못 되었는데 치외법권은 언제 가지었는가하고 그런 비법적 요구는 거절한다고 하니, 김기룡은 부끄런 줄도 모르고 가더라고 하였다. 아, 그때에 김규면에게 중앙금고 금화가 3만원이 물적 증거 있고, 국제당 선언에 대표로 서명한 것이 있으니까 물론 어떤 사람인줄 알 수 있지만 만일 그런 증거가 김규면에게 없었다면 “국민의회”에서 『Волна(볼나)신문』에 기서한 것이나, “국민의회” 외교부장 김기룡이 넘겨달라고 청구한 것이나, 흑백을 모를 것이다. 소위 “국민의회”로서 그런 협잡증거를 꾸며 만들었으리라고 판단할 수 있을까? 아는 사람은 안다. 투기업자들, 협잡꾼들, 문창범 같은 험악한 무리들은 얼마든지 그런 거짓 증거,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김규면은 원동전쟁 필한 후 1923년에 상해에 가서 중국노동자 파공운동에 참가하고 북벌전쟁에 동무들을 동원시키고, 1927년 장개석 반동에 밀려 소련으로 돌아왔다.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책사에서 동양서적 판매원으로 입사를 하면서 빨치산 꼼미씨의 일을 도와 주었다. 1939년 연해주 Обласхая(오블라쓰꺄) 제1차 꼰페런치야에 김규면은 빨치산 꼼미씨야 축하단으로 출석하였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는 누군가하고 물어서 김규면인줄 알았다. 며칠 후 빨치산 꼼미씨야 동무들이 말하기를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너를 가두자고 한다. 1921년부터 붙잡자는 김규면이를 만났다고 기뻐하더라고 한다. 그 후 며칠 후 빨치산 꼼미씨야 동무 말하기를, 너를 보는대로 붙잡으라고 하바로프스크, 이만, 니꼴리스크, 해삼위(블라디보스토크), 흑하, 각 지방에 이전부터 다 통지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친한 동무들은 김규면을 연해주 Пшеница(프셰니짜) 세력 범위 안에 있지 말고 다른 지방으로 가라고 권하였다. 그래서 병치료도 하고 그 지방을 떠나려고 하니 빨치산 꼼미씨야에서 굴올트뿌좀끼도 얻어주고, 여비도 도와주니, 산아도리 사마라에에 와서 치료하다가 다시 크림 가서 치료한 결과 다시 모스크바 굴올트로기(병원)에 몇 달 치료하여 차효를 좀 얻었다. 그때는 1934년이다. Красио Кфд Красно(크라씨오 케에프데 크라스노) 빨치산 원동동향회에서 김규면의 뼌씨를 호다따이하여 뼌씨를 타게 되니 원동으로 나가지 않고 모스크바에 있으면서 원동 고려인민, 중앙아시아로 이주하는 소식을 들었고, 중앙아시아를 가서 보지도 못하였다. 그러나 소식을 자꾸 듣고 중앙아시아 와서 생활하는 사람들을 자꾸 만나 보게도 한다. 무엇보다 고려 콜호즈마다 노역 영웅이 수십 명씩 적어도 5,6인씩 콜호즈마다 없고, 또 고급 교육대학, 전문학교, 기술자, 기사가 남녀 한 콜호즈에 7,8십 명, 4,5십 명씩 있다고 한다. 내 마음 속으로 기쁘다. Пшеница(프셰니짜)가 없고, Пшеница(프셰니짜) 깜반이 없으니, 앞으로 점점 더 잘 될 것이다라고.첨부기록 “김백추 필기”에서원동해방전쟁 5개년 동안에 고려인 빨치산 부대들이 참가한 전쟁 지점들 :1. 수청연안의 지방 : 우지미, 철산동, 석탄광(강가우재) 여기서는 마적 부대 코산파 7백 명(700)과 동해승패 3백 명을 토벌하는 전쟁(1920년 여름)에 고려 빨치산 부대(창해 소년단) 사령관은 김경천· 그 토벌에 우리 부대 분대장 김별철이 전쟁에서 희생하였다. 올긴스크 1921~1922년 큰 전쟁 이 두 번에 임한준 대대가 참가하였다. 그 전쟁에 우리 중대장 신용걸, 소대장에 김식과 군인 27명이 전사하였고, 부상자 수십 명이었다.쓰고스따위 이 전쟁에는 러시아 빨치산 부대 지휘관(사령관, 아니시모브가 전사하였고, 고려 빨치산 부대는 김병하 부대 70명(칠십명)이 참가하였다.이와노프스크 전쟁에는 박경철, 이승조 부대가 참가하였고, 김정하 부대도 참가함.2. 수이푼 연안의 지방 : 자피거위, 십여창, 솔밭관, 복다브스크 이 지방에서는 마적단과 일본 군대의 습격에 수삼차 전투한 것인데, 혈성단 부대와 독립단 조맹선 부대와 솔밭관 이중집 부대와 신민단 부대들이 연락 합작하였다. 군대 지휘자들은 사령장 채영, 참모장 김청남, 기병대장 신우여(1919년 하반기부터 1920년 하반기까지) 3. 우수리 연안의 지방 : 우수리, 모로베오, 이만, 구베리스크, 미낀, 어르잔깔도, 야심미스크, 크라스노, 에레찌까, 블라지미르스크4. 아물주 연안의 지방 : 하바로프스크, 복끄로프스크, 볼로차엡스크, 올니곡드, “인”, 니골나엡스크 등등 지방이다.1921~1922년 외 전선은 우수리서부터 “인”까지는 후퇴하면서 방어전이었고, “인”에서부터 볼로차엡스크의 공격전으로 백파 군대를 격파한 때부터는 연해주까지 질서를 회복하면서 추격전이었다.이 전쟁 방어전과 진공전과 추격전에 “고려의용군” 군대가 원동 국민군대와 합동하여 해방전쟁에 희생분투하였다. 이 “고려의용군” 군대의 편성부분은 : 이만 군대, 다반 군대, 군비단 군대, 적기단 부대, 간도 국민회 부대, 신민단 부대 합동편성된 것이고 또는 자유시참변에 우수문나게리에 갇혀 있던 팔백여 명(800)부대를 풀어 놓아서 “고려의용군” 군대에 편입시키었다. (2800명 속에는 박일리야 부대, 의군부 군인, 홍범도 군인, 안무 군인, 다반 군인, 이만 군인, 박그레고리 군인, 채영 군인, 기타 독립군 등이다)이 “고려의용군”군대는 “고려의용군사위원회”의 제도하에서 원동혁명 국민군대와 합동연락 동작하면서 전투하였다. 그리고 고려의용군사회위원장 김규면(김백추)은 “브리아물주군사 소비에트”의 전권위원으로 책임을 겸하고 일하였다.따로 지적할 것은 하바로프스크 시가전과 КрасНа реука(크라스나 례우까) 전투는 1918년 8월의 가마꼬프 백파와 악전고투한 한인사회당 군대는 반수 이상의 사상을 내고 다반으로 퇴각하였다가 고려의용군대에 합동하였다.니꼴나이엡스크 전투는 1920년의 뜨레프진의 부대가 니꼴나엡스크를 습격하여 일본 군대 7백(700)여 명을 멸진하고 백파 질서를 소탕할 적에 고려인 빨치산 군대 조직되었는데, 그 조직자의 한 사람은 박일리야였다. 그 후 자유시사변(자유시참변)에 박일리야는 감옥에 도망하였고 군인들은 무장해제당하고 우수문 철창에서, 기타는 아물주 농촌에 있다가 “인”전선 전투부대에 편입되어 끝까지 백당군과 싸웠다.

    1953 "「李東輝」|| 『在外排日鮮人有力者名簿』(1920)"

    < 이름본적현주소연령친족관계신분직업전 관직용모특징 정명 대자유, 이동휘(李東輝), 정호 모산(茅山), 별호 성제(惺濟), 성제(誠齊), 성참(誠參), 이광(李光)함북 성진목릉현(穆陵縣) 입면장(入面長)43(대4)이승교(李承喬)의 아들참●

    1954 "「李東輝」|| 『國外에서의 容疑朝鮮人名簿』(1931)"

    < 이름별명(別名)출생 년월일거주지본적적요(摘要) 이용영(李用永)메이지 40년함경남도 정평군 춘유면 광흥리정평군 춘유면 유중리사건 관계자로 소화 5년 이래 도주 중의 자 이용남(李容南)메이지 41년함경북도 성진군 학중면 송하동소화 7년 성진 농민조합사건에 관계되며 치안유지법 위반 피의자로 되어 검거를 받았으며 도주 중의 자 이용희(李容姬)이소정(李小丁), 이소성(李小星)당시25세(소화 7년)경상남도 창원군 웅남면 월임리조선공산당 조직계획사건 관계자로서 도주 중의 자 이용만(李容滿)당시20세(소화 7년)함경남도 고원군 상산면 신흥리110소화 7년 2월 경성 제1고보치안유지법 위반사건 관계자로서 도주 중의 자 이은호(李殷壕)이경산(李景山)메이지 37년 11월 21일상해평안북도 강계군 종남면 장평동병인(丙寅)의용대원 이동휘(李東輝,特)성제(惺濟), 성제(誠齊), 성참(誠參)메이지 5년 6월 20일노령 블라디보스톡 신한촌함경북도 성진군 성진면 욱거리대정2년 간도에 이주하고 대정 7년 チタ에서 고려공산당을 조직하고 그 후 상해가정부에 투신하여 대정 8년 군무총장으로 대정 10년 국무총리로 취임하였으며 대정 12년 플라디보스톡 고려공산당 충재였으며 소화 6년 6월 원동변강 고려 모부르(モーブル) 책임간부로 임명되어 활동을 계속하고 있다 이영달(李英達)길림성 밀산반일회 중대장 이영활(李英活)길림성 밀산부근반일회원

    1955 "「李東輝」|| 『在露鮮人排日運動根禦方에關한照會』(1915)"

    …(원본판독불가)…

    1956 遺疏(1905.12)

    엎드려 고하건대 신이 재능이 부족하고 배움이 짧아 초야에 묻혀 지내면서 남들에게 견줄 만한 것이 없습니다. 다만 임금님의 두터운 은혜를 입어 군대를 인솔한 지 8년간 나라를 지키는 묘책을 하나도 내지 못한 채로 공연히 나라의 녹만 축냈습니다. 이에 올해부터 본직을 물러나 강도(江都)에서 교육 사업에 종사하면서 이것으로 나라의 은혜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코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지난 달 중순 동쪽에서 나쁜 소식이 들려와 더 이상 시골에 심상하게 있을 수 없어 앞서거니 뒤서거니 하면서 입성하면서, 다만 이 시국에 신하의 마땅한 도리를 하고자 바랄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오래지 않아 나라가 잘못되어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폐하 일이 이미 끝났습니다. 그러나 신은 감히 한스러워 하거나 원망하지 않습니다. 다만 을사오적이 외적과 내통하는 것을 즐기면서 자신의 신분이 높아진 것을 기화로 삼아, 모두 알다시피…(원본판독불가)…선왕께서 정하신 우리 국토를 남에게 준 것에 임금께서 초개연하지 않은 것은 참을 수 있습니다만, 제가 참을 수 없는 것은 오히려 저들입니다. 폐하! 신하된 자에게 어찌 나라를 팔아먹겠다는 마음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날의 형세는 외적 군사들의 협박 때문이었다고, 또 난신적자들의 소행이었다고만은 말할 수 없습니다. 신하된 자로서 나라가 어려움에 처했을 때 죽음으로써 그 뜻을 지켜야 할 것입니다. 설사 그렇지 못한다면 그 죄를 어찌 면할 수 있겠습니까? 더욱이 성상께서 저 만족을 모르는 외적의 요구에 대하여 단호하게 거절하기로 결정하셨으니, 이제는 군과 신이 일체가 되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것밖에 없습니다. 만일 그렇게 하지 못한다면 그 죄를 어찌 면하겠습니까? 적들의 흉악한 심보가 여러 가지 방식으로 남김없이 드러났습니다. 그러니 하루 속히 올바른 조치로 그들의 사악함을 벌해야 할 것입니다. 폐하께서 일찍이 외적의 견제를 싫어하셨지만, 차마 벌하지 못하였더니, 나라의 부끄러움이 이미 심해지고, 온 국민의 공분이 어디까지 이르렀습니까. 만일 (을사)오적들이 신하된 마음으로 한발 물러나 자진한다면, 저들의 매국의 죄가 만분의 일이라도 속죄가 되겠지만, 오히려 그 속에서 더욱 날뛰면서 성상의 영명함을 가로막고 외적과 결탁하여 폐하를 상하게 하려 기획하였습니다. 이 오적들의 흉악한 기도는 나라를 파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 음모의 사악한 독이 이미 어디까지 스며들었을지 상상할 수조차 없습니다. 신이 억울하고 분한 마음을 이기지 못하고, 감히 이 두 손으로 이 목숨을 끊어, 불길이 더 번지기 전에 이 화를 막아 적들을 소탕하려 합니다. 다만 큰 행운이 조그마한 의로서 만회가 되어 앞으로 위험한 일이 없어지길 바랄 뿐입니다. 다만 지금의 상황이 부득이하여, 지금 폐하를 지척에 두고 일을 도모하는 제 심정 또한 눈물이 저절로 흐름을 주체할 수 없습니다. 다만 결단코 이 한 몸 죽음으로써 나라를 보존하려 합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 신이 죽은 이후, 하루 속히 오적의 무리의 목을 모든 형장에 달아두시어 천지신명께 감사하시고,…(원본판독불가)…저 거짓 조약을 거두어 들여 다시금 국권을 되찾으소서. 비록 신은 지금 죽으나, 다시 사는 날이 있을 것입니다. 신은 지금 매우 떨리는 마음으로 피눈물을 흘리며 목이 메이는 지경에서, 삼가 자결로써 아룁니다.

    1957 盧伯麟에게 보낸 서신(1920.4.13)

    계원(桂園)형, 우리 두 사람이 헤어진 지 얼마나 되었는지요. 또 나라를 잃은 한이 온 천하를 탄식에 빠뜨려 공적으로나 사적으로나 이 울적하고 답답한 마음을 떨칠 줄을 모르겠습니다. 하늘께서 우리 민족을 보우하시어 작년 3월 1일 2천만 동포가 일어났을 때가 동시에 우리들이 머리를 모을 때입니다. 또 해외로 망명한 이래 혹은 도처에서 방황하면서 우리의 숙원이 이루어져 온갖 고통을 씻어주길 고대해 마지않고 있습니다. 내가 충심으로 고하니, 2천만 형제, 자매들의 피가 온 서울을 적시는 날의 큰 책임은 모두 우리들에게로 돌아올 것입니다. 다만 출전하길 원합니다. 오늘날 의로운 명분으로 지원합니다. 감히 자신 있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우리들 모두 개인자격이 맞든지 안 맞는지, 또 개인적으로 원하든 그렇지 않든 모두 감히 입을 가볍게 열 수는 없습니다. 오직 한 마음으로 죽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이 일에 임할 뿐입니다. 이 일에 임할 때에 마음으로 바라는 바가 있습니다. 계원(桂園) 형이 계셔야 군국의 소망이 결실을 맺을 수 있습니다. 우리 형이 지금 상해(上海)에 있지 않고 의주(義洲)에 계십니다. 전보나 서신은 닿지 못할까 걱정이 됩니다. 형의 뜻을 일일이 살펴보니, 비행대의 일은 아주 찬성입니다. 적이 우리의 병력에서 멀리 떨어져 있으니, 도리어 육지전으로 승리를 얻기에는 적의 강함을 감당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형, 공중전의 계획은 매우 어렵고 복잡하니 서신으로는 다 전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비행대의 조성과 비행기의 양성의 일은 현재 우리가 서둘러야 하는 필요 불가결한 일일 것입니다. 그런데 이 계획이 지금은 비록 미미하지만 마땅히 적당한 사람을 선택하시어 이 일을 맡기셔야 할 것입니다. 군사 전체의 책임은 형께서 온 힘을 다해야 할 분야일 것입니다. 극동의 지금의 상황을 살펴보면, 중국과 러시아에 300만의 동포가 있으며, 이들은 모두 나라를 위해 죽음을 각오하고 있습니다. 또 동시에 최근 러시아 영토에서 우리 동포가 승리를 거둔 이래 우리의 독립 운동에 대하여 러시아가 찬성의 입장에 서 있습니다. 나머지 열강들은 더 기다려 보아야 할 것입니다. 러시아인이 우리에게 비밀리에 무기를 보급하기로 허락하였으니, 러시아 군대와 다음 일을 도모할 것입니다. 우리 한국의 입장에서는 대규모의 전쟁에 큰 희망을 걸고 있습니다. 동지들의 요구가 두 해 동안…(원본판독불가)…했으니 반드시 결사의 일전을 위해서 국내외의 민심을 움직여야 또 분위기를 충분히 무르익게 할 것입니다. 만일 이때 또 그 시기를 연장한다면, 아마도 이렇게 민의와 정부의 뜻이 모이는 때를 다시 얻기 어려울 것입니다. 국무회의가 이미 올 해 안으로 한번 거행하기로 하였으니, 누가 이 중대한 책임을 담당하여 진행할 것인가에 대해서는 형께서 걱정 안 하셔도 될 듯 합니다. 이 아우는 형이 하문하신 것에는 대략 다음과 같은 의견이 있습니다. 1. 비행대에 관한 건은 우리 형께서 가장 적절한 인물을 선택하시어 그로 하여금 계속 일을 진행케 하십시오. 2. 비행기(飛行車) 10대는 이 서신으로써 충분히 희망적이며, 우리 형제께서는… (원본판독불가)…백인과 교섭하실 때 반드시 이 10대로써 그 첫 번 째 거사에 사용하십시오.3. 이상의 두 가지 일이 완료되면, 우리 형께서는 그날 밤 동쪽으로 건너가시어, 군국의 큰 꿈의 희망을 그르치지 마소서. 이 밖의 우리가 진행하는 모든 방침들은 모두 만나서 의논하기로 하고, 이만 줄입니다. 형께서는 나라를 위해 분투하소서.

    1958 "「李東輝動情報告」|| 『耶蘇敎에 關한 諸報告』(1910.6)|| 地方部"

    1959 "「咸鏡代理會」|| 『朝鮮예수敎長勞會史記』上(1926)"

    一千九百七年(丁未)에 永興郡 太乙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處人 金永夏(김영하), 白基善(백기선), 金東哲(김동철), 李鳳雲(이봉운), 李基憲(이기헌) 等이 同時 決信하고 元山港에 專往하여 宣敎師 鄴亞力을 訪問하고 聖經 等을 買收하고 禮拜堂을 建築하여 敎會를 設立이러니 後來에 凶年을 遽遭하여 敎人이 四散하고 會堂이 一空이러니 數年以後에 敎人 劉文煥이 該地에 往하여 信者를 勸함으로 敎人이 復集하여 敎會가 中興하니라. 咸興郡邑 敎會에서 金昌甫(김창보)를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다. 自是로 長弘述(장홍술), 石承文(석승문), 朴致衡(박치형), 金鉉贊(김현찬), 洪基鎭(홍기진), 裴永根(배영근), 崔榮鶴(최영학), 毛鶴福(모학복), 金仲錫(김중석), 林晦榮(임회영), 李鎭明(이진명), 權昇經(권승경) 等이 相繼하여 長老로 視務하니라. 端川郡邑 敎會에 敎人인 漸增하여 從前禮拜堂은 收容키 不能한지라 敎人 金宅西(김택서), 許仁燮(허인섭), 崔基俊(최기준) 等의 發起로 全會가 協力하여 材木을 採取하며 基地를 議政하여 禮拜堂을 建築할 새 當時 基址가 國有에 編入이라 工事를 纔起에 官司가 制止함에 敎會의 經營이 水泡에 徒歸하였으니 可歎其時가 오히려 及자 못함이러라. 鏡城郡 古邑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安順永(안순영)이 此處에 來到하여 傳道함에 信者 十餘人이 信從이라 信者私第에서 禮拜러니 其後에 信徒가 百有餘人에 增進함지라 瓦家八間을 買收하여 禮拜堂을 移定하니라. 中國 東滿洲 臥龍洞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南監理會 宣敎師 河鯉永(로버트)과 傳道人 李和春(이화춘)이 傳道하여 信者 漸興함에 敎會를 設立하였더니 至是하여 長監兩敎의 分界條約에 依하여 長老會管理에 歸함에 宣敎師 富斗一(푸트)과 牧師 金永濟(김영제)가 輪行하며 視務하니라. 一千九百八年(戊申)에 高原郡下古邑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處人 金相鍵(김상건), 金允鍵(김윤건), 金聲鍵(김성건) 兄弟 三人이 同時 篤信하고 德池敎會에 往來 禮拜러니 其後에 信者 漸起함으로 禮拜堂을 新築하고 敎會를 成立하니 當時 宣敎師는 鄴亞力이요 助師는 金迺範(김내범)이러라. 金門 兄弟 三人이 信道後에 其 祠堂을 燒却하였더니 洞內의 逼迫이 大起하여 困辱을 備嘗하였으되 初志를 不變하고 至終忍受하더니 後來에 相鍵(상건) 及 其子 翰洙(한수)가 相繼하여 長老로 視務하니라. 同郡 溪南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儒林學者 李郁(이욱)이 勝都를 遍求하여 溪南에 寓居하였더니 예수 敎理의 眞正함을 得聞하고 德池敎會에 專往하여 敎理를 詳聞하고 드디어 信徒가 되어 聖經을 深究하고 隣人에게 傳道하여 梁基昊(양기호) 等 五, 六人이 並起함에 其後 信者가 續興하는지라 鄕里의 逼迫을 强忍하여 禮拜堂을 建築하고 敎會를 分立하니라. 北靑郡 新昌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馬具禮(맥레), 榮在馨(영)이 是處에 到及하여 福音을 傳道함에 申泰廈(신태하), 鄭石朝(정석조), 弓馹德(궁일덕) 三人이 始信하여 新興學校에서 禮拜를 擧行하니 校員全部와 學生一同이 並信하여 盛況을 頗成이러니 意外에 魔戲를 遽遭하여 信者가 四散하고 存者無幾하여 定處가 無히 禮拜를 守하더니 至是하여 敎會가 復興하여 禮拜堂을 建築하고 敎會를 確立하니 當時 助師는 韓道錫(한도석)이오 女傳道는 康熙鍊(강희련)이라 兩人이 熱心傳道하니 隣近 各處에 敎會가 興하는 지라 靑海面의 長湖里와 昇平里와 浦項里와 川上里와 俗面의 西湖里와 梧福里와 居山里와 坪里와 新昌面의 晩春里와 坪山面의 東上里 等 十餘 處에 敎會가 並立하니라. 會寧郡 勝岩洞 敎會에서 草屋八間을 買收하여 禮拜堂으로 使用하니라. 會寧郡邑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城津郡 宣敎會로부터 傳道人 安順容(안순용)을 此郡에 派送하여 傳道함에 黃鶴彬(황학빈), 金興俊(김흥준), 金希元(김희원), 尹天汝(윤천녀) 等이 始信하고 尹天汝(윤천녀) 私第에서 禮拜하고 敎會를 創立하니라. 明川郡 水西洞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郡守 李敎俊(이교준)이 上加面事務所에 面民大會를 召集하고 學校敎育을 獎勵하되 面內에 共同財產은 楊村洞 普興學校에 一並寄附하라 함에 水西洞民은 不應하고 예수 道理를 믿고 共同財產을 敎會에 寄附하다 當時에 五十餘 名의 信者가 金公勳(김공훈) 私第에서 會集이러니 信者 尤旺함에 禮拜堂을 新築하고 敎會를 確立하니라. 明川郡 自桂洞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郡守 李敎俊(이교준)이 共同財產을 普興學校에 一並寄附하라 함에 洞民 有力者 等이 예수 道理를 믿고 共同財產을 敎會에 寄附하니 當時에 李鐘周(이종주), 金鍾弼(김종필), 李學洙(이학수) 等 三十餘人이 金鍾弼(김종필) 私第에서 會集이다가. 信者 尤加함에 李學洙(이학수) 私第에 禮拜하고 敎會를 創立하니라. 利原郡 谷口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韓振河(한진하)가 是處에 來到하여 福音을 傳함에 趙成學(조성학), 金昇浩(김승호) 等 三十餘 人이 連續信道하여 金昇浩 家에서 會集이러니 其後 宣敎師 具禮善(그리슨), 魯亞力(로스) 兩人이 來巡時에 金基南(김기남), 金鐘國(김종국) 等 數人이 亦信하여 館西里 五峰齋에 會堂을 移轉하니라. 利原郡 荷田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里信者 六七人이 數年間에 趙德修(조덕수) 家에서 會集이러니 其後에 里中의 學校를 借得하여 禮拜堂으로 使用하니라. 水下面 上農 敎會도 同時 並立하니라. 利原郡 西面 新興里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各里 共同財產을 收合하여 學校의 基本으로 編入할 새 本里全州李門의 學契田土도 亦當寄附라 彼等이 以爲하되 예수 敎徒는 自由이 財產을 可保라 하여 敎人 任小天(임소천)을 訪問하여 道理를 得聞하고 本里 男女五十餘 人이 里中 書堂에서 禮拜하며 信者 金永鎬(김영호)를 敎師로 延聘하여 里中 兒童을 敎導러니 其後에 志士 李東輝(이동휘)와 勸書 韓辰昭(한진소)가 並來하여 傳道하니 敎會가 復興이라. 當時 領袖는 李容英(이용영)이오. 執事는 李河賢(이하현)이러라. 吉州郡 龍洞, 會前, 不老三敎會가 同時 成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朴丙壽(박병수)가 城津 宣敎師의 派送을 特蒙하여 福音을 本郡에 來傳할 새 信者가 朋興하여 龍洞에 七十餘人과 倉前에 六十餘人이 敎會를 分立하고 未幾에 不老에도 三十餘 名의 信者가 敎會를 成立하다. 城津郡 鶴東面 閑洞敎會가 成立하다. 是處는 港口라 各處 人士가 雲集할 새 信者도 漸多하여 臨時로 私第를 借用이러니 其後에 信者 漸旺하여 敎會를 設立하니라. 城津郡 港內敎會에서 李斗燮(이두섭)을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다. 宣敎師 具禮善(그리슨)이 傳道事業을 確定 以後에 魯亞力(로스), 徐高道(스코트), 富祿道(프록터), 南尊敬(로저스) 等 宣敎師가 繼續 來住하여 輪流 傳道하니라. 中國 東滿洲 帽兒山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李應賢(이응현)이 是處에 傳道함에 李秉春(이병춘) 等이 始信하고 其後 敎人이 漸次 增加하여 一大民家를 買收하여 禮拜堂으로 使用하니 宣敎師 富斗一(푸트), 朴傑(바커)과 助師 金永濟(김영제), 金迺範(김내범)이 連續 來巡하여 會務를 管理하니라. 是處 敎人은 生活이 便宜하고 信愛가 具備하여 同人家眷같이 相視 相恤하니 聯合한 敎會라 可謂하리로다. 後來에 張學秀(장학수)를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니라. 一千九百九年(己酉)에 洪原郡 三洞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定平 敎人 崔章煥(최장환)이 此地에 移住하여 隣近에 傳道함에 里內 十餘人이 信從하여 禮拜堂을 建築하고 敎會를 設立하니 當時 執事는 崔培健(최배건), 金濟煥(김제환) 等 兩人이러라. 後來에 新浦와 三浦가 通合하여 金濟鉉(김제현)을 長老로 將立하여 合堂會를 組織하고 牧師 韓秉稷(한병직), 韓元七(한원칠)이 相繼 視務하니라. 洪原郡 鳥來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里人 金廷熙(김정희), 金豪鎭(김호진), 金世憲(김세헌) 三人이 福音을 得聞하고 同志 十餘人을 集合하여 信者 私第에서 輪回 禮拜하니 匪意에 試驗을 遽遭하여 禮拜를 停廢하니 宣敎師 榮在馨(영), 趙栗林(조율림) 兩人이 敎會를 巡回할 때에 領袖 金一信(김일신), 金重根(김중근)과 執事 金庚允(김경윤), 金碩輔(김석보)가 熱誠活動하여 敎會의 試鍊을 除去하고 父老의 頑固를 劈破하여 敎會가 復活하니라. 端川郡邑 敎會에서 信者는 漸多하되 會堂이 甚窄함으로 敎人이 爲慮하니 至是하여 敎人 金炳洙(김병수), 姜鳳燮(강봉섭), 林得榮(임득영), 許仁燮(허인섭), 鄭基煥(정기환) 等이 協議하여 邑內 作廳을 買收하여 禮拜堂으로 使用하니 其後 數年에 敎人이 以爲 官門 近處에 婦人 來往이 非便이라 하여 維新學校를 買收하여 禮拜堂으로 使用하고 李昌甲(이창갑), 鄭基煥(정기환) 兩人은 大鍾 一座를 寄附하니라. 吉州郡 玉甫洞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金桂顏(김계안)이 宣敎師의 派送을 特被하여 此處에 福音을 來傳하니 信者 八九人이 繼興이라 敎會를 設立하니라. 城津郡 農城洞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曹京伯(조경백)이 宣敎師 具禮善(그리슨)의 派送을 特被하여 此處에 福音을 來傳하니 同時 被召者가 近數百名이라 數年을 不過하여 在來의 弊習을 革祛하고 眞理의 訓戒를 恪守하여 神聖한 敎會를 建立하니라. 明川郡 阿間塲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金桂顏(김계안), 李宗範(이종범)이 宣敎師의 派送을 並被하여 此處에 福音을 來傳할 새 當時에 龍岩 金河鍊(김하련)과 基洞 崔宗崙(최종륜), 崔克崙(최극륜)과 黃谷 金容逢(김용봉), 張翼周(장익주) 等이 並信하여 熱心으로 傳道함에 以上 三處에 各其 敎會를 設立하고 未幾에 各禮拜堂을 建築하니라. 利原郡邑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具禮善(그리슨)이 是處에 來到하여 傳道할 새 邑人 任小天(임소천)이 始信하고 隣人에게 更傳하여 數十 信者를 連得하여 敎會를 建立하니라. 利原郡 南面 松堂里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里內 公有財產事件이 發生함에 예수 敎會를 依賴保存할 動機로 里人이 傾向하던 바 李東輝(이동휘), 韓振河(한진하) 等이 適來하여 傳道하니 同時 決信者 三四百人이라 敎會를 遂成하니라. 利原郡 西面 文坪里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員 李鍾薰(이종훈)이 本里 文昌學校에 到任하여 福音을 宣傳함에 學生이 俱信하고 里人 姜鎭濟(강진제), 姜賢秀(강현수), 姜錫鳳(강석봉) 等이 且信이러니 其後에 宣敎師 具禮善(그리슨)과 李東輝(이동휘)와 敎員 李鐘翰(이종한) 等이 熱心傳道하니 敎會 大振하니라. 利原郡 西面 梨德里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員 毛鶴洙(모학수)(元山人) 本里 東明學校에 到任하여 福音을 宣傳함에 里人 李秉周(이병주), 李昌奎(이창규), 李用範(이용범), 李昌健(이창건), 李範在(이범재) 等이 俱信하여 東明學校로 禮拜所를 議定하고 敎會를 設立하니라. 利原郡 隱龍德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李東輝(이동휘)가 是處에 傳道할 새 里內 三人이 決信하여 百般苦難을 甘受하니 當時에 感而信者 漸多라 敎會를 成立하니라. 鍾城郡邑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藥商 高一涉(고일섭)이 本邑에 來住하여 福音을 宣傳하니 信徒가 稍興이라. 吳俊京(오준경) 家에 會集이러니 越數年에 信徒가 官府에 有事하여 會集을 暫停이라가 神祐를 優蒙하여 主日을 更守하니 牧師 金永濟(김영제)가 屢到 懇勸함으로 信者 得力하여 敎會를 遂成하니라. 中國 東滿洲 明東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信者 鄭載冕(정재면)이 是處에 傳道함에 金躍淵(김약연), 金河奎(김하규), 金定奎(김정규), 文定鎬(문정호), 文治正(문치정), 崔鳳岐(최봉기) 等이 始信하고 其後에 信徒 尤增이라 宣敎師 朴傑(바커)과 牧師 金永濟(김영제)가 來巡하여 敎會를 遂成하니라. 中國 東滿洲 湖泉浦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信者 崔鳳烈(최봉렬)이 是處에 傳道함에 韓秀良(한수량)이 最初 信從하고 未久에 其兄 秀學이 亦信함에 敎徒增加하는지라. 宣敎師 朴傑(박걸)과 牧師 金永濟(김영제)가 來巡하여 敎會를 設立하니 當時 領袖는 韓秀鉉(한수현), 李用權(이용권)이라 熱心勤務하여 敎會 隆興함에 禮拜堂을 建築하니라. 中國 東滿洲 渾春城 內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信者 吳秉默(오병묵)이 是處에 來住하여 信者 黃炳吉(황병길)로 더불어 協議하여 講堂을 成立하고 禮拜와 傳道로 並用하니 蓋中國 敎會 制度를 效則함이라. 宣敎師 朴傑(박걸)과 助師 金迺範(김서범)이 巡視하여 敎會를 成立하고 趙益亨(조익형), 鄭用河(정용하), 高日燮(고일섭) 等이 敎會를 導率하더니 其後에 平西老會에서 牧師 李柄夏(이병하)를 特派 視務할 새 禮拜堂을 建築하고 學校를 並立하여 同胞 子女를 敎育하더라. 中國 東滿洲 龍井市 敎會에 助師 金桂顏(김계안)이 移住하여 間島地方에 巡回 傳道하니 敎會 大●●러라. 蓋金君은 本是 佛敎人으로 我敎에 投入하여 眞理를 深究하고 傳道에 熱心하여 多年 勸書로 勤務하더니 到今 助師로 擔任하니라. 露領(러시아령)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城津港에 居留하는 宣敎師 具禮善(그리슨), 鄴亞力(업아력)과 傳道人 全燻錫(전훈석), 洪淳國(홍순국), 李斗燮(이두섭) 等이 咸北 各郡과 中國東滿과 露領(러시아령), 燕秋 等地로 經過하여 海蔘威(블라디보스토크)港에 到達하여 一週傳道할 새 如干信者로 더불어 數次 禮拜하다. 適其時는 日露 交戰時機가 迫近한지라. 露人의 拘禁과 搜査를 無數히 經過하였으나 當時 宣敎師는 皆英人이라. 國權으로 因하여 無事히 還歸하니라. 其後에 元山敎人 金士謙(김사겸)이 傳道人 金有甫(김유포), 毛鶴壽(모학수)를 是處에 派送하여 敎會를 成立이러니 是年에 朝鮮老會로서 崔寬屹(최관흘)을 傳道牧師로 特派하여 敎會를 管理하니라. 一千九百十年(辛亥)에 高原郡 德池 敎會에서 張斗翼(장두익), 金迺範(김내범)을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고 其後에 敎會가 尤興하여 鄭基俊(정기준)이 繼續하여 長老로 將立하고 金迺範(김내범), 全啓殷(전계은), 嚴致相(엄치상), 金學洙(김학수)가 相繼하여 助師로 視務하니라. 定平郡 播春 敎會에서 崔元基(최원기), 康錫俊(강석준)을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다. 兩人이 다 會務에 熱心하고 康君은 傳道會를 組織하며 禮拜堂을 建築함에 宣力이 最多하고 且其婦人 申馬大(신마대)는 所有家屋을 傳道會 中에 寄附하니라. 高原郡 松峴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處人 韓興仁(한흥인)이 德池 敎會에 往하여 福音을 得聞하고 親知에게 宣傳하더니 其後에 敎人 李郁(이욱)이 移來하여 多人에게 傳道하여 信者를 多得함에 禮拜堂을 設立하고 敎會를 完成하니라. 安邊郡 美峴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處人 申應相(신응상), 金鳳球(김봉구), 李在善(이재선)이 福音을 始開하고 本邑 敎會에 往來 禮拜러니 信徒 漸興함에 宣敎師 富斗一(푸트)이 姜基善(강기선)을 派送하여 敎務를 引道하더니 敎會 尤進하여 禮拜堂을 建築하고 敎會를 成立하다. 其 後에 姜基善(강기선)을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고 李基燦(이기찬)이 다시 長老되어 會務를 共執하더라. 咸興郡 中荷里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宣敎師 榮在馨(영)이 是處에 來到하여 敎徒의 形便과 地理의 關係를 深察하여 新昌里 敎會부터 分立하니라. 明川郡 自桂里 敎會에서 禮拜堂을 新築하니라. 明川郡 臺岩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李子雲(이자운)이 福音을 始傳하여 信者 三人을 始得하고 至是하여 敎人 金啓善(김계선)이 福音을 且傳하여 信者 六人을 連得함이 里內 永成學校에 會集하여 敎會를 成立하니라. 明川郡 花台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李斗燮(이두섭), 金文云(김문운), 金桂顏(김계안), 金宅西(김택서), 李正華(이정화) 等이 本郡 各處에 遍行 傳道할 새 當時에 本處 信者가 漸興이라 信者 朱慈明(주자명) 家에서 會集이러니 其後에 篤信者 洪在祐(홍재우)가 此處에 移來하여 敎會를 振興케 함으로 敎會가 得力하여 巨額을 捐補하여 十間 禮拜堂을 新築하고 敎職을 撰定이러니 未幾에 敎內에 搖事가 現出하여 信者 墮落이러니 唯幸 孫龍漢(손용한), 李承惠(이승혜)의 熱誠 安慰를 得賴하여 敎會가 僅保하여 匡峴 敎會와 合力하여 李永洙(이영수)를 助師로 延聘하고 金氏 信恒을 傳道로 視務하니라. 利原郡 塲門里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林得律(임득률), 金載根(김재근) 兩君의 傳道로 金俊景(김준경), 張弘達(장홍달) 等 十餘人이 決信하고 松堂里 敎會에 馳往하여 禮拜 模範을 學得한 後에 李東輝(이동휘)와 勸書 韓振河(한진하)의 講說을 深感하고 牧師 韓得隴(한득룡)에게 經訓을 又蒙하여 敎會가 漸進하니라. 端川郡 汝海津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李東輝(이동휘)의 傳道로 感應者 數十名이 信者 私第에서 會集이러니 敎導者 殆無함을 因하여 未久 解散하고 其後에 信者 姜鳳鎬(강봉호)의 勸勉으로 悔改者 數十 名이 다시 私第에 會集 禮拜하니라. 端川郡 院德里 敎會에서 文成基(문성기)를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니라. 端川郡 仲坪 敎會에서 禮拜堂을 新築할새 宣敎師는 基地 五百坪을 寄附하고 敎人은 千餘元을 收合하여 二十四間을 竣工하니 邑內의 第一의 建物이러라. 甲山邑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 宣敎師 具禮善(그리슨)과 敎人 南承五(남승오)가 此處에 來到하여 福音을 宣傳함에 姜珀(강백), 趙龍八(조용팔), 趙玉振(조옥진) 等 五六人이 同時 而信하여 姜珀(강백) 私第에 會集하고 敎會를 成立이러니 其後에 敎導者 無함으로 敎會 微弱하니라. 慶興郡邑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信者 金桂顏(김계안)이 本邑에 來到하여 福音을 傳播할 새 興明夜學校長 金泰勳(김태훈)과 敎師 金文協(김문협) 十七人이 同時 決信하여 夜校講堂에서 禮拜하여 敎會를 設定하니라. 慶興郡 屈浦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浸禮會 傳道人 張朝煥(장조환)이 是處에 來到하여 傳道할 새 文炳權(문병권), 文炳祿(문병록), 文炳燮(문병섭), 柳宗錫(유종석), 金昌烈(김창렬) 等이 同時 而信하여 文炳權(문병권) 家에서 禮拜러니 信徒가 漸增함에 敎會를 成立하다. 其後에 長老會에 屬歸하니 宣敎師 梅道捺(맥도날드)이 担任 視務하니라. 會寧郡邑 敎會가 成立 數年에 會務 不振이러니 城津 宣敎師會로부터 金文三(김문삼)을 特派하여 會務를 發展케 할 새 北面一里(今禮拜堂)에 瓦家二座를 買收하여 一은 禮拜堂으로 使用하고 一은 牧師住宅으로 確定하다. 是時에 咸鏡代理會(猶今老會)로부터 宣敎師 梅吉魯(매길로)와 牧師 金永濟(김영제)로 是處 堂會委員을 삼아 敎會를 管理케 하고 또 宣敎師會로부터 女傳道人 李馬利亞(이마리아)를 是處에 派送하여 婦人會務를 贊助케 하니라. 城津郡 鶴東面 間里敎會에서 敎人이 熱誠으로 捐補하여 禮拜堂을 新築하니라. 中國 東滿洲 龍井市 敎會에서 禮堂을 新築하다. 中國 東滿洲 眞基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韓秀鉉(한수현)의 傳道로 本里 姜成璜(강성황), 姜容哲(강용철)이 始信하고 禮拜를 誠勤하더니 未幾에 姜氏의 族人이 稍進하여 敎會를 設立하니 當時 牧師는 金迺範(김내범)이요 助師는 徐昌熙(서창희)러라. 中國 東滿洲 大荒溝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金夏鼎(김하정), 金東鉉(김동현) 兩人이 此處에 來住하여 福音을 宣傳함에 信者가 稍興하여 敎會를 設立하니 宣敎師 朴傑(바커)과 牧師 金迺範(김내범)이 有時로 來巡하더라. 其後에 李柄夏(이병하)가 牧師로 視務할 時에 鄭用河(정용하)를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니라. 中國 東滿洲 車大人溝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金剛(김강), 金秉鉉(김병현), 金明奎(김명규) 等이 熱誠 傳道함으로 敎會設立하니 宣敎師 朴傑(바커) 徐高道(스코트)와 牧師 李柄夏(이병하) 等이 輪回 視務하니라. 中國 東滿洲 敬信鄕 玉泉洞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李春(이춘)이 此地에 來住하여 傳道함으로 信者 漸興하여 敎會 遂成하니 宣敎師 朴傑(박걸)과 牧師 李炳夏(이병하)가 輪行 視務하니라. 一千九百十一年(辛亥)에 定平邑 敎會에서 張禮學(장예학), 李宗夏(이종하)를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다. 洪原郡邑 敎會에서 韓秉職(한병직), 韓元七(한원칠)이 相繼하여 牧師로 視務하고 男女 傳道會를 創立하여 成績이 頗好러라. 鏡城郡 勝岩洞 敎會에서 傳道人 朴丙壽(박병수), 姜斗松(강두송)을 請來하여 査經會를 始開하니 信者가 多會러라. 高原郡 彌屯面 敎會에서 會務가 漸進하여 禮拜堂을 新築하고 姜鳳奎를 長老로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니라. 會寧郡邑 敎會에 宣敎師 朴傑(바커) 夫婦와 梅道捺(맥도날드) 夫婦와 醫師 萬壽弼(만수필) 夫婦와 語學敎師 姜斗和(강두화), 金觀植(김관식), 金碩鉉(김석현), 劉永浩(유영호), 崔璟在(최경재) 等이 城津으로부터 移住하여 福音을 確證함에 敎會가 大振이러라. 利原郡 南面 浦項里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李東輝(이동휘), 辛慶斗(신경두) 兩人이 是處에 來到하여 傳道하에 信者 振興이러니 至是하여 李君의 懇勸과 敎人의 熱誠으로 捐補를 收合하여 本里 書堂을 買收하여 禮拜堂으로 使用하니라. 鏡城郡邑 敎會는 試難이 荐至함으로 會務가 漸衰러니 牧師 金永濟(김영제)가 屢到 勤勉하니 敎人이 復興이러라. 慶興郡 西浦項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東亞 基督敎人 李子雲(이자운)이 敎理를 宣傳함에 是處 夜學校生 十餘人이 同時 決信하고 學校에서 禮拜하니 其後에 信者加多함에 草葺 六間을 建築하여 禮拜堂으로 使用하니라. 中國 東滿洲 長白縣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信者 李殷卿(이은경), 趙德脩(조덕수), 吳周燮(오주섭) 等이 內地로부터 是處에 移住하여 同縣 新興德村에 福音을 始傳하여 敎會 遂成하니라. 中國 東滿洲 藏恩坪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城津人 老者 梁鎭燮(양진섭)이 家族 十二戶七十二人을 領率하고 是處에 移住하여 敎會를 設立하고 洞名을 藏恩坪이라 命名하니 在昔以色列이 十二子의 家族 七十二人을 領率하고 埃及(이집트)으로 移住함과 相應이러라. 城津 本處 敎友 追來者 亦四五家가 並力하여 禮拜堂을 建築하다. 宣敎師 朴傑(바커), 富斗一(푸트)과 牧師 金永濟(김영제), 金迺範(김내범)이 相繼視務하고 長老 梁亨植(양형식), 梁宗植(양종식), 李泰彥(이태언), 梁昌植(양창식)이 亦繼視務하니 是處位置는 東滿 第一이라. 現下 敎徒가 三百餘人이요 敎人 移來者는 逐年 增加하나니 將來發展할 所望이 甚大러라. 中國 東滿洲 赤岸坪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金桂顏(김계안)이 是處에 傳道할 새 金鳳烈(김봉렬)이 始信하고 其後 信徒가 繼興하여 四十餘人에 己達한지라. 牧師 金永濟(김영제)가 來巡하여 敎會를 設立하고 禮拜堂을 新築한 지라. 後來 牧師는 富斗一(푸트), 金迺範(김내범), 李夏榮(이하영), 崔德峻(최덕준)이오. 長老는 李台現(이태현), 廉昌和(염창화), 崔鳳烈(최봉렬)이니 相繼勤務하여 敎會前進이러라. 中國 東滿洲 局子街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平壤 敎人 柳基淵(유기연)이 此處에 移住하여 福音을 宣傳함에 信者 漸起하여 禮拜堂을 建築하고 牧師 朴傑(바커), 金永濟(김영제) 兩人이 來巡하여 敎會를 成立이러니 基後에 牧師 富斗一(푸트), 金迺範(김내범), 崔德峻(최덕준), 柳芝善(유지선)과 長老 柳讃熙(유찬희), 徐成權(서성권), 朴義涉(박의섭), 俞愚一(유우일), 柳興元(유흥원)이 相繼 視務하니 敎會 前進이러라. 中國 東滿洲 正東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姜翼泰(강익태)의 傳道로 兪漢豊(유한풍)이 始信하고 其後에 信者尤興하여 四十餘人이 會集이러니 牧師 金迺範(김내범)이 來巡하여 敎會를 設立하고 兪漢豊(유한풍)이 執事로 視務함에 敎會가 前進이러라. 中國 東滿洲 和龍縣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城津 敎人 南星昊(남성호)가 此處에 來住하여 傳道함에 信者 稍興이라. 敎會를 設立하니 當時 牧師는 崔善鐸(최선탁)이요, 助師는 文在獜(문재린)이러라. 中國 東滿洲 隱浦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長老 金躍淵(김약연)의 傳道로 沈成文(심성문), 嚴邦鎭(엄방진)이 始信하고 其後에 信者繼興이라. 敎會를 設立하니 當時 牧師는 崔善鐸(최선탁)이요 助師는 文在獜(문재린)이오 執事는 金湧淵(김용연), 金元燮(김원섭), 尹永福(윤영복)이러라. 中國 東滿洲 頭道溝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姜燦奎(강찬규), 洪一杓(홍일표) 兩君이 此處에 來到하여 福音을 宣傳함에 信者 繼起하고 移來信者도 不少하니 宣敎師 朴傑(바커)과 牧師 金迺範(김내범)이 來巡하여 敎會를 設立하니라. 其後에 禮拜堂을 建築하며 長老를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니 視務 長老는 李順昌(이순창), 曺命煥(조명환), 趙秉洙(조병수)러라. 中國 東滿洲 間獐岩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姜百奎(강백규)의 傳道로 金永燮(김영섭), 金東義(김동의), 金東熙(김동희) 等 十餘人이 相繼而信하여 設立하니 宣敎師 朴傑(바커)과 牧師 金永濟(김영제)가 來巡하여 敎會를 振興하여 禮拜堂을 建築하고 長老를 將立하여 堂會를 組織하니 其時 長老는 玄基允(현기윤)이러라. 中國 東滿洲 新豊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陳衡權(진형권)의 傳道로 信者 繼起하여 敎會를 設立하니 當時 宣敎師는 朴傑(바커)이요 牧師는 李炳柄(이병병)러라. 中國 東滿洲 一松亭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孔元甫(공원보), 朴秉燮(박병섭) 兩君의 傳道로 信者 繼起하여 敎會를 成立하니 當時 宣敎師는 朴傑(박걸)이요 牧師는 李炳夏(이병하)러라. 中國 東滿洲 金唐村 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敎人 吳在榮(오재영)이 此地에 來住하여 傳道함에 信者繼起하여 敎會를 成立하니 當時 牧師 李柄夏(이병하)러라.

    1960 "張道政|| 「高麗共産黨의 沿革」(1925)"

    한국의 사정은 1894년의 일청전역(戰役, 전쟁) 및 1904년의 일노전쟁 이래, 일본의 승리와 함께 1905년에 이르러 한국은 끝내 일본의 강제적 보호조약 하에 자유를 잃게 되었다. 동시에 일본의 압박은 더욱 심하게 되었기에 한국의 혁명당은 일본의 제국주의자들에 맞서 일치하게 대항하기로 하고 [1906년 독립협회의 일파, 이동휘(李東輝), 안창호(安昌浩), 양기택(梁基澤), 이동영(李東寧), 전덕기(全德基)등이 회의를 하여 신민회라고 하는 혁명기관을 조직하여 비밀리에 혁명사업을 진행하였다. 그러나 그것이 끝내 일본의 당국자에게 발견되어 동지자 400인의 희생과 동시에 안창호(安昌浩)는 미국에 망명하여 한국인 국민회를 조직하였다. 이동휘(李東輝)는 노령(러시아)에 망명하여 신민회의 사무를 또다시 연락하고 취급하였다.] 그 후 (1918년에 이르러 신민회의 중요 당국자가 일본군의 시베리아 출병을 기회로 하여 하바라프크스(はばらふくす)에 그 대항책을 강구하기 위하여 모였다. 그 때 양기택(梁基澤), 이동영(李東寧), 이동휘(李東輝)의 사이에 일종의 의견충돌이 일어났으며 그것은 즉 1917년 10월 러시아혁명 이래 이동휘(李東輝)는 공산혁명을 주의(主義)와 목적(目的)으로 하고 이동영(李東寧), 양기택(梁基澤) 등은 민족혁명을 주장하였기에 쌍방은 끝내 갈라져 이동휘(李東輝)는 하바라프크스(はばらふくす)의 러시아 공산총국과 함께 한국인 사회당을 조직하였다. (정강(政綱)은 러시아 공산당의 정강(政綱)에 근거하였다) 사업은 선전과 조직을 하고, 한편으로는 적군(赤軍)을 조직하여 일본의 제국주의 군대에 대항하였으나 연합군의 세력은 결국 대항할 수 없어 하바라크크스(はばらふくす)의 함락과 함께 사회당원도 각 지방에 도망하고 이동휘(李東輝)도 북만주에 망명하였다. 그 후 1919년 3월 한국의 혁명과 동시에 이동휘(李東輝) 등의 사회당 위원은 비밀리에 포람사덕(浦監斯德)에 회집하여 대표자 3인을 선출하여 모스크바 제3국제공산당에 참가하기로 하였다. 그 외의 위원은 한국의 내지에 주력하였으며 이동휘(李東輝) 등은 상해방면에서 진행하였다. 그 당시는 러시아의 반혁명자 테로챠크(てろちやく)와 일본군이 시베리아를 점령한 때이기에 그 사회당은 결국 형태도 실력도 없게 되었다. 때는 1919년 7월로서 상해 방면으로부터 본인이 와서부터 그해 올 목적으로 한 공산당을 조직하기 위하여 각 방면의 동지와 함께 중흥의 운(運)을 진척한 결과 내용은 러시아공산당의 정강을 표준으로 하여 각 지방에서 동지자를 구하여 지방회를 조직하고, 외면(外面)에서는 일세당(一世黨)으로써 일세보(一世報)라고 하는 신문을 발간하여 주의를 선전하였다. 또한 러시아공산당과 함께 일본의 제국주의군대에 공산주의 선전을 하는데 전력하고 그 외 남북만주의 의병단체를 연락하여 무장운동을 하였다. 이 때 일세당(一世黨) 당원 중에는 사회당 당원이 많이 입당하였으며 그 외 입당하지 않은 사회당원도 서로 동정(同情)이 있었다. 그 이유는 즉 하바라프크스(はばらふくす)의 사회당도 정강(政綱)은 전부 러시아 공산당의 정강을 채용하였기 때문에 끝내 1920년 봄 러시아 적군이 원동(遠東)을 점령(그 때도 적탑(赤塔)에는 세메노프(せめのぷ)와 일본군이 있었다.)하는 동시에 일세당은 세상에 나타나 총회를 여는 것과 동시에 남아 있는 사회당원도 전부 참가하기로 하였다. 처음으로 정강의 문제에 이르러서는 전부 러시아 공산당의 정강을 근거하기로 하고 명칭은 그 때도 연합군의 세력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활동 상 방해가 있다고 하여 한국인 사회당이라고 명칭을 하였다. 그리하여 남북만주와 노령에는 공산단체가 유일하였으나, 우리 사회당의 정책은 먼저 실력방면에 주력하여 이전의 사업을 계속함과 동시에 또한 더욱 나아가서 적군을 조직하였다.(아라스토리(あらすとうり)에 400명, 수청에 500명, 히만(ひまん)에 300명, 타반(たばん)에 60명) 각 방면 군대의 주동자는 우리 사회당원으로 하였다. 그리하여 각 민족단체의 측에서도 또한 인민도 이전 만세혁명 외 성공의 길이 보이지 않았다. 또한 베르사이유 회의에서도 희망이 없기에 낙심하였으나 실력적 군대가 조직됨과 동시에 우리 사회당의 측에 희망과 신앙을 잃지 않게 되었다. 이때 마침 ′대한국민회′라고 하는 민족단체가 있었으나 이는 즉 1918년 전 러시아 한민족중앙총회가 1919년 3월 혁명이래 형태를 바꾸어 중령(中領)의 국체(남북만주)와 합하여 대한국민회라고 명칭한 것이다. 그 단체의 역사를 서술하면 1918년 전 러시아 한민족 대표회에서 러시아에 입적한 한국인과 비입적한 한국인의 사이에 충돌이 일어났다. 입적한 한국인은 종래 모국으로부터 90년을 떠나 있어 의식주를 전부 러시아인 사회에 의지하였을 뿐만 아니라 러시아 전권시대부터 관인의 압박을 받았기에 러시아어를 아는 한국인과 입적한 인간은 비입적한 한국인에 대하여 권리를 남용하였다. 그 때에도 입적자가 비입적자를 압박하여 전(全) 러시아 한민족 중앙총회의 전권(專權)을 취하게 되었다. 1919년 봄에 이르러 중령(中領)의 단체가 합하였기 때문에 다소의 실력도 있었으나 이가 1919년 7월 중순에 이르러서는 점차 쇠퇴하게 되었다. 그 원인은1.중령의 단체로부터 의뢰받은 무기 구매의 전액 5000원을 대한국민의회에서 사사로이 사용한 것.2.에하우(えはう, 동청선(東淸線) 부근)에 자당 수령은 우로바토(うろばと)와 대한국민의회가 교섭하여 한국인 군대를 조직한 뒤 중령의 청년을 사관 양성을 하도록 소집하였으나 실패하여 해산된 것.3.중령으로부터 조선은행 회령(會寧)지점의 자금 15만원을 중령단체에서 탈취한 자금을 노령에 보내 무장을 구매하려고 하였으나 대한국민의회 당국 측의 보호가 불충분하였기 때문에 일본군에게 빼앗긴 것.이상의 사정으로 중령의 단체(남북만주)는 전부 대한국민의회를 반대하여 탈퇴함과 동시에 대표자 2인을 선출(박봉우(朴奉瑀), 유예균(柳禮均))하여 대한국민의회의 반대기관인 상해정부에 보내게 되었다. 대한국민의회는 끝내 노령의 한개 기관에 지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노령에서도 대한국민의회는 상해정부와 함께 조선내지로부터 발표한 정부를 봉대하여 두측 모두 취소하는 조건 하에 모든 위원 35인이 회의하여 대한국민의회의 취소선언을 하였다. 때는 1919년 12월로 상해정부의 측에서는 취소는 하지 않으나 개조의 형식을 가지고 내지정부의 각원을 그대로 상해정부의 각 원(員)으로 하며, 대한국민의회의 측에서는 두 파로 나뉘어 다수는 혁명시대에 임하여 통일을 목적으로 하기에 개조하거나 취소하는 것은 그 정도로 중요하지 않기에 그 대로 승인하자고 하였다. 그밖의 일부분은 상해 측에서 조약을 위반하였기에 대한국민의회를 부활하자고 하였으며 이들이 소수임에도 불구하고 7,8명이 부활선언을 하였다. 그리하여 그 기관은 내부분열 때문에 쇠퇴를 가져왔다.4.1920년에 이르러 러시아 공산당의 세력이 원동에 미치는 것과 동시에 입적, 비입적의 차별은 끝내 없어지게 되고 3분의 2의 비입적자가 이전에 압박을 당하여 조직된 대한국민의회에 대하여서는 절대 반대하게 되었다.5.대한국민의회는1918년 …(원본판독불가)… 대표회를 하였을 뿐 1920년과 21년 말까지도 대표회를 하지 않았기에 오랜 인물과 오랜 정치는 그 사이 새로운 기운의 인민의 이상과 사정에는 맞지 않았다.6.대한국민의회는 1919년 3월 이래 몇개의 선언서를 마련하였을 뿐으로 혁명사업의 성적은 하나도 없었기에 노령(露領), 수청(水淸) 일대의 인민은 대표회를 열어 대한국민의회와 관계를 계속한다는 선전을 하였다.7.그 밖에 노령의 각 단체는 더욱 동(同) 기관을 떠나게 되었으며 대한국의회는 끝내 빈 허울의 이름만 남아 7, 8인이 악의적으로 대한국민의회를 옹호하려고 하면 공중(公衆)의 적이 되고 말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