Loading...
글자크기조절

콘텐츠

선택

선택

    신문자료

    四二九를 祝賀하자
    • 신문명
      한민
    • 발행일
      1937-04-30 민국19년 4월 30일
    • 생산정보
      제13호


    우리는 이제 四二九의 다섯째 돌을 맞게 되었다.
    이날은 한국 임시정부의 전위부대로서 특무공작을 담임한 한인애국단의 윤봉길 의사가 적장을 도륙한 날이다.
    우리의 민족영웅 윤 의사의 벽력성은 처음으로 四二九의 가치를 천하에 뚜렷이 드러냈다. 이로부터 四二九는 꽃답고 향기롭고 풍부하고 또 고상하게 되었다.
    한·중(한국·중국)연합 전선을 부르짖은 것도 하루 이틀의 일이 아니었지만 사실에 있어서는 왜적의 간계로써 피차 간에 오해가 자라고만 있었다. 만보산 사건으로부터 중국인학살사건 또 九一八과 一二八사변 당시의 소위 조선군[조선에 주둔하는 왜군(일본 군인)을 정말 조선 군인으로 오해한 것]출동 등등의 문제로 인하여 중국인의 한인관(觀)은 순전히 이지를 떠난 감정문제로 급변하고 말았다. 이때의 윤 의사의 거룩한 전공은 중국에 있는 한인의 지위를 평안케하(●●●●●●●●●●●●)진선의 첫 걸음을 ●●로써 표현하게 하였다.
    四二九는 일본의 우상인 유인이가 세상에 나온 날이다. 그러므로 유인이가 황제 된 후부터는 일본 국민은 연중행사로써 이 날을 경축(맘에 있는 없든)하였다. 특별히 오년 전 이날에 상해에서는 상해침략 승리를 축하하기 위하여 개선대회를 겸한 문무관원과 교민전체의 연합 대경축을 거행하였다. 이때에 삼도왜적은 얼마나 기뻐하였으며 사억만 중국 민족은 얼마나 피눈물을 흘렸을까. 이러한 희비극 중에서 우리 윤 의사의 던진 폭탄은 적의 만위(蠻威)를 무여지하게 말살시키는 동시에 중국 사억만 민중으로 하여금 타도 일본 제국주의의 가능함을 확실히 믿게 하였다.
    윤 의사를 가진 한국 민족은 영광이다 명예다 비록 우리가 오늘까지 망국노는 면치 못하였을망정 누가 감히 우리를 없신 여기랴 누가 감히 한국의 ●●●●●●●●●●● 우리는 윤 의사를 더욱 존경하나니 그가 개선가를 부른 四二九를 마땅히 축하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과거에 이루어진 사업을 축하함보다도 장래에 그러한 사업이 계속되기를 축하 함에서 더욱 중대한 의미를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윤 의사의 전공을 축하함보다도 그의 사업을 계속함에서 우리가 축하하는 진의를 발휘할 수 있는 것이다.
    명예의 四二九, 영광의 四二九가 왜적의 독염(毒焰)을 말소함이 자못 광대하였으나 중국 자체의 역량이 충실치 못하였던 까닭에 침략세력은 필경 중국 복지에까지 심입하게 되었다. 이 세력을 빙자하고 남북에서 횡행하는 불량 한인은 중국인의 감정을 四二九사건 발생당시 보다도 더욱 악화하고 있다. 오늘의 광복운동자로서 이따위 불량배를 박살할 방법을 강구하고 있음은 물론이거니와 최근부터 일부 한인은 한·중(한국·중국)연합 진선 결성에서 갱진일보 하여 중화민족부흥만세 ●●●●●●●●●●●●(그들의 용어)친선을 남다르게 표시해 보려고 하는 듯하나 이것도 짝사랑이 되지 않으면 다행일 것이다. 요컨대 공상과 공담으로는 실지의 행동을 막을 수가 없나니 우리는 직접 행동으로써 우리의 이상을 실현할 것 뿐이다. 천편의 문장보다도 백가지의 구호보다도 한쌍의 철권으로써 적을 타도하여 그의 주구를 박멸할 것 뿐이다. 바꾸어 말하면 제이의 윤 의사가 됨으로써 그의 고귀한 피로 쌓아놓은 탑을 더욱 높이 쌓아 올리자는 것이다. 윤 의사의 폭탄은 대내하여서도 십이만분의 위력을 나타내었나니 그 당시에 적의 통신기관을 통하여 이 소식을 듣는 국내의 민중이 얼마나 큰 자극을 받았던 것을 상상할지라도 명백히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현재의 내외의 형세는 몇 개의 윤 의사가 나오기만 기다리고 있나니 四二九의 다섯째 돌을 맞는 우리는 비상한 결심으로 각개가 다 윤 의사 되기를 맹세함으로써 이날을 축하하자.
    사진 尹奉吉(윤봉길)義士