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종대왕이 등극하자 곧 여러 공신들은 왕비 신씨의 폐출을 주장하였다. 신씨는 신수근의 따님이었으므로 아버지를 죽이고 따님을 중궁으로 섬기는 것이 그들에게는 위험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연산의 모친인 윤씨의 폐출과 사약은 성종과 인수대비의 손으로 이루어졌음에도 뒤에 무수한 신하들이 피보라를 썻거늘 하물며 우리 손으로 죽인 신수근의 일에 있어서라 하는 것이 그들의 생각이었다. 그러하여 화근을 없애야 한다고 일제히 여러 공신들이 대비전과 중종 앞에 나아가 폐비를 간청하였다.
신수근은 반정을 반대한 신하로 폐세자를 세우는 것이 마땅하였사온 바 어두운 조정의 충신이옵고 밝은 조정의 역적이로소이다. 그는 비록 죽였사오나 그런 역적의 따님으로 지존을 지키와 중궁에 처하시게 하옴은 실로 도리에 어긋난 일이오니 곧 폐하시와 국가 혈통을 바르게 하심이 가합니다.
당시에 기세등등한 공신의 힘을 중종과 대비는 무마할 수 없었다. 그리하여 사랑하는 아내요, 아끼는 며느님을 싫으면서도 폐출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신씨는 왕비가 된 지 七일만에 폐비가 되어 본가로 돌아간 것이다.
중종은 신하의 강청으로 하는 수 없이 신씨를 사제로 보냈지만 차마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그래 자주 높은 루에 올라 신씨가 있는 집을 바라보았으므로 신씨 집에서도 그것을 알고 집 ● 동산에 있는 바위에 신씨가 입는 붉은 치마를 둘러두고 왕의 바라보는 마음을 위로했다. 지금 장동에 있는 치마 바위는 그 때 신수근의 집 뒤 동산에 신씨의 치마를 둘러둔 바위다.
왕비 신씨가 폐출된 후 차산 부원군 운여필의 따님을 간택하여 숙의를 삼았다가 곧 왕비로 책봉하였으니 그가 장경왕후다. 효혜 공주와 인종을 낳은 후 二十五 세의 방년으로 돌아갔다.
장경왕후가 하세하자 폐비 신씨를 복위하자는 말도 일어났으나 공신들이 극력 반대하여 파산 부원군은 이미 따님으로 중궁이 간택되었다. 그가 문장왕후다. 색태는는 비록 아름다웠으나 성질이 몹시 앙탈스러워 그로 말미암아 인종의 수명까지 짧게 하였으니 어찌 한스럽지 않으랴. 한편 폐비 신씨는 불우한 한 평생을 사체에서 보내다가 七十二 세에 하세 하였고 영종대왕 때 복위되어 단경왕후라는 시호를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