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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문자료

    해방 후의 민족자서
    • 신문명
      국민보
    • 발행일
      1960-07-20 WEDNESDAY
    • 생산정보
      국민보 제三千五百九호


    (계속)

    (一九四六년 六월 (민성) 제二권 제七호 소재) 친일파 문제에 있어서 우익을 옹호하고, 좌익만을 공격해야 할 의무를 갖지 않았기에 나는 (민성) 제三권 一월호 권두사설에 [북조선(북한)과 남대한(한국)]이라는 제목 아래 다음과 같은 글을 발표했었다.

    [남대한(한국)이 북조선(북한)보다 더 좋으냐?]

    북조선(북한)이 남대한(한국)보다 더 좋으냐? 그러한 승강을 붙여보는 것을 향락하려는 것은 아니다. 해방 직전까지 일본 헌병대의 주구로 일본인 이상이던 자가 거리를 활보하고, 혁명투사와 애국지사를 악형 치사케 하던 고등계 형사와 검사와 판사 등 총독부의 (개)들이 그냥 경찰계에서 또는 관계에서 머리를 휘두르는 곳이 남대한(한국)이요.군수공업으로 대일 협력하던 자가 이런 운동의 선두에서 모리에 모리를 거듭하여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그 반면에 가난한 자는 그냥 가난해야 하는 곳이 남대한(한국)이라면, 이제까지 일정 하에서 갖은 학대를 받으며 민족해방에 헌신하던 지사라도 공산주의 신봉자가 못되고, 민족주의자라는 낙인 밑에서 감시를 받고 투옥당하는 곳이 북조선(북한)이요, 언론·결사의 자유가 없고, 사상이 통제를 당하고, 정신이 한 형틀에 들어가 기계가 되어야 하는 (그렇게 되지 못하면 가식으로 살아야 하는) 곳이 북조선(북한)임은 위정자가 무어라 변명하든 인민이 더 잘 알고 있는 현실이다.

    (이하 략)

    또 남한(한국)에 입법의원이 서서 민족 반역자 처단법안이 상정되려 할 때 나는 (민성) 제三호 三월호 권두사설에 입법의원에 주는 공개장을 발표했다.

    (전략) 왕정위 정권의 부수령이었던 (진공박)은 집 한 칸도 가지지 못하고, 셋방에서 살았었다. 그는 전쟁 중에 말로나 글로나 일본을 우방이라 한 적이 없었고, 끝까지 만주국을 해체하라고 주장한 애국자였다. 그러나 그는 장개석의 중앙정부에 의해 사형당하고 말았다.

    조국을 도탄 속에서 구하기 위해 부득이 대독 협력했던 법국(프랑스) 수상 (패랑) 원수(그는 살아있는 제一차대전(제1차세계대전)의 최고 공로자다)도 사형언도를 받았다가 종신형에 떨어졌다.

    일본정부에서도 지난 번에 전쟁범죄자로 지목되어 공직에서 추방된 자가 (전총대)에 까지 뻗쳐 무려 三十만 명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제국주의자이든 군국주의자이든 간에 모두 자기의 조국을 위해 일했음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처단을 받았거늘 어찌하여 우리의 적국인 일본에 협력했던 순사, 검사, 판사, 면장, 군수, 지사, 중추원 참위 기타 온갖 일본 (개)들이 공직에서 추방을 당하기는 커녕 二계급, 三계급 승진해야 하며, 군수업자였던 자들은 모리로 인하여 더욱 부자가 되어야 하느냐? 아무리 핑계해도 그들은 일본에 (플러스)했으면 했지 (마이너스)했을 까닭이 없고, 조선에 (마이너스)했으면 했지 (플러스)되는 일을 했을 리가 없다.

    아마 세계에서 적국에 협력했던 역적과 매국노가 자기 조국 땅을 활보할 뿐더러 공직에 앉아서 예전 일제 때와 같이 국민을 떵떵 울러메며 호령하는 곳은 조선만 일 것이다.

    얼마나 그들 면직원과 경관들에게 매를 맞아가며 쌀을 강제 공출 당했으며, 귀여운 자식들을 강제 지원병으로 그리고 징병·징용으로 사지로 몰아넣는 피비린내 나는 중압을 당했던 것이냐? 그리고 조선에도 비행기 공장을 세운다고 젊은 청년들을 견습공으로 [명고옥(나고야)] 등지에 보내어 (비 二十九) 폭격에 무참히 쓰러지게 하던 군수업자들이 더 부자가 되어가라는 진리는 세계 어느 나라에 있더냐? 생각만 해도 이가 갈리는 이들 열렬한 왜 천황의 수양아들을 왜 우리 땅에서 우리도 먹기 어려운 우리의 쌀을 먹여서 배를 기름지게 하며 관리가 되어 세도 부리게 하느냐 말이다.

    이러한 견지에서 이번 입법의원에 회부된 민족반역자 처단법안이 무수정 통과되기를 우리는 주장한다.

    자고로 사대주의 외국 의존사상이 세계 어느 나라보다도 왕성한 이 조선민족을 이번에 징계하지 않으면 이 민족의 근성은 영원히 멸망의 일로를 더듬을 것이다.

    일찍부터 청국에, 일본에, 노국(러시아)에, 미국에, 소련(러시아)에 (아부첨)과 의뢰로 살아왔고 또한 살아오는 이 민족, 그러면서도 남보다도 애국과 자주독립을 외치는 얼빠진 민족, 타민족에게 대해서는 오금을 쓰지 못하면서도 동족끼리는 세계 유일한 용사가 되어 물고 찢고 할퀴는 이 경탄할 만한 용자들을 이번에 징계하지 않으면 언제 버릇을 뗄 것이냐? 후손 만대의 본이 되기 위해서도 처단법안을 무수정 통과시키라.

    미국군이 서울에 진주한 九월 九일 직후라고 생각한다. 하루는 김동인 씨가 문화건설본부에 나타나서 이태준더러 (대체 대회도 열지 않고 그냥 있으면 어쩌자는 거요?) 당신들 몇몇의 그룹운동이라면 몰라도 전국 문화 총본부라면 전국 문화인들을 불러 총회를 열고 거기서 명칭도, 강령도, 임원도 앞으로 할 사업도 결정지어야 할 것 아니요?) 그런데 당신들 몇몇 사람이 당신들의 뜻대로 누구는 제명하고, 일도 당신들의 마음대로 하니 그래 이게 전국문화 총본부요?)하고 항의했다.

    당시 어쩐 일인지 이만한 항의도 해오는 사람이 없었다.

    나는 김씨의 말을 지당한 말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임화)나 김남천이나 이태준은 무시하는 태도로 상대하지 않았다. 나도 대회가 없이 이 몇 사람이 좌지우지 하는데는 적지 않은 불만을 가졌었다. 더구나 평소부터 (임화)와 김남천이 헤게모니를 잡아 큰 벼슬이나 한 것처럼 행세를 하는 데도 구토를 느꼈거니와 하룻밤 사이에 이 여성들의 장난으로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에 누구, 외무상에 박헌영 이러한 조각 멤버가 발표되었듯이 대회도 없이 문화건설본부의 의장은 임화, 부의장은 김남천,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이태준은 겨우 문학 분과 위원장이라 발포되었다. 나는 그날로 문화건설본부에서 손을 뗐다.

    서울에는 정당과 식당과 강도단과 쓰레기가 하늘의 별처럼 많다. 이러한 말이 너, 나의 입에서 터져 나왔듯이 서울 장안에는 정당의 사태가 났다. (동진공화국)이니 무어니, 무어니 이루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어중이, 떠중이가 정당 간판을 내걸고 야단법석이었다. 그 중에는 중국에 가서 일본군을 따라다니며 아편장수 하던 협잡배가 망명가로 자처하는 것들을 위시하여 별의 별 괴물들이 많았다.

    광동군 스파이였던 (이종영)이 대동신문사를 만들어 극우의 민족주의자로 자처하는가 하면, 일본국에 아부하여 (군용열거)라는 영화를 만들었던 영화감독 (서광제)가 (독립신보)를 만들어 극좌의 행동을 했고, 박헌영은 서울에 나타나 부하들을 시켜서 (우리의 위대한 노동자의 영웅 박헌영 동지가 살아있거든 나서라)라는 벽보를 거리 거리에 붙였다. 실로 장관이다.

    이러한 때 (十월 초순) 나는 동지들과 고려문화사를 조직했다. 一九三四년부터 十여 년 간 종사해 오던 잡지와 도서 출판을 목적하여 일본인 개인 인쇄소로서는 가장 큰 (대해당)을 적산관리청에 교섭하여 접수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필요한 (어린이 신문)(二도 인쇄)을 호화판으로 냈고, 일본글만을 배워왔던 아동들을 위해서 五도 인쇄의 (한국 그림책)을 출판했다.

    계속하여 (한국독립혈사)를 출판했더니 좌익 측의 항의가 왔다. 조선독립을 위해 민족주의자만 피를 흘린 것이 아닌데 우리 피 흘리고 죽어간 많은 공산주의자나 사회주의자는 왜 송두리째 빼어버렸느냐고 신문의 서평에서 힐난했다.

    나는 그것에 대하여 (공산주의는 세계적화와 세계정부를 세우려는 계급투쟁이지 민족적 독립운동은 아니지 않느냐)고 응수했다.

    다음에는 책이 해방 후 최초의 호화 양장본인 순 한문글 번역인 三국유사였다. 이것은 우리 출판사상 처음 있는 번역이었다. 그런데 (어린이 신문)은 김영수 씨와 최영수 씨가 맡고, 종합잡지 (민성)은 나와 채정근 씨가 맡았는데 어떻게 해서든지 해방된해에 책을 내어 놓으려고 하려고 노력한 결과 그 성공을 보게 되었는데 중경(충칭)에 있던 임정 요인들이 아직 환국 전이라 갖은 애를 쓴 결과 김구 씨의 사진을 미국 (타임스)지에서 얻어 표지로 하였더니 우익 잡지라고 좌익에서 평했다. 그럴 밖에 없는 것이 (타임스)지에 발표된 김구 주석의 (五十년 투쟁사)가 번역되어 실려졌고, (오기영)의 집필로 (정열의 투사 도산 선생의 최후)가 실려졌고, (임정 요인들의 약전)과 러시아 사람 (아르테미에브)저 조선의 민족의식이 이병수 씨의 번역으로 실려졌고 박태원의 번역 (이충무공 난중일기 초)가 또한 한국에서 최초로 번역되어 실려졌던 것이다. 채형과 나는 의논하여 편집 목표를 확고히 세웠다.

    (계속)