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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입조선인노동자 도주방지 대책회에 관한 건 |
2의 (2) 사업장에 있어서의 불량분자의 예견에 노력하는 것과 동시에 감독을 ●로 해, 선동, 유혹 등의 방제에 노력하게 할 것.설명 요지이입 조선인 노무자의 직장을 방폐해 도주하는 사람의 원인을 검토해 보면 각종의 원인이 있는 것입니다만, 그 중에 가장 ●●을 필요로 하는 것은,(가) 이미 직장을 방폐해 도주하고 있는 불량 조선인의 유혹, 선동에 의해 도주하는 것.(나) 또, 사업장의 내부에 있는 불량 조선인의 유혹, 선동에 의해 도주하는 사람이 매우 많은 것입니다.또, 분쟁의의 원인도 이러한 외부로부터 혹은, 내부의 불량 조선인의 유혹, 선동에 의하는 것이 매우 많은 것입니다. 따라서 이 외부 및 내부로부터의 유혹, 선동을 미연에 발견해 도주 방지의 방법을 강구하는 것이 목하,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선동, 유혹을 미연에 발견해 도주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가장 먼저 각 사업장의 노무계를(1) 경찰적인 주의력, 관찰력을 함양하도록 환언하면, 시찰 내정의 방법을 연구, 훈련시키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것은 왕년, 노동 운동이 전성을 다해 각종의 쟁의가 연발하고, 공산주의 운동이 불호했던 시대에 있던 노무계는 이 점에 대해 특히 내정이라고 하는 것에 도달해 대단한 연구도 이루어, 또, 경찰과도 긴밀히 연락을 해, 상당한 성적을 올리고, 이것이 미연 방지에 노력해 간 것입니다. 그런데 그 후, 운동이 기세가 죽어, 시일을 거치는 것에 따라 현재의 노무계에는 이 열의가 결여하는 것은 아닐까 생각되는 것이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도주를 미연에 방지하려면 노무계에 대해, 경찰적인 관찰, 주의력을 함양하도록 훈련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다음은 일부 조선인 노무자가 사업주 측, 혹은 그 노무계의 마음대로 움직이도록 사업주 측의 편에 붙이는 것입니다. 즉, 아무리 노무계만 돌아다녀도 다수 노무자의 동정을 전부 아는 것은 힘들기 때문에, 조장, 반장, 또는 우량이라고 인정되는 일부 조선인 노무자를 물질적, 정신적의 양면으로부터, 다른 노무자보다 우대하는 등의 방법으로 회사 측의 편에 붙이고 노무자의 동정에 주의시켜, 그들이 외부로부터 유혹, 선동을 받고 있는 상황, 혹은 분쟁의, 도주의 담합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경우에는, 그 상황을 사전에 노무계에 연락해 오도록 훈련하는 것입니다.최근 특히 집단적으로 도주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에 반드시 도주하기 전에 담합해, 계획을 진행시키고 있는 것은 의심하는 여지가 없기 때문에, 이상 말씀드렸던 방법이 충분히 행해지고 있으면, 이러한 방지에도 지극히 유효하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차제에, 노무계를 이상 말씀드린 것 같은 방향으로 일하게 하는 것을 지도해, 또 일할 수 있도록 특별한 배려를 바랍니다.5, 노무자 브로커의 철저한 단속을 실행할 것.설명 요지노무자 브로커의 단속에 대해서는 경찰로서도, 범죄 수사의 입장부터 치안 유지상,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충분한 협력을 하겠습니다.6의(1) 협화회(協和会)는 경찰과 항상 협력해, 도주자의 발견에 노력할 것.설명 요지협화회(協和会)가 경찰과 긴밀히 연락을 해, 도주자의 발견에 노력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며, 특히 설명의 필요는 없다고 생각합니다.6의(2) 도주자를 발견했을 때는, 훈계 후, 종전의 사업장에 복귀 시킬 것.설명 요지종래, 이입 조선인 노무자는 조선에 송환되는 것을 몹시 무서워하고 있었으므로, 자숙외계의 의미로, 직장을 방폐해 도주한 사람을 발견했을 경우는 원칙으로서 조선에 송환해 간 것입니다.(가) 그런데, 최근, 이입 노무자 중에는 갱내 생활에 위험을 느껴, 또는 갱내 생활을 혐오해, 그 외 여러 가지의 이유로 조선에 송환을 바라며, 조선에 돌아가는 수단으로서 고의로 도주하는 사람이 일부 나오고 있고,(나) 또, 노동력이 부족한 현재, 막대한 비용으로 모처럼 이입 한 노무자이기 때문에, 송환하지 않고 이것을 활용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수도 있고,(다) 또 도주한 사람이라도 발견되면 반드시 종래의 사업장에 돌려보내는 것을 철저히 하면, 오히려 도주 방지에도 도움이 되게도 되므로 향후는 도주자를 발견했을 경우는, 반드시 훈계 후, 종전의 사업장에 복귀시키기로 한 것입니다. 따라서 향후 도주자를 발견했을 경우는 반드시 종전의 사업장에 인수하는 법을 통지할 테니, 사업주도, 다소 멀어도, 또 소인원수로 귀찮아도 가능한 한 빨리 인수하러 와주셨으면 한다고 생각합니다. 이 점, 특히 협력해 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7, 사업주는 협화회(協和会)의 회원장을 소지하지 않는 사람의 고용을 하지 않을 것.설명 요지지금, 생활국으로부터도 ●이야기가 있었습니다만, 경찰의 입장으로부터 내무성으로서도, 특히 부탁하고 싶은 것입니다.내지에 거주하는 조선인(노동자)은 한 명 남김없이 협화회(協和会)의 회원으로서 협화회(協和会)원장을 소지하는 방침으로 되어 있는 것입니다만, 아직도 이 점이 충분히 철저히 행해지지 않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최근 조선인 노무자의 전부에 대해, 회원장이 공포되게 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회원장을 소지하지 않는 사람은(가) 부정 도항자인가(나) 직장을 방폐해 도주한 사람, 혹은 범죄를 범해 협화회(協和会)의 지회인 경찰에 접근할 수 없는 사람에게 한정됩니다. 따라서 이것들 협화회(協和会)원장을 소지하지 않는 사람을 고용하는 사업장이 만일 있다고 하면, 범죄 기타 부정행위가 있던 불량 조선인을 고의로 은닉하는 결과가 되어 매우 곤란한 것입니다. 물론 이것만으로는, 즉시 형법상의 범인 은닉죄가 성립한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만, 경찰 측에서 말하면, 그 정도 이유를 활해 고용하지 말라고 하는데, 고용한다는 것은 좋지 않다. 경찰의 일을 방해한다고 말할 수도 있으므로 지난번, 경찰과 사업주 측과 좋지 않은 결과가 되어도 곤란하므로, 꼭 이 점, 유의를 부탁드립니다.즉, 향후, 회원장을 소지하지 않는 사람은 고용하지 않도록 해주시는 것과 동시에, 협화회(協和会)원장을 소지하지 않는 사람이 고용주에게 왔을 경우는, 부디 관할의 경찰서, 또는 주재소 등에 신고를 해주시길 바라는 것입니다. |
1860 |
일본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인에 대한 사상대책에 대하여 |
나고야(名古屋) 노동조합 관계 치안 유지법 위반 사건에 관여하는 조선인에 관한 약간의 조사 및 여기에 보이는 내지 거주 조선인에 대한 사상 대책에 대해(나고야(名古屋) 지방재판소 검사국 보고)(●기) 본 자료는 나고야(名古屋) 지방재판소 검사국에서 나고야(名古屋) 합노 사건의 취조를 담당한 ●도쿄쿠(東京區) 재판소●●●●의 연구와 관계되는 것이다.내용1.머리말2.조선인 문제 재음미의 현대적 의의3.소위 나고야(名古屋)합노 사건의 개황4.아이치현(愛知縣)에 있어서의 조선인 증가 및 분포의 상황5.사건 관여 조선인의 연령6.사건 관여 조선인의 범죄의 전력7.동 의 출신도별8.동 의 내지 도래 목적9.동 의 직업별10.동 의 교육정도11.동 의 학업 성적12.동 의 본적지 생가 생활상태13.동 로서 거가 도래자의 생활상태14.동 의 출신 계급별15.동 의 수입16.동 의 내지 도래 후 사회운동 단체의 관계하기에 이르는 기간17.나고야(名古屋) 합노에 참가했을 때부터 공산주의를 신봉하는 사람이 참가 후 동 주의를 신봉하기에 이를 때까지의 기간18.사건 관여 조선인의 공산주의를 신봉하기에 이르는 동기19.나고야(名古屋)합노와 기존 조선인 민족 단체와의 관계20.사건 관여 조선인의 행위의 위법성의 인식21.동 의 범죄 사실의 인정 여부22.동 의 의식의 정도23.동 의 전향 이유24.내지 거주 조선인에 대한 종래의 대책25.종래의 대책의 효과26.동 의 비판27.내지 거주 조선인 사상 대책 사견28.결론본 론문은 쇼와(昭和) 11년 12월5일 일제 검거된 나고야(名古屋) 합동 노동조합(약칭 나고야(名古屋)합노) 관계의 치안 유지법 위반 사건에 관여한 조선인에 관해, 그 공산주의를 신봉하기에 이른 동기, 기타 제반의 사정을 실증적으로 조사해, 이것을 기초로서 내지 거주의 조선인에 대한 사상 대책을 고구하는 데에 있다.나고야(名古屋)합노 사건은 여러 가지 점에 대해 주목해야할 것을 포장 하고 있었다. 그 중에 주요된 것은 다음의 두 가지이다. 즉 하나는 쇼와(昭和) 10년7월 모스코에서 개최된 그 코민테른 제7회 세계 대회의 결의였다. 합법 장면 이용 및 반파시스트 인민전선 결성의 신 전술의 지시에 앞서 이미 자발적으로 우기 전술을 채용해 운동을 끝까지 전개한 것이며, 둘은 검거 총수 71명 중 실로 43명의 다수의 조선인의 관여를 본 것이다. 우기 제 1의 점에 대해서는 이미 상당히 논구를 했기 때문에, 그 권위를 말하는데 이것을 양보해, 나는 지금 전기 목적을 가지고 우기 제2점에 관해서 조사 고구해 본다.나는 쇼와(昭和) 12년6월부터 쇼와(昭和) 13년6월까지 사이에 걸려, 검사로서 동 사건의 수사에 종사해, 직접 다수 조선인의 취조를 이룬 관계상, 동 사건의 조선인에 관해서는 비교적으로 아는 점이 많다고 생각된다.지금 자신이 이 수사에 의해, 얻은 지식 경험에 의해, 조선인에 관해서 제반의 조사를 이루어 사실의 진상을 밝히며, 이것에 근거해 종래의 내지 거주 조선인의 사상 대책을 비판해, 한층 더 장래의 방침을 검토하는 것도 반드시 무의미라고는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론 원부터 좁은 식견의 비난은 면할 수 없지만 이상과 같이 생각하고 이것을 시도했던 것이다.2.조선인 문제 재음미의 현대적 의의일한 합병 이래 여기에 20여년이 지났다. 이전의 일본의 조선 통치는 성공적이었을까. 지금 우리는 진지하게 이것을 반성해야 할 시기에 제회하고 있다. 하나는 20여년의 조선 통치의 경험을 음미해, 한층 더 장래, 통치를 완벽하게 기하는 것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이며, 둘은 현재 시나사변(支那事變)을 유종의 미를 장식하기 위해서이다. 후자에 있어서 그 한층 더 의의를 인정한다. 지금 황군은 시나(支那) 대륙을 배경으로서 일대 성전을 전개하고 있다. 그리고 그 곳에는 이 조선 민족보다 훨씬 더 우수한 한민족을 비롯해 무수한 다민족이 생존하고 있어, 이제 우리 일본 민족과 직접적인 교섭을 가지기에 이르렀다. 우리 일본 민족은 이들 여러 민족을 어떻게 처우해야 할 것인가, 이것이야말로 이번 사변의 전도에 과된 가장 기본적인 과제이다. 사변의 골자는 바로 그 곳에 있다.그런데 우리 일본 민족의 타민족 통치의 경험은 소수의 대만 민족은 당분간 두고, 이 조선 민족 이전에는 가지지 않고 지극히 부족한 것이다. 전부터 그 후 만주 민족의 통치의 귀한경험을 검토하는 것으로써, 시나(支那) 여러 민족의 처우를 성공적인 것으로 해야 된다.여기에 즉 조선인 문제 재음미의 현대적 의의가 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우리 일본 민족은 팔굉일우의 제국의 정신에 준거해 전 세계에 황도를 선포해야 할 중대 사명을 가지는 것이다. 이 성업의 대륙으로의 구체적 한걸음이 실로 조선 통치였다. 현재 우리는 이것을 재음미 하는 것으로써 성공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은 더욱 더 이것을 조장 활용해, 실패했다고 인정해야 할 것은 조심성이 없이 이것을 고치지 않으면 안 된다. 이것이야말로 이 황도 선포의 성업 완성을 위해 지금 우리가 해야 할 반성이다.그래서 조선인 문제는 물론 여러 방면에서 이것을 검토해야 한다. 반도 통치의 실정에 관해 논하는 것을 중추로서 내지 거주 조선인, 재외 조선인 등 각종의 방면에서 논구해야 하는 것이다. 지금 나의 계획은 우기 중에 내지 거주 조선인 게다가 그 중 아이치현(愛知縣)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 지방 거주 조선인의 관여하는 나고야(名古屋)합노 사건을 통해서 이것을 시도하는 데에 있다. 원래 구우일모적인 관찰에 지나지 않지만, 동 사건은 내지 거주 조선인의 사상을 아는 데에 있어서 정말로 구하기 어려운 사례이며, 이것을 검토하는 일도 내지 거주 조선인 문제 해결의 도움이 되어, 나아가서는 전조선인 문제 혹은 일반 외 민족 통치라고 하는 중요 문제 해결에 어떠한 기여를 이루는 점이 있을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이다.여기에 특히 시대적 의의를 인정하며 사건 수사의 일반적 보고를 겸해 본 논문을 시도했던 것이다.3.이른바 나고야(名古屋) 합노 사건의 개황이른바 나고야(名古屋) 합노 사건이란 전술과 같이 쇼와(昭和) 11년 12월1일, 아이치현(愛知縣), 기후현(岐阜縣), 미에현(三重縣)하에 걸쳐 일제히 검거된 치안 유지법 위반 사건으로, 그 사건의 진전 경과는 주범자 이시카와 토모자에몬(石川友左衛門)의 활동에 잘 표현되어 있기 때문에, 그 개황은 동인에 대한 예심 청구서를 가지고 이것을 설명하는 것으로 한다. 즉 이시카와 토모자에몬(石川友左衛門)(당 37년)은 본적지의 심상(尋常) 고등 초등학교 졸업 후, 노동 생활에 들어가자 현대 사회 기구의 모순에 대한 의혹을 안아 다이쇼(大正) 12년(1923년)경부터 사회과학의 연구를 시작해 그 당시 재경 사회주의 사상 단체 건설자 동맹사무소에 기우하고 연구를 열심히 하며, 결국 공산주의를 회포하기에 이르러, 그 이후 일본 노동 총연맹, 무산자 신문 이와무라(岩村) 지국, 일본 농민 조합 일본 노동조합 평의회 중부 지방 평의회 및 일본 노동조합 전국 협의회 중부 지방 협의회에 각 참가해, 그동안 다이쇼(大正) 12년(1923년) 봄 무렵 본적지 부근의 청년단 자주화 운동에 대해, 동년 6월 출판법 위반에 의해, 벌금 60원에 이어 쇼와(昭和)2년 여름 무렵, 미에현(三重縣)하의 삼림 노동쟁의 지도에 대해, 쇼와(昭和)4년9월 소란죄에 의해 징역8월에 각 처해진 것뿐만 아니라, 쇼와(昭和)4년1월 무렵, 일본 공산당 중앙 기관지 적기의 배부 등에 종사한 결과, 쇼와(昭和)7년5월 치안 유지법 위반에 의해, 징역2년에 처해져 쇼와(昭和)9년2월 출옥했는데도 불구하고, 조금도 공산주의 신봉의 태도를 바꾸지 않고, 옛날부터 일본 공산당(약칭 당)이 국제 공산당의 일본 지부이며, 혁명적 수단에 의해 우리 국체를 변혁해, 사유재산제도를 부인해 노동자 계급의 독재를 수립해, 이것을 통해서 공산주의 사회의 실현을 목적으로 하는 결사이며, 일본 노동조합 전국 협의회(약칭 전협)가 국제 적색 노동조합의 일본 지부이며 노동자 대중의 일상 투쟁을 지도 조직 해, 당과 동일 목적 달성을 위해 당을 지지해, 이것과 협동하는 결사인 것을 각 정통하면서 당 및 전협의 각 목적 달성을 위해 활동할 것을 결의해, 우기 출옥 후 얼마 안 돼, 나고야(名古屋) 소비조합 또는 일본 노농 구원회 준비회 나고야(名古屋) 지방 지부 준비회(약칭노구명지 준)에 참가하다가 당면 궤멸에 직면하는 중부 지방의 좌익 진영을 재건해 미력한 당 및 전협 강화의 대중적 기초 지반을 개척 건설하는 것을 기도해, 쇼와(昭和)9년 11월 이후 나고야(名古屋) 지방을 중심으로 좌익 노동조합 운동을 조직 지도해 왔다. 그런데 그 후 당 본부인 국제 공산당이 그 제7회 세계 대회에서 세계 혁명 수행의 방책으로서 자본의 공세, 파시즘의 위협, 전쟁의 위험에 대한 전면적 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노동자 농민 도시 소시민의 통일전선 즉 인민전선 결성되는 신 전술을 채용해, 당도 또 이것에 따르는 것을 알게 되자 우기 전술에 근거해 공산주의자 사토 도키로우(佐藤時郞)등의 재나고야(名古屋) 프롤레타리아·에스런치 파업 단체인 포포로사 및 동 주의자 池田三千秋등의 전국 농민 조합 아이치현(愛知縣) 연합회 준비회와 서로 제휴 협동하면서 전기 운동을 전개해 온 것이다.제1, (1) 쇼와(昭和)9년11월 무렵 공산주의자 키타가와 스에키치(北川末吉), 中久木勝利, 미즈노 켄조우(水野硏像), 신산축(申山祝), 최점보(崔占保)등과 함께 현재의 정세에 즉응해 전협의 과거에 있어서의 종파적 비합법 활동을 비판해, 합법 장면을 이용해 더구나 전협의 혁명적 전통 및 지도 정신을 재현한 지방적 군독 노동조합인 나고야(名古屋) 지방 일반 산업 합동 노동조합(약칭 일반 산업) 조직 준비회를 결성해, 우기 조직 준비회의 기관지 “일반 산업 준비회 뉴스” 제1호(동년 12월 15일자) 약 100부를 발행 배부하는 등, 제반의 조직 선전 활동을 하는 것과 동시에 일반 산노의 대중적 결성을 목적으로 해 우기 조직 준비회 스스로 제창자가 되어, 나고야(名古屋) 지방에 있어서의 전협 영향하의 중조선인 노동 문화당 단체, 쇼나이쵸(庄內町) 노동자 협의회, 문화 보급회, ●●공●회, 반도 청년단등의 각 대표 또는 개인 유시 ●●인 김유●(金裕●), 임영●(林泳●)인 임정만(林正萬), 박광해(朴廣海)인 박정균(朴?均)등을 결집해 무산 단체 대표자 회의(별칭 ●●●조합 결성 대표자 회의)를 조직 해, 우기 여러 단체를 일반 산노 조직 준비회에 해소시키려고 한●●, 각 조직 준비회가 현저하게 관헌의 주시를 받기에 이르기 때문에 우기 주시를 회피할 수 있도록 동년 12월 하순 우기 조직 준비회를 표면 해체해, 여기에 전기 무산 단체 대표자 회의를 모체로 해, 일반 산노를 대신해야 할 이것과 동일 목적 내용을 가지는 신노동조합의 설립을 기획해, 뉴스“나고야(名古屋) 노동자”(쇼와(昭和) 10년1월1일자) 약 100부를 발행 배부해, 우기 조합 설립에 관한 제반의 준비를 진행시켜 쇼와(昭和) 10년 2월 21일 우기 무산 단체 대표자 회의 참가 단체의 하나인 쇼나이쵸(庄內町) 노동자 협의회의 자주적으로 개장하는 형식을 가지고, 우기 신 노동조합으로서 나고야(名古屋) 합동 노동조합(약칭 나고야(名古屋)합노)을 결성했다.(2) 이렇게 그 후 쇼와(昭和) 11년 12월5일의 일제 검거에 이르기까지에 걸쳐, 신산축(申山祝), 김삼홍(金三洪)인 금병인(金炳仁), 박광해(朴廣海),미즈노 켄조우(水野硏像)등과 함께 대소 무수한 노동쟁의 및 각 ●투쟁을 격발 지도하면서 ●● 전기 내 조선인 노동 문화당단체를 재조직 해, 또는 그 ●●방법에 의해 나고야(名古屋)합노하부조직인 쇼나이(庄內) 지부, 則式 지부 준비회, 대●●지부 준비회, ●●지부 준비회,●●지부●●●분회, ●●●●●분회, ●●●●●●●분회●●●●●●●●●●●●●●●●, ●●●●●●여공 요시카와려생(吉川黎生), ●●●●●●●●●●●등 합계 약 500명을 동합노에 조직하는 것과 동시에, 나고야(名古屋) 합노의 자매단체 ●●합동 노동조합으로●●해, 일본 노동조합 전국 평의회 중부 지방 평의회(약칭전평중평) 가맹 중앙 지구 협의회, 주공 친화회, 아이치(愛知) 시계 주식회사 공장 내 여명 클럽, 기후시(岐阜市) 소재의정화회등을 그 영향 하에 획득해, 그동안 신산축(申山祝), 김삼홍(金三洪)과 함께 나고야(名古屋)합노 본부 서기국을 구성해, 상무를 통괄하면서 동합노기관지 “합노뉴스” 제1호 내지 제7호 및 “나고야(名古屋)합노동자” 제8호 내지 제11호 각 100부 내지 250부 및 “8월1일 국제 반전 데이는 전 세계의 노동자가 전쟁에 반대해 싸우는 날이다, 전쟁은 노동자의 이익이 될까”라고 제목을 붙이는 격문을 비롯해 성명서, 격문, 전단, 팜플렛 제2회 대회 의안 등 합계 수십 종, 각 수백 부를 발행해 전기 지부, 분회 또는 영향 여러 단체에 배부해, 공산주의의 선전 선동에 노력해 혹은 확대 집행위원회, 집행위원회, 상임 집행위원회, 본부, 전문부, 조직 쟁의 부회 등, 각종의 회합을 개최해 제반의 활동 방침을 결정해, 혹은 지구 대표자 회의를 소집해 하부조직의 통제 확대를 도모해, 혹은 지구 조직자 회의 및 동 연구회를 조직 해, 신산축(申山祝), 김삼홍(金三洪), 미즈노 켄조우(水野硏像), 박광해(朴廣海), 최점보(崔占保), 요시카와려생(吉川黎生), 김이홍(金二洪)인 김병홍(金炳洪), 손기정(孫基禎)인 손●출, 정상노(鄭相魯), 최정열(崔定烈), 김경오(金敬吾)등 각 조직자의 계급의식의 고양 및 훈련에 노력했다.(3) 그 나고야(名古屋)합노는 전기 반파시스트 인민전선 결성의 추진적인 세력으로서,사회 대중당(약칭 사대당)을 중심으로 우기 인민전선을 결성해야 할 방침 아래에,(가) 쇼와(昭和) 11년8월경 신산축(申山祝) 및 김삼홍(金三洪)과 함께 전평중평지도자 아카마츠 이사무(赤松勇)등과 제휴해, 전국 총동맹 아이치현(愛知縣) 연합회 나고야(名古屋) 제도 노동조합, 나고야(名古屋)시전종업원 클럽등 각 단체 유지를 인솔해 나고야(名古屋) 지방퇴수법 개정 유지 간담회를 결성했지만, 얼마 안 돼 전국 총동맹 아이치현(愛知縣) 연합회 및 나고야(名古屋) 제도 노동조합은 동 간담회를 이탈해, 새롭게 전국 수평사 아이치현(愛知縣) 연합회, 나고야(名古屋) 주조공 조합, 전국 농민 조합 아이치현(愛知縣) 연합회 준비회, 동 기후(岐阜) 및 미에(三重) 각 현 연합회, 사대당 복세 지부 각 유지 이에 참가하기에 이르러, 동년9월 중순 우기 간담회를 개편해 중부 지방 노농 무산 단체 유지 간담회를 조직해, 일상 공동 투쟁을 기조로서 사대당 및 노동조합 회의계 여러 단체와의 접촉 제휴를 도모해, 우기 간담회를 통해서 점차 전기 인민전선 결성에 노력해 동년 10월 초순 우기 취지의 성명서 발표를 결의해,(나) 또 동년 10월 무렵 전기 포포로사 멤버 足立直二 및 나고야(名古屋)합노 멤버 수 명을 사대당나고야(名古屋) 지부에 나고야(名古屋)합노 桑名 지부 멤버 성●경(成●慶)등을 동당 桑名 지부에 각각 가입하게 해 동당 내에 있어서의 우기 인민전선 결성 운동을 전개 지도해,당 및 전협 강화의 대중적 지반으로서 일반 산노 조직 준비회 또는 나고야(名古屋)합노를 결성 지도해,제2, 쇼와(昭和)10년3월 상순부터 동년5월 상순까지 사이에 해외 공산주의 문서 국제 통신 동년 2월호, 동년 4월호, 동 월호 팜플렛 및 태평양 노동자 동년2, 3월호, 동년4월호를 차례차례 입수 열독해, 그 무렵 나고야(名古屋) 시내에서 우기 문서 ●●앞을 신산축(申山祝), 최점보(崔占保), 미즈노 켄조우(水野硏像), 최명섭(崔明燮)등에 회람하게 하는 것과 동시에 쇼와(昭和)9년 10월 무렵부터 동11년9월 하순까지 사이에, 주로 자기 개인으로 모두 공산주의의 선전을 목적으로 하는 팜플렛 “공장 내 전략 전술을 세워 싸워라” “건설자” “메이데이의 의의와 역사” (쇼와(昭和)10년판) 및 2전 문고 “어떤 조직자의 기록─이 사람을 봐라 통일전선을 위해서 재론 한다” “국제 청년 운동의 투쟁의 역사” “노동조합의 통일에 기한다, 키의 취하는 방법을 바꾸어라” “메이데이의 의의와 역사” (쇼와(昭和) 11년판) “직공 국회의원 츠카모토 쥬우조우(塚本重藏)는 의회에서 어떻게 싸웠는지” 합계8종 각 60부 내지 100부를 발행해 나고야(名古屋) 지방 또는 전국 좌익단체 및나고야(名古屋)합노멤버 등에게 배부해 공산주의의 전파에 노력해제3, 쇼와(昭和) 11년2월경부터 동년 11월경까지 사이에 전기 인민전선 결성의 선전적 임무를 가지는 공산주의 계몽 잡지 “노동 잡지”의 나고야(名古屋) 지방에서 중개 배부 활동에 종사해, 나고야(名古屋)합노 멤버를 주요 강독자로서 우기 중개 부수를 매월6,7부에서 120수부에 증가하며, 그동안 동년 10월경 ●野明, 야마다 마사오(山田正男), 박광해(朴廣海)등 독자 대표를 소집해 회의를 개최해, 노동 잡지 나고야(名古屋) 중개소를 확립하고, 스스로 그 책임자로 취임해, 이후2회에 걸쳐 동 잡지 선전의 월간 뉴스 각 100부를 발행하는 등, 우기 독자망의 확대를 도모해제4, 쇼와(昭和) 10년 11월경부터 쇼와(昭和) 11년8월경까지 사이에, 전후4회에 걸쳐 오사카(大阪)시내 또는 나고야(名古屋)시내에서 당 중앙 재건 준비 위원회 간부 和田四三四, 吉見光凡등과 회견 연락해, 나고야(名古屋) 지방의 정세 등을 보고하며, 동년7월 하순 나고야(名古屋)시내에서 和田四三四와의 회견에 즈음해, 동인으로부터 당중앙 기관지 “적기” 제1호 및 당 팜플렛 “하기의 호음료” “일본에 있어서의 민중 전선을 위해서” 각 수십 부의 교부를 받아 동년8월 중순 동 시내에서 당 팜플렛 2종 각 일부를 足立直二에게, 우기 적기 및 당 팜플렛 2종 각 일부를 김삼홍(金三洪)에게, 당 팜플렛 “하기의 호음료” 일부를 ●野明에게 각 배부해 당 활동에 협력해, 이상 당 및 전협의 각 목적 수행을 위해서 하는 제반의 행위를 이룬 것이다.4.아이치현(愛知縣)에 있어서의 조선인 증가 및 분포의 상황다이쇼(大正) 4년(1915년)까지는 대부분 그 존재를 보이지 않았던 조선인이, 다이쇼(大正) 5년(1916년) 말에는 현 전체 하에 64명을 세며, 이 후 차례차례 놀랄 만한 증가율을 가지고 그 수를 더해, 제1표와 같은 경과부터 쇼와(昭和) 12년 말에는 실로 6만 227명을 헤아려, 오사카후(大阪府)의 23만4천, 효고현(兵庫縣)의 6만6천에 뒤잇는 전국 제 3위의 다수에 오르고 있다. 이 증가는 물론 아이치현(愛知縣) 산업의 융성이 원인으로, 장래에 있어도 증가율은 감소하지 않을 것이다.그런데 이것이 분포 상황은 제2표 (와) 같이 나고야(名古屋)에 32252명의 약 반수 거주해, 세토시(?戶市)의 9096명, 토요하시시(豊橋市)의 3836명, 이치노미야시(一宮市)의 2328명, 카츠카와(勝川)의 2045명, 오카자키(岡崎)의 2010명 등이 이것에 이어 있다. 이러한 분포도 물론 그 토지의 산업 관계에 지배되고 있는 것이다.5.사건 관여 조선인의 연령나고야(名古屋)합노 사건에 관여하는 조선인의 연령은 검거된 쇼와(昭和) 11년을 표준으로서 보고 별표와 같다. 최저는 19세부터 최고는 58세에 걸쳐, 인간 활동 연령의 모두에 걸쳐서 있는 것은 주의를 필요로 한다. 그 중에 26세, 27세, 31세는 각 4명을 헤아려, 가장 다수로 23세의 3명, 21세, 22세, 25세, 28세, 30세, 31세, 54세의 2명 등이 이에 잇따른다.그런데, 또 이것을 5년을 한시대권으로서 보고 분류하면 제2표와 같다. 이것에서 보면 26세부터 30세까지의 사람이 13명의 최다수를 차지해, 21세부터 25세까지의 사람 10명, 31세부터 35세까지의 사람 9명이 이것에 이어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