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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자료

    안창호선생의 약전
    • 신문명
      국민보
    • 발행일
      1938-03-16
    • 생산정보
      1722-1522


    「강영각씨 진술 중에서」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선생은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1879년에 태어나 서재에서 구학문을 공부하고 엄한 모질에게서 많은 교훈을 받아 유년시대부터 정직하고 진실하다는 칭예(稱譽)가 향당(鄕黨)에 자자하였다.

    16세에 서울 가서 독립협회(獨立協會)에 연설한 후에 선생의 웅변이 출중하게 공인되었고 19세에 일본 동경을 가서 웅변의 성예(聲譽)가 더욱 발전되었다.

    1902년에 그 부인과 같이 미국에 유학차로 갔다가 사회사업에 착수하여 1905년에 북미한인계의 첫 조직체인 공립협회(共立協會)를 조직하였으니 그 조직이 그 후에 수차 합동의 계제를 지나서 필경 하와이에 있는 합성회(合成會)와 합하여 국민회(國民會)가 된 것이다.

    본국에서 국가가 원수의 손에 패망을 당하게 되는 고로 선생은 1907년에 내지(내지:朝鮮)에 들어가서 구국사업을 착수한 바 전국의 유력인사와 애국청년들을 연락하기에 전력한 바, 평양을 활동의 중심점으로 정하고 윤치호(尹致昊)・이갑(李甲)・이동휘(李東輝)씨 등 사회계 거인들과 동모(同謀)하였다.

    정치운동과 병시하여 교육사업을 착수한 바, 선생의 중망과 인품으로 인하여 그의 설립한 대성학교(大成學校)가 한때에 정치 및 교육의 한 중심이 되었다. 그러나 원수의 간계와 방해가 날로 더해져서 필경은 어찌 할 수 없이 1909년에 간신히 망명하여 중국 청도(靑島)로 나아가서 시베리아와 유럽을 통행하는 중로(中路)에서 1910년에 한국이 「합병」의 치욕을 당한 소식을 들었고, 1911년에야 미국에 다시 와서 5개년간 미리 갈려 있던 그 부인과 어린 아들을 만났다. 선생은 그 후에도 낙심 없이 정치사업을 계속하였으니 무실역행의 종지로 흥사단(興士團)을 조직하고 국민회(國民會) 중앙총회장으로 멕시코와 하와이를 방문하여 대동단결을 도모하였다.

    1919년에 한국의 독립운동이 일어나고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가 조직되어 선생은 중망(衆望)에 의하여 각원(閣員)의 한 자리를 가지게 되었으니 그리하여 그 집을 다시 버리고 중국에 가서 @@년 동안을 지내면서 온갖 위험을 무릅쓰고 광복사업에 종사하였다.

    1932년에 상해(上海)에서 윤봉길(尹奉吉)의사의 폭탄사건 이후에, 도산선생 이외 11인이 원수에게 잡혀 내지에 들어가서 옥중의 신고(辛苦)를 수년간 지내고, 출옥한 후 얼마 되지 않아 다시 중일전쟁이 일어나자 원수의 흉한 손은 다시 선생과 그의 동정자와 추종자들, 즉 수양단원 전부를 검거하였으니, 그들이「사상범」이라는 죄목으로 잡힌 것이며 수양단(修養同友會)은 내지에서 유일한 정치 조직체요, 그 회규가 흥사단과 같다.

    선생은 원수의 옥 속에서 참형과 고초로 인하여 병을 얻었고 그 병으로 소위 서울대학교병원이라는 곳에서 3월 10일 상오 3시에 별세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