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계속)
폭군 중의 폭군 연산주 연산군은 성종의 맏아드님이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이 폐비 윤씨의 소생이다. 성종이 윤씨를 폐출한 후 그의 소생인 연산까지 폐출하려다가 어미의 죄를 자식에게까지 돌린다는 것이 옳지 못하다고 그대로 두었다 한다.
연산이 어릴 때는 매우 총명한 듯 보이더니 차츰 성장함에 따라 음험해져 갔다. 성종도 그것을 알았던 모양이다. 이미 말한 손순효의 이야기가 그것을 말하고도 남음이 있다. 또한 연산군에 혼인을 지내는 날 비바람이 몹시 불고 일기가 아주 좋지 못하여 사람들이 불길한 징조라고 하였음에도 성종은 들은 척 않고 사돈되는 신승선에게 음양의 화합하여야 바람과 비가 왔는 법이니 오늘 일기는 매우 좋다고 해서 억지로 행례케 하였다 한다.
연산군의 어머님 되시는 윤씨는 본가에 폐출된 뒤 이미 말한 바와 같이 밤낮을 울음으로 보내어 피눈물로 수건을 얼룩지게 하였다. 그는 사약을 받을 때 그 피 묻은 수건을 어머니인 신씨에게 맡기고
(내 아들이 다행히 살아 인군이 되거든 이 수건을 전하여 주오)라고 부탁하였다. 신씨는 울면서 그 수건을 받아 두었다가 인수대비가 죽은 뒤 내인을 통하여 그 수건을 왕에게 전하고 그 어머니의 원통히 죽음을 알렸다. 윤씨가 사약을 받아 죽을 때 연산은 아직 어렸다. 그래서 그는 사실을 알지 못했고 중종의 어머님인 자순대비의 손에 길러졌으므로 그가 어머님인 줄만 알고 있었다. 그것이 천만 뜻밖에도 아니라고 피 묻은 수건과 함께 슬픈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의 놀라움은 컸다. 그리하여 본래 포악한 성질이 불을 만난 기름처럼 타오른 것이다.
근시를 시켜 일기책을 가져오라 하여 사약공론 때 참여하여 그것이 가한 양으로 알린 신하들을 차례로 몰아 죽였다. 나중에 중종의 반정을 만나 인군 자리를 빼앗기고 호칭도 연산주로 불렸지만 이조 오백년 역사 중 그보다 포악한 인군도 없었을 것이다.
연산이 아직 세자 때의 이야기다. 일찍부터 놀고 장난하기만을 좋아하고 허침과 조자서 두 스승의 심혈을 기울이는 보도를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루는 조자서가 참다 못하여 자리를 바르게 하고 말하였다.
(이처럼 글 읽는데 마음을 두시지 않으신다면 신은 사실을 상감께 고하겠나이다.)
연산은 그 말에 순간은 꿈질했지만 몹시 비위에 거슬렸던 모양이다. 그 반면 허침은 언제나 너그러운 태도와 부드러운 말로 타일렀다.
그래 연산은 그것이 매우 고마워 붓으로 벽상에 낙서하기를
(조자서는 대소인이요. 허침은 대성인이다) 하고 썼다. 사람들은 그 말을 듣고 자서의 일을 걱정했고 그 우려는 헛되지 않아 뒤에 자서는 연산에 피보래를 쓴 첫 인물이 되었다.
점필제 김종직은 성종이 승하한 후 인산을 마치고는 곧 서울을 하직하고 향리로 내려가려 했다. 어느 친구 하나가 이상히 여기고
(승통한 인군 또한 밝으신데 왜 벼슬을 떠나려 하오)하고 물었다. 종직은 한참 입을 다물고 있다가
(승통하신 인군의 안채를 뵈옵건데 나 같은 늙은 신하는 백발을 보존함이 어렵게 여겨지오. 일이 이렇거늘 무엇을 바라고 머물겠소)하였다. 연산은 안광이 매우 불량했고 등극 초부터 대신들의 간함을 어디 개가 짖느냐고 듣지 않았다.
연산은 충성스러운 신하를 죽이고 소인 잡배를 가득히 조정에 묵게하여 더러운 욕심이 나는 대로 행동하였다. 그가 좋아하는 것은 술과 계집이었고 고을마다 채홍사니 채청사니 하는 관리를 보내서 남의 아내이거나 처녀임을 묻지 않고 인물이 어여쁘기만 하면 빼앗아 오게 하였다.
그리고는 대궐 안에 연방원이니 합방원이니 하는 처소를 만들어서 그들을 재워 두었다. 날마다 술과 잔치놀이로서 해가 지고 떴다. 놀이터를 마련하기 위하여 토목 역사가 헤아릴 수 없었고 응마 사냥이 사시로 벌어져 그 거대한 비용으로 부고가 탕진하여 명목 없는 돈을 민간에서 걷어들이고 백성들을 개나 말처럼 부려먹었다.
원성이 고을마다 넘쳤고 노역에 부대끼는 백성들 주려 쓰러지는 시체가 길에 즐비하였다. 심지어는 공자의 위패를 산중 이름없는 정자로 옮기고는 성균관을 놀이터로 만들어 글 읽는 유생들을 모두 쫓아내었다. 오부학당을 모두 폐하여 무당과 화랑들의 연습처로 쓰게 했고 서울 가까운 큰 고을에 좀 견디는 백성을 모두 내어쫓고 그 재산을 내수사나 노비들이 차지하게 주었으며 오강 나루마다 걷는 사람에게 비싼 세를 부과했으므로 길가는 나그네들이 끊어졌다고 한다.
그러나 그 모든 것은 오히려 약과다. 그보다 더욱 기막히는 것은 걸핏하면 사람을 죽이는 것이었다. 충성스러운 신하는 아예 얼씬을 하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 간하는 자가 있을까 하여 근신들을 억누르고
구시초화문 헐시살신부
(입은 화를 부르는 문이요, 혀는 몸을 죽이는 도끼다)라고 하는 패를 저마다 차게하여 충간의 입을 막았다. 내관 김천선 같은 이는 이어기찬 계률을 박차고 왕의 폭학을 간하다가 연산이 몸소 쓰는 화살에 쓰러진 분이다.
위로 어두운 인군이 있으면 간사한 신하가 생기는 법이다. 그리하여 그들은 저 한 몸의 욕심을 위하여 충신을 죽이고 백성을 도탄에 몰아넣는다. 이극도, 유장광 등이 곧 그런 무리였다. 그들은 그런 한 몸의 욕심을 위하여 저 김종직의 무덤을 파고 김일손 이하 일대의 명유 육십여 사람을 죽였으나 그것이 곧 무오사화다. 그러면 무오사화를 백여 낸 좀더 구체적인 요인은 무엇이었던가. 그것은 김종직의 의제 조상문이라는 글을 극돈과 자광이 사사로운 감정으로 모함한데 비롯한다. 즉 김종직이 예적 중국 초나라 인군 의제가 항우에게 죽은 일을 동정하고 그를 조상하는 글을 지었는데 그제야 김일손이 사관으로 있을 때 그것을 사기에 실었다.
이극돈은 김일손이 현남으로 있을 때 심하게 논쟁을 하고 심히 사이가 좋지 못했는데 그가 (성종대왕 실록)을 편찬하려고 사원에 있는 사기를 뒤적였던 바다. 본히 그를 욕한 대목이 나왔다. 본래 위인이 간악한 그는 앙심을 품고 유자광에게 가서 상의하였다. 어떻게 분풀이를 할 수 없었겠는가. 유자광 또한 전일 경상도 함양 고을에 가서 어느 정자에 글을 붙인 것은 김종직이 그 고을 군수로 가서 우습게 여기고 떼어버린 일이 있으므로 언제나 김종직을 욕했고 그의 제자인 김일손을 좋게 보지 않았다. 둘은 김종직의 의제 조상문에 트집을 잡아 단종을 의제로 세조를 항우에 비겼다는 사실을 연산에게 고하고 모함하였다.
연산은 그의 헛된 것을 간하여 말지 않은 유생들을 심히 귀찮게 여기고 있던 터이었으므로 크게 기꺼하였다. 그리하여 선비란 선비는 모조리 김종직, 김일손의 동당으로 몰아 죽은 사람은 배를 팠고 살아있는 사람은 목을 베었다.
길에 유생의 복색한 사람이 끊어졌고, 서당에 글 읽는 소리가 끊어졌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